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의 ‘휴먼다큐’란 희한한 장르의 볼거리는 불행을 꾸며주는 따뜻하고 심지어 서정적이기까지 한 잔재주를 부리며 불행이라는 것을 안온하고 나른한 감상 대상으로 꾸며 놓는다. 이는 그로테스크하다 못해 역하다는 기분까지 들게 한다. 비참함은 쓰라린 것, 차마 듣고 보기 어려운 것, 만류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적절한 감정적 기대를 갖고 느긋이 감상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가장 불쾌한 것은 불행한 이들이 자신 불행을 바로잡고자 대들거나 싸우는 것은 불행의 축에 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동적인 불행, 피해자 모습으로 나타나는 불행,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고발, 비난, 규탄, 호소, 투쟁 흔적은 말끔히 표백된 불행, 잠시의 감상적 연민을 통해 쾌적하게 소비되고 곧 휘발되어 버려야 하는 불행을 매일 한 꾸러미 씩 선물받고 태연자약 즐긴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전환을 통해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는 일이 불가능하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실용적인 대안을 추구하고 그 범위 안에서 긍정적인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어떨까? 사실 이런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인 지 이미 오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을 위하여 숱한 조언과 대안, 처방에 시달린다. 이를 테면 우리는 맘만 먹으면 매력적인 모습으로 외모를 바꾸고,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가장 맛난 식재료와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다.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홈쇼핑의 자동 주문 리모콘 버튼만 누르면 낙원과도 같은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위하여 못할 것이 없다. 단, 돈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실은 돈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품과 쾌락의 만신전은 휘황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일자리도 없고 호주머니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젊은 세대들이 있다. 그들이 가진 재산이라면 고작 2년 약정으로 빚을 내어 산 휴대전화 한 대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과거 프롤레타리아가 가졌을 ‘쇠사슬’ 대신 그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될 소유물, ‘증오’가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을 상징화하고자 이뤄졌던 시도들, 자본가 대(代) 노동자라거나 유산계급 대 무산계급, 자본 지배 대 스스로 지배로부터 소외된 자 등으로 이어지는 변증법 대립의 사슬은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적 인간학’을 분석한 정신분석학자 뒤푸르는 계급투쟁은 없고 오직 투쟁만이 있는 세계, 즉 대개 아무런 요구 없는 무의미한 분규, 아무런 이유 없는 살인, 다양한 대상에 대한 중독 등을 파헤친다. 그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계급이 아닌 계급으로서의 젊은이들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역설한다.

 

 

비록 그들은 간헐적으로 일자리를 얻지만 그로부터 자신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 삶에 관한 이야기를 구성하던 과거 노동자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들은 단지 하나의 집단 혹은 주체화할 수 있는 어떤 정체성도 갖지 못한 비생산적인 소비자 인구집단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사이에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고 누군가와 더불어 살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도와주는 것은 카카오톡이니 페이스북이니 트위터니 하는 소위 ‘소셜(social)’ 미디어뿐일 것이다. 소셜미디어가 지닌 커뮤니케이션의 잠재력을 침 튀기며 칭찬하는 주장이 강조하는 ‘사회성’이란 단지 덧없는 일시적인 사교일 뿐이다. 그것은 고작 내일이면 사라질 지금의 공감, 흐릿한 감정이입을 만들고 거품처럼 꺼지고 만다.

 

 

그 사회성을 통해 조합을 만들고 협회를 창립하고 상조회를 조직하는 등과 같이 단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여기에서 단체라고 말할 때 헤겔이 말하는 ‘단체(cooperative: 협력을 통해 공동 목표를 도모하는 모임)’를 말한다. 헤겔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 효과, ‘빈곤의 과잉과 천민의 출현’이라는 부정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단체를 제시한다. 이때 단체란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상조회 같은 집단적 조직화된 형식만 가리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헤겔이 단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 ‘인류적인 토대’로서의 그것이다. 헤겔 말 의미는 단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체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계급적인 문화 혹은 ‘계급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유롭다고 말하는 세계에서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그 누구도 자신을 그러한 주체로서 체험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로 스스로를 주체화하지 못한다. 애도와 기억, 느낌 등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체는 부정의 정치를 조직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탐색하는 것이다.

 

 

우리는 핼조선이라는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무력한 허무주의와 그나마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긍정적인 능동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최악의 세계와 최선의 세계를 변증법적인 부정의 관계 속에서 매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한 것처럼 보인다. 변증법이 긴 낮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낮잠 자는 변증법을 깨워야 한다.

 

 

서로를 배척하는 두 가지 시선을 조정할 수 있는 방편은 없다. 최선이거나 최악일 수밖에 없는, 서로 전연 다르게 현상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보는 관점을 통합하는 방편을 찾으려면 그것을 발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관점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전락한 정치를 되살려 냄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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