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고 1945년 5월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끝난 유럽 전쟁은 총력전이었다. 전쟁은 군인은 물론 민간인도 끌어들였다. 사실 프랑스에서 우크라이나까지, 노르웨이에서 그리스까지 나치 독일이 점령한 나라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주로 민간인의 경험이었다. 정규군 전투는 전쟁 시작과 끝에 한정되었다. 그사이 전쟁은 점령과 억압, 착취, 절멸에 관한 전쟁이었다.

 

 

나치 독일은, 특히 후기에, 점령한 국가의 경제를 약탈함으로써 (1805년 이후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보헤미아-모라바이, 그리고 특히 프랑스는 본의 아니게 독일 전쟁 수행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 나라들의 광산과 공장, 농장, 철도는 독일 요구에 도움이 되도록 관리되었으며, 주민들은 독일의 전시 생산을 위해 처음에서는 자국에서, 나중에는 독일에서 일해야만 했다. 대부분 자신 의사와 무관하게 독일에 끌려왔던 이들은 독일 노동력의 21퍼센트를 차지했다. 희생자들에 대한 나치의 착취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사실상 독일 민간인들은 1944년에나 가서야 전시의 제한과 부족의 충격을 느끼기 시작했다.

 

 

진정한 전쟁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은 서유럽이 아니라 동쪽으로 더 나아간 곳에 있었다. 비록 이용해 먹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만, 나치는 서유럽인들을 어느 정도 존중하여 대했고, 서유럽인들도 비교적 독일 전쟁 수행을 망치거나 방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이에 보답했다. 하지만 동유럽과 남동부 유럽에서 독일 점령군은 가혹했다. 그 지역의 빨치산들, 특히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우크라이나 빨치산들이 희망이 없는 중에도 독일 점령군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동부에서 독일의 점령, 소련의 진격, 빨치산 투쟁이 가져온 물질적 손실은 서유럽 전쟁 경험과는 전혀 다르게 더욱 처참했다.

 

 

유럽인들이 전쟁 중 겪은 물질적 손실은 비록 끔찍하기는 해도 인명 손실과 비교했을 때는 하찮다. 인구 비례로 따지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가 가장 큰 군사적 손실을 입었다. 민간인과 군인 등 모든 사망자를 다 계산할 때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소련, 그리스가 최악이었다. 폴란드는 전쟁 이전 인구의 약 5분의 1을 잃었다. 교육받은 주민 사망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나치가 의도적으로 그들을 파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전쟁 이전 주민의 8분의 1을, 소련은 11분의 1을, 그리스는 14분의 1을 잃었다. 두드러진 차이를 강조하자면, 독일은 15분의 1, 프랑스는 77분의 1, 영국은 125분의 1의 희생을 보였다.

 

 

전쟁에서 주된 희생자는 연령 불문의 모든 여성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 소련군이 도착한 이후 3주 동안 여성 8만7,000명이 병사들에 의해 강간당했다. 소련군이 독일 베를린에 진입하면서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여성들이 강간당했다. 그들 대부분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인 5월 2일에서 5월 7일 사이 당했다. 이 수치는 분명 둘 다 적게 어림한 것이며, 소련군의 오스트리아 진격로와 서부 폴란드를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하는 길에 있던 촌락과 도시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은 합산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전쟁 기간 내내 소련 군대에 휴가란 없었다. 많은 보병과 전차 승무원은 3년이라는 끔찍한 시간 동안 중단 없이 지속된 일련의 전투와 진격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지나 서부 소련을 가로질러 왔다. 그들은 전진 중에 독일군의 잔학한 행위에 대해 넘치는 증거를 보고 들었다. 나치가 전쟁 포로와 민간인, 빨치산 그리고 실로 그 앞길에 놓인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처리한 방식은 그 지역 주민들과 소련군 병사들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소련군이 마침내 중부 유럽에 도달했을 때, 지친 병사들은 다른 세계를 보았다. 러시아와 서유럽은 언제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 차르 알렉산드로 1세는 오래 전 러시아인들에게 서유럽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도록 허락한 것을 후회했다 – 전쟁 중에 그 차이는 훨씬 더 두드러졌다. 독일 병사들이 동부 유럽에서 파괴와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동안, 독일 자체는 계속 번영하고 있었다. 너무나 번영한 나머지 독일 모든 민간인은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기 전에는 전쟁의 물질적 비용에 대한 느낌을 거의 갖지 못했다. 전시 독일은 도회지의 세계, 식량과 의복, 상점과 소비재 세계, 영양 상태가 상당히 좋은 여인들과 이이들의 세계였다. 소련 병사들은 황폐해진 고향과의 극명한 차이를 이해하기가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소련 사람들에게 만행을 저질렀다. 이제 그들이 당할 차례였다.

 

 

소련군은 서부로 가는 길에 헝가리와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에서 강간하고 약탈했다(이 표현은 이 경우만큼 더럽게 적절하다). 하지만 독일인 여성들이 단연 최악의 상황을 경험했다. 1945년에서 1946년 사이 소련의 독일 점령 지구에서는 15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 아기들’이 태어났으며, 이 숫자는 보고되지 않은 수 많은 낙태 수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낙태 결과로 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은 태아와 함께 사망했다.

 

 

 

 

레지스탕스 신화가 가장 크게 문제시된 곳은 서유럽인데, 사실 서유럽을 나치가 점령했을 때 서유럽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엄청난 수의 진짜 빨치산들이 점령군과 교전하고 또 상호 간에도 공공연히 교전했던 그리스나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는 다른 점에서도 흔히 그렇듯 사정이 훨씬 더 복잡했다. 예를 들어 소련 당국은 해방된 폴란드에서 무장 빨치산이 공개적으로 찬양받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무장 빨치산은 최소한 나치에 반대했던 만큼 공산주의에도 반대했기 때문이다. 1945년 그리스에서, 우크라이나에서 그랬듯이, 정권은 찾을 수 있는 모든 무장 빨치산을 체포하여 투옥하거나 사살했다. 요컨대 ‘저항 운동’은 프로테우스처럼 변화무쌍하며 불분명한 범주였고 어떤 곳에서는 창안된 범주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역’은 또 다른 문제였다. 부역자란 어떤 사람들인가? 부역자는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게 협력했는가? 살인이나 절도 같은 명백한 경우가 아니라면, 부역자의 죄는 무엇인가? 누군가 국민이 겪은 고통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지만 그 고통은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것인가? 이러한 구체적인 난제들은 나라마다 달랐으나 일반적인 딜레마는 동일했다. 6년 간 유럽인들이 겪은 경험은 선례가 없었다.

 

 

1939년 이전에는 ‘점령군에 협력’했다는 범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점령하는 군대가 피점령국 국민들로부터 협력과 지원을 구하고 얻어 낸 전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는 범죄가 아니라 전쟁에 부수된 손해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어쨌거나 하나의 대륙 전체가 그러한 규모로 일련의 부역이라는 새로운 범죄를 규정하고 범죄자들을 재판이라고 할만한 것에 부쳐 처벌하려 했던 적은 과거 그 어느 때에도 없었다. 카뮈 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혐오스러운 견해라도 사람을 그 견해를 이유로 비난하고 처형하는 것은 부당하고 경솔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당시에 최악의 범죄들에 대해 동포를 비난하려 했던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그러한 범죄들의 온전한 책임은 독일인들이 져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정서였다. 심지어 오스트리아까지도 면죄부를 받았다. 1943년 맺어진 연합국 협정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공식적으로 히틀러의 ‘최초 희생자’로 선언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독일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이는 윈스턴 처칠이 나치즘의 프로이센 기원을 주장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다른 동맹국들에도 편리했다. 오스트리아 위치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했고 중부 유럽 정황은 앞날이 불확실했으므로, 오스트리아 운명과 독일 운명을 분리시키는 것이 신중한 일처럼 보였다. 오스트리아가 나치즘에 허비했던 시절에서 그렇게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과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장하는 것이 지역 모든 이해 당사자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전후 나치에 대한 재판이 독일과 독일인들의 정치적, 도덕적 재교육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재판들이 ‘승자의 재판’이라고 분개했으며, 실제로 승자의 재판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명백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실제 범죄자들에 대한 실제 재판이기도 했으며, 미래 국제 재판에 중요한 판례를 수립했다. 재판은 개인이 저지른 범죄는 이데올로기 목적이나 국가 목적에서 했더라도 개인 책임이며 법에 다라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은 변명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재판의 결점은 재판 절차의 성격에 내재했다. 히틀러 자신을 위시한 나치 지도부의 사적인 죄과는 너무나 완전하게 또 면밀하게 입증되었기에 많은 독일인들은 나머지 국민이 무죄이며 독일인도 집단적으로는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나치즘을 거역하지 못한 희생자였다고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치의 범죄들은 ‘독일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을지 모르지만, 독일인들이 그 범죄를 저질렀다는 진정한 인식은 없었다.

 

 

특히 미국은 이를 잘 의식하고 있었으며 곧 신들의 점령 지구에서 재교육과 탈나치화 일정을 시작했다. 목표는 나치를 폐지하고 그 근거를 파괴하며 독일의 공적 생활에 민주주의와 자유의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독일의 미국 군대에는 일단의 심리학자들과 기타 전문가들이 동행했는데, 이들에게는 독일인들이 그토록 심하게 탈선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내라는 과제가 할당되었다.

 

 

독일 민간인들은 의무적으로 강제수용소를 방문해야 했으며 나치의 잔혹한 행위들에 관한 기록영화를 관람해야 했다. 나치 교사들은 퇴출되었고, 도서관의 책을 새로 교체했으며, 신문 용지와 종이는 연합국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공급되어 진정한 반나치 신임장을 받은 새로운 소유주와 편집자들에게 할당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서독 수상인 아데나워가 볼 때 탈나치화는 너무 오래 지속되었고 전혀 이롭지 않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재판을 통해서든, 그밖의 법정이나 재교육 사업을 통해서든 독일인을 나치 범죄에 대면시키는 일은 회개를 부르기보다는 민족주의자들의 반발만 불러일으킬 공산이 더 컸다. 나치즘은 그 정도로 독일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에 수상은 그 문제에 관해 침묵을 허용하고 더 나아가 장려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1940년대 독일인들은 나머지 세계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인들과 독일의 지도자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파악하지 못했으며, 피점령국 유럽의 희생자들이 겪었던 고충보다 전후 어려웠던 자신들의 식량 부족, 주택 부족 등의 문제에 더 열중해 있었다. 실제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희생자로 보는 경향이 많았으며, 따라서 재판과 나치 범죄의 대면을 승리한 연합국이 소멸한 정권에 대해 벌이는 복수로 간주했다. 독일의 전후 정치적, 종교적 권력은 이러한 견해에 거의 반대하지 않았다.

 

 

재교육 효과는 확실히 제한적이었다. 독일인들에게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하는 곳에 가도록 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에게 영화를 보도록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고, 본 내용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다. 탈나치화는 단연코 큰 효과가 없었다. 1951년에 바이에른 주에서는 판사와 검사의 94퍼센트, 재무부 직원의 77퍼센트, 지역 농업부 공무원의 60퍼센트가 나치 전력자였다. 1952년에 본의 외무부 공무원 중 셋에 하나는 이전 나치당 당원이었다. 새로 구성된 서독 외교단의 43퍼센트는 전직 친위대 대원이었고 17퍼센트는 보안대나 게슈타포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1945년에서 1949년에 이르는 동안, 대다수 독일인들은 변함없이 ‘나치즘은 좋은 생각이었지만 잘못 적용되었다’고 믿었다. 독일인의 37퍼센트는 ‘유대인과 폴란드인의 절멸은 독일인의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독일인 세 명 중 한 명은 ‘유대인은 아리아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이는 사람들이 그러한 견해를 공약으로 내세운 정부의 통치를 12년간이나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진정 놀라운 일은 6년 뒤에 이루어진 여론 조사였다. 조사 결과 약간 더 높은 비율인 37퍼센트의 독일인들이 자신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낫다고 단언했다.

 

 

전후 정치적인 활동을 대가로 나치 전력이나 파시스트 전력을 눈감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오스트리아는 종종 파시스트 전력자들을 애호하여 언론이나 기타 민감한 직종에서 일하도록 허용했다. 아데나워 서독 수상은 1949년 9월 20일 독일연방공화국 의회에서 행한 첫 번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방공화국 정부는 많은 사람들이 중하지 않은 죄과에 대해서는 사적으로 속죄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정부는 과거를 잊는 것이 받아들여질듯한 곳에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독일인들이 이 주장에 진심으로 찬성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업다. 탈나치화가 무산되었다면, 그 이유는 1945년 5월 8일에 독일인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자발적으로 ‘나치의 굴레를 벗어’ 던졌다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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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0-15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내용의 책인 것 같습니다.

분량이 후덜덜하긴 하지만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북다이제스터 2019-10-15 18:4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근간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꽤 유명한 책이고 호평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직 몇 페이지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잘 몰랐던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몇 가지 짚어보면요.....

1. 4년 간 지속된 제2차 세계대전 시 대부분 지역에서 군인들 전쟁은 시작과 끝에서만 있었다는 점
2. 독일은 자국 경제의 어려움 없이 전쟁을 수행했고 독일 국민은 별로 경제적 고통이 없었다는 점
3.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대부분 영화는 서유럽을 배경으로 하기에, 그곳 희생이 컸다는 착각을 주지만, 실질적으로 더 큰 피해 지역은 동유럽과 남동유럽, 러시아라는 점
4. 다양한 책과 영화로 호도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신화는 과장되었을 수 있고, 독일 점령시 별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 국민 희생이 다른 나라 비해 월등히 적었다는 점에서 결국 현명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5.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적군에 부역이 범죄라고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 (무언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개념도 형성된 지 정말 얼마 안 되었다는 점)
6. 주축국인 오스트리아가 독일만큼 비난받지 않는 이유. 결국 처칠 같은 사람이 프레임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사람들 생각이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점, (불가리아가 독일 편이었다는 사실은 덤으로 알게 됨)
7. 일본과 달리 독일은 전쟁범죄자를 철저하게 심판하고 처벌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일본과 달리 현재 전 세계에 반성하는 메시지를 지속 내보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앞으로 책을 읽으며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