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도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혼과 도덕>

(Marriage & Morals)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 이순희 옮김

 

 

 

결혼이란 것이 남의 같이 느껴지기만 했던 노총각이 결혼식 전날 읽는 <결혼과 도덕> 참으로 묘하게 다가온다. 앞을 펼치니 문명인들은 성적인 행위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19)라고 대목이 눈에 띈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다. 책이 과연 1872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한 수학자/사상가/저술가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책이 맞는지 다시 이름을 확인해본다. 게다가 책이 출판된 것은 1929년이라하니 거의 90 전에 씌여졌다. 책을 계속 읽어 나가다보면 러셀이 흔히 말하는 전복의 철학자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징병 반대 문건으로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거나, 이와 관련한 벌금 납부를 거부하여 대학 강의권마저 박탈당했으며, 전쟁을 반대하는 글을 써서 투옥까지 사람. 러셀은 흔히 말하는 독불장군이 아니라 자신이 독자석으로 사유한 결과에 따른 신념을 평생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기가 시작된지 15년도 넘은 지금, () 관련한 담론은 여전히 껄끄럽기 마련이다. 하물며 100년이 가까운 시간 전에 이렇게 도발적인 결환과 성에 관한 글을 러셀은 아마도 거센 비판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니나다를까 책으로 그래도미국에서 개방적인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 뉴욕 소재 대학의 임용에 취소되었던 전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이를 굳은 신념으로 지켜나가려는 자세는 무엇보다 내가 책을 읽으며, 그리고 러셀이라는 사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눈여겨보게 되는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 보면 러셀이라는 인물은 영국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영국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있다. 최상의 기득권층의 가문 출신이라는 말이다. 특히나 보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영국, 귀족가문, 그리고 기독교 문화의 가운데에서 성장했음에도 이처럼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결혼과 성에 관련한 도발적인 책을 있었던 배경 내지는 환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흔히 전복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니체에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가져다준 영향이 컷던 것처럼, 러셀에게도 어린 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게 사건이 크게 영향을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부모, 기성세대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을 하게되는 것도 부모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을 아울러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나의 눈에 들어오는 인상은 러셀이 기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교 자체라기보다 바울의 결혼관에 대한 언급처럼 신이 말한 교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된 교리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바울이 말한 결혼관이란, ‘결혼은 자손의 생산을 주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간음의 죄를 예방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결혼관을 말한다. 여기에 가족이나 자식에 대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러셀의 말에 따르면 바울의 결혼관에는 생물학적 목적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란 오로지 간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결혼관에는 당시 남자의 시각에서 나아가 본능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수련해야하는 종교인에게 여성 어떻게 비추어졌는가를 있는 대목이다. 바울에게 여성이란 남성의 간음을 피할 있게 도와주는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대상으로 보인다. 흔히 성인 반열에 오른 기독교인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 양심에 따르고 자유로운 사고를 있었던 러셀의 입장에서 문헌에 근거하여 바라보는 종교인의 이중적인 모습에 다소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역시나 니체와도 같이 러셀은 기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바울이 결혼을 오로지 간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거나, 간통을 나쁘게 생각하는지 전혀 밝히지 않는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비유를 하기도 한다. “( 바울의) 주장은 빵을 굽는 이유가 사람들이 케이크를 훔치는 것을 막는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흡사하다.” 신랄하면서도 무릅을 치게 만드는 재치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이러한 재치는 러셀의 특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보면 버트런드 러셀은 영국 출신의 지식인들, 특히 신과 종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리차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에게 영향을 사람이 아니었을 추측해본다. 특히 도킨스나 히친스는 모두 영국 출신이며, 어려서 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로서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무신론자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미국보다 영국이 많은 느낌을 주는 이유도 지식인들이 만든 문화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일종의 탈선으로 인하여 많은 비난의 화살을 감당해야하는 소수의 지식인들에게, 이러한 소수자들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인물이라 생각한다.

아울러 종교에 대해 이렇게나 비판적이고 신랄함을 유지했던 러셀이 낭만적인 사랑 대해 매우 무게를 실어 주고 있는 점은 의외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점이라 있다. 러셀에 따르면 낭만적인 사랑이야말로 인생이 제공하는 가장 강렬한 기쁨의 원천’(71)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낭만적인 사랑에는 열정과 상상력, 그리고 배려심을 바치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 관계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라고 가중치를 두고 있기에 상당히 흥미롭다.

책을 읽고 다시금 생각해보면 종교라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본능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도구를 만들고 사람들을 강제해왔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나 러셀이 말하고 있듯이 성에 무지한성인이 결혼할 경우, 이혼이 성행하고 행복한 결혼이 어려울 있다라고 하는 대목은 크게 동의하게 된다.  특히 대해 비정상적인 관념을 통한 죄의식 종교라는 제도를 통해 주입시키게 드러날 있는 재앙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사유하고 있다.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러셀의 책에는 기독교에서 싫어할만한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다. 종교가 하나의 제도로서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므로  러셀은 인간의 해석을 거친 종교제도와 관습에 대해 의심하고 반문한다. 러셀이 바라보는 인간관은 아마도 완벽한 혹은 완벽한 악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모호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선과 악이라는 것을 굳이 나눌 있다면, 요소가 혼재한 인간성이 그가 말하는 인간의 모습일 같다. 인간이란 존재의 욕망 그대로 인정하고 이를 억압하고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훈련해야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본성을 길들이고 관계를 맺어가는 일은 지식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약점과 강점을 알고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종교와 같은 어떤 제도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억합하기 시작하면 왜곡된 가치관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잘못된 성교육 혹은 관련 주제를 회피하고 은폐하는 경우가 이러한 위험성을 안고있다는 말이다. 러셀의 논리는 현대인들에게 상당부분 맞지 않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명 사회에서 인간이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되는 원인으로 잘못된 성교육 언급하고, “성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혹은 생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이다. 음식을 맛있게 먹지 못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인간이 누릴 있는 기쁨’, ‘쾌락 금지하지 않는 부분에서는 저자의 선견지명과도 같은 사유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노총각의 결혼 전날 읽는 <결혼과 도덕> 흥미로움과 혼란스러움이 섞인 짦은 여정이었다. 크게 수긍을 하게 되는 논리와 노총각을 당황스럽게 만들만큼 앞서가는주장들, 독실한 종교인들이라면 불편해했을 종교에 대한 비판과 역사적 사실들로 인하여 흔히 이야기하는 결혼의 현실 견주어 보게 된다. 우리의 결혼문화에는 불합리한 점이란 없을까. 결혼이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와 같은 의문이 계속 이어진다. 버트런드 러셀의 <결혼과 도덕> 읽으면서 어떤 지식이 아닌 배우게 점이 있다면, 바로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힘이라고 있다. 인습적인 가치들에 대한 의문제기는 자신이 처한 환경과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바라볼 있을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은 90 전에 지식인이 주장한 새로운 견해들 대한 흥미로움과 기존의 가치관과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들로 혼란스러웠던 여정이었다. 책에는 새롭고 튀는저자의 견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낭만적인 사랑 중요성을 설파하는 대목에서와 같이 저자의 인간적인 면모 또한 읽을 있었다. 아울러 결혼식준비가 아닌 결혼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번쯤 결혼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볼 있는 기회가 되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61-62면 ) 과거 카톨릭 종교에 대한 비판의 근거
"교황 요한 23세는 근친상간과 간통 외에도 수많은 죄악을 범한 것 때문에 처벌을 받았고, (…) 성 아우구스틴은 1171년에 시행된 조사 과정에서 어느 한 마을에서 열 일곱 명의 사생아를 둔 것으로 밝혀졌으며, 스페인의 수도원장 성 펠라요는 1130년 정부를 무려 70여 명이나 두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리에주의 주교인 앙리 3세는 1274년 65명의 사생아를 둔 것 때문에 해임되었다. (…) 중세의 저작에는 사창가나 다름없는 수녀원과 수녀원 구내에서 자행되는 무수한 영아 살해와 성직자들의 고질적인 근친상간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근친상간이 어찌나 성행했던지, 성직자는 어머니나 누이들과 동거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엄격한 법력이 거듭해서 공표되었다."

(71-72면)
"결혼은 부부가 반려 관계에서 느끼는 기쁨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서 아이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사회의 긴말한 구조의 일부를 형성하는 중요한 제도이다. 낭만적인 사랑을 기초로 한 결혼은 바람직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히 적어두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지속시키고 결혼의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는 것은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친밀하고 다정하며 현실적인 사랑이다."

(83면) 러셀의 재치가 담긴 신랄함/비판
"가장 먼저 교육을 통해서 미혼 여성들을 우둔하고 무지하며 미신에 의존하는 여성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교육은 교화의 관리하에 있는 학교들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다. (…) 하지만 나는 권력 남용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경찰들과 의료진들을 거세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멀고도 가까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멀고도 가까운>

(원제: The Faraway Nearby)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지음 | 김현우 옮김 | 반비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저자는 위대한 인물도, 유명한 인물도 아닌 바로 평범한 독자의 이야기를 물으며 자신의 이야기부터 풀어나간다. 우리의 삶은 숱한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탄생은 부모님의 선택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우리가 성장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저자 리베카 솔닛의 책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저자의 다른 저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많이 들었지만, 왠지 뜨끔 마음에 아직까지 읽어보지는 못하였다. <멀고도 가까운> 무척이나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다. 특히나 저자 자신을 있게한 어머니와의 관계와 기억이 책의 중심구조를 이룬다. 저자 리베카 솔닛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지만, 무엇보다도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점을 있다. 저자 소개에 의하면 리베카 솔닛은 역사가이기도 하고, 예술평론 문화 비평을 비롯하여 환경, 반핵, 인권운동에 직접 나서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녀의 저서들로 전미도서비평가상을 받기도 했다는 점에도 주목하게 된다. 이처럼 다재다능하고 완전해보이는 저자가 책에서는 자신을 흔들던 인생의 가운데에서 솔직하게 보여주는 삶의 모습에 읽는 내내 공감하게 되었다.    

       우선 목차를 보면 매우 특이한 점을 (누구라도) 알아낼 있다. 불길한 느낌을 주는 13개의 () 일곱 장인 매듭 중심으로 정확히 뒤로 거울대칭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거울의 구조적인 면이 하나의 상징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듯한 책은 다른 편으로는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 추억 등을 회상하는 책이기도 하다. 특히나 어머니의 아들들, 어머니에게는 한없이 자랑스럽고 긍지의 대상이 되었던 아들들과는 다른 반응을 자신에게 보이던 어머니와의 애증어린 관계가 끊임없이 묻어나고 있다. 저자는 어머니의 로서 시기와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저자의 키와 금발머리를 결핍했던 어머니의 시기와 분노는 평생 저자를 괴롭혀왔다고 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갖는 일종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달리 아버지가 아들에게 갖는 일종의 경쟁심과도 같은 것일까. 리베카 솔닛과 그녀의 어머니의 관계는 내가 흔히 주변에서 보는 평생 친구 같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와 너무나 다르고 생소한 관계여서 놀라웠다. 특히 저자가 뜯어지는 같다라고 표현한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의 증후의 변화와 삶의 모습은 비슷한 환자들에 대한 수많은 병례사를 썼던 올리버 색스의 환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뇌의 부위의 손상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인간은 매일, 매주 저자의 말대로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는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되어가는 과정. 그렇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유럽의 철학자들이 바라본 대로 일종의 기계 뿐일까.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런 질문들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되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살구나무에서 따온 살구 100파운드는 어머니의 분신이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고, 어머니가 아들들에게 남겨준 물질적인 유산과 다른 소박하고 무심한 유산이었다. 살구가 집안에 들어 부터 물러지고 썪어들어가기 시작하는 상황은 자신의 삶을 매일같이 보듬고 보살펴야 함을 내게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매주 다른 사람, 다른 인격으로 변해가는 어머니가 마치 아이가 되어가며 보살펴야할 대상이 되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을 매일 그렇게 살구를 솎아내듯 가꾸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그러고보니 책의 제목 멀고도 가까운’, 원제로 <The Faraway Nearby> 어떤 맥락에서 씌여진 것인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책의 중반에 이르러서야 단서를 찾을 있었는데, 조지아 오키프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구절에 넣곤 했던 인사말 표현이라고 한다. ‘멀고도 가까운 에서 보내는 편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지만, 편지를 통해, 글쓰기를 통해 누군가와,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과 잇닿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표현이었다. 저자는 책의 군데군데 그녀가 읽은 책에 대해, 그리고 글쓰기에 관해 언급한다. 저자는 읽기와 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읽기와 쓰기의 고독이 지닌 깊이가 나를 반대편에서,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게 했다.”(101)  읽기와 쓰기는 고독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해도, 읽는 책의 저자와 , 그리고 나와 미래의 독자와의 연대의 행위라는 것이다. 읽기와 쓰기를 통해 어떤 과정이든 타인에게 공감하게 된다면 이는 자아의 확대를 경험하는 이라고 리베카 솔닛은 말하고 있다. 아주 공감이 되는 말이다. 문학이든 사회문제를 다룬 책이든, 사람과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선행되면, 우리는 대상에 공감할 있고, 그것이 우리가 지니고 있던 보이지 않는 어떤 경계가 확장되는 경험이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한편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고, 글쓰기를 거울삼아 자신을 되돌아 보게된다. 거울 대칭적인 책의 구조와 글쓰기를 통해 리베카 솔닛은 어머니와의 애증어린 관계를 되돌아보고, 추억하고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와 자신을 삶을 보듬고 보살피게 된다.  책의 제목인 멀고도 가까운(Faraway Nearby)’ 어머니와의 오랜 애증섞인 심리적 거리를 상징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우리가 축복을 받든 저주를 받든 아니면 다를 받든, 모든 일은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선택을 끝까지 쫓다 보면 지금 바로 순간 우리의 삶이란 매우 희귀한 것임을 알게 된다.”(107) 나는 대목을 읽으며 내가 언젠가 어떤 장소에서 순간 강렬하게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떠올릴 있었다. 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광장의 가운데에 섰던 순간, 나는 리베카 솔닛이 언급한 말이 전달하는 감정을 느낄 있었다. 수많은 선택 속에서 어느 특정한 장소에, 어느 순간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삶의 희박한 기적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단순히 기계일 뿐일까라는 다소 암울한 의문을 지니고 있던 나로서는 우리 자체에 대한 존엄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순간이었다.

     전반을 통해 저자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만큼 죽음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하면 책의 전반을 통해 죽음 이미지가 숨어있다고 말할 있다. 극심한 추위에 갇혀, 남편과 자신의 아이 셋의 사체를 먹어야 했던 어느 이누이트 원주민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면서도, 많은 의문과 생각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저자는 우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는 어떤 방식으로 식인을 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날마다 타인으로부터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상징적인 식인자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책의 시작도 결국 알츠하이머를 앓던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삶의 무상함, 유한성을 재인식한다.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들은 아주 희미하고, 예측할 없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탄생한다.”(106)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희귀한 것이며, 절대적으로 일어나는 죽음 대척점에 있다는 인식. 아울러 죽은 인간의 사체 부위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이야기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삶과 죽음의 문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 탄생시킨 메리 셸리 개인의 인생사 또한 남편과 아이의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다는 인식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있음을 나는 책을 통해 깨달았다.

       <멀고도 가까운> 저자 자신의 솔직한 삶과 독서, 글쓰기가 어우러진 독특한 에세이이다. 가지 기억나는 일화는 젊은 시절 그랜드 캐년의 계곡에서 보트를 타는 타지못한 일화와 20년이 지나고나서야 다시 보트를 타게 일화이다. "그동안 애가 했던 일들이 결국은 모두 고무보트에 몸을 싣는 사람이 되기 위해 했던 일처럼 느껴진다."(366)라고 말하고 있듯이, 책을 통해 저자는 삶을 배우고 변화되어온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과정은 저자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내면에서 젊은 시절 스스로 내면화한 부모님의 모습을 찾아내고, 어머니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인간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젊은 시절 저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알면서도 지나치고, 후회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 그대로이다. 우리의 어께에 내려앉은 사회적 의무 나의 욕망과의 경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수도 있다.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원칙은 심오한 것이 아니다.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라는 .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고민들을 하며 선택을 하게되는데 리베카 솔닛의 충고를 떠올려봄직하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에서 리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 대해 쉽지 않았던 시절에 오히려 삶이 풍성해졌던 과정에 대한 기록이라고 쓰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되어 어머니와의 애증과 상처가 점철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글쓰기 과정을 통해 결국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으며 어머니와의 화해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욕망이다."(35면)

- 여기서 ‘후회’는 일종의 ‘회한’이 섞인 감정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스페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40년 이상 품고 있던 전쟁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어하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아름다움이란 신체적 특징만큼이나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했다."(46면)

책읽기/쓰기에 관하여

"가끔 재능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96면)

(100-101면)글쓰기에 관해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나는 침묵에서 시작했다. 읽을 때만큼 조용하게 글을 썼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내가 쓴 것을 조금씩 읽었다. ... 아는 침묵에서 시작했지만, 결국엔 긴 여정을 거쳐 아주 멀리서도 들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아무도 아닌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고 청중 앞에서 낭독할 때라도 여전히 부재하며 사라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 (115면)

#공감,감정이입, 연대에 관하여

"내 안에서 나와 세상을 향해 뻗어 있는 신경처럼 감정이입, 연대, 지지 같은 것이 자아를 신체의 경계 너머로 확장해 준다."(218면)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286면)

"그동안 애가 했던 일들이 결국은 모두 그 고무보트에 몸을 싣는 사람이 되기 위해 했던 일처럼 느껴진다." (366면)

"우리는 슬픔을 먹고 살고, 이야기를 먹고 산다. 그 이야기가 열어주는 널찍한 공간에서 우리는 한계를 넘어 상상력을 여행한다. 이야기가 우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불완전하고 조각난, 미완의 자아의 가능성을 넓혀 보라고 재촉한다. 남동생이 종이 박스 세 개에 담아온 살구 더미, 그것도 눈물이었을까. 이 책도 눈물일까. 누가 당신의 눈물을 마시는 걸까. 누가 당신의 날개를 가지고, 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걸까."(371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How to Read Literature)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문학 작품은 인간의 삶을 다루고, 인간에 대한 작업이다. 문학 작품이 드러내고 우리에게 묻곤 하는 삶의 양상에 대한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같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이런 문학작품을 어떻게 읽어야할까라는 갈증을 느껴왔다. 때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스스로 터득할 것이라는 막연한 결론으로 나의 독서력의 부족을 탓하곤 했다. 이공학도였던 나에게 분명한정답을 제시해주지 않는 문학작품을 읽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시공간을 탐험하는 일이다. 테리 이글턴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 문학 작품을 거론하며 문학작품을 읽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구분하자면, 일상적인 방식으로 문학작품을 읽는일에 관한 길이 아니라 문학비평 관련한 길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보다 면밀하고 주의깊은문학 작품 읽기 혹은 비평적 읽기 관한 방법일 것이다. 저자는 문학을 어떻게 읽으면 쉽게 읽을 것인가하는 지름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못한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 책을 읽는 일은 꽤나 도전적인 경험이 수도 있다. 책에서 테리 이글턴이 제시하는 문학비평과 관련한 여러 전략들 중에서 내가 주목하게되는 공통적인 원리는 바로 언어에 대한 고양된 감수성이다. 문장의 느낌표 하나에도 문장의 비평적 논평에 달하는 가치가 있을 있다는 말은 텍스트속의 콘텍스트 파악하는 일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울러 이런 문학비평의 측면은 극소한측면인데 저자에 의하면 보다 문학비평의 문제들로서 인물, 플롯, 주제, 서사 등을 생각해볼 있다고 저자는 언급하며, 곧바로 저자는 도입부를 거쳐 인물, 서사, 해석, 가치라는 주요 맥락 속에서 자신의 몇가지 비평적 도구 일반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비평적 분석이 문학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있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제정신일까? 아뭏든 약간의 의혹과 약간의 믿음을 가지고 읽어나가보았다.

 

문학 이론가이자 정치 평론가로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는 테리 이글턴이 제시하는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내가 읽지 못했으므로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감수하지 못했다. 나아가 저자는 다른 작품을 이야기하며 앞에서 이야기했던 다른 작품들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 작품과 작품을 평론가의 관점에서 긴밀하게 연결시키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고있다. 예컨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등장 인물인 (Pip), <올리버 트위스트> 올리버, 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 등장하는 제인, 그리고 심지어 근래에 들어 세계적으로 성과를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시리즈 인물인 해리의 공통점을 언급하는 식이다. 작품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부모의 결핍이라는 맥락에서 다시말하면 고아라는 관점에서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매우 매력적인 소재라는 것이다. 물론 고아라는 주인공의 입장을 고려한 글들은 많지만 테리 이글턴의 경우,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사유와 지식을 통해 염주를 꿰듯 낱낱이 떨어져 무관해보이는 사실들을 본인의 고유한 시선으로 엮어낸다.   

 

조지 오웰의 <1984> 대한 문장에대한 분석부터 심상치 않다.

사월의 화창하고 차가운 날이었다. 시계가 열세 시를 울리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지독한 바람을 피하려고 가슴팍에 턱을 붙이고는 빅토리 맨션의 유리문을 재빨리 미끄러지듯 지났다. 그렇지만 모래 섞인 먼지 소용돌이가 함께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민첩하진 못했다.”

 

테리 이글턴은 시계의 열세 지적한 , 먼지와 모래 그리고 바람/소용돌이까지 의미를 따진다. 평론가이긴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파고드는 것은 아닐까?(너무나 세심하고 주도면밀한 분석이기는 하지만). 읽어가며 불현듯 떠오른 나의 의혹과 우려를 미리 집작이라도 한듯, 테리 이글턴은 바로 틈을 치고 들어온다.틀림없이 어떤 독자는 이런 해석이 터무니없이 기발하다고 생각하겠지요. 해석이란 엄밀히 말해서 당연히 기발한 것이이 깨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나의 불편함을 달래고 있다.

 

오웰이 먼지를 긍정적 이미지로 그리려 했거나 그런 생각을 혹시라도 떠올린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작가의 의도일 거라고 짐작하는 바에 순응해서는 된다는 것을 뒤에서 살펴보겠습니다.”라고 걸음 나아간다. 한편 테리 이클턴에게 보다 주목을 하게 되는 점은 본인이 독자로서 혹은 비평가로서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책을 읽어가면서 알게 되는 사실과 맞지 않을 있습니다. 바람이 언제나 악의 이미지로 제시된다는 것을 알게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럴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럴 경우에 회의적인 독자들은 그것이 텍스트에 대한 엉뚱한 해석이라고 판단할 다른 근거를 찾아야 겠지요. 결론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쯤에서 나는 테리 이글턴의 견해에 공감을 하게되고, 이것이 나아가 다른 생각으로 이어진다. 작가의 작품은 아무리 오랫동안 정성들여 퇴고를 거듭하고 작가의 사상과 의도로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일단 책으로 만들어져 서점에 진열되고 나면 작품은 더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은 이미 작가의 수중을 벗어나 작품을 익는 독자의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작가가 이것은 이런 의미이고 저것은 다른 이런 의미이다라고 모든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작가와 독자가 받아들이는 간극, 혹은 각자가 받아들이는 진실은 언제나 항상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독자가 읽게되는 문학작품은 온전히 독자의 것이 된다.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의 잘못을 우려하거나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독자는 언제나 옳다. ‘언제나 독자의 감성이 정답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읽어나가면 것이다. 그리고 독자의 특정 해석, 감성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테리 이글턴은 분명히 자신의 해석이 틀릴 수도 맞을 수도 있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독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학작품이 나아가 10, 20, 30 다른 나이에 다르게 다가오고 다른 감흥을 있단즌 사실에 많은 이들이 동의할 있듯이, 자신의 감성과 해석의 정당성을 믿으며 읽어가면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할 점은 당신은 언제나 옳다라는 것이다.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문학작품을 읽는 전략이나 폭넓은 문학작품을 섭렵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부분보다(사실은 내가 읽지 않은 작품이 많아서) 문학작품 자체의 읽기 관한 대목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읽기의 문제는 스스로 일반 독자로서 그리고 문학작품에 경험이 적은 초보 독자로서 관심의 대상이다. 분석적인 읽기 방식으로서 문학 비평의 길을 제시해주는 테리 이글턴은 천천히 읽기 방식을 언급하고 있으며 천천히 읽기를 옹호하고 있다. 그는 평론가로서는 의외로 짧게 서문에서 읽기의 전통으로서 100년도 더된 니체의 슬로리딩 언급한 점이 흥미롭다. 슬로리딩 전통이 현재는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아마무라 오사무가 <천천히 읽기를 권함>에서 다독가이자 속독가인 평론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읽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는 처럼, 과도하게 정보화되어있는 현대 사회에 다시금 천천히 읽기 가치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다시 얻는 같다. 책을 많이, 빨리 읽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방식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책읽기라는 행위가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에 대한 기대치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한정된 시간에 많은 책을 보고, 중요한 정보를 얻는 행위로 책읽기를 의도한다면, 방식이 분명 효율적일 것이다. 반면 저자가 나누고 있는 생각과 지식, 경험을 들여다보고 나에게 즐거움을 있는 책읽기를 의도한다면 분명 책을 천천히 읽어야할 것이다. 

 

아마무라 오사무의 <천천히 읽기를 권함>, 이토 우지다카의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 에밀 파게의 <단단한 독서>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성과내지는 (quantity)’ 대한 집착이 아니라 모두 천천히 읽기 대하여 가치를 전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말한 것처럼 장르에 따라 혹은 목적에 따라 다르게 책을 읽을 있다는 점에는 수긍이 가지만, 쓸모있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언제나 동의하긴 어렵다. 그리고 다독에 대한 그의 관점에도 온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로진 작가의 <몸으로 책읽기>에서 인상적인 책읽기의 모습을 보여주듯, 몸으로 경험하는 책읽기가 문학작품을 읽어나가는 데에 일반독자로서 도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외국이 배경인 문학작품을 보고 현장에 가기는 힘들겠지만, 작품의 인물들이 드러내는 감정의 양상에 우리를 대치시켜볼 있을 것이다.  

 

한편 책의 머릿말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문학 텍스트의 언어 어느 정도 민감하게 반응해야함을 강조한다. 이는 흡사 사진찍기의 과정과 유사한 점이 있다. 사진찍기에서는 피사체, 대상을 관찰하고, 사진가의 내적인 인식과정과 행동에대한 결정과정을 거쳐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게 된다. 대상을 관찰하고 셔터를 누르는 과정 사이의 영역을 반응과정이라고 있다면, 반응 내포된 심상( 이미지) 형성이 문학을 이해하는 반응과정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다시말해 시각적인 과정을 통해서건, 텍스트를 통해서건 어떤 현상에 대한 의미가 우리의 인식 내부에서 생겨난 과정은 모두 반응 공통적으로 수반하는 과정이라 있다.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응 인정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 문학이든 사진이든 예술활동의 본령이 아닐까.  

 

책을 읽고나면 내가 과연 비평적 분석 나도 있을지, 그리고 모든 문학작품에 대한 비평적 읽기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정리해보자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에서 저자들이 사용하는 언에 민감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며 읽을 , 그리고 천천히읽을 것이 초보 문학 독자로서 보다 유용한 팁이 있을 것이다. 테리 이글턴처럼 수많은 작품에 대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있는 사유의 망은 시간을 들여 이러한 미세한 과정을 거친 이후에 보다 시각에서 작품을 다시금 떠올려 가능한 일이겠다. 술에 배부를 없는 . 나는 중요한 무기를 얻었고, 당분간 무기를 사용하여 책을 읽어볼 일이다.  

"희곡이나 소설의 ‘문학적 성격’을 간과하는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는 작품의 인물들을 실제 사람처럼 다루는 것입니다."(97면)

"그 자체로서 연극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겸손의 미덕을 키워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귀중한 미덕입니다."(97면)

"사랑과 샤토뇌프 뒤 파브 포도주가 사라진다면, 그와 더불어 전쟁과 독재자도 사라지니까요."(98면)

"우리는 한 문학 작품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찬동할 필요가 없습니다."(308면)



"눈에 핏발이 선 천재가 새벽 두 시에 퍼뜩 떠올린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인류가 공유한 지혜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서나 유사하고, 이 말은 곧 호머가 소포클레스가 인간의 본성을 그려낸 방식에서 진정으로 더 나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지요."(327면)

"그리고 문학작품의 해석은, 아무리 무의식적으로라도, 우리의 문학적 가치와 가정에 의해 채색됩니다. 무릇 문학적 고전이란 변함없는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기 보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어떤 비평가는 생각합니다."(339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덕후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덕후감>

김성윤 지음/북인더갭

 

<덕후감> 자체로덕후스럽다. 스스로대중문화 비평가 불리기 원하는 저자 본인은 동시대 한국 대중문화의 행간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파헤치고 있다. 그리 두텁지 않아보이는 대중문화관련 도서임에도 수많은 한국 대중문화의 키워드가 보이는데, 그동안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