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원인으로 작용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세르비아는 인종적, 문화적으로 자신과 비슷하다고 추정되는 모든 사람들을 관할하려고 했다. 그 중 일부는 터키 영토 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 살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남부 지방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이었다.

 

 

1908년 이후 오스트리아가 갑자기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세르비아인들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강력히 대항했다. 대항 방식은 오스트리아 내에서 슬라브인 불만을 유도하는 선동 형태를 취했다. 세르비아인들은 슬라브인들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분리되어 그 영토가 세르비아에 통합될 것을 기대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 범슬라브주의자로부터 지원과 독려를 받았다. 범슬라브 운동은 동유럽 모든 슬라브족이 하나의 문화적 민족을 이룬다는 ‘이론’을 근거로 출발했다. 따라서 슬라브 국가인 러시아가 발칸 지역의 비교적 작은 슬라브 국가 보호자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슬라브주의는 단순히 열렬한 소수 민족주의자의 소망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 정부의 공식 정책의 일부였으며 또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일어난 모든 분쟁에 러시아가 공세적 태도를 보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터키 두 지역인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실질적 주권을 오스만 제국에 계속 두면서 오스트리아가 행정적으로 통제하도록 했다. 세르비아 또한 이 지역을 넘보고 있었다.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는 세르비아 왕국 영토를 두 배로 늘려줄 것이고 아드리아 해에 접근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는 베를린 조약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이 두 지역을 병합해 버렸다. 이에 격노한 세르비아인들이 러시아에 호소하자 차르 정부는 오스트리아에 전쟁으로 위협했다. 이에 독일은 러시아에 엄중한 각서를 보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겠다는 단호한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여 국내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에 러시아 개입은 연기되었다.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그리스 4개국이 러시아 동의 하에 터키령 마케도니아 지방을 정복하기 위한 발칸 동맹을 맺었다. 전쟁은 1912년 10월 시작되었고 2개월도 못 되어 터키 저항은 분쇄되었다. 이후 정복 지역 분할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 발발 이전 체결된 비밀 조약에서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알바니아까지 약속받았다. 하지만 세르비아 세력 확대에 항상 두려움을 갖던 오스트리아는 평화 회담에 간섭하여 알바니아를 독립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세르비아인에게는 파국을 초래한 최후의 사건이었다. 그들에게는 서부로 향한 길이 사사건건 합스부르크 제국에 봉쇄되는 것처럼 보였다. 세르비아와 이웃한 보스니아 지방의 반오스트리아 선전은 더욱 악의에 차게 되었다. 1814년 6월 28일 한 세르비아 지지자가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을 암살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불을 붙였다. 페르디난트를 죽인 이유는 그가 합스부르크 제국 재조직화 계획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미 실질적으로 자치를 행사하고 있던 기존 게르만인의 오스트리아와 마자르인의 헝가리 이외 슬라브인이 거주할 제3의 준독립 지역을 만드는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계 슬라브인들이 합스부르크 통치를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발칸 지역은 국가 건설을 위한 기나긴 투쟁을 하느라 20세기 대부분을 소진했다. 재미있는 것은 국가 건설 투쟁이 끝나자마자, 국제에서 정치,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 국가라는 생각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현재 발칸 국가들은 유럽연합(EU)에 편입되어 있든지 아니면 편입되기를 바라는 상태다.”<발칸의 역사>(을유문화사, 2014)

 

 

 

 

 

 

 

 

 

 

 

 

 

 

 

“개전 후 각국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민족주의 열기의 예기치 않은 결과나,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벌어진 기득권 쟁탈전이라기보다는 나라를 지키는 숭고한 전쟁으로 선전했다. 사회주의자 제2인터내셔널은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으로 동원령에 맞서야 한다고 선언했다. 각국 정부는 전쟁 수행 노력이 ‘아래로’부터 전복될 것을 우려했고, 애국심에 끊임없이 호소함으로써 그러한 운동 싹을 자르려고 했다. 따라서 전쟁 프로파간다가 기관총만큼이나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연합국 측은 처음에는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에 대한 가혹 행위, 예를 들면 민간인 인질 처형, 루뱅의 유서 깊은 도서관 파괴, 디닝에서의 600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폭로함으로써 용이하게 선전 효과를 낼 수 있었다.

 

 

1916년경 전쟁은 지루한 교착 상태에 빠졌고 교전 당사자들은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독일은 프랑스 동부 국경 근처의 베르덩 요새를 포위했는데, 여기서 사상자가 60만 명 이상 발생했다. 독일군 포위 목적은 요새 점령이 아니었다. 프랑스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할 것을 알았기에 독일군 목적은 ‘프랑스의 신체 건장한 사람들의 피를 짜낼 대로 다 짜기 위한’ 것이었음을 시인했다. 7월부터 10월까지 쏨므 강을 따라 지속된 전투에서 독일 측 50만, 영국군 40만, 프랑스군 20만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 대가로 연합국 측은 전선에서 불과 11킬로미터를 전진했을 뿐이다.

 

 

병사들은 벌레가 들끓는 진흙투성이의 참호 속에서 수주 일씩 극도의 불쾌감과 싸워야 했고, 불시에 찾아 드는 소름 끼치는 전장의 체험들 즉 대포, 기관총, 화염방사기, 독가스가 빚어내는 악몽 사이를 오가야 했다. 1917년 프랑스 병사들 사이에서 자그마한 반란이 일어났다. 돌격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양떼처럼 음매 애- 소리를 내며 전진했던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끊임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지휘관들에 대한 가슴 아픈 저항 방식이었다.

 

 

1917년 4월 3일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레닌이 독일 지원을 받아 극비리 러시아로 귀국했다. 혁명가로서 그의 잠재력을 인정했던 독일은,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으로서 그의 진가가 드러나기 기대했던 것이다. 독일은 레닌이 러시아 참전을 반대하여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한결 약화시켜 줄 것이라고 정확하게 추론했다. 1917년 봄과 여름에 걸쳐 레닌은 부르주아지와 협조를 피하고, 전쟁을 비판하는 강력한 노선으로 볼셰비키를 이끌었다. 그는 곧 노동자와 병사, 농민들의 거대한 민중 소요 지도자가 되었다. 이 무렵 볼셰비키들은 이제까지 그 어느 정당도 하지 못했던 인민 요구를 분명히 밝혔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1930년대 전세계 공황이 닥쳤을 때 유럽 민주주의 국가 중 프랑스는 대공황 시작과 더불어 발생한 불평등 및 빈곤과 싸우기 위해 가장 선진적인 일련의 정책을 채택했다. 1936년 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극단적 보수주의자 위협에 대응해 급진당, 급진 사회당, 공화당의 사회주의자가 이끄는 인민 전선 정부가 구성되어 2년 동안 지속되었다. 인민 전선 정부는 군수 산업을 국유화하고, 프랑스 은행의 예금에 대한 독점적 통제권을 최대 주주 200명부터 박탈했다. 또한 모든 도시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주당 40시간으로 고정시키는 법안이 통과되었으며, 공공 사업 계획이 만들어졌다. 인민 전선 정부는 농민을 위해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고 분배를 규제하기 위한 밀 관리국을 설립했다. 인민 전선 정부는 우파 위협을 잠시 동안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대체로 노동 계급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정부 노력에 비협조적이었고 공감하지도 않았다.

 

 

반면 미국의 뉴딜은 통화 관리 및 사회 보장 계획을 통해 개개 시민과 국가 전체의 회복에 도움이 되었지만 실업이라는 결정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뉴딜이 시행된 지 6년 뒤인 1939년 미국에는 아직도 900만 명 이상의 실업자가 있었다. 이는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실업자를 합친 수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세계 대전의 발발만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노동 시장에서 군대를 돌리고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한 수많은 공장에 일자리가 생김으로써 뉴딜이 해결하지 못한 완전한 회복을 제공해 줄 수 있을 뿐이었다.

 

 

사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몇 가지 측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원인을 제공해 주었다. 우선 대공황은 경제적 민족주의를 격화시켰다. 각국 정부는 실업과 경기 침체에 직면해 자국 생산자의 국내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고율의 관세 정책에 의존했다. 또한 실업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무기 생산을 눈에 뛸 정도로 증가시켰다. 영국 및 프랑스 정부 내 몇몇 각료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독일도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군비 확장은 대략 1935년 독일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실업이 실질적으로 감소했으며, 경기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다른 나라들도 독일 사례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단순히 경기 회복을 위한 방법이라기보다 나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황은 호전적인 팽창주의의 새 물결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각국은 자국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웃 나라 영토를 정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을 초래한 긴장은 다분히 미국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전시 정부의 선전으로 미국인들은 반파시트 용사로서 소련인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지난날 동맹자들이 실제로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미국인들은 순진하리만큼 환멸을 느꼈다. 전후 서유럽의 피폐해진 경제 상황에 부심했던 미국 지도자들은, 소련이 동유럽에서 했던 것처럼 서유럽 전역에서도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경제적 취약성을 활용할 대대적인 계획을 꾸미는 중이라고 믿었다. 최근 학자들의 신빙성 있는 주장에 의하면, 소련에는 이러한 종류의 대규모 전략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이 공세를 취하려 하지 않았던 주된 이유는 그럴 만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전 시 서로가 핵 전쟁을 우려하기에 한쪽 위협이 단지 으름장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면, 쿠바 미사일 위기처럼 필요 시 어떻게 다른 나라에게 핵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확신시킬 수 있겠는가? 이 경우 소련은 미국에 도전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그럼으로써 소련은 좀더 정치가다운 면모를 국제 사회에 보여 주었다. 하지만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 결과를 대결 끝에 얻은 승리로 착각했다. 여기에서 대결이란 미국이 곧 이어 베트남전에서 참담한 결과를 무릅쓰고 동원하기 시작했던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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