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말일인 어제 가족 모임을 다녀와서 일찍 잠들었더니

새해를 맞이했네요.

 

새벽에 잠이 깼는데, 최근에 접해본 시들에 대한 해묵은(?) 감상이

남아있더랍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세 명의 시 몇 가지를 읽고

이들로부터 남겨진 이미지를 떠올려보니 '슬픔'이란 녀석이 남아있었습니다.

 

 

 

 

 

 

 

 

 

 

 

 

 

 

 

유금은 제게 생소한 이름이나 박지원이 중심이 된 북학파 모임의 멤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이름을 '유연'에서 '유금(柳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일명 책바보라 불리는 간서치 이덕무는 이제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유금과 같이 북학파 일원이었으며, 유금과 같이 서얼출신으로 관직에 진출하는데 차별과 한계를 안고 있던 인물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설명이 더 필요없는 분이지만, 단순히 경세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폭넓은 저술과 훌륭한 시들을 남긴 분인 것 같습니다. 상업과 기술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북학파와 달리, 민생 경제와 농업에 주된 관심을 갖고 뜻을 펼치려 했던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고전100선은 들고다니기 가벼운 책들이지만, 연구자/번역자들이 저같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각 인물들이 남긴 시와 산문 중에서 선정하여 작품의 맛을 보여주는 큰 프로젝트의 결과물로서 현재 진행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세 권에 나온 저자들의 시 몇 소절만으로 일반화를 하거나 몇 단어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만, 유금과 이덕무, 정약용 선생의 삶과 이들의 시 몇 구절에서 보이는 '슬픔'의 감정이 주는, 혹은 제 안에 머무는 이미지는 모두 같은 '슬픔'의 감정이 아니었네요. 이 세 사람의 시에서 보이는 '슬픔'은 그 슬픔의 결이 서로 다르더라는 겁니다.

 

 

유금의 시로부터는 시인의 맑고 정갈한 인품이 느껴지면서도, 때론 자신의 출신과 가난에 대한 힘겨움의 감정, 극복할 길 없는 '슬픔'의 감정이 가득 느껴집니다. 바닥에 주저앉기 직전의 그런 절망감 같은 것들말이죠. '깊은 절망감이 담긴 슬픔'  

 

이덕무의 시 몇 구절을 읽으면 극심한 가난과 신분이라는 벽에 부딪히는 현실에서도 '의연한 느낌의 슬픔'이란게 있습니다.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수리도 못하고 비를 맞으며 지내도 책을 읽고, 자조하면서도 때론 유머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 집안으로 바람이 들어와 <논어> 한 권을 뽑아 바람막이를 하고, <한서>로 이불을 하면서 스스로 멋진 생각이라 자화자찬하는 이가 바로 간서치 이덕무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 가지고 있던 책 <맹자>를 팔아 배부르게 밥을 지어먹고 친구 유득공에게 자랑하던 인물. 역시 오래 굶고 있던 유득공은 한 술을 더 떠 자신의 <춘추좌씨전>을 팔아 남은 돈으로 이덕무에게 술을 대접하죠. 그러면서 '맹자가 자신에게 밥을 지어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권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덕무의 시와 산문에서 받은 인상은 의연함이 함께하는 슬픔이나 여기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온기가 느껴진다는 거지요.

 

정약용의 시와 산문에서는 아무래도 20년에 가까운 유배생활에서 묻어나는 시인의 체험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집안 가족들이 참수를 당하고, 유배를 가는 극한 삶의 조건과 그로인해 가족과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시인의 '그리움과 회한,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담긴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10대 시절에 결혼하여 결혼 60주년을 맞는 바로 그 날, 가족과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한 정약용 선생의 삶에서도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비애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중년의 나이가 되다보니 산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혼자 밤에 깨어있거나, 정신없이 들어찬 퇴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슬픔의 감정이 몰려오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그래도 이덕무의 '슬픔'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는 유금이나 정약용 선생의 '슬픔'에 공감하거나 위안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떠올리는 슬픔은 삶 속에서 스스로 위안을 찾고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이덕무의 '슬픔'인 것 같습니다. 이덕무의 '슬픔'이 떠오르고, 그 슬픔이 위안도 되고 힘이 되기도 합니다.

 

 

옛 사람들의 시를 보는데 위안을 얻을지는 몰랐습니다.

 

2019년에는 또 다른 고전 시들을 만나보길 기대합니다.

옛 시인들의 시와 산문을 번역한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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