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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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자기만의 시간들

- 금지된 일기장

(Forbidden Notebook)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 (2025)

 




어느 영어 관련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기쁨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들 중 joy/pleasure/delight가 있는데, 이걸 구분할 수 있는지 물으셨다. 결론부터 말하면(내 기억에 남아 있는 대로 적어본다면) joy는 보편적이고 즉각적인 즐거움과 관련이 있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사이다를 마실 때 느끼는 쾌감 같은 기쁨을 떠올릴 수 있다. 이와 달리 pleasure는 보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다. 보다 목적성이 뚜렷하다고 할까.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하면서 얻는 쾌감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이어서 delight의 경우는 더 나아가 어떤 노력이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정의 결과 얻지는 보다 수행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있는 느낌이다. 따라서 delight이란 단어는 종교인이 고된 수행을 통해 얻는 희열에 더 가깝다. 이렇게 기쁨을 뜻하는 여러 단어들이 담고 있는 뉘앙스는 이렇게나 차이가 크다.


 

쿠바 대사였던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일기장을 읽으며 나는 이 기쁨을 의미하는 여러 단어들을 떠올렸다. 일기 형식의 이 소설에서 화자이자 43세의 주부 발레리아는 일기장을 산 소소한 기쁨(joy)에서 시작하여 몰래 일기 쓰는 시간에 대한 기쁨(pleasure),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기쁨(delight)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소박하면서도 놀라운 솜씨로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변화는 그녀가 우발적으로 산 일기장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을 위해 꽃을 사고 싶어 들어간 상점에서 우연히 검은 노트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이렇게 삶은 우연과 필연이 직조되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가족은 남편 미켈레, 법학도인 큰 아들 리카르도와 딸 미렐라로 이루어진 단란한 중산층이었다. 가족들 몰래 간직하게 된 노트를 자신만의 비밀로 하면서 발레리아의 생활에 변화도 생겼다. 23년간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자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노트의 존재가 가족에게 들킬세라 그녀는 2주 동안 한 글자도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도대체 일기 쓰기가 뭐라고 새벽 2시에 가족 몰래 고단한 몸을 일으켜 일기장을 펼치게 되었을까. 그렇다고 그녀가 더 행복해졌던가? 화자인 발레리아는 그렇지는 않다고 일기장에 고백한다. 삶에 비밀이 생기고, 새로운 활력도 생긴 듯 느껴지지만 부작용도 함께 발생했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즐거웠던 일만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괴로운 일을 상기하고, 그럼으로써 그 기억이 더 오래 남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그나마 다락방 한 구석이라도 있었으면 마음 편히 쓸 수도 있으련만, 그럴 호사까지 누릴 처지도 아니었다. 부엌에서 조심스럽게 써가는 일기일지언정 발레리아는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직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연으로 시작했으나 그녀는 일기를 쓰게 될 운명이었다.


 

발레리아에게 일기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자신에게 비밀을 만들어준 물건이다. 곧 그녀는 혼자서 무언가를 써서 채워 넣고 싶다는 욕구, 잠깐의 평화를 조금씩 욕망하게 되었다. 물론 23년이란 시간이 누르고 있는 관성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을 터였다. 처음에는 고단한 일상 외에는 쓸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저녁에 침대에 눕는 순간 밀려오는 피로감이 평안의 원천이다.”(35)라는 한 문장이 장황한 설명을 대신한다. 이 과정에서 발레리아는 자신의 처지와 존재에 대해 가격지심과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일기를 쓰기 전에 그녀는 항상 자신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 그리고 양육과 가정을 돌보는 일처럼 특별한 것이 있을까. 어쨌든 20세기 중반을 살아간 여성이 가정을 돌보는 관습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21세기 현재, 우리 사회의 가정은 어떤가. 여전히 엄마는 늘 고단한 존재. 이 소설에는 100여 년 전에 태어난 유럽 작가의 삶이 녹아 있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닿아 있는 듯하다. 발레리아의 일기장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못 다한 말들을 쓰는 빈 서판으로 기능하기도하고, 성인이 된 딸 사이의 긴장과 삐걱거리는 관계에 대해 불만과 고민을 성토하는 고해소가 되기도 했다. 일기장의 곳곳에서는 삶의 여러 국면들이 교차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삶에 따라오는 불안과 혼란스러움 까지도 번번이 등장하고 있다. “일요일 한낮의 적막에 싸인 빈집에 홀로 앉아 있자니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67)는 고백처럼,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일은 이전의 생활과는 다른 고독과 불안의 순간에 적응하는 일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몰래 쓰는 일기는 가족이 모두 잠든 시간, ‘여기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비로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을, 보다 주체적으로 향유하게 해주었다.

 


일기장의 새하얀 백지는 나를 매혹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혼자 거리를 거닐 때처럼 말이다. (...)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처음으로 나를 위해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94)


곧 발레리아에게 일기쓰기란, 그녀 자신을 규정하고 제약하는 관습의 경계를 넘어 그 바깥을 경험하게 하는 행위로 볼 수 도 있겠다. 목적지 없이 혼자 혼잡한 거리를 걸었던 경험을 떠올려 본다. 발걸음이 늦춰지고 주위의 시야가 눈에 들어온다. 발레리아도 일기를 쓰면서 때론 무의식적으로 침투하는 생각들을 따라 길을 잃기도 했을 테다. 오히려 그녀의 일기 쓰기는 의도적인 길 잃기로의 초대이기도 했다. 이처럼 실수로 산 일기장은 그녀에게 살아 있음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괴로운 기억과 마주해야 했지만 말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의 삶이 일기 쓰기 전과 후가 분명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일기를 씀으로써 일기를 떠 쓰고 싶은 욕망을 발견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계획도 떠올리게 된 것이다. 딸의 생일 파티 계획을 세우고 싶다는 소망과 더불어 처녀 시절처럼 들뜬 기분도 느낄 수 있게 된 것. 이런 내밀한 기쁨들은 기쁨의 단어 중에서 pleasure에 가깝지 않을까.


 

그럼에도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50)이라는 깨달음도 얻는다. 친정 엄마와 자신과의 관계를 떠올리다 딸 미렐라와의 삐걱거리는 관계를 돌아보며 딸의 행동을 좀 더 이해하는 길로도 나아간다. 특히 딸을 생각하며 쓴 기록은 시간의 세례를 받으며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과정이 보인다. -부인-엄마로서 한 여성의 삶이 성숙해가는 장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가족이 함께 모여 마치 하나가 된 듯한 순간을 만끽한 발레리아의 심정은 다름 아닌 delight의 감정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기쁨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아니었으므로.

 



저자 알바 데 세스페데스는 일기 형식의 이 소설을 통해, 마치 모노드라마 연극의 배우처럼 여성으로서의 삶을 내밀하게 구성해 놓았다. 비록 70여 년 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작품에 녹여 내었다. 현실의 삶에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도 하며 투옥되었던 작가로서, 그만큼 현실의 삶도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작가가 화자로 내세운 발레리아는 파시즘은 아니지만, 또 다른 사회의 관성에 글쓰기로 저항하는 인물이다. 작가의 또 다른 분신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발레리아에게 일기장은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었으며,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이기도 했다. 나아가 삶이라는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戰場)이기도 했다. 일기장은 과거의 시간 단위가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되며 연속성을 갖게 해주는 공간이기도 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가정을 지켜내면서도 자신의 존재 이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숭고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한 인간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삶의 시간들이 이토록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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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은 빛을 쫓지 않는다 - 대낮의 인간은 잘 모르는 한밤의 생태학
팀 블랙번 지음, 한시아 옮김 / 김영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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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의 연결성을 깨닫게 해주는 어둠의 선물들

- 나방은 빛을 쫓지 않는다


(원제: The Jewel Box: How Moths Illuminate Nature's Hidden Rules)


팀 블랙번(Tim Blackburn) 지음 | 한시아 옮김 [김영사] (2024)

 



책 한 권이 오로지 나방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나방은 빛을 쫓지 않는다를 읽었다. 저자인 팀 블랙번은 영국의 생태학자로, 주로 새의 생태를 연구하는 새 전문가다. 그에게 나방 관찰은 업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관심의 연장에서 비롯되었다. 나방 덫이 주는 경이로움과 기쁨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가족과 휴가나 여행을 갈 때에도 나방 덫 설치를 위해 계획을 짜고, 낮보다는 나방이 활동할 밤의 날씨를 더 자주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방에 관한 책이라고 하면서, 원서의 원제목은 왜 보석 상자’(Jewel Box)라고 되어 있을까. 책을 받아든 순간부터 제목이 궁금했다. 그가 보석 상자라고 부르는 대상은 저자의 생일 선물로 아내가 사준 나방 덫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아름다운 나비는 숱하게 많을 텐데, 저자는 왜 나방을 관찰하고 동정하는 일에 그토록 매력을 느끼고 진심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뜬금없이 나방 덫을 보석 상자라고 표현하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처음부터 여러 가지 궁금증을 안고 책을 펼쳤다. 나방은 보통 사람들에게 징그럽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곤충이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알게 되면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처럼, 연구자이기에 그에게는 나방이 그토록 사랑스러워 보였던 것일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리가 보아온 나비와 비교하면 선뜻 나방을 관찰하겠다고 손을 뻗는 일에는 주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책의 여러 곳에서 저자가 나방들을 얼마나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을지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책에 따르면 지금까지 인간에게 알려진 150만 종의 생물 가운데 10분의 1인 약 16만 종이 나방이라고 한다. 나비는 이 중에서 2만 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비에 보다 친근한 눈길을 보내곤 한다. 나비가 주로 낮에 활동하지만 대부분의 나방은 주로 밤에 활동하기 때문일까. 저자는 나방에 보다 관심을 가짐으로써 보이지 않는생명의 세계에 한 걸음 더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나방은 주위 환경 속에 숨어드는 재주를 지녔지만, 생태계의 복잡한 먹이 사슬에서 많은 동물의 먹이가 되어 생태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나비처럼 중요한 수분 매개자이기도 하다. 그것도 나비에 비해 압도적인 숫자로 생태계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당당히 맡고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나방도 있다. 오래 전 아시아 지역에서 사용된 옷감인 비단을 떠올려 보자. 비단은 바로 누에 나방의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어 만들어진 고치에서 얻어낸 옷감임을 기억해두자.


 

이쯤 되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아마추어 나방 애호가로서 나방에 대한 저자의 진심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도 남을 것이다. 인간은 주변 세계를 감지하는 인간 감각 영역의 범주와 본능에 따라 상대적으로 큰 생명체에 관심과 경외감을 느끼기 쉽다. 이를 테면 코끼리나 고래, 북극곰 같은 동물의 카리스마에 매혹되기 쉽다는 말이다. 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이기 때문이다. 반면 작고 숨어 있어 잘 보이지 않아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존재는 주의를 기울여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방에 진지한 관심을 보내는 저자의 애정 어린 마음을 책 속의 어디서든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나방을 주제로 한 생태학 교과서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생태학에 등장하는 기본 개념들이 나방의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되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소 딱딱한 설명도 있다. 어느 한 종의 나방 개체들로 이루어진 개체군과 또 다른 종의 개체군이 경쟁을 하는 경우나 각 개체군 내의 종내 경쟁을 하는 경우 등에 대한 집단의 운명을 가늠하는 집단의 역학을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선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보다 복잡한 연결고리(혹은 매개변수)가 얽혀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들이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오히려 뒤로 가서 8장과 9장을 먼저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8장은 생태학자로서 우리가 사는 생태계에 인간이 미친 영향과 생태계 보전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장의 바탕을 이루는 정서는 무엇보다 모든 생명체의 삶 나아가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결됨의 감각과 이 자연과의 연대를 스스로 끊어내고 있는 인간의 영향력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멸종률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현재 멸종의 속도는 공룡이 멸종한 대멸종을 제외하면 우리 예상보다 100-1000배쯤 빠르다. 지구 처지에서는 인간의 존재가 소행성과 충돌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403)


 

저자의 이런 표현을 읽다가 나 스스로도 뜨끔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대량의 멸종을 가져온 소행성의 역할이 이제는 인간이 미치는 영향과 다를 바 없다는 표현은 생각지도 못했던 표현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생태학자로서 절박한 인식을 지니고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특히나 그가 보석 상자라 부른 나방 덫이야말로, 그 안에 들어온 나방들을 동정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의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귀한 상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동시에 이 나방 덫은 그 안에 들어온 나방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영향, 인간의 흔적을 반영하는 시금석으로서도 기능하는 상자다. 그러므로 저자에게는 이 나방 덫에 들어온 나방들이야말로 형형색색으로 빛을 비추어주는 보석이었음은 의심할 수 없겠다.


 

특히 나방 덫을 놓던 시기는 바로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기였기에, 보석 상자를 설치하고 그 안의 나방들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는 매일의 위안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나방들은 결코 이 자연에 아무런 쓸모없이 그저 잉여의 존재로서 살아가는 생명체가 결코 아니다. 저자의 표현대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나방들은 어둠 속에서 펄럭이는 치유의 빛”(432)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모든 삶은 연결되어 있다.”(357)고 말할 때 이 에는 자연의 모든 존재로 확장하여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이 연결이 끊기지 않아야 (자연이/우리 모두가) 번영할 수 있다.”(422)라고 말하는 데, 이 말은 우리의 자연이 얼마나 연약한 실에 함께 매달려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말이기도 하다. 나방 덫에 들어와 저자의 손에 조심스럽게 놓인 나방에서 어떤 숭고함마저 느낄 수 있다면, 아마도 그건 손에 든 이 나방이 얼마나 오랜 세월 자연의 규칙과 냉혹한 우연의 시험대를 거쳐 살아남은 존재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처음 책을 펼칠 때 들었던 궁금증인, 왜 나방을 보석에까지 비유했을까를 다시 떠올려 본다. ‘밤이 남겨둔 작은 선물과도 같은 이들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에겐, 각각의 나방이야말로 바로 보석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책 속으로]

[1] "모든 삶은 연결되어 있다."
- P357

[2] "인간이 점령한 7세기 동안 뉴질랜드에서는 60종 이상의 새가 완전히 멸종되었는데, 대부분의 멸종 원인은 포식으로 인한 사망률 증가였다."
- P388

[3] "미국에서만 매년 집고양이와 들고양이가 10억 마리 이상의 새와 60억 마리 이상의 포유류를 죽이는 것으로 추산된다. 고양이는 최근 몇 세기 동안 전 세계적으로 약 50종의 멸종을 도왔다."
- P389

[4] "현재 멸종의 속도는 공룡이 멸종한 대멸종을 제외하면 우리 예상보다 100-1000배쯤 빠르다. 지구 처지에서는 인간의 존재가 소행성 충돌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 P403

[5] "서식지 파괴와 단편환, 살충제 살포, 도시화, 기후변화가 켜켜이 쌓여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로 내가 잡은(그리고 잡지 못한) 수많은 나방 종이 국지적 또는 전국적 멸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도 우리의 흔적은 묻어 있다."
- P408

[6] "자연은 모두 열결되어 있으며, 이 연결이 끊기지 않아야 번영할 수 있다."
- P422

[7] "나방 덫은 진정으로 어둠 속에 빛을 밝힌다. 그것은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말하는 경고의 빛이다."
- P425

[8] "과학자로서 첫 번째 역할은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질문을 하는 것이다."
- P426

[9] "그들의 존재는 자연의 규칙과 냉혹한 우연의 산물이며, 이러한 압력으로 빚어진 보석과도 같다. 에메랄드, 진주, 루비... 그렇게 아름다운 보석처럼 그들은 탄생했다. 그들의 존재는 모두 중요하다. 그들을 돌보기 위해 조금만 노력한다면, 우리 삶도 더 나아질 것이다."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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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새기는 빛 - 서경식 에세이 2011-2023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연립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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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교수가 떠나신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빈자리는 크게 느껴집니다. 훌륭한 후학들이 그 자리를 많이 메워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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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새입니까? -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
아르노 네바슈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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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인류의 모습

- 이것이 새입니까?

 


아르노 네바슈 글·그림 | 박재연 옮김 [바람북스] (2024)

 



영화 <록키> 시리즈 중에서 유명한 장면이 몇 가지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면은 록키가 긴 계단을 올라 계단 아래에 있는 풍경을 내려다보며 두 손을 번쩍 드는 장면이 아닐까. 그리스 신전을 닮은 건물에서 마치 승리의 여신 니케로부터 받은 승리의 신탁을 만끽하는 듯한 그 장면 말이다. 이 장면이 촬영된 곳은 필라델피아의 한 미술관이었다. 이 미술관을 떠올린 이유는, 젊은 시절 이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 작품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15년도 더 된 내 기억을 다시 열어 준 계기는 이것이 새입니까?라는 책이 마련해주었다. 이 책은 루마니아의 조각가 콩스탕탱 브랑쿠시가 연루된 재판을 주제로 한다. 그의 추상적인 조각 작품이 미국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책의 부제인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이 일러주듯, 이 재판에서는 브랑쿠시가 제작한 한 작품이 수입될 때 발생한 과세 문제가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문제의 본질은, 당대에 어느 작품을 혹은 무엇을 예술로 볼 것인가를 판단하는 문제와 본질적으로 닿아 있었다. 예술 작품을 수입하는 경우는 면세가 되지만, 일반 수입 제품이라면 판매 가격의 40%가 세금으로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던 중 갑자기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떠올렸던 이유는, 아무런 정보나 기대없이 방문했던 미술관에서 브랑쿠시의 작품 하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미술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키스 Kiss>라는 제목의 작품. 이 밋밋하고 네모난 조각품과의 만남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이었다. 미술관을 다니던 사람도 아니었던 내가 알 정도로 브랑쿠시의 <키스>라는 작품은 유명한 작품이다. 어쩌면 미술 필기 시험을 준비할 때 교과서에서 보고 인상 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브랑쿠시의 작품은 높이가 내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아담했다. 게다가 작품이 바닥에 바로 설치되어 있어서 대개는 시선을 수평선 언저리 혹은 그 위를 향하게 되는 공간에서 이 조각이 그리 눈에 띄지도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문외한의 눈에도 교과서에서 보았던 이 소박한 조각상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돌조각에 새겨진 요철만으로도 이렇듯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추억과 정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해보았던 것 같다. 이런 찰나가 미술관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작품과 감상자가 만나 상호작용하는 접점의 순간들이 아닌가 싶다.

 


바로 이 조각상의 주인공인 콩스탕탱 브랑쿠시가 그래픽 노블 형식의 이것이 새입니까?에서 되살아났다. 당대의 예술 담론 공간에서 화제이자 관심 인물이 되었던 재판이 소개가 되고 있다. 이 세기의 재판에서 논의의 중심이 된 그의 작품은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브랑쿠시로부터 구매한 <공간 속의 새 Bird in Space>라는 작품이었다. 스타이켄이 이 작품에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미국의 세관이 이 작품에 세금 4000달러를 청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해당 금액에 대한 관세율이 40%라고 나오니까, 이 재판이 있던 1926년 당시에 거의 1만 달러에 해당하는 대금을 지불하고, 추가로 4000달러(지금도 큰 돈이지만 100년 전인 당시에는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타이켄은 예술 작품으로 구매했기 때문에 당연히 면세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이 물건을 예술로 볼 것인가, 금속으로 제조된 일반 상품으로 볼 것인가를 따지는 재판이 되었다.

 


지금의 상식으로 볼 때 법원에서 어느 작품이 예술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상황은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이 재판에서 제기된 물음은 언젠가는 우리가 마주하게 될 상황이기도 했다. 예술의 역사를 좀 단순히 되돌아보면, 예술 사조는 기존의 것에 대한 개선에서 나아가 비판과 반동의 움직임을 통해 그 정의가 끊임없이 변하고 외연이 확장되어 온 것이 아닌가. 브랑쿠시의 재판은 당시에 이미 현대 미술사에 큰 전환을 가져왔던 마르셀 뒤샹의 작품 <Fountain>(1917)이 등장한지 9년이 지나는 시점이었다. 그러니 브랑쿠시 작품에 대한 재판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아직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새로 등장한 결과물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어떻게 평가해야할지를 마주하게 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것이 새입니까?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우선 브랑쿠시와 작품을 구입한 스타이켄 측이 법정에서 해당 작품이 지닌 닮음의 정도독창성을 입증하기를 요구받았다는 점이다. 판사들은 공간 속의 새라는 제목에서 이 작품이 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여러 창작자들을 불러 묻고 답변을 듣고자 했다. 물론 이 문제만으로도 이 문제는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아주 섬세하게 어느 새의 모습을 닮게 조작한 작품을 먼저 떠올려보자. 그리고 같은 새를 대상으로 새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조각 작품으로부터 점점 지워나가면 어떻게 될까? 추상성이 점차 증가하면 어느 순간에는 브랑쿠시의 작품처럼 새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로 전혀 닮지 않은 결과물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상과 얼마나 닮아야 예술작품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될 수 있을 텐데, 이 문제는 역설적으로 절대적이고 특정한 기준이 존재할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게 된다. 예술이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실천된 전통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 창작자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미메시스(모방)’의 전통이야말로 인류에게 오래 전해진 예술작품에 대한 기준이 되었다. 그러므로 대상을 실제와 닮게(완벽할 수는 없지만 불완전하게나마) 형상을 그려낼 수 있다면, 그 기술만으로도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 셈이다. 제욱시스라는 그리스 화가가 벽에 그린 포도나무에 새들이 진짜인줄 알고 내렸다가 벽에 부딪쳐 죽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 재판에서 변호사 측(스타이켄)에게 요구된 답변은, 해당 제품이 과연 유일무이한 원본인지를 입증해달라는 요구였다. 재판부는 브랑쿠시 작품의 독창성을 입증하기를 요구했던 셈이다. 복제될 수 없는 화가 고유의 색깔이 담겨있는 작품이 훌륭한 예술의 전제조건이었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금속 공예 장인들도 브랑쿠시의 금속 조각 작품을 거의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복제해낼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장인의 복제품과 브랑쿠시의 작품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무엇이 브랑쿠시의 작업물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것일까? 이 질문이 당시 재판이 해결해야 했던 질문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이쯤에서 이것이 새입니까?를 읽으며 함께 읽었던 책 한권을 떠올려 보자. 아서 단토의 <무엇이 예술인가 What Art Is>이란 제목의 책이다. 단토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도를 받았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읽기 쉽지 않았던 단토의 책에서 기억나는 내용을 가져와 보면, 그는 예술의 정체를 구현된 의미로 판별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다시 말해 예술의 정의는, 예술가(창작자)의 의도가 어떻게 물성화(구체화)되었는가를 파악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이해되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작품처럼, 상점에서 파는 제품으로서의 소변기와 뒤샹이 사인을 하여 눕혀 놓은 작품 은 외관상 구별이 불가능하다. 기성품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토가 평가하는 뒤샹의 공적은 그가 우리에게 대상을 보는 다른 방식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뒤샹의 후원과 격려를 받은(따라서 예술품 수집가 페기 구겐하임의 관심과 지원을 받았을 법한데) 브랑쿠시의 작품이 일으킨 예술의 정의에 대한 일련의 재판과 대중 앞에서의 담론 형성 과정은 당대 사회의 동시대인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예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 같다. 이것이 새입니까?를 읽으며 놀랐던 또 다른 한 가지는, 브랑쿠시의 작품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판결하기 위해 밟아간 공부 혹은 탐색의 과정들, 그리고 마침내 이 작품을 예술이라고 판결을 내리는 과정이었다. 물론 현재의 관점에서 당시의 판결 기준을 살펴보면 예술로 인정할만한 기준에 제약이 많고 부실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를테면, 복제품이 두 개를 초과하지 않는다는 조건부 원본의 제약이나, 예술 작품의 조건이 전문 예술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조건, 그리고 단순 기계 공정을 통한 제작이 아니라 수작업으로 제작해야 한다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지엽적인 조건들인 셈이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판사가 브랑쿠시의 작업물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는 판결로 이어진 결과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본 법정은 이 물품이 면세 대상임을 판결합니다.”(117)라는 결말이 정말 놀라웠다. 이 장면은 한 사회가 성숙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요건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사례로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이러한 과정이 인식과 지평을 넓혀가는 사회적 리터러시의 문제로서 읽힌 대목이었다.


 

예술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들을 되돌아 볼 때, 브랑쿠시의 재판과 아서 단토가 언급한 뒤샹및 앤디 워홀의 작업을 통해 한 가지 더 배운 점은 예술의 범주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는대상만을 예술의 범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름답지 않은 대상, 심지어 추하거나 역겨워 보이는 대상도 예술의 범주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통찰에 대해 동의할만한 여지가 있다면, 그건 인간 존재가 끊임없이 시도하고 만들어 온 대상들을 예술로 여길 수 있도록 경험과 사유의 폭을 확장시켜온 과정에 힘입은바 클 것 것이다. 이런 모습이라면 이후의 예술 역시 기존의 전통이 마주하거나 바라보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시각을 예술이 계속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해, 예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이다. 혹은 인간의 맹점을 새롭게 발견하여 비추어주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현대 미술을 개념 미술이라고 말하게 된 것은, ‘해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작품 감상에서 이제는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새로운 사유/개념을 발견하는 경험으로의 나아감을 이르는 말일 테다. 이 과정은 결코 직관적으로 다가오거나 이해되는 과정은 분명히 아니다. 현대 예술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 관람자가 예술을 접할 때 단토가 언급한 작품에 구현된 의도를 곧바로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 의도에 다가가는 과정에 예술의 본령이 있지 않을까. 작품에 투영된 예술가의 의도에 조응하는 감상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행위로서 말이다. 따라서 관람자로서의 우리는 더욱 구현된 의미의 모호함과 마주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브랑쿠시의 재판은 후손들에게 우리의 맹점을 발견하고 새롭게 바라보도록 길을 열어준 사건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Bird in Space' (콩스탕탱 브랑쿠시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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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2-23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좋아했는데요...^^
제 기억으로는 브랑쿠시의 작품이 통관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래서 예술품이 아닌 주방용품으로 통과했다는,,, 맞나요? 기억이 가물가물
암튼 이 책 궁금합니다

초란공 2024-12-24 00:13   좋아요 1 | URL
아, 이 작품을 이미 알고 계시군요! 책에서는 통관 과정에서 ‘주방용품’이라는 구채적인 언급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40%관세를 부과했다고 나오네요. 백년 전에 4000달러 세금이라면 어마어마한 액수일 것 같은데요!
 
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
전영애 지음, 최경은 정리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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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살린다: 앎에서 삶으로 향하는 공부

- 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

 

전영애 지음 | 최경은 정리 [문학동네] (2024)

 



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이하 괴테 할머니)을 읽는다. 책을 통해 저자인 괴테 할머니전영애 교수의 발자취를 여러 방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러 발자취 가운데 언제나 만나게 되는 모습이 있다. 무엇보다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간절함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괴테 할머니를 이해하려면 그의 배움과 앎에 대한 간절함에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무언가에 대한 간절함은 결핍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며,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우선 저자는 한결같은 간절함으로 평생 공부해 왔다. 그에게 공부란 무엇이었을까? 짐작컨대 공부가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책을 통한 지식을 얻는 행위보다 넓은 의미로 이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괴테 할머니는, 공부란 결국 삶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것”(22)이었노라 말한다. 진실로 살아있다는 것은 곧 부단히 공부하는 일이라는 말로 들렸다. 이 행위가 모여 한 개인에게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으며, 그가 마주하게 된 세계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던 셈이다.


 

뿐만아니라 저자가 실천해 온 삶의 태도는 괴테에 빚진 바가 크다. 괴테가 삶을 대했던 태도는 저자가 실천해온 삶의 행보마다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괴테 할머니의 소개에 따르면, 괴테는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열어 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괴테 할머니는 이렇게 일러준다. 놀라며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려 있음을 인간이 지닌 최상의 부분으로 보는 것이지요. 괴테는 이를 파우스트가 가진 추동력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29) 괴테가 얼마나 열린 인간이었는지는, 그가 관심을 갖고 평생 공부한 분야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괴테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분야만 해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학, 회화, 색채론, 식물학, 광물학 등이다. 무엇보다 괴테의 삶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호기심이란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워하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괴테는 여기에서 나아가 자신의 결핍을 자각한 상태로 둔 적이 없었던 것같다. 자신의 결핍을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차이일지 모르지만, 무엇보다 평생 자신의 부족함을 부단히 극복해 갔던 초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였다면 모든 걸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며 자기합리화를 했을 법한데 말이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여우의 신포도와 같은 상황으로 곧잘 돌아가곤 하는 나의 습관을 돌아보게 한다. 이는 우리가 늘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괴테 할머니는 나의 마음을 이미 들여다보셨는지, 괴테의 말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준비하지 않고, 기다려내지 않고, 쟁취하지 않았던 좋은 것과 마주친 일은 나의 인생행로에는 없습니다.”(49)


 

괴테는 이미 청년 시절부터 그냥 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그 인내와 기다림의 가치를 일찍 이해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내 독서 감상이 다소 자기계발서 같은 교훈 찾기가 되어버린 감이 있지만, 괴테라는 인물의 태도와 행보를 볼 때마다 항상 배울만한 점을 찾을 수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나의 삶은 언제나 결핍투성이였지만, 대부분 기다려내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일깨워준다.


 

견뎌내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극복해 내는 일’, 괴테의 태도는 나의 삶뿐만 아니라 책읽기도 되돌아보게 한다. 책을 막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시기에는 읽은 책이 너무 없어서 그저 많이 읽어보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책만많이 읽는다고 그 사람이 건전한 상식과 윤리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었다고 말한 명사들 중에 어떠한 형태의 권위나 권력의 논리에 동조하거나 심지어 혐오에 앞장선 이들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책읽기란 자신의 결핍(타인에게 보여지는 욕망)을 메워주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자격처럼 여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본래텍스트는 그 자체로 엘리트주의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에게 애초에 자연스러운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텍스트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텍스트에 익숙한 능력은 돈과 다를 바 없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이른바 책읽기혹은 독서행위를 통해 축적된 지식이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권위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독서 혹은 독서를 통한 지식이 이른바 물신화된 사례를 여러 차례 보고 있다.


 

이와 달리, 괴테 할머니가 소개하는 괴테의 모습에서 공부는 책읽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공부가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괴테의 공부는 분명히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그의 지향점이 아니었을까. 그에게는 이것이 인생의 우선순위였던 것 같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더라도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곳, 익숙하고 안락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보고 느끼며 살아봐야 겠다는 결심으로 마차에 올랐을 한 서른일곱의 괴테를 생각해 보았다. 삶의 관성을 과감히 물리친 청년 괴테의 모습을 말이다. 괴테 할머니는 괴테의 선택을 기존 규범으로부터의 떠남’(98)이라고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괴테 할머니에서 저자가 소개한 괴테의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표현을 꼽으라면, “리벤 벨렙트 Lieben belebt."(50)를 들 수 있겠다. 이 문장은 사랑이 살린다는 뜻이다. 두 단어로 이루어진 이 간결한 문장은 죽어 있는 것을 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괴테가 60여 년 간 손보았던 작품 파우스트는 결국 우리의 삶에 사랑이 남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표현은 80대의 괴테가 인간을 바라볼 때 느꼈던 마음가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때론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를 내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80대의 대문호가 인간을 바라본 시선에는 분명 사랑이 담겨 있었으리라. 괴테의 사랑이 살린다라는 표현은 한강 작가의 감동적인 노벨상 수락 연설을 또다시 떠오르게 해주었다. 대문호가 남기고 간 작품들을 관통하는 배움은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느꼈다. 한강의 연설을 듣다보면 그는 자신의 어느 작품에서든 기도하듯 사랑을 담고자 했던 작가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잔인할 수 있는 인간에게서 여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다니 말이다. 괴테 할머니가 보여준 괴테의 삶은 모두 앎에 대한 간절함에서 출발한 공부가 결국 삶으로,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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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19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작년인가? TV에서 전영애 교수 다큐멘터리 본 적이 있는데 꽤 인상적이었죠.
자그마하신 분이 낮에는 땅을 일구고 밤에는 번역하시고.
항상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궁금하더라구요.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나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