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dustbone님의 서재 (지하철 독서가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3380165</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Mon, 29 Jun 2026 17:42:22 +0900</lastBuildDate><image><title>지하철 독서가</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13380165</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지하철 독서가</description></image><item><author>지하철 독서가</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예수복음 - [예수복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3380165/17332465</link><pubDate>Sat, 13 Jun 2026 16: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3380165/1733246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3372319&TPaperId=173324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21/27/coveroff/897337231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3372319&TPaperId=1733246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예수복음</a><br/>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0년 01월<br/></td></tr></table><br/>이 책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작년에 읽은 김유태의 &lt;나쁜 책&gt;에서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lt;최후의 유혹&gt;과 더불어 예수의 생애를 다룬 “불경한” 책으로 소개되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은 그 유명한 &lt;눈먼 자들의 도시&gt; 조차 읽지 않았는데 대뜸 이 불경한 책부터 읽게 되었다.<br><br>누구나 성경의 내용, 그 중에서도 예수가 등장하는 신약의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점 외에 우리가 그의 성장 과정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예수가 나사렛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성경은 말해주지 않는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 소설에서 그의 대담한 상상력으로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한다.<br><br>&lt;예수복음&gt;이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같은 복음서는 마태오나 루카 같은 사가들이 예수의 생애를 기술한 것이다. 그러니 예수복음이라고 하면 예수가 스스로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라는 뜻이 된다. 이 책은 일인칭이 아닌 삼인칭 시점에서 서술되는 소설이니, 예수의 자서전이 아니라 예수가 자기 삶을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는다. 예수를 신격화하지도 않는다. 예수는 이 소설 안에서 지극히 평범한, 고뇌하는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만 빼면.<br><br>수태고지, 예수의 출생, 헤롯 왕의 유아 학살, 광야에서의 시험, 가나의 혼인잔치, 간음한 여인, 오병이어 등의 에피소드들을 설득력 있게 엮어 예수의 삶을 만들어 낸다. 그 중의 백미는 예수가 갈릴리 호수에서 홀로 배를 타고 하나님과 악마 루시퍼와 대면하여 토론하는 장면인데, 감히 도스토예프스키의 &lt;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gt;에 나오는 그 유명한 대심문관 에피소드에 비견할만한 장면이다. 이 소설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도, 공평무사하지도 않은 신이다. 예수의 발칙한 질문에 당황하기도 하고 짜증내기도 하는, 어찌 보면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는 신이다. 그리고 가식적이면서 솔직한 신이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는 운명이라는 걸 알게 된 예수가 그 이유를 묻자, 하나님은 예수의 희생을 통해 교회가 설립되고 기독교를 믿는 인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이 히브리 땅을 넘어 전 세계에 미치게 되는 걸 원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예수가 그에 따른 희생을 캐묻자 하나님은 마지 못해 한숨을 쉬며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순교하게 되는 수많은 이들의 끔찍한 죽음의 양태를 열거한다. <br><br>이를 묵묵히 듣고 있던 악마는 하나님에게 그 모든 권세를 얻은 후 자신을 예전처럼 하나님의 하늘나라에 받아들여줄 것을 청한다. 하지만 신은 다음과 같이 악마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br><br>“그래. 자네를 받아들이지도 용서하지도 않을 거야. 자네가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훨씬 나아.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네가 지금보다 더 나빠졌으면 좋겠어. 왜 그렇습니까. 내가 대표하는 선은 자네가 대표하는 악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자네 없이 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자네가 끝나면 나도 끝나는 거야. 내가 계속 선이려면 자네가 계속 악이 되는 게 긴요해. 악마가 악마가 아니면 하나님도 하나님일 수 없는 거야.”<br><br>이 불경함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무신론자인 내가 봐도 이 대목을 참고 넘어갈 기독교 신자는 없을 터이다. 신이 스스로 악의 존재가 불가피하다고 선언하다니! 불가피한 정도가 아니라 악이 없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 책의 첫 챕터에 등장하는 문구, “선과 악은 사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그 반대의 것이 없는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신의 뜻이라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악을 없애지 못하는, 전지전능하지 못한 신이라면 대체 왜 우리가 신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신이 있든 없든 선과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없이 많은 희생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br><br>하나님과 악마를 만난 예수는 결심한다.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기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신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아들로 죽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신의 아들로 죽는 것이 아니니 기독교가 세워질 일도 없고, 하나님이 예언한 수많은 희생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예수는 하나님을 속이고 그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br><br>나 같은 무신론자라면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고, 기독교 신자라면 무척 고뇌하면서 읽을 법한 소설이다. 아니면 중간에 내던지던가.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으로 종교를 해부했다면, 주제 사라마구는 문학으로 종교를 해체했다. 도킨스처럼 사라마구 또한 신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웅변하는 듯 하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21/27/cover150/897337231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212734</link></image></item><item><author>지하철 독서가</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과학 잔혹사 - [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3380165/17282288</link><pubDate>Sun, 17 May 2026 19: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3380165/1728228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42930474&TPaperId=172822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785/97/coveroff/k642930474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42930474&TPaperId=1728228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a><br/>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04월<br/></td></tr></table><br/>과학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예전에 스티븐 핑커의 &lt;빈 서판&gt;에서 최재천 교수의 스승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에게 벌어진 일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1970년대, 윌슨은 ‘생물의 사회적 행동은 좀 더 많은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위한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내용의 사회생물학 책 &lt;인간 본성에 대하여&gt;를 출간한 후 큰 곤욕을 치렀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며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라고 생각했던 좌파 지식인들은 일제히 그를 공격했다.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나치가 우생학의 토대로 진화론을 차용했던 것과 진배없다고 말이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오롯이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목적에서만 비롯된다면, 지금의 불평등 - 성차별, 인종차별, 빈부격차 등 - 이 자연스러운 것이란 말인가?<br><br>학문에 대해 비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윌슨에게 가해진 건 사회적 테러였다. 재직하던 하버드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협박이 빗발치고, 강의실에서 학생들로부터 물리적인 위협을 받고, 저명한 진화생물학자들(스티븐 J. 굴드, 리처드 르윈턴)에게 공개적인 조롱을 당했다. 그의 이론이 우생학처럼 오용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그러나 결국엔 윌슨의 이론이 학계에 받아들여졌고, 오히려 지금은 스티븐 J 굴드의 이론은 사장되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br><br>하지만 나치가 진화론으로 우생학을 정당화했다고 해서 진화론이 잘못된 이론인가? 원자폭탄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고 해서 핵물리학을 발전시키지 말았어야 하나? 과학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인 수단일 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사용하느냐가 문제라고 나는 생각했다.<br><br>여전히 과학에 대한 내 판단은 변함없다. 하지만 이 책 &lt;과학 잔혹사&gt;에 등장하는, 그릇된 방법으로 과학을 연구하고 사용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황우석의 예를 봐도 그렇듯이,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연구는 과학적으로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비윤리적으로 난자를 채취하여 생명 복제를 연구한 황우석은 자기 이론에 결과를 끼워 맞추려고 논문을 조작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과학자들 또한 비록 그 의도가 선했을 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서서히 도덕의식이 마비되어 마침내 파멸적인 결과를 맞게 된다. 생물 탐사를 위해 해적질을 한 사람도 있고, 해부학을 연구하기 위해 도굴된 시신을 사들인 의사도 있었다. 미국 흑인들이 음모론을 신봉하는 이유라고 일컬어지는 앨라배마 주 터스키기 마을에서의 매독 연구는 비윤리적 실험의 교과서를 보는 듯 하다. 이 책의 원제 ‘Icepick Surgeon’은 전두엽절제술을 발명한 신경학자 월터 프리먼을 일컫는데, 그는 얼음송곳을 정신질환자의 안와에 찔러넣어 전두엽을 휘젓는 수술 방식을 개발하여 난폭한 환자들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시어도어 카진스키라는 명석하지만 예민한 학생을 그 유명한 테러리스트 유나바머로 만들어 버린 심리적 고문도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에 의해 연구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었다.<br><br>이 책에서 소개한 아인슈타인의 말이 인상깊다. “많은 사람은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인성이다.” 이에 대해 저자 샘 킨은 이렇게 해석한다. ‘… 과학은 세계에 대해 추론하는 사고 방식이자 과정이자 방법으로, 우리의 희망 사항과 편견을 드러내고 그것을 더 심오하고 신뢰할 만한 진실로 대체하도록 도와준다. 세계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감안할 때, 보고되는 모든 실험을 직접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믿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사람들이 명예롭고 신뢰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 과학이 얼마나 긴밀한 사회적 과정인지를 감안하면, 인권을 유린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함으로써 사회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는 거의 항상 결국에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한다. …’<br><br>과학적 사실을 이념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연구하는 행위도 우리 공동체에 큰 악영향을 끼친다. 전자는 과학을 이데올로기의 시녀로 전락시키고, 후자는 인간을 과학의 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둘 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과학의 명성 - 객관적, 절대적 진리라는 대중의 인식 - 을 남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익히 보아 온 디스토피아를 맞지 않으려면 이 두 가지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785/97/cover150/k642930474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7859721</link></image></item><item><author>지하철 독서가</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복종 - [복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3380165/17219292</link><pubDate>Wed, 15 Apr 2026 22: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3380165/1721929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36764&TPaperId=1721929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310/90/coveroff/895463676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36764&TPaperId=1721929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복종</a><br/>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07월<br/></td></tr></table><br/>2022년 프랑스 대선에서 커다란 이변이 일어난다. 좌파와 우파가 번갈아 집권하던 정치적 전통을 깨고 극우파 마린 르 펜의 국민전선과 무슬림 이민자 층을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박애당이 결선에 진출한 것이었다. 프랑스에 정착한 무슬림들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높은 출산율을 유지했고, 이때문에 무슬림 유권자가 크게 늘어나 이슬람박애당의 세력이 확장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극우는 정체성 운동, 이슬람은 지하디스트라는 강한 폭력성을 띤 집단과 가까웠기에 결선 투표 직전의 프랑스는 그야말로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맴돈다. 파리 시내 주택가에서 정체성 운동 단원들이 기관단총을 난사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발생할 정도로 대립은 격화된다. 내전에 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br><br>하지만 이슬람박애당의 당수 모하메드 벤 아베스는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는 극단주의로 치닫지 않고 노련하게도 극우에 맞서는 대화와 중용의 정치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부드럽고 유연한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좌파인 사회당, 그리고 우파인 대중운동연합으로 하여금 연정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결정적으로 ‘하나의 유럽’을 공통적으로 주장하던 사회당과 대중운동연합은 반유럽 노선을 표방하는 국민전선과 절대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이슬람박애당은 대연정을 구성하여 결선투표에서 승리한다. 프랑스 최초의 무슬림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br><br>벤 아베스는 당선되고 나서도 유연한 기조를 유지했다. 단 두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첫째는 교육 정책의 이슬람화, 둘째는 일부다처제였다.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은 사람은 교수나 교사가 될 수 없었고, 여학생들은 모두 부르카를 입어야 했다. 교육 또한 이슬람 교리에 맞는 과목만 개설되었다. 하지만 여성 취업이 제한되면서 실업률이 개선되고, 거대한 중동 석유 자본이 투입되면서 죽어가던 프랑스 경제는 활력을 띠게 된다. 벤 아베스는 천천히 노련하게 서구 민주주의의 첨병 국가 프랑스를 이슬람화 해나간다.<br><br>소설의 주인공은 프랑수아라는 이름의 40대 불문학 교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부모와는 거의 연을 끊고 매 학기 여학생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삶을 사는 그는 자신의 인생에 지독한 환멸을 느끼고 있다. 그는 미리암이라는 유태인 여학생을 사랑하지만, 미리암은 이슬람박애당이 집권할 분위기가 되자 부모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이스라엘에 정착한다. 프랑수아는 정치적 격변이 자신의 발치까지 다가왔음을 느낀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라는 19세기 프랑스 소설가를 연구한 그는 잠시 몸을 피해 위스망스가 카톨릭에 귀의하기 위해 지냈던 수도원에서 지내기도 하고 로카마두르라는 작은 마을의 성물인 검은 성모상을 매일 찾아 상념에 잠기기도 하지만, 결국 종교는 그의 몸에 맞는 옷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할 기회를 놓쳐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미리암을 그리워하며 방황한다. 그의 사회적 삶이 끝장난 것이다.<br><br>그러던 어느 날, 파리-소르본 이슬람 대학의 신임 총장이 된 르디제가 프랑수아에게 교수직 복귀를 제안한다. 별 볼일 없던 동료 교수가 어린 새 아내를 얻고 연봉이 세 배나 오르는 걸 본 프랑수아는 이 제안에 흔들린다. 르디제 또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얻은 대가 - 거대한 저택과 열 다섯 살의 둘째 부인 - 을 은근히 자랑한다. 허무주의적인 무신론자 프랑수아는 끝내 이렇게 말한다.<br><br>“혐오스러운 붕괴의 단계에 다다른 서유럽은 5세기에 고대 로마가 그러했듯 더는 몰락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자의 복종과 선조에 대한 존경 등 여전히 자연적인 위계질서에 의해 지배되는 전통문화를 고수하는 이민자의 대량 유입은 유럽이 가족적, 도덕적으로 재무장하기 위한 역사적인 기회였으며, 구대륙의 새로운 황금시대에 대한 전망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 백성들 중엔 간혹 기독교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슬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터였다.”<br><br>요컨대 진보와 이성, 무신론이 판치는 현대 유럽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적 가치관에 기반한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이 프랑수아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프랑수아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br><br>&lt;복종&gt;은 대단히 도발적이다. 정치인과 언론인들의 실명이 거리낌없이 등장하고, 유럽인들이 근심해온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을 발산한다. 미국 내 히스패닉의 다출산 때문에 백인이 소수인종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떠는 MAGA처럼 대놓고 반이민 정서를 노출하진 않지만, 그리고 작가 미셸 우엘벡이 &lt;복종&gt;은 반이슬람적 소설이 아니라고 표명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 굉장히 찝찝하다. 소설이 이슬람 문화에 대한 평면적 클리셰로 가득 차 있어 작가가 의도치 않았더라도 무슬림에 대한 반감을 갖게 만든 것도 하나의 이유이나, 지식인 주인공이 끝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이슬람교에 ‘복종’하는 뒷맛이 무척 씁쓸하다는 게 더 큰 이유이다. 홍상수 영화를 볼때 마다 느끼는 불쾌함이랄까. 허무와 냉소로 무장하고 정치적 담론과 문학적 표현으로 자신을 포장하던 주인공이 결국 복종하게 된 계기는 “대우는 어떤 수준인가? 부인은 몇 명이나 얻을 수 있나?”라는 지극히 속물적인 이해타산이었다. 주인공이 거기서 더 나아가 여자들이 이슬람 복장으로 몸을 너무 가리고 있는데 부인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냐고 르디제에게 묻는 대목은 노골적이고 천박한 육체적 욕망이 드러나서 읽기에 민망할 지경이었다. 프랑스라는 국가의 메타포인 주인공 프랑수아가 이슬람이 제공하는 속물적 욕망에 굴복한 것이다. 자, 이래도 &lt;복종&gt;이 반이슬람적 소설이 아닌가? 우엘벡에게 묻고 싶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310/90/cover150/895463676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3109054</link></image></item><item><author>지하철 독서가</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이해찬 회고록 - [이해찬 회고록 - 꿈이 모여 역사가 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3380165/17198473</link><pubDate>Sun, 05 Apr 2026 20: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3380165/171984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42839798&TPaperId=171984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175/15/coveroff/k4428397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42839798&TPaperId=171984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해찬 회고록 - 꿈이 모여 역사가 되다</a><br/>이해찬 지음 / 돌베개 / 2022년 09월<br/></td></tr></table><br/>사실 난 이해찬이라는 정치인을 잘은 몰랐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라곤 박정희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고, 김대중 아래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국민의 정부 때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참여정부 때는 국무총리를 했다는 정도?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레거시 미디어들에 의해 덧씌워진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도 한 몫 했다. 민주당의 노회한 정치인, 교육부 장관 때 입안한 입시제도 때문에 ‘해찬들 세대’의 학력이 떨어지게 만든 원흉, 선거기획의 달인이라는 껍데기 말이다.<br><br>그가 타계하고 몇몇 방송에서 그의 후배들이 회상하는 그는 이런 이미지와 사뭇 달랐다. 유시민이, 최민희가, 김어준이 기억하는 이해찬은 그렇게 단순한 이미지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책을 사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br><br>책표지에 떡하니 있는 근엄한 사진과는 달리 그의 회고록은 무척 재미나다. 이 책 한 권만으로도 한국 현대 정치사를 개괄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다. 그리고 이 양반 보기와는 다르게 좀 ‘깬다’. 진보 진영 거물 정치인의 당연한 스펙일 것 같은 빈농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부터가 그렇다. 머리가 좋아서 명문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공부 보다는 영화, 연극, 야구를 보러 다니는 ‘문화생활’을 즐겼다. 서울대 공대를 갔는데도 단지 수업이 재미없다는 이유로 반수를 해서 서울대 사회학과를 들어가는 것도 남들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목표한 바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할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인데, 오히려 슬렁슬렁 여유롭게 살았달까. 하지만 그의 인생은 사회학과 입학 후 유신을 맞으면서 큰 변곡점을 맞는다.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br><br>그의 비범한 선택에는 아버지의 말씀이 한몫 했다. 유신이 선포되고 학교가 문을 닫으니 이해찬은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갔다. 보통의 부모라면 절대 학생운동 같은 데 기웃거리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겠지만, 이해찬의 아버지는 어느 날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4・19 일어난 지가 10년밖에 안 됐다. 이렇게 학생들이 다 사라지만 그 4・19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유신에 맞서 싸워야지 왜 집에 내려왔느냐는 일갈이었다.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이해찬은 그길로 서울로 올라가 학생운동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br><br>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학생운동을 하며 경찰에 쫓기고, 잡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힘든 수감 생활을 하고… 참으로 암담하고 우울한 나날이었을테지만 그는 타고난 유머러스함 - 보기와는 다르게 - 을 곁들여 자신이 겪었던 사건들을 담담하게 구술한다. 이해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의 담대함과 끈질김에 놀라게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지식인들과 달랐다. 아마 그가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마음에 깊이 새겼다는,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찾는다’는 명제가 이해찬이라는 사람을 정의한 게 아닐까.<br><br>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찾는다. 체 게바라의 명언이라고 전해지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갖자’는 말 만큼이나 가슴을 울리고 뇌리를 강하게 때린다. 변하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이상 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그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는 뜻. 이상만 추구하다 교조주의로 빠지기 십상인 진보 진영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br><br>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관직을 시작한 그에게 다시금 배울 점은 바로 ‘퍼블릭 마인드’다. 이해찬은 공사를 정확하고 엄격하게 구분해서 절대 공적 영역에 개인의 감정이나 이익을 개입시키지 않기로 유명했다. 조그마한 지위라도 가져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렇게 칼같이 공사를 구분한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해찬은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철저한 퍼블릭 마인드로 무장한 삶을 살았다. 고문으로 인해 건강을 해친 그가 말년에 편히 쉴 수 있었음에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직을 수행하기 위해 호치민까지 갔다가 별세한 것은 우리 사회를 위해 철저한 공인으로 살겠다는 신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br><br>이뿐만이 아니다. 그에겐 현실에서 찾은 방법으로 가치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었다. 초선 의원 시절, 아직도 서슬퍼렇던 안기부의 어마어마한 특활비를 끈질기게 추적해 만천하에 드러낸 성과나, 서울시 부시장 시절 모자란 예산을 은행과의 협상을 통해 마련한 일화나, 당대표로서 민주당을 온라인 국민정당으로 탈바꿈시켜 지금의 1인 1표제의 초석을 마련한 업적은 그의 탁월한 능력에서 기인한다. 그는 단지 ‘행동하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미래를 읽는 혜안과 계획을 구현해 내는 추진력을 갖춘 거목이었다.<br><br>이해찬이 살아 있을 적에 그의 발자취를 좀 더 세밀히 좇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그러면서도 타고난 지략과 뚝심을 갖고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를 이제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 말미에 그가 한 말, DJ가 했던 바로 그 말,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말대로 그는 살았다. 이해찬은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br><br>“운동을 하면서 실패는 해도 좌절하지는 않잖아요. 정치를 하다 보면 목표대로 성취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못한 것은 또 하면 돼요. 실패가 아니에요.”<br><br>그렇다. 이루지 못했다고 주저앉을 게 아니라 또 다시 도전하면 된다. 그렇게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고,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175/15/cover150/k44283979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1751513</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