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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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남긴 사랑과 회한의 기억 그리고 복원의 기도


김이정, <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2024

 



상실의 경험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는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때론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장편소설 <유령의 시간>은 작가 김이정의 가족사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소설에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 초래한 어둠의 시간을 통과하며 상실과 상처를 화인처럼 짊어진 사람들로 그득했다.


작품 속 주요 인물인 김이섭은 일제 강점기에서 30, 해방 공간에서 전쟁을 겪고 30년 생애를 살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끝내 찾지 못했다. 특히 이념의 대립으로 손 쓸 기회도 없이 아내와 세 아이를 잃었던 그였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그리움이라는 깊은 우물의 심연 속에 평생 갇혀 살았다. 사회주의라는 이상과 타인을 위한다는 대의를 따르다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자각은 그의 삶을 평생 갉아 먹었다. 한차례 가족을 잃고 난 후 주변 사람들의 손에 떠밀려 한 여인, 미자가 그 앞에 나타났다. 그녀 역시 전쟁 중 눈앞에서 남편이 죽고 안식처마저 잃었던 여인이었다.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새로운 가족을 꾸리게 된 이섭과 미자는 엄혹한 시절, 가족을 지키고자 발버둥 쳐온 우리 선배 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별 인사도 미처 하지 못한 채 역사의 거대한 파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주었던 이섭에게는 잃어버린 피붙이들의 목소리와 이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시간 속에서 부유해야 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이섭, 미자, 그리고 월남전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돌아온 남편을 지켜보아야 해던 순희의 생을 상상해 본다. 이들처럼 인생의 고비를 넘는 동안 삶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배반당했을 때, 그러니까 이 방향감각의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이섭이 건너야 했던 기구한 삶은 내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섭은 물 밖에 나온 새우의 모습처럼 강하지 못한 생명을 무엇보다 혐오했다. 그가 이런 무기력함을 가장 잔혹한 형벌로 여겼을 속사정을 헤아려본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던 가장으로서의 수치심과 죄책감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섭과 미자, 그리고 가족이나 다름없던 이웃집 순희 같은 이들은 모두 고통스러운 상처를 끌어안고서 각자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자 분투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우리 삶의 비루한 취약성을 선명히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토록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등과 보듬을 수 있는 팔을, 살가운 손길을 서로에게 내어줄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첫 아내이자 한 집안의 사랑을 받던 맏딸을 잃고 삶의 의욕을 놓아버린 장인을 바라보던 이섭의 마음처럼, 사람이 사람을 잃고 무언가를 지켜낼 힘을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게 인상적으로 남은 장면 하나는, 지형이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저렇게 모든 걸 잃고도 여전히 인간을 사랑한다는 게 가능할까?”, 자문하는 대목이다. 지형의 형제들이 아버지가 평생 잃어버린 것들을 복원하자고 손을 모으는 장면이 오롯하게 떠오른다.


인생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다시 살리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에게는 갓 태어난 아이의 천진한 검은 눈동자일 수도, 또 누구에게는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등을 내어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상실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고 꿈을 꾸는 일일 수도 있겠다. 지형이 꿈에서 보았던 노란 두메양귀비를 백두산에서 발견한 순간 아버지의 존재를 다시금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리운이복형제에 가 닿고자 했다. 지형의 이러한 간절함은 다시 이생에서 누군가를 추억하고 사랑하며 꿈꾸길 멈추지 말 것을, 기도하듯 요청하는 듯했다. 불현듯 이섭이 남긴 오래된 일기장의 한 구절이 어른거린다. “인간의 생이여, 헛되고 헛되도다. 하물며 이념과 꿈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지 않는 생은 또 얼마나 헛될 것인가.지형이 이복 오빠가 있을 방향을 향해 무언가를 외칠 때, 나 역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메마르고 헛헛한 유령의 시간을 보내온 모든 이들이 이제는 꿈꾸는 시간으로 생을 채워 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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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4-10-31 13:44   좋아요 0 | URL
네~ 괜찮습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계-사이 - 찢어진 예술, 흩어진 문학, 남겨진 사유
최정우 지음 / 타이피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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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존재의 세계 사이에 무한에 가까운 경로가 있고, 그 한 가운데 우연히 마주치고 부대끼는 사람들을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창작을 하는 저자는 이 세계와 세계 사에의 시간을, 혹은 사건을 어떻게 보내고 마주하는 사람일까 호기심이 일었습니디. 곧 저자와 마주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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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연대기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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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견문록 이후 다시 김호동 교수님의 작업을 다시 만났습니다. 책 속에 담긴 인류사의 거대한 발자취를 흥미롭게 따라가 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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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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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감정은 소중하다. 정말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잊지말아야 할 것은 타인의 감정도 그렇다는 것.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봅니다. 피할길 없는 혐오의 감정도 포함하해서 말이죠. 나의 혐오 감정을 솔직하게 발견하는 시산이 될까요? ^^ 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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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증언 -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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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101년 째 애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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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간토대학살이 일어난 지 101년이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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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년전 오늘 오전 11시58분... 간토(관동) 대지진이 발생했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았으나 더 큰 재앙은 곧 이어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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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일본 군부의 의도적인 도발에 일본 우익 세력이 가세했다. 이 일본인들은 군부의 묵인 하에 조선인을 색출하여 살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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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6600여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살해당해야 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었던 기준은, 단지 ‘15엔 50전’이라는 일본어 발음을 잘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외국인들, 특히 조선인들이 일본의 우익 세력과 이에 동조하는 일본인들에게 죽창과 칼에 찔려 죽어야만 했던 이유로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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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그러니까 지난 101년간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점은, 역대 어느 대한민국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일본에 공식적인 조사와 해명 및 사과를 요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느 대한민국 정부도 말이다. 이점이 가장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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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진 직후 살해당한 사람들 중에는 일본의 타지역 출신 일본인도 있었다. 그러니까 ‘15엔 50전’이라는 발음을 관동지방 사람들의 발음으로 읽지 못해 살해당해야했던 오사카 출신의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 <백년 동안의 증언>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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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일본 영화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이야기도 기억난다. 간토대지진 당시 10대 였던 구로자와 아키라는 이웃 어른들이 어린 자신에게 죽창을 쥐어주며 ‘조선인놈들을 죽이라’고 했던 상황에 충격을 받은 순간을 기록한 대목이 있다. 그가 지성인의 자질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지점은 그의 손에 들린 죽창을 보며 ‘이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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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교 교수의 <백년 동안의 증언>을 통해 간토대지진에 대해 비로소 입문할 수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내용은 무겁지만) 작고 가벼운 이 책을 입문서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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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일제 부역자들이 자신들의 매국행위나 변절한 이유를 들어보면 상당 부분은 “조선이 해방될 줄 몰랐다.”였다. 이들은 대개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일제의 영원한 통치를 굳게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결정적으로 한 가지가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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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의 결핍요소를 ‘인간애’라고 생각한다. 깉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라는 마음의 불씨가 이들에게는 꺼져 잇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애라는 마음의 불씨가 꺼진 자리에는 패배주의와 열패감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이 지킬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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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이 일어난 지 101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은 101년째 애도중이다. 홍범도가 사라지니, 지하철 안국역과 잠실역에선 독도가 사라졌다. 아마 교과서에서 이들이, 독도가 사라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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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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