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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와 자유로운 행위는 칸트가 묘사하는 도덕적 삶의 전제 조건이다. 그는 ‘당위’는 ‘가능’을 함축한다고 말한다. - 내가 어떤 것을 해야만 하기 위해서는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그것을 자유롭게 할 수 없지만 그것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 의지와 행위가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는 많은 철학자들의 주장, 즉 경향성이 모든 인간 행위의 원인이며 이런 경향성은 그 자체로 인간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사물에서 생겨나거나 사물에 의해서 강제되므로 인간 행위도 우리 몸의 생리적인 변화나 우리 외부 사건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이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고통스럽게 인정한다.

 

 

보편적 인과론 또는 결정론이 주장하는 바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주장은 칸트 시대에 폭넓게 받아들여지던 뉴턴 역학의 일부로 등장한 것인데 칸트는 과학적 세계관과 관련해서는 뉴턴 주장을 충실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도덕적 영역에서 칸트는 만일 결정론이 지배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일 수 있는가라고 자문한다. 만일 도덕성이 자율을 요구한다면 도덕성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어떻게 정언 명법은 가능한가? 자신이 생각한 기본 원리와 도덕성 전제들을 제시하는데 많은 공간을 할애하고 난 후 칸트는 <도덕의 형이상학 기초> 마지막 장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일종의 망상 또는 환상이 아닌가 묻는다. 어쩌면 우리는 보편 법칙에 따르는 방식으로 또는 서로를 목적으로 대우하는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방식으로 이성의 인도를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목적의 왕국은 우리가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쓸모없는 꿈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 칸트 문제의 깊이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칸트 자신은 이미 <순수 이성 비판>에서 인간 모든 경험과 인식은 인과적 결정론 개념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기 위하여 과학은 반드시 인과성 범주에 호소하여야만 하며 자연을 필연적인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해석하기 위하여 반드시 인과성을 사용하여야만 한다. 만일 우리 마음이 이런 개념을 통해서 경험을 해석하지 않는다면 경험은, 마치 이전에 흄이 주장하였던 바와 같이, 수많은 주관적이고 독립적인 감각적 인상들로 분해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흄은 자신 견해가 바로 인식에 대한 회의론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이와 달리 칸트는 대상의 세계와 이런 대상에 대한 인식 가능성이 보편적인 결정론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우리가 이미 그런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 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하였으므로 –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덕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자신의 형이상학적인, 인식론적인 사고를 통하여 인간 자유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그의 사고는 자유 문제에 답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알려줄 뿐이다. <순수 이성 비판>에서 그는 지식(과학)은 오직 경험의(따라서 지식의) 대상이 인간 마음의 일반적 범주와 조화를 이루어 파악될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런 대상은 결국 현상일 뿐이다. - 즉 현상은 사물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들일 뿐이며 우리 마음 범주에 따라서 해석된 것일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칸트 비판 철학의 핵심 주장이다. 그가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표현한 바에 따르면 그는 우리 마음이 세상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우리 마음에 일치해야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상을 현상이라고, 즉 우리 마음이 자신 범주를 부여함으로써 생겨난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별도로 우리는 또한 우리가 해석하지 않은 대상들 자체의 세계, 즉 이른바 칸트가 물자체라고 부른 것의 세계를 생각하여야만 한다.

 

 

이 물자체는 우리 마음과 전혀 무관한 대상이다. 우리는 이 물자체가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며 또한 알 수도 없다. 우리 모든 지식은 오직 현상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범주들은 물자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범주들은 오직 경험계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물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 최소한 우리 이성적인 마음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요청하도록 이끌린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무언가가 없는데도 그것에 대한 현상은 존재한다는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물자체 세계를 칸트는 본체계 또는 예지계라고 부르며 이와 대비되는 현상 세계를 현상계 또는 감각계라고 부르는데 그는 물자체의 세계는 자연의 인과 결정론을 초월하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칸트 주장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현상적인 자연 세계 일부이며 우리 삶의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부분은 자연 안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현상적이고 감각적인 본성뿐 아니라 본체적이고 예지적인 본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자연의 인과 법칙은 본체적이고 예지적인 우리 자아 자체에는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정확하게 바로 여기에 도덕성의 가능성이 놓여 있다. 도덕적 자아는 본체적 자이이며 자아 자체로서의 자아이며 자연 결정론을 초월하는 자아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자아는 자유로울 수 있으며 과학 법칙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자아는 자기 자신의 법칙을 – 이성의 법칙을 – 스스로 만들어내며 이를 통하여 자율적인 존재,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목적 자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하여 칸트는 인간 자유의 실재성을 주장하고 도덕성의 실재성 또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순수 이성 비판> 서문에서 주장하듯이 그는 도덕성의 길을 열기 위하여)‘나는 신앙의 설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인식을 제한하여야만 하였다’) 인식을 제한하였던(즉 우리는 오직 현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만 인식할 수 있다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자신 행위를 경향성 결과로 간주할 때 우리는 그것을 현상으로서, 즉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 일부로 여기게 된다. 반면 우리 행위를 우리 자신의 이성과 그 원리에 의해서 생겨난 자유로운 것으로 본다면 이 때 우리는 그것을 물자체로서의 자아 행위로 여기게 된다. 오직 후자의 경우에만 우리 행위는 우리의 의지 – 즉 자유 의지 –의 산물이 된다. ‘이성적 존재로서, 따라서 예지계에 속한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 인과성을 오직 자유의 이념하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감각계 원인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그리고 이것이 이성이 항상 자신에게 부여하여야만 하는 것이기도 한데)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우리가 자연 관점과 자유의 관점, 둘 중 어떤 것도 피할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 설명과 이해를 위해서는 자연의 관점을 – 즉 자연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관점을 – 택하여야 한다. 반면에 행위를 위해서는 자유 관점을 택하여야만 한다. 행위함에 있어 우리는 자신을 도덕 법칙에 따라서 자신을 규정하는 이성적 행위자로 간주하며 또 그렇게 간주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자연 일부인 동시에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유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 모든 설명은 현상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런 설명이란 결국 우리가 설명하려는 바의 원인을 확인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 자유는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도덕성은 결코 파악될 수 없다. 우리에게 – 모든 경향성과 전혀 무관하게 – 어떤 방식으로 행위할 것을 요구하는 도덕적 명법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우리 파악 능력을 넘어서는 문제다. 따라서 칸트는 <도덕의 형이상학 기초> 제일 마지막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한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적 명법의 실천적인, 무조건적인 필연성을 파악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파악할 수 없는 것임을 파악한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자신 원리를 통해서 인간 이성의 한계에까지 추구해 나가는 철학에 대하여 우리가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의 전부다.’

 

 

현대인들이 현상계와 본체계에 대한 칸트의 강력한 이분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려우며 또한 도덕적 행위자로서 우리가 자연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칸트는 우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문제, 즉 자유의 문제를 남겨놓았다. 자연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가?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우리는 직관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자유가 실재함을 옹호한다. 하지만 우리 직관이 과연 모든 것이 자연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확립할 만큼 커다란 철학적 비중을 지니고 있는가 또한 반드시 물어보아야만 한다. 아니면 자유를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 즉 자연적 인과 결정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다른 어떤 방식이 존재하는 것인가? 예를 들면 어떤 행위를 하도록 인과적으로 결정되었다는 형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방식, 즉 그와는 다른 어떤 근거에서 행위하였다는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칸트 이후 도덕 철학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극도로 어려운 문제에 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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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 대해 자주 제기되는 또 다른 반박은 그의 도덕적 절대주의, 즉 완전한 의무를 위반하는 모든 행위는 항상 그르다는 그의 신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칸트는 우리가 결코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행위를 허용하는 준칙은 보편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칸트는 다음 과 같은 악명 높은 예를 든다. 나의 친구 중 하나가 자신을 죽이려고 위협하는 사람을 피하여 내 집에 와서 숨었다고 할지라고 그 위협자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칸트는 자신 입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위협자에게 내가 진실을 말하는 동안 나의 친구는 내 집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위협을 피할수도 있고 또한 내가 진실을 말하는 사이 다른 이웃이 도착해서 친구를 위협자 공격으로부터 막아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칸트는 위협자가 실지로 친구를 해칠지 분명히 확신할 수 없다거나 아니면 위협자를 막거나 돌려보내기 위하여 거짓말 이외 다른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 입장을 옹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모든 대답은 결코 설득력을 지니지 않는다. 분명히 우리는 칸트를 비난하면서 위와 같은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의무로 요구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칸트는 자신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보편 법칙 원리에 호소한다. ‘성실성은 계약에 의해서 성립된 모든 의무의 기초에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므로 만일 성실성과 관련해서 가장 사소한 예외라도 허용한다면 이는 곧 그런 의무 법칙을 불확실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칸트는 성실성은 무조건적인 의무여야만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곧 성실성 규직이나 다른 모든 완전한 의무 원리에 대해서는 결코 어떤 예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덕 원리는 ‘결코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런 예외를 허용하는 것은 곧 자기 모순이다.’ 그는 또한 도덕 원리에 예외를 허용하는 것은 ‘우리가 원리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편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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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주장에 대한 헤겔의 첫 번째 비판은 정언 명법이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어떻게 행위하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충고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언 명법은 우리에게 단지 자신 행위 동기가 모든 이성적 행위자가 모순 없이 그것에 다라 행위할 수 있는 그러한 동기여야만 한다는 점을 요구할 뿐이다. 헤겔 입장에서는 이러한 순전히 형식적인 요구는 본래적으로 악한 원리에 따라서 행위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형식적인 제한은 비도덕적인 내용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의 두 번째 비판은 칸트에 있어 도덕적 의지가 인간의 감각적 본성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칸트 철학은 물리적인 인간과 이성적인 인간 사이의 철저한 이분법을 만들어냈으며 도덕적 의지는 물리적 자아를 격려하거나 자극하는 데에 어떤 관심도 갖지 않는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헤겔은 이러한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는 한 인간은 물리적이고 이성적인 측면 모두에서 총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헤겔 입장에서는 물리적인 세계와 구별되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묘사하는 것은 이성의 실패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독립적이고 초월적인 자아가 어떤 자유를 소유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총체적인 인간 자유가 아닌 한 그것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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