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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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고통을 설명할 언어는 없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을유문화사] (2023)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타인과 비교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자녀를 지켜본 몇 가지 생리적 현상이나 습관, 기질에 대해서만 적용될 뿐이다. 적어도 자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나이라면, 이미 부모의 이해 범주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0여 년 전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던 총기 난사 사건이다. 당시에 총기와 폭발물을 들었던 가해자 2명은 이 학교를 다녔던 10대 청소년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언론 매체는 가해자들을 괴물이라고 표현하며 이들의 어린 시절을 파헤쳤다.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문제가 될 만한 기록을 찾지는 못했다. 가해자들의 부모 역시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자도 아니었고, 자녀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에 대해 무관심한 냉혈한이었을까? 전혀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주변 이웃들의 평가에서도 사건의 원인이나 동기가 될 만한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뉴스를 지켜보던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무자비한 폭력이 발생한 원인을 지목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했던 기억이 난다. 무난한 환경에서 자랐던 아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사례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서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은 바로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책이다.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10대 시절 붕괴하기 직전까지 소련(현재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지역)의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고,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한 가정의 일원이다. 국경이라는 거대한 경계를 넘고 너무나 다른 삶의 조건과 마주하게 된 저자는 그만큼 외부 세계에 대해 예민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가 성장한 환경 또한 그가 본능에 가까울 만큼 인간의 삶과 운명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체득하게 한 조건은 아니었을까. 저자의 글쓰기는 그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감지하는지, 세계가 그에게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경계를 넘은 경험을 가진 사람의 낯선 글쓰기인 셈이다. 낯설지만 그만큼 굳어진 독자의 시각을 유연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저자가 만난 여러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다룬다. 때로는 고통 받는 당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그들의 내밀한 속내도 듣게 된 듯하다. 내가 이 책에서 우선 주목한 부분은, 우리의 삶이 지극히 취약하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지역에 뿌리를 두고 활동하는 변호사로서, 가난하고 미약한 이들을 위해 변론하던 밴더와의 교류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조금 더 열어 보여준다. 삶 자체가 취약한 이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묻는 이도, 들어줄 이 마저 없었다. 이들은 관공서에서 처리할 안건으로 분류되었을 뿐이다. 당사자들은 아무에게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110) 이들은 침묵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이유다. 도움이라는 이름하에 이들의 고통과 슬픔은 공개되고 관리 받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은 왜곡되고 훼손되기 시작한다. 저자가 보여주는 여러 사례들은 우리가 어느 순간에라도 삶이 철저히 망가져버릴 수도 있음을, 그리고 특히 더 취약하고 더 큰 타격을 받는 이들이 있다는 현실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저자는 이처럼 취약한 사람들, 다시 말해 벌거벗은 상태로 완전한 외로움 속에 버려진 사람들에 대해 주목한다. 저자는 취약한 이들’, 그러니까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보호를 자처한 이들로부터 배신을 겪은 이들, 상처와 슬픔이 평생 트라우마가 된 사람들, 그리고 이를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과 고립감으로 고통 받은 이들의 사연을 듣고자 했다. 그는 이들이 지닌 고립감을 우주적인 외로움’(183)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나는 여기서 취약한 이들이라고 표현했지만, 저자는 나에게 한 가지 경고를 덧붙이는 듯 했다.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194)


 

그러니까 저자가 내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지점은, 취약한 이들(사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해당되기도 한다)이 경제적 어려움만으로 죽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재난적인 어떤 상황이 닥치게 되면, 사후 발생하는 고통과 슬픔을 말하거나 풀어 놓을 기회가 없다는 이유로도 사람들은 죽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극심한 상실의 슬픔을 놓아둘 애도의 공간이 없어서, 법원이나 공권력이 멋대로 단정하고 요약해버리는 행위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대상이 없어서 죽기도 한다는 것이다. 제도적·구조적인 절차만 마련한다고 이런 상황이 해결될 수는 없다. 개인들이 하나의 처리대상이 되거나 하나의 상징에 머물지 않으려면, 이들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저자는 이를 의도적인 무지라고 말하고 있다. 애써서 묻지 않는다면 결코 조금도 알 수 없다. 인간의 취약함은 애도의 부재와 이를 말하거나 설명할 적절한 언어의 부재로 의도적인 무지가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자가 덧붙이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 처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고통에 관한한, 인간은 언제나 미처리된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재난과 같은 현실이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를 바꾸어 가며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강하게 운명에 묶여 있다는 감각, 다르게 말해 개인에게 역사가 되풀이 되는 상황은 우리를 무력감에 빠뜨리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저자는 이 과거라는 것이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244)와도 같다고 말한다. 물을 열면 아무도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언제나 존재하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유령처럼. 저자가 보기에 과거는 고체가 아니기’(252) 때문이다. “그것(과거)은 보이지 않고 냄새도 색깔도 없는, 폐 속으로 들어와 그 안을 온통 헤집어 놓는 독성 화학 기체”(252)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고통으로 내상을 입은 이들에게 과거는 트라우마의 형태로 영원히 찾아온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당사자의 슬픔과 고통을 내려놓을 애도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반복되는 과거의 습격에 조금은 다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저자의 말하기가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이 책의 특징을 어떻게 파악하며 읽어야 할지 처음엔 난감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저자의 관점을 깨닫게 된 것은 그가 타인의 삶에 벌어진 일들을, 여러 사람들과 끊임없이 지켜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이 책의 표지나 각 장의 시작마다 제시된, 각기 다른 각도로 찍힌 암석 사진들처럼 말이다. 마치 이러한 모양으로 생긴 암석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212)는 점이다. 나도 책에 소개되어 있는 다양한 사례들을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된다. 이들에 대한 인상을 규정하기 전에 뭔가 다른 이유나 원인이 있었을까?’를 의심해보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다른 사정들을 설명해주며, 나에게도 섣부른 언어로 규정하지 말고 판단중지를 먼저 요청하는 듯 했다.

 


저자는 인간의 삶에 대해 운명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전자 혹은 가정환경과 같은 조건이 운명을 정하는 결정론자도 아니다. 다만 인간은 우주 속의 고아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저자는 인간 개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만 극히 일부라도알 수 있다는 입장에 가깝다. 사실 인간에게 씌워진 굴레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우리를 줄곧 끌어당기는 중력장처럼 우리의 인생행로에도 영향을 미친다.

 


책에 소개된 사례 가운데 20세 즈음 아버지의 자살을 겪은 아들 마틴의 이야기가 있다. 저자는 마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삶, 부모의 고난이 되풀이되려는 삶과 부단히 맞서며 살아가는 인물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 같다. 심지어 유전의 힘으로 아버지와 판박이처럼 닮은 외모는 마틴이 운명에 묶여 있다는 감각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저자는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으로부터 분리되려 애쓰며 부서진 삶을 추스르는 한 남자를 지켜보며 가슴아파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조금은 다를 수 있다는 생각, 혹은 희망이 남아 있다면, 마틴이 아버지의 나이에 다다른 시점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235)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Axiomatic이다. 이 단어에는 자명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이 제목은 우리가 타인의 사정에 있어서 자명한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환기시켜주기 위한 반어법인 것이었을까 싶다. 자명해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결코 언어로 말해질 수 없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부각시켜주는 제목은 아니었을까 싶은 거다. 이 해석이 너무 억지 같다면, 조금 다르게 해석해보자.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타인의 곁에 있어주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공리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이해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타인을, 혹은 타인의 고통을 대할 때 기초가 되는 공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지극히 취약한 존재임을 우선 알아차리는 일부터 시작해볼 수 있겠다. 불시의 재난, 불시의 죽음은 대상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장 아메리가 언급한 애도와 기억의 윤리성에 대해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저자는 책에서,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92)이라고 한 아메리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 고통을 마주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 기회, 이를 통해 고통을 조금은 덜어놓을 수 있는 기회, 곧 애도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되짚어본다. 우리가 당사자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때로 우리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들의 곁에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뱉어내는 언어를 들어줄 사람 말이다. 곁에 있어주는 이들의 역할은 당사자들의 곁에서 함께 하고, 당사자들이 결코 지워낼 수 없는 고통을 결국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독자에게 고통은 언어로 번역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동물원(C)초란공(현상/아날로그인화/스캔)





"인간의 삶은 언제나 숲속의 새 두 마리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포착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본문 3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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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1] "잊으려 애쓴다고 정말로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와 달리 학교의 제도적 기억 속에는 자살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34)

[2] "나는 어느-청소년의 시신을 검시하는-검시관으로부터 젊은 사람들은 최종성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무도 많은 일이 시행착오일 수밖에 없는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한번 죽으면 우리는 영원히 죽은 채로 남는다는 사실을, 어떤 일들은 지울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64)

[3] "나는 우리가 왜 죽은 이들을 살려 놓으려 애쓰는지 안다. (...) 우리가 그들을 살려 놓으려 애쓰는 건 그들을 우리 곁에 두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살려면 죽은 이들을 단념하고, 그들을 보내 주고, 죽은 채로 있게 두어야만 하는 시점이 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71)
- 조앤 디디온의 말

[4] "아메리 Jean Amery는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92)

[5] "물론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만약 물어봤더라면, 저는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대답했을 거예요."(110)

[6] "인간들은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그 고통이 참을 수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모든 선택지가 사라져 버리는 순간은 언제 찾아올까? 철조망 속에 갇힌 상황에서는 어디로 움직여야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112)

[7] "소년이 처해 있던 곤경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행위 역시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그 의도적인 무지는 어느 정도는 행정 구조적 문제였고, 어느 정도는 관료주의가 지닌 문제였고, 또한 과부하에 걸려 비틀거리던 청소년 구호 체계자체의 문제이기도 ... 아니, 좀 다르게 말해 보자. 그 체계는 좆나게 많은 애들 때문에 포화상태에 다다랐고, 결국 그 애들을 인간답게 대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122)

"이 사건을 둘러싼 의도적인 무지. 이것은 제도의 실패이며 문화의 파산이다."(135)

[8] "그때 그(옐레나 포포비치)는 치안 판사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이해하게 된 게 있다고 말했다. 바로 자기 앞에 출두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그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처한 ‘위기’ 속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150)

[9] "오스트레일리아 남성들은 자동차 사고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요. 저는 이렇게 썼어요. 각자 집으로 가서 집에 있는 남자들을 끌어안아 주자고요. 그들은 종종 우리한테 속마음을 말하지도 못한다고요. 그러니까 말해 달라고 하지도 말고, 말해 줄 거라는 기대도 하지 말고 그냥 곁에 있어 주자고요."(165)
- 지역 변호사 밴더의 말

[10] "내가 ‘미처리’라는 표현을 처음 들은 건 킴벌리 지역의 사막 근처에서였다. 그곳에서 ‘미처리’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들이 사는 땅의 현실을 설명해주는 말이다. 그 땅에서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장례식이 치러진다. 살아 있는 이들에게 죽은 이들을 애도할 시간을 주지 않는 현실. 그런 현실은 내부로부터 붕괴하면서 일종의 기능 마비를 일으키며, 그 마비 또한 타르 구덩이 속에 들어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다."(169)

[11]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194)

[12] "레이먼드 게이타가 말했듯, "고통에 취약하다는 우리의 특성을 슬픔 속에서 알아채는 일"이 "죄에 어울리는 처벌을 하라"는 슬로건보다 더 나은 행동 지침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취약함. 고통에 대한 취약함. 우연에, 불운에, 유전자에, 당신이 태어난 가족에, 당신이 사는 지역에 대한 취약함."(202)

[13] "한 인간에 관한 사실들은 대개 타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중 대부분은 애초에 타인들이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무시하면 타인들은 곧 상징의 집합체로 변해 버린다.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만 골라 담은 물통으로, 일종의 도구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의 어떤 점이 우리와 다른지 알아차리는 것이며, 또한 그 다른 점을 굳이 비틀어 숭고함에 가까운 무언가로 왜곡하지 않는 것이다."(212)

[14] "우리(저자와 변호사 밴더)는 하늘에 떠 있는 한 쌍의 풍선 같다. 그 풍선 안을 채우고 있는 건 헬륨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니다.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우리를 대기 속으로 더 멀리 밀어낸다. 때가 되면 우리는 스파게티 면발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풍선 조각으로 변해 땅으로 되돌아올 것이다."(215)

[15] "‘자살 유전자’는 ‘연쇄 자살’보다는 어감 상 더 쉽게 와 닿는 표현이지만, 여전히 나는 이 단어를 접할 때마다 움찔한다. 자살이 남길 수 있는 것들을 멋대로 요약해 버리는 무리하고 어설픈 언어들은 진짜 언어가 나타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세워진 대역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리저리 목을 꼬며 기다리지만 진짜 언어는 여기 없다."(231)
- 언론이 시인 실비아 플라스와 아들 니콜러스 휴즈의 자살에 대해 ‘자살 유전자’라는 표현을 쓰며 소비하는 것에 대해 저자가 한 말.

[16] "마틴은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신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챙겨 주지만 감정적으로 곁에 있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35)
- 20세에 아버지의 자살을 경험했던 마틴의 사례.

[17] "마틴이 맞서고 있는 문제, 즉 부모의 고난이 자식에게서 다시 되풀이된다는 그 문제는 하늘의 별들이나 율법을 써넣은 서판이 전해 주는 숙명처럼 절대적이지는 않다."(239)

[18] ""과거는 현재를 빚어낸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빚어낸다? 그보다는 과거가 현재 안으로 스며들고, 물들고, 불어넣어지는 것에 더 가까울 것 같다. 과거는 고체가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냄새도 색깔도 없는, 폐 속으로 들어와 그 안을 온통 헤집어 놓는 독성 화학 기체다."(252)

[19]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에서도 곧잘 발견되는, 인간은 타인을 조금도 알아낼 수 없다는 끔찍한 사실의 피해자."(280)
-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부모와 인터뷰한 앤드류 솔로몬이 남긴 말.

[20] "동시에, 당신은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대화는 오직 몇 명의 동료 생존자들과 함께일 때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이 아는 것은 언어로 옮길 수 없고, 따라서 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전체 경험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당신이 그것을 말해 버리면 남들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당신은 말하거나 침묵하기를 스스로 택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을 배신하게 된다. (...) 이런 말하기는 사람을 소진시키고 텅 비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은 너무나도 무거운 부담을 지는 작업이며, 심지어 그 서사 자체도 극심할 정도로 가혹하다."(327)

[21] "인간의 삶은 언제나 숲속의 새 두 마리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포착(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일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언뜻 보기에는 친절하게 느껴진다)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타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가리키는,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친절한 표현이다)할 수도 없다."(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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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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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우주의 서로 다른 시간 속에 갇힌 인간의 조건들


고전환담 古傳幻談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

 



고전환담에 실린 26편의 단편소설은, 예부터 전해지는(古傳) 기록·사실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고 있다.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사실의 뼈대를 연결하며 삶의 새로운 진실을 보여준다. 크게 3부로 되어 있는 이 단편집은 전쟁과 혁명, 역사추리 소설, 사랑 이야기를 주요한 주제로 담고 있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의 운명이 투쟁이라면, 이 소설집에 대한 인상은 신화 속 시지프스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멈추는 법 없는 모든 생명 존재의 투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싶다.


 

우리 옛 역사의 한 장면을 글의 소재로 삼았다고 하면, 먼저 식상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만약 작품집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는 독자라면 우선 첫 작품 「왜장 와키자카의 고백」만이라도 읽어보라 권하겠다. 국경을 넘나들고 육신의 경계를 넘어 왜장의 시선에서 바라보았음직한 신선한 상상력이 구현되어 있다. 때로는 광대한 스케일을 배경삼아 풀어내는 저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역사적 사실과 어우러져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단편소설임을 감안하더라도 역사에 대한 저자의 조사와 섬세함은 나의 의혹을 단번에 날려버릴 만 했다. 소설을 읽고 유쾌하고 시원한 느낌을 받은, 보기 드문 독서경험이었다. 

 


나는 3부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필멸의 삶과 불멸의 삶을 꼽아보았다. 어쩌면 소설을 포함한 모든 문학이 이 두 가지 상태 사이의 긴장과 불안정함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각 존재의 본성상 현상유지를 추구한다. 이를 존재의 유지 본능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타인의 장수(현 상태의 오랜 지속)를 기원하곤 하지 않은가. 그렇다. 생명을 지닌 존재는 그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고, 이것이 존재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가 반드시 죽기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삶의 본질 속에서 이 두 가지 상태는 언제나 충돌할 수밖에 없다.


 

단편 불멸하는 고독에서 이러한 삶의 문제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사람의 수명을 알아보는 사미승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자문해본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오늘 하루를 보다 의미 있게살아낼 수 있을까? 혹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이야기 속에서 죽지 않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던 화두타는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자신의 말벗이 모두 죽어 사라지고 남은 자의 외로운 고통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화두타는 자신의 말벗을 삼고자, 화자에게 도를 닦으면 수명을 적어도 백 년은 보장하겠다고 회유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 때 화자는 자신이 죽을 날이 바로 다음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결국 화자는 난 불멸을 원치 않는다”(63)며 화두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의 삶, 즉 필멸의 삶과 불멸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소설의 주인공들이 묻는 듯하다. 단편 어떤 하루에서도 이 문제는 그대로 서사를 관통한다. 이야기는 인조반정을 배경으로 하는데, 주인공 김유는 당파 간 투쟁으로 희생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왕에 대한 반역을 꿈꾼 자였다. 하지만 복수를 실행하러 떠난 길 위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신의 전생은 이미 수많은 생명을 반복해서 죽이는 과정 속에 있던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복수를 중단함으로써 이 끝나지 않는 업보를 벗어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불멸하는 존재의 권태라는 문제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이다. 김유는 전 그런 식으로 수없는 세월을 싸우며 살았습니다. (...) 이 투쟁을 이제 멈추고 싶습니다.”(94)라고 선언하며 왕에게 복수하러 가는 도중 탈영하기에 이른다. 단군 왕검에 관련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세상의 마지막 단군도 같은 결의 주제를 보여준다. 불멸의 삶을 바라는 유한한 존재의 열망이 불멸하는 새 이름을 얻고 싶은 욕망으로 드러난 작품이라 볼 수도 있겠다. 

 


몇 편의 사례만 보아도 인간은 필멸과 불멸의 경계 사이의 어딘가에서 각자 다른 속도와 구간에 속해 끊임없이 두 경계 사이를 왕복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은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을지문덕에 관한 호방한 작품 요동을 달리는 전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특히 불교적 관점에서 언급되는데, 우리가 삶과 죽음의 중간 지역인 중유(中有)를 떠도는 영혼”(27)이라는 것이다. 이 중유의 상태를 좀 더 밝혀주는 듯한 단편 그날 밤 성불의 재구성을 보자. 이 이야기에서는 원효와 사미승 사복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데, 원효과 의상이 함께 당나라로 향하는 배를 타려 했으나, 배가 떠나기 전에 원효는 유학이 필요하지 않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신이 성불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중유의 세계로 보이는 부분을 사복에게 설명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중 하나인 기라. 그러다 가끔 두 세상이 맞물려 양쪽 사람이 만나면 막 놀라기도 하고, 또 내처럼 깨달은 자들끼리는 인사도 나누코. 부처가 별거 아이데이.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교차할 때 고 좁은 틈으로 억만 겹 대우주의 법계를 엿보면 그게 성불인 기라.”(138)


 

어떤가? 원효는 사복에게 화엄경에서 설명하는 인드라망의 우주를 설명하는 이 장면이 내게는 현대 우주론에서 말하는 다중우주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원효의 표현을 빌려 말하는 불교적 다중우주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은가. 이는 앞에서 언급한 단편 요동을 달리는 전사에서 저자가 을지문덕으로 상정한 인물 우이치 모테르가 동료 전사 너케르에게 말하는 대목을 생각나게 했다.

 

형제 아르막 너케르여. 실은 나도 그대와 같은 운명이라네. 나 역시 그대를 만나는 이 순간으로 끝없이 되돌아오고 있지. 우린 서로 다른 시간 안에 갇힌 거라네.”(30)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전쟁과 같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다르게 이 순간이야 말로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현실의 삶과 불멸의 삶이란 키워드로 소설을 읽어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작품들의 소재는 모두 오랜 역사 기록에서 나온 것이지만, 대륙을 넘나드는 작가의 상상력이 저자의 해박한 역사 지식과 어우러질 때, 현재 우리 삶의 진실도 다채롭게 탐구할 수 있음을 고전환담은 보여준다.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무척 흥미롭고 나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했다. 개인적으로는 정조를 둘러싼 정치적, 역사적 배경을 다룬 비밀 서가, 살인자를 쫓는 밤도 몰입감 있게 읽었다. 실학파와 관련한 인물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정약용, 이덕무 등의 인물이 나올 때 더 주목해서 읽게 되었다. 한편 구한말의 정치적·역사적 배경이 치밀하게 어우러지며 추리소설처럼 펼쳐진 모리스 쿠랑 이야기 역시 도중에 멈추지 못하고 읽어갔다. 마치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단편으로 읽은 것처럼 흥미로웠다.


또 페르시와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에 관련한 단편 불과 모래의 기억도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대영박물관에서 발견된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의 대부분이 신라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는 이야기는 무척 흥미를 자아낸다. 고대의 우리 조상이 페르시아와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사실 아닌가. 고대에 이야기를 소중히 생각한 누군가가 남긴 이 이야기가 이어지고 알려져 불멸의 삶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이 이야기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고전환담은 조상이 남긴 자취에 후손인 작가의 현대적 해석과 상상력이 어우러져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의 운명을, 필멸하는 현실의 삶에서 불멸의 삶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삶의 모든 이슈가 관통하고 있다. 이 사실을 음미하다보면 때론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불멸의 권태와 외로움 보다는 낫지 않을까 애써 생각해보기도 한다. 특히 작품 속의 원효가 말해주듯 우리 인간은 억만 겹의 우주 속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이를 누구나 짊어지고 살아간다. 이 지점에서 단편 시마의 계약에 언급된 한 대목이 떠오른다. 고려시대를 대표한 문호 이규보의 둘째 아들 이함이 문학의 신 시마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문재가 다소 부족한 인물로 묘사된 이함이 문학의 신 시마에게 자신도 아버지 이규보나 형 이관이 지녔던 시마의 눈을 갖고 싶다고 청하자 시마가 거절하는 대목이다.


저는 왜 안 되는 겁니까?

가질 수 있는 것만 사랑하거든. 넌 시라무렌강과 그 강 너머 더 먼 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어. 넌 집에 집착하지. (...) 땅에 집착하는 자에겐 시가 없어. 가질 수 없는 걸 사랑해야 시가 찾아와.”(152)


이 대화가 인상 깊다. 시마의 논리에 따르면 땅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대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말이다. 그럼 이번에는 가질 수 없는 것불멸로 대체해보면 어떤가. 어느 누구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인간의 조건 아래 인간이 경험하고 겪을 수 있는 모든 운명이 영원토록 갈망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시가 찾아오는 원리가 있다고 시마는 말해주는 듯 했다. 사실 시뿐만이 아니라 문학,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학문과 예술, 혹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시마가 말하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은 적어도 중요한 시 혹은 문학의 생성 원리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건 고전환담을 읽다가 문득 필멸인 존재와 그 존재의 불멸의 삶이란 키워드로 바라보며 내린 한 가지 결론이다.


생명을 지는 존재 각자가 (다중 우주 속의)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깨닫는다면, 오히려 우리가 시간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보다 겸손해지고 보다 편해지지 지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러한 진실을 깨달은 인물 사복(단편 그날 밤 성불의 재구성에서 원효를 따르던 사미승)이 말한 한 마디가 오늘 나의 결론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복이 전 맘 편히 이 세상에서 놀아예. 스님도 확 다른 사람이 되셨으니 저랑 노시면 안 됩니꺼?”(142)라고 말한 대목. 결국 인간이란 필멸과 불멸의 경계 사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왕복하며, 이 중유(中有)의 세계를 떠도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찬란한 현재의 순간을 그대로 즐길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문득 상상의 시공간 속에서 원효와 사복이 함께 놀자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면도 떠올려보았다. 사복의 노는 마음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 했다. 내게 고전환담은 역사의 빈틈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채우며 낯선 진실을 찾아가는 모험을 오롯이 독자에게 선사한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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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 가장 진실한 허구, 퍼렇게 빛나는 문장들
존 밴빌 지음, 이수경 옮김 / 이터널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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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삶 사이사이를 채우는 아일랜드 작가 존 밴빌의 탐구와 상상력을 따라 가고 싶었습니다! 이제 책이 도착했고, 이제 저는 호기심의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기대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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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양화가이자 1세대 모더니스트라고도 불리는 장욱진 화백의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에 다녀왔다.


전시된 작품이 많아 꼼꼼하게 관람하지 못했는데도 3시간이 걸렸다. 

현재 알려진 그의 작품들만 보아도, 유화730여 점, 먹그림 300여점이나 된다.  


장욱진 화백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역시나 책을 통해서였는데, 그 책이 바로강가의 아틀리에였다. 화백이 쓴 산문집이었다. 화가는 그림으로만 말해야 한다고 언급한 그 역시 자신의 산문을 줄곧 대단하지 않은 글이라고 줄곧 낮추지만, 나는 한 마디 한 마디 귀를 쫑끗 새우고 듣는 학생처럼 조심스레 읽었다. 



















회고전 입구를 처음 들어가면 관람객을 맞는 그림이 바로 댄디한 검은 양복을 입고 붉은 황톳길을 터벅터벅 걸어온 듯한 화백의 자화상이었다. 그는 액자의 그림 속 반대편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관찰하는 듯 나를 맞았다. 이 초상 작업을 한 해가 1951년이었다. 전쟁 중이던 조국의 황금들판을 가로질러 화백은 어디로 향하고 있던 것일까?



독립서점이면서 책을 만들기 시작한 청계천의 소요서가에서 두 번째로 만든 책이 도착했다. 바로 이 초상화의 그림이 담긴 엽서와 함께! 이 책은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명예교수 정영목이 집필한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삶 장욱진이다. 



책을 처음 받아 처음 펼쳐보고 감탄했던 것은 단순히 광택이 덜한 고급지를 사용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책을 완전히 펼칠 수 있게 제본되어 두 지면에 걸친 그림을 보기에 좋다. 양쪽 지면에 그림이 배치되어 있는 경우도 각 지면이 활짝 펴져 각각의 그림이 작은 벽에 걸린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책에 수록된 자화상을 전시회장을 들어서자마자 만나 반가웠다. 화백은 붉은 황톳길을 걸어 어디로 향하고자 했던 걸까. 그 실마리를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싶어 조바심이 난다. 이 그림이 책에 수록된 그림 크기 정도보다 작아보여서 놀라기도 했다. 


문외한의 눈으로 본 장욱진 화백의 그림에는 반복되는 주제가 있었다. 

사람(가족), 새(주로 까치), 황소, 강아지(특히 검은 강아지)와 같은 동물들, 나무와 화분 등의 식물들, 그리고 해와 달이 반복적인 주제를 이루는 듯 했다. 이 '흔해보이는' 대상으로 그토록 다양하게 그림의 방법을 실험하며 이들 주제에 천착했던 이력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 같다. 이 모든 구성원들이야말로 세계를 이루며 그의 가족이 된 존재들이었다. 동시에 이 '가족'들은 고 그 자신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집에 와서 다시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을 펼쳐 전시장에서 보았던 그림들을 떠올리고, 그 때의 감흥을 다시 떠올려본다. 이 책에 수록된 그림의 발색이 꽤나 좋은 것 같다. 다만 몇몇 이미지는 확대와 크롭을 해서 그런지 해상도가 다소 아쉬운 부분도 보인다. 


무엇보다 그림에서 전해지는 화백의 따뜻하고 때론 천진난만한 시선이 작은 아쉬움을 무마해주는 듯 하다. 또 대부분 유화 작품인데도, 물감을 유기용매에 상당히 희석해서 사용해서인지 수채화 내지는 수묵화의 농담을 구현한 듯한 느낌을 처음 보았던 부분도 인상깊다. 


여기에 책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 말고도 전시회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림을 담고 있는 액자다. 아마도 화백이 그림을 완성한 후 당시에 만든 액자들이 꽤 있는 듯한데, 많은 작품이 캔버스에 직접 그렸기 때문인지 작은 액자를 보다 큰 액자에 넣은, 2중의 액자 형식을 취한다. 그러니까 큰 액자 속에 작은 액자 전체가 하나의 입체작품처럼 통째로 끼워져 있다는 말이다. 말만으로 이해하면 꽤나 둔해보이기도 할 것 같은데, 의외로 이런 액자가 독특하고 참 아름다웠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전시회에서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도록이나 책에는 잘 나오지 않는, 아름다운 액자의 모습, 그리고 그림과 조화된 액자의 선택과 관련한 사항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것. 그러니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전시장을 직접 찾아 보시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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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증언 -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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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는 애도하기, 그리고 인간이길 다짐하는 일


백년 동안의 증언

: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책읽는고양이] (2023) 




인간은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낸 종이지만 동시에 취약하고 어두운 존재이기도 하다. 올해 100주기를 맞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이하 간토학살)은 인간이 지닌 어두운 면을 일깨워주는 역사다. 백년 동안의 증언을 읽으며 그 시각, 그 공간에 내가 있었다면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간토학살을 목격한 유학생들이 느꼈을, 아찔한 감각이 느껴지는 듯했다. ‘1550이라는 일본어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나 역시 아라카와 강변의 땅속 어디엔가 묻혀 흙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간토학살은 국가의 비호아래 자행된 국가 폭력이다.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나라시노 기병 연대의 한 병사가 증언했던 것처럼, 이 사건은 조선인 사냥에 다름 아니었다. ‘불령선인에 대한 단속과 조선인 보호라는 명목은 오히려 조선인 학살을 허가 하는 국가 공인 살인 면허였던 셈이다. 여기에 더하여 같은 일본인임에도 사회주의자나 노동조합원을 탄압하고 학살한 행위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자국의 장애인과 불순분자들을 잡아들여 수용소로 보냈던 나치독일의 만행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저자가 20년 넘게 관련 자료를 모으고 연구한 결과물이다. 간토학살을 경험한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증언이나 시 또는 소설 등을 통해 사건을 기억해온 노력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있다. 여기에 간토학살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희생자들을 추모해온 후손들의 노력도 담겨 있다. 내겐 이 책이 저자가 마음을 다해 치르는 애도 의식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해야만 한다는 말을 뻔한 물음에 구태의연한 답변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간토학살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야카와 야스히코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추도비를 세우고, 50년 동안 매년 추도식을 하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간토학살과 희생자를 기억해온 일본인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왜 이토록 집요하게 기억하려 했을까? 이제 간토학살 이후 한 세기가 지났다. 여전히 변함없는 일본 지배층과 한일 양국 정부의 태도를 보며 깨닫게 된 것 한 가지는, 우리의 냉소와 망각이 언제든 되풀이 될 수 있는 비극을 조장하고, 심지어 동조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전망이다.



간토학살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의 작품 총구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한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체온을 가진 것처럼,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165)임을 자각하는 일이다. 간토학살은 소수 집단을 대상화하고 혐오와 차별을 조장함으로써 가능했다. 인간을 사물화 하는 행위는 행위 주체의 인간성도 파괴하고야 만다.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비국민이라는 문제의식과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남긴 유산에서도 발견한다. 그가 설립한 자유법조단이 여전히 인권 변호사들의 모임으로 남아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저자는 간토학살에 관한 증언과 기억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무엇보다 양국의 화해를 추구한다.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일은 혐오나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기억하기야말로 화해를 위한 첫 걸음인 까닭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숨을 걸고 간토학살의 진상을 조사하고 조선인들을 변호한 후세 다쓰지나 오야마 레이지 목사의 부단한 사죄 운동에 주목한다. 남아 있는 자들에게 기억하기, 무고하게 희생당한 이들을 애도할 시공간을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 간 화해 전망이 암울하기만한 지금,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애도를 양국의 시민들이 함께 이어가길 희망한다.



간토학살은 일본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축소·은폐되고 왜곡되어 왔다. 한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저항했다. 이들의 모든 노력이 비록 희미해 보이더라도, 나는 여기에서 작은 희망의 빛 조각들을 발견한다. 물론 과거를 기억하는 일만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와 고통을 다 벌충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기억함으로써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을 애도해야 한다.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위한 애도는 우리가 같은 인간임을 애써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이 책은 일본 시민들이 꾸준히 이어온 화해의 요청을 보여준다. 한국 독자로서 나 역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답하고 싶다. 한국과 일본에서 빛을 내는 작은 조각들이 모여 과거와 우리 안의 어둠을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그리하여 상처를 치유하고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될 가능성을 조금 더 줄일 수 있도록 말이다




[책 속으로]


[1] "발음 하나를 듣고 사람의 목숨을 따진다는 것은 희극적 비극이요, 광기의 오락이었다."(70)

[2] "서사시적 정신이란, 어떤 현실적인 어둠에 압도되지 않고, 아울러 어떤 어둠도 밝혀내는 광원을, 현실과 서로 관련지어, 그것과 격투하면서, 시인 자신을 주체로서 창조하여, 장치하는 정신이다."(72)
- 간토학살을 다룬 시인 쓰보이 시게지의 평론 「두 가지 조선 서사시에 대하여」중에서

[3] "(조선인 ‘보호’ 수용 방침과) ‘후테이센징(불령선인)’에 대한 ‘단속과 보호’라는 이중적인 지시는 사실 학살령과 다름없었다."(89)

[4] "어른들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인간에게 진정한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상상도 못할 텐데, 그 공포는 인간의 정기를 빼앗는다."(97)
- 세계적인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가 13세 때 발생한 간토대지진 당시 자신에게 죽창을 쥐어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한 생각

[5] "비극의 역사를 삭제한다면, 그 비극의 결과를 모르는 이들에 의해 비슷한 집단적 폭력이 다시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104)

[6] "불순한 무정부주의자들이 대지진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기에 살해했습니다."(137)
-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를 살해한 용의자 아마카스 마사히코 헌병 대위의 재판 증언

[7] "그래도 이놈은 조선 사람인걸요. (...)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조선 사람도 같은 인간이야. (...) 남자의 체온이 류타의 손에 따뜻하게 느껴졌다. (...) 역시 부모도 형제도 있겠지. 세이다로오가 말한 ‘같은 인간이다’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류타의 가슴에 와닿았다."(164)
-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총구》의 문장 재인용

[8] "어떤 말로 추모하더라도 조선 동포 6000명의 유령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184)
-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1923년 12월 간토학살 조사 후 결과 보고로 쓴 문장

"일본인으로서 전 조선 형제에게 사죄합니다."(185)
- 후세 다쓰지가 1926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보낸 사과문

[9] "일본이 어느 정도 사죄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은 큰 범죄를 한국에 범했습니다. 게다가 아직 한국인에게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고 있습니다."(196)
- 오에 겐자부로가 2015년에 한 말

[10] "일본국 안에 들어오지 못한 오키나와인과 재일조선인은 차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실제 오키나와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많은 조선인이 미국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학살당했다."(205)

[11] "쉽게 한국에 사과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정치가처럼 혀로 사과한다고 하지 말고, 그 시간이 있으면 한국을 공부하세요. 한국을 공부하는 것이 사과하는 태도입니다."(223)
- 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한국 문화 기행을 함께 한 와세다 대학생들에게 한 말

[12] "이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은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민족 차별을 없애고, 인권을 존중하며, 선린우호와 평화의 큰 길을 개척하는 주춧돌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228)
- 일조협회를 세운 미야카와 야스히코의 말

[13] "우리들 일본인은, (...) 우선 국모를 죽이고, 토지를 빼앗고, 아름다움을 빼앗았고, 이름을 빼앗고, 언어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고,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나아가 여성을 일본군의 위안부로서 징용해,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신사 참배를 강요해,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투옥해, 고문을 가했습니다. 이 사실을 많은 일본인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며, 저희 일본인은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247)
- ‘사죄 운동’을 했던 오야마 레이지 목사의 말

[14] "사회와 화해를 통해 우리는 더 자유를 느끼고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국가와 국가 사이만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남편과 아내, 사장과 노동자가 끊임없이 사과하고 용서하고 화해해야 합니다."(257)

[15] "사회의 삼각형 제일 위에 천황이 있고 가장 아래는 천민이 위치하는 등 수직적 관계가 견고히 형성되어 있다. 이 종속적 구조를 따르지 않는 거주자는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262)
- 일본의 종사회(다테사회)의 특징을 설명하는 말

[16]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거 일본의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라고 했다. 백년을 제대로 기억하려면, 호주 총리나 독일 총리처럼 가해자가 피해자를 직접 만나 사과해야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법적 시스템도 정비해야 한다."(277)

[17] "한일 사이의 백년을 기억하는 것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기회다. 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 강제 징용, 일본군 성노예 문제 등은 인류의 문제다. 백년을 기억하는 것은 피해 의식이나 자학적 태도가 아니다. 구원의 방법은 이미 과거에 있으며, 진정한 희망은 과거의 기억에서 나온다."(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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