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 186(겨울)

촌평 미래는 오지 않는다》를 읽고

(전치형·홍성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9)


 

미래 예측이란 바로 우리의 현재를 보살피는 일이며

자체로 미래를 만드는 행위다


 

이번창작과비평 겨울호(186) 실린 촌평 모두 흥미롭게 보였는데, 중에서 개인적인 관심사에 따라 과학기술의 담론과 관련 있는 미래는 오지 않는다(전치형·홍성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9) 대한 서평을 먼저 읽게 되었다. 서평을 작성한 강연실 교수는 마치 상공에서 새의 눈으로 지상을 조망하듯, 책의 경계 넘나들며 책이 다루는 문제의식의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에게는 기술이 주도권을 사회에서 기술이 중심이 미래상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서평자 강연실 교수는 미래는 오지 않는다에서 저자들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 의식을 주의 깊게 포착하여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래 예측은 이론과학이나 실험과학이 다는 . 인간 사회는 자연에 적용하는 정확한 예측 메커니즘을 그대로 적용할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측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를 수행하는 사람의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기술 진보를 거론하며 진행하는 미래 예측은 전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담론이 되는 미래 예측에는 누가 미래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가 중요해진다. 소위 전문가 집단이 기술에 대한 기대를 만들어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미래 예측이란 자체로 미래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이해할 있지 않을까.


가지   주목한 부분은, 서평자가 책을 소개하는 몇몇 일간지의 소개글을 비판하는 대목이었다. 물론 서평자는 독자가 책의 핵심 논제를 오독할 가능성을 지적하는 대신, 책을 소개하는 주력 일간지들이 책의 핵심주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독자들이 흔히 지나칠 있는 오독의 전형을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책을 소개했던 일간지 담당자는 책을 읽지 않았을 같다. 서평가의 표현대로 주요 일간지의 책소개 글은 책이 비판하는 기술결정주의적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사례를 통해 언론이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책의 논지를 간과했든, 의도적으로 회피했든), 우리가 어떤 가치를 향해 나아가려면, 우리의 현재 어떻게 바꾸고 변화해야 하는지를 되묻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 아마도 기술산업사회의 가장 위대한발명품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미래라고 하는 거대한 허구속에 우리가 노오력 해야하는 이유, 우리가 월급으로 평생 마련하지도 못할 아파트를 꿈꾸며 달려가야 이유, ‘인공지능 유토피아 꿈꾸며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는 이유가 녹아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미래는 오지 않는다에 대한 서평은 미래 예측이 미래의 기술을 예견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임을 환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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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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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를 읽고



'식민주의라는 오랜 바이러스'의 존재

 


이번창작과비평 겨울호(186) 통해 문학계간지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동시대 작가들의 시와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글과 인터뷰 등을 통해 우리 삶과 닿아 있는 현상들에 대해 예민한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문인들의  존재를 느낄 있었다.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를 위협중이다. 하지만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일본과 관련한 편의 글에 드러난 현상이었다. 바로 일본의 패전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과 관련하여 벌어진 ‘4.24 교육투쟁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였다. 편의 글을 읽고, 뇌리에 남은 단어는 식민주의라는 글자다. 4.24 교육투쟁(1948) 패전 일본 사회에 남아 있던 식민주의에 미군의 반공프레임이 개입되어 진행되었던 불행한 사건이었다. 한편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는 식민주의의 관성이 키워낸 거대한 인재였다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가 전무하고, 심지어 가해자로서의 인식마저 결핍된, 일본 식민주의의 현재성을 확인할 있었다. 사건 모두 식민주의 관점에서 드러난 국가 폭력 사례들인 셈이다.


특히 4.24교육투쟁은 이번 겨울호를 통해 처음 알게 역사였다. 저자 정영환은 2010 2 24일자 <아사히 신문> 사설에 언급된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고교무상화제도 배제 움직임을 언급하며 글을 시작한다. 고교무상화법은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고유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본래 취지다. 그런데 일본 사회에서는 유독 조선학교 교육문제에 북한에 이익을 준다 정치적 이유를 들어 교육의 형평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위배하고,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다. 저자는 현상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며, 야당 보수층과 여당 모두 논리에 동조하게 현상의 근원을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배제 정책이라는 역사적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엉뚱한 논리를 들이대며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거나 논점을 흐리고 물타기를 하는 양상, 그리고 공산주의자의 선동이라는 색칠하기 수법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비단 뿐일까. 2020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감지할 있는 부분이다. 작년에 일본의 어느 미술관에서 소녀상 전시가 중단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전시 중단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표현의 자유를 훼손했다 점이었다. 마치 이번호에 실린 고교무상화제도에서 조선학교를  배제하려는 일본정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아사히신문> 논지를 보는 같았다. 내가 보기엔 이들 일본의 언론 역시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영역에서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천황제에 기반한 일본의 식민주의라는 막강한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이것이 코로나바이러스보다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식민주의 바이러스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터져 나온 곳이 후쿠시마가 아닐까. 문제를 일본 내에서 꾸준히 언급해왔던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표현을 일부 빌려 얘기해보면, 식민주의라는 바이러스는 타자의 고통에 둔감하고, 이들의 희생을 요구하며, 이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바이러스는 오키나와에도 오래 머물고 있지만, 아직도 세가 약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들어와 단지 잠복하고 있는 것만 같다. 사회의 자정능력, 면역기능이 떨어지는 순간 바이러스는 언제든 다시 숙주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본지에 소개된 조선학교의 교고무상화제도 배제 ‘4.24교육투쟁’, 그리고 후꾸시마 오염수문제는 식민주의라는 바이러스가 다르게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처음 만난 창작과비평 겨울호(186)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건재를 과시하는 식민주의 바이러스의 존재를 강하게 느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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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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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

현장


 '함께 풀어야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를 읽고

 


이번창작과비평 겨울호(186)에는 2011 3 지진으로 이어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최근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발생되고 있는 오염수 처리 문제에 대해 언론에서 자주 접하고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사로만 접하고 있어 관련 문제 전반에 대해 사실 알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다. 벌써 핵발전소 사고가 난지 9 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특히 작년 여름 일본에 수차례 태풍을 맞아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거나 처리된 제염토 자루가 유실되었다는 기사를 기억한다. 일본 본토의 오염 상황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심각할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나라다. 이번 글을 작성한 정의당 생태에너지본부장 이헌석의 우려대로 후쿠시마 사고의 가장 피해를 주는 이웃국가는 우리가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후쿠시마 사고는 우리에게도 절실한 문제인 셈이다.


그동안 단편적인 기사로만 후쿠시마 사고 관련 상황이나 문제점들을 접해왔다. 이번 호에 실린 글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후쿠시마 문제가 더욱 심각하고 장기적으로 대처해야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분명한 것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사고 수습(제염과 복구) 대한 전적인 책임은 도쿄전력과 일본정부에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기억해야할 점은 도쿄전력과 일본정부가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세계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가해자로서의 책임의식을 갖는 일일 것이다. 어느 과학자가 언급한 사고 실험이 생각난다. 오염된 컵을 바다에 버린 다음, 지구의 바닷물에 고르게 희석시켰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지구 어디에서나 바닷물을 떴을 , 물컵에는 최소한 오염된 컵에서 나온 분자 100 이상은 담겨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60-7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사용이 중지된 살충제 DDT 여전히 전세계의 수산물에서 미량이나마 계속 검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2019 9 기준으로 누적 오염수의 (원자로 냉각을 위해 쏟아 부은 물과 지하수 유입으로 오염된 ) 116 톤에 이르고 있다는 , 그리고 현재도 매일 110 정도의 오염수가 계속발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암울한 소식 가지는 방사성물질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점과 부실하고 신뢰성 떨어지는 관리 문제다. 2013년부터 도쿄전력은 플루토늄과 텔루륨 62 핵종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방사성물질의 일종인 삼중수소의 경우, 이를 제거하는 설비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도쿄 전력은 현재 삼중수소 제거에 손을 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오염수에 포함된 삼중수소의 농도는 리터당 120Bq(베크렐) 수준인데, 세계보건기구(WHO) 음용수 기준으로 제시하는 삼중수소 농도의 상한치는 1Bq라고 한다. 그러니까 삼중수소 농도만 해도 세계 기준의 120 수준에 달하고 있다는 의미다. 발생되는 오염수의 막대한 양과 비용 때문에 방치된 오염수 문제는 현재 장기간 지구 환경에 영향을 주게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오염수 방류 문제는 결국 고농도의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 희석시키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염수의 방대한 양과 현재도 계속해서 발생하는 오염수와 지하수 오염을 통한 바다 유입의 문제는 분명히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는 끊임없이 피폭 노동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이루어지는 원격작업만 해도, 여기에 참여하는 작업자가 한번의 작업으로 반년치 이상의 피폭을 입고 있다고 한다. 글에 따르면, 방사선량 6Sv(시버트) 피폭되면 사람이 즉사하는 수준인데, 후쿠시마 발전소 원자로 내부에는 시간당 최대 530Sv 방사선이 측정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사실 아직도 작업자들이 원자로 내부에 직접 들어가서 작업할 수는 없는 상황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작업을 해야 하겠지만, 작업 노동자들에 대한 피폭문제는 무엇보다 일본정부가 우선시해야 사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재 도쿄전력과 일본정부의 부실하고 신뢰가 가지않는 수습과정을 보면서 희생의 시스템이란 관점에서 일본사회의 문제들을 검토했던 동경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를 떠올렸다.  데쓰야 교수와 재일한국인 서경식 교수는 후쿠시마 사고와 오키나와 문제 모두 배경에는 일본의 식민주의 공고히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희생되는 존재가 필요하고, 결과 (희생되는 대상) (희생을 요구하는 ) 구별되는 차별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이 사실 후쿠시마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대도시인 도쿄에 전력을 공급하도록 마련된 시설이다. 그러니까 도쿄 외곽에, 후쿠시마 지역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설립된 시설인 것이다. 도쿄라는 나라의 수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차별적인 대상(후쿠시마 지역과 지역민들) 있고, 중앙정부는 이를 당연시하게 되는 구조이다. 결과적으로 희생의 시스템은 민주주의적인 의견이 수렴되는 절차가 제대로 지켜질 없는 구조다


서경식 교수는 일본정부의 후쿠시마 사고 대응방식에는 2020 도쿄 올림픽이라는 추가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살펴보고 있기도 하다. 이번 글의 저자 역시 간단히 이를 간단히 언급했지만, 후쿠시마 사고 대응에 대한 일본정부는 움직임에는 도쿄올림픽이라는 국가 행사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정부는 올림픽이 예정된 여름까지 국내외 여론을 살피며 자신들의 부실한 대응과 오염수 문제를 언론에서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 올림픽이라는 국가의 사업, 행사를 명분으로 언론이 통제되고, 세세한 정보가 은폐되고 있으며, 부실한 관리 실태가 국내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결국 도쿄 올림픽을 위해 일본의 거주자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안전을 담보로 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 일본정부는 아직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점을 염두에 둔다면, 2020 도쿄올림픽 개최 이전에는 일본정부가 오염수 배출 문제를 언론의 관심을 가능한한 받지 않도록 것이라는 점을 눈여겨 봐야 것이다. 희생의 이벤트 끝나면 일본정부는 전격적으로 오염수 방류를 발표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나아가 이번 여름 일본에 태풍이 경우, 사고지역에서 오염수나 제염토의 유실 또는 방류(?) 문제가 더욱 가속화되지 않을까 예견된다.


저자는 오염수와 제염폐기물이 동북아가 함께 풀어야할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제는 피해규모와 계속되는 오염수 발생을 , 동북아시아만의 문제로 제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국제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하여 떠오른 생각은 중국의 동해안에 건설중인 원자력 발전소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성이 있겠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여러 대의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체르노빌 사고나 후쿠시마 사고만 보아도,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문제는 국가만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중국의 동해안에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다가 사고가 생겨, 후쿠시마와 사고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 대한민국에 주는 영향은 후쿠시마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원자력의 이용에는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나아가 국제적 개입이 필요할 같다. 왜냐하면 원전 사고의 방사능 피해에는 국경이 없고, 피해규모는 인류 전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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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록웰 켄트 그림,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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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1850 12 16 오후 1 15 15.

31세의 청년 작가가 자신의 소설(초고의 절반을 넘어간 시점이다) 시각을 기록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게다가 그는 시각을 축복의 순간이라고 쓰며, 고래가 내뿜는 물줄기가 정말로 물인지 아니면 수증기인지 의문이라는, 엉뚱한 화제로 글을 시작했다.


엉뚱한 작가의 이름은 허먼 멜빌이다. 그의 대표작 모비딕 어느 () 시작하는 부분에서 가져왔다. 소설은 이슈미얼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선원으로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보고 들은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어린 시절 축약본으로 접해보았을 소설은 사실 방대한 서사를 다룬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완역본을 읽은 사람은 드물 같다. 소설을 읽어내는 일은 포경선을 타는 만큼이나 험난하게 느껴진다. 내가 읽은 판본은 유명한 일러스트 작가 록웰 켄트의 그림들이 곁들여진 일러스트판 모비딕이다.  일러스트판을 읽는 내내 멜빌이 던져놓은 텍스트의 그물을 건져올리며 강렬한 그림들을 함께 감상할 있었기에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낼 있었던 같다.



경계인으로서의 이슈미얼


소설은 유명한 문장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 시작한다. 장로교파의 청년으로 나오는 화자, 이슈미얼은 이미 상선에서 선원으로 바닷물을 맛본 인물이다. 작가 허먼 멜빌은 구약성경에서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이슈메일을 소설의 화자로 삼았다. 성경에서 이슈메일의 이미지는 추방자’, ‘사회에서 버려진 암시한다. 결국 소설의 화자인 이슈미얼은 이미지에 걸맞게 곳에 정착하는 붙박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떠돌이 나온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관습과 구속에서 보다 자유로운 자로 수도 있다. 구속에서 자유로운 자는 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로, 육지에서 바다로 향하기 마련이다. 이슈미얼이 바다로 나가게 되는 당위성을 화자의 작명에서부터 세심하게 찾아볼 있다.


이처럼 이슈미얼은 사회에서 소속이 명확하지 않은, 물과 같이 유동적인 존재다. 아울러 멜빌의 분신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슈미얼이 멜빌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표출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슈미얼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낯설게 보기’, ‘뒤집어 보기 아는 인물이었다.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와 침대에서 자게되는 에피소드를 통해 기독교 문명-백인의 시선을 대표하는 이슈미얼이 이교도-유색인을 대변하는 식인종 퀘퀘그를 인간이자 동료로 바라보게 되는 장면은 19세기 중반의 보편적인 인식을 고려할 놀라운 시선/고정관념 뒤집기 보여준다. 멜빌의 뒤집기는 여기서 나아가 성경의 가르침(이웃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내가 이웃에게 해줄 ) 그대로 따라 숭배의 의미 되묻고, 이교도 퀴퀘그가 자신의 신을 숭배하는 의식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이슈미얼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이교도의 신을 숭배하는데 참여하는 이율배반을 보여주었다


이슈미얼은 어느 하나의 대상 혹은 현상에 대해 표면적인 모습과 이면의 모습 모두를 대등하게 놓고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은 작가 자신이 현상의 측면 위에 발을 딛고 서서 양쪽을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경계인으로 부르겠는데, 역할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떠돌이 이슈미얼에게 제격으로 보인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경계인이슈미얼은 기독교도이면서도 신성한 성경구절을 패러디하여 풍자하거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주목하기도 한다.  


토요일 밤에 정육 시장에 가서 살아 있는 두발짐승 무리들이 죽은 네발짐승들이 길게 내걸린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보라. 식인종도 입을 벌리게 만들 광경이 아닌가? 식인종? 식인종이 아닌자, 누구란 말인가? 다가올 기근에 대비해 야윈 선교사를 소금에 절여 지하실에 저장해둔 피지 사람들이 참아줄 만하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일이 닥쳐오면, 거위를 땅에 못으로 박아놓고 간이 터질 정도로 배불리 먹여 만든 파테드푸아그라를 포식하는 문명화되고 개화된 그대 대식가들보다 검약한 피지 사람들이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472)


이처럼 허먼 멜빌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서양인들과 이들 문명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대목들은 소설의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멜빌이 이런 시각을 가질 있었던 배경에는 멜빌의 가정환경도 무시할 없을 같다. 스코틀랜드계 집안(아마도 카톨릭 집안) 출신의 아버지와 네덜란드 칼뱅파 집안의 후손이었던 어머니가 일군 가정이라면 충분히 그럴 있을 듯하다. 멜빌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멜빌은 은행원, 학교 교사 뿐만 아니라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상선의 선원, 포경선 선원, 해군으로 입대하여 배를 타게 되었던 . 소설의 피쿼드호에는 흑인, 북미 원주민(인디언), 마닐라 배화교도를 포함하여,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몰타, 시칠리아, 아조레스, 중국, 동인도, 타이티, 포르투갈, 덴마크, 영국, 스페인, 산티아고, 벨파스트 등에서 다양한 선원들이 승선하고 있다. 멜빌이 실제로 상선과 포경선을 경험은 당시 19세기 중반의 평균적인 미국인들과 비교하면 지극히 이례적인 것이라고 있다. 멜빌의 독특한 시각은 아마도 이런 폭넓고도 예외적인 경험을 통해 자라나지 않았을까.  아래 문장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멜빌의 관점이 드러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물과 현상을 공정하게 바라보려는 경계인의 시선에서 말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천상의 어떤 것에 대한 직관, 둘을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게 되며, 그러한 사람은 양쪽 모두를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579)


공정한 시선을 바라보려는 멜빌의 의지는 소설 전반을 통해( 군데를 제외하고) 발견할 있었다.



에이해브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


이슈미얼이 타게된 포경선 피쿼드호 선장은 에이해브다. 화자 이슈미얼이 지난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것과 다르게, 에이해브는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방향을 결정하고, 사건의 진행을 추동하는 중심인물이다. 작가는 선장의 이름(에이해브) 역시 구약성경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폭정을 일삼았던 아합에서 가져왔다. 이슈미얼이 피쿼드호에 오르기 전에 피쿼드호의 선주 펠레그 선장과 나눈 대화를 살펴보자



(펠레그 선장) 그는 에이해브란 말이지. 그리고 그대도 알다시피 옛날에 에이해브는 왕관을 왕이 아니었겠나!

(이슈미얼) 게다가 몹시 나쁜 왕이었죠. 사악한 왕이 살해됐을 개들이 그의 피를 핥지 않았던가요?

(149)


소설에서 이슈미얼이 퀴퀘그와 마치 부부처럼 운명의 밧줄로 연결되어 있다면, 에이해브와 같은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물은 마닐라의 이교도 페달라이다. 베일에 가려져 있고, 말이 없는 페달라는 존재감이 미미해 보이지만  페달라는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본다. 은폐된 페달라의 존재는 피쿼드호의 선장을 맡은 에이해브 자신의 내밀한 목적을 대변한다. 페달라는 바로 에이해브의 다리를 앗아가고 자신의 존재를 밟아버린 모비딕 쫓기 위해 고용된 용병인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에이해브는 모비딕 추격하는 일에 잠시 고뇌하고 머뭇거리지만, 페달라는 선장을 파멸의 길로 흔들림없이 안내하는 죽음의 안내인이자 선장의 운명을 예언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페달라는 1인칭 화자로 서술되는 소설의 한계를 어느 정도 보완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한편 에이해브 선장은 피쿼드호의 폐쇄된 공간 내에서 왕과 같이 군림하려 든다.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선장이 모든 선원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선동을 시작하자, 일등항해사 스타벅만은 모비딕에 복수하려는 선장의 계획에 의문을 제기한다. 스타벅은 모비딕에서 집단의 양심을 대변하며 에이해브 선장과 온건하게나마 대립한다. 스타벅은 잠든 선장 앞에서 머스킷 총을 들고 에이해브 선장의 지휘권을 무력화한 다음, 모비딕을 추적하는 일을 중단할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벅은 조심스럽고 양심적이지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런 인물형은 아닌 같다. 스타벅은 집단 속에서 고뇌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우유부단한 인물로도 보인다. 에이해브가 자신의 복수에 눈이 멀어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것처럼, 스타벅도 피할 없이 선장과 배를 타며 피쿼드호의 운명에 동참하게 된다. 이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에이해브 선장을 중심으로 대립 혹은 보강하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비극을 암시하는 상징들


영미 문학의 대표적인 비극으로서 모비딕 곳곳에서는 피쿼드호의 파멸과 죽음의 상징을 찾아볼 있다. 우선 피쿼드호의 피쿼드 절멸한 매사추세츠의 인디언 부족 이름이다. 소설에는 물론 백인들에 의해피쿼드족이 절멸했다는 언급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에이해브의 이름을 따온 성경의 아합왕은 폭정으로 살해되는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다. 피쿼드호의 출항 직전 이슈미얼 일행은 불길한 느낌을 주는 낯선 사내의 예언과도 같은 횡설수설을 듣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낯선 남자의 이름이 일라이자였다. 이름은 성경에서 아합왕의 파멸을 예언한 엘리야를 말하는데, 것은 에이해브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에서 죽음과 관계 있는 상징으로서 이미지가 여러 등장한다. 번째 장에서부터 관이라는 단어가 보이는가 하면, 뉴베드퍼드항의 여인숙 주인의 이름은 연상하게 하는 피터 코핀이기도 하다. 페달라의 예언에 의하면 가지 관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는 모비딕, 다른 하나는 피쿼드호가 되었다. 여기에 가지 떠올려보면 퀴퀘그가 갑자기 열병에 걸려 죽어갈 목수가 만들어 주었던 관이 있다. 그런데 퀴퀘그의 관은 죽음 파멸을 암시하는 관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 관이었다. 목수가 관을 밀봉하여 구명부표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피쿼드호가 침몰했을 , 유일하게 떠올라 이슈미얼을 구해주었던 것이 바로 퀴퀘그의 관이었다. 퀴퀘그의 관은 예외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관이다.


멜빌은 소설에서 색채를 활용하여 죽음 이미지와도 연결시킨다. 무엇보다 에이해브가 추격하려는 향유고래는 고래다. “무엇보다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던 것은 고래가 흰색이라는 점이었다”(311) 이슈미얼은 흰색이 지니는 고귀한 우월성과 기쁨 같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백색이 주는 공포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모든 감미롭고 명예롭고 숭고한 연상들에도 불구하고 색의 가장 내밀한 관념 속에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가 숨어 있어서 공포스러운 피의 붉은 색보다 영혼에게 더욱 극심한 공포를 안겨준다”(312)


여기에 더하여 이교도 페달라의 흰색 터번’, 그리고 앨버트로스의 흰색 등이 불길한 분위기를 더한다. 망망대해에서 피쿼드호가 목격한 거대 오징어 역시 크림색이었다. 이등항해사 스터브는 오징어를 보며 오징어를 이들이 살아서 항구로 돌아간 이가 거의 없다 불길한 믿음을 전한다.



에필로그


일러스트작가 록웰 켄트의 그림이 곁들여진 모비딕 읽는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독서 경험을 준다는 의미다. 소설에 등장하는 켄트의 그림은 그가 주로 작업하던 목판화가 아니라 붓과 펜으로 그려낸 결과물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켄트의 작업은 강렬한 흑백대비를 보여주는데, 이런 분위기는 빛과 그림자(어둠) 통해 모비딕에 대한 복수라는 맹목적인 광기와 우울감을 더해주는 듯하다. 실제로 이슈미얼은 빛과 어둠의 대조를 말하기도 하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에는 빛이 어울리지만, 실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바로 어둠이라는 듯이 말이다.”(111)


이렇듯 빛과 어둠이 어우러진 켄트의 그림은 수면 ’(인간의 세계/) 수면 아래’(고래의 세계/어둠) 대비, 기독교 문명과 이교도 문명의 대비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만의 상상인 것일까.


밖에 일러스트 모비딕에서 향유고래가 고래 추격용 보트를 공격하고 있는 장면(427) 사람들이 던진 작살을 그대로 몸에 꽂은 상태로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등장하는 장면(601) 압권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무엇보다 소설 인물들, 특히 에이해브를 그린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피쿼드호의 뒷갑판 위에서 성한 다리와 고래뼈로 깎아 만든(소설에서는 어디에도 왼쪽 다리라고 언급된 적은 없지만) 왼쪽 다리를 굳건히 내딛고 서있는 에이해브(264) 위풍당당한 모습과 손은 뱃전을 단단히 잡고, 다른 손은 일자코트에 찔러 넣은 모비딕에 복수를 다짐한 , 혹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는 바다를 응시하는 에이해브(345) 음울하고도 강렬한 눈빛을 담은 그림은 책을 덮어도 여전히 여운을 준다. 펜이 만들어 내는 날카로운 선과 붓이 완성하는 강렬한 흑백의 대비는 모비딕이라는 비극을 완성하는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이슈미얼이 침몰하는 피쿼드호에서 올라온 관을 구명부표 삼아 바다에서 수면 , 인간의 세계로 귀환하는 장면은 다시 소설의 처음을 환기시킨다. 소설의 문장에서부터 이슈미얼이 인간의 세계에서 배를 타고 물의 세계, 바다로 나가는 순환적인 구조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건 끊임없이 회귀하고 반복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점에서 모비딕 인간이 단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고래를 추격하는 비극적인 이야기, 그리고  방대한 고래학과 포경업에 대한 지식의 규모를 넘어서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한 멜빌의 통찰이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모비딕 덮고 다시 1850 12 16 1 15, 선장실 같은 자신의 서재에 앉아 글을 쓰다가 시계를 확인했을 법한 멜빌을 떠올려본다. 멜빌은 축복의 순간 웅장한 쓰고 싶은 열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았을까.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고래를 요약한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이다”(695)라고 말하고 있듯이, 멜빌은 고래 이야기와 정면대결하듯 글쓰기를 해나가며 고래가 내뿜는 물기둥을 상상했을 같다. 나는 소설을 읽다가 예상치 못하게 만난 지점을 좋아한다. 작가는 순간 소설 속에서 자신의 손을 내밀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고, 2020년의 어느 독자가 손을 맞잡게 되었다. 내가 직접 멜빌과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지점이다. 소설이 끝나며 바다에서 구출된 이슈미얼은 육지로 나갔다가 언젠가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을까. 이제 모비딕이란 심연을 빠져나온 나는 언젠가 다시 모비딕으로 돌아가게 같다.    






“오오, 인간이여! 고래를 찬양하고 고래를 본받을지어다! 그대로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이 세상에 살되 그 속에 속하진 마라. 적도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극지에서도 계속 피가 흐르게 하라. (…) 그 어떤 계절에도 그대만의 체온을 유지하라”

《모비딕》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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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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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

문학초점



문학계간지를 처음 읽어보고 있다. 지난 주는 문학초점이라고 하여 최근에 출간한 또는 소설에 대해 대담형식으로 소개하는 코너다. 이번 겨울호 문학초점에서는 시인 박연준, 문학평론가 김나영, 문학평론가 노태훈 세명이 소설 또는 소설집 종류와 시집 권에 대해 소감을 나누고 정리했다


     우선 명의 대담을 따라가면서 시나 소설에 대해 이렇게 다양하고 예민하게 읽어내고 자신의 언어로 정리할 있다는 사실이 내겐 충격이었다. 시를 읽지는 않았지만, 평론가나 시인이 인용하는 싯구를 따라가면서도 행간을 읽으며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점이 놀라웠던 것이다. 소설 또한 내가 소설을 읽을 하는 습관대로 소설 전체를 요약해야한다는 압박에서 사람은 자유로운 같다. 무엇보다 대담자들에게는 화제에 대해 동일한 출발선 상에서 이야기를 나눌 있는 공통의 기반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나도 소설이나 시를 읽지 않았기에 어려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 감안하고 대담자의 대화를 따라가 보았다.


     사실 가지 소설과 가지 모두 흥미로웠지만, 아직 소설과 시의 독법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로서 내게 무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장 먼저읽어보고 싶은 소설은 정소현 작가의 소설집 품위 있는 이었다.   이유는 박연준 시인이 편안하게 읽은소설이기도 하고, ‘좋은 문장들이기에 독자를 피로하게 하지 않는다 언급 때문이었다. 나머지 명의 소설집도 모두 흥미로웠지만, 내게는 소설을 소설읽기를 시작하기에 좋은 출발점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계간지 창작과비평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고, ‘문학초점 소개된 소설가와 시인들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문학잡지를 통해 나처럼 어떤 작가들을 처음 알게되면 여기에서 시작하여 관심있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면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침 박연준 시인도 소설가 정소현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기대이상으로 좋았기에 소설집도 찾아 읽어야겠다고 한다. 문학과 친근하지 않은 같은 독자들에겐 소설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짚어주는 사항 이외에 읽기 관한 방법을 간접적으로나마 배울 있는 기회였다.


     특히 품위 있는 대해 시인은 작가가 이야기에서 진실 드러내는 방법이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소설에서의 진실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점은 소설을 읽고 익숙해지면 생각해볼 있는 부분일 듯하다. 아울러 소설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이미 죽은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 비교해서 읽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파묵의 소설에서는 다양한 시점에서 화자가 주기적으로 바뀌며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취하는데, 정소현 작가의 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진다


     내게 시는 소설보다 읽기 어려운 상대이지만, 먼저 읽어보고 싶은 시집을 선택하라면 성동혁 시인의 아네모네 선택해보겠다. 이유로는 노태훈 평론가가 시집에 대해 만약 한편만 읽는다면 감동이나 감각의 폭이 제한될 같다는 생각이 정도로 한권으로서의 의미가 시집입니다라고 대목 때문이었다. , 편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를 통해 시인에 대해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평론가와 시인의 명료한 언어와 사고로 이해하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시집 전체를 통해 단어를 고르고 자신을 형상화해내는 시도가 내게는 시에 접근하는데 보다 정통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문학초점에서는 문학평론가와 시인이 소설의 어느 대목, 시의 어느 구절에 대해 상반된 감상을 내놓은 경우가 있었는데, 대담에서 이러한 부분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정답이 있는 읽기와 공부에 익숙해져있던 내게 열린 텍스트로서 문학이 사실은 아직도 낯설다. 하지만 시인과 평론가가 상반된 감상을 드러내면서도 상대방의 이해에 수긍하고 공감하기도 있는 점이 문학의 매력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숱한 문제들이 항상 결말이 명확하거나 행복한 결말, 혹은 슬픈 결말로만 일관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문학초점 통해 작가들은 편의 소설이나 시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리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런 질문들이 독자의 읽기행위를 통해 다른 질문으로 혹은 응답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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