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호 특이점 - 정규 2집 바람 불면
최성호 특이점 연주 / 미러볼뮤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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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재즈를 잘 모른다. 조금 안다고 하기에도 부끄럽다. 하지만 내 말은 틀렸다. 재즈를 ‘안다–모른다‘의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최성호의 즉흥음악을 어떤 이해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까?

어떤 음악이 좋다, 나쁘다의 정도로 반응하지 못하는 나, 특히 재즈를 잘 모르는 나는 그저 그의 연주를 듣고는 오만가지 딴생각을 하며 옆길로 샌다. 어떤 대목에선 서정적인 느낌을 받다가도, 과거의 추억으로 살며시 빠지기도 한다. 다른 어느 부분에서는 연주자들의 순수한 열정이 느껴지다가도 또 다른 부분에서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소리‘라고 느끼는 것이다. 글세다. 묘하게 자유스러운 구성과 음색에서 음색이 한마디로 ‘예쁘다‘라고 느끼는 것은 나보다도 연주자들이 더할 것 같다.

이들 연주자의 음악을 이반 일리치의 언어로 말하면 철저히 ‘자급자족적 음색‘이라 할 수 있을까. 획일화된 언어를 만인을 위한 통치로 적용하려했던 중세 언어학자 네브리하의 경우가 떠오른다. ‘표준화된 언어‘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적 지배 내지는 통제를 원했던 그의 오랜 사례처럼, 우리는 이미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노골화된 편견의 속박 속에서 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 체 타인을 평가하고 선언하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특이점과 같이 실험적인 팀이 국내에 많지 않은 것 같아 아쉽지만, 과거보다는 많아졌다는데 안심해야할까. 재즈는 특히 즉흥연주는 많은 이들의 ‘공감‘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이성에 너무 호소하며 대상을 ‘이해‘해야한다는 강박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난 특이점의 음악을 듣고 그저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상상하기도하고, 드럼 박자에 나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딴짓‘을 한다. 이들의 음악을 ‘이해‘하려하기보다 이들의 음색을 들으며 떠오른 그 때 그 때의 단상을—그리고 곧 사라져버릴—오롯이 나만의 ‘딴 생각‘을 소유해볼 뿐이다. 어쩌면 클래식과 다른 재즈의 ‘자유로움‘이라 하면 들을 때마다 나의 ‘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2집 앨범이 나온지 얼마 되지 읺은 모양이다.

특이점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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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쓰는가?>  

폴 오스터 지음 |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폴 오스터의 책을 단지 몇 권만 읽어보았지만, 이 책들 을 다시 떠올려보면 출판사나 얼론에서 그의 글쓰기를 왜 “우연의 미학”이라 소개하고 있는지 이제서야 조금 수긍하게 된다. 아무리 작고 소소한 이야기라도 삶에 내재된 수많은 우연성과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이를 이야기로 만들며 듣는이가 귀를 쫑긋 기울이고 듣게 만드는 그는 확실히 당대의 탁월한 이야기꾼임에 분명하다. 폴 오스터의 책은 무엇인지 모를 묘한 분위기(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를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이 묘한 작품 속의 정서는 초현실적인 느낌마져 들게하는데, 폴 오스터가 이야기로 만들어내면 마치 사실과도 같이 느껴진다. 심지어는 소설 속의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능력마져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 만들기는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우연을 발견하는 작가의 능력(세렌디피티: serendipity)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 속에서 우연을 발견하는 감수성과 겸허함이 겸비되어야한다.


 

<빵굽는 타자기>에서 폴 오스터는 자신의 지난한 글쓰기 역정의 단면을 드러낸다. 전업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점들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는지를 묻고있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집안이었음에도 스스로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경제적으로 부모와 독립하기로 하면서 오랜기간 동안 ‘뼈빠지게’ 노동하는 삶을 선택해야만 했던 작가를 떠올려볼 때, 삶의 불확실성에서 발견하는 우연한 관계와 아이러니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겸허함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를 써서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패트와(죽음의 선고)”를 받았다. 살해 위협으로 도피중이던 살만 루슈디에 대한 견해를 밝힌‘살만 루슈디를 위한 기도’에서 폴 오스터는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의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같은 클럽(국제 문학인 단체 ‘펜클럽’을 말함)에 속해 있습니다. 단독자, 은둔자, 괴짜들, 작은 방에 틀어박힌 채 종이 위에 글을 써넣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인생의 태반을 보내는 자들의 비밀결사인 것입니다. 그것은 기묘한 생활 방식이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만이 그것을 천직으로 선택합니다. 그것은 너무 힘들고, 대가는 형편없고, 실망이 거듭되는 생활 방식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작가들은 다양한 재능과 야심을 가지고 있지만, 제몫을 하는 유능한 작가라면 모두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할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88)


 

대학교 신입생 때, ‘우연히’ <스모크 Smoke>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누가 만든 영화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항상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영화는 담배로부터 나오는 자욱한 연기를 보여주며 시작하는데, 브루클린에 있는 작은 담배가게 주인이 작가인 단골 손님에게 들려주는 ‘괜찮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매개로 하고 있다. 매일매일 수십년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자신의 유일한 필름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워두고 사진을 한 장씩 찍는 유형학적 사진을 찍는 담배가게 주인의 캐릭터는 다소 생뚱맞긴 하지만, 일상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이 <스모크>가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끽연가인 작가가 담배가게 주인집에 초대받아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담배가게 주인의 취미인 사진찍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인은 수십 년간 모아둔 앨범 더미들을 작가에게 보여준다. 매일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모아둔 앨범은 작가에게 모두 동일한 사진으로 보일뿐이다. 작가가 건성으로 사진을 보며 넘기는 모습에 담배가게 주인은 사진 한 장 한 장을 음미하며 천천히 보라고 조언한다. 이는 <왜 쓰는가?>에서 폴 오스터가 유대계 미국시인 찰스 레즈니코프를 만난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해준다. 레즈니코프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뉴욕에서 매사추세츠 주의 케이프 코드까지 걸어갔던 여행을 언급하며 ‘중요한 것은 너무 빨리 걷지 않는 것’이고 ‘시속 3 킬로미터 정도의 속력을 유지해야만 보고 싶은 것을 모두 볼 수 있다’라고 젊은 폴 오스터에게 전해준 시인의 지혜를 연상케한다.




 

 

또 다른 우연 – 폴 오스터가 작가가 된 이유


폴 오스터가 작가가 된 이유에 대해 아이들에게 즐겨말하는 에피소드도 인상깊다. 초등학생일 법한 나이에 이미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을만큼 조숙했던 그였지만, 무엇보다도 좋아했던 것은 야구, 특히 뉴욕 자이언츠 그리고 소속 선수 들 중 윌리 메이스를 무척 좋아하는 어린아이였을 때의 이야기다. 야구가 끝나고 ‘우연히’ 윌리 메이스를 선수들 락커룸 근처에서 발견한 어린 폴 오스터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 ‘사인을 해달라’고 청한다. 하지만 본인이나 아버지, 윌리마저도 연필이 없었던 상황에서 그는 결국 윌리 메이스의 사인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날 밤 이후, 나는 어디에나 연필을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주머니에 연필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 연필로 뭔가를 하겠다는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싶었다. 빈손일 때 한 번 당했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 () 주머니에 연필이 들어 있으면, 언젠가는 그 연필을 쓰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크다. 내 아이들에게 즐겨말하듯, 나는 그렇게해서 작가가 되었다.(41)

 

‘우연’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다른 이름일 것이다. 앞으로 나의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물론 내가 어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면, 그 시험을 보게 되어 합격 또는 불합격 결과를 통해 그 다음 삶의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에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개연성을 있을 수 있지만, 언제나 인과관계로만 파악할 수는 없을 것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우연’한 계기가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다시 이 지점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중년이 된 나도 언젠가 부터는 이러한 삶의 아이러니와 ‘우연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우리가 자주 ‘삶이란 우리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바로 폴 오스터가 민감한 촉을 지니고 찾게되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의 삶은 진실로 수많은 우연과 그 전환점 내지는 방향을 제시하는 수많은 시작점(계기)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폴 오스터의 인간애


폴 오스터의 글쓰기를 ‘우연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한다고 해도, 이 표현으로는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그의 글에서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살만 루슈디를 위한 기도’에서와 같이 타인에 대한 고통에 민감하고 이를 함께하고 배려하는 정서를 작가의 에피소드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앞에서 시인 찰스 레즈니코프로부터 젊은 시인 폴 오스터가 받은 진심어린 격려의 말을 보면 폴 오스터가 얼마나 큰 감명을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는지 느낄 수 있다.



시인 레즈니코프가 젊은 폴 오스터에게 말한다.


자네가 보내 준 글 말인데…’ 그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 글을 읽으면, 언젠가 우리 어머니한테 일어난 일이 생각난다네. 하루는 길거리에서 웬 낯 선 사람이 어머니에게 다가오더니, 사뭇 상냥하고 우아한 어조로 어머니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칭찬했지. 어머니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적도 없었고, 머리카락이 다른 부위보다 특히 돋보인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네. 하지만 그 낯선 사람의 칭찬 덕분에 어머니는 그 날 온종일 거울 앞에 안장서 머리를 매만지고 치장하고 감탄하면서 시간을 보냈지. 자네 글도 나한테 꼭 그런 역할을 해주었어. 나는 오후 내내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을 찬탄했다네.(52-52)



 

폴 오스터의 글쓰기에는 이렇듯 보편적인 인간에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작고 우연한 사건 하나가 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하루의 존엄을 지켜주었다면 그것이 바로 폴 오스터가 주목하고 드러내는 그의 유일한 특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리하면 폴 오스터의 글쓰기는 뼈대가 되는 우연의 미학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더해졌기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 소설만이 아니라 작가를 드러내는 글을 통해 우리는 그 작가의 작품에 더욱 공감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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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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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아니 에르노의 책을 한 권만 읽어보면 누구나 에르노의 글쓰기를 오래 기억할 것같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는 철학을 갖고 글쓰기를 하는 작가로서 에르노의 강한 개성은 저자의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한인상을 받을 것이다. <단순한 열정>도 중년의 나이에 이미 성년이 된 아들이 있는 저자는 파리에 파견나온 한 외국 영사관의 유부남 직원과 연애한 경험을 글로써서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 작품이었다. 자신은 사실을 기반으로 썼으나, 저자가 겪은 경험을 통해 이를 회상할 때(글을 쓸 때) 떠오른 이미지의 말들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지금 표지를 다시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인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삶들을 생각할 때 썼던 그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저자의 강한 개성이 드러나는 글쓰기를 떠올려볼 때, <남자의 자리> 역시 저자가 겪지 않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책은 자신의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젊은 시절 아버지에 대한 딸의 시선, 아버지와 딸의 관계, 그리고 저자 자신의 불가피한 근원에 대해, 그리고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의 오랜 자신의 열등감과 치부의 흔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어서 강한 인상을 남긴 책이었다.


책의 절반은 분명 에르노가 담담하게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아버지에 대해 에르노가 느끼는 흔들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이 역시 책을 읽고 내가 다시 나의 기억을 더듬어갈 때 떠오른 단상의 말들일 뿐인지 모른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부모님을 방문하며 어느 새 늙어버린 아버지에게 로션 한 병을 선물하며 '아빠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거야!'(110면)라고 적은 부분처럼 아버지가 병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로서 에르노의 부모님은 평생을 줄곧 일만 했고, 교양이 부족함을 언제나 부끄러움으로 여겼던 에르노의 고민이 곳곳에 묻어난다. 자신의 '근원'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을 그녀는 그러면서도 교양을 갖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이 곳에 속한 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에르노는 늘 아버지의 변함없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에 대한 시선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유형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와 딸의 관계와는 또 사뭇 다른 무언지 모를 애틋함과 거리감이 존재하는 그런 유형이 있고, 이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공통점이 있는 모양이다. 


또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은, 롤랑 바르트의 책을 많이 접했을 에르노의 이 <남자의 자리> 또한 어떤 점에서 바라보면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과도 같은 계기(어머니의 죽음)를 가지고 부모를 회상하는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남자의 자리><밝은 방>에 대한 하나의 오마주와 같은 글쓰기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서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며 사진이 주는 감정을 돌아다보고 있다. 회상의 어느 특정한 부분이 주는 '찌를 듯이 아픈' 기억들과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 그리고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이 모든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남자의 자리>에서도 보인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오랜 옛날 헌팅캡을 쓰고 카메라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젊은 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에르노의 심정이 느껴진다. 아울러 이 사진첩에 아버지가 스크랩 해놓은 에르노에 관한 신문기사 스크랩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뿐만 자신의 열 여섯 살 당시의 사진(아마도 dust cover에 나온 사진으로 보이는 이 사진)에 드리운 아버지의 그림자를 발견하며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니 에르노가 결핍으로 가지고 있었던 교양있는 집안의 '교양'은 그녀의 부모가 평생 접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세계였다. 톨스토이의 귀족 사회를 엿보면서도 느꼈던 점은 이 '교양'이라는 이름의 허구의 모습을 프랑스의 '교양있는' 집안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대화에서 항상 '재치있게 말하는' 법을 알고 있다던가, 심지어는 감탄사를 연발할 때도 누구의 시에 나온 대사를 자연스럽게 체화된 것처럼 내뱉는 그런 교양에 나는 주목한다. 이러한 '스펙'은 노동자 가족의 딸로서 갖지 못한 특질로서 언제나 에르노에게 스트레스이자 컴플렉스가 되었던 모양이다. 한 사회가 불편해하면서도 공유하는 이 '교양'이라는 허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것일까. 배운 사람들과 노동자와 구분하기 위한 혹은 이들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도록해주는 자위장치였을까. 하지만 이제 현대사회에서 이런 모든 것을 다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것은 자본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자의 자리>에서 프랑스 사회의 또 다른 단면(그러나 내가 속한 사회와 크게 다를바 없는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남자의 자리>를 단순한 '사부곡'으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이 책의 원제는 <La Place> 곧 공간, 장소, 자리의 의미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을 지켜온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발견이자 회상이며 애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공간은 아버지가 평생을 지켰던 '물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영역이며 존재에 대한 분명한 흔적일 것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 대한 재발견 내지는 회귀는 어머니에 대한 집요한 애도를 보여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과도 너무나 닮아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93면)

글을 왜 쓰고 있는지 에르노는 끊임없이 되물었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경험한 일만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제약이 있는 그녀의 글쓰기는 오히려 더 엄정하게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고 반문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이 한 문장에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이유와 아버지와 딸인 자신의 관계의 양상을 간접적이나마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이 힘을 갖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아니 어느 딸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번역에 관하여)

피에르 르메트르의 흥미로운 소설 <오르부아르>를 번역한 임호경 번역자의 번역으로 만나는 <남자의 자리>는 역시 번역이라는 것은 쉽지 않다는 자각과 함께, 무난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잘 된) 번역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물론 딸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버지에 대한 관점과 자신의 치부의 드러냄을 얼마나 섬세하게 잘 드러내었는가라고 묻는다면 글세,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기교나 거슬림없이 무난하게 읽어나갈 수 있게 도와준 번역이라면 나는 그것이 잘된 번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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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의 시를 김형수 시인이 엮은 <시의 황홀>에서도 말하자면 '똥'에 관한 시가 나온다. <동행>이라는 시의 일부를 담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날파리야 날파리야

이제 보니 네놈밖에 알아줄 놈 없구나

산에 가서 똥 싸면

맨 먼저 웽하고 달려오는 네놈밖에"

(<시의 황홀> 78면)



고은 시인의 선문답같은 문장들이 기억날 때

한번씩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가 있다. 

읽을 때는 와닿지 않던 문장들인데,

지금 국내 상황을 보면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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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에 관련한 글이 나의 주목을 끌게 된 계기가 있다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읽었을 때이다. 쿤데라는 소설에서 '미녀의 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키치'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사전을 찾아봐도 이 키치라는 단어를 명확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답답해하던 중에 마침 어느 저자의 강연을 듣는 와중에 '키치'라는 용어를 언급한 시점부터 어느 정도 그 의미가 와닿았다.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니, 다시 쿤데라의 경우로 돌아가 곰곰히 되새겨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미녀의 똥'을 언급하는 것은 쿤데라가 '키치스러운 모든 것'에 대한 혐오를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랄까. '미녀는 화장실도 안가고 이슬만 먹고 살 것 같다'라고 하는 소름돋는 멘트도 키치의 전형적인 멘트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미녀의 똥'은 이를 단박에 깨버리는 쿤데라의 도끼였던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의 분위기가 보다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작가가 있다. 쿤데라처럼 나에게는 제프 다이어(Geoff Dyer)도 그러한 사람이다. 사실 글을 쓰는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겠지만, 특히나 제프 다이어의 경우에는 '키치'에 대한 거부반응이 느껴지는 작가이다.

20대 젊은이들의 객기에 가까운, 때로는 유치해보이는 사랑의 단면을 보여준 그의 소설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에도 '미녀의 똥'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화장실에 들어가는 순간 화장실에서 나오는 니콜과 마주쳤다.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모습이 조금은 당혹해하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들어와 문을 잠그며 알렉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장실 안에 똥 냄새가 가득했다. 그녀의 똥도 남자들의 똥과 마찬가지로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 환하게 빛나는 거울과 호텔에서처럼 깨끗한 수건이 준비된 고급 화장실이었다 - 그 냄새가 오일과 로션의 딸기 향과 섞여 있어서, 게다가 오줌을 누면서 내려다본 변기에 니콜의 배설물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쁘지 않은, 거의 이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 느낌이었다."

(187-188면)

 

물론 소설의 전개과정에서 전혀 중요하지도 않을 수 있는 이런 부분에 관해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은 소재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혹은 태도에 대한 흥미로운 공통점을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작가의 사랑에 대한 철학을 드러내는 두 소설에서 '똥'에 대한 유사한 태도를 발견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일 수 있다는 점이다. 뭐 싱겁지만 전혀 쓸모없는 생각도 해보는 것 그게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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