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시간 - 13년의 별거를 졸업하고 은퇴한 아내의 집에서 다시 동거를 시작합니다
이안수 지음 / 남해의봄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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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시간

: 13년의 별거를 졸업하고 은퇴한 아내의 집에서 다시 동거를 시작합니다

이안수 글과 사진 | [남해의봄날] | (2021)

 



인생의 후반기, 치열하게 지금-여기의 삶을 구도하는 부부에게서 배우다

 


남편이 은퇴하고 하루종일 같이 있으려니 짜증이 난다는 어느 부인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남편에게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자신이 외출할 때, 함께 나서거나 차를 태워 주려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아마 이럴 때 우스개소리로 죽이고 싶은 남편이 되어버리는 것이 대한민국 가정의 현실이 아닐까 싶다. 병원에 들렀다가 모처럼 쇼핑도 하고 바람도 쐬고 들어오고 싶은데, 남편이 시시각각 자신의 행방을 궁금해 하고 동행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란 제도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논의는 제쳐두고, 현실적으로 가족의 중심인 부부 사이의 관계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결혼할 때 나 역시 막연하면서도 무척 궁금했더랬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방정식처럼 정해진 답은 없다는 것뿐.


 

여기, 오랫동안 글을 쓰고 사진작가로 지내온 남편과 평생 종합병원 신생아실에서 일하고 은퇴한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아내의 시간에 등장하는 이들은 40년간의 결혼생활 중에서 13년을 별거하고 다시 동거를 시작하게 된 별난부부다. 작가 남편이 지난날의 부부관계와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는 이 책은 무엇보다 아내의 후반기 삶을 응원하며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부부가 세 자녀를 오롯이 키워낸 후 어느 날, 작가의 아내는 별거를 선언했다. 이렇게 시작된 아내의 홀로 생활은 13년간 온전히 자신을 찾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그녀가 참여한 어느 모임에서 그녀는 퇴직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내 차례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 마지막 무대가 시작되었다고, 그래서 진짜 나로 살기 위해집을 나섰던 것이다. 한편 그녀의 가정이 범상치 않은 것은 이를 응원하는 남편과 자녀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부부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할지, 가족 모두가 서로에게 굴레가 되지 않으려면 어떠해야 할지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서울과 파주, 영국 등에 흩어져 있던 이들이 가족 대화방에서 각자 그 시간의 하늘 사진을 찍어 올리고 대화를 나누었던 부분이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잠시 위를 올려다보고 가족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들이 내게도 전해졌다. 이들은 서로의 의견과 지혜를 나누되 삶의 방식을 서로에게 강요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게 이 특이한가족의 소소한 행위는 가족이 함께 만들어가는 하나의 예술 프로젝트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독자에게 무엇이 올바른 가족, 혹은 부부의 모습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가족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글로써 나누고자 했을 뿐이었다. 작가는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삶의 경험을 통해 상대방을 가르치거나 강요하는 일이 서로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부부가 40년간 살아온 진솔한 모습과 지혜가 담겨 있었다. 이를 발견하는 것은 물론 독자의 몫일테다. 이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인생의 도반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언젠가 카페에서 여성들끼리 모여 남편을 험담하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이들의 남편 역시 아내를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반면 작가의 아내는 남편의 말을 경청하고 그를 스승이라 여겼다. 남편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아내의 생각을 경청했다여기에서 나를 비롯한 보다 젊은 세대가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바로 아내의 지혜로부터 말이다. 인생의 후반에 지혜로운 아내를 만나고 싶다면, 남편 역시 아내와 가족에게 좋은남편이자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좋음을 찾는 일은 물론 각자의 삶에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저자가 책의 앞부분에서 말하듯, 부부의 이상적인 모습이란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가 되어야 했다. 이 명제가 바로 작가가 제시하는 이 부부의 지향점을 잘 요약해주는 듯하다. 부부는 애초에 하나가 될 수 없는 개별적인 존재임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듯하다. 꽃봉오리부터 짙은 향기를 내뿜는 치자꽃처럼, 부부는 각자가 나름의 향기를 품고 꽃을 피워낼 수 있도록 함께 서로를 북돋아주는 관계가 되어야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따로 또 같이말이다.


 

부부, 그리고 가족이 각자 나름대로의 이유로 행복할 수 있는 관계는 단순히 집안일을 50:50으로 분담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듯하다. 단연코 부부관계는 나는 이만큼 집안일을 했는데, 너는 왜 이만큼도 안하냐?’는 태도처럼 왜곡되고 편협한 평등주의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만 원만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이 관계가 각자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닐까. 책을 읽는 동안 이 부부와 가족의 모습이 특별한 이유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현실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모습을 어떻게 구체화하고 실현하는지가 각자 삶의 탐구 주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인생의 후반기에 있는 이 부부가 치열하게, 그러나 또한 물이 흐르듯 지금-여기의 삶을 살아가는 여정을 따라, 나 역시 지금부터 그러한 삶을 준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신주의에 종속되어가는 우리의 삶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1] "우리가 동거에서 고수하는 두 가지는 ‘간섭하지 않는다‘와 ‘단순하게 산다‘입니다." (23)

[2] "모든 배움과 독서와 경험은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할 수 있습니다. (...) 글쓰기의 최종 목표는 내 삶이 좋은 삶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그곳에 닿기 위한 징검다리인 셈입니다." (160)
- 저자의 글쓰기 철학

[3] "남편은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 왔고, 나는 이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프레임 속에서 무엇을 뺄지 고민하고, 나는 텅 빈 도화지 속에 무엇을 담을지 고민한다. 뺄 것을 염두에 두니 더하지 않는 마음이 좀 쉬워졌다." (189)

[4] "아내의 소유에 대한 기준은 없음으로써 있음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야 할 때 버리고 갈 것조차 없음에 도달하길 원합니다." (194)

[5] "그림을 그리고 연극을 만드는 일은 자신을 타자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일이며 타인과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과 태도에 대한 공부란 점에서 아내는 똑같이 흥미를 보였습니다." (204)

[6] "두려움은 없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든 생각은 ‘이제 내 차례구나‘였다. 내 마지막 무대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이었다." (207)

[7] "이제 우리는 없는 것을 탓하기보다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할 나이에요." (212)

[8] "왜 두렵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두려움은 바라보고 있으면 커지고 직면하면 사라지지요." (250)

[9] "43년 전 애인이었던 아내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동전을 한 움큼 쥐고 벚나무 아래의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기가 그 동전을 모두 삼킬 때까지 통화했던 밤이 생각났습니다."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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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2-10 14: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아내, 마누라, 집사람, 안사람, 애들 엄마가 필요해지고,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독립만세, 를 외치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내가 애들 키우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이제 좀 친구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 하면
남편이 놀아 달라고 할지 몰라요. 그러니까 젊을 때 잘해 줘야 하는 거죠.
여자들이 흔히 하는 말, 늙어서 보자, 하잖아요. ^^

초란공 2021-12-10 19:31   좋아요 2 | URL
공감이 팍팍 됩니다~^^ 그래서 좀 더 젊을 때부터 함께 잘 지내는 ‘연습‘도 필요할 것 같아요^^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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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Luis Sepulveda) 지음 |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4)

 



삶의 터전을 연애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사랑하라

 



사랑에 관한 책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나중에는 그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숱한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는 이야기였네.

 


백인들의 문명이 세계의 자원과 금을 탐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아마존의 운명은 결정되었던 것인지 모른다. 문명은 아마존의 깊은 밀림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혜롭게 살아가는 수아르 족과 같은 원주민을 미개인으로 규정하고, 숲을 밀어버렸으며, 동물과 사람들에게 총질을 해대며 재앙을 몰고 왔다.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의 뒷담화와 무례한 오지랖으로 상처를 받았던 노인은 아내와 함께 문명이 개발하기 시작한 작은 마을 엘 오딜리오로 나와 정착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문명과 함께 혹은 그 이전에 오지에서 문명이 들어오도록 길을 만들곤 했던 선교사들이 아마존의 오지 마을 엘 이딜리오에도 도착한다. 마을을 떠나는 선교사 신부가 배를 기다리며 졸다가 떨어뜨린 책을 주워든 노인. 그는 더듬더듬 책을 읽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문자 없이, 때로는 글을 필요로 하지 않은 수아르 족과 밀림 속에서 살았던 노인은 글자를 읽으며 자신이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앞에서 인용한 대목은 아직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지 못한 노인이 선교사 신부에게 어떤 종류의 책이 있는지 묻고 나서 연애 소설에 대해 신부가 해준 답변이었다. 신부는 자신도 지금껏 연애소설은 두 권밖에 읽지 않았다면서. 신부의 대답은 신의 사랑을 제외하고 인간들의 사랑, 연애의 감정이 무엇인지 피상적으로만 이해했을법한 답변이었다.


 

연애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신부가 내린 정의를 읽다보니 학창 시절 거의 유일하게읽어보았던 책들인 무협소설이 떠올랐다. 무협소설에는 다양한 캐릭터를 지닌 영웅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나는 남녀 주인공들이 함께 고난을 극복하고 사랑을 키워가던 그런 소설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칠레 작가 세풀베다의 대표작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이렇게 아마존 지역의 어느 오지 마을에 사는 노인을 서서히 장면 속에 등장시킨다. 작가는 아마존과 그 곳에 거주하는 원주민, 동식물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백인 문명과 책읽기를 이 소설에서 대비시킨다. 노인은 선교사의 책 소개를 듣고 어느 때보다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을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노인의 책읽기는 우리가 어릴 때 책을 처음 접하고 글자를 읽어나가기 시작하며 느꼈던 기쁨, 몰입의 행복감을 환기시켜준다. 음식을 음미하듯 한 음절 한 음절 따라 읽고, 낭독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또 반복해서 읽었다. 그런 식으로 단어가 문장이 되자 노인은 이를 반복해서 읽었던 것이다. 독서와 관련한 인간의 인지기능을 연구하는 어느 연구자[1)]는 책 읽기가 인류에게 익숙하지 않은, 애초에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던가. 문자를 발명하고도 한 참 후에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접근이 가능했던 책은 인간에게 문자를 읽고 이야기를 음미하는 순수한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어쩌면 불길한 예언과 함께 말이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라는 긴 이름의 이 노인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굶어죽을 정도로 힘들게 살다가 수아르 족으로부터 돌봄과 가르침을 얻는다. 밀림에서 자연과 더불어살아가는 법을 배웠던 것. 이즈음 아마존을 개발하려는 문명에서 온 이들, 금을 캐어 일확천금을 노린 노다지꾼들이 밀림에 출몰하면서 서서히 비극은 시작한다. 노인은 원주민 친구를 죽인 백인에 대한 복수를 총으로대신했다. 하지만 수아르 족에게는 이들만의 계율이 있었으니, 복수를 하더라도 이들의 방식을 따라야 했다. 노인은 백인의 총으로 복수를 했기에, 부족의 계율을 어긴 셈이 되었고, 부족을 떠나야 했다. 다시 엘 이딜리오라는 작은 마을로 돌아오게 된 노인은 이 곳에서 책을 알게 되고, 글을 읽는 기쁨을, 책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발견한다. 다만 이렇게 순수한 기쁨도 어느 날 떠내려온 금발의 백인 시체로 오래가지 않았다.


 

사망한 백인은 밀림 속에서 살쾡이 새끼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 먹이를 구하러 집을 비웠을 암살쾡이는 이제 인간을 상대로 복수에 나섰던 것이다. 이 금발의 양키는 밀림의 첫 번째 복수였던 셈이다. 노인의 말대로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이었다.”(153) 숱한 역사에서 끊임없이 확인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마을의 읍장은 사람을 공격하는짐승을 제거하기 위해 수색대를 꾸린다. 읍장은 밀림에 경험이 많은 노인에게 강요하듯 수색대에 포함시켜 밀림 속으로 길을 떠난다. 밀림 속에서 읍장이 보여주는 행동은 자연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맨발로 가라는 제안을 거부하고 장화를 신고 가다가 전갈이 바글바글한 진흙탕에 빠져 결국 장화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한 밤중에 전등을 키고 밀림을 깨워 일행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밀림의 법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자연의 이미지와는 매우 다르다. 밀림은 동물이 배설물을 배출하면 곧이어 밀림의 개미를 비롯한 동물들이 달려드는 곳이다. 사람이든 다른 동물이든 밀림 속에서 생명을 잃으면, 개미들과 새들을 비롯한 숲 속의 동물들은 반나절도 안 되어 사체의 백골만을 남겨놓는다. 노인이 죽음에 대해 갖게 된 시각 역시 깊은 밀림 속에 살며 밀림의 규칙을 익힌 수아르 족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죽음을 죽음 자체의 행위라고 믿었다. 죽음은 참혹한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153)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밀림에 사는 유일한 조건이라면 밀림 세계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이렇게 바라보게 된 노인은 지나치게 대담한 행동을 하던 암살쾡이가 속임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새끼들이 사람의 손에 죽었고, 상처를 입고 비쩍 말라버린 수컷 살쾡이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상황을 떠올려본다. 아마도 암컷 살쾡이는 수컷의 고통이 긑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마지막 선택, 죽음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난 후 노인은 암살쾡이의 입장에서 이 짐승이 원하던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노인이 보기에 살쾡이는 속임수를 쓰며 조심스럽게 행동하기 보다는 대담한 맞대결의 기회를 노렸기 때문이다. 노인은 이 대결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소설은 이제 인간과 동물, 문명과 밀림 간에 벌어지는 최후의 대결로 이어진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유랑을 하게 된 작가였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신자유주의 정책과 권위주의적 강압 정책을 내세운 피노체트 정권의 위협으로부터 오로지 살기 위해모국을 떠나야 했던 인물이었다. 소설 속 노인 역시 자신이 살던 곳에서 자신을 압박하며 숨 막히게 만드는 삶을 피해 고향을 등진 사람이었다. 세풀베다도 유랑하는 여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작가의 눈길은 전 세계를 집어삼키는 백인 문명의 위력과 폐해, 그리고 희생자들에게도 머물렀다. 한 때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그가 환경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인간이 자연과 맺는 파괴적인 관계를 비판하고 회복을 촉구하는 소설을 쓰게 된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개발 문명 세력의 사주로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소설은 이렇게 탄생했다.


 

소설 속에서 노인은 사람을 공격하는 밀림의 짐승을 죽이려는 수색대에 마지못해 합류하게 되지만, 살쾡이와 벌인 최후의 대결 후 그는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린다. 자연 속에서 공존의 지혜를 잃어버린 인간은 자연의 복수에 또 다시 자연을 파괴하는 악의 순환 고리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이러한 대결은 노인에게 결코 명예롭지 못한 싸움이었다. 인간이 자연과 벌이는 이런 무모한 대결과 갈등은 노인이 좋아하는 연애 소설 속의 사랑에 빠진인물 사이의 관계와 대비된다. 연인 사이의 행복을 가로막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연인들은 서로를 보살피며 결국에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노인은 부끄러움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강물에 엽총을 던져 버리고, 다시 연애 소설이 있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자연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자신만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일상으로 가는 길일 테다. 어쩌면 연애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통속적 구도와 교훈이야말로 자연을 파괴하며 자멸할 위기 앞에 놓인 인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은 아닐까



[참고] 1) 매리언 울프, 책 읽는 뇌, 다시, 책으로의 저자.


[1]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45)

[2] "낮에는 인간과 밀림이 별개로 존재하지만, 밤에는 인간이 곧 밀림이다." (130)
- 수아르 족 인디오의 말

[3] "처음에 길을 잘못 들어서면 끝까지 헤매는 곳이 밀림이라고요." (138)

[4] "그들(수아르 족)은 죽음을 죽음 자체의 행위라고 믿었다. 죽음은 참혹한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말하는 죽음은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밀림 세계의 냉혹한 원칙에서 나온 죽음이었다." (153)
- 노인의 ‘죽음’에 대한 시각

[5]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이었다. 금발의 양키는 짐승의 어린 새끼들을 쏴 죽였고, 어쩌면 수놈까지 쏴 죽였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짐승은 복수에 나섰다. 하지만 암살쾡이의 복수는 본능이라고 보기에 지나치리만치 대담했다. (...)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153)

[6] "친구, 미안하군. 그 빌어먹을 양키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 놓고 만 거야." (171)
- 죽어가는 수컷 살쾡이를 총으로 죽여 고통을 끝내준 노인의 독백

[7]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179)

[8] "그는 그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이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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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1-25 15: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톤 체홉의 사랑에 관하여, 라는 단편 소설집을 보면 표제작은 불륜 관계의 사랑을 포기하고
아프게 결별하고,
그 안에 있는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연인-은 둘이 함께 하길 다짐하죠. 그들 앞엔 숱한 어려움이
있겠죠. ^^

초란공 2021-11-25 16:16   좋아요 1 | URL
소설가는 다종다양한 고난을 겪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저는 감사하게도 얌전히(?) 읽기를 바랍니다^^ 소설을 읽으면 혹시라도 있을 고난을 견딜 힘이라도 생길지도 모르겠구요^^;;
 

세상의 조화로운 질서에 관해 연구하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치열하게, 내면을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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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1-25 1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장 쉬운 게 남에게 충고하는 것,
가장 어려운 게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이라고 하네요.

초란공 2021-11-25 16:10   좋아요 1 | URL
나이가 들면서 더 고민하게되는 문제들이네요^^ 사람들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길 바랄뿐입니다^^
 
케이크와 맥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4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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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와 맥주

: Cakes and Ale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지음 | 황소연 옮김 | [민음사]

 




인생의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가 말하는 위선과 진실한 삶

 



케이크와 맥주는 서머싯 몸의 대표작 인간의 굴레와 짝을 이루는 인간 탐구시리즈로 보면 되겠다. 물론 모든 소설은 작가가 탐구한 인간의 삶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각자가 다른 색으로 보여줄 뿐이다. 결국 모든 작가의 작업은 인간이라는 주제로 수렴한다. 서머싯 몸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진실과 부조리함, 자유와 예속의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토대를 이루는 기본 전제는 사랑과 죽음이다. 이렇게 시작하고 보니 다소 맥 빠지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이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는 내가 서머싯 몸의 글을 학창시절에 읽었다면 당시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케이크와 맥주를 읽다보면, 작가의 생각이 슬며시 드러나는 부분마다 꽤나 공감을 하게 되었다. 삶에 대한 이런 통찰을 얻으려면 적어도 작가가 40-50대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작가 연보를 살펴보았다. 1874년에 출생한 서머싯 몸은 외교관 역할을 겸하며 첩보활동을 하던 시기인 1915(41)인간의 굴레를 출판했다. 첩보 활동으로 건강을 해치고 활동을 접은 직후인 1919(45)에 화가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삼은 달과 6펜스를 펴냈다. 오늘 다루게 될 케이크와 맥주는 보다 원숙기에 접어든 1930(56)에 출판했다. 아마도 40-50대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삶의 고민들이 작가가 소설에서 그려내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달과 6펜스에서는 고갱이라는 화가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고, 작품 전반에서 진지함으로 일관하는 듯했다. 반면 케이크와 맥주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날카롭고 풍자적인 시선과 위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기적으로도 작가가 긴장 속에서 치열하게 인간을 탐구하던 40(그리고 첩보활동을 병행하던 시기)보다는 여유로움을 찾은 50대의 모습이 소설에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학창 시절에 읽은 인간의 굴레는 사실상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그저 유명하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서머싯 몸의 소설에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했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는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작품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하나는 작가 혹은 예술가의 성공과 위선, 자유 및 예속과 관련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진실에 관한 부분이다. 우선 전자에 대해 언급해본다. 작가가 태어난 영국은 오랜 세월동안 귀족이 세상을 지배했고,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진 세계였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노동자 출신의 자녀들은 세상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장애가 많았다. 세상은 이미 기득권인 귀족 중심으로 규칙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출신의 작가가 더 올라가도록 도와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는 이들이 감히세상의 중심에서 활약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의 화자 어셴든은 성직자 가문의 도련님이다. 부모가 전하는 교양과 관점에 영향을 받은 어린 화자는 노동자 출신 가정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한다. 하지만 남들이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싫어하고, 우연한 기회에 노동자 출신의 작가(에드워드 드리필드)와 부인(로지)을 만나 격의 없는 교제를 하게 되면서 또 다른, 말하자면 관습에서 보다 자유로운 세계를 알게 된다. 소설은 오랫동안 계급의식이 지배하던 영국에서 지식인으로 성공과 출세를 거머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세히 보여준다. 문단 내에서 작가와 비평가와의 유착 관계, 기득권 계층 내의 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지는 스타 작가의 허상을 드러낸다. 서민 출신의 작가 드리필드는 사회의 도덕을 조롱하듯 규범을 벗어난 일탈행동을 보인다. 아울러 노년에 그의 성공과정을 통해 계급사회의 두터운 규범과 체면으로 위선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군상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풍자 정신과 위트가 드러나는 순간은 이렇다.


 

예로부터 노인들은 그들의 젊은이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세뇌했고, 젊은이들은 그것이 허튼소리임을 깨달을 즈음엔 이미 늙은이가 되어 그 기만적 행태에 편승해 이익을 봐 왔다. 또한 정치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치고 국가를 다스리는 데 별다른 지능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결과만 봐도 파단이 가능하다.)” (143)


 

책을 다 읽고 남는 인상은 다소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이랄까. 특히 작가가 표현하는 사랑관에 주목하게 된다. 누구나 살면서 현재 사랑하는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계급이 인간 공동체에 등장하면서부터 따라온 체면과 위선이 강요하는 일종의 불문율일 테다. 작가 드리필드와 결혼한 로지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선택하는 모든 행동은 체면치레에 급급한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부도덕한 여성이었다. 사회가 강요하는 위선적인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고민하지 않고 현재의 감정에만 진실하고자 했다. 결국 로지는 자신의 삶에 진지했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은 여성이었다. 물론 그녀는 개의치 않았지만 도덕적인 이유로 그녀를 비난한 모든 이들은 결국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훗날 사람들이 세상의 규범을 벗어난 로지를 비난할 때, 로지와 좋은 추억을 간직했던 어센든은 그녀를 옹호하며,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그녀는 아주 단순한 여자였어요. 건강하고 천진한 본능을 가진 여자 말입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걸 좋아했죠. 사랑을 사랑했어요. (...) 그럼 그냥 사랑의 행위라고 해 두죠. 천성이 정이 많은 여자였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두 번 생각하는 법이 없었죠. 그건 악덕도 아니고 음탕한 것도 아닙니다. 천성일 뿐이죠. 태양이 햇빛을 발산하고 꽃들이 향기를 내뿜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어 준 거예요. 그녀 자신에게 기쁜 일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됨됨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녀는 늘 진실하고 예의바르고 순박한 여자였어요.” (274-275)


 

아마도 50대 후반에 이른 서머싯 몸이 생각하던 사랑의 원형을 어센든의 말 속에 이렇게 담아두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면에서 로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학창시절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주제다로지를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비난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 사랑의 모습을 조금은 다르게 고민해보게 된다. 인생에서 단 한 명의 파트너와만 사랑해야한다고 요구하는 자는 누구인가. 인류 역사에서 계급이란 것이 생겨나기 전 인류의 초기 공동체를 떠올려본다. 이런 집단에서 이루어졌던 사랑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상대에게 끌리는 감정이 들면 다가가 서로를 탐색하다가 자연스럽게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에게 덧씌운 문명의 관습과 규범을 벗어나 서로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고 자연스러운 사랑의 모습을 추구한 작가가 또 한 명의 영국 작가 D. L. 로렌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크와 맥주의 로지는 온전히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살아낸 유일한 자유인이었다.


 

로렌스를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할만한 대상은 영국 사회가 고질적으로 지녔던 계급성이다. 로렌스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집 귀향에 실린 글에서도 이 문제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의 글에는 작가로 상승하고 싶은 욕구가 넘쳐나면서도 동시에 광부의 아들, 곧 노동자 가정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두터운 장막과도 같은 계급 구조를 극복할 수 없었던 좌절감이 깊게 배어있다. 능력을 갖추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영국 사회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판에 참여하기에 적절하다고 인정한 이들만이 게임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사회였다. 그들은 언제나 이 게임이 공정하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작가 서머싯 몸은 이 지점에 주목하여 노동자 출신의 작가가 성공하는 이야기를 한 줄기로 끌고 가며 세상을 풍자했다. 내가 서머싯 몸에게 좋은 점수를 주는 부분이 있다면 이런 지점을 놓치지 않는 그의 작가 정신이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성공에는 어느 정도의 운과 그만한 대가(노력과 희생)가 으레 요구된다. 물론 성공의 정도와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수긍할 것이다. 소설 속의 노 작가 드리필드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그저 애쓰면서 남들보다 오래 살기만 하면 되는 거야”(147)라면서 겸손한 듯 다소 냉소적으로 표현하지만, 그 역시 귀족 계층 후원자의 집중적인 관리를 받아 비로소 문단 시스템에 안착했다. 문명을 갖춘 어느 인간 사회든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머싯 몸 역시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사람을 탐구하면서 이렇게 부조리한 세계의 이면을 이야기로 솜씨 좋게 드러냈다. 서머싯 몸은 드리필드의 평전을 쓰고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하는 로이 앨로이처럼 성공에 목마른 작가들이 빠지기 쉬운 위선적인 삶을 보여준 반면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가치 역시 인정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어셴든의 입을 통해 작가의 삶이란 가시밭길이다”(294)라고 언급하면서도 작가는 유일한 자유인이다”(295)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50대 후반에 이른 서머싯 몸이 작가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하나의 위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내게 묻는다. 당신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소설의 제목 중에서 케이크는 귀족 계급이 사교 모임에서 차를 곁들이며 먹는 음식 혹은 값비싼 향신료가 들어간 기름진 저녁 식사 후 먹는 후식으로 여겨진다. 귀족들의 삶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계급성을 대표하는 음식인 셈이다. 반면 맥주(원문에서는 에일 Ale)는 계급성을 벗은 음료로서, 서민들의 삶과 함께 했던 음료였다. 노년의 드리필드가 술집에 들러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며 한 잔씩 마셨던 음료였으니까. 몸의 대표작 달과 6펜스가 정신과 물질적 세계, 혹은 자유와 예속의 세계와 같이 대조되는 세계의 삶을 보여주듯, ‘케이크와 맥주역시 위선과 진실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일 케이크를 먹기 위해 오늘 체면치례 없이 진실한 사람들과의 맥주 한잔을 마다할 것인가. 아니면 내일에 대한 불안과 고민 없이 오늘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는가. 내게는 이런 문제로도 다가왔다. 계급사회 이전의 인간 공동체에서 과연 내일이란 개념은 존재했었을까. ‘내일을 대비하고자 염려하느라 오늘을 놓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내일이란 문명의 필요로 만들어진 정교한 발명품이거나 문명이 만들어낸 고질병은 아닐까.




 



[1] "위선만큼 성취하기 어렵고 진이 빠지는 악덕도 없다. 위선은 한시도 늦추지 않는 경계심과 영혼을 초월하는 극기가 필요하다." (27)

[2] "돌이켜 보면 당시 사람들은 가식이 가득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이들은 체면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100)

[3] "평균 나이를 넘긴 노작가가 노년에 보편적으로 칭송받는 진짜 이유는 지식인들이 서른 살이 넘으면 글을 전혀 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때 읽은 책들은 화려한 빛을 발하게 마련이니 그 책을 쓴 저자의 가치는 해마다 높아진다." (144)

[4]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면 안 돼? 기회가 있을 때 인생을 즐겨야지. 어차피 100년 후엔 우리 모두 죽을 텐데 뭐가 그리 심각해? 할 수 있을 때 우리 좋은 시간 보내자. (...)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줘." (224)

[5] "진지한 감정이란 본디 부조리를 내포하는 게 분명하다. (...) 다만 영원불멸한 지성이 보기에는 하찮은 행성에 잠시 머물다 가는 처지에 온갖 고통에 시달리며 아등바등하는 인간이 그저 농담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276)

[6] "청혼하는 남자가 없어서는 아니고 지금 이대로 행복하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늙은이하고 결혼하기는 싫고, 이 나이에 젊은 남자랑 결혼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니까. 한세상 신나게 살았으니 여기서 그만 마무리해도 괜찮아." (295)
- 노년의 로지가 재회한 어셴든에게 한 말

[7]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296)
"그이는 언제나 완벽한 신사였거든."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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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09 16: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 공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저녁 메뉴로
케이크와 맥주 ^0^

초란공 2021-12-09 22:26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올해 스콧님의 놀라운 글과 음악에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야밤에 땡기는 각종 음식 사진까지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릴께요!

그레이스 2021-12-09 16: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못읽는 책 리뷰 보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이달의 리뷰 축하합니다.

초란공 2021-12-09 22:2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께서 아직 읽지 않으신 책이 있다는게 상상이 안되네요^^

그레이스 2021-12-09 22:29   좋아요 1 | URL
그럴리가요

쎄인트saint 2021-12-09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1-12-09 22:46   좋아요 0 | URL
쎄인트님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12-09 18: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리뷰에 선정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1-12-09 22:41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1-12-09 18: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리뷰당선 축하드려요**
저와 같은 책으로 선정되어 더 이 책이 좋아요~~

초란공 2021-12-09 22:33   좋아요 3 | URL
와~ 그렇군요!!! 이렇게도 선정을 해주시네요.
독서모임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이렇게 페넬로페님의 글도 읽으면서
미쳐 생각치 못했던 것들을 즐겁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다요~

이하라 2021-12-09 18: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초란공 2021-12-09 22:39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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