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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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김미현 지음 | [창작과 비평 겨울호(186)]



토니 모리슨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

 

 

이번 주에 창작과비평 겨울호 특집에서 관심있게 읽었던 글은 편이 있다. 하나는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한국 SF 새로운 리얼리티에 관한 논의가 담긴 글이고, 다른 하나는 김미현 교수가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의 타계를 계기로 그녀의 문학적 유산에 대해 글이다. 나는 아직 SF장르에 대해 다소 낯선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영화 <칼라 퍼플> 통해 토니 모리슨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었기에 김미현 교수의 글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토니 모리슨은 미국 여성 흑인으로서 처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관심이 갔다. 이번에 실린 글을 통해 나중에 그녀의 작품을 읽게 맥락을 짚는데 도움을 받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지난해 여름, 토니 모리슨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적이 있다. 나는 젊은 오프라 윈프리가 노예 소녀를 연기했던 <칼라 퍼플> 어렴풋이 떠올렸다. 영화를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학창시절에 이러한 영화를 보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영화는 내게도 그러한 충격을 전달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미국의 노예제라고 하는 표현의 이면에 어떤 구체적인 삶들이 있었을지를 그나마정제된 수준에서 보여주었고, 상상할 있게 되었던 같다.

 


나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 중에서 가장 푸른 읽었던 기억만 난다. 내용의 상당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흑인과 백인 사이의 넘을 없는 근본적인 편견의 벽과 흑인들에게 내재화되어버린 자기혐오와 같은 정서들을 갑갑한 마음으로 느꼈던 기억만 남아있다. 김미현 교수의 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읽으면서 모리슨이 일생동안 일구었던 작품 세계와 노력들이 하나의 단단하고 통합된 덩어리로 다가왔다. 특히 작가에게 문학 인생은 본인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와 한시도 떨어질 없는 것이었을 테다. 그녀에게 좋은 , 좋은 예술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의식은 소속감과 정체성 확립의 문제로 이어졌을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인종주의/식민주의라는데 많은 이들이 동의할 같다. 김미현 교수는 11권의 소설을 남긴 토니 모리슨의 문학적 인생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그의 소설은 미국 흑인의 정체성, 기억과 역사, 가족과 공동체 관계에 대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이자 인종주의에 물들지 않은 언어와 비전을 찾는 과정이라 있다.”(72)

 


여기에 더하여 모리슨의 글쓰기는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단지 과거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여 이를 복원하거나 재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란 역사가의 일일 같다. 하지만 과거를 되살리는 소설가란 의지가 가해진 창조 통해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작업이라고 의미를 살피고 있다. 소설가로서 모리슨은 지금 여기 삶에 우리의 과거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었던 같다. 그렇기에 속에서의 정치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그녀의 문학 인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주목하게 다른 내용은 인종주의가 가져온 심리적 분열 대한 부분이었다. 과거부터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노예제의 가운데에는 흑인들의 자기 혐오나 흑인 내부의 심리적 갈등과 상처뿐만 아니라 백인을 포함한 모든 미국인들에게 역사의 모순과 분열의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일명 백인들의 죄의식 white guilty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백인들의 분열적 심리는 전체의 제목과 같이 인종주의/식민주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라고 이해된다. 모리슨이 이런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했다고 평가한 윌리엄 포크너 같은 작가들 외에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인종과 상관없이 인종주의/식민주의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불편해할 같다.

 


 나는 김미현 교수의 논평을 읽으면서 토니 모리슨이 일생을 통해 보여준 문학적 유산의 현재성은 미국 사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종주의/식민주의 식민지의 기억을 갖고 있는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작품을 나는 흑인 말고 다른 이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78)라고 언급했지만, 말은 흑인만이 중요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것이다. 작가로서 모리슨은 본인이 가장 알고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이 흑인/흑인문제 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리슨은 인종주의 문제의 관점에서 천착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모리슨이 지니고 있던 문제의식이 바로 우리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모리슨이 남기고 유산을 우리의 문제에 대입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재일한국인 서경식 교수가 여전히 일본사회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민주의 문제삼는 일은 모리슨의 문제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리슨의 현재성은 한일 무역분쟁의 이면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식민주의 잔재를 이야기할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러한 인종주의/식민주의 대한 기억은 보다 분명한 소속감 정체성 범주에 있었다고 있다. 그런데 문제를 세계화 문제와 결부시켜보면, 다소 혼란스럽다. 세계화과정에는 국경과 국제법 전통적인 영역의 경계 약화시키는 과정이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가 다양성의 측면 보다는 문화적, 언어적 차이와 정체성을 무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점은 새롭게 유발되는 타자(혹은 낯선 ) 대한 공포와 배제기작이 더욱 강화되지 않을지 우려가 되는 사항이다. 난민 문제를 떠올려보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현대의 난민 문제는 세계화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게 문제는 고민과 판단이 필요할 같다.     

 


이번 특집을 통해  궁금했던 토니 모리슨의 작품과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장 학자가 이해하는 소설가의 문학 인생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와 의의를 지니는지 엿볼 있었다. 김미현 교수가 조명한 모리슨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소개를 통해 나는 넓은 의미에서 예술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모리슨에게 문학이란 삶과 결코 분리될 없는 기억하기이므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의 글쓰기는 이러한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예술가는 과거의 기억과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무던히 되돌아가고 바라봄으로써 끊임없이 의미를 묻고 이에 응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리슨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준 성찰은 행동과 변화에 대한 기대도 품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리슨은 이러한 노력들이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에 놓인 언어라는 새의 운명은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앞으로 모리슨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그가 남기고간 문학적 유산을 떠올리며 읽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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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26-35, 197-263)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적막한 대서양으로 운명처럼 무작정 내던져진피쿼드호의 구성원들에 대한 소개와 고래학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모비딕 출간된 정확히 120년이 지난 해에 커피전문점의 상호명으로 다시 세상에 주목을 받게된 일등항해사 스타벅. 그는 양심적이고 자연에 깊은 경외심을 가진퀘이커 교도 집안의 남자이다. 아울러 상당히 조심스럽고, 고래에 대한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다. 그의 고래사냥 철학은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포경 보트에 태우지 않겠다”(198)라고 말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키가 호리호리한 체격에 단단한 살집으로 묘사되는 스타벅의 모습은 록웰 켄트의 상상력으로 재탄생했다(199). 그는 이슈미얼과 단짝이었던 퀴퀘그를 작살잡이로 선택했다.

 


다음  이등항해사 스터브 역시 미국 코드 태생으로 침착하고 쾌활하며 파이프 담배를 잠시도 놓치 않는 골초로 묘사된다. 멜빌은 스터브라는 인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스터브의 담배연기도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시련에 대한 일종의 소독약 역할을 해주었을지 모른다.”(205) 스터브는 순수 혈통 인디언인 타시테고를 자신의 작살잡이로 뽑았다. 타시테고는 길고 가느다란 검은 머리에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검고 둥근 눈을 가진 게이헤드 사나이 설명되어 있는데, 록웰 켄트의 그림으로는 207면과 왕성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253) 등장하고 있다. 207면에서는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스터브의 모습도 그림에서 찾아볼 있다.

 


다른 항해사인 플래스크는 미국 마서스비니어드 출신으로 키가 작고 다부진 몸집에 혈색이 좋은 남자다. 성격은 스타벅과 매우 상반된 인상을 주는데, 자연을 경외하는 스타벅과 달리 재미로 고래를 추격하고 고래에 호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에 가까운 대담무쌍함을 지닌 것으로 나타나며, 그에게 고래사냥은 장난거리인 셈이다. “그의 짧은 소견에 의하면, 경이로운 고래란 일종의 커다랗게 확대된 생쥐이거나 고작해야 물쥐 정도에 지나지 않은 존재이므로, 고래를 죽여서 끓이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계략으로 고래를 속인 약간의 시간과 수고만 들이면 되었다”(205)라는 표현에서 플래스크의 고래사냥 철학과 그의 성격을 짐작해볼 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는 적어도 켄트가 상상한 플래스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찾을 없었다. 플래스크는 자신의 작살잡이로 흑인 다구를 선택했는데, 귀에 커다란 황금귀걸이(링볼트라고 불리는) 다구의 모습은 203면에서 있었다.

 


이번 독서에서 드디어 에이해브 선장이 등장한다. 향유고래의 턱뼈를 갈아 만든 의족을 그는 얼굴에 줄무의의 낙인이 있다. 선장의 음울한 모습을 묘사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34, 264면의 그림 참조)

 

기분이 매우 언짢은 에이해브는 무슨 십자가에라도 매달린 사람같은 표정으로 그들 앞에 있었는데, 강력한 비애는 뭐라 말할 없이 장엄하고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213)

 

에이해브 선장에 대한 이슈미얼의 묘사는 역시 관찰을 통해 다양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번은 그를 헐벗고 울퉁불퉁하고 벼락에 쪼개 늙은 참나무”(214) 비유하기도 하면서, “에이해브야말로 갑판 위의 , 바다의 , 리바이어던의 위대한 지배자”(220)라고 언급하며 모순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추운 크리스마스날 낸터킷을 떠난 피쿼드호가 적도부근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여러 주요 인물들에 대한 소개를 하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멜빌은 32장에서 고래학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고래들에 대해 서지학적인 체계로 분류를 시도하고 있다. 멜빌은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자신이 포경선을 타본 경험 뿐만 아니라 상당한 문헌들을 조사하려고 노력했던 정황을 소설에도 남겨놓았다. “하지만 나는 도서관들을 헤엄쳐 다녔고 대양을 항해하고 다녔다. 나는 손으로 고래들과 명백히 관계를 맺었다.”(228) 허먼 멜빌은 모비딕 당시(1850), 자신의 방에 두문불출하며 하루종일 책을 읽은 정황을 있는데, 항해와 고래, 린네의 분류학, 포경업 등에 대한 수많은 도서들을 함께 읽었음이 분명하다.  모비딕 다른 영미 소설들과 다른 특징을 꼽으라면 이런 괴팍한장들을 우선 떠올려볼 있겠다.

 


259면에는 소설의 화자인 이슈미얼이 돛대 꼭대기에서 망을 보는 그림이 나온다. 이슈미얼은 켄트의 상상에 의해 돛대 꼭대기에 설치된 나무 발판에 올라서서 돛대와 철제 링난간에 기대어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있다. 이슈미얼은 자신을 형편없는 망꾼, 눈이 퀭한 젊은 플라톤주의자(얼빠진 철학자) 표현하고 있다.

 

얼빠진 젊은이는 파도와 상념이 만들어낸 운율에 취해 멍하고 무의식적인 몽상이 가져다주는 아편 같은 나른함에 빠져들고 만다. 그리하여 급기야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발아래 펼쳐진 신비로운 대양을 인류와 대자연에 충만한 깊고 푸르고 끝없는 영혼의 가시적 이미지로 받아들여버린다.”(262)

  

록웰 켄트는 바로 이러한 멜빌의 묘사를 간결한 선으로 표현했다. 잔잔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지닌 이슈미얼이 망망대해의 외딴섬인 피쿼드호의 꼭대기에 올라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한편 선원들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짧게 지나치는 인물 중에는 앨라배마 출신의 흑인 소년 있다. 그런데 역시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암시를 작가는 잊지 않았다. “ 세상에서는 겁쟁이로 불렸으나, 세상에서는 영웅으로 찬양받는구나!”(209) 멜빌은 피쿼드호와 구성원들의 운명을 이렇게 곳곳에 보물찾이 놀이하듯 숨겨두고 있다.

 


모비딕 지니는 다른 특징은 멜빌이 소설의 곳곳에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자칫하면 글의 진행이 지루해질 우려도 있겠지만, 역시나 사회에서 길어내고 있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할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피쿼드호의 나머지 선원들에 대해서는, 오늘날 미국의 포경업계에 평선원으로 고용된 수천 명의 사람들 미국 태생은 하나도 되지 않는 반면, 간부 선원들은 거의 미국인이라는 사실만 말해두도록 하자. 점에서 미국 포경업계는 미국의 육군과 해군과 상선, 미국의 운하와 철도 건설을 위해 고용된 토목 기술자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다를 바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경우에서 미국 토박이들은 관대하게 머리를 제공하고, 나머지 나라 사람들은 아낌없이 근육을 공급하기 때문이다.”(208)

 




재미있는 대목

 

선원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겁많은 찐빵이라는 인물이 거친 작살잡이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희화하 대목이다.

 

아아! 찐빵이여! 백인 웨이터가 식인종의 시중을 들다니, 얼마나 모진 운명인가. 그는 팔에 냅킨을 걸칠 아니라 둥근 방패를 들어야 한다.”(262)

 

노예제를 찬성하던 미국인들에게는 상당히 거슬리는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멜빌이 누구인가. 성경의 문구든, 이교도의 역사이든 아니면 셰익스피어나 바이런의 시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 비틀고 패러디해버리는 낯설게하기의 대가 아닌가. 당대의 현실에서와 반대로 소설 속에서는 백인과 이교도 식인종의 지위를 뒤바꾸어 버렸다. 오늘 읽은 부분이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었다. 모비딕 읽기에 중독성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지점들이 아닐까 한다.

 

 


흔들리는 돛대 꼭대기에서 망을 보고 있는 이슈미얼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지금 그대가 지닌 생명이란 부드럽게 굽이치는 배가 나눠준 흔들리는 생명일 따름이다. 배는 바다에서 빌려왔고, 바다는 신의 헤아릴 없는 조류에서 빌려온 바로 생명 말이다.”(263)

 

소설 화자는 망을 보다 잠시 졸아 떨어지지 말라는 당부도 덧붙이고 있다. 바다로 떨어지면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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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16-25, 133-196)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낸터킷 섬에 도착한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타게될 포경선을 고르고 마침내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부분이다. 출항 이슈미얼은 포경업에 관련된 모든 이슈를 다룰듯한 기세로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미국의 포경업을 일군 퀘이커 교도들에 대한 이야기나 이를 중심으로 종교와 현실세계의 충돌과 화해의 문제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  모비딕 만을 놓고 보면, 작가 멜빌은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예언적 징후들


어쨌든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척의 포경선 중에서 선택한 배는 피쿼드 였다. 본문에 따르면 피쿼드 고대 메디아왕국처럼 절멸한 매사추세츠의 유명한 인디언 부족 이름”(134)이었고, 배의 선장은 성경에서 아합(Ahab)이라고 하는 에이해브 선장이었다. 구약성서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폭정을 일삼았던 아합왕을 떠올리게 하는데, 피쿼드 호의 선주 펠레그 선장과 대화하던 이슈미얼은 눈치없이 아합왕에 대한 진실을 내뱉는다.

 

그는 에이해브란 말이지. 그리고 그대도 알다시피 옛날에 에이해브는 왕관을 왕이 아니었겠나!

게다가 몹시 나쁜 왕이었죠. 사악한 왕이 살해됐을 개들이 그의 피를 핥지 않았던가요?” (149)   

 

한편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피쿼드 호에 승선하기 전에 에이해브 선장에 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하며 횡설수설하기도 하는 낯선 사람이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일라이자라고 말하는데, 일라이자는 역시 구약성서에서 아합왕의 파멸을 예언했던 엘리야를 가리킨다.

 

내가 말했다. ‘이리 , 퀴퀘그. 이런 미친놈한테서 벗어나자고. 그런데 잠간, 당신 이름이 뭐요?

일라이자”(169)

 

이쯤하면 이미 여러 곳에서 피쿼드호의 운명에 대해 불길한 징후를 심어두었다고 의심할만하다. 피쿼드호에 오르는 사람들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는 뉴베드퍼드에서 만난 적이 있던 벌킹턴이란 사람에 대해 기술하는 (23) 등장한다. 이슈미얼은 피쿼드호의 키잡이로 자리잡고 있는 벌킹턴을 다시 보며 짧은 ()이야말로 벌킹턴의 비석 없는 무덤이다.”(186)라며 한번 불길함의 실마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 멜빌은 앞으로 피쿼드호 사람들이 맞게 거대한 비극적 사건에 대한 복선을 예비하고 있다.

 


낯설게 보기의 대가, 허먼 멜빌


앞선 읽기에서 작가 멜빌은 어느 하나의 대상, 혹은 현상에 대해 표면적 모습과 이면의 모습 모두를 대등하게 놓고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언제나 하고 있었다. 오늘 읽은 범위에서도 이런 부분들이 심심치않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에게는 익숙할 성경 구절을 비틀어서 소설 장면을 설명 또는 묘사하곤 한다. 퀘이커 교도들에 대한 칭찬과 인정을 보내고 있는 반면, 종교와 현실세계와의 모순적인 현상을 언급하기도 한다.

 

빌대드 선장에게는 평범한 일관성이 조금 결여되어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이유로 육지에서 침략자들에게 무기를 들고 맞서길 거부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끝도 없이 침략했다. 또한 인간의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은 하지 않겠노라 맹세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일자형 코트를 입고 리바이어던의 피를 통씩이나 끝도 없이 흘려보냈다.”(142)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고래잡이들을 백정이라고 무시하지만, 정작 군대 사령관들은 가장 피비린내나는 훈장을 백정이라고 표현하며 인간 사회의 모순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전체 소설 거의 4분의 1 분량이 특별한 사건 없이 지나가고 있으면서도, 작가 멜빌은 여전히 인간과 사회에 대해 비틀어보고 낯설게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슈미얼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생각해보자. 문제를 온갖 종류의 저울에 달아서, 우리 고래잡이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지금껏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190)

 

내가 이러한 시도는 모비딕 지니고 있는 보이지 않는 형식 내지는 작품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작가 허먼 멜빌이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의 근간이라고 말이다.

 

 

기타 흥미로운 구절들

 

점을 명심할지어다.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란 한낱 질병에 지나지 않음을.”(141)

 

지옥이란 사과 덤플링을 먹고 체한 사람이 처음으로 떠올린 개념이며, 후로 라마단 때문에 대물림되는 소화불량을 통해 불멸의 개념이 되었다고.”(158)

 

포경선이야말로 나의 예일대학이자 나의 하버드대학이었으므로.”(194)


“이 점을 명심할지어다.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란 한낱 질병에 지나지 않음을.”
- P141

“지옥이란 사과 덤플링을 먹고 체한 사람이 처음으로 떠올린 개념이며, 그 후로 라마단 때문에 대물림되는 소화불량을 통해 불멸의 개념이 되었다고.”- P158

“포경선이야말로 나의 예일대학이자 나의 하버드대학이었으므로.”-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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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11-15, 110-132)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킨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로 월요일 새벽부터 낸터킷 섬에 상륙한 날까지의 장면이다. 앞의 독서에서 작가 허먼 멜빌은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11(잠옷)에서 보다 분명한 사례를 통해 드러난다. 화자인 이슈미얼은 몸의 온기를 제대로 향유하려면 어딘가가 반드시 추워야만 , 그러므로 세상 모든 특성은 오로지 대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라고 이야기한다. 작가의 이런 시각은 비교적 부유한 수입상인의 아들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그가 일찍 사망한 가세가 몰락했던 경험에서도 찾을 있을 같다. 이런 삶의 양태를 멜빌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몸소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빛과 어둠의 대조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역시 이어진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에는 빛이 어울리지만, 실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바로 어둠이라는 듯이 말이다.”(111)


 

이런 대목에서도 엿볼 있듯이 멜빌은 현상의 양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판단하려는 의식을 가진 인물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여기에서 과감하게덧붙이자면, 소설에서 이슈미얼에게 익숙한 기독교-단일신-일원론적인 세계와 퀴퀘그에게 익숙한 이교도적 이원론 세계가 서로 부대끼고 섞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 멜빌은 남자의 침대를 상정한 것이라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멜빌은 기독교적 세계와 이교도적 세계를 나란히 놓고, 이를 대등한 것으로 들여다보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비딕 영미문학의 유명한 비극 소설이긴 하지만, 남자의 브로맨스 통해 가지 세계가 소설 속에서 희극적이고 상징적으로 화해하고 있다라고도 생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오독은 나의 자유이자 나만의 감상이니까. 물론 이렇게 상상해보는 것은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근거를 가질 시도해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비딕 바다 위에 길이 있지 않은 것처럼, 나의 엉뚱한 상상을 자유롭게 이끌어주는 힘을 지닌 소설이기도 하다


 

13(외바퀴 손수레)에서 이슈미얼-퀴퀘그 부부 낸터킷 소형 정기선 모스(the Moss) 타고 바다로 나간다. 장면에서 이슈미얼의 감상이 인상적이다


 

보다 넓은 바다로 나오자 점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고, 조그만 모스호는 어린 망아지가 코를 힝힝거리듯 뱃머리에서 재빠르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야만적인 공기를 나는 얼마나 마음껏 들이쉬었던가! – 도로로 뒤덮인 땅을 나는 얼마나 경멸했던가! – 온통 노예의 뒤꿈치와 말굽에 움푹 자국들뿐인 흔해빠진 도로를 말이다. 도로가 나를 어떤 흔적도 남기길 거부하는 바다의 넓은 아량에 감탄하는 사람으로 뒤바꿔버렸다.”(121)     

 


대목에서는 노예제 반대하는 작가 허먼 멜빌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이문장에서는 일부의 자괴감도 느껴지는데, 그건 혁명을 꾀하는 이의 자의식이라기 보다는 노예제라는 불가항력에 압박감을 느끼고, 이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로서의 모습이다. 하지만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은 노예와 말의 노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바다는 멜빌의 분신인 이슈미얼에게 보다 매력적인 공간이었던 것이 아닐까. 상선과 포경선, 해군으로 젊은 시절 여러 해를 바다에서 보낸 멜빌은 자신이 속한 문명과 대양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고해볼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백인의 기독교 문명과 이교도적 원시 문명 사이에서 멜빌이 설정하고 있는 대립적 요소는 소설의 곳곳에서 계속 발견된다. 낸터킷 모스호에서 퀴퀘그는 추운 겨울 바다에 떨어진 백인 촌뜨기 명을 바다에서 구해냄으로써 자신을 무시하던 선장과 놀리던 다른 백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물론 퀴퀘그는 자신이 일을 당연히 해야할 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바다에 빠진 백인은 퀴퀘그에겐 먹이감 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똑같이 위험에 처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다. 앞선 독서에서 이슈미얼이 퀴퀘그에게서 어떤 고결함의 징후를 발견했다면, 단서는 이런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이슈미얼은 다음과 같이 이질적인 문명 세계에 대한 대조 곁들이며 위에서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한다.

 


마치 세상은 어느 자오선에 있든 서로의 공동 자본으로 세워진 거야. 우리 식인종도 너희 기독교인을 도와야만 라며 혼잣말을 중얼대는 듯한 모습이었다.”(123)

 


배를 타고 오래 세계를 누볐기 때문일까, 멜빌은 자신이 속한 사회, 자신이 익숙한 모든 것과의 차이 느끼기에 매우 민감한 감각기관을 지닌 작가인듯하다. 모비딕 앞부분에 인용되어 있는 발췌문 중에서 멜빌은 몽테뉴의 수상록 읽은 정황을 찾아볼 있는데, 소설을 읽어가면서 멜빌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마치 몽테뉴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우연하지 않은 필연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생각을 밀고 나간다면, 열하일기에서 연암 박지원이 보여주는 사물 인식, 현상에 대한 접근법과도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며 점점 놀라게 되는 것은 모비딕 바다처럼 활짝 열린 텍스트 내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문학평론가가 보는 모비딕 문학사적 의의와 위치가 어떻든 내게 소설은 상상력의 씨앗을 소설의 전반에 걸쳐 풍요롭게 심어 놓은 소설로 다가온다.

 


그리고 14(낸터킷)에서는 대서양에 떠있는 낸터킷이라는 섬과 역사에 대한 멜빌의 애정과 찬사가 느낄 있었다. 물론 멜빌이 소설을 쓰던 1850 즈음에 낸터킷 섬은 이미 포경기지로서의 주도권을 뉴베드퍼드에 넘겨주었지만 말이다. 아니, 그렇기에 멜빌은 소설의 화자, 이슈미얼이 반드시 낸터킷에서 출발하는 포경선만을 타겠다 결심하도록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을 쓰던 당시에 낸터킷은 이미 쇠락의 징후가 뚜렷한 곳이었지만, 미국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를 멜빌은 소설에서나마 기억해두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작가가 살았던 당대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타임캡슐인지도 모르겠다. 낸터킷 섬과 섬사람들의 호연지기 대한 멜빌의 애정을 보여주는 다음 대목도 흥미롭게 인상적이다.

 


육지와 물로 지구 전체의 삼분의 이는 낸터킷 사람들의 것이다. 바다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제국을 소유하듯 그들은 바다를 소유한다. 다른 선원들은 오직 그곳을 지나갈 권리만을 가질 뿐이다.”(127)      

 

 

제13장에서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소형 정기선 '모스'호(the Moss)를 타고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킷 섬으로 향한다. 

제14장의 제목이기도 한 '낸터킷' 섬. 화자 이슈미얼은 이 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저 작은 언덕과 굽이진 모래사장만으로 이루어진 그곳을. 온통 해변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다."(1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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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10, 103-109)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일러스트 모비딕10장에서는 예배당에 다녀온 식인종 퀴퀘그와 이슈미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퀴퀘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인물 정보가 소개됨과 동시에 이슈미얼과 보다 본격적인 브로맨스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슈미얼은 바로 기이한 문신 너머로 소박하고 정직한 마음의 흔적 퀴퀘그를 통해 발견합니다. 심지어 이교도의 몸가짐에서 고결함까지 느끼며, 새로운 친구의 모습에서 조지 워싱턴의 모습을 찾아낼 있다고 말하구요. “퀴퀘그는 조지 워싱턴이 식인종으로 변한 모습”(105)이라고 말하며 이슈미얼은 이교도 친구에게 마음이 끌리기시작합니다. 기독교인들의 허례와 겉치례를 떠올려보면, 퀴퀘그를 통해 투박하지만 진실한 모습을 이슈미얼은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이교도와 장로교 신자인 이슈메일이 종교의 벽을 허물고 진실한 친교를 맺는데,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나자 그는 자기 이마를 이마에 갖다대더니 허리를 껴안은 이제 우리는 결혼한 거라고 말했다. 그의 고향에서는 말이, 이제 우리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만일 그럴 일이 생긴다면 기꺼이 나를 위해 죽겠노라는 의미였다.”(106



이제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유쾌하고도 정다운 흡연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퀴퀘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은화들을 반으로 나누어 이슈미얼의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어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작가 멜빌이 이쯤에서 끝내지 않고 이슈미얼을 통해 숭배의 의미 되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숭배란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므로 성경의 가르침 대로 이웃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내가 이웃에게 해주는 행하면 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죽음만이 사람을 갈라놓을 있는 친구가 이상, 퀴퀘그가 자신의 방식대로 숭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여 이교도의 의식을 숭배할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성경의 논리를 이용한 돌려치기 수법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슈미얼의 행동은 (제가 판단하기에)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다르게 바라보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내일은 하루종일 읽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짧게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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