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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톨스토이 지음 (42)

고통과 실패에서 배우다

 

 

인간에게는 고통과 병이 필요하다.

인간은 고통을 이해하면서

육체가 일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통과 실패가 없다면 기쁨, 행복, 성공을

무엇과 비교하겠는가.

 

인간은 작은 문제들로 균형을 잃는다.

반대로 커다란 문제는

인간을 영혼의 삶으로 인도한다.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는 톨스토이가 말년에 소설쓰기를 그만두고 명상을 하며 써낸 모음집이라고 한다. 항생제가 없던 톨스토이의 시대에 그 자신도 폐렴과 장티푸스로 몇 달 간 사경을 헤맨경험이 있다고 하지만, ‘인간에게 고통과 병이 필요하다’는 말은 가족 중에 누군가 큰 병을 겪고 떠나 보낸 사람이나 암과 같은 큰 병을 선고 받은 사람의 가족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게 다가온다. 내 친구, 친구의 부모님 중에 암으로 고통받고 우리를 떠난 사람이 있기에 톨스토이의 말에 수긍은 하지만 내 가슴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을 간호하느라 병원에서 몇 달이라도 지내본 사람들은 무상함을 많이 느끼게 된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아프구나 하는 사실을 환기할 때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곤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우리는 너무나 사소한 것들에 큰 의미부여를 하고있다라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이 사소한 것들에 우리 삶의 여정이 잠시 빗나가거나 흔들리기도한다. 하지만 한 개인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알았음을 알게된다면, 사소한 문제들은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톨스토이의 말대로 진실로 영혼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할 것이다. 친구의 부모님이 큰 병을 진단 받은 날,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쿵’하는 충격을 받았다. 거대한 자연불변의 법칙 앞에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겸손해짐을 느낀다. 아울러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라고 썼던 나짐 히크메트의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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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를 권함>

야마무라 오사무 지음/송태욱 옮김, 샨티, 2003, 118-119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 114)

월요일 아침

  월요일 아침, 새 책을 펼친다. 통근 전철 안이다. 새 책은 월요일 아침에 가장 잘 어울린다. 책 속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고 새로운 풍경이 있다. 지금까지 몰랐던 관계성의 세계가 있다. 그 한 권의 책은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도 읽고, 집에 돌아가 내 방 안에서도 읽고, 그렇게 해서 주말까지는 다 읽는다. 다시 말해 내 독서는 주 단위이다. 일주일에 한 권, 따라서 한 달에 네다섯 권 정도를 읽게 된다.

   특별히 일주일에 한 권 읽기로 정해 놓은 것은 아니다. 하루에 세 번 식사하는 것이 딱 정해진 일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간이 돌고 돌아 아침에서 낮으로, 다시 어스름한 저녁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한 권의 책을 새로운 주가 시작될 때 읽기 시작하여 요일이 돌아 한 주가 끝나는 지점에 다 읽는 것이 내 생활에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정말 그뿐이다.

   읽는 양과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표준적인 척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다독가들의 독서량에서 보면 일주일에 한 권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터이다. 스기우라 민페이는 나이가 들고 병 등으로 체력이 쇠약해져서, 결국 한 달에 1만쪽, 즉 권수로 해서 평균 34-35권 내지 38-39을 단념하고 새로이 한 달에 열 권 이상이라는 할당량을 정했다. 이제 곧 일흔 살이 되어갈 무렵의 일이었다. 이것과 비교해 보아도 내 분량은 그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일주일에 몇 권, 한 달에 몇 권, 일 년에 몇 권 읽으면 표준이고 그 이상은 다독, 그 이하는 과독(寡讀)에 해당한다는 말도 아니다. 누구나 자기 생활에 고유한 시간의 사이클이 있게 마련이다. 생활의 시간 사이클에 의해 책을 읽는 방법은 저절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생활보다 먼저 독서가 있고 생활이 그 뒤를 좇아가는 것이 아니다.

   엔도 류키치는 생활의 어떤 일보다 독서를 우선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엔도 류키치는 자신의 저서인 <독서법>밤에서 아침으로 걸치자라고 쓰고 있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자려고 할 때는 베개 위에 책을 놓고서 그 펼친 쪽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좋다. 전등을 끄고 책을 덮었다면 그 책에 대해 생각하자. 이내 졸음이 와 잠이 들고 말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곧바로 그 책을 다시 펼쳐 읽자. 그것이 밤에서 아침으로 걸치자의 의미이다.

 

 

 

 

나는 여기에 발췌한 부분에서 새 책은 월요일 아침에 가장 잘 어울린다.라는 대목이 너무나 맘에 들었다. 새 책을 들고 첫 장을 읽어 나갈 때의 설레임은 발걸음이 무거운 월요일의 출근길에 새로운 활력을 준다. 새 책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큰 것이다. 월요일 아침에는 박민규 작가의 유머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유머(진지하고 점잖아 보이는 글 속에 반전이 있는 유머)가 담긴 문장을 만나면 출근길이 더 즐겁다. 나 혼자 킥킥 거리며 가기도 한다. 어려운 책보다도 바로 이런 글들을 만날 것 같은 기대감이 월요일 아침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가 아닐까.

   나는 작년에 거의 매일 야근을 하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지하철에서 책을 많이 보게 된 것 같다. 버스 안은 대개 불빛이 어둡고, 이리저리 많이 흔들리므로 버스 안에서 무언가를 읽으면 멀미가 난다. 하지만 지하철 안은 밝고, 적어도 나에게는 책을 읽을 때 멀미가 나지 않아 나에게 잠깐 짬을 내어 책을 읽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버스를 타는 것보다는 (적어도 혼자 다닐 때에는) 지하철을 주로 이용한다. 그리하여 지하철에서 주로 책읽기를 하여 작년에 80권정도의 책을 읽은 것 같다. 물론 간단한 그림책, 사진책을 제외해도 나름 진지한 주제의 책들을 50권은 넘게 읽은 셈이다. 작년에는 태어나서 처음 1년에 20권 넘게 읽은 셈이다! 야마무라 오사무도 장석주 시인도 지적하듯이 자투리시간을 잘만 활용해도 일년에 50권은 읽을 수 있다는 말은 내 경험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읽은 책의 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젊은 시절부터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해온 장석주 시인처럼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매일 2~3권의 책을 읽을 재간은 없다. 나에게 맞는 독서 스타일은 그저 꾸준하게 읽고, 의미를 곱씹어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이 될 것이다. 책에 메모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면 주로 스마트폰을 꺼내 페이지와 주목할 부분을 간단히 메모하거나, 그 때 문든 떠오른 생각들을 잊지않기위해 메모한다. 그 외에는 주욱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혹은 책의 성격에따라 지하철에서 집중이 안되거나 이해가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경우에는 잠시 책을 덮고, 눈을 쉬거나 이해가 잘 안되었던 부분에대해 생각을 하곤한다. 책을 덮고 스마트폰을 하지 않은 경우, 지하철에서는 옆 사람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는 줄 알고 나를 처다보는 경우가 많아 민망하다. 그러면 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거나, 어떤 광고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딴 생각을 하곤 한다.

   참고로 나는 일본 지식인들의 어떤 방법, 기술들을 얘기하는 부분은 좀더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읽는다. 이들은 각자 개인이 선택하여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여기에 오래동안 천착해왔기때문에 나에게 잘 맞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 이들이 권하는 어떤 방법(혹은 여기에 나오는 독서술마져도)이 나에게 적절하지 않은이상, 나에게는 잘 맞지 않는 옷처럼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의 편견인지도 모르나, 일본 지식인들의 경우 나에게 적용할만한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좀더 비판적으로 이들의 조언을 살펴보되 나에게 맞는 방법을 따로 찾아보려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읽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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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중에서

레프 톨스토이 지음

'손님' (23면)

 

 

우리가 가진 생각은 손님과 같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손님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나쁜 생각을 몰아내고

좋은 생각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힘은 생각에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많은 악이 사라질 것이다.

 

감정은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난다.

하지만 생각은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진 생각이

모든 거의 핵심이다.

 

 

 

- 여기서는 두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생각의 힘감정이라는 것. 우선 우리의 힘이 생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많은 악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 말에서 한나 아렌트가 기록하고 평한 아이히만의 재판을 떠올린다. 히틀러 밑에서 그의 명령을 충직하게 실행에 옮긴 아이히만은 결국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주범이 되었다. 아렌트는 평범한 악의 실체인 아이히만에게 생각하지않은 죄를 묻는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조건, 사물, 지식들은 가치 중립적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우리가 소망하는 인문적 교양이라는 것도 인간이라는 가치가 우선적으로 놓여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지능적이고 교활환 착취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우선하여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한편 감정이라는 것은 외부의 상황이나 자극에대하여 우리의 신체가 반응하는 것처럼 때에따라서는 나의 의지감정을 분리시켜 바라볼 줄 알아야할 것 같다. 곧 나의 감정은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일어난 어떤 감정, 예컨대 분노, 공포, 우울함의 감정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겨나므로 나 스스로 이를 바라보고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육체의 자유가 아니더라도 독립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은 익숙한 대상에 대해, 기본의 권위에 의문을 던져보는 일이 자유로운 인간으로되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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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26)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우리 모두 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리라.

30분 후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삶을 보면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하루의 일과와 같다.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것은 죽음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행동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108-109)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라

 

타오르는 촛불이 초를 녹이듯

우리 영혼의 삶은 육체를 스러지게 한다.

육체가 영혼의 불꽃에

완전히 타버리면 죽음이 찾아온다.

 

삶이 선하다면 죽음 역시 선하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와 세상, 우리와 시간 사이의 연결을 끊어놓는다.

죽음 앞에서

미래에 대한 질문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조만간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오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잠잘 준비, 겨울 날 준비는 하면서

죽을 준비를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올바로 살지 못하여

삶의 법을 깨뜨린 사람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삶은 진지하고 즐거우리라.

 

 

- 생의 말년에 죽음에 임박했던 톨스토이가 남긴 진실한 지혜들의 모음인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글 두 꼭지를 모았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을 처음 본 날 학교 복도에 있던 선배들의 학창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하던 말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이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주문은 젊은 날의 방종을 눈감아주는 명분이 되지 않지만 우리가 현재를 살 수 있도록 깨어있게해준다. 장석주 시인은 죽음은 삶의 순간들을 빛나게 만들며,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삶을 썩지 않게 만드는 천연 방부제다라고 말했다(<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 59). 죽음은 우리의 삶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일은 모든 예술의 출발점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예술 활동이란 결국 예술가가 진실로 자신이 되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과정인 까닭이다. 곧 모든 가식과 거짓이 배제된 순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오늘 내가 더 진지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내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자각을 하면 된다고 톨스토이는 충고하고 있다. 죽음이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해준다는 말을 곱씹어본다.

   전호근 선생의 <한국철학사>(746)에 보면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을 소개하는 장이 나온다. 일본 무교회주의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 아래서 함석헌 선생과 함께 공부한 적이 있는 유영모 선생은 20대 초반에 톨스토이의 저작을 읽고 큰 영향을 받은 정황이 보인다. 톨스토이가 만년에 스스로의 삶을 마무리짓기위해 가출하여 10일 만에 어느 기차 역에서 삶을 마감한 것처럼, 유영모 선생도 1977 87세가 되던 해 6월에 가출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사흘 만에 순경에게 업혀서 집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듯이, 스콧 니어링의 경우 100세가 되던 해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굶어 죽는 방식을 택했다.

   현대의 죽음은 자신의 의지대로, 존엄을 지닌 채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가버렸다. 현대 사회는 사람의 죽음을 기피하게 되었다.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숭고한 권리를 빼앗아가버렸다. 현대인은 고가의 장비에 둘러싸여 생명을 연장하며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삶을 마감하게되었다. 삶의 유한성, 곧 일회성은 영원히 반복되는 비애감의 원천이 될 것이나 우리의 고결한 삶을 마무리하고 우리의 인생을 완성시키는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죽을 것임을 기억함으로써 지금 여기 나의 삶은 더욱 충만해진다. 오늘은 나를 더 겸손해지게끔 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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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멋진 물장이라면> 장석주 쓰고 엮음, 50면에서 발췌

 

(50) 물살을, 삶을 헤치는 법

 

세상은 언제나 내가 두렵게 그 앞에 섰던 큰물 같았다. 두려우면서도 세차게 마음을 끌며 나를, 우리를 불렀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며 내 스스로 헤쳐가야 하는 곳이자, 헤쳐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모질게 공부만 하는 작고 여린 딸이 안쓰럽고 헤어질 때는 서운하다. 그러나 든든하다. 그렇게 어렸을 적에도 제법 큰 강 하나를 건너보았는데,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무슨 강을 이제 어떻게든 못 건너겠는가.

- 전영애, <인생을 배우다>, 청림출판, 2014, 45

 

 

 

- 장석주 시인은 이 문장에 덧붙인다. '인생이란 기어코 건너야 할 큰 강물 같다. 누군가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강물에 뛰어들어 건너간다. 이때 두려움이란 용기 부족이 아니라 제 인생에 대한 자존과 사랑의 부족에서 생겨난 감정이다. 제 인생을 끔찍이 사랑한다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법이다.'

 

- 이 문장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 것인가. 나는 거대한 강물에 무기력하게 휩쓸려가는 꿈을 자주 꾸곤했다. 그것은 두려움과 무기력으로 물의 거대한 흐름 속에 나를 온전히 맡긴 채 끝도없이 흘러가던 꿈이었다. 잠에서 깨면 언제나 허무하고 기진맥진하였다. 두려움과 대면하여 정면돌파하는 마음가짐이 나에겐 부족했던 모양이다. 전영애 교수는 쉽없이 공부하고 노력하시는 분으로 알고있다. 나약한 내 삶의 태도를 꾸짖음과 동시에 격려하는 문장이란 생각으로 나의 필사하기를 이 문장으로 시작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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