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 책과 독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독서 편력의 서사시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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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학창 시절 우연히 보르헤스를 만나 시력을 잃은 그를 위해 4년간 책을 읽어 주었던 알베르토 망구엘. 대문호와의 교류 때문이었는지 그 역시 굉장한 저술가이자 독서가가 되었다. <독서의 역사>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고루함과 달리, 이 책은 단편적인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다양한 주제에 따라 써낸 방대한 에세이에 가깝다. 챕터 제목들만 봐도 ‘눈으로만 읽는 독서‘, ‘누군가에게 대신 책을 읽게 하기‘, ‘책 분류의 역사‘, ‘갇힌 공간에서의 책 읽기‘, ‘책 훔치기‘ 등으로 연대기적 서술과는 거리가 멀다.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이를테면 고대엔 지금처럼 소리내지 않고 읽는 묵독이 없었다고 한다. 어떤 글이든 주위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낭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책장에 쓰여진 단어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데 반해, 큰 소리로 외쳐지는 단어는 날개까지 달고 훨훨 날아갈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이 모친에게서 온 편지를 말없이 읽자 부하들이 당혹스러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처럼 알베르토 망구엘은 어마어마한 독서 편력으로 쌓은 엄청난 지식을 기막히게 풀어내어 절대 구글 검색 같은 것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정보를 알려준다. 이 점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저술 형태와 유사한데, 다카시가 논리적이고 냉철한 과학도라면 망구엘은 매우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인문학도의 느낌이다. 다카시는 절대 픽션을 읽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망구엘은 그 유명한 ‘픽션들‘을 지은 보르헤스의 제자 아니던가.
카프카가 말했듯 ‘책은 우리 내부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는 도끼‘여야 하고, 월트 휘트먼이 말했듯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은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원천이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읽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카프카는 1904년에 친구인 오스카르 폴라크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요컨대 나는 우리를 마구 물어뜯고 쿡쿡 찔러대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읽고 있는 책이 머리통을 내리치는 주먹처럼 우리를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면 왜 책읽는 수고를 하느냐 말야? 자네가 말한 것처럼 책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일까? 천만에. 우리에게 책이 전혀 없다 해도 아마 그만큼은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책들은 우리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쓸 수 있단 말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마치 우리 자신보다도 더 사랑했던 이의 죽음처럼, 아니면 자살처럼, 혹은 인간 존재와는 아득히 먼 숲속에 버림받았다는 기분마냥 더없이 고통스런 불운으로 와닿는 책들이라구. 책은 우리 내부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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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2 0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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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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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의 살인으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된다. 오스만 궁정 화원의 세밀화가인 엘레강스가 우물 아래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 책은 그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를 쫓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갖지만, 그 속에서 예술과 종교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드러낸다. 젊은 시절 가 본 베네치아에서 초상화와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유럽 화풍에 매료되어 유럽풍을 가미한 화집을 만들자고 술탄을 설득하는 에니시테 에펜디. 위대한 장인들이 이어온 화풍에서 한 치도 어긋남을 허용하지 않는 화원장 오스만. 유럽의 원근법은 인간의 시점에서 본 세상, 즉 인간이 중심인 세상을 그리는 것이다. 반면 조감도처럼 하늘에서 본 평면적 시선의 이슬람의 세밀화는 바로 신의 시선, 신이 본 세상을 그린다. 따라서 이 대립은 신과 인간에 대한 종교적 물음으로 치환된다. 여기에 에니시테 에펜디의 아름다운 딸 셰큐레와 그녀를 사랑하는 사촌 카라, 오스만의 제자들인 올리브, 나비, 황새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전개된다.
세밀화는 신이 본 세상을 그리는 것이기에 화가 개인의 스타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화가의 서명은 물론, 붓 터치 하나 조차도 개성을 드러내면 안 된다. 개성을 억압받는 화가들의 내면엔 자기만의 스타일을 뽐내고 싶은 욕망과 전통과 종교에 위배된다는 죄책감이 충돌한다. 엘레강스의 죽음도 여기서 기인한다.
이 책은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매 장마다 화자가 달라진다. 카라, 셰큐레, 올리브, 나비, 황새, 에펜디, 오스만은 물론이고, 이미 시체로 변한 엘레강스나 그림 속의 개, 나무 등도 화자로 등장한다. 이러한 시점의 전환이 독자에게 더할 수 없이 독특한 느낌을 선사한다.
김영하가 <보다>에서 말했듯, 오르한 파묵은 어릴 적부터 철저히 유럽 문화에 경도된 교육을 받았다. 당연히 젊은 시절엔 현대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을 냈으나, 정작 세계적인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나이가 들어 터키의 전통을 다룬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도 오스만의 전통과 새로운 유럽 문화의 충돌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 군상이기에 <내 이름은 빨강>은 어찌 보면 오르한 파묵 개인의 일생을 바친 예술에 대한 고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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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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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김중혁의 소설을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근래 가장 유망한 젊은 소설가로 꼽히는 이이기도 하지만, 사실 김연수의 고향 친구라는 점이 호기심을 끌었다는 점을 부정하진 않겠다. 같은 학교 친구가 나란히 연예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그 좁은 김천 바닥에서 두 명이나, 그것도 친구 둘이 소설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난 단편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읽고 나면 잘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하루키, 위화, 김연수의 단편들도 읽을 땐 감탄했으나 지금 기억나는 작품은 없다. 김소진도 마찬가지. 그런 내가 김중혁의 단편집 <악기들의 도서관>을 고른 건, 여름휴가 때 가족들과 묵었던 제주의 한 민박집에 꽂혀 있던 책이기 때문이다. 민박집 조그만 벽장엔 서울에서 여성운동, 환경운동을 하다 제주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민박을 치는 주인 아가씨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 책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서 이 책을 골라 단편 하나를 읽어보고 한 번 사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내가 김중혁에 대해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자주 가는 합정역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냉큼 사서 읽었다. 완독한 후의 소회를 말하자면, 나는 이 책과 잘 안 맞는 것 같다. 이 책의 단편들엔 <무방향버스> 한 편만 빼놓고 전부 음악이 주된 모티브로 등장한다. 등장인물들도 피아니스트, 공연기획자, DJ지망생 등 음악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다. 이 책의 작품들은 사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가벼운 사건을 다루지만 그 울림이 가볍지만은 않다. 음악을 매개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음악에 대한 개인의 취향이 타인과 세계를 판단하는 가치관으로 전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회적인 3~40대를 위한 동화 같은 느낌의 단편집이고 바로 그래서 내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고향 친구인 김연수와는 너무나 다른 작풍을 가진 소설가다. 김중혁의 장편을 읽어보고 계속 찾아 읽을지 판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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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전쟁사 1941~1945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지음, 윤시원.남창우.권도승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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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읽었던 독소전에 대한 저작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나 안토니 비버의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소전이 발발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전쟁의 진행양상, 전쟁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에 비해 이 <독소전쟁사>는 순수히 군사적 관점에서 소련군과 독일군이 전쟁 내내 펼친 작전의 전개에 대해서 다룬다. 공동 저자 두 명도 미 육군 장교 출신의 학자이고, 번역서의 추천사도 죄다 육군, 해군, 해병대 장성들이 썼으니 아주 충실한 전쟁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만큼 밀덕이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겐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이 작전은 양측의 병력이 몇 명, 야포가 몇 문, 전차가 몇 대인데 XX군단이 어떻게 종심돌파를 시도해서 몇 킬로미터를 진격했고, OO분견대가 이에 어떻게 대응했고... 이런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각주도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전사 몇 명, 부상 몇 명, 전차 손실 몇 대였는지를 알려주는게 대부분이다. 이렇게 숫자와 지도로만 독소전을 바라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작전 한 번에 십만명 단위로 죽어나가는, 말도 안 되는 숫자에도 무뎌진다.
이 책에서 특기할 점은 역자들이다. 역자가 본문의 틀린 내용을 수정하는 역주가 수도 없이 나온다. 그 내용도 지극히 전문적인데, 놀랍게도 이들은 해당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다. 세 명의 역자들 직업은 각각 정형외과 의사, 물리학 교수, 사학과 대학원생이다. 이들은 한 밀리터리 전문 사이트에서 만난 밀리터리 마니아들이다. 책 말미에 이들의 대담을 실을 정도이니 이 책은 저자들만큼이나 역자들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앞서 말한 두 저작보다 흥미는 떨어지지만, 소련측 자료의 충실한 반영과 뛰어난 번역으로 밀리터리 마니아라면 읽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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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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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 전에 산 <대성당>은 내내 우리 집 책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난 이 책 제목만 보고 중세 스페인 카톨릭을 소재로 한 어두운 역사 소설이 아닐까 제멋대로 단정짓고 있었다. 그땐 레이먼드 카버가 누군지 몰랐으니까. 그래서 이 책은 몇 년 동안 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우연히 TV채널을 돌리다 보게 된, 김창완이 진행하는 <TV책을 보다>라는 프로그램에 이 책이 소개되었다. TV에선 우리 부부가 가끔 가는 상수역 일본 라멘집 주인이 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책의 한 구절을 소리내어 읽다가 눈시울을 훔쳤다. 턱수염을 기른, 산도적 같은 외모의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게 좀 충격이었다. 대체 어떤 책이길래?
그래서 읽어 봤다. 미국 현대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표 단편집. 이 <대성당>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은 일상의 한 조각을 떼낸 듯한, 다소 밋밋한 전개를 보인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고, 설령 뭔가 큰 일이 일어날 듯 긴장이 고조되더라도 바로 그 시점에 소설이 끝나버리는 식이다. 대신 카버는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매우 자세히 서술한다. 이러한 행동의 묘사를 통해 카버는 인물들의 심리변화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사건이 제대로 전개되지 않고 소설이 끝나버리는 불친절한 작법은 독자로 하여금 그 뒷이야기를 마구 상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여운이 아주 길게 남는다. <기차>의 주인공 미스 덴트는 노인과 여인을 어떻게 했을지, <체프의 집>에서 주인공과 웨스는 어떻게 되었을지 같은 걸 잠자리에 들기 전 문득 상상하게 된다.
가장 좋았던 단편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었다. 주인공 부부는 여덟 살 짜리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해 빵집에 아들 이름이 새겨진 케익을 주문한다. 생일날 아침, 아들은 등교길에 뺑소니 사고를 당해 뇌진탕을 일으켜 깨어나지 못한다. 아들이 입원한 병원의 담당의에게 아들이 조금 있으면 깨어날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듣지만, 부부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어 안절부절 못한다. 아들의 병실에서 전전긍긍하던 부부는 잠시 쉬기 위해 번갈아 집에 들리는데, 그 때 전화가 걸려와 아들의 이름을 언급한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인줄만 알고 미친듯이 병원으로 돌아오지만, 아들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집에 들러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할 때마다 아들 이름을 대는 전화는 계속 걸려오고 부부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된다. 곧 깨어날거라던 아들은 어느 날 아침 혈관폐색으로 허망하게 죽어 버린다. 슬픔으로 미칠 것 같은 부부에게 또다시 아들 이름을 대는 전화가 걸려오고, 마침내 부인이 아들 이름으로 생일 케익을 주문했음을 기억해낸다. 분노에 찬 부부는 한밤중에 차를 몰아 빵집으로 쳐들어가 무례한 전화를 걸어댄 주인에게 악다구니를 퍼붓게 되고, 한창 내일 팔 빵을 만들던 주인은 부부의 아들이 죽었다는 걸 알고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 그는 갓 구워낸 빵들을 부부에게 대접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외로움과 중년의 무력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치고 화난 부부, 며칠 동안 제대로된 식사도 못 했던 부부는 ˝꽃향기보다 좋은˝ 빵 냄새를 맡으며 커피와 함께 온갖 빵을 먹고 빵집 주인과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이 난다.
이 단편을 보고 전에 읽었던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가 떠올랐다. 정혜신 박사는 아이를 잃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치유공간 <이웃>에 불러 따뜻한 밥을 먹였다고 한다. 자식을 잃고 나서 밥을 먹는 행위조차 죄스러워하던 유가족에게,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따뜻한 밥 한 끼는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유가족들이 진정 원한 것은 진심어린 사과와 따뜻한 밥 한 끼 같은 위로였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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