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애의 발자국들 뒤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 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2]

 

 

지난 글에서는 파울 첼란의 발자국을 상상하며 따라가 보았다. 오늘은 다른 작가의 글에서 우연히발견한 파울 첼란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독일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폴란드 유대인으로서 20세기 전반이라는, 인류사의 유례없는 굴곡을 살아낸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말년에 그가 남긴 회고록 나의 인생 Mein Leben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우연히 다시 그의 회고록을 넘기다가 라니츠키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언급한 대목을 발견했다. 사실 우연히 파울 첼란의 전집이 나온 것과 비슷한 시기에 라니츠키의 회고록을 읽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시의 발견을 출발점으로 삼아 첼란의 삶을 좀 더 이해해볼 수 있을까 했던 것이 이번 기획(?)의 동기다.

 

라니츠키의 회고록 중에서 나의 눈길을 붙들었던 대목은 이렇다.

 

이튿날 토지아(결혼 전의 아내)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땅에 묻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얼마 후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 나오는 공중 무덤뿐일 것이다. 유대인의 자살이 아직은 생소하던 때라 묘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나의 인생, 178)

 

다시 이 부분을 읽어보니 무척이나 생소하다. ‘공중 무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자살을 미화할 의도는 없다. 다만 모든 자살에는 메시지가 있다고 믿는다. 이 메시지의 앞에는 세상을 향한’, 혹은 사회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행동함으로써 언어로 이야기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여기에 인용한 대목은 나치의 위협과 굴욕적인 대우를 받던 폴란드 망명 시절 이웃집에 살던 랑나스씨가 자살한 사건을 언급한 부분이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랑나스씨의 딸을 위로해주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랑나스씨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인연은 결혼으로, 그리고 정말로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게 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지나는 역사의 굴곡 속에서 맺어진 인연이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침 전영애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적 있는 죽음의 푸가(민음사, 2011)를 먼저 구하게 되어, 공중 무덤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시를 찾아보았다. 이 시는 1952년에 출판된 첼란의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실린 죽음의 푸가라는 제목의 시다. 그리고 이 시는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이 시집에서 가장 유명해진 시라고 한다. 참고로 시인의 집에서 전영애 교수는 이 시집이 1953년에 출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97), 큰 문제는 아니겠으나, 출판연도가 1952년인지 아니면 1953년인지 정확한 것으로 수정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시집은 이미 첼란이 파리에 정착한 1948년에 적은 부수로 출판한 시들을 재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의 푸가는 그다지 길진 않은 시지만, 번역자의 저자권 문제도 있으므로 여기에서 전문을 인용하지는 않는다. 이번 글에서는 시에 대한 소개와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  (죽음의 푸가민음사, 전영애 옮김, 2011, 40-41)

 

내가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시인이 무엇을 보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너무나 어두운 얘기만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시를 상상해보기 위해 아버지를 화장하던 날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던 검은 연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에 나를 낳아 준 존재가 매여 있다는 느낌, 더듬을 수 있는 형체가 사라져버렸다는 황망함이란 대체불가 한 것이었다. 그렇게 비쩍 마른 한 몸도 편안히 누울 수 없었을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매일 가스실로 향하는 행렬과 굴뚝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를 목격해야 했을 테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매일의 의식처럼 이들의 재를 들이마셔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동포들의 재를 들이마셨던 수용소 생존자들이 하나 같이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나 파울 첼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과 같은 것은 아닐까라고 자문한 적도 있다.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의식을, 경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첼란의 시는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쓴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라는 글을 읽었던 기억으로 이어졌다. 식인 부족의 문화를 연구하기도 했던 그는 서양인들이 이 부족들을 미개인이라고 치부해버리는 편견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야만적인 자신의 문화를 돌아보았다. 식인 행위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부모나 지인을 태운 재를 마심으로써 이들을 자신의 내부에 모시는의식에 더 가깝다.


고고학자 강인욱의 책 테라 인코그니타에서도 식인 행위의 첫 번째 배경을 사랑의 발로라고 언급했다. 떠나간 가족, 친구를 보내는 환송 의식의 하나로 그 사람의 신체 일부를 먹음으로써 죽은 사람이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 한다고 믿는 사랑의 발로”(63)라는 해석이다. 물론 첼란이 경험했던 비통하고 비인간적인 경험과 레비-스트로스의 관점, 그리고 일반적인 식인 행위의 시각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 첼란이 살아남의 자의 죽음을 증언하는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가 나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겠다. 곧 다른 동기에서지만, 타인의 재가 내 몸 안에 들어온다는 것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청년 파울 첼란의 무대로 돌아온다. 지난 글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청년 시인 첼란과 미래의 문학비평가 라이히라니츠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럽을 관통했던 역사를 기록했다. 193811, 독일에서는 나치가 유대인의 건물을 파괴하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폭력을 자행했던 수정의 밤사건이 발생했다. 조국에서 유대인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길이 막힌 파울 첼란이 프랑스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위해 프랑스로 가던 시점에, 라니츠키의 가족은 불과 며칠 전에 독일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은 앞선 글에서 언급했다


폴란드로 쫓겨 간 라니츠키의 가족은 나치군인들이 자행하는 폭력적인 위협을 경험한다. 라니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군은 할례를 받는 유대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남자들의 바지를 내리게 했고, 여자들에겐 관공서 바닥을 닦을 때, 이들이 입던 속옷을 벗어 걸레로 사용하게 했다. 어느 날 독일군에 호출된 라이츠키 형제는 우리는 유대인 개새끼들이다. 우리는 더러운 유대인이다.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라는 구호를 수도 없이 복창해야 했다. 우리는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인간의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이야기하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경험은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망가져버린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살아가는 동안에는 상황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로 연기하는 것일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결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여기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신체 전체를 통해 각인되니까. 그리고 의식은 신체와 분리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그저 몸과 하나를 이루는 몸의 일부이면서 몸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존자들의 경험과 기억이야말로 비가역적 법칙을 따른다. 이런 행위를 강압에 의해 따라야 했던 이들뿐만 아니라, 이를 강요했던 이들까지도 말이다. 이들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려면 이들이 남긴 증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히틀러의 건축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이라면 가해자의 입장을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가 남긴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증언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 정권의 전쟁 물자 생산을 총괄한 군수장관이었기에, 나치의 범죄 행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내밀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일부의 비판처럼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책인지는 읽어보면서 판단해볼 일이다. 최소한 리영희 선생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달은 정황이 있으니,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이번엔 다른 작품에서 파울 첼란의 시를 살펴보려 한다. 그의 시 죽음의 푸가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이 시를 분명히 읽었음직한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장편소설 시간 時間에서 그 정황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일본군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의 면모를 그려내었다. 공교롭게도 난징 대학살이 발생했던 시기(193712- 19382) 역시 독일에서 발생했던 수정의 밤’(193811)과 시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가해국(일본)의 작가가 피해국(중국) 장교의 시선으로 썼다는 점이다. 그는 난징 대학살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가며 가해국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여기에 첼란의 시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이다.

 

검은 점 하나로 응축된 검은 세발솥이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 세발솥은 옛사람들이 우주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우주를 데우기 위해서 수탄(獸炭)을 썼다고 한다. 세 개의 두꺼운 다리 옆에 시체 두 구가 너부러져 있다. 시체 두 구를 숯으로 해서 우주가 데워지고 있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난징을 상징하는 듯이.

(시간 時間, 박현덕 옮김, 글항아리, 73-74)

 

일본군이 수 개월간 유린한 난징의 모습을 시내로 나간 화자가 관찰하는 대목이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라는 대목에서 나는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떠올렸다. 그 이유는 홋타 요시에가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이 1955년이라는 시점과, 1918년생인 그가 30년대 말 혹은 40년대 초에 게이오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는 것을 바탕으로 상상해볼 뿐이다. 나아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 죽음의 푸가가 실린 시집 양귀비와 기억1952년 혹은 1953년에 출판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미 1948년에 자비로 소량 출판한 책에 실려 있었기에 추정해보는 것이다. 요시에는 대학시절(30년대 말, 40년대 초) 이미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했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당대의 시인들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보았을 법하다. 물론 첼란은 파리라는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독일어로 시를 쓴 시인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요시에가 첼란의 시를 읽었는지 여부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첼란이 세상에 내놓은 살아남은 자의 증언을 요시에가 읽었다면, 그리고 첼란의 부모와 지인을 죽인 자들의 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그 정황을 요시에가 인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소설을 쓰기 전에 선체험으로 요시에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말이다. 나는 그 가능성에 주목하고 상상해보고자 했다. 요시에가 시간 時間을 씀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신변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을 이러한 글쓰기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첼란의 언어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상상해보는 것이다. 반성적인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첼란(1920년생)과 라이히라니츠키(1920년생)과 동년배인 요시에(1918년생)가 겪은 세계사적 사건들을 함께 바라볼 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마지막 길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은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특수한 그의 삶을 닮았다. 시인은 투병을 시작하고, 가족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으로, 센 강 근처의 집을 얻어 따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04월 어느 날 그는 파리 센 강에 투신한다. 투병 중이던 그의 방에는 카프카의 책이 펼쳐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독 속에서 병마와 싸웠을 그는 당신이 나를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버림받은 느낌이고 외롭습니다”(시인의 집, 69)라는 카프카의 구절에 밑줄을 쳐놓았단다. 언젠가 파리에 가게 된다면 시인이 보았을 거리와 파리 식물원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았으면 한다. 그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플라타너스의 잎뿐”(시인의 집, 89)이라던 시인의 시선을 떠올릴 수는 있을 테니까.

 

추가로 파울 첼란의 삶과 작업에 보다 가까이 가기 전에 두 가지 작품에 주목해본다. 하나는 첼란의 후기 시집 숨결돌림 숨결수정이라는 시에 관심이 간다. 이 시는 아내 지젤의 판화작업과 나란히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 공동작업이라고 한다. “이 공동작업은 아름다운 부부애의 예로 꼽힌다”(93)라는 전영애 교수의 말을 기억해두기로 한다. 시인과 화가 부부가 만들어낸 판화 시화집이 나온다면 꼭 소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나온 파울 첼란 전집 2권에는 숨전환(1967)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것 같다.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집에서 언급한 시집 숨결돌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숨결수정이라는 시가 파울 첼란 전집 2권에서는 어떤 제목으로 소개가 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또 주목해보고 싶은 첼란의 작업 하나는 독일 시인 잉에보르크 바하만(1926-1973)과 파울 첼란이 주고받은 편지 묶음 마음 시간 Herrzeit이다. 전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제목은 첼란이 바흐만에게 써준 스물세 편의 시 중 쾰른, 암 호프라는 시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시는 파울 첼란 전집 1권에 실려 있다. 쾰른, 암 호프는 두 사람이 쾰른에서 재회했을 때 첼란이 써준 시다. 시인의 말년에 두 사람은 시를 매개로 하여 많은 교감을 나누고 사랑했던 사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전후 독일 문인들의 모임인 47그룹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룹에는 독일 문학계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모여 있었다. ‘47그룹은 첼란과 바흐만을 비롯하여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문학비평가 라이히라니츠키까지 참여하던 모임이었다.


시를 떠나 두 시인의 배경을 살펴보면 두 사람이 얼마나 이질적인 조건을 지닌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첼란은 나치에 의해 부모를 잃고,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가 모국어인 까닭에 독일어로 시를 써야 했던 시인이었다. 국적을 잃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첼란과는 달리, 바흐만은 골수 나치 당원의 딸이었으며 독일 문단과 문화계의 주목을 받기까지 했던 시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오로지 시를 매개로 교감을 나누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도 대조적이다. 첼란은 센 강에 투신했고, 바흐만은 로마의 집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길지 않은 이 시인들의 삶 후기에 이루어졌던 작업들을 이 작품으로 접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 함께 언급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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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애의 발자국들 뒤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 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1)

 

 

작년(2020) 말에파울 첼란 전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시 전집은 1920년에 출생한 첼란의 탄생 100주년, 사후 5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으로 나오게 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시인 허수경의 유고 번역작업이기도 하여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가 그의 시를 읽어본 것은 없다. , 한두 편은 있을 것이다.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가 독일어권 시인들의 자취를 찾아다니며 써내려간 시인의 집에 인용된 시 몇 구절과 만난 인연은 있다.

 

시는 언제나 읽어보고자 하면 번번이 높은 장벽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전문 번역자에게도 매우 난해하다고 알려진 첼란의 시에 굳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시인의 집을 통해 알게 된 시인의 삶을 조금 들여다보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마주해야 했던 삶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여러 번 읽어보았던 책이지만, 다시 파울 첼란이 살던 집과 자취를 찾아간 대목을 읽어보니 처음 읽는 것 같이 새롭다. 언젠가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만나는 파울 첼란 전집을 읽어보길 바라며, 충동적(?)으로 첼란의 삶을 가능한 한 조사하고 기억해두고 싶었다. 오늘은 전영애 교수의 시인의 집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앞서 지나 간 첼란의 흔적을 밟아 따라가 보고자 한다.

 

먼저 파울 첼란은 루마니아의 끝자락인 부코비나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192011). ‘너도밤나무숲혹은 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는 부코비나에서 성장했단다. 하지만 가혹한 역사는 식물을 유난히 사랑하던 유대인 청년을 가만히 놔주지 않았다. 나치에 끌려간 부모는 그가 23세일 때 목숨을 잃었다. 그가 18세 일 때(1938) 의대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루마니아에서는 이미 유대인에 대한 엄격한 정원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에 있는 의대로 진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던 중 독일을 지나게 되는데, 그 다음날이 바로 나치가 유대인들의 건물을 급습하여 파괴를 일삼았던 수정의 밤(1938119)’이었다고 한다. 수정의 밤이란 이름은 깨져버린 수많은 유리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밤의 불빛에 반짝반짝 빛났던 광경에서 나온 명명이라고 알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정의 밤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 훗날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또 다른 유대인 청년이 독일에서 추방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독문학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가족이 추방당해 폴란드로 갔던 것이다. 게다가 라니츠키는 파울 첼란과 동갑인 1920년 생이었다.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하던 시기,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청년은 프랑스가 있는 서부로,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청년은 다시 폴란드가 있는 동부로 이주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떠올려보게 된다. 수정의 밤 이후 나치는 10,000명에 가까운 유대인을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전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부헨발트라는 이름 역시 너도밤나무숲혹은 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순간, 같은 의미를 지닌 부코비나에서 출생한 첼란의 삶이 교차한다. 그에게 이 나무의 의미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짐작해볼 뿐이다.

 

나치의 손에 부모를 잃고, 노동수용소에서 우연히살아남은 시인은 전후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19487월부터 파리의 센 강에 몸을 던졌던 19704월 까지 22년 간 이곳에서 국적 없는 유대인이자 철저한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독일에는 평생 한 번도 살아 본 적도 없지만, 독일어가 모국어였던 시인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이들의 언어를 모국어로 해야 했던, 뒤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수용소에서 잃고, 부모를 죽인 이들의 문학을 이들의 언어로 평생 글을 써야 했던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삶이 다시 소환되는 지점이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거대한 운명의 물결을 누군들 거스를 수 있었을까? 라이히라니츠키는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첼란과 라이히라니츠키의 운명을 일별해보니 이들과는 또 다른 대척점에 있는 한 유대인의 삶을 떠올린다. 바로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다. 그는 무엇보다 질소고정법으로 공기에서 질소를 얻고, 이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합성비료를 만드는 데에 하버의 발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하버는 이 공로로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친구이기도 하며 역시 유대인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버가 살충제 개발을 한다는 명목으로 청산염 개발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과학저술가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금지된 지식에 따르면, 이 청산염은 세포의 신진대사를 방해해서 신체 내부 질식’(175)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나치가 대량 학살에 사용했던 치큰론베라는 독가스의 원리를 하버가 만들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독가스가 자신의 형제자매를 학살하는데 사용되었던 모순적인 역사의 진실을 읽을 수 있다.


다시 첼란의 파리로 되돌아온다. 전영애 교수는 시인의 자취를 따라간 기록에서, 시인의 시선을 상상하며 시인이 보았을 법한 풍경을 바라본다. 교수는 주소 몇 개와 지도 한 장만을 가지고 시인이 살았던 집들과, 걸었음직한 장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플라타너스의 잎뿐이라는 첼란의 문구를 기억하는 교수는 시인이 바라봤음직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들을 발견한다. 문득 시집 한 권과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 헤매던 전영해 교수의 시 읽기가 궁금해졌다. 나도 시를 읽는 방법과 관련하여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해서다. 전영애 교수는 파울 첼란을 읽는 일로 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며, ‘(첼란의 시가) 쉽게 읽히지 않지만 소중히 읽을 수밖에 없는 시라고 말한다. 시인의 집을 펼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교수는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이 또다시 새로운 이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66) 한 줄 한 줄 시를 읽어나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유독 시와 거리가 먼 유형의 사람이지만, 시인의 삶과 이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다보면, 이들은 자신의 작업물을 발견하고 따라가는 이들에게 초라하고 작은 삶을 소중히 하라는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지닌 이들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다음 글에는 여러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첼란의 흔적으로 이어가보려고 한다. ‘역사와 언어에 대한 회의를 표현했다고 하는 첼란의 언어를 일부나마 들여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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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섬

: 장 지글러가 말하는 유럽의 난민 이야기

장 지글러(Jean Ziegler) 지음 |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한 해를 마무리하며 환대의 전통을 생각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할퀴어버린 한 해가 저물어간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고립감을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중국의 전설적인 요순시대를 제외하고는 태평한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 싶다. 어느 시대건, 지구상의 어느 곳이건 사람에게든, 동식물에게든 태어나 살아가는 일은 지난한 과업인 것 같다. 우리 조상도 어려운 시절에 서로 돕고 상대방을 품어주던 풍습이 있었다.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우연히 고대 철학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처음 접했다.

 

그 중에서 특히 플라톤은 특이하게도 대화형식을 빌어 자신의 철학을 문학작품처럼 집대성해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플라톤의 대화편인데, 여기에는 종종 고대 그리스에 있었던 환대(xenia, 크세니아)’의 전통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어떠한 이유로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타인 혹은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상대방(주인)은 도움을 요청한 이(손님)를 환대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전통이 고대 그리스의 정의관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대의 전통은 시기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오디세이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며,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도 이 환대의 전통에 따른 인물들의 행동을 찾아볼 수 있다. 나아가 환대의 전통에 따른 당대의 정의관에 따르면, 주인의 도움을 받은 손님은 주인에 대한 빚을 적절하게 보답하는 것 또한 (기대되는) 올바른 응답이기도 했다.


국내의 여러 그리스 고전 연구자들이 쓴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에서도 이 환대의 전통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방인에 대한 환대(크세니아)는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었고, 제우스는 크세니아를 보호하는 신이었다.”(41) 그러니까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의 주요 배경인 트로이 전쟁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 환대의 전통에 따른 정의관을 어겼기 때문에 발발한 사건이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왕국에서 환대를 받고서는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데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또 어떤 면에서는 헬레네가 트로이 전쟁 중에도 파리스와 트로이의 보호를 받은 것 역시 이러한 전통이 양쪽 사회에서 당연히 지켜지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근에 조금 책장을 넘기고 있는 플라톤의 자연철학을 담은대화편티마이오스에서는 아예 자연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대화의 도입부에서 이 환대의 전통에 얽힌 상황이 등장한다.

 

티마이오스: “어제 당신에게서 제대로 손님 대접을 받은 마당에, 우리 남은 이들이 열의를 다해 당신께 보답하려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온당치 않은 일일 테니까요.

(티마이오스, 17b, 김유석 옮김, 아카넷, 25)

 

이처럼 고대 그리스에 명백하게 존재했던 환대의 전통을 장황하게 꺼내들은 이유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장 지글러의 신간 인간 섬의 주요 배경이 바로 그리스의 여러 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인간 섬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고대 그리스의 환대의 전통을 떠올렸다. 이 책은 유럽 연합이 유럽으로 유입될 수 있는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 전쟁과 고문, 국가의 파괴 등을 피해서 그리스 해안으로 접근하는 수천 명의 난민들을 받아들이는’(12) 핫 스폿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핫 스폿은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에게 해에 있는, 특히 소아시아 지역에 가까운 다섯 곳의 그리스 섬들을 가리킨다.

 

유엔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하기도 하고, 유엔 인권위원회 자문위원회의 부의장을 맡고 있는 저자가 핫 스폿 중 특히 가장 큰 섬인 레스보스 섬의 난민 시설을 방문하고 기록한 내용이 책의 주를 이룬다. 책에는 사진이 없어서 그 현장의 충격이 덜하겠지만, 가족이 몰살당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과밀한 보트를 탄 채 에게 해를 건넜을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환대의 전통을 갖고 있던 그리스가, 공식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의 생존에 대한 요청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핫 스폿, 특히 이 책의 주요 무대인 레스보스 섬에서 이렇게 환대의 전통이 사라져 버린 현실에 그리스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이 책에는 유럽 연합의 자금을 받고 난민들을 몰아내는 그리스 경찰들도 나오지만, 난민 구조 및 인권 보호 활동을 하는 여러 시민 단체들의 활동도 언급되고 있다.

 

인간성의 극단을 시험하는 난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이 화산섬 레스보스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이 섬이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기원전 7-6세기에 유명했던 시인 사포의 고향이면서 레즈비언이란 용어의 기원이 된 장소 때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 섬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의 부름을 받고 펠라로 가서 어린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기 바로 전의 2년 간 머문 곳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섬에서 물고기와 철새들을 연구하며 동물지라는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탐구방법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관찰하고 증거에 기반 한 보다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방법에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는 서양생물학의 시작을 알리는 작업을 했으며, 이 작업이 바로 이 섬에서 마련된 것이다. (참고 아리스토텔레스 조대호 지음, 아르테, 92-104)

 

이런 배경들을 고려해볼 때, 오늘날 환대의 전통을 보여주었던 그리스의 전통이 서양인들의 삶을 지배하게 된 자본에 의해 무력화되고, 인간성의 위기를 겪는 모습을 인간 섬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환대의 정의관에 따르면, 그리스는 공식적으로 야만의 길에 서기로 결정한 셈이다. 환대의 전통이 고대 그리스에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었다는 한 고전 연구자의 글에서 오늘날 이 섬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대의 아이러니를 읽는다.

 

레스보스 지역을 비롯한 그리스-터기 지역은 지진이 특히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유명한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지난 10월에도 강도 7.2의 강진이 그리스-터키 지역에 발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핫 스폿에서 난민 대기자들이 코로나 팬데믹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경험했을 지진을 상상해보려 했다. 우리도 전쟁과 공포, 배고픔을 극복하고자 터전을 떠난 조상의 역사가 있었음을 떠올려본다면, 이 난민 대기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 것이 옳은 일일지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당장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우리는 이들이 처한 상황과 이들이 느낄법한 감정들을 이해해보도록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환대를 응당 해야 할 의무로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보다, 도움을 요청하는 손님과 주인과의 관계가 인간사에서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상상력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인간 섬을 읽고, 저물어가는 한 해를 되돌아보며, 올해를 마무리하는 생각으로 환대의 에토스를 떠올려보았다. 내년에도 우리는 한동안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모두가 어렵지만 내년에는 나부터도 내 주변을 돌아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언급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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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과 '전염병 문학'을 생각해보며



코로나19가 올해 세 번째 유행을 시작했다고 한다전염병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버렸는지 이번 기회에 충분히 실감하고 있다개인사업자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특히 여행업과 관련한 제반 사업이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모양이다반면 출판계는 한동안 도서관과 학교가 제한적으로 운영을 해서 그런지 대체로 잘 버티고 있는 업종에 속한다 한다물론 작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언제는 넘어야할 도전이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올해 팬데믹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역사적으로 여러 전염병이 최소 2년 정도는 지속되며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을 떠올리면이번에도 쉽게 끝날 것 같진 않다특히 지금 겨울철이 되어 다시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코로나19가 나와 주변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버렸는지 생각하다가 스페인 독감이 떠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즈음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스페인독감은 1918년 2월부터 1920년 4월까지 만 2년 2개월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위키피디아 참조). 감염자가 대략 5억 명(당시 전 세계 인구의 대략 3분의 감염)이었고이로 인한 사망자는 1억 7천만 명에서 5천만 명 사이로 추산되는 모양이다코로나19는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전 세계적으로 감염자 수가 이미 5천만 명을 넘었으니 안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런 상황을 보니 이 작은 바이러스 혹은 병원균(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이 인류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염려하지만인류는 지구상에 나타난 이후 줄곧 전염병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기억해둘만 하다.

 

     최근에 우연히 국내의 단테 연구자가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의 자취를 쫓아 여행한 기록 단테를 읽게 되었다단테는 1265년 피렌체에서 출생한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35세 였던 1300년에 공직에 선출되어 공적활동을 시작했고능력을 인정받아 피렌체 최고위원이 되었다그런데 1302년에 교황을 배후지지 세력으로 둔 정적에 의해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이후 사망할 때까지 19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식객으로 망명생활을 한 셈이다단테의 삶을 따라간 이 책 중에서 내가 눈여겨보았던 부분이 단테가 말년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대목이었다마지막에 라벤나라는 도시의 외교사절단으로 베네치아에 파견을 나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1321년에 56세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우리가 읽고 있는 단테의 신곡이나 철학서 향연과 같은 저서는 그가 망명생활 중에 본격적으로 작업한 결과물이었다그가 말라리아에 걸려 일찍 사망하지 않았으면 피렌체로 교황의 사면을 받아 귀향할 수 있었을까그리고 단테가 만약 더 오래 살았다면그를 흠모하고 존경하던 조반니 보카치오를 만나 교류하며 더 풍성한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우리에게 데카메론으로 잘 알려진 그 보카치오다그 역시 피렌체(이탈리아 중부인근 체르탈도라는 곳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니유명한 단테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보카치오가 태어난 1313년에는 단테가 추방당한지 이미 11년이 지난 시점(단테는 48)으로 단테의 망명생활 중반에 해당한다단테가 객지에서 사망했을 때보카치오가 8살이었으니두 사람이 지나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단테가 오래 살았다면단테와 보카치오 두 사람도 괴테와 에커만과처럼 교류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독일의 대 문호 괴테가 노년에 이르러 요한 페터 에커만이라는 조력자가 나타나 43년의 나이차를 넘어 서로 멘토-멘티 관계를 이룬 것처럼 말이다요한 페터 에커만은 괴테와의 대화를 쓴 인물로보카치오처럼 괴테의 작품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푹 빠져있던 젊은 문학도였다고 한다노 문호에 대한 존경심으로 에커만은 10여 년에 걸쳐 괴테 옆에서 지켜보고그와 대화하며 이 기록을 남겼다단테와 보카치오 역시 48년의 나이차이가 있었으니 단테가 말년에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고 평온한 삶을 살았다면단테를 흠모하던 젊은이로 보카치오는 노년에 이른 단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그러면 후세인들은 단테의 망명생활과 고뇌에 대해서 작품을 통해서만이 아니라단테와 보카치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또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보카치오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 데카메론이 전염병의 영향으로 쓰게 된 작품이라는 것이다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는데 책 소개에 따르면이 작품은 1327년 14세의 보카치오가 1340년에 피렌체로 돌아온 뒤, 1348년에 유행했던 흑사병(페스트)의 참상을 목격하고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데카(deca-)’라는 접두사가 숫자 10을 의미하듯이이 책의 제목은 젊은 남녀 10이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 교외로 가서 자연을 벗 삼아 어울리며 열흘간 100편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이라고 한다말하자면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를 떠나 교외에서 자가 격리를 하던 젊은이들이 스스럼없이 나눈 대화록이라고 예상해본다당대(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과도기)의 젊은이들이 삶을 어떤 식으로 향유하고 바라보았을지 엿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전염병이 등장하는 다른 문학을 떠올릴 때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빼놓을 수 없다사실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는 소설이라 읽어보긴 했는데처음 읽었을 때는 다소 밋밋하게 다가오긴 했다이 책에는 베네치아에 유행하기 시작한 전염병이 등장하는데나는 단테 역시 베네치아로 가던 길에혹은 베네치아에서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걸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베네치아에 물이 많아서 그런지 향후에 이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모기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이 소설의 주요 모티프는 노작가의 소년에 대한 동성애적 집착(파이데라스티아소년애)이다작가 토마스 만의 동성애적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고 보다 이해가 되었다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와의 플라토닉’(동성애관계를 떠올려보면서 말이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전염병은 작품의 주제와는 무관할지 모르지만이야기를 끌고 가는 가장 주요한 장치 혹은 제한조건으로서 기능한다고 이해된다.

 


     











     또페스트하면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 카뮈의 페스트이다소설의 배경은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 서북부의 도시 오랑이다오랑 시는 카뮈가 27살에 파리에서 결혼하고 이듬해에 돌아와 교편을 잡았던 도시이기도 하다카뮈는 교편을 잡으면서 동시에 페스트를 준비하고 이방인을 출간했다도시에 어느 순간 쥐들이 나타나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도시에 페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한다인간의 거주지에서 함께 사는 쥐의 벼룩이 인간에게 전염시켰던 것인데코로나19가 발병했을 당시에 우한 시가 봉쇄되었던 것처럼 오랑 시가 봉쇄되는 것이다소설에서 죽음과 마주한 고립된 오랑 시의 시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들을 읽을 수 있다나는 인간과 자연이 대립하는 시공간에서 연대하고 인간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다고 읽었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전염병과 관련한 소재가 등장하는 작품에 우루과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가 있다이 단편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된 주제는 삶과 죽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그리고 그 사이에 광기라는 것이 매개한다작품 중에는 인간과 자연과의 대결에서 여지없이 패배하는 인간의 이야기도 나오지만기이한 사랑의 이야기도 있다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광견병에 걸린 개가 그것이다모두 단편이므로 줄거리를 이야기하지는 않겠다다만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배경은 모두 병원균와 관련이 있다. ‘뇌막염은 대개 혈관을 타고 뇌에 침투한 바이러스나 세균(박테리아)에 의해 발병된다고 한다이 바이러스나 세균을 전달한 매개체는 아마도 모기나 벼룩진드기와 같은 녀석들일 것이다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기이한 사랑이야기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와 관계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해준 단편이다.

 

     키로가의 광견병에 걸린 개역시 광견병이 주요 모티브인데우리가 흔히 개가 물을 무서워하는’ 공수병이라고 부르던 것이다광견병 역시 광견병 바이러스가 중추신경계를 감염시킴으로서 발병한다광견병이 무서운 것은 광견병에 걸린 개나 야생동물(너구리오소리박쥐 등)에 물리면대개는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전염병이기 때문이다광견병 바이러스는 스스로를 전파시키기 위해 숙주를 상대적으로 빨리 죽이는 대신공격적으로 다른 동물을 물어서 자신을 전파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물론 정확히 말하면 이런 의도를 가졌다고 의인화해서는 안되겠지만결과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전염병이 숙주를 상대적으로 오래 살도록 하는 대신다양한 방법(설사재채기기침콧물 등)으로 자신을 다른 숙주에게 전파시키도록 진화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광견병은 특히 개가 인간 사회(수렵-채집 사회)에 사냥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지면서 함께하게 되었을 것이다야생에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의 침범(사냥)을 계기로그리고 이 개를 매개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허버트 조지 웰스는 우리에게 워낙 유명한 공상과학 소설 작가이지만기본적으로 과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특히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한명이었던 토마스 헉슬리로부터 직접 진화론과 생태학 등을 배웠다고 한다웰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19세기 말에 핵전쟁과 세균전광선총로봇 등을 예견한 것으로 유명한 SF소설 우주 전쟁(1898) 때문이다전염병과 관련하여 주목해보면이 세발 달린고대 그리스의 세발솥 같은 로봇을 타고 파괴를 일삼던 화성인들이 갑자기 전멸하게 되는 이유가 지구의 세균에 대한 면역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이긴 하지만박테리아와 면역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었다면 쓰지 못했을 놀라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책의 전반부보다는 후반부에 작가의 문명 비판적인 시각이 많이 드러나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소설이다톨스토이의 소설들처럼 작가의 말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공상과학 소설에서 작가의 비판적인 철학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개인적으로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작품에서 작가가 직접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이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하고자하는 말을 많이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전염병과 관련하여 떠올린 작품이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가 쓴 장편소설 최후의 인간이다아직 이 책 역시 읽지는 못했지만조만간 읽어보려는 목록에 들어있다불치의 전염병으로 인류가 전멸하고 한 명이 살아남는, SF의 고전이 된 이야기라고 한다프랑켄슈타인에서도 그렇지만뭐랄까 메리 셸리 역시 죽음대한 강박 같은 것이 있었을까 추측해본다전류를 흘려주어 죽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장면을 직접 보았을 메리 셸리를 상상해본다프랑켄슈타인이 죽음에서 생명을 주는 이야기라면반대로 최후의 인간은 인류의 생명이 사라져가는 풍경을 묘사했던 것 같다이 두 이야기의 중심에 모두 죽음에 관한 문제가 자리한다메리 셸리의 어머니 역시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사망했으니작가에겐 이 죽음이 평생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지 짐작해볼 수 있겠다죽음에 대한 강박이 작품에 드러내는 작가는 앞서 언급한 오라시오 키로가도 만만치 않다.

 

     메리 셸리 역시 작가 소개란을 보면 죽음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첫 아들이 출생 직후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자녀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부모보다 자녀가 먼저 죽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을 상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게다가 25세에 남편이 익사하여 미망인이 된 그녀는 시인 바이런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소식 이후 최후의 인간을 완성했다고 한다문학사상 최초로 세계 종말을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가 따르는 이 소설에 불치의 전염병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만 남고 먼저 사망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언제나 갖지 않았을까성인이 된 메리 셸리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책을 하기도 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추측이지만 첫 남편의 사망 이후평생 홀로 살았던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과 관련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이런 배경을 이해하면 최후의 인간을 읽을 때인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의 고독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혼자 남은 그 사람이 바로 메리 셰리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코로나를 극복하자는 구호로 많은 것을 감내하고 있는 상황이지만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이 코로나19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우울한 결론일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냉엄한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전염병과 관련하여 암울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장회익 명예교수의 저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보면 고전 물리학을 정립한 뉴턴에 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기적의 해 1666’(103)이라는 소제목을 단 글에서 뉴턴이 고전 물리학을 정립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1665년에 학사 학위를 받고 혼자 공부하던 뉴턴은 그 해에 영국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던 역병(페스트)를 피해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역병이 유럽을 2년 가까이 휩쓸고 지나가버린 후 정상화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왔을 때그는 이미 고전 물리학을 정립해냈던 주요 연구를 고향집에서 이루어냈던 것이다이 결과에 간접적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역병(페스트)라고 할 수 있다그러니 페스트가 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과학사에 있어서는 기적의 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역병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신화 만들기에 활용한 사람도 있다바로 나폴레옹과 파시즘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알려진 시인이자 선동적인 정치가군인호색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다파시즘의 서곡단눈치오에서 단눈치오는 도시의 사령관으로 지낼 때, ‘야파(오늘날 이스라엘의 자파 지역)에 창궐했던 페스트 환자들에게 과감하게 손을 내밀었다는 나폴레옹의 신화를 떠올렸던 것이다그리고 나폴레옹의 신봉자였던 단눈치오 역시 전염병이 돌던 병사들의 막사를 돌면서 나폴레옹이 했던 것처럼 정치적인 쇼를 하기에 이른다전염병이 신화만들기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이 정도 사례는 아니라도 비슷한 전략은 오늘날 국회의원 선거철만 되면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광경이긴 하다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진 않았지만여기에도 야파를 비롯한 이스라엘 지역에 창궐한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들이 심심치않게 등장한다아울러 여러 문학작품에도 이 야파그러니까 지리학적으로 비옥한 초승달지역의 지중해 연안 지역에 속하는 이스라엘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도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흑사병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흑사병의 귀환이다이 책도 다음 기회에 읽을 목록으로 생각해두었는데역사학자와 동물학자가 함께 써내려간 흑사병 연대기라 할 수 있다한스 홀바인의 그림이나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그림에 자주 등장하곤 하는 해골은 중세인에게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 삶의 요소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특히 당시에는 원인도 모르는 전염병등을 통해 언제 죽을지 모를 상태에서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죽음에 관해 많은 성찰의 기록을 남겼던 수상록의 작가 몽테뉴도 책에서 자신의 마을을 휩쓸어버린 역병에 대해 이야기 한다역병이 자신의 마을을 휩쓸고 있을 때몽테뉴는 자신의 몽테뉴성에서자가 격리를 하며 삶과 죽음에 관해 성찰하고 에세이를 썼다는 말이다이렇게 전염병과 관련한 문학 작품도서를 생각하다보니 전염병이야말로 인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던가 싶다중세 유럽에 페스트가 휩쓸고 가버린 후살아남은 이들은 신의 자비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지 않았을까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배경에는 유럽인이 세계로 퍼져나가고무역을 통해 신흥 귀족이 부를 축적한 물질적인 배경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전염병을 통해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극적으로 뒤바뀌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본다.

 



     










     전염병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상상하다가 여기까지 왔다올해 읽은 책들을 정리하지 못해 이 기회에 전염병과 관련한 도서전염병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을 떠올려 보고 몇 가지 읽어볼 도서도 모았다물론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이 더 많을 것이다발견하는 대로 전염병 문학리스트에 추가해나가려고 한다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콰먼의 책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를 읽고 새롭게 알게 된 것은전염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와 세균의 관점에서 인류를 최종 숙주로 삼은 것은자연스럽고 최선의 선택으로 보인다는 점이다인간은 자신의 편리함을 위해 지구의 모든 자원을 착취 활용하며 그 수가 유례없이 증가하고 있기에인간은 바이러스에게 숙주로서 좋은 조건을 다 갖추었다다시말해 인간은 바이러스와 세균에게 가장 핫한숙주다무엇보다 인간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무한정한 이윤추구 활동으로 인해 바이러스와 병원균의 숙주되기를 자초하고 있다.



      











     특히 인간과 동물이 함께 걸리는 이런 인수공통’ 전염병의 경우인간이 이 전염병을완전히’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이점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인간과 기타 숙주 동물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종하여 사라지지 않는 이상인간이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역사적으로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전염병과 함께’ 살아온 셈이다그러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바이러스 및 병원균과 함께 생존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특히 과도한 이윤추구를 위해 아프리카의 자연과 아마존 밀림을 파헤치고 무단으로 침범하여 훼손하지 않는 것언제든 자원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무모하게 이용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방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더 많은 비닐과 플라스틱을 사용하며더 많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단순히 경제가 파탄난다는 것을 우려하기 전에 우리가 맞물려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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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로런스 웨슐러(Lawrence Weschler) 지음 | 양병찬 옮김 | [알마]

&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김승욱 옮김 | [알마]




호기심과 인간애가 충만한 삶을 보고 싶다면, 올리버 색스를...



오늘은 올리버 색스에 관한 두권을 위주로 살펴보려 한다. 올리버 색스의 사망(2015) 이후 이제 5년이 지났다. 와중에 작년(2019) 미국의 문학 중심의 잡지 <뉴요커> 전속작가였던 로런스 웨슐러가 올리버 색스 평전 And How Are You, Dr. Sacks? 세상에 내놓았다. 국내에는 그리고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 나왔다.  박식하고 박물학자와 같은 면모를 지닌 색스는 평생 호기심어린 관찰자로서 지냈다.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엉클 텅스텐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노년에 성인이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반추해본 자서전 무브 흥미롭게 읽었더랬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며 타인이 바라본 올리버 색스의 모습을 상상해볼 있었다.


     올리버 색스의 평전을 저술한 로렌스 웨슐러는 색스가 30대일 처음 만나 그가 82살에 세상을 때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교류를 인물이다. 올리버 색스의 임상기록보다도 개인적인 일기(오악사카 저널) 3자가 기록한 평전을 동시에 읽으면서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보다 선명히 그려볼 있었다. 다만 대상에 대한 묘사를 사후 기록만으로 파악하여 전달하는 경우보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조심스럽고 부담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대방을 옆에서 오래시간 지켜보고 교류해왔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글에는 거짓이나 지나친 미화가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상대방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습관, 성향 등을 파악하고 있기에 평전을 읽게 독자에게 대상이 어떤 이미지로 남게 것인지를 분명히 고민했을 같다. 저자는 책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솔직하게 색스의 면모를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리고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다른 평전과 달리, 저자가 색스와 세기에 가까운 교류를 통해 모아둔 메모와 함께 색스가 지인들과 나눈 대화를 제공하고 있고, 저자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와 가정사가 색스와 함께 하나의 직물처럼 짜여 있다. 저자의 가족들도 색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올리버 색스라는 인물을 재구성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할 있다. 저자인 웨슐러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점은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이자 글을 쓰는 올리버 색스와 많은 점에서 통했을 같다. 오랜 시간 나누던 사람의 대화 기록과 메모는 계속되었지만, 처음 색스의 전기를 쓰려던 1984년에 색스의 요청으로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무려 30년이 지나 색스가 사망하기 직전인 2015년에 색스는 저자에게 전기를 마무리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웨슐러가 쓰려고 했던 전기에 30 년에 걸친 교류가 이번 평전에 추가된 셈이다.


     웨슐러가 그려내는 색스의 모습은 무엇보다 엄청난 다독가로서의 모습이다. 자신의 전공인 신경학은 물론이고, 시와 소설 등의 문학과 철학, 밖의 논픽션 등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가의 이미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저자가 기록하는 색스의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독서의 유일한 가치는 지식 습득하기 아니라 새로운 의문 품기였어.”(282)


올리버 색스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그가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인물의 천진난만한 호기심과 상상력뿐만 아니라 강박증도 발견할 있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색스의 독서는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강박적인 독서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중시했던 것은 결국 저자들이 제공하는 지식의 권위에 압도되기 보다 여기에 맞서는 , ‘의혹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더욱 중요하다는 말로 요약해볼 있다.


     종종 등장하는 색스의 강박증적인 모습은 본인이 저술한 책들을 통해서 독자가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겠지만, 3자가 평전을 통해서도 그려볼 있었다. 자신이 남다르며, 뛰어나다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인지하고 고민했을 내밀한 생각들은 이렇게 웨슐러가 모아둔 메모를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


영재는 허영과 나르시시즘의 끔찍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법이야. (…) 나는 때부터 그런 압박감을 느꼈던 같아.”(460)


이런 표현을 자신의 자서전에서 쓰기란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웨슐러가 색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바라본 것은 재능이 많고 완벽해 보이는 인물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라는 점이다. 웨슐러는 때로 엄살과 지나친 강박증 건강 염려증을 보이며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내면의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이를 신뢰와 애정어린 시선으로 색스를 한결같이 바라보았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지 궁금했던 저자가 올리버 색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기쁨 눈물을 흘렸던 이유였다. 정서는 과연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일까? 내가 공감이나 상상력이 부족해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독후기록을 쓰면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있었다.


1984 말에 쓰려던 올리버 전기를 2019년에 마무리하게 것은 바로 때문이다.”(523)


만약 내가 유명인인 누군가와 세기 가까이 교류하며 사람의 많은 일상, 장점 단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사람에 대해 인간적인 애정과 존경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데 이제 30년이 넘게 시간이 흘러서 지인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사람에 대한 전기를 오랫동안 쓰고 싶었는데, 진전없이 중단되었다가 사람의 죽음에 앞서 다시 시작할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대상보다 먼저 사망하지 않고 그에 대한 전기를 마무리할 있게 것이 기뻤을 같다. 그렇지 않을까? 나는 사람의 삶을 정리해보겠다는 일생의 목표가 다시 생기고, 사람과의 좋았던 추억을 다시 떠올리며 상대방의 현존을 놓치지 않고 계속 함께 있게 것이다. 나는 아마도 점에 우선 감사한 마음이 같다. 웨슐러가 올리버의 부음 소식을 들었을 기쁨의 눈물을 흘린 배경에는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이런 감정과 소회가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웨슐러가 나를 압도한 번째 감정은 반가움과 고마움이었다.’(625)라고 대목에서 이를 다시금 확인할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앞서 잠깐 언급했던 보다 개인적인 텍스트로 가본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아마추어 식물 애호가로서, 특히 소철과 같이 오랜 역사를 품은 양치식물을 좋아했던 색스의 색다르고 개인적인 여행 기록이다. “나는 지금 양치류 탐방여행을 위해 식물학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을 마난려고 오악사카로 가는 중이다.”(13) 시작하는 문장에서 있듯이, 저자의 흥분감과 기대감을 그대로 느낄 있다. 색스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가의 면모를 지녔지만, 무엇보다 개인적인 이야기와 학문적인(지적인)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는 글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19세기 박물학 연구자들의 여행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다윈의 저서들 뿐만 아니라 다윈에게 영향을 주었던 알프레드 월리스와 알렉산더 훔볼트의 탐사여행기를 좋아한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있다.


     책은 양치류에 열광하는 식물 덕후들이 멕시코의 오악사카로 날아가서 다양한 양치류를 살펴보고 자신들의 애정을 확인하는 여행에 관한 책이다. 물론 저자는 식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멕시코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멕시코에 1500 명이던 아즈텍인들이 50 이내에 300 정도로 감소한 역사에도 주목한다. 정복자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노예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백인의 입장에서 색스는 반성적인 입장에 있는 편이었던 같다. 물론 색스의 다른 저서에서도 이런 점들을 짧게 내비치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문제를 텍스트에서 풀어내지는 않는 같다. 내가 이해하는 색스의 입장은 백인으로서 이러한 역사의 문제를 예민하게 주시하고 인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를 독자에게 제시해주는 질문하는 , 생각거리를 던지는 가깝다.  


     책은 식물과학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통찰이 담겨있지만, 인간에 대한 관심과 관찰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집단 속에서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빼놓지 않는다. 색스가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136)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평소에 담아두고 있던 심정을 엿볼 있었다.  10일간 함께 무리 속에서 색스는 유일하게 동행인 없이 홀로 참가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글쓰는 사람으로서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도 보인다. 내성적인 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다소 불안해하곤 하는데, 유명인이면서 수많은 환자를 대하던 색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악사카에서 그가 만난 집단에 대한 감정은 무엇보다 기쁨이었다. 소속감에 대한 기쁨. 일행에는 레즈비언, 게이 커플도 있었는데, 참가자들 모두 서로 다른 조건과 무관하게 식물학에 대한 사랑만으로 상대방을 포용하고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 색스의 평전에서도 발견할 있었지만, 내가 보았던 색스의 관심받고자 하는 내면의 어린아이 덕후들의 모임에서 비로소 편견 없는 관심을 받고 만족감을 느꼈던 같다.


     한편 나는 여행일기를 읽으면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자연과 얼마나 괴리되어버렸는지도 느낄 있었다. 색스는 오악사카에서 술을 전문으로 담그는 마을, 염색을 전문으로 하는 마을 1,000 넘게 나름의 기술을 전통으로 유지해온 마을을 인상깊게 기록하고 있다. 소위 문명 사회에서 사람의 눈에 비쳤던 점들에 주목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색스는 이렇게 자신의 소회를 밝힌다.


발전되었다는 우리 문화와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 문화에서는 누구도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법을 모른다. 펜이나 연필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필요한 경우에 우리가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 있는가?”(156)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즘도 거리를 걷거나 어느 장소에 가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때가 있다. 우리 얼마나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지 모른다. 나의 생존 하나 하나가 타인의 손에 지나치게 달려있는 형국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요소를 지나치게 외주화해버린 것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 살면서 타샤 튜터 할머니처럼 스스로 사과를 재배하여 수확하여 사과주스를 만들고, 양초를 직접 만들며, 다양한 채소를 키워서 식탁에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도시는 우리의 자연 되어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젊은 세대가(전자기기를 다루는 능력 외에) 때로는 우리의 부모 혹은 조부모 세대와 달리 일상에서 스스로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하는 의구심이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던 것을 너무나 쉽게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생각해볼 문제다. 책의 맥락과는 조금 벗어나게 되었지만, 색스가 말에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경이로운 면을 발견할 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란 자체로 완전할 없다는 것도 함께말이다. 자체로 불완전한 대상으로서(사실 표현 자체도 불합리하다) 인간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이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해결될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색스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식물 탐사 여행기에서 역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호기심이 전체에서 드러나는데, 모습은 우리가 사람, 타인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특히 색스의 여행기록에서 그의 어린이 같은 호기심과 관심이 경탄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모습을 통해 이러한 단서들을 확인해볼 수도 있겠다.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어쩌면 자연과 현대인을 이어주는 유일한 에테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은 우주의 시간에 비해 지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을 사는 존재다. 나는 인간이 남긴 유산을 찾아보고 나의 삶을 돌아볼 있다는 사실에도 경이로움을 느낀다. 특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다른 이들이 남긴 궤적을 찾아보면서 남은 나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내가 올리버 색스의 평전과 여행 기록 권을 통해 깨닫게 것은 나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애정과 돌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당한 노력 역시 필요하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나는 삐딱한 사람, 도덕률 폐기론자, 변절자, 영지주의자 등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었던 적이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도덕률 폐기론의 전통 - 사실은 전통 자체 - 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 (올리버 색스의 말)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191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독서의 유일한 가치는 ‘지식 습득하기’가 아니라 ‘새로운 의문 품기’였어." (올리버 색스의 말)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282

"내 경험에 비춰보면, 사람들이 ‘타인의 노예’처럼 행동하기를 멈추고 ‘자신에 대한 주인’이 되려고 노력할 때, 열정이 폭발하여 모든 ‘순간의 기억’들을 줄줄이 소환하여 이어 붙이게 된다." (저자 로런스 웨슐러 말)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538

"우리는 죽음에 직면하여 기뻐해야 한다. ‘삶의 난제’에 열정적으로 당당해 맞서 죽음을 얻어내리라 다짐해야 한다."
(저자의 딸 사라가 올리버의 부음을 듣고 저자에게 보낸 제임스 볼드윈의 구절)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627

"나는 지금 양치류 탐방여행을 위해 식물학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을 마난려고 오악사카로 가는 중이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첫 문장 - P13

"더 ‘발전’되었다는 우리 문화와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 문화에서는 누구도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법을 모른다. 펜이나 연필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꼭 필요한 경우에 우리가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는가?"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 P156

"데이비드와 나는 마지막으로 우리들 사이의 인사를 나눈다.
‘황이철석!’
‘웅황!’
‘계관석!’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마지막 문장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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