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 날, 길에 떨어져 있던 초록색 인형을 보았다.
이 인형은 어떻게 찬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아이가 들고 가다가 놓쳤던 것일까.
아니면 초록색 인형이 종량제 봉투에서 탈출한 것일까.

새 해의 첫 날부터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나와 관계를 맺고 있던 존재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공상에 빠져본다.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둘째치고, 
버림받은 이 느낌이 어떻게 전해질까, 
그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궁리도 해본다.


박노해 시인의 ‘경운기를 보내며’란 시가 생각났다.

23년간 고쳐 썼던 경운기 한 대를
폐차장에 보내는 가장의 마음이 생각나서다.

야가 그 긴 세월 열세 마직 논밭을 다 갈고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 박노해 시 ‘경운기를 보내며’ 중에서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해 가족들에게 여전히 핀잔받곤 하는 나는
어떤 물건과 함께 보낸 시간이 떠오르면 쓰레기통으로 가다가도 
다시 서랍을 열곤 한다. 언젠간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다음으로 미루게 되는 것이다. 

안다. 경운기와 어느 아이의 인형과 같을 수 있겠냐고. 
하지만 난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경운기가 가장에게 지녔던 의미와,
인형이 어떤 아이의 가슴 속에서 차지했던 의미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마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인형은 아이에게 부모 다음으로 세상의 전부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오늘은 도로에 떨어져 있던 인형의 마음 혹은 사라진 인형을 찾고 있을 지도 모르는 아이의 마음을, 그리고 경운기를 몰고 폐차장으로 가는 가장의 마음을 생각하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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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1-03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초란공님,
저는 언젠가 아파트 상가 계단에 떨어져 있는 아가양말 한 짝 보고 걸음을 멈춰서 생각 잠겼던 적이 있어요. 초란공님 페이퍼를 읽으며 느린걸음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종량제봉투에 버려졌기엔 왠지 사랑많이 받고 있었을 인형처럼 보여요^^;; 아이가 찾고 있겠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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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나를 만나는 여정





20여년 만에 하루키의 문학과 다시 만났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모처럼 기나긴 꿈을 꾼 것만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생각해본다. 삶의 외적인 조건이 충족되어 느꼈던 만족감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감을 느꼈던 기억을 말이다. 딱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갓난 아이 시절, 세상 모두를 가진 듯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행복감을 표현할 언어를 아직 갖지 못했을 뿐. 엄마 품속의 따뜻함, 창을 통해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던 어느 무탈한 하루에 행복감을 느꼈을 법하다. 우리는 성장하며 언어를 갖게 된 대신, 행복했던 기억은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버렸을지도 모른다. 행복감을 언어로 표현해보기도 전에.


작가 하루키가 창조하고 바라본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무언가의 상실로 인한 슬픔을 지녔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무언가를 잃거나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인간관계에 실패하거나 사별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모두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소설의 화자인 역시 고등학교 시절에 사랑했던 한 소녀를 잃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 당혹스러운 상실감을 30여 년간 생생히 간직하며 살았다. 직장에서는 유능하다는 인정을 받기도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 때문인지, 인간관계는 종종 어긋나버렸다.


소설에는 두 가지 주요 배경이 나온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생노병사의 순리가 함께하는 현실세계다. 다른 하나는 높고 두꺼운 벽에 둘러싸인 도시다. 이 도시의 주민들에겐 그림자가 없다. 일단 도시에 입성하면 자신의 그림자와 분리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곳의 도서관에는 책 대신 인간의 오래된 꿈이 보관되어 있다. 대신 꿈 읽는 이만이 이 꿈에 접근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도시의 형태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릴 때면 많은 일각수 짐승들이 죽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높고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여 고독하고 무미건조한 초현실적인 장소다.


이런 점에서 소설 속 배경은 화자와 그의 그림자가 각각 머무는 두 세계를 보여준다. 마치 분열된 자아의 두 모습 같다. 이 때 화자가 반복해서 묻는 질문이 바로 나는 무엇인가?”(158) 혹은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을까?”(224)라는 질문들이다. 화자는 소설 전반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궁금해 하고,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한다. 이것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자각이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이 때 화자가 반복적으로 묻는 질문들에 답을 찾는 과정은 소설의 방향을 찾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은 어쩌면 살아가면서 각자 자신의 여러 모습을 확인하며 알아갈 수 있을 법하다. 반면 두 번째 질문은 삶에서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확인하고 그 감각의 상실을 자각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결코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곳,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두 번째 질문을 아우르는 문장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548)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단순한 희망 찾기의 소명이 아니다. 이 문장은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 곧 물질로 이루어진 본체와 그의 그림자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책임이 있다고 일러준다. 화자의 독백은 우리 각자에게 애써 미약한 관성을 부여하여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상실과 절망으로 몸이 굳어진상황에서 누구나 지니고 있을 삶의 쓰라림을 끌어안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라는 것 말이다. 이를 하나의 의식(儀式, ritual)으로 삼아 삶이라는 파도를 헤쳐가라 말해주는 듯하다. 나는 이 문장에서 멈추고, 공감했으며, 작은 위로를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상의 부단한 움직임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부여한 소명 아니겠냐고 소설은 말해주는 것 같았다.


현실 세계에서 화자가 후쿠시마현 작은 마을의 도서관장이 되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이 지역은 지진과 원전폭발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여전히 그 상처를 지니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저 작가의 우연한 설정은 아닐 것이다. 지역 주민들의 일상은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한 순간에 망가져버렸다. 어떤 이들은 죽음으로, 살아남은 이들의 삶은 대지에서 뿌리 뽑혀 부유했다. 이들의 시간은 이 때 멈추어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동시대인들에게 이 지역만큼 삶의 불확실성과 취약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있을까? 화자가 줄곧 묻는 두 번째 질문처럼, 이 주민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물었을 것이다. 가공할만한 재난 앞에서 이들은 단연코 방향 감각을 상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자들이 삶의 높은 장벽 앞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 것은 타당하다.


유령이 된 고야스 관장은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건넨다. 중요한 건, “나 자신에게 백퍼센트인가 아닌가”(448)라고.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지닌 불확실성과 취약성을 받아들일 것을 전제한다. 상처와 상실의 슬픔을 끌어안으라고 말이다.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 정리하면, 이 말은 결코 열심히 살아라혹은 노오력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40대 중반이 된 화자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에서, ‘걷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의 방식과 닿아 있다. 살면서 마주하는 고통과 더불어 행복했던 기억, 혹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기억을 발판삼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라는 요청이었다.


도서관장이 된 화자는 유령이 된 고야스 씨와 대화를 하고, 매주 월요일 그의 무덤을 찾기도 한다. 그는 고야스 씨의 생전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그의 무덤 앞에서 뚜렷한 온기를 지닌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눈물의 온기를 느낀다. 나는 이 장면에 공감했고, 또 한 번 멈추었다. 고야스씨가 말한 나 자신에게 백퍼센트인가라는 물음이, 내가 온기를 지닌 인간임을 자각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설이 내게 던지는 물음 하나는, ‘우리의 마음 일부가 탈 정도로 뜨거운 빛에 노출한 적이 있는가. 고야스씨의 말에 따르면, 이는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맛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징이다. 물론 이 사랑의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다. 이제 소설의 물음은 우리가 삶을(혹은 타인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가 될 수 있다. 소설은 삶에서 온기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이토록 뜨거운 빛에 노출시켜 태울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내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사랑하면 좋을까? 소설에 제시된 실마리는 우리에게 되풀이되어 주어지는 수많은 나날들을 나 또는 타인을 위한 작은 의식(ritual)’으로 만드는 일이다. 화자는 월요일마다 고야스 씨의 무덤을 방문한다. 이후 카페에 들려 커피와 블루베리 머핀을 먹곤 한다. 이 또한 사소해보이지만 화자의 삶을 이루는 작은 의식이었다. 또 카페 주인과 화자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다가가는데, 두 사람이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짝을 맞춘 식기를 테이블에 내놓고, 편한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는 것”(564)과 같은 일, 혹은 스파게티 면을 제대로 삶기 위해 830초 동안 기다리며 상대가 행복해할 모습을 상상하는 일, 카페 주인처럼 하루를 마감하며 멘톨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한 잔의 싱글몰트를 마시는 것 같은 작은 의식들 말이다. 이런 일상의 의식들이 우리가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은 아닐까 싶다. 나아가 작은 의식들이 모여 행복한 기억이 될 수 있다면, 삶에 따라오는 상처와 상실의 슬픔에도 우리는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런 일상이 모여야 내 삶이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나의 그림자인 또 다른 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40년이 넘도록 이 소설을 줄곧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이는 존재라고 여겼다고 한다. 나는 이 소설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작가의 화두 역시 담고 있다고 느꼈다. 그에게 문학이란 임시로 매어둔 기구(氣球)’(535)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소설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이긴 하지만. 그에게 문학이란,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를 조금 벗어나, 조금은 다른 풍경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기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현실의 벽, 마음의 벽을 마주한다. 이러한 벽 앞에서 우리는 높고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주민들처럼 정체된 삶과 마주할 것이다. 화자가 후쿠시마현의 소도시 마을 도서관으로 가게 된 것, 벽으로 둘러쳐진 막다른 길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상실과 슬픔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문학적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하루키에게 문학은 이런 벽을 넘어 바라볼 수 있는 기구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은 이 모든 여정을 담고 있었다.


작가는 40여년 만에 자신의 작품으로 돌아와 30대의 자신과 만났고, 그의 소설 속 화자는 30여년 만에 강물을 거슬러 걸으며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만났다. 20여년 만에 하루키의 문학으로 돌아온 나는 이제 읽고 쓰는 나와 다시 만나고 있다




[0]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11)
- 소설의 첫 문장

[1] "어쩌면 그것이 영겁이 지닌 한 가지 문제점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어디로 향하면 좋을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영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단 말인가?"(80)

[2] "집합적 기억을 송두리째 상실한 듯 보인다. 아마 그들은 제 손으로 떼어낸 그림자와 더불어 그런 기억도 빼앗기고 말았으리라. 이 도시 사람들은 지리에 대한 수평적 호기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수직적 호기심도 딱히 느끼지 않는 듯했다."(94)

[3] "구덩이에 던져 넣고 유채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지. 오후에는 도시 어디서나 그 연기를 볼 수 있어. 그게 매일 이어진다네."(121)

"사람들 말에 따르면 옛날에 여기(웅덩이)에다 이교도나 전쟁 포로를 던져넣었다고 해요. 벽이 생기기 전 시대에."(145)
- 집단의 상처와 슬픔을 암시하는 문장들. 난징 대학살이나 간토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4] "벽 안에 사는 사람들은 벽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130)

"이 도시로 말할 것 같으면 구성부터가 모순투성이에요."(151)

"도시는 이 웅덩이 주위에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 엄중하게 둘러쳐 뒀지요. 담이나 울타리보다 훨씬 효과적이에요."(210)

"내 모든 사고와 추론은 번번이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했다."(328)

[5] "그들(짐승들)은 온갖 것을 떠맡고 아무 말 없이 죽어갑니다. 아마도 이곳 주민들을 대신해서요. 도시를 성립시키고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하죠. 그것을 저 불쌍한 짐승들이 짊어진 겁니다."(154)

[6] "그나저나, 나는 무엇인가? 이게 아주 큰 문제야."(158)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자, 어떻게 해야 할까?"(159)

"나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어째서 이곳에 있고,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묻는다."(184)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을까?"(224)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230)

"내가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무얼 하려는지, 새삼스레 그런 생각을 시작하면 몸안의 판단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나는 정말 올바른 장소로 향하고 있을까?"(250)

"사고의 미로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다. 왜 나는 여기 있을까, 왜 나는 저쪽에 없는 것일까..."(319)
- 삶이 묻는 실존적인 물음들.

[7] "사실 당신이 이 도시를 만든거나 마찬가지니까. (...) 당신이 이 도시를 오랫동아너 유지하고, 상상력이라는 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해왔어요."(174)

[8]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178)

[9] "이 도시는 완전하지 않아요. 벽 역시 완전하지 않고요. 완전한 것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것에나 반드시 약점이 있고, 이 도시의 약점 중 하나는 저 짐승들이에요. 그들을 아침저녁으로 출입시킴으로써 도시는 균형을 유지하죠. 우리는 방금 그 밸런스를 무너뜨린 겁니다."(204)
- 화자의 그림자가 화자에게 하는 말.

[10] "그림자는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잡았다. 자기 그림자와 악수하다니 왠지 묘했다."(217)

[11]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247)

[12] "제 생각에 우리가 무엇보다 실제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의식과 기억뿐입니다."(348)

[13]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358)
- 고야스 관장이 매료되었다는 《성경》의 「시편」 한 구절.

[14]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뚜렷한 온기를 지닌 굵은 눈물방울이었다. (...) 또다른 눈물이 뒤를 이었다.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린 건 오랜만이었다. (...) 눈물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429)

"눈물도 혈액과 마찬가지로 온기를 지닌 몸에서 짜낸 것이다."(430)

[15] "살아서나 죽어서나, 뼈와 살을 깎는 그 무정함, 쓰라림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제게는 과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감촉이 양 손바닥에 짙게 배어 있어요. 그리고 온기의 유무에 따라 사후 영혼의 상태가 크게 달라진답니다."(441)

[16]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으므이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 여기서는 나이 차이도, 시간의 시련도, 성적 경험의 유무도 대단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백 퍼센트인가 아닌가,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448)

[17]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을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452)

[18] "이것이 매주 월요일의 내 소소한 습관이 되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지난주의 자기 발자취를 더듬는 것. (...)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반복이 내 인생의 중요한 목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485)

[19] "고야스 씨에게 운명은 결코 친절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 인생을-자신에게나 주위 사람에게나-유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했다."(507)

[20] "소년은 이 현실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의미로는 뿌리내리지 않은 것이다. 임시로 매어둔 기구 같은 존재. 지상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로 살고 있다. 그리고 주위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535)

[21] "나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548)

"생각해보면 많은 일이 그렇듯 당사자의 의도나 계획과 무관하게, 자연스럽고 멋대로 나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좀더 생각해보면 지금 내게는 의도나 계획 따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553)

[22]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 자신이 그대로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궁극의 개인 도서관."(557)

[23]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짝을 맞춘 식기를 테이블에 내놓고, 편한 대화를 나누면서 저녁을 먹는 것."(564)

[24]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에서 확고하고 힘있게 살아나갈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세계에서, 당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590)

[25] "제가 생각하기에 도시를 둘러싼 벽이란 아마 선생님이라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의식일 겁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651)

[26]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갈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684)

[27] "그건(벽) 꿈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현실의 가장자리 끝에 존재하는 관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685)

[28] "나는 눈을 감고 몸속의 힘을 한데 모아, 단숨에 촛불을 불어 껐다. 어둠이 내렸다. 무엇보다 깊고,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어둠이었다."(761)
- 소설의 마지막 문장

[29]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767)
- 작가후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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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잉글랜드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
(Christina Rossetti, 1830.12.05–1894.12.29)의 129주기 되는 날이군요.
날짜가 지나기 전에 노트를 남겨봅니다.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큰 오빠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가 그린 

빨간 머리의 여인들 그림이 유명하지요.
책의 표지로도 많이 사용되는 그림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의 쓸모>라는 책에서 표지로 사용된 그림이

바로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큰오빠인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의 작품입니다.
















번역가 김군(@monsieurq7)님이 번역하신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에 따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이
이 로세티 남매의 가족사진을 찍었다는 언급이 나와요.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루이스 캐럴이 로세티 집안과 교류만
한 것이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보면
이 로세티의 영향으로 보이는 구절이 나온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로세티의 시 [고블린 시장] 의 한 구절에서
Eat me,  drink melove me."라는 구절이 나와요.


그런데 이 표현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Eat me"라는 표현과 “Drink me"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을까요?
일단 로세티의 시 [고블린 시장]이 1862년에 출간되었고
곧바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럼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 책은 로세티의 시가 나온지 3년 후인 1865년에 출간 되었습니다.


당시에 로세티의 시가 상당한 인기를 거두었고 루이스 캐럴이 로세티 남매와 개인적으로 교류를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캐럴이 (아마도?) 로세티의 시 [고블린 시장]을 흥미롭게 읽고 이 문장 혹은 표현들이 마음에 들어 기억해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에 루이스 캐럴은 자신의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기이한 상황에서 이 표현을 떠올리고 사용했을 

것이란 추측을 해봅니다.



요즈음 상식으로는 표절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통념상 루이스 캐럴이 마음에 들었던 문장을 기억해두었다가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짓는 과정에서 짖꿋게 사용했을 것 같습니다.


또 이 "love me"란 표현을 정말 웃긴 언어 유희로 변용한 사례는, 

우디 앨런의 1979년 영화 <맨해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안개 낀 브루클린 브리지가 배경인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상대 배우인 다이앤 키튼 역에게 이 표현 “love me"을 사용합니다.

사랑을 구걸하면서 "love me"라는 표현이 나오고 곧이어 
아마도 ”rub me"와 같은 단어로요. 

(그러니까 발음을 살짝 바꾸어 날 사랑해줘, 날 문질러줘? 이런 엉뚱한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죠.)


우디 앨런이 영화에서 “love me, rub me"이런 식의 언어 유희를 사용한 것도, 따지고 보면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유산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어 유희에 능한 우디 앨런은 틀림없이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촌철살인같은 낯선 표현들에 매료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로세티의 문화적 유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튼 오늘은 크리스티나 로세티 타계 129주기였군요.
일기삼아 남겨봅니다.






















#크리스티나로세티 #단테로세티 #나는크리스티나로세티입니다 #번역가김군 #별책부록 #고블린시장 #고블린도깨비시장 #민음사 #크리스티나로세티129주기 #루이스캐럴 #이상한나라의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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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신 사람들 외 디다스칼리 총서 3
몰리에르 지음, 백지희 그림, 안세하 옮김 / 디다스칼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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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이 연기되어 더 기다렸던 책 잘 받았습니다~
책이 아담하고 무엇보다 표지가 마음에 듭니다!
처음 출간된 단행본의 삽화도 있어서
인물들의 모습응 상상해보고 당대의 의상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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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정영목 지음 / 소요서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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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타계 33주기, 한국적 모더니스트의 마음 풍경 산책하기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정영목 지음 | [소요서가] | (2023)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매년 말이 되면 이렇게 인위적으로 구분한 시간에 남다른 감회와 마주하는 상황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진다. 올 한해는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해보다가, 특별한 문제없이 지내온 것만 해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미술관을 찾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장욱진 화백의 회고전가장 진지한 고백전이 전시 중이었다. 전시와 관련하여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소개하는 책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을 읽어보았다. 이 책은 철학서점 소요서가에서 두 번째로 출간한 책이다. 책을 읽다가 우연히 오늘(20231227)이 장욱진 화백이 타계한지 33주기 되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간단한 리뷰를 남겨보고자 한다.


 

덕수궁 전시장을 처음 들어섰을 때 나와 마주한 장욱진 화백의 그림은자화상(1951)이다. 황금들판이 출렁이는 들판을 뚜렷하게 가로지르는, 황토처럼 붉게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왔을 법한 화백의 모습이다. 엽서 크기보다 작아 보이는 실제 그림 속 화백은 검은 색 연미복과 실크햇 모자, 검은 우산을 든 서구적 신사의 모습이다. 당대의 시대 분위기와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는 복장이다. 당시에 그의 나이 35. 조국이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519월에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충남 연기군으로 귀향할 즈음 그린 작품이라 한다. 혈기왕성한 가장으로서 고향으로 오면서 어떤 기대를 했을까 궁금해진다.


 

그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나의 그림 감상은 이렇게 작가의 연보와 연대기적인 정보를 참고하여 짐작하거나,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나름의 정보를 찾고 때론 상상하는 데 그치고 만다. 그림을 아예 감상하지 않는 것보다야 나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나의 그림 감상은 금방 한계에 도달하곤 한다. 나는 그림 해설을 읽고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기에, 아마도 작가에 대한 에피소드를 접하며 작품을 감상한 것으로 착각했던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이번에 읽은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은 미술사학을 전공한 정영목 교수가 집필했다. 만약 그라면 나의 감상 방식을 작가론에 치우친 감상 방식이라고 진단할 듯하다. 미술이론을 잘 모르는 내가 미술을 감상할 때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아마도 작가론중심의 감상방식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싶다.


 

저자는 작가론중심의 감상을 벗어나 작품 자체의 가치를 탐색하는 작품론위주의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점이 저자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기존의 작가론위주의 감상을 단순히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가론적인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했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한계를 이렇게 지적한다. “소설 쓰듯 단순한 문학적 서정성의 수상(隨想)”(43)에 그칠 수 있고, “개별 작품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존재가치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질 소지”(45)가 있으며, “상대성의 잣대는 형태의 외형적 결과를 신봉하는 피상성”(45)에 빠지기 쉽다고 말이다. 다시 정리하면 저자는 장욱진의 작품 세계를 감상할 때 작품 자체의 미학적 가치, ‘진정한 작품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보다 절대적인 존재 가치, 객관적인 가치를 찾으려면 이 기준에 부합하는 합당한 기준이 있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작품 감상의 큰 틀은 작품에 대한 형식주의적 해석에 기초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형식이 단순히 외형적 형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가 감상에서 근거로 사용하고자 하는 단서는 형식의 진정성이라고 말한다.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낙담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장욱진 화백의 그림 대부분을 감상하다보면, 사실 감상자가 사전 지식이 없이도 무엇을 그린 것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저자는 화백의 그림이 지니는 가장 직관적인 특징은 친근감’(235)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지만, 어떤 화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미술책을 읽기도 한다. 반면 장욱진의 그림에는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사적 틀과 지식이 아니라도 장욱진의 그림에는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미술비평가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인에게 장욱진 화백의 작품들은 해석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감상하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번에 책을 읽다보니, 내가 부실한 지식을 지녔음에도 얼마나 서구적인 기준에 치우쳐 우리의 그림을 바라보곤 했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작가론보다는 작품론위주의 해석과 감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장욱진의 작품 자체가 지니는 진정성이 작품 그 자체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 같다. 특히 일반 대중에게 작가론방식의 이해가 피상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향의 평가와 관점의 해석이 필요함을 절감했을 것 같다. 다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 역시 작가의 개인적인 면모나 가족 배경에 관한 사항들, 저자의 말이나 가족과 있었던 일화를 곁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작품론위주로 해석을 시도하지만, ‘작품작가에 대한 정보를 엄밀히 구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저자의 입장은 이 두 가지 방식의 접근법 가운데, ‘작품에 더 중심을 두고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하려는 인상을 준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그들(한국적 모더니스트들)의 존재가 돋보이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의 인간적 면모나 그들의 작품에 드러난 진정성 때문이다. 심지어 이 진정성은 작가와 작품 혹은 이 둘 모두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과 함께 발견된다는 점이 핵심이다.”(48)


 

그러므로 저자 역시 장욱진 화백을 포함하여 김환기, 백영수, 유영국, 이중섭 화백들의 작품을 평가하고 감상할 때 작가와 작품, 그리고 시대적 맥락을 모두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미술사적 방법론으로 형식주의적 해석을 채택한 이유는, 절대적인 작품 자체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장욱진의 경우 그의 작품에는 일생을 통해 반복되는 라이트모티브가 있다. , 해와 달, 나무, 집과 사찰와 같은 자연 풍경 및 집, 까치나 닭, , 돼지, 강아지와 같은 동물들, 여인과 아이,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다. 서구적인 관점에서 화백의 그림을 평가한다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림 속 대상에 혼란스러워하거나 매너리즘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저자는 무엇보다도 화백의 그림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반복되는 대상과 조형 형식 이면의 독창성과 진정성을 읽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화백의 작품이 보여주는 진성성은 무엇보다 그의 삶과 작품이 일치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고, 그림 속의 대상들은 곧 작가의 분신이나 다름없다고 일러준다. 평생 화백이 그린 수많은 대상들은 곧 작가의 마음 속 풍경을 보여주는 구성물들이지, 단순한 장식물로서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 서구의 미술사적 관점에서 작품은 예술을 위한표현, 혹은 신앙이나 삶에 관한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화백의 작품은 보다 정신적인 면, 구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화백의 그림에 나오는 까치나 나무, 동물 등의 대상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은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이 아닐 것이다.


 

내가 저자의 설명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저자가 화백의 작품에 있어 불교와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아본다. 화백이 평생 작업한 작품 가운데 불교적인 소재 혹은 대상이 나오는 그림은 먹그림을 비롯하여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불교 집안에서 성장한데다, 고등학생 시절 6개월 간 절에 가서 정양하는 동안 성철스님을 지도한 적 있는 만공 선사 밑에서 몸과 마음을 회복했던 경험을 참고해보면, 그의 그림에 불교가 준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불교보다) 노장 사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 작품세계는 노장사상뿐만이 아니라 불교와 전통적인 무속과 민화, 설화 등의 요소가 자전성을 바탕으로 서로 종합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럼에도 나의 판단에는 장욱진이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이며, 그것은 작품 자체의 도상이나 주제보다는 작가적인 인식과 태도, 그리고 예술이라는 개념에 관한 부분에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205)


 

다시 말해 불교가 장욱진의 작품세계에 미친 영향은 소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예술관 혹은 작업 방식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특징 때문에 외국의 미술사학자들이 장욱진 화백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몰라 곤란해 했을 것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화백의 삶과 작품의 일치가 보여주는 진정성에 주목하고 이를 높이 평가한다.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나의 눈에는 그저 간단한 선을 사용한 아이 그림 같아 보인다. 하지만 화백은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언어를 어떻게 찾아냈을까 궁금하다. 어두컴컴한 새벽에 산책을 나갔다 돌아와 조그마한 화폭 앞에서, 어떤 생각을 채울까를 고심했을 화백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붓을 수없이 들었다 놓기도 했을 법한 그는 자신이 바로 그림이 되는 길을 찾아 또 다시 마음 속 풍경을 산책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스님에게는 불경을 외우고 참선하는 구도의 길이 있듯이, 화백에게는 작은 화폭을 채우는 구도 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때론 마음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붓을 내려놓으며,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225)라고 스스로를 달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감상하는데, 작가가 직접 쓴 산문과 더불어 그림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감상하는 데 중요한 주춧돌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책 속으로]




[1] "개별 작품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존재가치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질 소지가 충분히 있다. 또한 시각예술에 있어 이러한 상대성의 잣대는 형태의 외형적 결과를 신봉하는 피상성에 빠지기 쉽다."(45)
- 개별 작가의 독창성과 고유성을 평가할 때 상대적인 접근방식이 갖는 문제점 지적.

[2] "작품의 외형적 형식보다는 형식의 내재율에 흐르는 진정성, 즉 형식의 진정성을 찾는 것에 더욱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45)

[3] "장욱진은 그리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형식의 문제가 아닌, 자연과 삶 그리고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걸쳐 있는 일종의 ‘진실’을 추구하는 문제로 보았다. 또한 조형으로서의 ‘압축’과 변화하지 않는 ‘반복’의 조형은 자신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표상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같은 스타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이미 조형 이전의 문제인 것이다."(47)

[4] "여인 이미지에 대한 장욱진의 태도는 그의 어머니와 부인을 정점으로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한 인물만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딸들에 대한 심상이 복합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 화가의 여인상은 매우 자전적이며 심리적이다."(140)

[5] "이러한 나무는 노장사상과도 같이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 동양적 사유의 관념을 보여준다. (...) (나무는) 아이와 새를 품에 안고 키우는가 하면 인간에게 휴식을 주고, 아예 마을 전체를 위에 얹어놓고 보살피기도 한다."(156)

[6] "그러니까 항상 자기의 언어를 가지는 동시에 동시대인의 공동한 언어를 또한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164)
- 장욱진 화백의 말

[7] "참선의 수행처럼 몸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으로 자신의 몸을 다 소모한 장욱진은 구도자처럼 삶과 예술에 대한 불교적 실천을 보여주었다."(189)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190)
- 그림에 임하는 장욱진의 말

[8] "예술을 향한 작품들이 서구의 미술 개념이며 모더니즘이었던 반면, 장욱진은 예술을 뛰어넘어 도를 향했다. 이 점에서 장욱진은 불법(佛法)에 연결되어 있다."(207)

[9] "문화유산으로서의 전통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새로운 시대정신과 맞부딪쳐 박제화 될 위험성이 농후하다. 이것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항상 재해석되어 우리의 현재와 함께하는 생물처럼 살아 움직여야 한다."(220)

[10] "작가는 그 세계의 주변 사물들을 애정으로 보듬는다. 생명은 생명의 고귀함으로, 무생물에게도 애정을 담아 정성껏 의미를 부여한다."(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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