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의 과학 - 하나의 세포가 인간이 되기까지 편견을 뒤집는 발생학 강의
최영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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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학연구를 통해 세포의 놀라운 잠재성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학문적인 연구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여기에는 연구수행자의 인식의 한계, 편견이 개입될 수도 있다. 책의 처음에 언급된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저자는 수동적인 난자, 무기력한 난자 편견을 지적해주었다. 난자는 101일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수정을 유도하기 위해 나름 화학 신호를 열심히 내보낸다는 등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남성 위주의 현상 해석은 과학적인 사실을 계속해서 알아내고, 끊임없이 나누는 과정을 통해 편견을 바로잡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책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저자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의 문제를 언급한 부분 흥미로웠다. 저자에 따르면 배아 발달과정 초기에 인간은 남녀 생식기 어느 쪽으로도 발달할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인간에게는 모두 남성 여성 결정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이었다. 특히 SRY유전자라고 하는 유전자가 성별을 결정하게 되는데, 세포가 SRY유전자를 읽게되면, 남성 결정유전자들이 차례로 활성화되고, 반대로 여성 결정 유전자들은 발현이 억제된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 몸이 각자의 결정된 성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동안 세포들이 노력한다는 점이다. 실험을 통해, 성결정 유전자를 제거하니, 암컷의 난소 세포가 고환으로 변했다는 연구결과는, 점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백과사전적인 책에는 남자로 살다가 어느 시기에 여성화되어버린 사람의 사례를 적이 잇는데, 이것이 마법이나 신의 저주가 아니라 실제로 드물지만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식을 통해 성소수자들의 생물학적인 특징을 이해해볼 있지 않을까.

 

플라톤의 향연에는인간의 가지 형태의 원형들(-, -, -) 등장한다. 원형 인간이 신들의 노여움 때문에 둘로 나뉘어 지금의 남자와 여자로 되었다는 이야기말이다. 그런데 생물학을 이해하면 신화적이고 은유적인 이야기가 단순히 상상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본다. 저자는 우리 인간은 남녀 모두의 잠재성이 있다는 , 우리의 몸이 결정된 성을 유지하도록 평생 노력한다는 , 그리고 안의 다른 성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럼 우리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물을 , 이런 생물학적인 지식도 철학적 성찰에 분명히 영향을 있다. 우리 인간은 가지 성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수십 억의 인간이 각자 동일한 성의 잠재성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므로 그만큼 다양한 성적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분포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상 비정상 기준을 과연 정할 있을까? 문제는 생명을 어느 단계에서부터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정답이 없다. 그런데 가지 확실한 점은 100% 정상 남자이거나, 100% 정상 여자라는 개념은 환상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정상 남자 정상 여자사이에 무수히 많은 다양한 양상의 성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어느 쪽이 좀더 우세한지에 따라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말이다. 따라서 성의 문제에 있어서 정상 비정상 문제는 종교의 문제도, 정책입안자의 문제도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상 비정상이라는 환상은 생물학 지식을 통해 부조리함을 알아차릴 있을 것이다. 저자가 우리의 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포들이 평생 노력한다는 위의 연구는 성의 정의, 성의 유동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79)라고 언급에서 나는 성소수자 것이 본인들의 의지나 도덕적 타락 등의 문제가 아니며, 생명체의 다양성 메커니즘으로 이해할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런 다양한 성소수자 모습들은 생명체가 다양성을 위해 마련한 기작의 한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분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 있었다면하는 아쉬움은 있었으나, 기고문의 성격상 제약은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생물학적인 사실은 흥미로웠다. 그리고 지금 순간에도 몸의 세포들은 유전자의 정보에 따라 성의 발현 특징을 유지하기 위해 쉼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아가 언제는 몸에 어떤 이상으로 인해 성결정 유전자에 변형이 발생하면, 내가 여성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철학적인 시각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과정에도 분명히 생물학 연구의 결과를 고려해야할 같다. 플라톤과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생물학 지식이  없었을지라도 상당히 예민하고 명민한 관찰자였음이 분명하다. 은유적이나마 인간의 특징을 파악하고 분류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발생학을 비롯한 생물학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하게 되면 인간이 인간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있지 않을까? 수많은 편견이 영향력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되고 사회에 영향을 미쳐왔음을 역사기록에서 흔히 확인할 있다. 그러므로 편견을 바로잡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도 발생학은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있으며, 그래야한다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하나의 세포에서 수백 개의 세포로 구성된 온전한 개체로 변화되어가는 현상은 우리 몸이 하나의 소우주라는 표현이 결코 진부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사람의 세포 내에 있는 2만여 개의 유전자들이 만들어내는 소우주인 우리는 모두 경이로운 존재인 것이다. 유전자에 기록된 정보에 따라 하나의 세포가 수많은 세포로 되면서 다양한 기능이 분화하고 복잡한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배아의 분화과정에서 초기 대칭성이 어느 순간 깨어지고, 몸의 좌우 비대칭이 형성되는 기작은 상당히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특히 발생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발생 과정은 다른 동물들의 발생 과정과 크게 다를바 없으며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그러면 인간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데 도움을 있지 않을가. 아울러 우리가 거대한 자연이라는 우주 속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하는데 기여를 있다고 생각한다. 세포가 지닌 다양한 발달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생명체의 몸이 지금 모습대로 이루어진 , 그리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은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있다고 본다. 탄생의 과학 발생학자의 지식을 일반 독자들과 나누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다만 인간 혹은 생명체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인 견해를 들을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았을 것같다. 이제 과학분야의 기본 지식 없이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한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존재하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탄생의 과학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 독자로서 더욱 주목하게 되는 책이다.



˝과학의 목표란 점진적으로 편견을 없애는 것˝
- 닐스 보어- P31

˝하지만 난자도 경쟁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치열하게 말입니다.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경쟁이 배란 전에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P26

˝사실 우리 세포에는 성별에 관계없이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만드는 데 필요한 유전자들이 모두 존재합니다.˝- P77

˝중요한 것은 이런 성 결정 기작이 ‘평생‘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리 몸은 선택된 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성별에 따라 생식기 구조와 호르몬 수치가 정해진 이후에도 내 안의 다른 성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P78

˝다만 2018년, 중국에서 탄생한 세계 최초의 복제 원숭이는 인간 복제 배아의 탄생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예고합니다.˝- P109

˝몸 속 각종 기관들의 위치를 잡아주는 머리와 꼬리, 배와 등,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비대칭 덕분에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합니다.˝- P166

˝두 세포가 만나 하나의 세포가 되고, 다시 이 세포가 하나의 인간으로 발달하는 과정. 셀 수 없이 많은 물질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구조들,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쁘게 움직이거나 듬직하니 한 곳에서 지표가 되어주는 세포들, 이 모두가 정해진 규칙과 정해지지 않은 환경에 반응하여 쉴새없이 자기 몫을 해내는 시간. 이렇게 기억에 없는 기적, 내가 빚어집니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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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배신 - 무병장수의 꿈은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조영 옮김 / 부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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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배신》

(원제: Natural Causes)

바버라 애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 지음 | 조영 옮김 | [부키]

 

나의 지인 중에는 자신의 신체 컨디션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 있다. 그는 각종 측정기구를 통해 자신의 신체 상태를 체크하고 반드시 숫자로 표기된 결과가 건강한 영역 내에 포함되는지를 따진다. 물론 결과 여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체중이 늘었는데, 약한 비만 기준을 넘었다는 이유로 음식을 줄여야 하며 맛있는 식사를 피하거나 조금 밖에 즐기지 못한다. 옆에서 보면 마치 스스로에게 벌을 준다거나 학대를 하는 사람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는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나의 몸을 관리하지 못하는나를 보고는 가르쳐주려 한다. 오늘 만나게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신간 건강의 배신에서는 바로 이렇게 지나친 건강 염려증의 허상을 파헤치기도 한다. 책은 기본적으로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나올 있었는지, 의료화된 우리의 건강에 대한 관점을 검토하고,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까를 되돌아볼 있는 기회를 준다.

 

책의 저자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노동의 배신 시작으로 하여 여러 종류의 배신시리즈를 출간한바 있다. 그녀는 번째 책에서 현대 자본주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마주하는 문제점들을 파헤치고 조사했다. 나도 저자의 배신시리즈를 익히 들어서 다른 도서들을 조만간 읽으려고 하던 차에 건강의 배신 만나게 되었다. 내가 저자의 책들에 주목하게 이유는 그녀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미국사회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건강을 둘러싼 의료 현실은 미국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 사회의 모습을 책에서 많이 발견할 있다.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일부 지역이나 국가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발견할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저작들(병원이 병을 만든다 전문가들의 사회 같은 저작들)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이반 일리치의 저작을 인상깊게 읽었던 것을 기억한다. 건강의 배신에서는 크게 가지 점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맥락에서 현대의 의료문화가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는가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의 개념이란 무엇이고, 우리의 삶에 어떻게 귀결될 있는지에 관한 점이다. 사실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주제다. 하지만 나는 항목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의료화된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책에서 의료서비스의 소비자들이 어떤 의료 환경에 놓여있는지를 다각도로 고찰한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인이 의지하는 의료문화가 자본주의체제라는 맥락과 분리하여 생각할 없음을 깨닫게 된다. 현대의 의료 환경은 의학 전반 분야의 발달과 함께 거대한 의료 산업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의 의료 문화에서도 과잉 진단, 과잉 진료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환자들 혹은 내담자들이 불필요한 검진 검사를 받는 이유는 의사들이 그렇게 하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검사와 검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의 원인 하나는 바로 이윤이다. (…) 영리를 추구하는 민영 의료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29)

 

고가의 장비를 빚을 내어 개원하는 개인 클리닉의 경우, 의료인들은 이윤 추구라는 현실에 더욱 내몰리게 된다. 책에 소개된 의료 산업의 이윤에 대한 집착 혹은 광기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가 있다. 어느 의학 세미나에서 ‘100 여성이 생애 최초로 유방 조영 검사를 마쳤다 보고된 청중들이 엄청난 환호를 터뜨렸다는 이야기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노인은 검사를 받으면 안되는가를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문제의 본질은 자체로 발병의 위험 요인 되는 유방 조영 검사를 과잉 진단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 그리고 이를 광고한 아니라, 수많은 의사들, 의료관계자들이 보여준 반응 때문이다.

 

저자는 건강에 대한 정보 제공의 명목으로 건강에 대한 우려를 하는 이들에게, 의료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이용하여, 건강한 이들로부터 돈을 버는 시스템이 형성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모든 의사가 동의하는 것은 아닐 것이나, 관찰되는 양상은 의사와 병원, 제약회사가 연관되어 있다. 의료 소비자가 충분히 많은 검사와 검진을 받게 하면, 의사들은 추가 검진을 유도하기도 한다. 저자는 검사를 권하는 의사가 검진 영상 장비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을 과잉검사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의례화된 건강 검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의례라고 표현한 것은 개별 환자의 의료행위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공동체, 사회에서 의례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목적에 기여하고 있으며, 목적에 부합하고 있다는 의미가 것이다. 나는 건강 검진이 전국민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보장제도로서의 장치가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서구 의학의 의례화된 검진이 원시 부족의 치유 의례와 유사성이 더욱 크다고 본다. 구성원들에게 확신과 가르침을 주거나 단결을 강화하던 원시 부족의 의례와 비슷하게, 의례화된 검진은 건강 염려에 중독된사람들에게 환자의 권익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몸이 보살핌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저자의 경우, 의료 대상자 본인들의 주체적인 참여와 함께 실질적인 효과와 건강의 증진을 가져오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무력감과 패배감을 주고 있다고 보는 같다.

 

예컨대 일반적인 치과진료를 받던 저자가 치과의사로부터 수면 무호흡증으로 자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자신이 추천하는 의료기기를 구매하면 안전하게 수면을 취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분노를 떠올려보면 더욱 수긍이 간다. 나아가 여성의 경우 적어도 사춘기부터 폐경기에 이르기까지 의료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은 저자에게 더욱 무력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이에 저자는 의례화된 검진에서 의사의 지배적 위치와 환자로서의 복종적 관계에 주목한다. 문제는 남성 의사에 의한 여성 검진 대상자에 허용되는 프라이버시 침해 상황에서 더욱 불거진다. 사회가 용인하는 의사의 권위에 여성 검진 대상자는 자신의 몸에 대한 프라이버시 접근 권한을 무기력하게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여성 환자 혹은 검진 대상자의 생명을 구하거나 질병의 위험을 줄이지 못하고 있는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에 연례 건강검진에 적용되는 신체의 부위가 개별 의사들과 해당 검진에 대한 비용 부담에 동의하는 보험회사 기타 기관들의 이해관계가 더해진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의례화된 정기 건강검진의 무용론을 이렇게 지적하며 반문한다.

 

환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관심과 염려의 표현이라면, 의료행위가 연구실과 실험실에서 양성되어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의료 기관에서 일하는 의사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일까?”(51)

 

한편 저자는 연간3 달러의 산업으로 성장해버린 미국 헬스 케어 시스템 산업의 본질은 우리 몸에 대한 통제를 제안하고 있다는 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산업화된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미국적 자기계발 운동의 맥락과 불교 신비주의적인 종교의 영향이 결합되어 우리의 마음 자본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 나아가 현대인들이 스스로 자기 통제라는 유행에 기꺼이 참여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보아야 것이다. 우리가 건강 혹은 건강한 상태라고 믿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보다 가까워지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내몰고 있는 형국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몰두하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통제한다는 미명하에, 피트니스가 자기계발과 성장의 수단으로 확산된 것처럼 말이다. 고용상태가 불안한 직장에서 소진된 현대인들은 퇴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피트니스 센터에서 다른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이런 맥락에는 부지런함이나 자신의 몸을 돌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도덕적인 판단과 도덕적 의무의 문화가 개입한다. 그리고 과정에는 어김없이 건강보험의 존재 빠지지 않는다. 대목에선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에서 피력했던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소진되고, 소진됨에 기꺼이 참여하는 현대인들의 모습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을 다시 단순하게 정리하면 저자는 책에서 현대인은 누구나 자본화된 의료 산업의 영향력과 의사들의 지배아래 우리의 몸과 마음이 통제받게 되었음 다각도로 검토하여 보여주고 있다.       

 

 

 

건강 패러다임에 대하여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지인의 사례는 줄곧 내게 건강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의사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인 지인에게 건강이란 몸에서 측정한 수치 정상범위 내에 있는 것이다. 이건 무슨의미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거리들이 존재한다. 물론 측정된 수치가 절대로 믿을만하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하지만 정확성은 제쳐두고라도 매순간 변하고 유동하는 신체상태를 고착화된 수치로 나타내는 것은 참고의 기준은 지라도 지나친 신뢰를 갖는 것에도 나는 의문을 갖는다. 한편 우리가 정상혹은 건강 상태로 여겨지는 어떤 기준이라는 것도 나라마다, 문화마다 다르다. 게다가 우리는 기준을 정함에 있어 제약회사나 자본의 이해관계가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본 적이 있을까? 수많은 개별 인간의 편차를 두고 정상과 비정상혹은 건강과 비건강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 과연 충분한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가령 건강과 비건강의 경계 기준 언저리에 있던 어떤 사람이 어느 측정한 결과가 비건강의 영역으로 나왔고, 그리하여 평생 약을 먹으라고 권고를 받거나 호르몬 주사를 평생 맞아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볼 있다. 이건 분명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장비로 동일 항목을 측정해보니 건강한 영역에 속했다고 하면, 과연 누구를 믿어야 것인가. 혼자 결정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의료계가 정한 어떤 기준 분명히 건강과 비건강 대한 주의를 주고 환자나 해당자가 결과에 대처할 여지를 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 패러다임으로는 일시적인신체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대개 우리는 이런 일탈의 상태에서 벗어나거나 문제를 제거하는데 모든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다. 그리고 현대 서구 의학과 약리학의 입장은 이러한 관점에 입각한다.

 

지인의 경우, 이런 건강 개념에 따르면 몸을 상하게 여지도 있을 것이다. 당장 두통이 있고 감기까지 겹친 경우, 바로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오거나, 자가진단하는 경우, 감기약과 두통약을 함께 먹을 있다. 두통과 감기라는 비건강 요인이 있으며, 문제(두통과 감기) 제거가 건강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에 따라 종류의 약은 함께 복용하면 혹은 다른 신체 부위에 악영향을 있다고 설명서에 나온다. 흔히 우리는 이런 점을 간과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 나는 문제가 보다 분명하지 않는 몸의 회복력에 여지를 주는 편이다. 말하자면 건강에 대한 개념은 문제가 없는 몸의 상태보다 문제가 있을 때에도 이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능력을 포함한 상태 주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나는 몸의 상태와 감각에 보다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물론 약을 거부하거나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료를 가기 전까지의 몸에 대한 판단과정은 저자의 관점과 유사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의학이 과학과 손잡음으로써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의료 사업의 독점권을 획득했다고 언급한다. 나아가 의학이 실험 과학으로 여겨지면서 의료 행위 자체가 샘플 등의 데이터를 필요로하는 채취산업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의료 검진에서 혈액, 소변, 혹은 조직 채취, X-Ray CT스캔 장비의 영상 자료 다양한 장비와 기구를 사용한 후의 증거, 신체에 대한 수치가 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의 입장은 분명히 과학적 의료 개념 공격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신체 데이터의 권위가 너무 확고해지거나 비대해짐을 경고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가 말하는 자신의 병력이나 보다 자세한 증상에 대한 정보는 실증적 데이터보다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미국에서 에볼라 바이러스로 처음 사망한 사례가 바로 이러한 상황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리고 데이터에 대한 신뢰의 형성에는 어김없이 건강 보험 산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보험회사의 경우, 확고한 증거에 기반하여 보장할 있는 치료 범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보험회사의 입장에서 치료 범위의 문제는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으로서의 의학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맥락과도 맞닿아 있음을 상기하며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다시 건강 문제로 돌아가보자. 건강에 대한 나의 관점은 한편으로는 지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건강해지기 위한 책임을 개인에게만 지우고, 이에 더하여 건강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비난까지 곁들여지게 정황에는 민영화된 의료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없다. 여기에 미국이라는 문화적 맥락을 무시할 없을 것이다. 문화적 맥락을 결정짓는 미국적 요소에는 자본주의와 손을 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문화(근면한 자들의 자기계발 문화) 신비주의적 종교의 요소(뉴에이지 문화, 신비주의적 자기계발 문화) 해당된다. 특히 60-70년대 반문화주의의 영향과 어우러진 신비주의적인 영향으로 등장한 전체론의 관점은 내가 우리의 신체를 생각할 신뢰하고 주목하던 관점이었다. 전일적(holistic) 관점이라고도 하는 전체론의 관점은 몸과 마음이 이어져 있으며, 심신이라는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몸과 마음을 독립적인 개체로 보았던 심신이원론의 데카르트적 관점은 일찌감치 나의 관심사는 아니었는데, 아마도 신체가 기계같이 느껴지도록 했던 관점이기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같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건강 문제를 어떻게 있을까. 아마도 서로 독립적인 신체와 마음의 개별적인 건강 개념이 필요할 같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나아가면, 환원주의적 시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현대 생물학이 20세기 중반에 DNA 구조 역할에 대한 발견으로 극단적인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지지를 받았다. 반면 전체론적 시각은 분자 수준의 기능을 넘어, 신체의 부분의 협력과 조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70년대 이후 많은 지지를 받아왔다.

 

이번 독서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리의 , 건강에 대한 기존의 관점(환원주의 전체주의 관점) 불완전함을 보여준다는 사례였다. 바로 백혈구의 일종인 체내 대식세포의 이중적인 역할과 세포들의 개별적인 자율성에 대한 발견 사실 때문이었다. 대식세포는 신체의 외부에서 침입하는 세균 등을 잡아먹거나 노화된 세포를 먹어 청소하는 좋은세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대식세포가 암세포와 결탁하여 암세포의 성장과 전이를 돕는다는 결과였다. 암환자들은 면역력을 강화해야 암을 극복할 있다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의 지식 수준으로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대식세포가 심근경색이나 뇌졸증은 물론이고, 관절염과 당뇨병에 긴밀히 관여하며, 심지어 치매와 우울증, ADHD, 노화와 여드름까지도 관여한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고 저자는 전한다. 뿐만 아니라 대식세포는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며 단순히 타자(침입 세균, 혹은 노화된 세포) 먹어치워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주는 영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식세포는 무엇보다 타자 구별하여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유기체를 파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 주목해봐야 한다. 대식세포가 공격할 있음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바버라 애런라이크가 놀라면서 지적하고 있는 상황의 함의는 무엇일까. 의학계에서는 신체의 면역체계라는 관점에서 대식세포가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대식세포가 때로는 오히려 우리의 자체를 공격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자율성을 갖는 대식세포는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달리 유기체 전체에 반하여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있는존재라는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저자는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토머스 홉스의 자연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가까운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세포들의 집합체에는 이들을 통제할 왕이 없다. 따라서 우리 몸은 엄청나게 다양한 세포들의 공동체이며, 면역체계는 비유적인 공생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공생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구성 요소들 사이의 갈등과 동맹을 포함하는 전장이기도 하다는 뜻이된다. 저자는 대식세포가 보여주는 배신행위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몸의 세포들을 연결하는 모든 화학적, 전기적 커뮤니케이션에도 불구하고 다툼과 혼선이 발생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 안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조화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갈등까지 모두 포괄하는 패러다임이다.”(179)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첨단 과학의 도움과 개인의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명분으로 구축된 현대의 여러 제도적 측면은 우리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 온전한 답을 주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암시하고 있듯이, 여기저기에 우리의 건강에 대한 배신 요소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주위의 것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없이 그저 수용하기만 해왔던 것은 아닐까 자문해본다. 건강의 배신 자본의 영향으로 구축된 현대의 의료 산업의 현주소를 재검토해보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는 얼마나 의료화된 영향을 받고 있는지,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하는 건강이란 개념에 대해서도 말이다.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책의 서론에서 독자에게 전하는 본인의 바램 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책이 몸과 마음을 향한 프로젝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책은 의료 산업이나 우리의 건강 프로젝트가 어떠해야 하는지 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반면 우리가 현재 어디에 서있으며, 주체적으로 우리 삶의 결정권을 어떻게 획득할 있는지에 대해 자문해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로서 내게 주어진 과제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고민하고, 판단하는 일이 것이다. 저자는 분명히 의료의 혜택을 거부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의료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혜택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여기에 근거하여 살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저자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다음과 같이 슬쩍 내비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예방 의료를 거부한 데서 걸음 나아가고자 한다. ‘의료화된 죽음이라는 고문에 반대할 아니라, ‘의료화된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한다.  (…) 죽기에 충분한 나이가 됐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성취이며, 그것이 가져다 주는 자유는 축하할 가치가 있다.”(32)

   

나는 부분을 바바라의 건강 선언으로 이름 붙이며 마무리 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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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자 - 김인국 칼럼집 철수와 영희를 위한 사회 읽기 시리즈 1
김인국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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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

김인국 칼럼집 | [철수와영희]

 

하루라도 아무런 사건없이 평온한 날이 있을까. 오죽하면 천주교 신부가 글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판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230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일원인 김인국 신부가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국내 일간지에 기고한 서른세 편의 칼럼을 모은 책이다. 날카로운 비판보다 원색적인 비방과 공격이 난무하는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을 고려해볼 , 김인국 신부의 칼럼에 주목하게 된다. ‘2230 저자가 기고하는 칼럼에 대한 분량제한인 듯하다. 저자는 사회의 크나큰 이슈들에 대한 생각을 한정된 분량의 지면에 풀어 놓는다. 그의 목소리는 사회의 일반 구성원이자 시민의 입장에서 나오고 있다.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 준엄하게 권력을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어두운 현실에서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나는 그리 길지 않았던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요지경 세상을 체험했다. 신문에서만 보던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가까운 거리에서 있었다. 아마 오랜 시간을 사회 속에서 지낸 사람들은 사회의 부조리한 면들이 이미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졌을지 모르겠다. 백남기 농민을 전문 시위꾼이라 욕하던 회사의 임원도 있었고, ‘우리 나라가 일제 강점기 해방이 안되었으면 지금 살았을 이란 말을 하여 나를 놀라게 했던 거래처 임원을 만나기도 했다. 어느 중소기업 업체 사장은 요새 젊은이들 중에 빨갱이들이 너무 많다라며, 자신의 아파트 매매가격이 15 이하로 떨어졌다며 정부를 욕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때론 기업의 하청업체의 입장에서, 때로는 다른 외주업체에 일을 맡기는 작은 회사의 회사원으로서, 좋은 환경에서 전문직으로 살았다면 접하기 힘든 값진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이런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과 합리적인 일처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일이 아닌 다른 문제에 관해서 이들은 어떻게 이런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만났던 이들을 단순히 비난하기만 하는 일은 매우 쉽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쉬운 비난하기를 일단 접어두고, 이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과 주장을 하게 되었고, 나는 어떻게 바라볼 있을지 판단이 선다면, 보다 긍정적인 변화를 미칠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는 이미 익숙해진 사실인 언론의 글은 무엇보다 결론이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 글이 쓰이거나 다듬어진다는 사실 염두해둔다면,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좀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검토해보고 판단할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앞서 예를 사람들의 논리 대해 이를 비판하고 의견을 갖출만한 논리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발견으로 나는 나에 좀더 알게 부분도 있다. 나라는 사람의 감정과 지적인 한계에 대해 깨닫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출발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2230 읽어나갈 , 사회의 부조리에 비판하는 사람이 필요한 이유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일본사회의 상황을 예를 들어보아도 중요성을 바로 있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아베 정권과 여기에 동조하는 일부 세력이 기획하고 휘두르는 망동에 그동안 일본 사회내에서 비판기능이 상당히 약해져버렸음을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 특히 90년대 이후 진보세력으로 자처하는 리버럴 세력의 붕괴현상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입지를 찾기 힘들어 졌다. 오늘날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는 자체가 힘든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아베를 비판하는 공무원은 상당수 퇴출되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서경식 교수에 따르면 모든 결과의 근본원인으로 일본의 식민주의 대한 철저한 반성과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그리고 이들과의 화해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점점 거짓말을 하다가 이제는 걷잡을 없게 형국이다.

 

김인국 사제의 비판은 우리 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곧바로 겨냥하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머리글에서부터 어차피 고운 말씨, 고운 말씀은 것입니다. 그래도 언제나 땅을 사랑하시고 땅의 형편때문에 자주 끙끙 앓으시는 하느님의 애끓는 심정이 어느 한구석 글자에라도 묻어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글은 비판적이면서도 마디 마디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사랑을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떠올리기도 하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비판과 포용을 하는 모습도 읽게 된다.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름대로 만족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만족도는 사회가 부조리하게 변해갈 , 열악한 사회의 상황에 적응해갈 뿐이다. 당연해보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2230 저자는 사회에 당연해보이는 일에 곧바로 목소리를 높여 의문을 던지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칼럼 하나에 담긴 저자의 모든 주장에 공감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보다 다양한 생각과 비판적 검토가 독자들 내부에서 이루어질 있다면, 칼럼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2230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한 글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사회의 해당 문제와 시간·공간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할 ,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고, 생각하게 하는데 역할이 있을 같다. ‘세월호 사건 우리 사회에 크나큰 충격과 경종을 주게된 사건이다. 그러나 사건의 배후에는 보다 거대한 어른들의 부조리가 함께 도사리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저자는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타박하는 이들에게 이를 계속 기억할 계기를 준다. 보다 근본적인 사회의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바꾸기에 변화는 아직 느리기에, 김인국 사제가 사회에 던지는 경종은 소중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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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기간에 우연히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를 집어들었다가 첫 페이지에 발견한 시를 공유해볼까 합니다.
저는 아직 호메로스의 저작들을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시를 읽고나니 호메로스의 저작은 언젠가 꼭 읽어싶어집니다.


<오디세이 세미나>에 대한 서평을 작성하신 분들의 글을 읽다보니,
오디세이아라는 인물이 트로이전쟁과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오랜 여정의 기록이 담긴 서사시라고 알게되었네요. 그리고 이타카는 오디세이아의 고향으로 이타카라는 지명은 여러 문학 작품에서 사용되고 있네요. 어떤 이는 '이상향'으로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너무 단순화한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가닿을 수 없는 '고향'의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W.G. 제발트라는 독일 소설가의 <이민자들>에서는 전 세계를 떠도는 유대인들 혹은 여러 이유로 이민자가 된 이들에게 '잃어버린 고향'의 이미지로 활용됩니다. 또는 문명사회로부터 소외된 이가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서의 이미지로 말이죠.


다시 소개하려던 시 '이타카'는 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Konstantinos Petrou Kavafis)[1863-1933]의 시를  <오 자히르>의 번역자가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중에는 <콘스탄티누스 페트루 카바피스 시전집> 한 권이 
출간되어 있지만, 시번역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미리보기 기능에서 동일한 시 '이타카'의 번역일 일부 보았는데, 
번역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단어 단어가 이어지지 않고 분절되어 있는 표현이 시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시전집 전체를 읽어보진 못해서 역자의 작업 방향도 모르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봅니다. 


혹시 이 한국어 번역이 영화 <페터슨 Paterson>에 주요 모티브가 되고 있는 미국 뉴저지의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모더니즘/이미지즘 시의 느낌으로 번역을 한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만큼 단어의 의미연결보다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 다가옵니다. <오 자히르>의 번역자(최정수)가 번역한 시 '이타카'는 읽기가 좀 더 편합니다. 한번 감상해보세요. 시를 다시 읽어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의 삶의 흔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코엘료의 소설 <오 자히르>의 첫 장 제목이 '나는 자유다'인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과 일치하기도 합니다. 우연일까요?

아무튼 호메로스의 저작들은 언제 꼭 읽어보고 싶네요.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

기도하라.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생각이 고결하고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읺고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길이 오래되더라도

늙어져서 섬에 이르는 것이 나으니.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역주-최정수 옮김)

*라이스트라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등장하는 식인 거인족

**키클롭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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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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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원제: Manifestly Haraway)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지음 | 황희선 옮김 | [책세상]



우선 책을 겨우 읽어낸 내게 남은 인상은 흥미롭지만 아직은 매우 낯설음이었다. 좀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무엇보다 페미니즘의 담론에 생소한 독자로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통시적으로  또는 공시적으로 여러 층위의 맥락들이 한데 어우러져 표현되는 도나 해러웨이의 사상은 자신이 진창(muddling) 속에서, 진창이 되고 있다 표현하듯, 실천적인 의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담론은 둘째 치고, 심지어 푸코의 생명정치에 관한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페이지부터 커다란 벽과 만난다. ‘포기할까 그래도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라는 마음이 팽팽히 맞서며 갈등을 하고 있던 와중에, 반려종 선언에서  언급된 말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다.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반면,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친밀한 타자를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과정에서 별수 없이 겪게 되는 우습고도 비극적인 실수들은, 타자가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한 무생물이건 간에 존경심을 자아낸다.”(161)

 

부분을 내가 해러웨이의 책을 끝까지 읽겠다는 선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익숙하지도 않은 대상()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완전히 이해하길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착각이다. 반면, 골치 아픈 글을 계속 읽어내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타인의 오랜 사유를 오롯이 담은 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들은 자체로 유의미한 위대한 시도다.’라고 말이다. 내가 책에게 아무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데, 책이 나에게 보여줄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공들여 읽기 게을러진 나에게 해러웨이의 마디는 읽기에 관한 사랑론으로 우선 다가온다.    

 

읽어서 모든 내용이 이해되는 책이라면 오히려 던져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물론 지금까지 그런 책은 없었다). 나는 해러웨이의 책을 읽으며 내가 새로운 세계와의 희미한 경계 어딘가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자각하며,   경계는 내가 속해 있는 세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 시도중이다. 그리고 나는 헬렌 베란의 표현대로 ( 세계 속에서 타자와) ‘함께 지내기 위한하나의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나에게 타이르며 끝가지 읽어나갈 있었던 같다. 물론 온전한 이해라는 상태는 현재 요원한 일이긴 하지만, 머리를 싸매고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기회가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문 들어있는 <사이보그 선언> <반려종 선언> 생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한 과학자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서 해러웨이 교수가 이런 관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개인과 사회의 관계성 혹은 정치성 혹은 타자성에 대해 다시 바라보기) 대한 통찰력있는 진단과 면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사이보그 선언>에서 사이보그는 인공두뇌 유기체이자 순수하지 않은,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자, 사회현실의 상상적 피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이보그는 단순히 생명과 기계의 모호한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무언가는 아닌 것같다. 개념에는 무엇보다 젠더 개념과 인종, 계급 개념이 결부되어 있다. 또한 사이보그 개념에는 하이테크 첨단 공학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정치적 정체성에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정보가 우리의 삶을 단단히 지배하며, 전쟁의존적인 경제와 강한 유착을 보이는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은 푸코의 생명정치를 벗어난 무엇이다.

 

기술이 인간의 전반을 새롭게 바꾸어줄 것이라는 약속이 앞서 말한 젠더와 인종, 계급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빗겨나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선언이 나왔던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던 여성들에게 있어 노동, 문화, 지식 생산, 섹슈얼리티, 재생산의 모든 양상과 맺는 관계의 함의가 순전히 우울하기만 것은 아니”(67)라고 분석한다. 대신 해러웨이가 지적하는 일말의 희망은 범주들 자체가 다채로운 변환을 겪고 있기 때문이며, ‘현재의 패배보다 정치가 발휘하는 모순적 효과에 주목하고 기대해볼 있다 입장에 근거한다. 저자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의 시대에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의 발사 성공의 여파로 해러웨이 같은 재능있는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을 있었다. 게다가 오히려 정부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지식인으로 가능성을 내포하는 모순적 효과 대한 희망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해러웨이의 낙관적인 입장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언급한 인권선언과 마그나카르타를 대비하여 발견해내는 희망과 유사한 인상을 준다. 덧붙이자면, 1789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인민이 주권자라고 선언한 화려한 인권선언 대비하여 지나친 노동시간을 줄여 표준노동일 제정했던 마그나카르타(노동법 관련 협정) 마련한 사건이 오히려 마르크스에게는 위대한 변화 다가왔던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의 발견이다. 자본가의 계약에 눌려 비인간화된 노동 기계와 같은 처우를 받았던 노동자들은 저항행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패배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숱한 희생과 고통을 통해 표준노동일이라는 작은 변화를 지켜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로서 해러웨이도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 주목하지는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분명 해러웨이도 이런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 주목하고 희망의 근거를 찾았을 것같다. 바로 이런 사소한 것의 변화에 인간적인 위대함 깃들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반려종 선언> 앞서 소개하고 있는 <사이보그 선언>보다 좀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반려종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양치기 품종견 카옌과  파수견 롤런드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생물의 함께 살기에 대해 다양한 층위에서 고찰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이보그 선언> 기술과학 현대의 삶이 내파하는 현상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이해’(119)하려 시도한 글쓰기였다면,  <반려종 선언>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특수한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내파하는 현상과 관련’(136) 되어있다고 글쓰기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언 모두 문명-문화와 인간사이의 공진화의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좀더 간결히 표현해보자면 <반려종 선언> 개에게 홀닥 빠진 과학자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반려종으로서의 개는 함께 살기위해존재한다는 맥락에서 나온다. 당연한 듯하면서도 다시금 음미해보면 다양한 가능성과 틈이 잠재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무언가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관계속에 내재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가능성이 어느 쪽으로 뻗어나갈지는 존재의 존재론적 안무 양상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대상들은 관계 선행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상들 사이의 존재-관계에는 소중한 타자성 깃들어 있으며, 여기에는 아직 발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의 창발된 실천 소통이라는 과정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라고 이해된다. 인간과 , 여성과 암캐, 교수와 파수견의 존재로서 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각자가 연결된 타자성으로서의 역할(저자는 이를 존재론적 안무라고 표현하는 같다) 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관계를 주목해야한다는 의도로 읽힌다. 그렇기에 저자는 아기 대신 친족을 만들자!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우선적으로 흥미를 갖게된 부분은 저자가 반려종 반려동물 구분하는 지점에 있다. 반려종의 species개념은 무엇보다 차이 인식하고 정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반려종 반려동물보다 크고 이질적인 범주라는 표현도 새롭게 다가왔다. 해러웨이가 의도하는 사랑은 보다 상호관계적이며 동시에 상호참여적 양상을 띤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저자가 의미하는 반려동물 개념에는 존재 사이의 차이 대한 분명한 인식과 존중보다는 그저 무조건적인 애착관계로 있을 같다. 무조건적인 귀여움과 보살핌을 받는 일방적인 관계 말이다. 여기에는 창발적 실천이 들어설 여지가 매우 적다.

 

반면 반려종이라는 개념에는 존재의 차이 대한 인정과, 따라서 소중한 타자성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사랑의 양상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대한 존중 신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개념을 떠올릴 저자가 부를 있는 좀더 정밀한(혹은 구체적인) ‘사랑 개념이 이해가 된다.     

 

개를 아기로 만들며 차이의 존중을 거부하는 문화적 관행으로 오염된 말이 아닌 한에서는,  사랑이라는 말로 매케이그가 개를 다루는 방식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66)

 


내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자면, 중학교 때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국어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랑-소망-믿음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물으셨다. 학생들 여러 명에게 물으셨고, 친구들 각자 나름의 대답을 했다. 나는 믿음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선생님의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내가 말한 믿음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세 가지 성경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세대는 소중한 타자 혹은 차이의 존중에 대한 경험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정답사랑이란 무엇일까 다시금 궁금해지기도 한다. 반면 나는  해러웨이의 반려종관계에서는 신뢰-믿음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울러 이 신뢰의 실천적인 행위를 오히려 사랑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해러웨이의 반려종에 대한 사랑이란 나의 보살핌에 기대고 나에게 의지하는 종에 대한 보답, 나의 자비 행위에 합일되는 타자로서의 관계는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서로의 다름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귀찮고 머리아프지만 서로의 존재영역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서, 온전한 두 존재를 지켜낸다는 개념이 분명 들어있다는 점이다. 무심코 생각했던 반려동물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새롭게 검토해볼 수 있었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공진화적인 관점에서 이 사랑의 개념이 함께-되기가 되어야한다는 해러웨이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면 해러웨이의 사랑개념은 남성 중심의 과학분야에서는 다소 낯설은, 오히려 기독교적인 사랑의 개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냉담하는 신자라는 표현 대신, 스스로를 세속적인 천주교인이라 말하는 저자는 상대 종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은 바로 함께 잘 살기를 통해 나의 자유 혹은 구원에 이르는 일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단계를 이어주는 것은 물론 사랑-배려가 될 것이다. 물론 이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것은 이 반려종에 깃든 사랑의 개념이 다시 말하지만 철저하게 양방향적이라는 점이다. 반려종은 함께 빵을 나누어 먹는 존재(company 어원 cum panis)로서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있으며, 서로에게 얽힌 채, 함께 만드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반려종의 존재와 관계를 통해 나 또한 변화하며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창발적 실천).

 


이외에도 이 책 해러웨이 선언문에는 아직은 알듯모를듯 하지만 낯선 개념, 신선하고 진지한 생각들이 양피지처럼 겹겹이 싸여 있다. 하지만 개에 관한 글쓰기가 페미니즘의 한 갈래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선언은 무엇보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사실 <반려종 선언>에서 나타난 해러웨이의 글쓰기는 개에 관한 지식을 전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무수하게 적용될 수 있는 차이의 관계를 개라는 반려종을 통해 설파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보다 보편적이고 모든 이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함의를 찾아낼 수 있겠다. 아직도 생소하지만, 다시 책장을 들쳐보며 눈에 띄는 문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 더 익숙해지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은 페미니즘과 생명정치의 담론에 전무한 지식을 가진 나같은 독자에게 친절히 길을 안내하는 책은 분명 아니다. 대신 해러웨이 선언문은 반려종과의 관계 만들기에 관한 비유를 빌려온다면, 골치아프지만 시행착오와 오독의 과정을 감수하면서 조금씩 의미의 확장을 경험해가는 독서의 경험을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책의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책이 어려운 이유가 결코 번역에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많은 숙고 끝에 나온 결과물임을 느낄 수 있었으며, 번역자의 주석을 보면 독자들을 위해 최선의 배려를 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책이 이해되지 않았다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좀더 들여다보고 고민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번역은 독자에게 여러 모로 배려를 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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