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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와 역사소설이라니 참 안 어울리는 조합 같지만, 김영하는 누구보다도 멋지게 이 반역적인 역사소설을 만들어 냈다. 역사소설은 그 속성상 대개 민족주의로 경도되거나 민초들의 비극적 영웅담으로 흐르기 마련인데, 이 <검은 꽃>은 민족과 국가의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고 역사에 휘말린 개인이 겪는 삶의 잔혹한 아이러니를 드러낸다(역시 김영하답다).
1905년 4월, 조선인 1033명을 태운 영국 기선 일포드 호가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로 출발한다. 장돌뱅이 고아, 도망친 신부, 몰락한 황실 종친, 내시, 강제로 해산당한 대한제국의 군인, 도둑, 가산을 탕진한 역관, 생계가 막막한 농민 등 여러 군상들로 이루어진 이민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멕시코에 도착하지만, 그들이 대륙식민회사의 농간에 속아 4년간의 채무노예로 팔려왔음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전근대적인 조선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세계로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이들은 자본주의의 잔인한 톱니바퀴에 분쇄되다시피하는 고통을 겪는다. 김영하는 이 개인들의 비극을 짤막짤막하게 조망하는데, 감정을 배제하고 철저히 제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주인공인 김이정과 이연수조차 작가의 냉정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로 인해 독자가 느끼는 절절한 안타까움은 이러한 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 누군가는 자본주의에 적응하여 거부가 되고, 누군가는 농장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 농민혁명에 휘말려 처단당하고, 어떤 이들은 과테말라의 혁명을 돕기 위해 남미의 밀림을 헤맨다. 그들의 국가와 민족은 자본주의의 굴레를 벗어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역사의 물줄기는 개인의 신념 따위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다른 작가였다면 10권 이상의 대하소설로 구상했을 법한 이야기이지만, 김영하는 300페이지 남짓한 한 권의 소설로 <검은 꽃>을 마무리했다. 이것이 김영하 소설의 특징인 카프카적 부조리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낸다. 더 길었다면 다른 장편역사소설과 별 다를 바 없는 이야기가 되었을 테니까. 짧기 때문에 길고 긴 여운이 남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