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대멸종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김보영 옮김, 최재천 감수 / 쌤앤파커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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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의한 과잉 살육과 멸종의 연대기

그리고 오래된 인류의 미래 - 여섯 번째 대멸종

 


엘리자베스 콜버트(Elizabeth Kolbert) 지음 | 김보영 옮김

최재천 감수 [쌤앤파커스] | (2022)

 

 


우리가 바로 그들에게 닥친 불운이었다.

 

이 말은 독일 쾰른의 어느 박물관 연구원이 여섯 번째 대멸종의 저자 엘리자베스 콜버트에게 건넨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를 가리키고, ‘그들은 네안데르탈인을 가리킨다. 인류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에 등장하면 으레 네안데르탈인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현대 연구자들의 지배적인 견해는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멸절시켰다는 것이다.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고유전학의 창시자 스반테 페보도 인류의 DNA가운데 몇%정도는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들이 함께 자손을 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이제 남아있지 않다. 우리의 DNA 안에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참으로 놀라운 면모를 지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로 사라져간 존재는 네안데르탈인만이 아닌 듯하다. 인류가 존재한 흔적이 있는 곳에서는 으레 대형 동물이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 주목하기 전에는 생물 종의 멸종이라는 생각이 인류의 지성사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시기에 지식인들이 생물의 멸종에 대해 가정하고 있는 지배적인 관점은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멸종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나마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멸종은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난다는 점진적인 멸종개념이었다.

 

한 가지 예로, 찰스 다윈과 공동으로 진화 개념을 정립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처럼 생물의 멸종이 기후 변동에 따른 결과로 해석했다. 기후 변동설을 지지한 인물에는 다윈에게 큰 영향을 미친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도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월리스는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생물(특히 고대 생물)의 멸종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바꾸게 된다.

 

이 주제를 전체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때, (...) 나는 그렇게 많은 대형 포유동물이 급격히 절멸한 것이 사실 인간이라는 행위자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322)

 

점점 드러나는 화석의 증거들로 생물이 멸종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힘을 잃게 되었지만, 이후 멸종에 관한 개념은 고대 생물이 점진적으로 멸종했다는 견해와 급격한 절멸로 대립하게 되었다.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 해부학자로 알려진 조르주 퀴비에다. 그는 탁월한 해부학적 지식으로 마스토돈이라고 부른 동물이 다른 대륙에서 발견된 전혀 다른 종의 코끼리였음을, 그리고 이 오래 전의 생물이 빠른 시기에 멸종했음을 주장했다. 조르주 퀴비에는 (급격한) 멸종이 사실임을 입증했던 셈이다. 반면 라마르크는 대격변 이론으로 불리던 퀴비에의 멸종 개념에 단호히 반대했다고 한다. 다윈 역시 점진적인 진화와 멸종을 지지한 덕에 퀴비에의 멸종 개념을 비판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종의 기원에서 종의 멸절이라는 주제는 불필요한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었다.라고 써두었겠는가. 여기에는 퀴비에에 대한 다윈의 암묵적인 조롱이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퀴비에의 급격한 멸종 개념은 당시에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더 많은 연구를 통해 증거가 쌓이면서, 연구자들은 수많은 동물, 특히 거대 동물이 절멸한 까닭이 바로 인류의 도래 때문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이 주장에 대한 반대자가 많이 있던 시기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대형 동물의 급격한 절멸의 이유가 인간 때문이라는 결론이 다시 힘을 얻은 셈이다. , , 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도 같은 맥락에서 언급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왜 수천만 년 동안의 숱한 가뭄에도 살아남았던 호주의 거대 동물이 공교롭게도 정확히 최초의 인류가 도착하자 거의 동시-수백만 년을 단위로 하는 지질사적 의미에서-에 죽음을 선택했는지를 가늠할 수 없다.”(324) (, , 에서 재인용)

 

여섯 번째 대멸종에서 저자가 보다 문제시한 사항은, 지구 역사상 지금까지 발생했던 다섯 번의 대멸종이 아니다. 이런 대멸종은 우연에 의해, 혹은 불가피한 우주의 현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이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절멸의 위기에 놓였다는 경고가 이 책의 강력한 메시지다. 여기에 더하여 전 지구적인 멸절 문제가 제기하는 우려 사항의 핵심은 멸종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변화의 속도. 여기에 인간이 주요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백악기 말에 소행성 충돌로 공룡을 비롯한 생물종의 대량 멸종을 처음 설명한 월터 앨버레즈의 말처럼, 우리는 바로 인간이 대량 멸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다”(369)는 것이다.

 

뉴질랜드의 날지 않는 새모아의 멸종을 한 사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모아는 단테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까지 살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뉴질랜드에 상륙한 마오리족이 모아 사냥을 시작한 이후 몇 세기가 채 지나지 않아 멸종했다. 1800년대 초에 뉴질랜드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거대한 모아 뼈가 쌓여 있는 무덤만 보았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약 100년 전만 해도 아프리카에 100만 마리 가까이 있던 검은코뿔소는 이제 약 5000마리 남짓 남아있다. 이마저도 고가에 팔리는 뿔 때문에 다시 밀렵꾼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한다. 모두 인간의 손이 닿은 곳에서 어김없이 거대 동물이 멸종한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는 사례다.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도 고래는 멸종할 것인가?’라는 장을 통해 동물의 멸종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거대 포유류의 멸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40(인간에게 반평생의 시간)전만 해도, 일리노이주에서 버팔로의 개체 수는 현재 런던의 인구수를 앞섰으나, 지금 그 지역에서는 버팔로의 뿔이나 발굽을 단 한 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충격적인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창이었다.”(561, 모비 딕,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이 소설이 다윈의 종의 기원보다 8년 앞서 출간된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연구자는 아니지만 지식인으로서 멜빌은 실제 자신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과잉 살육행위를 면밀히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느 생물 종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멸종현실에 위기감을 느낀다면, 이제는 무엇보다 인간의 활동 때문이다. 이 상황을 우려하는 많은 연구자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생물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침입종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생 인류가 침입종이 된 시기는 우리의 조상이 약 12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벗어나 이주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이 설명은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고 하는 단일기원설’(343)에 근거한 추정이다.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고유전학의 창시자 스반테 페보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생 인류가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던 작은 인구집단의 후손이라고 보는 단일 기원설에 배치되는 결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가설이건, 현생 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교잡하여 아이들을 낳고, 유럽, 아시아, 신대륙의 인구를 구성하는데 기여했지만, 결국 네안데르탈인을 멸절시킨 장본인으로 여겨진다.

 

정리해보면 침입종으로서의 현생 인류는 네안데르탈인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거대 포유류의 멸종을 초래했다. 다만 이 경향을 더욱 가속한 계기가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사건이다. 이로부터 아프리카인의 노예 매매를 비롯하여 각종 동물의 대륙 간 이동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저자 콜버트는 콜럼버스 시기 이후 초래된 방대한 생물학적 스와핑을 콜럼버스 교환(Columbus Exchange)'라고 부른다. 콜럼버스의 시대에 지구 반대편으로 항해하려면 1-2년이 걸리던 것이 이제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치명적인 감염병 보균자가 하루 만에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적인 콜럼버스 교환은 더욱 큰 문제를 낳을 가능성이 많아졌다.

 

저자가 언급하는 최근의 사례를 살펴보면 특히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 파나마에서 희귀종인 황금개구리와 청독화살개구리가 항아리 곰팡이 때문에 사라지고, 이 곰팡이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또 저자의 책 출간(2014) 직전인 2013년에 호낭성 균류(곰팡이)가 박쥐에게 일으키는 흰코증후군으로 몇 년 사이 북미 대륙에서만 박쥐 600만 마리가 사라져버린 일은 연구자들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을 주었다. 이 모든 결과가 인간의 부단한 이동 때문에 초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외래종이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여 침입종이 되는 사례가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이는 즉각적으로는 지역의 종 다양성에 기여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침입종이 고유종을 멸절시키는 사례도 많다. 결국 전 지구적인 다양성은 결국 감소하게 된다는 점이 큰 문제다.

 

이 책에서 끊임없이 제기하는 멸종의 쓰나미사례는 큰 포유동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곰팡이, 바이러스에 이르는 침입종의 유입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299). 여기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주체가 바로 인간이다. 이제 지구상에는 야생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지리적인 경계를 허물고 이를 넘어버렸다. 저자는 이 현상을 신판게아라고 부른다. 판게아는 33500만 년 전 즈음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하나의 거대한 초대륙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초대륙은 부단한 지구의 움직임 때문에 갈라지고 이동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지질학적으로 오랜 시간 분리된 대륙이 이제는 인간의 행위로 지질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신판게아는 지구의 생태환경을 극적인 속도로 재편하고 있기 때문에 우려스럽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제는 이 변화의 속도. 한 침입종은 생태계에 유입되어도 대개는 살아남지 못하거나 지배종으로 될 수 있는 적절한 시간과 조건이 주어질 때, 지역에 적응하여 하나의 고유종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상징적인 초대륙 환경을 급속히 재편하며 지구를 혹사시키고 있다.

 

책을 통해 저자는 수많은 멸종 사례 및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언급하며 인간이 야기하는 여섯 번째의 대멸종을 경고한다. 이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 역시 생태계에서 홀로 생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생물들과 부단히 연결된 상태로 살아나갈 수밖에 없기에, 사람이 야기한 파괴의 끝은 결국 우리 인간 자신을 향하게 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수많은 다른 생태계 구성원들을 멸종에 몰아넣고도 아무런 영향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답은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지구 생명체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강인한 생명력과 회복력을 발휘했지만, 저자는 이들의 회복력이 무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페이지마다 일러주는 듯하다. 그리하여 인류는 이제 대답해야 한다. 글 앞에서 독일의 어느 연구원이 저자에게 했던 말을 조금 바꾸어보면 우리가 대답해야하는 질문은 이거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닥친 불운이 될 것인가?” 




[1] "모든 개구리의 가치가 저에게는 코끼리만하게 다가옵니다."(35)
- 백악기 대멸종에도 살아남은 양서류가 사라지는 상황을 보고 한 양서류보전센터 책임자가 한 말

[2] "종들이 사라지는 데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 과정을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늘 동일한 범인인 ‘일개의 나약한 종(인간)‘을 만나게 된다."(45)

[3] "18세기 말까지는 멸종이라는 범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146)
- 멸종은 해부학자 조르주 퀴비에에 의해 입증되었다.

[4] "생물다양성 감소가 일어날 것이라는 증거는 확실하다."
"해양 산성화라는 거대하고 끔찍한 놈이 곧 다가올 겁니다."(181)
- 환경연구가들의 경고

[5] "인류는 땅속의 석탄과 석유를 꺼내 태움으로써 수천만 년 이상 - 대개는 수억 년 동안 - 격리되어 있던 탄소를 대기 중에 되돌려 놓고 있다. 그것은 지질사를 거꾸로, 그것도 초고속으로 되돌리는 일이다."(186)

[6] "여러 세대에 걸친 초대형 건설 프로젝트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산호의 방식은 인간이 해온 방식과도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그 과정에서 다른 생물들을 쫓아내지만, 산호는 다른 생물들을 돕는다."(193)

"산호는 생태계의 건축가입니다. 그러니 산호가 사라지면 그 생태계 전체가 사라지는 건 자명한 일이지요."(207)

[7] "관건은 속도다. 오늘날의 온난화는 마지막 빙기를 비롯하여 이전의 모든 빙기말에 일어났던 것보다 최소 10배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235)

[8] "무척추동물은 윌슨이 말한 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생명체‘일 수 있지만, 작다는 이유로 간과되기 쉽다."(269)

[9] "인간 활동은 기후 변화 - 자연적인 기후 변화를 포함하여 - 에 따라 생물다양성이 확산할 수 있는 길에 장애물을 만들어 왔다. (이 결과는) 역사상 생물에게 닥친 그 어떤 위기보다 심각한 위기가 될 수 있다."(271)
- 환경운동가 톰 러브조이의 말

[10] "먼 미래를 내다보자면, 생물계는 궁극적으로 더 복잡해지기보다는 더 단순하고 빈곤한 상태가 될 것이다."(300)

[11] "나는 그렇게 많은 대형 포유동물이 급격히 절멸한 것이 사실 인간이라는 행위자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322)
- 진화론의 창시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마지막 저서에 언급한 말

[12] "유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미학적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358)

"기호와 상징으로 세계를 재현하는 능력은 세계를 변화시킬 능력을 수반하며, 그것은 곧 세계를 파괴할 능력이 된다."(359)

"인류는 기호와 상징을 사용하여 자연 세계를 표상하기 시작하자마자 자연의 한계를 뛰어넘었다."(370)

[13] "멸종 현상의 문제는 멸종 그 자체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다."(369)

[14] "여섯 번째 대멸종은 인간이 쓰고, 그리고 건설한 모든 것이 먼지가 되고, 초대형 쥐 혹은 다른 어떤 생물이 지구를 물려받은 후에도 오랫도안 생명이 가는 길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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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김보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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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상대로 한 팡글로스의 도박

- 화이트 스카이

 


엘리자베스 콜버트(Elizabeth Kolbert) 지음, 김보영 옮김, [쌤앤파커스] (2022)

 



근대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자신의 철학을 담은 콩트 캉디드를 남겼다. 이 풍자소설을 통해 볼테르는 라이프니츠식의 낙천주의, 세계는 조화롭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믿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런 세계관을 대표하는 인물이 캉디드의 철학 스승 팡글로스다. 소설 속의 인물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상에 편재해 있는 악과 부조리를 겪지만, 그는 이 세상이 언제나 최선으로 이루어졌다고 굳게 믿는다. 여섯 번째 대멸종을 저술하며 인류세의 위기를 경고하고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엘리자베스 콜버트는 자신의 신간 화이트 스카이에서 팡글로스 같은 과학자와 공학자들을 만나 취재했다. 물론 이 책에서 만난 과학자·공학자들은 현재 지구가 마주한 여러 문제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팡글로스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이들은 전 세계 사람들이 마주한 지구적인 환경 문제들을 과학기술로 해결해보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저자는 이들이 가진 논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독자에게 제시하고 점검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환경 문제는 인류가 처한 어떤 위기보다도 심각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든 무언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마련이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보인다. 하지만 환경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인류가 마주한 위기를 경고했던 저자가 저널리스트로서 현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헤친 현장을 따라가 보면 생각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보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처한 환경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자연 환경에 개입하고 이를 바꾸어 놓은 결과, 으레 또 다른 재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지역을 물로부터 보호하고자 시행했던 토목공사의 결과 이 지역은 1시간 반마다 축구장만한 땅이 수몰되어 지도에서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뉴올리언스 일부는 10년에 거의 15센티미터씩 가라앉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05년에 이 지역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에는 도시 해체를 신중하게 계획하기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오랜 세월 미시시피강이 퇴적해 놓은 이 지형은 이렇게 자연을 통제하려 했던 인간의 선한 프로젝트의 결과 홍수의 범람은 줄어들었을지 모르나, 퇴적 작용마저 중단되게 되었다.


 

뉴올리언스에서 인간이 거대한 자금을 들여 개입한 프로젝트의 목록은 우리의 4대강 사업처럼 제방을 높이고 강물을 막았던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남부의 대홍수를 계기로 미시시피강 홍수 통제권을 국유화한 미국 의회는 자연을 개조할 권리를 미 육군 공병대에 부여했다. 이들은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강 주변으로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제방을 쌓았고, 나아가 세계 최대의 양수장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뉴올리언스의 토지 손실은 계속되어 멕시코만과의 거리가 도시 형성 초기보다 32킬로미터나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이들은 지치지 않는 투지와 마르지 않는 희망으로 승리를 다짐하며 이 지역을 바꾸어 놓았다. 여기에 석유 산업이 들어와 습지에 운하까지 팠던 것이다. 이제 가라앉던 습지는 바닷물까지 들어와 갈대 등의 식생이 죽고 습지의 많은 생태계가 회복하기 힘든 교란을 겪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1920년대 미국 사회는 엔지니어링의 힘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 넘쳐났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자연을 엔지니어링하는 작업의 선봉에 섰던 집단이 바로 미육군 공병대였다. 자연에 대한 이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공병대가 만든 구조물이 자연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재앙에 휩싸일 뻔한 후에도 공병대의 한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병대가 명령하면 미시시피강은 그게 어디든 가게 되어 있다.”(89) 나아가 공병대원들은 우리는 강을 틀어쥐고, 바로잡고, 길들이고, 족쇄를 채웠다.”(56)라고 말하는 이들이었다. 이정도면 뻔뻔한 것이 아니라 광신도 집단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21세기에도 이들의 태도는 크게 변함이 없는 듯하다. 한 공병대원은 저자에게 문제가 있는 곳에는 공병대가 있습니다.”(90)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공병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야 할 듯하다.


 

저자는 저널리스트답게 본인이 취재하는 이들에 대한 평가나 판단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고 이들의 말을 거리를 유지하며 전한다. 오히려 저자의 입장이 너무 중립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거대한 정치 세력과 연결되어 있는 미 공병대에 대해서 저자의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기에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 대신 저자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던 로마 서정시인 호라티우스의 말로 자신의 입장을 대신한 듯하다.


 

쇠스랑으로 자연을 긁어낸들 자연은 이내 돌아와 우리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우리의 비뚤어진 경멸을 뚫고 승리할 것이다.”(82)


 

하지만 토목 공사로 환경을 변화시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저자는 생태계 보전에 앞장 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제2부에서 들려주고, 지구의 대기 환경을 바꾸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제3부로 가면서 점차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미육군 공병대가 주장하는 논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통제가 문제라면 더 큰 통제가 해법이다’, 라는 입장이다. 저자는 이를 인류세의 논리라고 정리한다. 1부에서 저자가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 주변의 광활한 지역에 개입한 프로젝트를 소개했다면, 2부에서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에 대한 통제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크리스퍼(CRISPR) 기술을 활용한 유전자 편집 기술로 생태계를 통제하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이들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사용하여 생태계에 발생한 재앙을 해결하고자 했다. 해수 온도 상승으로 인한 백화현상을 겪는 산호에 유전자 편집 기술을 적용하여 환경에 대한 스트레스에 강한 내성을 가진 산호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 논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면 이들 유전공학자들의 주장이 공병대의 인류세 논리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물론 이들의 주장 가운데 우리 환경이 이미 유전적으로 변형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 이들은 애초에 존재하면 안 되는 2만 개의 유전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단지 10개 정도의 유전자를 추가하려는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큰 질적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연에서 이루어진 유전자 변형은 오랜 시간생물과 환경이 상호작용하며 적응하여 최적화된 결과다. 여기에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생태계 그물이 영향력을 발휘한다. 반면 인간이 단 10개의 유전자를 바꾸어 생태계에 노출시켜 빠른 시간에 생태계에 영향을 주게 된 상황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개입은 환경을 교란시키고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이다. 이들 유전공학자들은 단지 10개 정도의 유전자 변형이라고 대중을 교묘하게 설득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들은 선한 프로젝트라는 선민의식으로 과학자로서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은 것이다.


 

인간의 개입으로 생태계가 위기에 처하게 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저자가 언급한 수수두꺼비도 한 가지 사례다. 또 다른 예로, 일부 과학자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유전자 기술로 생쥐를 멸종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자연선택을 무력화시키는 드라이브 유전자를 가진 생쥐를 만들어 수컷만 낳도록 조작함으로써 멸종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제 책의 후반으로 가면서 자신의 견해를 점차 드러낸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181)는 점도 지적한다. 여기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은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회의론까지 덧붙이면서 말이다.


 

생물의 다양성이 생태계 구성원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 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해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어 자연 스스로의 회복력을 기대하는 것과 유전자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이 마주한 문제를 값싸고 빠르게 해결하는 방식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이들 과학자들이 지적하듯, ‘그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견해에 크게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류가 처한 위기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본질적인 원인에 손을 댈 일이다. 인간이 환경 및 생태계의 어떤 이상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특정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자연을 교란시키는 일을 직접 해결하려고 뛰어들기 보다는 자연의 치유력을 이용하는 일이 보다 근본적이며 필요한 일이라 여긴다. 물론 이들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그럴수록 문제의 해결책은 문제의 원인을 곧바로 공략해야 할 일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무분별한 성장과 자연의 과도한 이용을 줄이고 자원을 보다 고르게 분배하는데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에게 필요한 자원이 영원히 무궁무진한 것처럼 취하고 소모해서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미 육군 공병대나 유전자 기술을 이용하여 생태계 재앙을 해결하려는 공학자와 과학자들이 포기하지 않는 일말의 희망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내가 인간 세계에 편재하는 모든 부조리를 경험한 뒤에도 세계의 최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팡글로스의 공허한 희망을 이들에게서 본다면 너무나 지나친 해석일까 자문해본다. 이들의 사고는 북미 대륙에 침입한 아시아 잉어를 제거하고자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죽이려는 이들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토착 생명의 순수성을 지키고자하는 서양 백인들의 사고와도 연결될 수 있으리라. 이처럼 인간이 적극 개입하여 자연을 엔지니어링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우려를 보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취약점을 지닌다.

 


3부에 이르면 과학자들의 자신감이 지구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기 환경을 바꾸는 계획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지구 온난화에 대비하기 위한 아이디어로 지구 성층권에 햇빛의 반사율을 높이는 입자를 살포하는 사업이다. 이를 통해 지구 온도를 강제로 낮추려는 것이다. 특히 그동안 태양빛을 상당히 반사시켜준 극지방의 얼음과 빙하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아이디어는 보다 더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1815년의 탐보라 화산 분출과 같이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례처럼 자연이 기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례가 있다. 하지만, 인간의 개입으로 지구 생태계를 갑작스럽게 교란하는 일은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부작용의 발생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는 이런 부작용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자도 이를 분명히 지적한다. 그는 햇빛의 반사율을 높이려고 하늘에 수많은 입자들을 살포하는 시도에 대한 부작용으로 하늘도 흰 색으로 보이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이 화이트 스카이인 이유다.

 


저자는 인간이 마주한 여러 환경적인 재앙을 해결하고자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취재했다. 때론 이들의 명분에 동의도 하고 수긍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개입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분명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과학자들이 여러 방면에서 문제들을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하지만, 해결 방안의 실행은 또한 정치적 결정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물론 이 문제에 과학기술자들의 책임은 가볍지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적 결정의 문제이기에 이는 모두의 문제가 된다. 이런 중대한 문제의 결정이 전문가 혹은 정치인들의 손에만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독자들에게 한 가지 더 생각거리를 던진다. 만약 전문가 혹은 정치인들의 결정으로 하늘에 무수히 많은 입자들을 뿌리게 되었다고 상상해보길 요구한다. 전 세계의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 없이 말이다. 이 때 전 인류가 태양빛의 반사율을 성공적으로 높여 지구의 온도를 낮추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만일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이 주어들지 않고 계속 늘어난다면, 인류는 다시 이전의 기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어쩌면 인류는 하얀 하늘 아래기후가 교란되어 여름에 작물이 얼어 죽어 식량 대란이 발생한다면 인류에게 큰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독자에게 암시하며 마무리한다. 그러므로 제목으로 사용된 화이트 스카이는 인간의 어리석은 개입으로 인류가 보게 될 또 다른 재앙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저자가 독자에게 경고하는 말을 읽고 다시금 캉디드가 생각났다. 지구 온난화를 늦추자고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많은 입자들을 대기에 뿌리겠다는 생각은 도박과 다름없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팡글로스의 마음가짐을 가진 세계 최고 수준의 지식인들이 인류를 상대로 벌이는 도박에 다름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에다 인간 세계의 온갖 부조리를 경험하고 고향에 돌아온 캉디드와 스승 팡글로스가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 역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여전히 최선인 세계의 존재를 믿는 팡글로스의 말에 캉디드가 대꾸하는 말 때문이다.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이 말을 공병대나 일부 과학자들이 들으면 자연을 통제하려는 의욕이 더욱 고취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학자를 포함하여 아마도 모든 인류가 공유해야할 마음가짐이란 우리가 꽃과 열매를 당장 맺을 수 있게 기후를 바꾸거나 물길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조화로운 정원을 마련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책 속으로]

[1] "통제가 문제라면 더 큰 통제가 해법이다. 그것이 인류세의 논리다."(56)

[2] "엔지니어들의 개입 덕분에 범람을 막았고, 대혼란도 없었으며, 새로운 땅의 조성도 없었다. 그 대신에 루이지애나 남부의 미래는 바다로 쓸려 내려갔다."(64)

[3] "미국 의회는 ‘대홍수’에 대한 대응으로 미시시피강 홍수 통제권을 사실상 국유화하고 그 임무를 육군 공병대에 맡겼다."(71)

[4] "공병대가 명령하면 미시시피강은 그게 어디든 가게 되어 있다."
(한 공병대 장군의 말)

[5] "하나의 생태계가 제대로 작동하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그에 비하면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108)

[6]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협력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150)
- 이 견해는 인류 최대의 오판인 듯하다.

[7] "그레이트배리어리프를 파괴하면서 인간에게 아무런 고통이 없으리라는 생각은 오만이 맞다. 그러나 ‘모든 산호초를 아우르는 규모의 개입’이라는 것 역시 또 다른 오만이 아닐까?"(151)
- 저자의 비판적인 시각

[8] "우리는 애초에 존재하면 안 되는 2만 개의 유전자에 단 10개 정도의 유전자를 추가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10개는 나머지를 파괴하고 생태계에서 몰아냄으로써 균형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162)
- 일부 유전공학자들의 지극히 인간중심적 시각, 책임회피, 생태계의 균형에 대한 근시안적 사고와 무지를 드러낸 말.

[9] "수학적 모델링에 따르면 효과적인 억제 드라이브는 엄청난 효율성을 발휘하여, 정상적인 생쥐 5000마리가 서식하는 섬에 유전자 드라이브 생쥐 100마리를 방사하면 몇 년 안에 생쥐를 박멸할 수 있을 것이다."(179)

[10] "우리는 신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 일을 잘 해내지는 못했다. (...) 우리는 재미로 아름다운 것들을 죽이는 로키(북유럽 신화의 장난꾸러기)이며,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경의 신)다. (...)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뭔가를 하는 것보다 낫다. 또 때로는 그 반대다."(187)
- 영국 환경 운동가이자 작가인 폴 깅스노스의 말.

[11] "우리가 배출량을 반으로 줄인다고 해도 - 그러려면 전 세계 인프라의 상당 부분을 재편해야 한다 - 이산화탄소농도는 덜 빠르게 상승할 뿐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204)

[12] "신속한 염가 솔루션으로 보이는 SAIL이 그렇게 빠르고 저렴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진정한 해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온난화의 증상만 치료할 뿐,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다."(236)

[13] "과학자들은 권고를 할 수 있을 뿐이며 실행은 정치적 결정의 문제다. 우리는 그 결정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미래 세대,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공평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랬던 적이 별로 없다는 것만은 짚고 넘어가야겠다."(259)

[14] "전 세계 - 혹은 적극적인 소수의 국가 - 가 SAIL함대를 띄운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만약에 SAIL이 점점 더 많은 입자를 하늘에 뿌리지만 전 세계의 탄소 배출도 계속 늘어난다고 하자. 우리는 산업화 이전의 기후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악어가 북극해 해안에서 볕을 쪼이던 플라이오세나 에오세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얀 하늘 아래 백련어가 반짝이는, 전례 없는 기후의 전례 없는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259)
-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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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논, 김현준의 재즈+로그
김현준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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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재즈 현장을 비추는 거울, 캐논

- 캐논, 김현준의 재즈 + 로그

 

김현준 지음, [한울] (2022)




책을 통해 재즈비평가 김현준을 처음 알게 된 건 25년 전의 일이다. 우울증인지도 모르고 내 안의 세계에 갇혀 있던 시절, 나는 어떤 음악도 듣지 않는 아이였다. 우연한 만남. 재즈는 나를 세상으로 향하도록 처음 문을 열어주었다. 새끼 새가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올 때 어미 새는 밖에서 알을 쪼아 도와주기도 한다던가.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문을 잡아준 것에는 김현준의 재즈 파일(1997)과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도 있었다. 군 시절 라디오로 그가 진행하던 재즈 프로그램을 듣던 기억이 난다. 점호가 끝난 한 밤중, 고참들이 잠든 시간.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눌러 그가 진행하던 방송을 테이프에 녹음하곤 했다. 내무반에서 방송을 녹음 한 테이프를 늘어져라 듣고 지우기를 반복하던 기억도 새롭다.


 

캐논, 김현준의 재즈 + 로그(이하 캐논)18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책이라고 한다. 책에 담긴 이야기가 무르익는 동안 그는 어떻게 지냈을까 궁금했다. 간간이 그가 번역했던 쳇 베이커마일즈 데이비스 평전을 서점에서 만나면 반가웠지만, 나는 나대로 생활에 매몰되어 오랫동안 음악을 잘 듣지 못했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는 여전히 재즈비평가로, 또 공연기획자와 프로듀서로, 그리고 교육자로 치열하게 자신의 역을 맡아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출간된 캐논은 그가 지난 세월 함께 했던 국내 재즈 현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기에 저자가 가상의 피아니스트 한세영과 대화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을 도입했다. 비평가만이 아니라 음악과 연주자에 대한 애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가슴에 꾹 눌러 담았던 이야기였다. 그가 써야할 책이었다고 말할 때, 재즈 클럽의 문을 여는 순간 떠들썩한 공기의 떨림과 실내의 열기가 살갗을 때리는 듯 느껴졌다. 여기에는 지난 20여 년 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을 것이다.


 

책 전반에서 저자가 비평가로 지내는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 되물었을 법한 화두를, 재즈곡의 중요한 프레이즈(phrase)처럼 만나게 된다. 바로 비평가란 누구인가?’, ‘비평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저자에 따르면, 비평가의 역할이란 물밑에 감춰진 이슈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눅눅하게 처져버린 우리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일”(7)이다. 그에게 비평이란 짝사랑하기다. 그렇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포기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을 주어본 이만이 상대방을 미워할 수도 있는 법이라고 이해한다. 조금 과장해본다면 배교자라도 한때는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의 비평은 연주자의 상처를 덧나게 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재즈 연주자들에게 여러 가지 해법을 제시하고 대안과 자성의 소중함’(125)을 지향한다. 이런 내막으로 그동안 그의 눈길은 줄곧 무대 위 연주자의 표정과 몸짓을 향하고 그의 숨소리 하나까지 듣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왜 비평을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나의 비평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게 해준데 대한 감성의 화답이다.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미학적 신념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이성의 손길이다.”(125)


비평가는 무엇보다 먼저 연주자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대상 없는 비평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124)이다. 지난 25년간 재즈계 현장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연주자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당부가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이 말들이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의 당부가 재즈 음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서 재즈나 재즈인이라는 표현을 다른 분야의 예술로 대체해보라. 여전히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미술가는? 사진가는 또 어떤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느 예술 분야를 떠올려보아도 대상 없이존재하는 분야는 없다.


 

또한 저자는 연주자의 궁극적인 목표가 스타일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과 주변 세계를 면밀히 관찰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예술가는 세상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으로 대상의 상태를, 특히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입은 상처와 슬픔을 제일 먼저 감지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의 상처와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 상처를 어루만짐으로써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27)을 갖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은 각자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는’(172) 존재들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가로서 그가 재즈계에 전하는 당부를 나는 모든 예술인들에게 전하는 정언명령으로 읽는다. 이 길이 고귀한 길인 반면,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코로나 시국으로, 또는 기득권이 들어앉은 높은 성벽에 가로막혀 재즈인의 길을 걷지 못한 연주자들의 사연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손에서 놓아 버린 가슴 아픈 사연들이 찬바람 이듯 지나가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재즈라는 서브컬처는 굽은 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저자는 음악이 경력을 쌓는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이유’(264)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이 말을 읽고 어느 작가가 언급한 표현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의 글쓰기 수업 중 언급한 표현을 대강 옮기면 이렇다. ‘글쓰기는 결코 직업이 아니다. 글쓰기는 여러분이 좋아하기 때문에, 나아가 쓰지 않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라고. 물론 음악인의 경력을 쌓는 문제는 중요하다. 다만 여기에 선행되어야 하는 건, 음악가가 자신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다. 달리 말해, 저자는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지 당신이 음악을 좋아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음악가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연주가가 아니기에 이런 말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비평가가 후배 연주자들에게 하는 말은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보다 먼저 재즈 현장에 뛰어든 사람으로서 그는 새로운 세대에 대해 무한한 관심과 지지를 보내면서, 음악을 가까이하는 대중에게는 국내에서 왜곡되어버린 재즈의 위상을 바로 알리고자 한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나름의 위치에서 분투해온 시간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10년 전 즈음의 기억이다. 이탈리아 재즈계의 거장 트럼페터 엔리코 라바의 공연에 간 적이 있다. 2012년 즈음이므로 당시에 라바는 이미 73세 정도였다. 젊은 시절만큼의 에너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분한 연주였지만, 특히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연주 중에 빈번히 젊은 연주자들에게 연주할 기회를 더 주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좋은 작품을 인정하는 기준으로 표현력(연주력), 독창성, 진정성을 들었다. 엔리코 라바의 연주 기량이나 독창성은 비평가의 입장에서 인상적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까마득한 후배 연주자의 소리를 정성껏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며 배려하는 모습은 선배 연주자가 보여주는 진정성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재즈를 여전히 잘 모르는 나에게도 그 날의 연주가 뭉클한 감동으로 남아있는 이유다. 저자가 책에서 들려주는 진정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이 날의 연주를 떠올리며 읽었다. 언제 그의 연주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기약할 수 없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저자가 한국 재즈계와 후배 연주자들에게 하고자했던 말은, 문학을 하고 싶었던 중학생시절의 저자에게 친척이 해준 말에 아마도 모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의 고향을 잃지 마라.”(109) 앞서 이야기한 선배 연주자 엔리코 라바의 사례처럼 이미 정상에 오른 이들이 후배들에게 더 많이 배려할 때, 후배들은 새로운 마음의 고향을 얻게 될 것이다. 선배 연주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혜를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후배 연주자들에게 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재즈 1세대는 그야말로 어려운 여건에서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만든 세대다. 아울러 후배들을 많이 챙기고 배려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이제 그 몫은 다음 세대에게 주어졌다. 여기에 더하여 후배 재즈인들이 해야할 일은 마음의 고향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이들에겐 힘겨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대로 대한민국에서의 재즈는 앞으로도 서브컬처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한 소수 음악이 사회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로부터 그 존재를 인정받을 때 젊은 연주자들은 최소한 마음의 고향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책을 읽는 동안 재즈비평가가 오랫동안 묵혀놓았던 이야기들을 밤새 옆에서 들은 느낌이다. 자연 생태계가 건강한지의 여부는, 생태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서로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종의 다양성 확보에 달려 있다. 한국 재즈계도 그렇다. 젊은 재즈연주자들이 마음의 고향을 잃고 존재 이유인 음악을 손에서 놓아버린다면, 한국 재즈 생태계의 다양성이 감소하고, 나아가 언젠간 대한민국 재즈의 미래 역시 소멸 위기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 오래도록 음악과 멀어져 있던 나 역시 한국 재즈계에 침묵의 봄이 오지 않길 바란다. 음악은 음악인 혼자 수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속한 생태계는 건강해야만 한다. 예술은 국내 어느 한 기업가가 말했던 것처럼, 한두 명의 천재가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분야가 결코 아니다. 효율성과 성과를 기준으로 예술인들을 평가하고 지원하는 것은 다양성이 확보된 생태계를 만드는 데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생명력을 잃고 하나의 화석처럼 되어 버린 퓨전 국악의 사례를 떠올리면 된다.


 

책을 덮고서 책에 등장하는 가상의 피아니스트 한세영을 다시 떠올려본다. 한세영이란 인물은 대한민국에서 소수 음악을 어께에 짊어지고 고군 분투해온 이 땅의 모든 재즈 음악인들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책에 제시된 한세영의 경력이 피아니스트인 점을 제외하면 저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닮았다는 점에서, 한세영은 저자를 비추고 있는 하나의 거울상으로도 읽힌다. 따라서 한세영이 하는 말은 비평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할 테다. 나아가 저자가 또 하나의 자신한세영과 대화할 수 있게 해주었던 이 거울이야말로 하나의 캐논’(예술가들이 삶과 창작 과정에서 지켜야할 규범, 176)이었다는 생각도 해본다. 저자가 지향했던 삶과 마찬가지로, 그가 바라보던 연주자는 오늘도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 길을 헤매기도 할 것이며,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고 있을 것이다. 또 어디선가는 마음의 고향을 지키며 자신의 작품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마음의 고향을 지키며 자신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는 모든 예술인들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하느니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전영애 역, 도서출판 길, 91)









[책 속으로]

[1] "나는 재즈가, 수많은 이들의 갈채 속에 시대를 풍미하는 상업 음악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재즈를 그렇게 만들려는 시도가 되레 그 가치를 왜곡하기 쉽다는 점도 현장에서 몸으로 배웠다."(9)

[2] "삶과 동떨어진 음악은 현실 속에서 생명력을 얻지 못하며 울림의 폭도 좁다. 그리고 만드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음악은 온몸으로 느끼지 못하면, 음악은 없다."(70)

[3]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의 고향을 잃지 마라."(109)
- 문학을 하고 싶었던 저자의 중학생 시절, 친척 한 분이 저자에게 했던 말.

[4] "비평은 짝사랑이다. 비평가로 세상을 산다는 건 설렘의 포로가 된 채 ‘마냥 기다림‘의 끈기를 요구받는 일이다."(124)

[5] "비평가는 그대가 꿈에 그렸던, 그대의 작품을 누구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마주했던 열렬한 짝사랑의 주체였다."(125)

[6] "건강한 서브컬처로서의 소수 음악이 사회에 의해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건 견디기 힘든 폭력이다."(126)

[7] "연주자로서 눈여겨봐야 할 재즈의 교훈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는 태도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 있어요."(172)

[8] "세상 그 누구도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모든 이들에게서 사랑받지 못한다. 그러니,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은 생을 바쳐라."(231)
- 재즈 연주자 앤드루 시릴이 2014년 사천 국제 재즈워크숍에서 저자에게 건넨 말.

[9] "우리는 그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351)

[10] "(연주자는) 조건 없이, 자기 작품을 아낌없이 무조건 사랑하라."(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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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 시대의 아이콘 평전시리즈 2
앤 C. 헬러 지음, 정찬형 옮김 / 역사비평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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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에 이방인이 된다는 것

-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



C. 헬러 지음, 정찬형 옮김, [역사비평사] (2021)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은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대한 짧고 강렬한 평전이다. 잡지 편집자이면서 인물에 관한 논픽션작가인 앤 C. 헬러의 군더더기 없는 글이 돋보인다. 간결한 평전인 만큼 아렌트의 대표적인 정체성을 규정하는 세 가지 사항에 크게 초점을 맞추었다. 저자는 먼저 아렌트를 세계적인 논란의 중심에 서게 했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어서 철학자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던 젊은 시절을 조명한다. 특히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공적·사적 관계, 그리고 유럽 대륙이 나치의 광풍에 휘말린 1930년대에 아렌트가 자신의 운명과 마주해야했던 경험 및 그가 지나야 했던 삶과 죽음의 경계로 독자를 이끈다. 마지막으로 아렌트가 미국으로 망명 한 후 그를 다시 깨어나게 한 사건, 곧 유대인 여성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를 언급하고, 이어서 그를 지식인 사회에서 인정받게 했던 역작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배경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단지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32) 이 말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 중에 남긴 유명한 말이다. 아렌트는 <뉴요커>지의 기자 자격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고 생각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그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썼다.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한 것”(44)이라고 말이다. 아이히만 자신은 상부에서 시키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렌트의 기준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복종은 나치를 지지한 행위나 다름없다는 말이 된다.



어렸을 때 흔히 볼 수 있었던 학교 폭력 현장을 생각해보자. 눈앞에서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을 경우, 이 상황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방관자로 있었다면, 이 방관자는 결국 폭력에 대한 지지나 다름없다는 경고가 된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왔을 때는 또 어떤가. 집단 자체가 하나의 모순 덩어리인 상황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종종 거대한 생산 장치를 이루는 하나의 작은 부품처럼 되어야 한다. 부당한 것, 불합리한 것들이 있을 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 방관자로서 살아갈 때 결국 우리는 우리 삶을 규정하는 거대한 부조리를 지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아렌트는 현대 사회와 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유형을 진지하게 고찰하여 우리에게 경고를 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우리를 어떤 선택의 경계로 내몬다. 더 이상 방관자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문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각 구성원의 판단과 행동 그 자체가 곧 정치라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우리 삶의 문제점을 보다 더 진지하게 마주할수록 우리는 방관자일 수 없다.


 

저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요약해놓았다.

 


아렌트의 숨은 의도는 아이히만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대중사회의 인간’, 즉 사회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외롭게 표류하며 경제적으로는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로, 허무주의와 전체주의의 표적이 되기 쉬운 특성을 지닌 후기 산업주의 사회 특유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인간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7)


 

이 문장만을 본다면 아렌트는 시대를 너무 빨리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아렌트는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고 비추어 놓은 것만 같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의식은 그가 미국으로 망명을 한 이후 쏟아낸 글들을 거치며 보다 총체적인 시각을 형성해 갔고, 결국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발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한편 아렌트에게 재능을 갖춘 유대인 여성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는 또 다른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듯하다. 아렌트가 유대인의 문제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야말로 비로소 그에게 고유한 문제, 그와 불가분의 관계인 정치적문제가 되었던 셈이다. 유럽 역사에서 유대인에 대한 혐오/증오는 꽤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어느 사회든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개신교를 비롯한 현지의 종교 및 문화에 대한 동화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유대인에게 동화의 문제는 꽤나 다층적이고 복잡한 문제였다. 단순히 종교를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경멸의 시선을 바라보곤 했는데, 이들에게 동화의 문제는 곧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내면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06). 이는 곧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이 상황이야말로 창과 방패의 관계, 곧 모순이었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동화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태어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야만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단순히 고향을 떠나고, 고향을 상실하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는 것, 곧 언어도 잃어버릴 위기를 에 놓이는 걸 의미했다. “가장 간명한 표현 수단인 ... 언어도 잃어버렸다.”(162) 이 말은 아렌트의 어머니 마르타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고립된 생활을 하며 남긴 하소연이었다. 표류하는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이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렇게 다층적인 삶의 조건이 아렌트에게는 자신과 전혀 무관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당면한 문제들을 마주하며 치열하게 사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렌트가 미국으로 망명 한 후 9년 째 되던 1949년에 발표한 전체주의의 기원이 바로 치열한 사유의 결과물인 셈이다. 저는 이 책을 고독, 뿌리, 소속의 상실에 관한 명상록’(164)이라는 문구로 요약하면서, 책의 목적이 사람을 잉여란 존재로 만드는 사악한 의도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체주의는 인간의 고독과 소속감의 상실이라는 경험에 터 잡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격렬하고 절망적인 경험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165)

 


이 대목을 읽는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고독’, ‘소속감의 상실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게 목격할 수 있는 징후가 아닐까 해서다. 계층과 세대 간 갈등과 소외, 역사 및 전통과의 단절과 괴리가 이토록 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런 증상은 이미 뚜렷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후기 산업사회의 모습, 이를테면 고도의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한 노동자의 소외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와 여건이 70여 년 전 아렌트가 했던 경고를 떠올리게 하지 않은가. 우리 삶을 점점 더 좌지우지하고 정치력을 거머쥔 대기업은 현대적인 맥락에서 전체주의 세력과 다를 바 없다는 자각을 준다. 아렌트가 말한 상황과 현재 우리 사회의 조건이 잘 부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얼마나 취약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아렌트의 사상에 비추어 더욱 실감하게 된다.


 

저자 헬러는 아렌트가 가장 어둡고 위험했던 시대에도 언제나 이방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아렌트의 행보는 어린 시절부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라 이해된다. 그럼 어두운 시대에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밝힌 바를 이용하여 정리해보면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내 안의 작은 아이히만과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다. 아렌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우슈비츠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 순간, 그리고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이런 문제들은 그에게 고유한 문제,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다. 그가 단순히 방관자로만 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어두운 시대의 삶은 아렌트의 사상과 저작들에 이미 익숙한 독자들보다는 입문자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아렌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표 저작 몇 가지를 중심으로 여기에 영향을 준 아렌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 앤 C. 헬러는 태생적 조건(20세기 전반 유럽의 유대인)으로 경계인이 된 아렌트가 단순히 방관자로만 있지 않고, 이방인이 되고자 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익숙함과 구태와 거리를 두고 새롭고 공정한 시각으로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했던 한 정치철학자의 삶을 소개해주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래픽노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도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수 있겠다. 이 책은 탈출이라는 키워드로 미국으로의 망명 이전의 한아 아렌트에 좀 더 초점을 맞춘 책이다. 이 그래픽노블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좀 더 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책 속으로]


[1] "나는 단지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32)
- 재판을 받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말

[2] "아렌트의 숨은 의도는 아이히만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대중사회의 인간‘, 즉 사회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외롭게 표류하며 경제적으로는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로, 허무주의와 전체주의의 표적이 되기 쉬운 특성을 지닌 후기 산업주의 사회 특유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인간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7)


[3] "사람들이 모두 내면에 작은 아이히만을 갖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바로 그것이었다."(42)

[4]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한 것이다."(44)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마지막에 쓴 문장


[5] "최소한 하이데거가 아렌트의 장점들을 강화시키고,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여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 변호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인물임은 분명하다."(111)


[6] "단순히 방관자로만 살 수는 없었다."(117)
"유대인이라는 것이 나의 고유한 문제가 되었고,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그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었다."(121)


[7] "내 삶을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계기는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알게 된 날이었어요."(156)


[8] "(대규모) 만장일치는 합의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광신과 히스테리의 표현과 다름이 아니다."(159)


[9] "전체주의는 인간의 고독과 소속감의 상실이라는 경험에 터 잡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격렬하고 절망적인 경험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165)


[10] "가장 어둡고 위험했던 시대에도 그녀는 언제나 이방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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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03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픽 노블로는 좀 아쉬었는데
최근에 나온 새로운 평전이 인기
라 해서 일단 수급은 해두었답니
다.

<아이히만>도 다시 읽고 리뷰
를 써야지 했는데 결국 다시 읽
지도 리뷰도 남기지 못했네요.
 
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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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찾아가는 여정

- 고독한 얼굴를 읽고

 



제임스 설터(James Salter) 지음 |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

 



책을 덮으니 그 산은 마치 거대한 오벨리스크 같다라는 문장이 주는 이미지가 또렷이 떠오른다.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던 작가 제임스 설터가 54세 때 발표한 장편 소설 고독한 얼굴은 이처럼 산의 선명한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이 작품은 눈과 얼음으로 덮인 채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암벽과 이를 오르는 사람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야자나무가 있는 로스엔젤레스의 해안가에서 건물 지붕을 수리하며 살아가는 버넌 랜드라는 인물이다. 20대 중반으로 등장하는 랜드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멕시코계 여인의 집 창고 하나에 세 들어 살고 있다. 언뜻 보기에 구차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랜드가 암벽을 타다가 이전에 함께 등반했던 동료 캐벗을 만나 다른 삶을 향하게 된다. 샤모니에 가보라는 캐벗의 말에 랜드는 자신이 속해 있던 곳을 떠나게 된다.

 


프랑스의 알프스 산지에 있는 샤모니에 도착한 랜드는 확고한 기쁨, 충만한 행복감을 다시 느낀다. 산악인에게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이 충만한 행복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책을 읽는 동안 줄곧 궁금했다. 호락호락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바위처럼 내게는 그저 낯선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혹한 바위는 자연 조건과 사투를 벌이며 정상을 정복한 이들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으로 보상한다. 랜드 역시 거대한 오벨리스크같다고 표현한 짙은 빛깔의 화강암 암벽 드뤼를 정복하고 만다. 함께 오른 캐벗이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등 위험한 고비를 극복하고 말이다.


 

하늘로 치솟은 얼음 암벽에 오른 이들의 내부에는 생명력이 넘쳐흐르고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행복이 채워진다.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산이란 열정을 불어넣어주고 생명력을 전하는 존재다. 다만 암벽은 이들에게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산악인들은 자신의 손과 발을 지탱해주는 홀드를 붙든 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자포자기의 심정 및 자기 번민과 반드시 싸워야 한다. 산악인들에게 자포자기의 심정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의지가 고갈된다는 것은 곧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딛고 있는 홀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이제 랜드는 거대한 첨탑같은 드뤼를 정복하고, 이곳에서 조난당한 이탈리아 산악인을 구조하는 등의 활약으로 산악계에서 유명해지고 영웅이 된다. 그는 이곳에서 알게 된 카트린이란 여성과 파리로 와서 자신의 유명세를 즐기기 시작한다. 파리의 아늑함과 행복 속에서 이따금 샤모니를 생각하던 랜드는 이곳 생활과 기만적인 자신의 모습에 역겨움을 느낀다. 한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유명세에서 생명력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결국 다시 샤모니로 돌아와 이전에 등정했던 드뤼보다 두 배 높고 험한 워커에 오르고자 했다. 하지만 파리 생활로 무뎌진 열정을 안고 워커에 오르게 된 랜드에게 암벽이 호락호락 자신을 내어줄 리 없었다. 한 인간의 내부에는 이미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는 마음이 교차하고 충돌하고 있었다.



 

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찾아서

 


두려움과 의지의 고갈은 산악인에게 치명적이다. ‘넌 할 수 있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도 결국 랜드의 내면은 두려움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는 암벽에서 물러난다. 상상하기조차 아찔한 이 뾰족한 암벽을 도대체 왜 오르는 것일까? 그리고 이 존재가 어떻게 인간에게 그토록 확고한 기쁨과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것일까, 궁금했다. 상상만으로 온전히 이해할 길은 없지만 산악인들이 느낀 충만한 행복감의 근원이 어디에 있을까 몇 가지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항상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이, 앞장서는 것이 운명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삶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 사람은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최초의 인간이다.”(188)


 

소설의 제목이 고독한 얼굴(Solo Faces)이기도 하지만, 산악인이 마주한 암벽 역시 'face'로 표현된다는 점은 소설이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될 여지를 준다. 샤모니에 우뚝 솟아 있는 험난한 암벽들은 각자 문명 이전의 고유한 남성성의 원형을 간직한 존재이자 장소로 읽을 수 있겠다. 샤모니의 암벽 드뤼를 가리킬 때 희고 거대한 존재’, ‘거대한 오벨리스크로 표현한 점은 떠올려보면 그렇다. 제임스 설터는 이 최초의 인간이 지녔을 법한 얼굴이 바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 그리고 이런 존재 자체가 바로 생명력을 지닌 인간의 모습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세상사에는 숨겨진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길이 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은 짐승의 지혜를 익히는 것이다.”(270) 여기에서 짐승의 지혜를 갖는 것은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에 집중하고 존재의 일부가 되는 일이다. 암벽과 마주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홀드 하나에 걸고,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악인들에게 산을 오르는 일은 바로 문명 이전의 인간 원형에 가 닿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이 일에는 파리에서 만난 여인 콜레트가 말했듯 누구나 대가를 치러야했다. 산악인들이 대가를 치루는 곳은 암벽이었다. 눈과 얼음에 덮여 가려진 준엄한 바위 암벽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다. 이를 마주하고 오르는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한다. 곧 암벽은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최초의 인간들이 문명을 일으키자, 문명은 이 인간의 본성을 광기로 규정하고, 이를 도덕과 규범으로 억압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여기에 길들여졌다. 문명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된 인간들은 열정을 잃고 생명력을 강탈당했다최고의 등반에 용기 이상의 것, 영감과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언급과 달리, 문명은 인간에게서 상상력마저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산악인들이 산을 찾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지만, 각자의 마음 속 보다 깊은 곳에는 최초의 인간이 지닌 생명력 넘치는 얼굴을 되찾고자 하는 본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산의 암벽은 산악인들로 대표되는 인간이 문명으로 잃어버린 남성성 혹은 인간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넘어서야 하는 경계이자 전장(戰場)으로 읽힌다.


 

산과 달리 파리로 대변되는 문명은 인간을 도덕과 규범으로 길들인 곳이다. 대신 길들여진 인간에게 아늑함을 제공하고 쾌락과 명성 같은 피상적인 행복을 건넨다. 그 결과 많은 인간들이 순수한 열정을 잃어버렸다. 본질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된 이들에게 생겨난 공허함은 단지 랜드가 파리에서 만끽했던 물질적 보상 같은 다른 기호로 끊임없이 대체될 뿐이었다. 니콜을 비롯하여 파리에서 만난 이들에게서,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운전하던 차의 백미러를 통해 갑자기 늙어버린 얼굴을 발견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역시 문명 속에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소모된 삶이라는 질병에 걸린 셈이다. 이 늙어버린 얼굴이야말로 문명에 길들여진 최후의 인간이 지닌 모습일 것이다.

 


랜드는 산에서 추락하여 하반신 마비가 된 캐벗을 찾아간다. 그런데 그가 권총으로 자신과 캐벗을 상대로 러시안 룰렛을 감행한 까닭 역시 캐벗이 생명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최초의 인간이 지녔던 얼굴을 되찾을 수 있길 요구하는 메시지였을 테다. 동료의 얼굴에 생명력과 충만한 행복감이 다시 넘칠 수 있도록 말이다. 현대 문명이 거세해버린 남성성은 소설 앞부분에서 설터가 스치듯 설정해 두었던 D.H. 로런스의 사진과도 연결된다. 이 사진은 랜드와 동거하던 여인 루이즈가 잡지에서 오려 붙인 것이었다. 로런스의 소설에서 엿보이는 주제 의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산업 문명으로 손상을 입은 남성성의 문제, 그리고 회복에의 갈망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강요하고 억누른 인간들은 매일 같이 패배하고 바수어진 채, 뿌리 없이 부유하는 존재들이다. 랜드가 찌그러지고 못쓰게 된 차들을 취급하는 폐차장을 운영한다는 설정도 이 주제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폐차장으로 들어온 차들은 모두 거세된 남성성혹은 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잃은 문명인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바로 문명에 의해 내상을 입고, 생명력을 상실한 인간들 말이다.


 

높은 곳에 올랐다가 낮은 곳으로 추락한 랜드는 날개를 잃은 새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랜드는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다시금 고독과 태양을 즐기고 있다. 여기에 설터는 랜드가 뭔가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 병으로부터,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278)라고 씀으로써 그가 언젠가는 다시 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되찾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현재 그의 삶이 미식축구 선수가 실수로 떨어뜨린 펌블 같은 상태일 지라도, 그 공을 다시 집어들 수 있는 시간은 남아 있다. 랜드가 새 연인 폴라에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견디는 거예요. (...) 두려워 하지 말고.”(281)라고 한 말은, 꼰대스러운 남자가 여자에게 충고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독백이었다. 이 말은 그가 기자들에게 나는 (산이 아닌) 삶을 사랑합니다라고 했던 말과 다르지 않게 들린다. 희망은 여전히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1] "바위는 따뜻하고 낯설었으며, 아직 호락호락 자신을 내어주지 않았다."
"바위는 바다의 표면과 같아서, 일정하긴 하나 결코 똑같지는 않다. 동일한 루트를 오르는 두 명의 등반가가 있다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등반할 것이다. 그들의 능력은 같지 않고, 자신감도 욕망도 같지 않다."(32)

[2] "침대에 누운 그는 육체적인 차분함보다는 훨씬 더 깊은 어떤 것, 삶 자체의 고동 같은 것을 느꼈다. 확고한 기쁨이, 따뜻함과 충만한 행복감이 차올랐다.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47)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이 이보다 더 가치 있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았다."(57)


[3] "산들은 희고 거대했다."(85)

"그 산은 마치 거대한 오벨리스크 같다."(87)
: 거대하고 험난한 봉우리 드뤼에 대한 표현


[4] "등반하는 사람을 벽에 매달릴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믿음이다."(108)

[5] "산을 오를 때면 그의 내부에서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그의 야망은 예전에는 평범했으나 드뤼 이후 달라졌다.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행복이 그를 가득 채웠다. 자신의 삶을 찾은 것이었다."(120)

[6] "항상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이, 앞장서는 것이 운명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삶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 사람은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최초의 인간이다.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든 남보다 앞서 배운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힘을 주고 사람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188)

[7] "파리, 그곳은 랜드가 이미 떠나고 있는 거대한 터미널 같았다. (...) 그는 잠시 그들의 주의를 끌었던 것에 불과했다. (...) 파리는 그를 버렸다."(216)

[8] "인간의 얼굴은 항상 변하지만 완전히 완벽해 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 모습을 갖춘 것이다. 그것은 불변의 얼굴이다."(227)

[9] "그는 뭔가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 병으로부터,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278)

[10]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견디는 거예요. (...) 두려워 하지 말고."(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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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2-09-26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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