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러시아는 왜 17세기 뒤늦게 봉건제가 아닌 중앙집권 시기에 농노제가 발생했을까?


“모스크바국은 영토를 확장하고, 커져가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서 봉직자들, 즉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고 정부를 위해서 행정이나 여타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던 귀족들에게 의지했다. 봉직에 대한 대가로 부여된 영지인 포메스티예는 모스크바국 시회질서의 기반이 되었다. 모스크바국 정부는 포메스티예애 적합한 토지를 계속해서 찾기 위해서 영토를 확장했다.


중요한 것은 국민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농민 지위가 이로 인해 악하되었다는 점이다. 봉직귀족의 성장은 점점 더 많은 국유지와 농민들이 포메스티예 제도로 인해 봉직귀족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귀족 자신이 국가에 대한 과중한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농민들로부터 짜내야만 했다.


많은 농민들은 도망치려고 시도했다. 러시아가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함으로써 동남쪽 방향의 비옥한 토지로 향한 길이 열렸고, 정부는 처음에 이 지역에 러시아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서 농민 이주를 장려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봉직귀족 이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봉직귀족이 국가에 봉사하려면, 그들이 데리고 있던 농민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6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에 모스크바국 당국은 봉직귀족이 노동력 확보를 보장하기 위해서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합법적인 이주는 중단되었다.


사실 러시아 노에제를 포함하여, 초기에 성립된 농민들의 세속 상태는 자연스러운 계약의 결과였다. 농민들은 주로 금전이나 곡물 혹은 농기구를 빌린 대가로, 지주에게 지대를 납부하고, 부역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비록 1년에서 10년에 이르는 기한이 정해졌다고 할지라도, 농민들이 채무를 다 갚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협정은 연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농민들이 지주에게 매년 내는 분담금은 종종 대부금에 대한 이자에 불과했다. 결국, 봉직귀족계급이 농업 노동력의 필요성 때문에, 농민들 이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이런 일이 모스크바국 성장 초기에 전개되기는 했지만, 농노화는 17세기까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포메스티예 농업의 성장은 차르가 봉직을 맡을 귀족들에게 토지와 함께 농민을 하사함에 따라 예속 상태가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는 특히 농민 이주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고, 농민 탈주를 중단시키려는 노력으로 귀족 이익을 계속해서 확대시켜주었다. 비록 농노제를 직접 확립하는 법은 17세기 이전 단 한 번도 공포된 적이 없지만, 몇몇 입법 조치는 그런 목적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봉직귀족으로부터 제기된 거듭된 청원에 대한 반응으로, 정부는 탈주 농노를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보낼 수 있는 기간을 계속해서 연장했다. 그 기간이 16세기 말에는 5년이었는데, 1649년에 공포된 새로운 법령 『울로제니예』로 무기한이 되 었다. 나아가 1607년과 몇몇 다른 해에는, 탈주 농노들을 숨겨주는 것에 대한 처벌을 입법화했다. 1550년부터 1580년 사이에 행한 최초의 인구조사는 그 이후에 실시된 것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의 거주지 기록을 제공하고 농노의 자식들을 부모와 동일한 범주에 올려놓음으로써 농노제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1649년의 울로제니예와 함께, 이제 농노제의 명확한 본질은 법으로 명문하되었고, 효과적으로 강제될 수 있었다. 농민은 주인 허락 없이는 이동할 수없게 되었다. 새로운 법전은 탈주자들에 대한 모든 제한 규정을 폐지했으며 도망자들을 숨겨주면 처벌을 무겁게 부과했다. 그리고 정부는 농촌에서 탈주자들을 수색하기 위한 특별 부서를 설치했다. 울로제니예는 본질적으로 ‘한번 농노는 영원한 농노이다’라는 카스트적인 원칙을 채택했고, 귀족에게 완전한 만족감을 안겨주 었다. 무제한적인 의무를 지고 있던 농노들은 전적으로 지주 수중에 있게 되었고, 지주들은 자신 영지에서 사법권과 치안권을 점차 더 많이 행사할 수 있었다.


17세기 말에는 농노의 매매와 증여 관행이 발달되었다. 즉, 농노는 사실상 노예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농노제는 봉건제가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군주정치 시기에 등장했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예로부터 존재해오기는 했으나 지주에 대한 농민의 경제적 의존도가 점점 더 증가했다는 점, 그리고 모스크바국 정부가 귀족에게 유리한 정책을 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17세기의 모스크바국에서 인구의 85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농노였다고 추산된다.


2. 표토르 대제의 농노제 폐지는 선의였을까?

18세기 표트르 대제는 계속해서 돈이 엄청나게 부족한 상태였는데,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인 경우도 때때로 있었다.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이미 과중한 부담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거의 한계점에 다다를 정도로 압박받던 러시아 대중을 더욱 쥐어짜는 수밖에 없었다.


추정에 따르면, 1702년에 정부가 거두어들인 세입은 1680년 세입과 비교해서 2배였고, 1724년에는 5배 반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벌통, 방앗간, 어업, 턱수염 그리고 대중목욕탕 등 거의 모든것에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정부는 국가 독점권이 적용되는 품목을 새롭게 확대했다. 예를 들면, 법적 처리 과정에 필요한 인지는 국가에 추가적인 세입원이 되었고, 오크 나무로 만든 관(棺)도 그랬다.


사실, 정부 재정을 증가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거나 꾸며내는 일은 그의 통치기 동안에 특별한 하나의 업무로 발전했다. 직접세의 주요 형태에서 또다른 혹은 아마도 좀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표트르 대제는 1718년에 가구별 세금과 경작지에 대한 세금 대신에 인두세(人頭稅)를 도입했던 것이다!


인두세가 가진 하나의 목적은 가구를 통합하거나 자신 땅을 경작하지 않는 탈세자들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인두세는 하층계급 전체에게 부과되었고, 세금 평가액도 아주 많았으며 현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1718년부터 1722년 사이에는 인구조사, 즉 인두세를 내야 하는 소위 인구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애초에 인구조사에는 사유지를 경작하던 농부만 포함되었다. 그런데 경작을 담당하지 않는 가구 내 노예와 모든 부자유민, 심지어 부랑자들도 추가하라는 명령이 내려겼다. 인구조사 동안에 등록된 각 사람은 동일한 액수로 정해진 인두세를 내야 했다.


영지에서 지주들은 돈을 국고로 즉각 이관하는 책임을 맡았다. 인두세로 인해서 마침내 농부와 농노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졌으며, 모든 농민이 국가에 하나의 예속민(bonded mass)으로 통합되었다. 인구조사 이후에 농노들은 주인의 서면 허가증을 가지면 영지를 떠날 수 있었는데, 이것은 통행증 제도의 출발을 의미하는 조치였다. 그리고 인두세는 황제의 지속적인 혁신정책 중의 하나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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