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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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린은 대도시 군 병원에서 일하는 군의관이다. 그에겐 고향의 부모가 정해준 아내 수위가 있다. 전형적인 농촌 아낙인 수위는 고향 시골에서 딸을 키우며 남편과 떨어져 살고 있다. 린은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 만나에게 끌리게 되고, 아무 애정없는 결혼을 청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휴가를 받아 집에 갈 때마다 아내와 이혼하려고 시도하지만, 매번 실패를 거듭하고 그의 이혼 시도는 17년 동안 계속된다.
얼핏 들으면 흔한 불륜 이야기 같지만, 이 중 악인은 아무도 없다. 심약한 린과 가련한 만나가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게 되는 것도 이해가 되고, 순종적인 수위에게도 동정심을 갖게 된다. 섬세하고 풍부한 심리 묘사와 평범하고 담담하지만 탁월한 절제를 보여주는 문장은 마치 펄 벅의 소설을 연상케 한다. 여기엔 소설가 김연수의 매끄러운 번역도 한 몫 한다.
<기다림>의 저자 하 진은 중국 태생으로 미국 유학 중에 천안문 사태를 맞아 미국에 남기로 결심한다. 마흔 셋의 나이에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이 <기다림>으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하고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까지 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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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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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위화를 꼽을 수 있다. 위화는 10개의 단어(인민/영수/독서/글쓰기/루쉰/차이/혁명/풀뿌리/산채/홀유)를 키워드로 하여 공산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부유하는 현대 중국의 사회와 경제, 도덕의 급격한 변화와 이로 인해 파생된 모순들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롭게 조롱한다. 이를 위해 저자가 경험한 수많은 실화들이 등장하는데, 사실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부조리하다. 그리고 그 이면엔 항상 문화대혁명이 있다. 고교 시절, 위화와 친하게 지내던 국어 선생이 제발 자기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써붙여달라고 위화에게 조른다거나, 초등학생 때 친구와 어떤 논쟁을 하든 `루쉰 선생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주장하면 반드시 이기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현대 중국의 역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하고 냉혹한 코미디 같다는 기분이 든다. 대약진운동 때 모택동이 참새를 가리키며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한 마디를 했다고 전 인민이 들고 일어나 중국의 참새를 모두 잡아 죽이는 바람에 해충으로 인한 대기근이 발생하여 3천만명이 굶어 죽은 것처럼 말이다. 하루키 소설의 시원이 60년대 전공투이듯, 위화의 글은 언제나 문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위화의 인생 뿐만 아니라, 당금의 중국, 중국인의 모든 사상과 생태에 절대적 영항을 미친 사건이니까.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문화대혁명을 이해하는데 꽤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일반 민중들의 삶이 문혁으로 인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아주 쉽게 보여준다.

이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빛이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고, 또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의 몸보다 에너지를 더 멀리 전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이던 그 밤에 나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장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 중국 각지의 양곡 창고는 텅텅 비었다. 그 뒤로 이 낭만주의 부조리극은 무기력하게 막을 내리고 현실주의의 잔혹한 비극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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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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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는 노 불문학자의 글모음 답게 사회 문제를 다루는 칼럼조차도 대단히 문학적이다. 어휘 하나하나가 저자의 치열한 고민 속에서 바루어졌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신문이나 잡지 어딘가에 기고했었을 1, 3부의 단문 모음도 좋으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결론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허나 2부야 말로 이 책의 정수가 아닐까 한다. 사진가의 사진 한 장을 걸어 놓고 온갖 상상을 펼쳐 내어 진한 시적 감흥을 끌어내는 저자의 `사진 평론` 이야말로 예술 평론이 나아가야할 길이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대학에 입학한 남학생들이 한두 해를 방황 속에 허송하다가 `복학생 아저씨`가 되고 나서야 공부에 전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군대 생활이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보다는 군대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불안은 슬픔보다 더 끔찍하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표준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말일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의 특수한 정서와 얽혀 있는 생각을 보다 큰 틀의 잣대로 검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폐쇄사회가 당하는 가장 큰 곤경, 그것은 모든 사태가 항상 어느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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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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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와 역사소설이라니 참 안 어울리는 조합 같지만, 김영하는 누구보다도 멋지게 이 반역적인 역사소설을 만들어 냈다. 역사소설은 그 속성상 대개 민족주의로 경도되거나 민초들의 비극적 영웅담으로 흐르기 마련인데, 이 <검은 꽃>은 민족과 국가의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고 역사에 휘말린 개인이 겪는 삶의 잔혹한 아이러니를 드러낸다(역시 김영하답다).
1905년 4월, 조선인 1033명을 태운 영국 기선 일포드 호가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로 출발한다. 장돌뱅이 고아, 도망친 신부, 몰락한 황실 종친, 내시, 강제로 해산당한 대한제국의 군인, 도둑, 가산을 탕진한 역관, 생계가 막막한 농민 등 여러 군상들로 이루어진 이민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멕시코에 도착하지만, 그들이 대륙식민회사의 농간에 속아 4년간의 채무노예로 팔려왔음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전근대적인 조선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세계로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이들은 자본주의의 잔인한 톱니바퀴에 분쇄되다시피하는 고통을 겪는다. 김영하는 이 개인들의 비극을 짤막짤막하게 조망하는데, 감정을 배제하고 철저히 제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주인공인 김이정과 이연수조차 작가의 냉정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로 인해 독자가 느끼는 절절한 안타까움은 이러한 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 누군가는 자본주의에 적응하여 거부가 되고, 누군가는 농장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 농민혁명에 휘말려 처단당하고, 어떤 이들은 과테말라의 혁명을 돕기 위해 남미의 밀림을 헤맨다. 그들의 국가와 민족은 자본주의의 굴레를 벗어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역사의 물줄기는 개인의 신념 따위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다른 작가였다면 10권 이상의 대하소설로 구상했을 법한 이야기이지만, 김영하는 300페이지 남짓한 한 권의 소설로 <검은 꽃>을 마무리했다. 이것이 김영하 소설의 특징인 카프카적 부조리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낸다. 더 길었다면 다른 장편역사소설과 별 다를 바 없는 이야기가 되었을 테니까. 짧기 때문에 길고 긴 여운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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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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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울림이 깊은 작품인 <밤은 노래한다>. 주위에 선물하려 해도 그간 절판되어 아쉬웠는데 드디어 재출간되었네요. 이념과 혁명, 그리고 인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위대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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