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필연적 우연과 우연적 필연을 가져야 한다. 추종자에게 벌을 주는 신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필연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며 부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지옥에 가야 했을까? 모든 것이 필연이라면 누구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다. 죄가 없다면 벌도 없다. 벌을 주기 위해서는 ‘우연’이 필요하다. 유다는 우연히 선택된 것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단지 재수가 없었던 것일까?

 

 

사실 세상은 이보다 더욱 영악하다. 세상은 이제 우연을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유다는 자유의지로 예수를 팔아넘겼다. 자유의지는 우연이 아니다. 복권을 뽑기 전에는 모든 것이 우연이지만 일단 결과가 나오면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된다. 유다는 우연히 선택된 것도 억울한데,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비난마저 받아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신이 정한 필연이지만, 처벌이라는 결과는 나의 자유의지란다.

 

 

뉴턴은 자연법칙을 미분방정식으로 기술했다. 이제 세상에 우연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면 자유의지는? 자유의지가 없다면 죄도 없다. 나의 선택에 비난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벌하지 못하는 무법천지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때 데카르트는 뉴턴이 야기한 무법천지의 아수라장에서 세상을 구한다. 바로 ‘영혼’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든다. 영혼은 뉴턴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영혼에는 우연도 있고 자유의지도 있다. 이렇게 근대철학자는 우리에게 죄를 돌려주고 지옥을 리모델링했다.

 

 

그렇지만 결국 물리학이 우주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물리는 한마디로 우주에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해준다.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뜻하지 않은 복잡성이 운동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다. 생명체는 정교한 분자화학기계에 불과하다.

 

 

초기에 어떤 조건이 주어졌는지는 우연이다. 하루가 24시간이기1년이 365일인 것은 우연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아무 의미 없이 법칙에 따라 그냥 도는 것뿐이다. 지구상에서 물체가 1초에 4.9미터 자유낙하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일까? 4.9라는 숫자는 어떤 가치를 가질까? 4.9가 아니라 5.9였으면 더 정의로웠을 까? 진화의 산물로 인간이 나타난 것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공룡이 멸종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화에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 우주에 인간이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떨림과 울림>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정론(필연성 학설)에 의하면 인간 행동과 욕구, 사상 등 모든 것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결정론이 참이라면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반면 만약 결정론이 거짓이라면 몇몇 사건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기는 일이 된다. 하지만 우연에 의해 생기는 것은 인간 통제력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경우도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자유 의지에 관한 문제는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기 쉽고,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다.

 

 

또한 근대에 와서 자유 의지 문제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도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인과 법칙을 적용하려는 시도와,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는다는 자연 감정의 충돌이 계기였다. 이처럼 자유론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불합리하고, 또 다른 의미로는 이해할 수 없다."<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유의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단순한 환상이라고 한다면, 자유의지에서 유래하는 책임이라는 관념도 붕괴하고 도덕철학이나 법철학이 성립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 심신을 상실한 자에게는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다. 심신을 상실한 사람은 ‘자유의지’로 자신 신체를 제어할 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도덕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세계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은 물리적 인과법칙에 따라 일어날 만하니까 일어날 뿐이라는 말이 된다. 이래서야 도덕법칙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만약 자유의지가 실재한다고 해도 그때 나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 의지를 결정하는가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자유의지는 모든 물리적 인과법칙에서 자유로울 테지만, 내가 이제부터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할 때 내 안에 떠오르는 이유의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물리적 인과법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품고 있는 의지가 모든 외적인 인과법칙에서 자유롭고 어떠한 현실적 원인이나 이유에도 의거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때 내 의지는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내 의지가 어떠한 원인도 이유도 없이 생겨난다면, 내 의지가 완전히 우연에 의해 정해졌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우연에 의해 정해진다면 내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의지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에도, 실재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의지의 주체인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의해 내 의지를 정하고 있을까?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심연’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도 자유의지를 둘러싼 막다른 곳에 부딪치고 있다. 칸트는 어떠한 인과법칙과도 관계없이 순수한 선(善)의지(=자유의지)에 기초한 도덕명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 것은 ‘~하고 싶다면, 너는 ~해야 한다’는 형태의 가언적(假言的) 명령이 아니라, 무조건 ‘너는 ~해야 한다’고 명령한 정언적(定言的) 명령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선한 자유의지가 진정 무조건, 즉 순수하게 자발적 내 마음 속에서 생겨난다고 한다면, 타자가 들어올 여지가 어디에 있을까? 타인의 사정을 생각하여 타인이 기뻐하도록 그리고 내 자신이 만족할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선을 행한다고 한다면, 그 의지는 외적 조건에 의해 제약받으므로 자유의지로서의 선의지가 아닌 것이 된다. 간략하게 말하면 내 자유의지의 안으로 내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가 들어올 여지는 원래부터 없는 것이다. 타자 존재 없이 도덕이 있을 수나 있을까? 그것을 과연 도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몇몇 중요한 철학적 주제들이 대중 관심을 받지 못하는 건 논증이 탄탄하지 못해서라기보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도 그렇게 나쁜가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궁극적인 자유의지가 없다고 믿는 건 끔찍한 일일까? 우리 생각이 실은 우리가 하는 행동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객관적인 도덕 가치가 없다면 예절이니 품위니 하는 것들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까?

 

 

물론 끔찍한 일은 믿고 싶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자기기만에 빠져든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아서 눈앞에 빤히 드러난 증거 의미를 애써 무시한다. T. S. 엘리엇의 유명한 말처럼 ‘인간은 과도한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람들이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가끔 그런 일이 생긴다는 건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이런 못마땅한 사실을 언제까지 부정할 수 있을까?"<가짜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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