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리미널 씽킹 - 변화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데이브 그레이 지음, 양희경 옮김 / 비즈페이퍼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기적의 리미널 씽킹

(원제: Liminal Thinking:

Create The Change You Want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데이브 그레이(Dave Gray) 지음 | 양희경 옮김 | [비즈페이퍼]

 

 

(리미널 씽킹이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리미널liminal이란 단어는 문턱 의미하는 라틴어 리멘limen’에서 유래했다. 리미널 변화의 단계, 또는 변화의 기간을 의미한다. 리미널 씽킹을 풀어말하면 경계에서 생각하기 의미한다고 한다.

 

 

우선 책의 전반부에서는 우리의 개인 집단에서 형성되어 있는 무형의 실체의 믿음체계 관해 해부를 하며 들여다본다.  과연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는 심리적 기작을 통해 형성되는 진실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해볼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이러한 신념체계 기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행동은 이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성 사람의 행동을 부추기지 못한다.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것은 감정이다.”(136)

시간이 지나며 깨달은 사실은 변화를 꾀하지 못하게 막는 제약의 대부분이 오직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224)

 

 

표현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취사선택하여 진실이라고 받아들여진 믿음 우리의 감정과 욕구가 유착되어 이루어지게 된다는 관점이 것이다. 그리고 어떤 행동에는 나름의 결과가 있을 것이고, 결과가 타인과의 관계나 회사의 기업활동에 해당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과가 우리에게 바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결과가 긍정적이면 좋지만, 우리 사회가 매번 우리가 바라는 대로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99% 우리가 우려하는 대로 나타나기 쉽상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믿음체계 적절하지 못하다면, 믿음을 바꾸어야할 것이 당연할 듯한데, 이게 쉽지가 않다. 그럼 이런 문제점들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몸을 움직일 있겠는가에 대한 물음에 저자가 제안하는 것들로 이루어지고 있다.

 

 

 

책의 전반에 소개되는 우리의 믿음 본질과 믿음체계 대한 분석 그리고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수칙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따로 정리하지는 않겠다. 책이 얇고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요구하는 대로 변화를 열망하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것이다. 여기까지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약장수같은 느낌이 없지않지만, 저자 데이브 그레이가 믿음이 우리를 제한한다.”(81)라고 간결하게 써놓은 문장에서 자신의 경우를 바로 떠올릴 있었다. 어떤 사람의 수행능력이나 행동여부 등을 살펴보면, 의외로 심리적인 원인 기인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나의 경험을 통해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저자의 견해대로 나의 믿음 나의 경험과 나의 판단에 의해 취사선택되어 형성된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어 나의 행동을 제어하곤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개개인이나 집단의 행동이나 변화를 이야기할 개인 또는 집단심리적인 연구결과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믿음이라는 무형의 대상이 형성되는 과정이 다분히 심리적 과정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신과 영혼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상당히 많은 일상의 영역에서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나의 믿음’, 신념체계에 관계된다. 따라서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듯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고 배우려면 자신의 잔을 비우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바로 자신을 비우라는 말을 상기하며 저자의 말을 계속 따라가며 읽어나간다.

 

 

책은 우리가 가질 있는 의혹 중요성을 인지하며, 모호하고 방향성없는 상태를 벗어날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책으로 읽힐 있다. 뇌신경학자/심리학자 등의 전문가들의 견해가 아니라(이들은 대상의 상태, 현상을 분석하거나 이해하는데 도움을 수는 있지만), 저자는 우리가 다른 어떤 무언가를 하고 결과를 얻을 있는가에 대한 길안내를 자처하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사실들과 방법론들은 개별적으로 새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에서 내가 주목해보게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때문이다. 저자는 바로 인간이라는 대상의 욕구 감정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책이 다른 경영서와 다른 차별적인 특성은 바로 인간이라는 요소에 대한 성숙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개인의 욕구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금기시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의 욕구와 감정은 부정적인 것인가? 나는 이전에 이런 의문을 가져보지 못했던가를 새롭게 자문해보기도 했다. 책의 개별적인 사항에 대해 새로울 것은 없어도, 저자의 경험과 숱한 고민을 통해 제시하는 인간적인방법론은 나름대로 타당하다. 구체적인 저자의 실천법을 여기서 일일이 정리하지는 않겠다. 다만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자신이 노력을 기울인 리미널 씽킹, 경계에서 생각하기의 요체가 무언인가를 다시 정리해둔 부분을 여기에 다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경계에서 생각하기는 우리의 일상에 혼돈 상태를 도입함으로써 기존 모델에 의도적으로 훼방을 놓는 방법이다. 일부러 혼돈으로 뒤엉킨 상태를 만듦으로써, 과거 모델보다 효과적으로 작동할 있는 새롭고 흥미로운 모델을 도출할 있게 해준다. (…) 새로운 기회를 맞으려면 여러분은 복잡함을 포용해야 한다. 경계에서 생각하기는 모호함과 불확실성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줌으로써 변화의 길로 항해하게 하는 방법이자, 어느 정도의 파괴 없이는 어떤 실체적인 창조도 있을 없음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227-228)

 

 

저자의 설명을 언어로 이해하고 표현하자면, ‘경계에서 생각하기 고인 물의 물꼬를 있는 변화를 주어 흐름 변화를 촉발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다시 정리할 있을 같다. 과정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경계에서 생각하기가 중요한지를 개인에서 출발하여 사회적인 의미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경계에서 생각하기가 중요한 이유는 우선 (어느 광고의 문구처럼) 당신이 중요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가족, 친구가 중요하기 때문이며, 모든 구성원들이 속한 사회가 중요하고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 전부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교 선종의 가르침을 언급하기도 저자의 리미널 씽킹의 가치는 마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교훈과도 닮아 있다. 이토록 중요한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바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이것이 만사의 근본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책을 덮으며 책을 다시 환기해보면, 저자 데이브가 말하는 믿음, 믿음 거품은 다른 말로 패러다임으로 번역해볼 수도 있겠다. 개인이든 사회든 각각 지니고 있는 믿음 체계, 독트린, 주의가 바로 이러한 아닐까. 우선 믿음은 (취사선택되어) 만들어지는 모델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믿음이 창조해낸 공유세계 바꾸려면 당연히 이러한 믿음체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나름의 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의 행동 강령으로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보존하려는 힘을 갖는다. 따라서 기반이 되는 믿음을 바꾸어야만 하는데, 결국 이것은 당사자 바로 자신이 스스로를 바꾸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패턴, 실패와 파멸의 고리 속에 있는 자신을 인식하고, 여기에 변화의 물꼬를 트는 , 시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데이브가 책에 쏟아부은 노력과 에너지의 실체라고 정리해보고자 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9가지의 실천법은 책을 확인하라. 가장 인상적이고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실천법 가지는 자신을 비우고, 멈추어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는 타인의 욕구와 감정이 드러날 있는 안전지대를 만듦과 동시에 타인과 나와 공유할 있는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모든 사람들이 드러난 문제점들을 바라보고 해결할 있는 지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중요한 것은 고인 물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행위가 바로 인도의 쉬바 역할처럼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일이다. 여기서의  파괴는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것의 건설이라는 전제가 되는 파괴를 의미할 것이다. 변화의 순간, 전환기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사고방식이 바로 리미널 씽킹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믿음이 우리를 제한한다."(81면)

"이성은 사람의 행동을 부추기지 못한다.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것은 감정이다."(136면)



"시간이 지나며 깨달은 사실은 변화를 꾀하지 못하게 막는 제약의 대부분이 오직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224면)

"경계에서 생각하기는 우리의 일상에 혼돈 상태를 도입함으로써 기존 모델에 의도적으로 훼방을 놓는 방법이다. 일부러 혼돈으로 뒤엉킨 상태를 만듦으로써, 과거 모델보다 더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새롭고 흥미로운 모델을 도출할 수 있게 해준다. (…) 새로운 기회를 맞으려면 여러분은 복잡함을 포용해야 한다. 경계에서 생각하기는 모호함과 불확실성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줌으로써 변화의 길로 항해하게 하는 방법이자, 어느 정도의 파괴 없이는 그 어떤 실체적인 창조도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227-228면)

"만약 어떤 일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1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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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멍키 - 혼돈의 시대, 어떻게 기회를 낚아챌 것인가
안토니오 가르시아 마르티네즈 지음, 문수민 옮김 / 비즈페이퍼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카오스 멍키

(원제: Chaos Monkeys)

안토니오 가르시아 마르티네즈 지음 | 문수민 옮김 | 비즈페이퍼

 

강아지 이름을 닮은 <카오스 멍키> 저자 마르티네즈는 IT벤처 업계의 개자식이라 불릴만 했다. 물론 좋은이란 수식어를 앞에 붙여줄만하다. 책을 읽기시작하자마자 솔직담백하게 드러나는 저자의 저돌적이고 돌아이 기질은 저자의 매력이라 있을 같다. 스페인계 이민자의 자손으로 미국 서부의 명문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마친 마르티네즈는 말하자면 미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돈키호테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지적이면서도, 솔직하다못해 (책의 지면을 통해) 여자를 밝히고, 그럼에도 스스로를 사기꾼이라고 묘사하는 사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두툼한 책이지만 시간이 걸린다뿐이지 지루하지 않게 읽어나갈 있었던 같다. 스페인계 미국인 돈키호테의 좌충우돌 생존기(?) 처음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흥미진진하다.  

 

 

저자는 학위를 받자마자 미국의 많은 명문대 물리학과 졸업생들처럼 동부의 뉴욕에 있는 월가로가서 퀀트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 금융자본주의의 핵심인 월가의, 그것도 세계적인 금융회사로 알려진 골드만삭스에서 금융자본주의의 실상을 목도하고, 업계를 떠날 결심을 하게된 것이 마르티네즈의 좌충우돌 생존기의 서막이었다. 미국 동부의 금융계에서 저자가 일할 월가가 하는 일을 매우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상대가 차도둑이고 차를 훔칠 계획을 짜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경우, 그들은 차를 훔치기 전에 미리 보험에 들어둠으로써, 차도 훔치고 보험금도 타내 양쪽으로 이득을 보려할 수도 있다. 월가가 그렇게 한다.”(37)

 

책에서 저자는 실제 인물(예를 들어 투자자, 대기업 CEO, 벤처업계 동료)들의 실명과 함께 이들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가감없이, 그리고 돈키호테와 같이 저돌적으로 던지고 있고, 이러한 저자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쓰기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호감을 끌어들이는 점이 분명 있다. 아마도 투자자들과 수도 없는 미팅과 설득(다시 말하면 구워삶기)으로 투자자들의 돈을 끌어들이는 저자의 수완과 경지를 엿볼 수도 있다. 물론 물리학 박사에다 최고의 금융회사, 그리고 최첨단의 IT벤처업계, 그리고 트위터와 페이즈북과 같은 IT계의 공룡회사를 종횡무진하며 일해온 저자의 화려한 경력으로 , 교활하기만한 인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솔직함이 투자자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주목을 더욱 받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내가 처음, 책을 읽지 않았다면 미국 첨단 기업의 생태계를 엿볼 있는 기회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눈에 비친 시각이나마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해본다는 것은 두툼한 책이 전달해주는 미덕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요즈음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주목받는 화두는 단연코 ‘4 산업혁명 것이다. 나라가 앞으로 생존하기 위해 ‘4 산업혁명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형국이다. 초등학교 수준의 교실에서는 놀이를 통한 프로그램 코딩의 기초배우기에 여념이 없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우리는 ‘4 산업혁명 요긴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프로그램 코딩 조기교육 당연히시켜야한다고 믿기 시작한 하다. 그러나 이러한 호들갑 이면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분명 아주 중요한 일이 것이다. 이미 국내의 언론에서는 35년도 이전에 ‘4 산업혁명 대한 준비를 촉구하는 기사가 것을 적이 있는데 이제와서야 이런 전국적인 호들갑은 과연 무엇때문이었을까.

 

 

저자가 지나가듯 전달하는 통찰 중에는 귀기울여 들어볼만 것들이 많이 등장한다. 4 혁명의 물결에 잘대비하기 위한 이런 대한민국의 호들갑은 분명 마르티네즈의 심각한 비판을 받게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르티네즈에 따르면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술의 주체가 인간에서 컴퓨터 이동한다고 말하는 대목이 인상깊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리스트 마크 앤드리슨의 말을 다시 여기에 언급하자면, 미래의 일자리는 컴퓨터에게 일을 지시하는 사람과 컴퓨터가 지시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라고 말은 가까운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격변을 예고하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앞으로는 모든 것의 주체가 인간에서 컴퓨터로 이동하게 되고,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4 산업혁명 본질적인 특성이 되어버리지나 않을까하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특히 저자가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온라인 광고 타기팅 관련한 기술을 언급할 새롭게 알게된 사실들 때문이었다. 내가 장바구니를 담는 나의 행위가 실시간으로 추적당하고, 기록이 읽히면서 이것이 내가 온라인 상에서 어디를 가든 나를 따라다니고, 나의 취향 행동 패턴을 반영한 소비활동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가 시간을 두고 점점 쌓여간다면, 나를 구성하는 무의식마저 읽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물론 이제는 인터넷에서 나의 구매 행위나 각종 활동들이 계속 읽히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이것이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있다는 점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카오스 멍키> 읽으면서 전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온라인 생태계와 첨단 IT업계에서 주도하는 기술개발의 방향이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설정되어가는지를 맛볼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꺼운 책을 읽어나갈 있도록 해준 것은 마르티네즈의 돌직구 같은 솔직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입담과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실제 인물들과의 좌충우돌 비하인드 스토리가 특히 흥미를 잃지않도록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서 여러 가지 역경을 겪는 모습은 책의 제목대로 (다중적 의미에서) 혼돈 속의 카오스 멍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 더하여 장의 시작에서 저자가 인용해두는 고전의 진지한 문구들은 저자가 겪게되는 사건들과 관련하여 자신을 희화하하는 보다 인간적인 감각을 보여주고 있는데, 점은 분명 저자의 어린 시절 경험했던 폭넓은 독서에 힘입은바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책의 내용 뿐만 아니라 저자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경제 경영서를 읽지 않았던 나도 책을 꽤나 재미있게 읽었다는 . ‘이거면 아닌가?’

 

 

 

 

(44면)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리스트 마크 앤드리슨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미래에는 두 부류의 일자리가 존재할 것이다. 컴퓨터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과, 컴퓨터가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월가는 시작일 뿐이었다.
(...) 컴퓨터가 작업흐름을 이끌고, 인간이 빈틈을 메우게 된 것이다. 우버의 운전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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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기원 - 예일대 최고의 과학 강의
데이비드 버코비치 지음, 박병철 옮김 / 책세상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것의 기원

(원제: The Origins Of Everything in 100 Pages More Or Less)

데이비드 버코비치(David Bercovici) 지음 |  박병철 옮김 | 책세상

100페이지 수준에서 담아낸 모든 존재의 기원

야심만만해보이는 책의 제목에 비해 책은 두껍지 않다. 지구물리학자인 저자 데이비드 버코비치 교수가 거꾸로 엮어내는 모든 존재의 역사 요약 물론 과학의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다. 저자는 어느 몇명의 학부생들로부터 과학수업(세미나) 개설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모든 것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학기동안 진행되었던 수업 내용을 권의 분량으로 정리한 책이 바로 책이다. 버코비치 교수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책의 목적은 간결명확하다. ‘얇고 피상적이면서 영양가 있는 집필한다는 것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과학지식 예일대 강의 버전이라 있다.

저자의 전공을 중심으로 이렇게 주제를 학기의 강의로 한정하면서 정한 목적은 학생들에게 과학의 탐구는 과학의 검증가능성에 대한 교훈을 전달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의 기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빅뱅 우주의 형성, 그리고  수십 억년에 걸친 생명의 탄생과 진화의 과정은 물론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기나 시간의 틈새 만큼이나 우리는 포착하지 못하는 상황들도 많을 있다. 조심성있는 저자와 같은 과학자들이 최고의 덕목으로 고려하는 과학의 본질적인 특성은 바로 검증가능성 있다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이야기 달리 ‘(과학적) 가설 나름의 근거와 합리적 설명이 뒷받침되면서도 새로운 실험이나 근거가 드러나 기존의 설명을 전복시킬만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면, 언제고 기존의 가설을 대체할 있을 것이다. 대개 과학의 역사는 이러한 기존의 가설을 보다 개선하거나 획기적인 인식으로 인류를 안내해왔기에 보다 강력한 힘을 지낼 있었을 것이다. 

책의 독특한 특징으로 보이는 것은 얇은 속에 꽤나 많은 과학사의 사건들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저자가 써내려가는 문장 문장의 무게는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말하면 저자가 언급하는 문장 하나로도 상당한 이야기 거리가 수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기원으로부터 마지막 인류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펼쳐내는 과학사의 진실들은 상당히 중요한 사건들의 알곡들이 모여있다. 여기에는 물론 나름의 장단이 있을 것이다. 과학사에서 일어난 일들의 맥락을 파악해보기에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줌과 동시에 너무나 중요한 사건들의 폭격으로 때론 피로해지기 쉽다는 점이다. 책도 결국은 짧은 시간에든 천천히 시간을 들여 하나의 줄기가 되는 책으로 읽어나갈 있을 것이다. 결국 권의 책으로 많은 지식과 관련하여 라는 의문에 대답할 수는 없지만, 의문의 답을 찿아보려는 이들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살아있는 평생을 의식-무의식중에 되묻게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론적 의문이다. 의문을 염두하며 인상깊게 기억하는 대목은 버코비치 교수가 우리는 별의 자손이다라고 하는 대목이었다.

결국 당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원자들은 과거 어느 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별의 후손이라고 하면 무슨 외계인이나 신성한 존재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우리가 별의 직계 후손인 셈이다.”(55)

 

우리는 결국 우주의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성분으로부터 나왔다. 나아가 나라는 존재를 비롯한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모두 별의 자손이자 직접적으로 태양의 핵융합 과정을 통해 존재를 드러낸 동기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보면 나는 결국 태양이 지구에 보내주었던 무한한 에너지의 잉여물의 자손이라고 수도 있으며, 모든 존재와 나는 서로 잇닿아있는 존재라는 자각이 생긴다.  현대의 과학자들에게는 이미 익숙히 알려진 사실이겠으나, 이러한 통찰의 재발견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고있다고생각하지만, ‘제대로알고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중요한 과학적 사실과 과학의 발견들 속에서 나는 잠시 멈춰서 나의 위치를 생각해본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있게 되었다. ‘나는 별에서 아이(아니 이제는 중년)’이라고 말이다.

얇지만 상당히 묵직한과학 지식들을 따라가는 동안 느끼게 되는 것은 인류가 발견해낸 수많은 지식에도 여전히 우리는 우주와 태양계, 그리고 지구의 기원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바로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무지의 발견이다.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우리는 매일 보고 있는 달의 탄생을 만족할만하게 설명하는 이론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반대로 인류는 절대로 직접 목격할 수없는 사건 현상에 대해 이해하고 발견할 있는 지적인 수단을 부지런히 마련해왔다. 수많은 천재들이 지진으로 발생한 지진파를 분석하여 지구 내부 구조를 짐작한 부분도 흥미롭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모든 것의 기원> 읽으면서 인류가 알아낸 지식의 한계를 깨닫게되는 동시에, ‘별의 자손으로서 위대한 인간의 면면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 대한 겸손함이 아니라 그럼에도인류가 이루어낸 위대함 따라간 짧은 여행이었다.

 

가지 아쉬웠던 부분은 판구조론(plate tectonics) 관점에서 저자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지구의 항상성에 대한 판단이다. 지구의 기후변화를 언급하며 저자는 지구의 역할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환경을 아무리 망쳐놓아도 지구는 적어도 앞으로 수백만년 동안 멀쩡하게 유지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질구조판은 인간이 내뿜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205)

과연 그럴까? 과학의 핵심에 검증가능성 있다는 저자의 말을 믿어본다면, 저자의 과학적 판단 역시 뒤바낄 있을 것이다. 다만 지구에 대한 저자의 무한한 신뢰와 확신을 드러내는 표현에 대한 설명은 아마도 저자의 세미나 수업을 들어야 이해가 있을 같다. 얇은 책이라는 지면의 제약 수많은 중요한 자연사의 사건들에 대해 설명과 이유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나의 주목을 끌고 다소 거슬렸던 부분은 저자에게 해당하는 과학적 진실 숱한 맥락의 생략과 의미의 변형과정을 통해 왜곡될 있는 부분에 대한 것이다. 과학자가 우리가 아무리 지구의 환경을 망쳐놓아도 정상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라고 단언한다면, 수많은 시민들과 정부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위한 전지구적 노력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까라는 의문을 품을 있다. 내가 만약 버코비치 교수의 세미나 수업을 들었다면, 단연코 나는 부분을 질문했을 같다.  

끝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종종 등장하는 버코비치 교수의 유머는 숨막힐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묵직한 과학적 사실들 속에서 잠시 쉬어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중에서도 인류의 기원을 다루는 부분에서 인간에 대해 뼈있는 농담을 던지는 다음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탈락했거나, 유전적으로 흡수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렵에 거대 포유류의 대부분이 인간의 손에 의해 멸종했다. 다른 종의 씨를 말리는 기술은 인간이 단연 챔피언이다. 분야에서 인간을 따라올 동물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251) 

부분은 저자의 냉소가 담긴 뼈있는 농담이며, 우리가 귀기울여 듣고 생각해볼만한 문제다. 인간은 다른 종의 씨를 말리는 선수이므로 다른 모든 종의 씨를 말리거나, 혹은 지구의 환경을 아무리 망쳐도 지구는 저자의 믿음대로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과학자의 사고실험 맡길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에 대한 나의 관점은 이렇다. 인간이 아무리 지구를 망치고, 다른 종들의 씨를 말려도 지구는 어떤 변동의 내에서 지구를 정상적인상태로 되돌려 놓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결과적으로 파악되고 인식될 있는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살고 있는 우리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이 기원 아는 만큼이나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별의 자손들이고, 서로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원자들은 과거 어느 날 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별의 후손’이라고 하면 무슨 외계인이나 신성한 존재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우리가 별의 직계 후손인 셈이다."(55면)


"우리가 환경을 아무리 망쳐놓아도 지구는 적어도 앞으로 수백만년 동안 멀쩡하게 유지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질구조판은 인간이 내뿜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205면)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탈락했거나, 유전적으로 흡수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무렵에 거대 포유류의 대부분이 인간의 손에 의해 멸종했다. 다른 종의 씨를 말리는 기술은 인간이 단연 챔피언이다. 이 분야에서 인간을 따라올 동물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25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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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악한 책, 모비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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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 모비딕

(원제: Why Read Moby-Dick?)

나타니엘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지음 |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책을 읽으며 기록했던 메모들)

 

 

책은 <주홍글씨> 작가 나타니엘 호손의 이름과 같은 이름(나타니엘) 저자가 <모비딕> 다시 읽어내려간 독서기록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나타니엘 호손과 <모비딕> 작가 허먼 멜빌과의 관계이다. <모비딕> 거의 완성할 즈음인 1850년대 초에 이웃에 살던 나타니엘 호손과 친해진 멜빌과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모비딕> 완성되는 시기 전후에 멜빌에 미친 호손의 영향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저자의 기록에 따르면, 작가(호손과 멜빌)들은 매우 상반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호손은 나이가 멜빌보다 10 이상 연상이었으며, 보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멜빌은 포경선과 해군에서 바다생활을 수년 하고 돌아온 매우 에너지 넘치고 말이 많은 성격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당시 미국 사회 조금 들여다보면 1850 대를 전후하여, 미국은 노예제도 관련하여 마치 불붙은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당시 긴장된 사회의 분위기를 <사악한 , 모비딕>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포경산업이 이미 성황을 이루었던 시기였으며, 포경산업의 중심에는 퀘이커 교도들이 있었고, 포경산업을 통해 퀘이커 교도들은 당시 부를 축적할 있었음을 알려준다. 저자 나타니엘은 주로 퀘이커 교도들인 낸터킷 포경 상인들은 (고래)기름을 팔아 미국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되었다.라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흑인 노예였다가 탈출, 자유인이 되어 작가 활동가로 변신한 프레데릭 더글라스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미국인 노예 프레데릭 더글라스의 이야기>(1845)에서 언급했던 말을 병치시킨다. 가장 잔혹한 노예주가 가장 경건한 사람이기도 하다 모순된 진실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수많은 고래의 생명을 담보로 부를 축적했던 퀘이커 교도들의 고민거리를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지적하고 있는 부분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있는 사례로 있겠다. 결국은 종교적인 양심과 부의 축적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키냐의 문제를 미국인들은 ‘(신의) 소명 (calling)’이라는 장치로 합리화했다고 있을 것 같다.

 

 

<사악한 , 모비딕> 작가 나타니엘이 간단히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모비딕> 그야말로 고래 포경업에 관한 방대한 백과사전과도 같은 책인 동시에 당대 미국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반영해주는 거울과도 같은 책으로 읽힌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시기, 그리고 여성이 이 보다 조금 나은(?) 지위였던 시기에 식인종 고래작살잡이 퀴퀘그와 친한 동료가 되고, 흑인이나 백인, 황인종이나 식인종들과 상관없이 모두 동일한 사람일 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는 허먼 멜빌의 견해는 지금의 진보적 개념에 비할바가 아니. 그대로 포경선이라는 배를 타고 모두가 하나의 목적으로 가지고 서로 협력해야만 하는 선원들은 피부가 어떤 색이냐보다 중요한 실존적인 문제들, 요구사항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작가가 강조하고 있듯이 <모비딕> 후대에 다시 조명을 받고 수많은 작가들로부터 위대한 미국의 문학이자 복음서라고 인정받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대를 앞서나간 작가의 예민한 시각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모비딕> 시작 부분에 멜빌이 읽은 중에서 고래 관련한 문장들을 발췌한 부분에서 몽테뉴의 <에세(수상록)> 레이몽 스봉의 변호’  한 대목 발견했다는 점이다.

짐승이든 배든, 다른 것들은 모두 괴물(고래) 아가리, 무시무시한 심연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 삼켜져서 모습을 감추지만, 오직 바다모샘치만은 그곳으로 안전하게 물러가 잠자리로 삼는다.

 

물론 나의 상상이긴 하지만, 멜빌이 <모비딕> 초입부에 주인공 이슈마엘의 동료를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를 설정한 것도 몽테뉴의 <에세>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종교와 계급을 불문하고 사람과 상대방에 대해 배우고 대화하기를 즐긴 몽테뉴의 열린 자세 뿐만 아니라, 몽테뉴가 유럽을 방문한 식인종족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식인종에 대한 설정은  <모비딕>  영향을 실화 에섹스 이야기에서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사건은 1812 포경선 에섹스 호가 거대한 향유고래를 잡으려 시도하다가 고래가 배를 여러 들이받고 파선된 사건을 말하는데, 대의 구조선을 타고 탈출한 선원들이 바다에 표류하다가 결국 동료를 잡아먹으며 3 넘게 버티다가 구조되었던 사건이다. 특히 사건은 당시 미국사회에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퀘이커 교도들인 선원들이 바다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다가 죽은 동료의 시신을 먹고, 심지어는 제비뽑기를 하여 명을 희생하여 시신을 먹은 사건이기에 그러하다. 허먼 멜빌을 비롯한 지각있는 작가들은 분명 동물로서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더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사악한 , 모비딕> 읽어나가다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자신의 불멸성을 이상 믿지 않게 사람에게 삶은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살아갈 방법을 찾는게 삶이다.

대목을 아주 보여주는 소설이 떠오른다. 바로 윌리엄스 <스토너>이다. 소설에는 미국의 지식인(영문과 교수) 삶이 온전히 묘사되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 스토너는 교수로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평생토록 패배만 하는소시민의 모습으로 답답하리만치 그려지고 있다. 극적인 사건도, 그렇다고 촌철살인의 유머도 보이지 않는다다만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처럼 삶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끊도 없이 패배하는 인간의 모습만을 잔잔하게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윌리엄스도 <모비딕>에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스토너>는 특히나 '미국적'인 소설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도 자신의 삶을 꾸역꾸역살아가는 우리 삶의 위대함이 있다고  <스토너> 나에게 말을 건네주었듯, <모비딕>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읽는방법을 제시해주는 같다.

 

 

여기까지 <사악한 , 모비딕> 읽어나가면서 떠올린 단상들을 묶어보았는데, 역시나 두서가 없다. 하지만 보다 다듬고 싶어서 고민하다보면, 메모해둔 단어들을 보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을 같아 다소 급한 마음으로 적어보았다. 아직 <모비딕> 읽어보진 못했으나, 미국 그리고 인간이라는 키워드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해볼 있는 무언가 담고있는 책으로 보인다. 인간과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배에서 일어나는 양상들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비유와 은유가 풍부한 책으로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독서에 더욱 기대가 된다. <사악한 , 모비딕> 이런 점에서는 나에게 보다 동기를 책으로 있다. 책의 원제가 모비딕을 읽는가?’라고 직역해본다면, 나는 우리는 모비딕에 주목하는가?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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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 테크놀로지와 기술제국 소련의 몰락
로렌 R. 그레이엄 지음, 최형섭 옮김 / 역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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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과도 같은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읽은 책을 덮으며 서서히 떠오른 것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 도시 이야기> 문장이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찰스 디킨스 < 도시 이야기> 에서 인용

 이율배반적인 삶의 역설과,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인간 사회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문구를 떠올리며, 아마도 문장은 인류가 존재하는 어느 시대이든 진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미국의 역사학자가 냉전이 한창이던 60년대 초반 미국 최초로 구소련에 교환학생으로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이후 관심을 갖게된 소련 엔지니어의 삶과 스탈린 치하의 사회상을 추적한 기록이다. 저자가 관심을 갖고 추적한 사람은 표트르 팔친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구소련 엔지니어이다. 그는 1875 10 05,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42 전에 태어나 1929 5 54세의 나이에 산업당 사건이라는 역사의 사건을 통해 다른 엔지니어들과 함께 소비에트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숙청당했다. 책의 저자는 처음 팔친스키와 관련된 정보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를 통해 폐쇄적이던 구소련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팔친스키는 어떤 사람이었나

 

표트르 팔친스키는 평범한 가정의 12 형제 장남으로 태어나 이혼한 어머니 슬하에서 어머니가 운영하던 도서관의 책을 많이 접할 있었던 환경에서 자랐다. 장남으로서 사실상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력으로 엘리트 공대에 입학해서도 생활비를 벌기위해 다른 부유한 동급생과 달리 다양한 일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엔지니어로서 정치와 예술에 또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에 이끌려 온건적인 아나키스트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과도 교류를 했다. 러시아 혁명 당시 급진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여 스탈린이 집권한 20년대 이후 소련 공산당과의 마찰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다만 팔친스키의 경우, 지도자급의 엔지니어로서 글쓰기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한 행동을 통해 체포와 석방을 여러 반복하는 경험을 했다. 아마도 작가 디킨스가 자신의 소설에서 묘사한 인간 사회의 극한 진실을 팔친스키는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팔친스키의 엔지니어링 철학을 인간적 엔지니어링으로 간결하게 요약한다. ‘기술과 노동자 모두 최적의 상태여야 한다라는 팔친스키의 주장이 보여주듯 기술 대한 신뢰와 더불어 인간으로서 노동자의 삶의 조건 주목한 점에 주목해야한다. 소련의 중앙집중식 프로젝트에서도 엔지니어의 의사 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필요가 충족된 상태를 의미했다. 인간의 요소는 나아가 인간을 위한 사회정의 기술과 동시에 고려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기술은 인간의 삶의 질을 고양하는데 활용되어야한다는 가치에 충실한 철학인 셈이다. 당대에 국가 주도의 소련 산업구조 속에서 개별 인간에 대한 가치를 중요한 요소로 고려했다는 점은 현대의 고도 산업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편 팔친스키의 엔지니어링 철학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경험들을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꾸준히 제공하고 있다. 분명 다른 많은 당대의 엔지니어들과 다른 폭넓은 식견과 인간의 가치를 주목할 있게 배경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족도서관에서 경험한 독서체험, 그리고 성장해서는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성공한 산업 컨설턴트로 일하며 다양한 삶의 양식과 문화를 접한 경험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울러 엔지니어로서의 전문지식 뿐만 아니라 정치와 예술에 관심을 갖고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있었던 인문적 교양 형성의 결과가 아닐까.

 

 

 

【스탈린 치하의 사회변화와 엔지니어의 역할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이 집권을 이후, 숱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지던 20년대 후반 유능하지만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팔친스키는 스탈린에게 거슬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특히나 현재의 시각으로 인문적 교양 지닌 팔친스키는 자신의 비판적인 시각을 글쓰기로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후 팔친스키는 스탈린의 비밀경찰에 납치되어 20년대 후반, 비밀리에 숙청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팔친스키의 숙청과 관련한 산업당 사건 스탈린 치하의 폭압적인 정부아래 어떻게 지식인들이 억압을 받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사례가 된다. 팔친스키의 체포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묘사해놓았다고 하니 이후에 보다 자세한 면모를 구소련체제 내에서 바라본 지식인의 시각으로 살펴볼 있을 것이다. 시기에 많은 지식인과 정적이 숙청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도 고통을 받게된다. 30년대에 우즈베키스탄 등의 황무지로 강제이송당한 고려인들의 기억은 팔친스키가 처형당한 이후, 구소련의 암울한 시기와 병치되고 있음도 상기해볼 있다. 

 

팔친스키가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 인하여 숙청된 이후, 스탈린은 본격적으로 엔지니어들을 생각하지 않는기술자들로 만드는 국가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스탈린 시대에 비로소 엔지니어의 인문 교양의 습득 전통이 소멸해버린 것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과정이었다. <타임머신> 작가 H. G. 웰스 스탈린을 인터뷰한 아래 대목에서 스탈린의 생각을 보다 분명히 느낄 있다.

생산 조직가인 엔지니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받은 대로 따라야 한다. (…) 기술 지식 계급이 독립적 역할을 있다고 생각해서는 것이다.

(84, Bailes, <Technology and Society>에서 재인용)

 

더욱 경악스러운 부분은 스탈린 집권 이후 엔지니어 양성과정이 지나친 전공 세분화라는 특징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계 공학 전공엔지니어가 아니라, 기계 종류별 압축기 담당 엔지니어를 양성한다던지, 구리와 구리합금을 다루는 전문가가 별개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저자가 모스크바에 자료조사차 갔을 , 근교에서 만난 여성 엔지니어가 자신을 제지공장 볼베어링엔지니어라고 소개한 상황을 믿기지 않는 듯이 묘사한 대목도 이런 소련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스탈린의 목표대로 과도한 전공 세분화는 팔친스키와 같은 생각할줄 아는엔지니어가 아닌 거대한 전체의 부속품으로 기능하는 기술자를 양성해내었다. 저자는 스탈린이 뿌린 이러한 씨앗의 재앙이 여전히 팔친스키의 유령으로 소련 내에 출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스탈린의 중앙집중식 산업화 방식은 기본적으로 이전의 레닌이 도입한 미국식 산업경영기법 (포드주의 테일러주의 기반한 경영방식) 결합되어 이루어졌다고 이해해볼 있겠다. 시기의 사회 건설 실험은 노동자를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기계 부속품으로 만들어 효율성(생산성)만을 추구하게 하는 강력한 추동을 제공했다. 나아가 금융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여기에서 나아가 인간이 하나의 상품으로,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버렸음을 상기해볼 있을 것이다. 

 

스탈린이 성취(?) 중앙집중식 산업화의 사례를 가지 떠오려보자면, 나는 백해운하 건설 프로젝트 예로 들어보겠다. 발트해-백해를 잇는 운하 건설은 스탈린 치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선전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이면은 참혹한 진실이 가려져 있었다. 백해운하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는 거의 대부분인 정치범인 죄수들이었기에, 이들의 인권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듯하다. 표트르 팔친스키와 동료 엔지니어들이 제시한 엔지니어링 원칙이 철저히 무시되었고, 폭압적으로 인권이 유린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2 미만의 공사기간 동안 20만명이 사망하여, 매달 평균 명씩 사망한 참혹한 프로젝트였다. 이것이 스탈린식 산업화와 사회주의의 진실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전문가/엔지니어들이 정치적 폭압으로 인하여 전문가로서의 소견 표명의 기회를 포기하거나 차단되는 경우, 또는 폭압적인 정치체계나 정치가들의 견해에 심지어 동조하게 되는 경우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생각하는엔지니어의 역할로서 팔친스키는 어떤 국가의 프로젝트에 대한 결정을 , 경제적·사회적·윤리적 관점 포괄적으로 검토를 거쳐야하며 특히 산업에서 노동자와 지역주민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주장한 팔친스키의 유령은 국내에서도 여기 저기 출몰하고 있다. 4대강 사업, 제주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 건설과정이나 밀양 송전탑 건설, 그리고 성주 사드 배치 과정 등을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인간, 특히 지역 주민을 고려한 사회 정의는 아예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알아볼 있다. 특히 지역주민이 완전히 배제된 의사결정 과정과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윤리적 관점 등에서 검토되지 않고 성급하게 결정된 엔지니어링이 초래하는 대가는 우리의 후손들이 짊어지고 부담이 것이다. 과연 무엇을 위한 건설이었나? 결국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졸속 국가 프로젝트의 엔지니어링 양상은 스탈린의 무리한 중앙집중식 산업화 방식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찾기 힘들다.

 

 

 

 

 【책을 덮으며】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나에게 하나의 주제를 던져주었다. 인간이라는 요소가 배제된 기술 어떤 결과를 초래할 있는가? 그리고 생각하는엔지니어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당당히 말할 없는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있는가?하는 주제들이다. 그리고 나는 주제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모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다. 팔친스키가 엔지니어들은 정치와 경제를 반드시 알아야한다는 점과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 오늘날의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인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에서 타당하다고 본다. 과학기술인은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면 안되는가? 과학기술인들도 역시 정치들과 마찬가지로 국민이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있는 사회가 더욱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스탈린 치하 국가 주도의 거대한 실험은 분명히 실패했다. 하지만 사실이 행여나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일방적 우월이라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물론 저자는 서문에서 책은 소련이 근대 산업국가가 되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언급하듯 국가의 지원을 받는 프로그램의 수혜자로서 입장을 대변하는 언급하고 있다. 부분은 물론 거슬리긴 하지만 나는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통해 스탈린 치하의 사회상을 잠시 살펴볼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동조하는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결국은 정치적 숙청을 당한 팔친스키의 삶과 당대의 사회상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음을 상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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