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몽(夢)슈슈 무민의 밝은 방 (초란공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2015년 9월 개설/2015년, 호기심에 처음으로 시집과 문학책을 사보다. Slow Reader</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11 Jul 2026 11:27:35 +0900</lastBuildDate><image><title>초란공</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12851116282181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초란공</description></image><item><author>초란공</author><category>문학/에세이</category><title>﻿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기다리는 존재다 - [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 - 라틴아메리카의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찾아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69000</link><pubDate>Wed, 01 Jul 2026 23: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690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8538&TPaperId=173690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49/12/coveroff/k12213853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8538&TPaperId=173690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 - 라틴아메리카의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찾아서</a><br/>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 지음, 조구호.남진희 옮김 / 알렙 / 2026년 04월<br/></td></tr></table><br/><br><br><br><br>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기다리는 존재다<br>《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찾아서  &nbsp;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 지음조구호·남진희 옮김 [알렙] (2026)<br><br><br><br> 시간을 살아남아 이제는 고전이 된 《유토피아》는 15-16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토머스 모어의 작품이다. 그의 글을 읽지는 않아도 이 작품은 텍스트로서, 문학으로서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법조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청빈하고 공정한 재판관으로도 존경을 받았던 모어는, 헨리 8세의 권위에 맞서 옳지 않다고 믿었던 가치에 반대하고 비판하다 결국 참수되고 말았던 비운의 인물이다. <br>  &nbsp;  토머스 모어의 ‘억울한’ 죽음이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일까. 한때 라틴아메리카에 건설되었던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 한 문학 교수의 여행기에는 과거 유토피아 건설을 시도했고 결국 우울한 결말을 남기고 폐허가 되어버린 장소들이 즐비하다. 《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의 저자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는 멕시코 출생의 문학가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학자이기도 하다. 또 단편소설과 연대기, 아동 및 청소년 문학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br>  &nbsp;  저자가 한때 라틴아메리카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대부분 폐허의 흔적만 남은 장소를 찾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학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문학을 연구하며 또 스스로 문학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유토피아란 ‘하나의 텍스트’이자 ‘문학’이었던 까닭이다. 그는 ‘유토피아’라는 문학의 힘에 깊이 매료되었던 사람이었을 것 같다. “유토피아는 문학을 현실로, 또 현신을 문학으로 바꾸려는 시도”(182)임을 이미 간파했던 사람이니 말이다. <br>  &nbsp;  이 책의 글은 여행기이면서 일종의 연대기이다. 다만 저자는 ‘유목민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다’(149)는 바람을 내비치는데, 그저 떠돌기 위해 여행한다고 말한다. 그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일종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의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내게 그의 여행은 우리에게 대상에 대한 명료한 판단과 구분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해되었다. 책 밖으로 나와 모호하고 복잡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단지 새로운 앎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나의 무지가 더욱 드러나는 계기로서의 여행 말이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모든 여행이 거대한 오해의 과정”(277)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여행자라면 여행한 장소에 대한 앎이 더욱 빈곤하게 느껴졌을 법하다. 그의 말처럼 여행에서 기록자는 늘 실패하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여향자란, 결국 여행에서 ‘무지의 지’에 도달하는 사람이다.   &nbsp;  <br>폐허가 유토피아에서 발견되는 특징들<br>저자는 과거 한때 유토피아가 시도되었으나 지금은 폐허로 남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장소를 방문한다. 설립된 년도만 보더라도 1539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4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세상에 나왔으나 대부분은 사라진 이상향의 실험 장소들을 섭렵한다. 하지만 이상향에 대한 논의는 단지 이 시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류가 등장하여 누군가와 무리를 이루며 함께 살아온 이상, 유토피아는 언제나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nbsp;  <br>이렇듯 인간이 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은 인간의 ‘살아감’이란 문제가 어느 곳, 어느 시대에서든 결코 녹녹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해보자면,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회도 많은 이들에게는 ‘지옥과 같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현실의 녹녹치 않음’이야말로 위정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의 유토피아가 ‘지금의 이 지옥보다는 나을 것’이라 설득하기 수월하게 해준 조건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먹고 살기 힘들었던 한인들이 평생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떠나 목숨을 걸고 한반도를 넘어 북쪽으로 건너갔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br>  &nbsp;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실패한 유토피아는 일종의 성공적인 재앙’(88)을 남겼다. 유토피아에 대한 실험은 대부분 실패했다. 유토피아 실험이 실패했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파라과이에 설립되었던 누에바 게르마니아처럼 지독히 인종차별적인 시선과 타 민족에 대한 아리아족의 우월감, 그리고 현지 원주민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 현지 자연 환경에 대한 무지와 같은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유토피아를 지지하던 이들이 지닌 타자에 대한 도덕적·신체적·문화적 우월성으로 무장한 강력한 배타성은 결국 스스로 섬이 되고 밀림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br>  &nbsp;  뿐만 아니라 “그런 곳은 없다”는 의미를 지닌 유토피아의 시간성 역시 특징적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오븐에서 갓 꺼낸 빵 속에 있다’(88)는 표현처럼, 아직 손을 대고 시식을 하기 전의 빵에만 존재하는 관념 그 자체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미 사람의 손길이 닿고,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닌 인간이 모이면 유토피아는 이미 서서히 사라져가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유토피아는 “언제나 신화적인 과거를 되찾으려 하는 동시에, 아득한 미래에 닿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가속화한다는 이중적인 시간성”(193)을 띠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시간의 순서와 무관하게, 오로지 과거에 대한 향수에 붙들려 과거를 소급하거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데만 몰두하는 영화 속의 인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유토피아의 시간성은 시대착오적이며 자기분열적일 수밖에 없을 터다. <br>  &nbsp;  유토피아는 결국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br>앞에서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기획했던 이들의 설득에 쉽게 넘어가곤 했던 이유를 말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건 인간의 삶이라는 조건이 결코 녹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으레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건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모든 사건 앞에서 살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과거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늘 지옥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굳이 치안도 불안정한 폐허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도 한 때 존재했던 사회의 ‘꿈과 악몽’을 좀 더 알고 싶어서였으리라. 저자는 어느 사회의 꿈과 악몽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라 여긴 듯하다. 이 작업은 과거나 미래에 집작하는 유토피아의 시간성에 틈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비로소 현재에 좀 더 머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br>  &nbsp;  또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들여다보는 일은 창립자로 대표되는 당대 인간들의 욕망을 만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유토피아 건설의 전망과 수행 과정, 그리고 실패 혹은 재난의 잔해 위에 반복해서 세워지는 인류 존재의 원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인류학자가 ‘인간은 문화에 중독된 존재’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란, 유토피아라고 하는 ‘문화적 관념’에 중독되어 있는 존재는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시대와 상관없이 ‘그런 곳은 없는’ 어딘가를 늘 꿈꾸어온 까닭일 터다.    &nbsp;  <br>작가는 대개 폐허로만 남은 유토피아의 흔적을 답사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현대적인 유토피아, ‘성스러운 믿음’이라는 의미의 산타 페를 주목해 본다. 에스파냐 식민 세력이 신앙을 전파하며 멕시코의 이 지역을 점령했던 것처럼, 20세기 말에 기획된 유토피아적 도시는 여전히 인류 존재의 원리로서의 유토피아를 증거한다. 도시로서 산타 페는 신에 대한 믿음, ‘신이 죽은 시대’를 대체하는 믿음이 이제 자본과 신자유주의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믿음이라는 ‘문화적 기호’는 이제 단지 새로운 기호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모든 이들의 혐오 지역이었을 법한 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이 신자유주 유토피아는 수평으로 확장되고, 수직으로 자라나며 기존의 도시들과는 다른 하나의 섬과 같은 곳이 되었다. 도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고 배타적인 섬이 되기를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신흥 현대 도시 산타 페는 유토피아의 이중적인 시간성을 잘 보여주는 기획이면서 여전히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장소였던 것이다. <br>  &nbsp;  이런 관점에서 산타 페는 저자가 책을 시작하며 한 말, ‘유토피아는 언제나 존재했다’는 말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현대적인 단서가 된다. 이에 유토피아는 줄곧 혼돈과도 같은 현실 문제에 대한 책임과 마주보기의 실패 혹은 회피를 전제해온 듯하다. 지금 내 발 아래의 현실과 충돌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늘 현실 밖을 상상하며 꿈을 꾸는 존재다. 그렇기에 저자는 유토피아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문학’이라 말하지 않았는가. 문학의 상상력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폭력적/비폭력적인지, 본래부터 선한지 혹은 악한지와 무관하게 허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인간의 초상을 그대로 비추어주는 것이 유토피아일 것이다. 이제 인간은 세상에 등장했을 때부터 현실이라는 악몽과 이상향이라는 꿈을 늘 꾸어온 존재로 보였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욕망을 비추어주는 거울이었다.   &nbsp;  <br>내가 이 점을 특히 강렬하게 느꼈던 대목은, 아마존의 밀림 한복판에 건설되었던 고무 플랜테이션 도시 포드란지아에 대한 글에서였다. 밀림 속의 폐허로 남아 있는 이 공장 터 주변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포드란지아를 기획하고 수행했던 이들의 신념을 여전히 내면화하고 있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이 지역 주민 대다수는 오히려 열대림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곳의 어느 가게에서 저자에게 탄산수를 건네주던 여종업이 “우리는 여전히 포드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35)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의미에서 그 종업원과 연결됨을 느꼈다. 인간이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 죽기까지 이 지루함의 공백을, 미치지 않고 살아나가려면 유토피아 같이 기댈 곳이 있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결국 인간은 결코 유토피아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시대와 장소를 떠나 유토피아를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 유토피아는 면 과거에 존재했으며, 미래에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지금도 여전히 포드를, 유토피아를 기다린다. <br><br><br><br>&nbsp;[책속으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49/12/cover150/k12213853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491227</link></image></item><item><author>초란공</author><category>문학/에세이</category><title>서울형책방 함께 읽기 모임 후기 - 필립 K. 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53729</link><pubDate>Wed, 24 Jun 2026 23: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5372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907995&TPaperId=1735372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215/98/coveroff/896090799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094438&TPaperId=1735372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67/36/coveroff/8993094438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독립서점 책방연희에서 2026 서울형책방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작품으로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유명한 영화 &lt;블레이드 러너&gt;(1982), &lt;블레이드 러너 2049&gt;(2021)의 원작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거리가 풍성할 수 있지만 워낙 널리 알려진 나머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마침 비가 제법 오던 주말 아침이어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요, 빗길을 뚫고 멀리 제주에서 온 분도 계셔서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모임 2시간 동안 길게 느끼지 않고 재미있으셨는지 모르겠네요.<br>  &nbsp;  이번 읽기는 작품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느슨하고 불완전한 읽기 모임이었죠. 그럼에도 소설의 배경과 작가에 대해 먼저 알아보고, 이어서 보이트-캄프 검사 장면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 검사는  안드로이드(합성 세포이지만 인간처럼 만든 유기체)가 감정 이입(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특징을 이용하여 만들어졌구요. 안드로이드를 ‘은퇴’시키는 현상금 사냥꾼 릭 데카드가 안드로이드를 찾아내는 데 쓰던 테스트였죠. <br>  &nbsp;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한 인물은 특수인(specials) J.R. 이지도어였습니다. 그는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부작용에 지능도 떨어지는 인간, 인류 대부분이 화성으로 이주할 때 배제된 존재였죠. 문제는 그가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가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차별받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점입니다. 혹시나 데가드가 이지도어를 안드로이드로 판정했다면, 이지도어는 ‘은퇴(사살)’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반대로 공감능력이 월등히 개선된 안드로이드가 이 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한다면, 우리는 이들을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nbsp;  <br>이런 관점에서 이번에 저는 이지도어에 주목해보고자 했습니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낙인도 모자라, 낙진이 세상을 덮고 있던 지구에서 결혼과 자녀를 낳는 것도 금지된 인물말입니다. 그는 특수인이라는 미명(?) 하에 실제로는 ‘치킨헤드’라 불리며 차별당하고 타자화되어버린 존재였죠. 심지어 안드로이드들은 현상금 사냥꾼으로부터 달아나고자 그를 이용하려 했죠. 반면 이지도어는 정체 모를 안드로이드들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도와주려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지도어는 화성으로 갈 수 있었던 ‘선택된’ 인간과 ‘은퇴할 운명인’ 안드로이드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 혹은 이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로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nbsp;  <br>언젠가 이 소설을 다시 읽을 때 이지도어의 존재에 주목하여 읽어보면 조금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지도어는 공감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구보다 공감할 줄 아는 인간이었으니까요. 이런 생각을 사회로 확장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다수가 소수를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죠. 사회 속의 소수를 포용하고 환대할 수 없는 사회는, 인위적인 경계 짓기의 효용성을 넘어 결국 서로를 타자화하고 나아가 인간성 상실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필립 K. 딕이 우려하던 바였지요.    &nbsp;  <br>주어진 시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이지도어가 인용한 영국 시인 존 던의 “인간은 누구도 섬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작품 전체에서 던지는 질문,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은 이 영국 시인의 문장 앞에서 특히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참가자분들은 이 작품이 1968년에 발표되었지만, AI가 우리의 삶에 깊이 들어온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해주셨습니다. 비 오는 주말 아침에 함께 생각하고 좋은 의견을 나누어주신 참가자분들 모두 고맙습니다.<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67/36/cover150/899309443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673670</link></image></item><item><author>초란공</author><category>문학/에세이</category><title>﻿﻿삶의 그네타기: 상실의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고 삶을 사는 기술 - [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47376</link><pubDate>Sun, 21 Jun 2026 20: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4737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22137266&TPaperId=1734737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37/coveroff/k22213726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22137266&TPaperId=1734737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a><br/>빌헬름 슈미트 지음, 강민경 옮김 / FIKA(피카) / 2026년 03월<br/></td></tr></table><br/><br><br><br><br>삶의 그네타기: 상실의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고 삶을 사는 기술《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  &nbsp;  빌헬름 슈미트 지음강민경 옮김 [피카] (2026)  &nbsp;  <br><br><br><br>사람이 태어난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진실이 하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함께 시간을 겪어온 가족 구성원의 상실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부모, 배우자나 자녀, 혹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지켜보는 남은 이들의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죽음을 통한 상실감을 시간이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실감과 슬픔이 내게는 시간이 지나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다. 이제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라는 기대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슬픔을 기억하는 빈도가 조금은 줄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올라오는 슬픔의 강도는 시간이 지나도 약해지는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어쩌면 사람마다 슬픔을 느끼는 방식이나 양상은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상실감과 슬픔이 너무나 큰 나머지 여기에 잠식되어 다시 이전과 같은 일상으로 복귀가 어려울 지경인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아니 사실, 사라진 대상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한, 결코 예전 같을 수는 없는 셈이다.   &nbsp;  <br> 《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의 저자 빌헬름 슈미트는 독일의 철학자다.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평생을 함께 했던 아내가 어느 날 식도암 판정을 받고 먼저 떠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아내의 마지막 까지 곁을 지키고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그네타기’로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직접적인 삶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기에 어려운 이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게는 ‘상실감과 슬픔에 잠식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삶이라는 그네에 태우는 자신의 모습을 기록한 글이면서 삶을 마주하는 기술’에 가깝다. 배우자를 생각하면서 썼을 한 문장 한 문장이 얼마나 힘겨웠을까도 생각해본다. 하지만 글쓰기란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애도하는 의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br>  &nbsp;  무엇보다 내게는 ‘시간이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식의 모호하고 조금의 도움도 안 되는 훈수를 두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삶의 엄정한 진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부정적 순간을 우리 삶에서 배제할 방법은 없다.’(94)는 것을 분명히 해둔다. 대신 우리가 그네를 타던 것처럼 삶이라는 ‘흔들림에 몸을 맡겨보라’(121)고 말한다.&nbsp;내게는 흔들림에 몸을 맡기는 기술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상실의 슬픔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이란 생각이 들었다.<br>  &nbsp;  나아가 저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삶을 축제처럼 즐기는 일’(161)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느 중산층 지식인의 표피적인 수사학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내가 살면서 바라는 바였기도 하다.&nbsp;천상병 시인의 글귀처럼, 이 삶을 ‘소풍처럼 살다 가는 삶’말이다.&nbsp;내가 속으로 생각해오던 표현을 저자가 공감하고 글로써 화답해준 느낌을 받았다. 저자가 줄곧 언급하는 그네타기 비유처럼, 누구나 삶에서 상승과 하강을 겪게 마련이다. 저자는 이 진실을 단순하고 모호하게 바라보거나 회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담백하게 삶의 모습들을 지켜볼 수 있게 해준 것은 그만의 글쓰기 시간이었을 테다.  &nbsp;  <br>저자는 우리가 삶을 축제처럼 즐길 수 있으려면 필요한 것이 ‘회복탄력성’이라 말하는 듯하다. 우리가 삶이라는 통로를 지나갈 때 이 회복탄력성, 곧 삶에 대한 유연성을 기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감각의 즐거움을 환기하고 삶을 축제처럼 즐길 수 있다고 말이다. 이 회복탄력성이야말로 삶에서의 쉼과 수행 사이를 반복하는 삶의 리듬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본다. 상실의 슬픔에 압도당하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를 여유를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충고가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지는 않을 수는 있을 텐데, 분명한 것은 삶이라는 그네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이 ‘쉼과 수행’ 사이를 오갈 수 없을 것이다. <br>  &nbsp;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는 배우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읽고 또 읽어본다. <br>“나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땅에서 왔어.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갈 테지. 당신은 거기서 나를 언제든, 영원히 찾을 수 있어.”(181)<br>남편은 아내의 글에 다시 아내를 찾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금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술을 연습할 힘을 얻은 듯하다. 이 책은 저자인 남편이 아내와 다시 만나기 전에 남은 생을 온전히 즐기고 가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이었구나 싶다.&nbsp;<br><br><br><br><br>[책속으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37/cover150/k22213726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933740</link></image></item><item><author>초란공</author><category>자연과학-기술-환경-생태</category><title>﻿‘사이언스 믹서’ 6월 모임 후기  - 《나쁜 유전자》 함께 읽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46382</link><pubDate>Sun, 21 Jun 2026 08: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4638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64480&TPaperId=17346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878/31/coveroff/893566448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939314&TPaperId=17346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643/74/coveroff/k872939314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92832436&TPaperId=17346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503/28/coveroff/k89283243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3716894&TPaperId=17346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539/13/coveroff/8983716894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25347&TPaperId=173463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469/93/coveroff/8954625347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46382'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사이언스 믹서’&nbsp; 6월&nbsp;모임 후기<br>《나쁜 유전자》<br>정우현 지음<br>제5장 범죄 유전자  &nbsp;  <br><br>홍대 독립서점 책방연희에서 이번 달에 진행한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에서는 정우현 교수님의 《나쁜 유전자》 제5장 ‘범죄 유전자’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번 장은 ‘범죄자는 유전자로 결정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과학이 어떻게 답변해 왔으며, 사회가 어떻게 수용해 왔는지에 관한 짧은 역사라고 정리해볼 수 있겠네요.   &nbsp;  <br>이번 장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인간이란 스스로의 호기심만큼이나 세계에 대한 무지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서 발견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함으로써 불완전함에도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해온 셈이죠. 《나쁜 유전자》에서 되풀이하여 확인할 수 있듯이, 과학은 ‘나쁜 유전자’라는 관념이 실체 없는 것임을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관념에 대해 지배층과 언론에 의해 왜곡된 시선을 관철해온 결과의 부작용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0세기의 역사만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나쁜 유전자’는 그 자체로 모호하고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조건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 되면 ‘인간’이란 이름은 부조리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순덩어리 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br>  &nbsp;  언젠가 지하철에서 지인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벽에 붙어 있는 수배자 명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명단에 공개된 인물들의 사진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머그샷이 없다보니 그저 평범해 보이는 살인자부터 눈빛이 무서워 보이는 사기범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눈에 비친 인물들의 느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사실 대부분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도 유럽에서는 두개골에 범죄의 본성을 지닌 부위가 있다는 믿음이 공기처럼 퍼져있었던 모양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가 오랜 시간 집필한 ‘루공-마카르 총서’의 대표작인 &lt;목로주점&gt;이나 &lt;제르미날&gt;과 같은 작품만 보더라도 인간의 빈곤 문제가 알코올 중독과 폭력성과 더불어 되물림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는 ‘범죄자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며 타고난 악마는 결코 교화될 수 없다’는 결정론적인 믿음이 너무나 확고한 나머지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는 겁니다. <br>  &nbsp;  이러한 믿음은 영국에서 다윈의 사촌형인 프랜시스 골턴의 우생학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우생학이 꽃핀 곳은 미국이었죠. 우생학은 보다 많은 지배층의 지지를 받으며 법제화되고 이른바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을 ‘개선’한다, 혹은 대를 잇지 못하도록 불임시술을 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곧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미묘하게 굴절된 시선을 통해 현실에서 실천되며 특정 인구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탄탄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무솔리니가 제정한 ‘인종법’과 같은 구체적인 탄압의 장치가 마련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세계의 역사는 독일에서 채택되어 인류사에서 참혹한 재앙을 낳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이른바 ‘유전자 결정론’의 선조격인 이 견해는 단순히 이웃을 견제하고 고발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었죠. 이른바 ‘타고난 악마는 결코 교화될 수 없다’는 믿음이 ‘수치화, 혹은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구실과 얽혔을 때 인류 공동체에 어떤 재앙을 야기했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br>  &nbsp;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빈 서판’과 같다는 견해도 존재했습니다. ‘인간에게 적절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어떤 행동이든 원하는 대로 빚어낼 수 있다’는 극단적인 견해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죠. ‘내게 건강한 아기 12명만 데려다 달라. 나는 이들을 변호사, 의사, 심지어 범죄자로 길러낼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한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존 왓슨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적절한 환경(조건)과 교육이라면 새로운 인류도 창조할 정도의 자신감이 아닌가요. 특히 행동주의 심리학을 이야기할 때 들 수 있는 사례는,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나 보상을 통해 특정 행동의 빈도를 늘리는 실험이었던 ‘스키너 박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940-50년대에 특히 유행했던 ‘전기 충격 요법’은 이른바 ‘정신질환자’에게 많이 시도되었던 방법입니다. 이 시술은 특히 인간의 ‘기계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정인이 가진 정신 질환은 뇌를 (전기 충격을 통해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듯) 백지화한 후 새롭게 교육을 하여 ‘교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셈이죠.    <br>  &nbsp;  여기서 주목해보는 것은 현실에 개입하고 나아가 통제하려는 인간의 충동입니다. 이런 관점은 &lt;신기관&gt;등을 저술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른바 ‘자연을 조작하고 변형하여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말입니다. 나아가 이런 관점은 자연의 조건을 실험실 안으로 가져와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관점이 지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우리는 나치 독일 내과의사 요제프 멩겔레의 생체(인체) 실험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인간이 야기한 이런 ‘재앙’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을 실험용으로 보고 인간이 개입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만들어낸 결과와 그리 동떨어져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시선이 사전에 저지되었더라면 40만 명이 수용소에서 생체 실험으로 사라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br>  &nbsp;  우리가 생물학/유전자에 의한 영향력을 이야기할 때 ‘유전자의 힘’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읽은 5장에서는 유전자가 환경과 맺는 상호작용이 훨씬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서술합니다. 이른바 ‘유전 vs. 환경’ 논쟁에서 유전자는 환경의 영향 없이 논의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특정 형질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도 환경과 조건에 따라 그 형질이 발현될 수 있는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절대 다수의 유전자는 ‘다면발형성’, 곧 하나의 유전자가 다양한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멀티 플레이 유전자’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멘델의 유전 법칙에서 나오는, 하나의 유전자가 그대로 하나의 또렷한 형질 발현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말이죠. 여기에 우리는 아직도 어느 특정 형질에 어떤 유전자가 관여하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 알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할 것 같네요. 따라서 특정 형질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유전자가 장차 유해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정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이 유전자가 관여하는 다른 형질 발현 과정에 교란을 일으킬지 모르기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br>  &nbsp;  이쯤에서 유전보다 환경에 더 방점을 두는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lt;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gt;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핑커가 지닌 견해의 기반은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 책의 주요 논지인 ‘인간의 폭력성이 점차 감소해왔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로 핑커는 환경적 측면, 그러니까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진전, 교육의 역할 등을 꼽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매우 빈약/취약해 보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인류의 역사 무대에서 대량 학살을 비롯한 인간의 범죄나 폭력성이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한 번이라도 대량 학살이 발생한다면 이 주장은 폐기될 수밖에요. 개인적으로는 핑커가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통계자료를 사용한 방식이 설득력이 매우 약해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정우현 교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비판합니다. <br>  &nbsp;  “폭력을 주로 전쟁과 살인에 의한 사망자 수로 다소 편협하게 제한해 정의함으로써 통계적 착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과거 특정 시대의 폭력을 지나치게 과장했고, 반대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현대의 수많은 참상은 애써 축소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테러, 내전, 국가폭력 등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사실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빈곤이 결국 범죄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인신매매, 성범죄, 사이버 폭력, 언어폭력, 환경 파괴 등 수치화하기 어려운, 그러나 대량의 물리적 폭력 못지않게 큰 고통을 유발하는 요인들을 (아마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도 문제다. 그의 책은 마치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이를 입증할 만한 통계자료만 선별해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235-236)<br>  &nbsp;  <br>제가 놀랐던 점은 많은 매체나 독자들이 &lt;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gt;를 호평 일색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에서 납득이 가지 않거나 불만스러웠던 점들을 이처럼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비판한 글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던 것이죠. 단지 내 생각과 맞아서만이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학자가 자신의 책에 적용한 논리가 일개 독자도 납득시킬 수 없는, 문제적인 논리임을 그동안 아무도 지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대한 리뷰/독후기를 남긴 사람들은 왜 이런 점들을 지적하고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듯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핑커의 책에 담겨 있는 그의 ‘역사관/인간관’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lt;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gt;에 실었기 때문이죠. 정리해보자면, 핑커의 역사관도 유전 보다는 ‘환경’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상황에 있지만, 자신의 주장에 도움이 되는 통계자료만을 취사선택함과 동시에, 중요한 사례의 누락을 학자적인 양심에서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비판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지난 세기에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무너진 상황에서, 핑커의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낙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아무튼 핑커의 책과 관련한 사항은 이렇습니다.     &nbsp;  <br>이번 모임에 읽은 ‘범죄 유전자’를 정리해보면, 유전자는 단독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유전자가 환경, 곧 특정 상황과 맥락 아래에 놓여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쉬운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환경의 영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맥락, 바로 그 유전자가 놓인 맥락 혹은 환경이 어떤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학은 언제든 새로운 발견과 사실에 의해 기존의 것이 수정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가능성을 지닌 유연한 존재’로서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는 저자의 말이 이번 장인 ‘범죄 유전자’를 읽으면서 인상에 남았습니다. <br>  &nbsp;  이번 여름인 7-8월에는 과학책 읽기 모임이 ‘방학’에 들어갑니다. 9월 모임에서는 ‘동성애 유전자’에 대한 내용을 다룰 예정입니다. 아주 이야기 거리가 풍성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나쁜 유전자》의 참고문헌에 나오는 책 한권 씩 골라서 읽어 오시면 더 좋겠네요. 9월에 만나요!<br><br><br><br><br>    <br>   <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38/94/cover150/k26203137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1389434</link></image></item><item><author>초란공</author><category>문학/에세이</category><title>우리에게도 ‘노는 마당’이 필요하다 - [박완서 가족에 관한 글쓰기 - 가족 가면 벗기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34744</link><pubDate>Sun, 14 Jun 2026 21: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347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9398&TPaperId=1733474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23/34/coveroff/k0221393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9398&TPaperId=173347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박완서 가족에 관한 글쓰기 - 가족 가면 벗기기</a><br/>양혜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6년 06월<br/></td></tr></table><br/><br><br><br>우리에게도 ‘노는 마당’이 필요하다 <br>《박완서 가족에 관한 글쓰기》: 가족 가면 벗기기  &nbsp;  양혜원 지음 [책읽는고양이] (2026)  &nbsp;  <br><br><br>‘가족’이란 어휘처럼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을까. 박완서 연구자, 여성학 연구자, 번역가,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활동을 해온 양혜원 작가의 글을 읽으며 처음 든 생각이었다. 저자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한 편씩 읽으며 작가의 출발점이자 글쓰기의 모태가 된 가족에 대한 글과 시선에 주목한다.   &nbsp;  <br>전쟁이나 시대의 불운과 같은 불가항력이 불시에 가져다주는 불행과 고통 다음으로 깊은 고통과 시련을 던져주는 것이 가족은 아닐까. 그만큼 제도로서의 가족은 인생사에서 개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원천이기도 하다. ‘노력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인내하고 양보해라’와 같은 말은 집안 어른들의 덕담이나 결혼식 주례사에서 늘 듣는 말이 아니던가. 이러한 ‘덕목’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삶에 자신을 던져 넣어야 했던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이전의 여성들은 대부분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현실에서의 삶은 늘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한 가족’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저자는 이 불완전한 가족 신화의 이면을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본다. 이 책은 가족이라는 자장 속에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한편으로 후배 작가/독자로서 박완서 작가의 ‘노는 마당’을 다시 방문하고 그의 글을 읽어온 기록이다. <br>  &nbsp;  애초에 가족이란 제도는 왜 생겼을까, 의문이 들다가도 고라니와 같은 다른 동물들을 떠올려본다.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일어서서 걸어 다니고 곧이어 뛰어다닐 수 있는 고라니 새끼들과 달리, 너무나 미숙한 존재로 태어나는 인간은 보살핌을 제공하는 안식처가 오랜 기간 필요했다. 굳이 ‘억지로’라는 수식어를 붙이려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이 걸리는 육아를 책임지는 최소한의 공동체로서 가족은 어쨌거나 필요할 수밖에. 하지만 가족의 구별짓기를 위한 필요는 어쩌면 더 큰 공동체의 출현, 그리고 이 작은 공동체의 연합을 연결하기 위한 행정적 필요가 어느 시기에는‘발명’되어야 했을 법하다. 제로도로서의 ‘가족’이 탄생한 시기가 있지 않았을까. <br>  &nbsp;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제도가 지닌 문제점들을 일일이 열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제도 이전의 본질적인 기능을 일부러 무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지금껏 외로움이란 감정에 강한 편이라고 스스로 평가를 내리곤 했지만, 웬걸,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고독한 존재구나 싶다. 심지어 어떤 날은 아직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심각한 외로움이 불쑥 찾아올까봐 두렵기까지 하다. 인간이라는 글자에 담긴 의미만큼이나 서로에게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울타리로서의 가족이 온전히 기능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으련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은가보다. <br>  &nbsp;  제도 그 자체로 많은 문제를 양산하기도 하는 가족을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인간은 지극히 문화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스스로 만들어 낸 모든 ‘인공적인’ 양식(문화)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중독’되는 존재다. 문화는 결코 혼자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말 그대로 인간은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온 존재가 아닌가. 박완서 작가의 작품 중에서처럼 볼품없이 늙어버린 남편의 모습에 극한 혐오감을 느끼는 부인처럼, 선택에 의해 구성되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공간을 점유하는 현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은 쳐다보기도 싫어진 구성원을 돌보아야한다는 의무에 얽매여 지옥이 되기도 하니까. 가족이란 제도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인간은 한편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할 수 있는 존재다. 모기 물린 자국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앙상한 남편의 정강이에도 손을 뻗어 쓰다듬어 보기도 하는 존재다. 저자는 모순적인 가족에 대해 쓴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따라가면서, 가부장의 사회적 의무에 얽매인 인간의 초상을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도 읽어낸다. <br>  &nbsp;  인간은 사회의 규범과 제도의 지배 아래 살아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에는 각각의 인간이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부여받고, 이 역할을 잘 해내도록 요구받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 속 어느 남편처럼 부부의 정도 사라진지 오래된 터에 가족을 위한 역할에 얽매인 인간으로 살다가 생을 마치게 되는 가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품 속 인물에 대한 묘사 이긴 하지만, 작가가 남긴 작품은 대부분 본인이 겪은 일들이 작품에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여성들이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면 삶이 몇 배나 더 고달파지던 시대에 남편들 역시 가부장의 의무에 얽혀 평생을 살아갔던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의 삶이 이게 다인가, 싶기도 하다. 결혼은 일이기에, 현실이기에 더욱더 상대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순서가 뒤바뀐(?) 듯한 표현에 더 공감하게 되는 이유다. <br>  &nbsp;  한편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 속의 한 남편은 부인의 혐오가 담긴 시선을 받으면서도 가부장의 의무에 집착한다. 아무리 공감력이 떨어지는 남자라 해도 혐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감지하지 못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쩌면 이시대의 많은 남편은 이러한 사회적 역할에서만이 스스로의 쓸모와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반문해본다. 저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은 학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28)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 되기’도 사회적 의무와 가정에서의 역할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워야할 일이다. 결국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남편과 부인 되기의 공간과 시간이 각자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면 남편들도 가족의 외부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야 문제가 많은 제도로서의 가족에 최소한 숨 쉴 틈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br>  &nbsp;  이 책에서 감지할 수 있는 박완서 작가의 가족에 대한 태도는, 가족이라는 제도의 모순을 또렷하게 감각해내면서도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세심하게 견지하는 모습 같은 것이다. 또한 의연하고 한편으로는 가족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자에 가깝다. 어쩌면 박완서 작가에게 가족의 문제는, ‘철저한 개별성’을 지닌 현상으로 보았던 죽음의 문제처럼, 지극히 개별적인 사정으로 이해되었을 법하다. 그렇기에 글쓰기라는 절차를 통해 결국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nbsp;  <br>이런 관점을 볼 수 있는 또다른 에피소드가 &lt;저물녁의 황홀&gt;에 등장하는 ‘화초 할머니’이야기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 어느 날 침투한 불청객이었다. 반면 화초 할머니는 영화 &lt;유주얼 서스펙트&gt;의 케빈 스페이시가 해낸 역할 뺨치는 연기로 가장의 임종을 지킴과 동시에 유산도 받고 이 가족으로부터 유유히 떠나는 인물이다. 그 과정의 장면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려져 보였던 것이다. 화초 할머니는 불완전하고 모순적 제도인 ‘가족’의 맹점 한 군데를 파고든다. 그녀의 역할은 모순적인 제도에 대한 통쾌한 업신여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저자의 인물 해석에도 공감이 갔다. 자녀나 본처가 생의 마지막까지 가장에게 주지 못한 역할을 화초 할머니가 연기를 하면서도 해냈다는 점 말이다. <br>  &nbsp;  더 나아가 화자의 친할머니와 화초 할머니 사이의 관계를 여성 사이의 연대와 인류애로 읽어낸 시선 역시 인상 깊다. 이런 마음은 어쩌면 우리 세대 이후에 더 발견하기 힘든 덕목으로 남을 것 같다. 누구는 화초 할머니 캐릭터 혹은 혼신의 힘을 다한 그녀의 연기를 비난할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비루한 연기나마, 결과적으로는 한 인간(할아버지)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었던 화초 할머니야말로 유산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아무리 눈속임 ‘연기’라고 해도, 연기란 그 역할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과 진정성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립된 한 인간의 마음과 처지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마음을 나도 배우고 싶다. <br>  &nbsp;  저자는 박완서 연구자이면서 후배 작가로서 박완서 작가의 유산을 되짚어보고 다시 읽기를 했다.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는 저자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방향을 들려준다. 특히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저자는 글이 서툴더라도 AI를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진실하게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요즘 이 AI 시대에 진실함이 없다면 글쓰기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차였다. 저자의 글쓰기 이야기를 듣게 되니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자신의 진실한 목소리를 발견하고 글로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AI는 이 과정을 초보 작가로부터 빼앗아가기 쉬운 까닭이다. 저자는 박완서 작가가 평생 ‘피와 땀’으로 쓴 글을 정성껏 읽으며 발견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 책의 독자와 나누고자 한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박완서 작가를 다시 읽어내며 놀았던 저자의 또 다른 마당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작은 목소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가족과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 보다‘큰 이야기’를 남겨준 박완서 작가를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겠다. 나 역시 서툴더라도 나의 목소리를 찾아내기까지 계속 읽고 쓸 수 있길 바란다. 저자처럼‘피’까지는 아니고, ‘땀’이라도 흘릴 수 있는 나의‘노는 마당’에서 말이다.<br><br><br><br>*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23/34/cover150/k02213939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233469</link></image></item><item><author>초란공</author><category>자연과학-기술-환경-생태</category><title>낯설어진 지구에서 함께 잘 살기위한 공부 - [낯선 지구 - 기후위기를 넘어서는 지구와 인간 공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14525</link><pubDate>Wed, 03 Jun 2026 10: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31452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12138239&TPaperId=1731452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24/68/coveroff/k91213823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12138239&TPaperId=1731452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낯선 지구 - 기후위기를 넘어서는 지구와 인간 공부</a><br/>김추령 지음 / 종이와빵 / 2026년 05월<br/></td></tr></table><br/><br><br><br><br>낯설어진 지구에서 함께 잘 살기위한 공부<br>《낯선 지구》: 기후위기를 넘어서는 지구와 인간 공부<br>김추령 지음 [종이와빵] (2026)  &nbsp;  <br><br><br>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AI에 대한 신기술이 발표되고 인류의 달 거주 계획이나 화성 탐사에 대한 전망을 접하는 시대에 산다. 어느 과학자의 예언 같은 선언처럼, 기술적인 ‘특이점’이 이제 곧 시작될 것만 같다. 너무나 빠른 발전 속도와 생산성, 그리고 인류의 운명에 대한 우려는 반기술주의자라는 오명을 얻기 쉬운 형국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위를 올려다보는 동안, 이들이 발을 딛고 있는 대지와 발아래의 세계는 어느덧 꽤나 낯설어져 버렸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제는 새로운 현실 세계로 편입되어버린 가상공간이나 우주 공간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자연과 본래의 현실 세계로부터 오히려 더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br><br>  &lt;낯선 지구&gt;에서 저자는 인간에 의해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얼굴을 갖게 된 지구에 주목한다. 곧 이어 인간이라는 존재로 향하는 저자의 시선이 담긴 글쓰기는 지구와 인간 사이의 느슨해진 연대를 확인하고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전망을 담고 있다. 결국 저자는 인간에 주목하지만, 과거의 검은 하늘(우주)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질계의 역사에 관해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딘가 익숙한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낯설었다. 달이 없던 태초의 지구를 상상해본 적이 없거니와 인류가 달이 생겨나는 순간을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낯선 지구’의 모습이다. 물론 과학자들의 상상은 지금껏 인류가 축적해온 모든 지식과 보다 많은 파라미터를 사용한 시뮬레이션에 기반하고 있지만 말이다.  <br>  &nbsp;  저자에 따르면 이 생소한 지구의 모습은 지금껏 단 하루도 같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 특히 지구와 달의 형성과정에서 우연히 삐딱해진 지구의 자전축이 오늘 지구가 갖춘 모습에 이토록 큰 영향력을 주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다만 인간은 너무나 짧은 시간에 칙칙한 회색빛 얼굴을 지구에게 안겨 주고 말았다. 인간이 기후 및 자연 환경의 변화 때문에 나무 아래로 내려와 발을 딛고 살아가기 시작한 터전을 무심하고 거침없이 파헤치고 이용해온 결과다. 인류는 과거에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지구’와 또 다른 지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도록 안내한다. <br>  &nbsp;  우선 지구의 부단한 지질활동이야말로 질소나 탄소 같은 주요 원소들의 순환을 견인했다. 이로 인해 빙하기와 해빙기의 순환도 이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물질계의 흐름과 상호작용과 부단한 변화들은 생명의 출현과 이들과의 상호작용으로 더욱 극적인 국면을 맞게 되었다. 우연히, 한편으로는 필연적으로 대기 산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질학적 시간에서 말하는 다섯 번의 대멸종과는 차원이 다른 대멸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내 주변의 모든 존재들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나의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특히 나의 존재가 지질시대의 대멸종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1%의 존재에 빚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의 역사로부터 나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흐름에 대한 이해의 놀라움은 나를 연대와 새로운 부채의 감각으로도 이끌어주었다. <br>  &nbsp;  내 피부에 와 닿도록‘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연대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었던 대상은 바로 ‘나’의 존재였다. 내 몸 안에 무척이나 다양한 개체(미생물/바이러스/남세균 등의 흔적)가 들어와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내가 ‘나’혼자만의 고립된 단독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이건 감각이 새롭게 환기되는 경험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개체들이 내 몸 안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상호작용하고 유전자도 교환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내 몸의 세포보다 100배나 많은 유전자가 비인간 생명체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은유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서로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이 언급한 것에서 더 나아가 내 몸이 정말로‘소우주’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nbsp;  <br>저자가 초기 지구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를 들려주는 동안 내가 주목했던 부분 한 가지는, 어느 영국 시인의 말대로 ‘인간은 누구도 고립된 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모든 생명체 역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바다 밑 수 km 아래, 저 심해 바닥의 열수공 주변은 수백 기압의 압력과 수백 도의 극한 환경이지만, 이런 곳에서도 혐기성 생물들은 열수공에서 분출되는 광물질에 의존해 살아간다. 무엇보다 이 세균들마저 나와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가 새삼 낯설게 다가온다. <br>  &nbsp;  이 책은 우리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현재 기후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한 가득 안겨준다. 이를 테면 물질계와 생명계가 서로 촘촘하게 얽혀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진화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반면 인간은 지구의 다양한 순환 시스템에 상당한 교란을 일으키는 아마도 거의 유일한 종이다. 오늘날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드게임 젠가(Jenga) 위에 올라가 있는 존재처럼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발밑에 놓인 나무토막을 하나씩 계속 빼고 있다. 멈추지 않고 호기심에서든 혹은 관성 때문이든 나무토막을 계속 빼려 한다. 다만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음에도 발아래 다가온 위험을 직시하거나 멈추기 위한 행동에 옮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의 운명은 분명하다. 다만 언제 그 운명이 닥쳐올지 모르는 것뿐이다. 많은 이들이 기후위기를 이야기하지만, 인류 공동체는 이전과 달리 행동하거나 변화를 시도하는 데 여전히 더디다. <br>  &nbsp;  인류 대부분은 이러한 위기감을 분명 알고 있다. 다만 발아래에 있는 이 위기를 당장은 살짝 눈감고 싶은 불안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생물학적인 이해에 더하여 과거와 현재의 몇몇 공동체의 모습들, 사회적인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은 여기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저자는 작은 공동체에 존재했던 작은 전통들을 이야기하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캐나다 서부 선주민의 ‘포틀래치’ 전통이나 멜라네시아의 ‘쿨라 링’의 전통이 그렇다. 저자는 이런 전통들에서 인간이 ‘움직이는 동기’가 경제적인 것만 있지 않음을 역설했다. 특히 공동체를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에 주목했다. 저자가 여러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에서 읽어내는 것은 구성원 사이의 명예나 존경심, 연대의 가치다. 다만 이러한 가치들이 규모가 훨씬 큰 현대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좀 더 고심해볼 문제다.  <br>  &nbsp;  이 책의 제목 ‘낯선 지구’는 인간의 편리함, 나아가 성장 위주의 탄소 소비 문명이 지질학적 시간에 비해 얼마나 짧은 시간 만에 지구-자연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분명한 점은 지구상의 어느 종이든 영원히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류 문명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문명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이 과정을 얼마나 빨리 앞당길 것인가는 분명 인류의 손에 달려 있을 터다. 저자는 오래 전 지구 곳곳의 선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연대의 문화에 주목하고 여기에서 일말의 희망을 본다. 지구는 인류에게, 나아가 모든 존재들에게 유일한 공유지이다. 기후위기와 같은 지구적인 문제가 너무 거대하게 느껴진다면 작은 공동체의 사례로부터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실마리로부터 내가 속한 공동체에 맞는 방안을 마련하고 실천해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낯선 지구’와 다시 연결되어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며, 작지만 공존을 위한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우리가 지구상의 모든 존재와 ‘함께 잘 살기’위해 이제는 낯설어진 지구에게 손을 내미는 작은 제스처이다.           &nbsp;    &nbsp;  <br>  &nbsp;  &nbsp;<br>[책속으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24/68/cover150/k91213823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246833</link></image></item><item><author>초란공</author><category>느릿 느릿 책읽기</category><title>과학책 읽기 ‘사이언스 믹서’ 5월 후기 - 우생학의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285181</link><pubDate>Tue, 19 May 2026 08: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285181</guid><description><![CDATA[<br><br><br>과학책 읽기 ‘사이언스 믹서’ 5월 후기《나쁜 유전자》: 세계사를 뒤바꾼 문제적 유전자 바로 읽기 <br><br><br>  &nbsp;  올해 네 번째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날은 맑았지만 아침부터 햇볕이 강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부쩍 여름이 온 것만 같네요. 이번 달에는 《나쁜 유전자》의 제4장 ‘열등한 유전자’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4장은 많이 들어보셨을 우생학의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분야의 짧은 역사에 비해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견주어보면 실로 믿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nbsp;  <br>어느 날 오스트리아의 한 백수 청년이 독일 군인으로 입대했습니다. 그는 그림을 좀 그릴 줄 알았고 특히 웅변에 재주가 있었죠. 또 어느 날은 무장청년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수감되기도 했죠. 그는 비록 실패했지만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 덕분에 얻은 유명세와 그의 유대인 혐오에 힘입어 정권을 잡게 됩니다. 이어서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대인 ‘제거’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시작했죠. 짐작하시겠지만 이 청년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이번 읽기에서는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와 말살 정책이 무엇보다 우생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br>  &nbsp;  물론 제2차 대전 당시에 유대인만 희생당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뉘른베르크법에 의해 ‘일탈자’로 규정되었던 혼혈아, 장애인, 동성애자, 정신질환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집시들도 모두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분류되어 희생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치의 우생학은 ‘좋은 혈통’을 낳는데 ‘부적격’인 판정을 받은 여성 수십만 명에게 불임수술을 강제하기도 했습니다. 신체 기형 혹은 백치 판정을 받은 어린이의 운명은 훨씬 가혹했습니다. 이들 어린이들은 약 20만 명 정도가 ‘안락사’를 당해야 했습니다. 더 섬뜩한 사실은 나치가 사회에서 제거 대상이 된 이들에 대한 대량 말살 프로젝트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도록 고안된 것이 바로 가스실과 독가스 치클론 B라는 점이죠.  &nbsp;  <br>이처럼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는데 핵심적인 이론이었던 독일의 우생학은 이미 20여년 동안 미국 사회의 지도층 사이에서 널리 인정과 지지를 받던 이론이기도 했습니다. 철도왕 해리먼,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씨리얼의 왕 켈로그의 이름도 보이고, 룰루 밀러의 책 &lt;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gt;에서 학문적 일대기가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던 스탠퍼드대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나 하버드대 총장 애벗 로렌스 로웰도 우생학의 핵심 지지자였습니다.<br>  &nbsp;  우생학을 지지했던 인물 중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이는, 당대에 존경받던 대통령 플랭클린 루즈벨트, 진보 여성운동가 마거릿 생어, 흑인 인권운동가 듀 보이스를 비롯하여 소설가 H.G. 웰스나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 작가이자 사상가 조지 버나드 쇼 등도 있었네요. 실로 수많은 지도층 인사가 우생학을 지지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산아 제한을 원하던 영국의 여성단체도 우생학에 관심을 보이며 ‘단종법’을 지지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이처럼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정황이 보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오늘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생학을 다시 보게 합니다.<br>  &nbsp;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2500여년 전의 플라톤 철학(&lt;국가&gt;)에도 이미 우생학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우생학의 기본 논리가 우리의 건강 추구 욕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자손을 낳고자하는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지점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논리가 사회 혹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나 공감의 여지없이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될 때 발생하지요. 특히 사회의 관리 주체에 의해 ‘단점’으로 규정된 특징을 지닌 구성원들을 사회에서 격리/제거하려는 ‘위생학적인 욕망’이 과도할 때 심각한 재앙을 낳게 되는 것 같네요.<br>  &nbsp;  이에 더하여 유럽의 식민권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던 우생학의 역사로부터 인류가 큰 희생을 치르고 배운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생학의 전통에서 이제 자유로운 걸까요? 과학기술의 발전은 빠르게 발전해 왔지만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도 심심치 않게 드러납니다. 이미 현실에서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도록 유전자를 교정한 아이가 태어났고, 형제의 유전자 치료에 골수를 공여할 수 있도록 기획된 ‘구세주 동생’과 같은 존재가 태어난 바 있습니다. 고통 받는 생명을 돌보고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들의 복지를 위해 또 다른 생명이 ‘이용’되는 관계 나아가 희생되는 구도는 분명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생학의 흔적과 논리는 여전히 우리의 현살 한 가운데에 분명히 존재하니까요.<br>  &nbsp;  우리는 대화에서 농담이나 우스개로 ‘우월한 유전자’, ‘열등한 유전자’라는 표현은 망설임 없이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세계에서 어느 유전자가 ‘우월’하다거나 ‘열등’한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 유전학/생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우리가 일일이 예측하지 못하는 것만큼 한때의 유리한 유전자가 다른 장소, 혹은 다른 시기의 환경에서는 치명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저자는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게 우월하거나 열등한 구성원이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힙니다. 유전자는 우월함이나 열등함의 원인이 될 수 없으며, 그저 다양함의 원천이라고 말이죠. 우리 모두는 그저 ‘다양한’ 존재이기에, 모든 존재의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획일화하는 조건에 저항하고 다양함을 지켜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는 우생학의 역사를 중심으로 우리 주변에 잔존해 있는 우생학의 잔재를 발견하고, 다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nbsp;    &nbsp;    &nbsp;  <br>  &nbsp;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519/pimg_712851116512843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285181</link></image></item><item><author>초란공</author><category>사진/미술/영화</category><title>비슷한 감정의 여행 사진들과 주시성에 대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226079</link><pubDate>Sun, 19 Apr 2026 15: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22607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55106&TPaperId=1722607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8465/83/coveroff/8954655106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br>비슷한 감정의 여행 사진들과 주시성에 대해  &nbsp;  《박상우의 포톨로지》: 베르티옹에서 마레까지 19세기 과학사진사<br>  &nbsp;  박상우 지음 [문학동네] (2019)  &nbsp;  <br><br><br>세상에 나온 지 70년도 더 된 카메라, 그리고 표면에 코팅 없이 80년 여 년 전에 나온 렌즈 하나를 달랑 들고 이탈리아의 도시를 산책하다 찍은 사진들이다.<br>  &nbsp;  여행 사진을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하다 단지 예쁜 사진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하나의 지배적인 감정에 맞는 사진을 골라보고자 했다.&nbsp;각 이미지는 촬영자/감상자의 기억과 반응하여 만들어내는 ‘감정의 결’에 주목한 결과다. 따라서 일반 여행사진에서 부각되는 장소성과 역사성에 관한 정보는 최소화된다. 다만 아직 시퀀싱(순서 배열)은 마음에 들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br>&nbsp;필름 사진을 이야기할 때 흔히 ‘감성’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피상적이고 모호한 말이다. 필름은 다분히 제약이 많은 매체다. 아쉽고 부족하다 느끼지만, 필름 사진은 나로 하여금 이런 제약과 부족함을 보완하고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nbsp;  <br><br>새로운 작업 과정과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프레임에 들어온 사물이나 인물의 이미지를 쉽게 지울 수도 있는 디지털 사진과는 매우 다른 매체다.<br>  &nbsp;  19세기 과학사진사를 전개했던 《박상우의 포톨로지》에서 저자는 카메라 렌즈와 눈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데, 19세기 프랑스의 해부학자 루이 페스(Louis Peisse)가 한 말을 인용한다.  &nbsp;  <br>“눈은 사물에서 주시하는 것만 본다. 그리고 눈은 정신에 관념으로 이미 있는 것만 주시한다.”(68)  &nbsp;  <br>다시 말하면 렌즈에 들어오는 빛이 나르는 모든 정보를 선별 없이 남기는 카메라-렌즈 메커니즘과 달리, 인간은 눈은 ‘주시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가 ‘그냥 본다’와 달리 대상을 우리의 이전 기억/경험과 결부지어 ‘인식 한다’는 의미에서 ‘보는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nbsp;  <br>눈이 사물을 주목할 때, 인간은 배경에 대해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반면 특정한 사물에 눈길이 가지 않은 상태라면, 그 사물이 속한 배경 전체를 비로소 알아볼 수 있게 된다.  &nbsp;  <br>우리가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한다’고 누군가를 비판할 때, ‘인간의 눈은 원래 그렇게 작동한다’고 말해줄 수 있겠다. 그러니 ‘너도 그렇다’라고,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말해주면 된다.  &nbsp;  <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선별한 사진들 슬라이드 보기]https://blog.naver.com/close2i/224257675652<br><br><br><br><br>@munhakdongne#박상우의포톨로지 #슬라이드필름 #눈의주시성 #필카사진 #이탈리아  &nbsp;  ​  &nbsp;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8465/83/cover150/89546551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4658319</link></image></item><item><author>초란공</author><category>철학/사회/정치/역사</category><title>식민주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 [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맥]</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218936</link><pubDate>Wed, 15 Apr 2026 20: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21893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22032121&TPaperId=172189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41/98/coveroff/k822032121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22032121&TPaperId=1721893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맥</a><br/>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구호 옮김 / 알렙 / 2025년 11월<br/></td></tr></table><br/><br>식민주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br>&lt;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gt;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조구호 옮김 [알렙] (2026)  &nbsp;  <br><br>지난달 강원도 영월의 세계 최대 텅스텐 광산이 재개장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1980년대 중국의 저가 텅스텐 공급으로 경쟁력을 잃으면서 상동광산은 1994년에 문을 닫았는데, 30여 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소식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이 있었다. 현재 광산의 소유권은 캐나다의 광산기업 알몬티 인더스트리스가 지분 100%를 쥐고 있다고 한다. 광산이 문을 닫은 시기, 그 빈자리에 외국 자본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추정 경제적 가치 약 60조 원에 이를 자원의 광업권을 온전히 외국 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nbsp;  <br>우루과이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 1940~2015)의 역작 &lt;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gt;을 느릿느릿 읽는 동안 강원에 있는 상동광산에 관한 기사를 종종 떠올렸다.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가 지난 500년 동안 겪은 식민주의적 수탈의 역사를 담아 1971년에 출간되었다. 갈레아노는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청소년기에 자동차 수리공, 외상 수금원, 간판화가, 경리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노동의 현장을 직접 겪었던 언론인이자 작가였다. 이런 삶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그는 방대한 역사 자료와 날카로운 문장으로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의 본질을 이 책에서 해부해 놓았다. 이 책이 지닌 폭발력은 군부독재 시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등 여러 나라에서 금서로 지정될 만큼 컸다고 한다.  &nbsp;  <br>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이 지닌 주제의 무거움을 조금 덜어준 것은 표지와 본문의 삽화였다. 게다가 앞뒤 표지 안쪽에도 그림이 있는 책은 드문데,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제작 과정에서 의도되었던 이런 작은 마음과 상상력을 만나는 일은 그 반가움이 배가 되곤 한다. 표지 안쪽에 있는 삽화는 아마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산타 마리아호를 타고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를 떠난 모습(앞)인듯하다. 표지 뒤쪽의 삽화는 두 개의 십자가와 갈라진 땅 밖으로 올라온 한쪽 팔이 그려져 있는데, 원주민의 무덤처럼 보이는 장면은 유럽에서 온‘정복자’가 라틴 아메리카에 출현한 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의 눈에는 배를 타고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이 모두 ‘죽음이 신’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출간 5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nbsp;  <br>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견지한 논지는 간결하지만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의 관점은 라틴 아메리카의 ‘낙후성’과 ‘저개발’이 자연적 후진성이 아니라, 무려 500년에 걸친 체계적 수탈의 결과라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잘 모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저자의 입장은 지극히 명료하고 비판적이다. 또 한편으로는 삽화가의 경력을 지닌 언론인다운 위트가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정복자들이 규정해 온 표현)이 아닌,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점에서 선택된 언어가 낯설었지만 이내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16세기 스페인·포르투갈의 라틴 아메리카 정복 이후 영국, 미국으로 이어지는 식민주의적 수탈의 연속성을 추적하며, 풍요로웠던 땅이 어떻게 빈곤과 죽음의 땅이 되었는지 집요하고 치밀하게 서술해 나간다. 금과 은, 사탕수수, 면화, 카카오, 고무, 석유에 이르기까지, 자원이 풍부할수록 그 땅의 원주민들이 더 가난해진 역설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nbsp;  <br>책에서 인상적인 대목 한 가지를 꼽아본다면,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과 멕시코 금·은광 채굴 과정과 그 결과를 들 수 있다. 16~17세기 포토시 광산에서만 백만 명의 원주민이 ‘미타(mita)’라는 강제노역 제도에 의해 동원되어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제도를 두고 “죽음으로 향하는 초대장”이라 불렀다. 광산 내부의 수은 증기와 상존하는 붕괴 위험, 혹한 및 굶주림 같은 가혹한 작업 환경 속에서 원주민들은 소모품처럼 소비되거나 죽어 나왔다. 그들은 언어를 가졌으나 정복자들의 언어와 편견에 의해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상화되었다. 정복자들의 억압과 요구에 그들은 가축처럼 무거운 짐을 나르며 쓰러져 가기도 했다. 인류의 폭력성이 현대로 오면서 감소했다고 주장하는 서구의 학자들이 있지만, 나는 이런 역사 앞에서 과연 인류가 더 나은 윤리·도덕성을 지니게 되고 성숙해 왔는지는 의문이다.<br>  &nbsp;  한편 스페인으로 유출된 라틴 아메리카 은의 총량은 당시 유럽 전체가 보유했던 양의 세 배가 넘었다고 추산된다. 이 은이 유럽의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자본으로 전환되는 동안, 포토시 원주민의 인구는 불과 수십 년 만에 격감했다. 저자는 이 현실을 다름 아닌 ‘학살’이라 불렀다. 영화 &lt;미션&gt;에서 볼 수 있듯이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식민지 수탈 과정에는 교회도 유럽 정복자들의 착취 구조를 신의 섭리로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렇게 빠져나간 은과 금 등의 자원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제적 몰락을 앞당겼다는 점이다. 이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라틴 아메리카의 은과 금 등을 비롯한 막대한 자원을 유럽에 유입시킨 장본인들이었지만, 건실한 제조업에 재투자되지 않았던 두 나라는 자원의 이동통로 역할만 했을 뿐이다. 실제적인 부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주변국으로 넘어갔다는 저자의 지적은 현재 유럽의 지형도를 다시 보게 해주었다. 오늘날 번성한 유럽의 존재는 사실상 라틴 아메리카 덕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테다.   &nbsp;  <br>갈레아노의 표현에 따르면, ‘자원은 그 땅에 있되 이윤은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형태는 각각 달라도 구조는 닮아있다. 500년 전 포토시의 은이 스페인 왕실의 금고를 잠시나마 채웠듯, 강원도의 텅스텐 역시 그 수익의 핵심이 어디로 귀속되는지 관심을 가지고 물어볼 일이다. 우리의 경우 구한말 시기에 이미 전국 각지에 있는 광산을 소유했던 것은 외국의 자본이었다. 우리 땅에서 생산된 금과 은, 구리, 철, 석탄 등을 소유했던 국가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이었다고 한다. 내가 상동광산에 관한 기사에 주목한 이유는 국내 광산을 소유한 외국 기업과 자본의 존재보다는 자원에 대한 서구 문명의 집착과 욕망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실감,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구조가 계속되리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nbsp;  <br>이 책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은, 분노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가 겪었던 현실에 대한 저자의 구조적 인식이다. 수탈은 폭력을 수반하곤 하지만 이것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폭력을 수행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자본과 시장의 논리,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기도 한다. 출간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lt;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gt;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이 땅에서 나오는 자원이 이곳에 사는 이들의 삶을 위해서도 충분히 쓰이고 있는지 자문해 볼 수 있겠다. 이 책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과 그 위에 살고 있는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강원도의 텅스텐 광산이 열렸다는 소식에 환호하고 주가를 검색하기에 앞서, 이 책을 읽은 우리는 갈레아노처럼 질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땅의 혈맥은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또 내일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말이다.  &nbsp;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41/98/cover150/k822032121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419818</link></image></item><item><author>초란공</author><category>자연과학-기술-환경-생태</category><title>과학책 읽기 ‘﻿﻿사이언스 믹서‘ 4월 후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215054</link><pubDate>Mon, 13 Apr 2026 22: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2851116/1721505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4972467&TPaperId=172150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424/4/coveroff/k48283221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3716894&TPaperId=172150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539/13/coveroff/8983716894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031375&TPaperId=172150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38/94/coveroff/k26203137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br>사이언스 믹서 - 4월 후기<br>《나쁜 유전자》 <br>제3장 - ‘사나운 유전자’ 함께 읽기   &nbsp;  <br><br>벚꽃이 떨어지는 4월 둘째 주에 세 번째 ‘사이언스 믹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꽃구경의 유혹을 잠시 뒤로 하고 오전부터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분들이 더 계셔서 안도(?)와 반가운 마음으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정우현 교수님의 저서 《나쁜 유전자》(2025)를 읽고 있는데요, 그 중 제3장 ‘사나운 유전자’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br>  &nbsp;  제3장의 흐름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동물의 폭력성과 관계된 유전자가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았던 유전학의 역사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의 답을 찾는 탐색의 출발점으로 저자는 스탈린 시대를 선택합니다. 때는 스탈린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생겨난 수많은 문제 중에서 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Holodomor)이 발생한 시기입니다. 스탈린의 소련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 아래 놓인 우크라이나의 농촌에 집단농장을 강요했습니다. 예상한대로 이 정책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저항했던 이들은 무자비하게 억압과 숙청을 겪었고 농부들은 곡물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농민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종자까지 독재자는 모두 수탈해갔던 것이죠. 그 결과 정확한 숫자가 집계되지 않지만 2-300만 명 정도가 굶어 죽었다도 추정됩니다. 독재자답게 스탈린은 서방 세계에 이 진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언론을 봉쇄하고 억압하기도 했더군요. 이 때 식량이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줄 구원 투수로 ‘트로핌 리센코’라는 유사 과학자가 등판하게 되었습니다.<br>  &nbsp;  스탈린의 비호 아래 등판했던 리센코라는 인물이 끼친 영향은 역사가 잘 보여줍니다. 멘델의 유전학과 다윈식 진화론을 부정했던 소련의 독재 체제는 이를 지지하던 수많은 과학자들을 숙청했고, 소련의 유전학과 농업은 수십 년간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숙청당한 과학자의 피붙이 가운데 젊은 유전학자 드리트리 벨랴예프가 있었고요. 그는 해외에서 인기 있던 은여우의 품종개량 연구원이었습니다. 그가 독재 당국 몰래 한 연구가 바로 ‘은여우 길들이기’ 였습니다. <br>  &nbsp;  곧 벨랴예프는 동물의 ‘가축화’ 과정을 연구한 인물입니다. 기본적인 방법은 순한 은여우 개체를 골라서 순한 개체끼리 세대를 이어 교배를 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실험을 반복하여 50년 정도가 지나자 거의 모든 은여우가 개처럼 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랜 시간 형성되어 갖추게 되는 한 생물종의 진화적 특성을, 인간의 손으로, 그것도 극히 짧은 기간에 얻어낼 수 있었음을 입증한 결과였습니다. 이 실험은 인류가 아마도 몇 만 년 동안 형성된 개의 순한 특성을 한 인간의 생애주기 이내(70년에 가까운 실험)에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연구였던 것이죠.   <br>  &nbsp;  무엇보다 이렇게 가축화된 동물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커다란 눈, 축 늘어진 귀, 동그랗게 말린 꼬리, 몸집에 비해 큰 머리, 짧아진 주둥이와 다리, 귀여운 반점 등”(125)의 공통점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유형성숙적 특징’이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성체가 아닌 어린 개체에게서 보이는 특징이 성체가 되어서도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특징을 지닌 동물들은 공통적으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br>  &nbsp;  이 결과는 이미 가축화된 말(horse)과 가축화에 실패한 얼룩말, 현존하는 150종의 사슴 가운데 유일하게 순록만 가축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운 시사점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은여우의 가축화’ 실험처럼 동물의 가축화에는 여전히 알아야할 것이 많은 수수께끼라는 점에 더하여, 얼룩말과 대부분의 사슴도 이렇게 품종 개량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던져 주네요.<br>  &nbsp;  이 상황을 좀 더 거리를 두고 본다면 ‘길들임’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메타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질문은 ‘누가 누구를 길들이는가?’가 되겠지요. 과학자들은 우리가 ‘가축화한’ 동물 역시 이 과정에 개입하고 참여한 인간을 길들인다는 통찰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공진화’의 관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죠. 특히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는 순수하게 유전적인 진화만 일어난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개체를 둘러싼 환경이나, 집단 내에 형성되거나 이와 영향을 주고받는 환경/배경이 함께 진화 과정에 참여한다는 인식이 중요한 거지요. 또 유전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명 ‘사나운 유전자’ 혹은 폭력성을 드러내는 유전자가 있는지 줄곧 찾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알아낸 사실보다 알아내야할 사실이 더 많긴 하지만, 과학 연구는 결국 “어떤 행동이나 성질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134)을 확인시켜 주었죠. 더 많이 알아낼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보이게 마련이라는 교훈은 유전학에서 빠질 수 없을 듯합니다.<br>  &nbsp;  다윈의 진화 개념이 그랬던 것처럼, 동물 종의 진화에 대한 개념이 전개되어 온 과정을 따라가면 결국 인간의 진화에 도달합니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가축화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진화와 ‘가축화’ 개념에 대응하는 설명을 찾도록 하는데요, 그 답으로 제시된 가설 하나가 ‘자기가축화’입니다. 이는 진화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이 제안한 가설입니다. 그는 하나의 종인 인류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진화해왔는지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관점은 인간의 본성이 기본적으로 악하다(‘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고 보았던 사상가 토머스 홉스의 맥락에 가깝게 여겨집니다. 인간은 침팬지와 더불어 선천적으로 ‘폭력적’인 종이지만 ‘자기가축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스스로 길들여 야만성과 공격성을 효과적으로 억제’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종’이 될 수 있었다고 보았으니까요. <br>  &nbsp;  이 개념을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인물이, 랭엄 교수의 제자인 브라이언 헤어입니다. 그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2021)에서 ‘인간이 여러 세대를 거치며 자기가축화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인간에게 협력하게 하는 능력, 다정해지는 특성을 갖게 해주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인간은 자기가축화 과정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다고 설명하는 것이죠. 하지만 과연 인간의 본성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는가, 라는 주장에는 아직 반론의 여지가 많은 듯합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은 가장 포악하고 잔인했기에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 종’이라고 말하니까요. <br>  &nbsp;  나아가 저자인 정우현 교수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결론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특별한 형질을 가졌다고 해서 어떤 환경에서든 보편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질 리는 없기 때문”(139)이라 언급하지요.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조건에서 언제나 살아남을 수 있는 형질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적자’(the fittest)라는 개념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자연선택이 일어날 때, 그 변화에 맞추어 생존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140)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적자’란 결국 그 종 혹은 개체가 결과적으로 살아남고 나서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자’의 판별은 오로지 ‘사후적’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br>  &nbsp;  한편 저자는 자기가축화 가설의 원인이 ‘다소 단편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음도 지적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자기가축화 기작을 통해 단순히 폭력성의 감소로 이어졌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환경과 문화, 교육 등의 복합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나타난 결과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자기가축화 가설의 다정함이 지니는 ‘이중성’에도 주목합니다. 인간이 자기가축화 기작을 통해 다정함을 키웠다면, 그만큼 타인에 대한 배타성과 잔혹성도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죠. 내가 몸담고 있는 ‘내집단’과 그 경계 밖의 ‘외집단’을 대하는 태도의 온도는, 이타적인 존재일수록 극명하게 나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서로 똘똘 뭉치는 집단일수록 외집단에 대해 강한 적대감도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죠. 하지만 자기가축화 가설의 입장을 주장하는 브라이언 헤어와 같은 연구자들은 이타적인 집단의 외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자기가축화의 부산물’이라고 말합니다. 폭력성이 줄곧 감소해왔다는 입장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적대감에 대해 설명하지만 썩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만약 인간의 점차 폭력성이 감소하고 다정해졌다면 이는 집단 생존의 관점에서 오히려 불리해졌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화의 법칙이 ‘다양함’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인데, 집단이 ‘다정함’이라는 특징을 얻게 됨으로써 오히려 ‘다양성’이 줄고 보다 획일적으로 변했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명제는 옳지 않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며 3장을 마무리합니다. <br>  &nbsp;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명료하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기가축화 가설에서와 같이 인간의 폭력성이 감소하고 다정함이 더해졌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네요.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이 모든 걸 다 잠재적으로 지닌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갖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가 처한 환경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여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성향을 지닌 존재 그 자체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란 상황 및 맥락 의존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앞에서 이타성과 배타성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도 동전을 던졌을 때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그 사람의 본성도 달라질 수 있다는 시각으로 이해해보는 겁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여전히 인간이 드러내는 폭력성을 단순히 ‘자기가축화’ 과정의 피할 수 없는 부산물로 취급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물론 이러한 이해가 좀 두루뭉술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본성이 (체질적으로) ‘좀 더 다정해 졌다’는 무리한 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br>  &nbsp;  그렇다면 저자가 제3장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견해와 견주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핑커는 자신의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4)에서 인류가 현재에 이르도록 폭력성이 감소해왔음을 다양한 통계 자료와 수치로 논증합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원동력으로 인간이 성취한 환경적 요인을 꼽습니다. 교육과 발단된 문화와 같은 요인이 이를 가능케 했다는 입장을 취하지요. 개인적으로는 핑커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수치와 통계 자료를 끌어오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보는 입장이라, 과학자로서 그의 연구 업적과는 별개로,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견해는 설득력이 약해보입니다.  &nbsp;  <br>개인적으로는 이 지점에서 저자인 정우현 교수가 핑커의 견해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간의 폭력성과 친화성은 환경적 요인이나 문화적 발달, 교육 방식에 따라 크게 좌우될 수 있지 않은가”(141)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점에서는 핑커의 입장과 비슷한 결을 갖고 계신 듯하긴 합니다. 하지만 저자도 핑커의 논거 제시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고자 저자가 언급한 사상가 토머스 홉스와 장-자크 루소를 소환해보면, 핑커의 입장은 인간의 본성으로 (과거에는) 폭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의 입장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반면 인류의 폭력성이 감소해온 요인으로 교육과 문화의 역할에 주목하고 이를 신뢰한다는 점에서, 루소의 입장(계몽주의적?)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br>  &nbsp;  하지만 정우현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인류가 폭력성이 감소하고 협력성/이타성이 증가하여 얻게 된 이익만으로 이 특징을 인류 성공의 보편적인 요인으로 지목하기에 핑커의 견해는 너무나 단편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인간이 보이는 협력성/이타성에 상존하는 이중성의 문제가 여전히 남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편이라고 여기는 내집단에 비해 외집단에는 여전히 강한 배타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br>  &nbsp;  어느 쪽이든 인간이란 존재는 이처럼 복잡다단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유전자만 보더라도 폭력성을 발현하는 단 하나의 유전자가 존재해서 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유전자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사나운 유전가가 있는가를 묻는다면, 여기에는 완전히 부인할 수 없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r>  &nbsp;  그럼 애초에 인간에게 혹은 그 이전의 동물에게 ‘폭력성’은 왜 생겨났을까요? 어쩌면 이 질문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방이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로 가득한 초원에서 살아가는 얼룩말을  ‘극도로 예민하고 성질이 고약한(?)’는 특징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겠죠. 얼룩말에게 ‘폭력성’은 어쩌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와일드카드가 아니었을까요. 사자나 호랑이, 고릴라처럼 강하지 못했던 인간이 ‘성공적인’ 하나의 종으로 남게 된 건, 유발 하라리 교수의 말처럼 인간이 협력적으로 큰 집단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인간이 폭력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어느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그 종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nbsp;  <br>이번에 함께 읽은 제3장에서 저자는 앞의 1장, 2장과 달리 보다 강한 어조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표현이 틀렸음을 분명히 하며 마무리합니다. 특히 우리가 ‘폭력성’이라고 부르는 생물체의 특징이 단지 진화 과정에서 사라져야할 특성이 아니라 종의 보존에 필요할 수도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물론 인간의 경우에 ‘폭력성’은 보다 다양한 맥락이 존재하므로 좀 더 주의를 기울여 판단해야 겠지요. 나아가 한 존재가 ‘폭력성’을 드러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유전자만의 특징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존재가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적인 이유, 맥락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봅니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폭력성’에는 유전자와 환경이 복잡하게 얽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배후에 있었음을 한번쯤은 의심해보라 말하는 듯합니다.  &nbsp;  <br><br><br><br>  &nbsp;   <br>                 &nbsp;  <br><br><br><br><br><br><br><br><br><br><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38/94/cover150/k26203137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1389434</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