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봉역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연주한 Free Jazz Guitarist 최성호 특이점의 공연 후 즉흥 감상'


2016년 11월에 발매된 '최성호 특이점'의 2집 앨범 이후, EBS에서 이 음반에 수록된 곡을 중심으로 공개녹화를 진행하였다. 연주를 시작하기 직전, 즉흥음악이란 무엇일까 나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정말 몰라서 궁금증이 생긴것이었는데, 물론 나에게도 답은 없다. 그저 음악을 취미로 듣지도 않았던 나에게는 사실 매우 어렵게만 느껴지는 음악이다. 하지만 공연 중 최성호는 자신의 작곡과정을 지극히 '소소하게' 얘기했다. 그의 작곡과정은 일상에서 맞닥드리는 '작은 사건'을 모티프로하곤 한다는 것.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한 주제를 가지고 난해한 음악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나 싱겁게마저 느껴지는 일상의 어떤 순간이 최성호에게는 '낯설게 느껴지고', 이것이 그에게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글세...기타(최성호), 베이스(김도영), 이한얼(피아노), 드럼/퍼커션(백선열) 이렇게 네 명이 모여 연주를 하는 쿼텟 구성으로, 연주자들 바로 앞에서 이들의 연주를 들으며 문득 어떤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도시의 일상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고, 나는 도시를 멀리서 조망하는 그런 느낌말이다. 마치 디오라마 형식의 도시 사진처럼 작은 장난감 같은 전철이 한강의 다리를 건너고 있고, 벼룩같은 차들이 분주히 자기 갈길을 재촉한다. 점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미세한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런 도시의 원경이 떠오른다. 우리의 일상은 누가 뭐래도 각자 알아서 분주히 진행되고 있다. 거리를 지날 때, 스쳐지나가는 어느 여인은 누군가와 전화로 이야기하며 지난 주 소개팅한 남자를 흉보는 그런 대화가 잠시 들리다 사라지는 그런 도시의 일상이 떠오른다. 


즉흥 연주의 본질적인 특징일까. 특이점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들의 즉흥 연주는 마치 '문어'와 '불꽃놀이'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문어'는 주변 환경의 색과 표면 특성에 따라 순식간에 주변 환경과 동화를 이루는 능력을 갖는다. 특이점의 연주도 이와 비슷하다. 네 명의 악기가 각자가 내는 불협화음과도 같은 소리가 어느 순간 어떤 패턴을 띠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는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드럼 연주자가 갑자기 어느 리듬을 다르게 치기 시작함과 동시에, 나머지 밴드의 연주가 마치 문어 다리의 색이 순식간에 변해가는 것처럼 이들도 새로운 패턴을 따라간다. 너무나 예민한 '촉'을 훈련받은 사람들같다. 라이브 공연이라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이들은 기타리스트의 색다른 시도에 다른 멤버들이 순식간에 이에 호응한다. 탄탄한 기본실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런 예측하기 힘들어보이는 변화에 대응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 같다. 마치 문어의 한 몸처럼 이들은 자신의 색을 순식간에 바꾸는데 아주 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특이점의 즉흥 연주는 '문어'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한편 최성호 특이점의 연주는 '불꽃놀이'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불꽃놀이를 유심히 보면, 하늘로 올라가는 하나의 거대한 불줄기로부터 작고 여러 가지 불줄기로 나뉘고, 이들이 퍼지는 동안 또다시 어느 순간 각자의 점이 새로운 불줄기를 결과하는 프랙탈 구조같은 연주같다는 생각을 했다. 번져가던 작은 불줄기의 점들이 어느 순간 새롭고 더 작은 불꽃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더 작은 불꽃을 내뿜는 계기는 연주자가 의도한 새로운 연주가 진행되기 시작할 때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특이점의 연주는 이렇게 폭죽이 터지는 양상과 유사한 것 같다는 생각을 연주를 들으며 해보았다. 


예술의 장르는 서로의 경계를 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스스로 존재해나가는 것일까. 최성호 특이점의 연주를 들으며 기타리스트 최성호가 언급한 작곡 과정의 모습들은 마치 현대 사진의 과정과 매우 유사한 면이 있는 듯하다. 근대적 사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스투디움'적 요소, 다시말하면 어떤 학습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 정보에 해당하는 요소들보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반응을 일으키는 '푼크툼'적 요소에 보다 큰 자리를 내주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가 '푼크툼'을 언급할 때 사진을 바라보거나 어떤 오브제를 바라볼 때 관찰자의 내부로 관통해 들어오는 어떤 충격의 요소까지는 아닐지라도, 관찰자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어떤 인자를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최성호의 음악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눈이 고요히 내리는 광경을 무심코 지켜보다가 문득 바람이 불어 눈이 위로 올라가는 순간을 그는 포착한다. 또는 한강변을 걷다 바람이 불어 자신이 하고있던 생각의 편린들을 바람에 실려보내는 듯하다고 말하는 그는 온 몸과 마음의 힘을 빼고, 지극히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작곡을 하고 연주를 하는 연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최성호 특이점의 즉흥연주를 바라보면 Free Jazz란 연주자 중심의 지극히 개인적인 장르이면서도 그 나름의 보편적인 주관성을 갖는 '반응'의 음악이라 나 나름대로 정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Free Jazz의 본질적인 특징을 현대 사진의 맥락에서 그 유사성을 찾는 이유가 바로 이 '주관적이면서 무의식적인 반응성' 때문일 것이다. 


EBS 공연 팜플렛을 보면 최성호가 한 말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즉흥 재즈하면 뭔가 추상적인 대단한 의미를 담은 음악인 것 같지만, 저의 음악은 대부분 일상 속에서 느끼게 되는 지극히 평범한 감정들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의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공감'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자 합니다."    


최성호는 자신의 소소한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긴밀히 교감하는 연주자란 생각을 해본다. 그에게 작곡의 대상은 일상에 '촉수'를 드리우고 있는 한 무궁무진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해하고 있던 즉흥 음악, free jazz의 난해함과는 달리 최성호의 음악은 서정적인 멜로디가 자주 나온다. 이런 부분이 그 만의 독특한 특징일까. 즉흥 음악이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그가 연주하는 이런 서정적인 멜로디의 적용도 역시나 낯설긴 마찬가지다. 최성호는 이런 자신만의 특징을 억누르거나 감추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으로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점은 본인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최성호 특이점'이 해나갈 앞으로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연주자로서 만들어나가는 정체성을 확인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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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같기도하고 아포리즘 같기도 한 장석주 시인의 산문집 <달과 물안개>를 우연히 중고서점에서 만났다. 게다가 초판 1쇄. 운수좋은 날.


 시인의 산문을 읽으며 문득 문득 떠오른 생각들. 게으른 필사. 딴 생각하던 짓의 흔적을 간단히 메모해둔다. 분명 다음 날 다시 읽으면 부끄러워 삭제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이 어느 책에서 언급했던가. '졸렬한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로 끄적여 보겠다.


산문집은 시인의 내밀한 속내와 삶을 너무나 솔직하게 폭로해낸다. 

'늘 탕기보다 먼저 타는' 가슴을 가진 시인.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의 흔적을 밤새 따라가보았다.

'그건 순전히 당신 탓이다'라고 시인이 말한 후의 공백은 

시인의 삶의 고단함과 짧은 후회의 순간을 대변하는 듯하다.


(시인의 팔월)

시인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달로 팔월을 꼽는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팔월의 새벽'을 제일로 치는 모양이다.

시인은 '팔월의 새벽'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깨끗하게 빨아 말린 뒤 방금 다림질 한 면셔츠를 입었을 때처럼 기분이 좋다."(39면)라고 말이다.


이 좋은 계절, 좋은 시간에 시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읽고 또 읽는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카뮈의 <결혼 여름>, 카프카 단편선,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 등이 그것이다.


시인의 팔월 예찬은 계속된다.

"팔월이 되면 나는 턱없이 낙관적이 되고 행복해진다."(45면)


또 시인은 '생'에 대한 예찬을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46면)


이 뜨거운 팔월에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자각하면서 시인이 좋아하는 그 목록들을 떠올리고 좋아하는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시인에겐 무엇보다 큰 행복감을 주는 모양이다.



(시인의 어머니)

'비에 씻긴 말갛게 핀 앵두나무 꽃들' 앞을 지나간 시인의 어머니는 이제 '늙은 앵두나무'가 되어 그 나름의 원기왕성함으로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말하며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드러낸다.(53면)



(고독)

"능소화가 소문없이 꽃봉오리를 연 저녁, 모깃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한다. 고추장에 열무김치 얹어 비벼먹는 늦은 저녁, 양푼밥은 달고 오늘밤 잠도 잘 오겠다." (89면)


시골에서 보내는 시인의 생활은 겉보기와 달리 외롭고 단촐하다. 

불쑥 든 부끄러운 생각.

'나, 아직 모자라고 철들지 못해, 더 외롭고, 철든 후 다시 세상에 나아가야겠다. 나의 하루가 부끄럽다. 찌질한 내 인생.'


"내가 직면한 생의 단 하나의 어려움은 나 자신이 된다는 것. (...) 내 앞의 벼랑은 바로 나 자신이다."(117면)


시인은 수없이 자신을 마주한다. 바삐 살아가느라 백색의 노이즈에 파묻혀 인지하지 못했을 우리의 삶을 다시 고요히 들여다 본다면, 시인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시시각각 마주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시쓰기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방심'할 수 있는 자유.

도시의 삶은 긴장의 삶이기에 시인처럼 홀로 방심한 채 소주병을 비울 여유가 없는 것일까.

 

"싸구려 조화 같은 진홍 영산홍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늦봄지나 초여름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125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연'이란 또 다른 '인공'일 뿐이다. 앞으로의 세대는 '인공자연' 속에서 살며, 자연의 시간성이 몸에 각인된 삶을 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우리의 삶과 자연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며 만들어낸 24절기만 해도 이제 우리는 달력을 통해서 '정보'로서만 인지한다. 어르신들이야 달력의 '절기'를 보고 '자연이란 참 신기하지? 어떻게 매년 이렇게 잘 맞아들어갈까?'라고 말하곤 하지만,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파트 키드들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앞으로 아파트 난방비며 관리비만 비교하며 걱정하게 될 삶이 아닌가. 우리 인간은 우리 스스로를 부지런히 소외시킨다.

 

시인은 혼자 먹는 점심을 '일인분의 자유와 일인분의 고독으로 차려진 나의 정찬'이라 말한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이 익숙했던 나의 삼십대를 떠올린다. 나이들어 한 쪽으로 굽은 척추를 안고 걸으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목이 메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내무반에서 밤새 뒤척이던 나를 떠올린다. 삶이란 원래 이처럼 무뚝뚝하고 시시한 것이었을까.

 

"그가 먹던 빵을 내 얼굴로 집어던질 때 나는 웃어 보였다. 화내야 할 때 화를 못내는 것, 그게 비굴이야! 겸손이란 위장된 비굴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155면)

 

이 말이 나를 때렸다. 내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다 다시 가라 앉았다. 무언가에 대한 기억이 내 안에서 맴돈다. 내 안 기억 속 깊은 어딘가를 건드렸을 것이다. 순간 먹먹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이미 세상의 기대에, 무언의 규칙에 길들여져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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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다.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는 20여 년의 시간 동안 인생의 절정과 몰락을 모두 경험한다. '사실주의 소설'이라 분류되는 이 소설은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세탁소 주인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듯했던 가난한 여인의 인생 몰락과정을 너무도 우울하게(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이 실존적인 우울함은 주인공 제르베즈의 체념섞인 탄식에 가감없이 담겨있다. 

"야! 이놈의 인생은 아무리 욕심없이 살아도 소용이 없네!"(<목로주점> 제2권)

반전이란 것도 없이 가난 속에서 술과 본능적 욕구의 유혹으로 끝도 없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어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반면 저자인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이 대중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어 파리 근교 메당이라는 곳에 집을 구했다고 한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이야기로 삼아 경제적인 여유를 얻게된 것이다. 그러니 아이러니하다는 말이다. 


<목로주점>의 시대적인 배경은 1840년대 말에서 1860년대 말이라고 하니 주인공 제르베즈가 1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의 20 여년 간 한 여인이 겪는 기구한 세월을 그리고 있다. 아울러 이 시기는 산업혁명의 도래 이후, 새로운 경제구조의 영향이 소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 손을 직접 움직여 일하던 공장의 모습에서 불평하지 않고 24시간 일할 수 있는 기계의 등장으로 노동력이 불필요해지기 시작하던 사회의 모습이 소설의 구석구석 드러나고 있다. 소설 속의 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요! 이놈(리벳만드는 기계)이 우릴 쫓아내게 될 겁니다! 뭐, 더 시간이 가면 모든 사람의 행복에 기여할 수도 있고요."

이 말은 당대에 살던 사람들이 공유하고 느꼈을 법한 '기계의 도입으로 노동력이 점점 불필요해지고 소외되어가는 사회의 모습'을 잘 포착해내었다. 반면 서양의 합리적 전통의 반영으로서 도구의 발명과 개선을 추구하는 미래낙관적인 시각도 일부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인 <목로주점>은 독특한 역할을 해내는 곳이다. 하루살이 노동자들이 2주치 급료를 받아 술로 탕진해버리며 인간의 고달픔을 달래주는 공간인 동시에, 사람을 타락시키고 몰락할 여지를 마련해주는 공간으로서 매우 아이러니하고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도시가 변하고 가난한 이들이 도시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인간의 조건을 묵묵히 지켜보는 곳으로서 공간이기도 하다. 주인공 제르베즈의 남편인 함석공 쿠포가 입에 술을 대기 시작하고 몰락을 예고하는 곳이다. 아울러 제르베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폐쇄된 병원과 도축장을 지나)거리를 배회하며 '죽음'의 이미지에 둘러싸인채 한 때 남편 쿠포와 술 한 잔을 들이키며 몰락을 예고했던, 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을 담고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은 사실주의 소설답게 너무나 암울한 분위기를 전달하기에 수월하게 읽힌 소설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삶의 조건은 어느 학술적 연구보다도 더 분명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19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의 도시 주변부로 밀려나버린 숙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도시 하층민의 삶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가 보기에 생소한 '인간조건'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삶의 근본적인 양상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4차 혁명으로 이야기되는 새로운 인간의 조건은 한 번 더 우리 인간을 위해 기능할 것인지, 아니면 한 차례 더 인간을 '소외'시킬 것인지 궁금해진다. 어떤 점에서보면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이 인간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도 해본다. 결국 어떠한 결론에 이르더라도 '몰락의 독주'를 마실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목로주점 1>
(190면)
"쿠포는 제르베즈를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제르베즈도 체념했다. 빨래 더미 때문에 가벼운 현기증이 일면서 머리가 멍했고, 술냄새가 밴 쿠포의 숨결도 싫지 않았다. 직업상 주어진 더러움 한가운데서 주고받은 이날의 진한 키스야말로 두 사람의 삶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첫 추락이었다."

<목로주점 2>
(190면)
"야! 이놈의 인생은 아무리 욕심없이 살아도 소용이 없네!"
- 제르베즈의 탄식

<목로주점 2>
(284면) 장의사 바주즈 영감이 죽은 제르베즈를 관에 넣으며 하는 말
"내 말 잘 들어...나야. 부인네들을 위로해 주는 비비라게테지...자, 이제 행복할 거야. 아름다운 그대, 이제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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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만화판에 ‘2016 시사영화상 남우 주연상 김기춘‘이란 내용을 보니 한 해가 저물어감을 새삼 느낀다.

문득 올 한해를 정리할 말로 떠오른 표현.

˝저물어가는 병신년과 함께 하야!˝

올 한 해는 어느 해보다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많은 일을 겪고 바라보느라 많이 지친 한해였다.

내년 한 해는 뭘 더 바랄 것이 남아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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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ress-activist susan SARANDON>
마크 샤피로(Marc Shapiro)지음 |  손주희 옮김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자신이 스스로 내린 결정을 고집스럽게 지켜내는 이 여배우는 그녀의 영화 <의뢰인><데드맨 워킹>이란 영화를 통해서 더욱 나에게 각인된 인물이었다. 다른 여배우들보다 좀더 '묵직하고 진지한' 주제를 다룬 영화에 출연한다는 인상만 가지고 있었는데, 수잔 서랜던에 대한 책을 보고 내가 받은 인상이 틀림이없음을, 그리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양심적인 판단을 굳은 신념으로 지켜내는 인간을 알게되었다.


책을 읽으며 공감하거나 기억에 남는(분명 현재 나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내용일 것이다)부분을 기록해본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의 묘미는 질문을 던지고 화를 내고, 뭔가 바꾸고 싶어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지요. 스무 살 적에 나는 아주 신비스럽고 영적인 데 빠져 있었어요. 그때는 정말이지, 추상적인 질문이나 직관적인 문제에 파고들 수도 있었고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었어요."(53면)


60년 대에 대학을 다닌 수잔 서랜던은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은 일반적인 소시민들과 다들바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시대의 영향으로부터 무관하게 지낼 수 없듯이, 예술인으로서 사회에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한 감수성과 양심은 서랜던에게 큰 울림을 주었던 모양이다. 지금 우리의 20대는 질문을 던지고 분노할 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혹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이라면 예술활동이나 해라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인이야말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하고 지적해야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작품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테크닉'에만 골몰하는 이들은 지성인으로서의 예술가가 아니라 기예만을 습득한 이들일 뿐이다. 예술가는 지성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게을리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으로 위장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뛰는 법인"

(257면)  

: 이 말은 미국의 정치인으로서 미국의 녹색당을 이끌며 공화당과 민주당의 허위와 부패상을 비판하던 랄프 네이더가 부시 전 대통령(부시2세)를 비판하며 언급한 말이다. 기업의 이익을 앞장서서 대변하는 정책을 펼쳤던 부시 2세가 대통령 입후보 행방을 보며 비판한 말이다. 최근에 선출된 도널드 트럼프에게도 잘 어울리는 비판이다. 


  

"그녀(서랜던)는 두 주요 정당이 미국 법인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하여 진심으로 마음을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일이라고 했다."(259면)


미국의 두 주요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은 모두 결국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정체성을 간파한 수잔 서랜던의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 아울러 내가 막연히 하고 있던 생각과도 다르지 않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서랜던은 의회정치가 모든 사회 경제적 지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모든 웅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2000년의 미국이 대부분 미국법인이 꼭두각시 조정자처럼 배후에서 조정하는 엄연한 계급사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261면)


: 번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미국이라는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정확한 지적이다. 아울러 2001년 9월 11일에 있었던 "9.11테러"를 앞둔 시점이어서 더욱 섬뜩한 지적이다. 아울러 2008년 미국의 모기지 사태로 부터 발생한 세계 경제 불황과 월 가(Wall Street)에서 한 동안 이루어진 점거운동(OCCUPY Movement)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잔 서랜던의 사회참여와 현실비판의식이 더욱 돋보인다. 


여기에 메모하지 않았지만, 수잔 서랜던의 삶 자체도 매우 래디컬한 인상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10살 이상의 연하 배우 팀 로빈스와 결혼하지 않고 평생의 반려자로서 살고 있는 모습에서도 그렇고, 팀 로빈스를 만나기 전 전설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여러 영화계 인사들과 연애을 한 궤적도 특이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그러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할지 모르게지만, 나에게는 독립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간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필요한 경우 자신의 입지와 미디어를 이용하여 자신이 신념으로 지키는 가치를 위해 공공연한 자리에 나서서 연설을 하고, 정치적인 견해를 전달함으로써 사회의 변화를 이루는 데 동참하는 그녀의 삶은 역자가 밝히고 있듯이 내가 닮으려고 노력하기에는 힘든, 어쩌면 불가능한 삶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견해를 찾고 이를 추구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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