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버거(John Berger) 지음 | 김현우 옮김 | 열화당

 

 

[I] 작가의 글쓰기

노()작가의 문장은 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왔다. 시작한다. 80 가까이 글을 써온 버거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글쓰기 활동은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활동 덕분에 나는 의미를 찾고, 계속할 있었다.라고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버거가 발표한 다른 책들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담긴 작가의 글쓰기는 흐르듯 자연스럽고 매우 직관적이다. 어떤 외부의 소재로부터 글을 시작하여 곧바로 소재가 이어주는 현상/기억 등의 내면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다시 어느 순간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곤한다. 버거는 외부의 소재/사물이 내면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하고 소재와 자신의 내면이 나누는 담소를 듣는 것같다.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에서 저자는 순간을 인식하며 현재와 하나가 된다. 버거의 문장은 차분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함축적이다. 

 

책의 곳곳에서 버거는 오랜 지인들의 죽음을 계기로, 사망한 지인들의 장례식에 찾아가며 이들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고 이들과의 추억을 소환한다. 따라서 저자 자신의 오랜 지인을 기억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버거의 지인들은 평생지기들이다. 보통이 30 정도인 듯하고, 사진가 모르처럼 50 지기도 있다. 책은 현재를 충실하고 온전하게 사는 버거의 방식 또한 살펴볼 있다. 개인의 제한적인 시간성 속에서 망각에 저항하고영원을 사는 법이 담겨있는 것이다. 

 

 

[II] 자연의 텍스트 읽기 - 드로잉

버거는 진정한 번역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글을 써내려 가지만 어느 번역 맥락은 언어의 문제에서 벗어나 본인의 관심사인 드로잉으로 옮겨간다. ‘외양이라는 텍스트를 풀어내어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던 그는 자연의 외양들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일이 가능할까”(104)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는 저자의 오랜 지인의 모습이나, 채플린과 같은 이의 초상 또는 그림의 부분을 보고 거칠게 스케치한 그림과 장미를 비롯한 여러 식물들의 그림들이 실려있다.

 

   버거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텍스트 번역의 과정과 다르지 않는 듯하다. 아무리 손기술이 좋은 화가도 자연의 모습을 동일하게 그리는 것은 불가능한데, 화가는 자연을 대상화하여 인지한 화가에게 떠오른 심상, 형성된 이미지를 드러내 보이는 작업을 뿐이다.  

 

   이미지를 이야기 , 작가 자신이 그린 붓꽃 그림과 사진작가 타토 올리바스(Tato Olivas) 버거의 편지에 대한 답신으로 무용수 사라 바라스(sara Baras) 사진을 보내온 장면은 무척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버거의 붓꽃 그림과 무용수의 사진을 순간 소름이 돋았다. 책에 나온 내용을 보니 버거 자신도 사진작가 타토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자신의 눈을 믿을 없었다라고 하였다. 사진에 포착된 무용수의 역동적인 동작이 주는 에너지와 붓꽃 그림에서 보여주는 동적 형태가 주는 정서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사진과 그림을 보면 때서야 버거의 설명이 더욱 실감나게 이해된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붓꽃 그림과 무용수 사진) 무한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리듬의 관점에서는 함께 움직이고 있다.”(81)

 

   이제야 비로소 작가가 간결하게 모든 시대, 모든 춤의 모태가 동작’(81)이란 표현이 스스로 맥락을 드러내고 정당성을 획득한다.

 

 

[III] 신자유주의 비판

아흔에 가까웠던 작가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변 머나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관심을 갖는다. 책의 곳곳에서 현대인들의 삶의 영원히 바꿔버린 투기 금융자본주의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날카롭게 지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투기 금융 자본은 정부를 노예 주인처럼 활용하고, 세계 미디어를 마약 공급상처럼 활용한다. 폭정의 유일한 목표는 이윤과 자본 축적인데, 이를 위해 사람들에게 소란하고, 위태롭고, 매정하고, 설명할 없는 세계관 혹은 삶의 패턴을 강요한다.”(35)

 

미국이 이라크에 있는 자신들의 정유 시설을 지키기 위해 삼백 개가 넘는 부대를 은밀히 파병했다는 소식”(56)

 

버거는 현대의 금융 자본주의가 야기한 폭력성에도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작가였다. 대한민국에서 1997 외환위기를 통해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경험한 기억을 떠오려보면, 작가는 현대사회의 본질을 명료한 언어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 1990년대를 지나며 세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져 버렸다. 시기에 대리인들, 로비스트들, 다국적 투기 자본이 지구촌의 길을 정하는 최고 결정권자가 되었다. 그게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독단은 전통적인 정치학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 의회 정치인들은 무력해졌고, 그들이 있는 것이라고는 말뿐이다. 미디어도 똑같이 공허하고 언어를 이어받았다. 유럽, 국제적 연대, 독립 같은 용어는 쓸모없고, 내용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국제적인 뉴스를 전할 약어들을 남발하는 역시, 내용 없음을 향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60-61)

 

모든 정치적인 활동의 노력이 투기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버릴 위기에 처해 있음에 노()예술가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신을 전문적인 작가라기 보다는 그저 곳을 메우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고백과 비교하면 얼마나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새삼 발견하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면 버거에게 글쓰기란 의미를 찾도록도와주는 수단으로써, 이는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항상 깨어있게 해주며 망각에 저항하도록 해주는 평생의 지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정부 관료들만을 위한 자유,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 다수는 아니더라도 -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언제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여야 한다."(16면)
-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 중에서

"(고아는) 혼자 살아가는 프리랜서가 된다." (27면)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57면)
- 작가 자신이 수영을 하다 하늘에 떠 있는 ‘새털구름‘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과 관련하여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 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10면)

본인의 드로잉과 관련하여

"드로잉을 할 때, 나는 외양이라는 텍스트를 풀어내서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 외양이라는 텍스트는 이미 나의 모국어 안에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9면)

"자연의 외양들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일이 가능할까"(104면)



신자유주의 비판

"마찬가지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생겨나는, 또한 점점 늘어나는 인류의 가난과 계속되고 있는 지구에 대한 착취도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그 유토피아는 자유시장방식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작동할 때 보장되는 것이다. 그건, 밀턴 프리드먼의 말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넥타이 색깔을 놓고 투표하는’ 세상이다."(89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투기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미디어는 끊임없이 정보를 폭탄처럼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 정보들은 대부분 계획적인 교란에 불과하며, 진실로부터, 본질적이고 다급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들이다. 정보들은 대부분 한때 정치라고 불리던 활동에 관한 것이지만, 정치는 이미 주식 거래인과 은행의 로비를 앞세운 전 세계적 투기 자본의 독재로 대체되어 버렸다."(104-5면)

신자유주의 사회의 ‘언어‘ 비판

"여기에 미디어가 세상을 전달하고 분류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더해진다. 그것은 전문 경영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나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그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율을 이야기하고, 여론조사의 변동이나 실험률, 성장률, 증가하는 채무, 이산화탄소 측정치 등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숫자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목소리지만 삶이나 고통받는 신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후회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새털구름은 북족, 수영장의 끝을 향해 흘러간다. 나는 물에 뜬 채로 가만히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구름을 지켜보며, 눈으로 그 넘실거리는 모양을 기록한다. 그때 풍경이 보여 주는 확신이 변한다. 변화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그 변화는 분명해지고, 내가 받는 확신도 더 깊어진다. 하얀 새털구름의 털들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물 위에 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본다.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로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 (56-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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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같기도하고 아포리즘 같기도 한 장석주 시인의 산문집 <달과 물안개>를 우연히 중고서점에서 만났다. 게다가 초판 1쇄. 운수좋은 날.


 시인의 산문을 읽으며 문득 문득 떠오른 생각들. 게으른 필사. 딴 생각하던 짓의 흔적을 간단히 메모해둔다. 분명 다음 날 다시 읽으면 부끄러워 삭제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이 어느 책에서 언급했던가. '졸렬한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로 끄적여 보겠다.


산문집은 시인의 내밀한 속내와 삶을 너무나 솔직하게 폭로해낸다. 

'늘 탕기보다 먼저 타는' 가슴을 가진 시인.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의 흔적을 밤새 따라가보았다.

'그건 순전히 당신 탓이다'라고 시인이 말한 후의 공백은 

시인의 삶의 고단함과 짧은 후회의 순간을 대변하는 듯하다.


(시인의 팔월)

시인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달로 팔월을 꼽는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팔월의 새벽'을 제일로 치는 모양이다.

시인은 '팔월의 새벽'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깨끗하게 빨아 말린 뒤 방금 다림질 한 면셔츠를 입었을 때처럼 기분이 좋다."(39면)라고 말이다.


이 좋은 계절, 좋은 시간에 시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읽고 또 읽는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카뮈의 <결혼 여름>, 카프카 단편선,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 등이 그것이다.


시인의 팔월 예찬은 계속된다.

"팔월이 되면 나는 턱없이 낙관적이 되고 행복해진다."(45면)


또 시인은 '생'에 대한 예찬을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46면)


이 뜨거운 팔월에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자각하면서 시인이 좋아하는 그 목록들을 떠올리고 좋아하는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시인에겐 무엇보다 큰 행복감을 주는 모양이다.



(시인의 어머니)

'비에 씻긴 말갛게 핀 앵두나무 꽃들' 앞을 지나간 시인의 어머니는 이제 '늙은 앵두나무'가 되어 그 나름의 원기왕성함으로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말하며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드러낸다.(53면)



(고독)

"능소화가 소문없이 꽃봉오리를 연 저녁, 모깃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한다. 고추장에 열무김치 얹어 비벼먹는 늦은 저녁, 양푼밥은 달고 오늘밤 잠도 잘 오겠다." (89면)


시골에서 보내는 시인의 생활은 겉보기와 달리 외롭고 단촐하다. 

불쑥 든 부끄러운 생각.

'나, 아직 모자라고 철들지 못해, 더 외롭고, 철든 후 다시 세상에 나아가야겠다. 나의 하루가 부끄럽다. 찌질한 내 인생.'


"내가 직면한 생의 단 하나의 어려움은 나 자신이 된다는 것. (...) 내 앞의 벼랑은 바로 나 자신이다."(117면)


시인은 수없이 자신을 마주한다. 바삐 살아가느라 백색의 노이즈에 파묻혀 인지하지 못했을 우리의 삶을 다시 고요히 들여다 본다면, 시인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시시각각 마주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시쓰기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방심'할 수 있는 자유.

도시의 삶은 긴장의 삶이기에 시인처럼 홀로 방심한 채 소주병을 비울 여유가 없는 것일까.

 

"싸구려 조화 같은 진홍 영산홍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늦봄지나 초여름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125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연'이란 또 다른 '인공'일 뿐이다. 앞으로의 세대는 '인공자연' 속에서 살며, 자연의 시간성이 몸에 각인된 삶을 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우리의 삶과 자연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며 만들어낸 24절기만 해도 이제 우리는 달력을 통해서 '정보'로서만 인지한다. 어르신들이야 달력의 '절기'를 보고 '자연이란 참 신기하지? 어떻게 매년 이렇게 잘 맞아들어갈까?'라고 말하곤 하지만,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파트 키드들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앞으로 아파트 난방비며 관리비만 비교하며 걱정하게 될 삶이 아닌가. 우리 인간은 우리 스스로를 부지런히 소외시킨다.

 

시인은 혼자 먹는 점심을 '일인분의 자유와 일인분의 고독으로 차려진 나의 정찬'이라 말한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이 익숙했던 나의 삼십대를 떠올린다. 나이들어 한 쪽으로 굽은 척추를 안고 걸으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목이 메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내무반에서 밤새 뒤척이던 나를 떠올린다. 삶이란 원래 이처럼 무뚝뚝하고 시시한 것이었을까.

 

"그가 먹던 빵을 내 얼굴로 집어던질 때 나는 웃어 보였다. 화내야 할 때 화를 못내는 것, 그게 비굴이야! 겸손이란 위장된 비굴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155면)

 

이 말이 나를 때렸다. 내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다 다시 가라 앉았다. 무언가에 대한 기억이 내 안에서 맴돈다. 내 안 기억 속 깊은 어딘가를 건드렸을 것이다. 순간 먹먹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이미 세상의 기대에, 무언의 규칙에 길들여져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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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다.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는 20여 년의 시간 동안 인생의 절정과 몰락을 모두 경험한다. '사실주의 소설'이라 분류되는 이 소설은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세탁소 주인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듯했던 가난한 여인의 인생 몰락과정을 너무도 우울하게(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이 실존적인 우울함은 주인공 제르베즈의 체념섞인 탄식에 가감없이 담겨있다. 

"야! 이놈의 인생은 아무리 욕심없이 살아도 소용이 없네!"(<목로주점> 제2권)

반전이란 것도 없이 가난 속에서 술과 본능적 욕구의 유혹으로 끝도 없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어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반면 저자인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이 대중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어 파리 근교 메당이라는 곳에 집을 구했다고 한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이야기로 삼아 경제적인 여유를 얻게된 것이다. 그러니 아이러니하다는 말이다. 


<목로주점>의 시대적인 배경은 1840년대 말에서 1860년대 말이라고 하니 주인공 제르베즈가 1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의 20 여년 간 한 여인이 겪는 기구한 세월을 그리고 있다. 아울러 이 시기는 산업혁명의 도래 이후, 새로운 경제구조의 영향이 소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 손을 직접 움직여 일하던 공장의 모습에서 불평하지 않고 24시간 일할 수 있는 기계의 등장으로 노동력이 불필요해지기 시작하던 사회의 모습이 소설의 구석구석 드러나고 있다. 소설 속의 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요! 이놈(리벳만드는 기계)이 우릴 쫓아내게 될 겁니다! 뭐, 더 시간이 가면 모든 사람의 행복에 기여할 수도 있고요."

이 말은 당대에 살던 사람들이 공유하고 느꼈을 법한 '기계의 도입으로 노동력이 점점 불필요해지고 소외되어가는 사회의 모습'을 잘 포착해내었다. 반면 서양의 합리적 전통의 반영으로서 도구의 발명과 개선을 추구하는 미래낙관적인 시각도 일부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인 <목로주점>은 독특한 역할을 해내는 곳이다. 하루살이 노동자들이 2주치 급료를 받아 술로 탕진해버리며 인간의 고달픔을 달래주는 공간인 동시에, 사람을 타락시키고 몰락할 여지를 마련해주는 공간으로서 매우 아이러니하고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도시가 변하고 가난한 이들이 도시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인간의 조건을 묵묵히 지켜보는 곳으로서 공간이기도 하다. 주인공 제르베즈의 남편인 함석공 쿠포가 입에 술을 대기 시작하고 몰락을 예고하는 곳이다. 아울러 제르베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폐쇄된 병원과 도축장을 지나)거리를 배회하며 '죽음'의 이미지에 둘러싸인채 한 때 남편 쿠포와 술 한 잔을 들이키며 몰락을 예고했던, 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을 담고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은 사실주의 소설답게 너무나 암울한 분위기를 전달하기에 수월하게 읽힌 소설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삶의 조건은 어느 학술적 연구보다도 더 분명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19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의 도시 주변부로 밀려나버린 숙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도시 하층민의 삶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가 보기에 생소한 '인간조건'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삶의 근본적인 양상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4차 혁명으로 이야기되는 새로운 인간의 조건은 한 번 더 우리 인간을 위해 기능할 것인지, 아니면 한 차례 더 인간을 '소외'시킬 것인지 궁금해진다. 어떤 점에서보면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이 인간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도 해본다. 결국 어떠한 결론에 이르더라도 '몰락의 독주'를 마실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목로주점 1>
(190면)
"쿠포는 제르베즈를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제르베즈도 체념했다. 빨래 더미 때문에 가벼운 현기증이 일면서 머리가 멍했고, 술냄새가 밴 쿠포의 숨결도 싫지 않았다. 직업상 주어진 더러움 한가운데서 주고받은 이날의 진한 키스야말로 두 사람의 삶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첫 추락이었다."

<목로주점 2>
(190면)
"야! 이놈의 인생은 아무리 욕심없이 살아도 소용이 없네!"
- 제르베즈의 탄식

<목로주점 2>
(284면) 장의사 바주즈 영감이 죽은 제르베즈를 관에 넣으며 하는 말
"내 말 잘 들어...나야. 부인네들을 위로해 주는 비비라게테지...자, 이제 행복할 거야. 아름다운 그대, 이제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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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 특이점 - 정규 2집 바람 불면
최성호 특이점 연주 / 미러볼뮤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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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재즈를 잘 모른다. 조금 안다고 하기에도 부끄럽다. 하지만 내 말은 틀렸다. 재즈를 ‘안다–모른다‘의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최성호의 즉흥음악을 어떤 이해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까?

어떤 음악이 좋다, 나쁘다의 정도로 반응하지 못하는 나, 특히 재즈를 잘 모르는 나는 그저 그의 연주를 듣고는 오만가지 딴생각을 하며 옆길로 샌다. 어떤 대목에선 서정적인 느낌을 받다가도, 과거의 추억으로 살며시 빠지기도 한다. 다른 어느 부분에서는 연주자들의 순수한 열정이 느껴지다가도 또 다른 부분에서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소리‘라고 느끼는 것이다. 글세다. 묘하게 자유스러운 구성과 음색에서 음색이 한마디로 ‘예쁘다‘라고 느끼는 것은 나보다도 연주자들이 더할 것 같다.

이들 연주자의 음악을 이반 일리치의 언어로 말하면 철저히 ‘자급자족적 음색‘이라 할 수 있을까. 획일화된 언어를 만인을 위한 통치로 적용하려했던 중세 언어학자 네브리하의 경우가 떠오른다. ‘표준화된 언어‘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적 지배 내지는 통제를 원했던 그의 오랜 사례처럼, 우리는 이미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노골화된 편견의 속박 속에서 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 체 타인을 평가하고 선언하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특이점과 같이 실험적인 팀이 국내에 많지 않은 것 같아 아쉽지만, 과거보다는 많아졌다는데 안심해야할까. 재즈는 특히 즉흥연주는 많은 이들의 ‘공감‘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이성에 너무 호소하며 대상을 ‘이해‘해야한다는 강박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난 특이점의 음악을 듣고 그저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상상하기도하고, 드럼 박자에 나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딴짓‘을 한다. 이들의 음악을 ‘이해‘하려하기보다 이들의 음색을 들으며 떠오른 그 때 그 때의 단상을—그리고 곧 사라져버릴—오롯이 나만의 ‘딴 생각‘을 소유해볼 뿐이다. 어쩌면 클래식과 다른 재즈의 ‘자유로움‘이라 하면 들을 때마다 나의 ‘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2집 앨범이 나온지 얼마 되지 읺은 모양이다.

특이점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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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쓰는가?>  

폴 오스터 지음 |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폴 오스터의 책을 단지 몇 권만 읽어보았지만, 이 책들 을 다시 떠올려보면 출판사나 얼론에서 그의 글쓰기를 왜 “우연의 미학”이라 소개하고 있는지 이제서야 조금 수긍하게 된다. 아무리 작고 소소한 이야기라도 삶에 내재된 수많은 우연성과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이를 이야기로 만들며 듣는이가 귀를 쫑긋 기울이고 듣게 만드는 그는 확실히 당대의 탁월한 이야기꾼임에 분명하다. 폴 오스터의 책은 무엇인지 모를 묘한 분위기(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를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이 묘한 작품 속의 정서는 초현실적인 느낌마져 들게하는데, 폴 오스터가 이야기로 만들어내면 마치 사실과도 같이 느껴진다. 심지어는 소설 속의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능력마져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 만들기는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우연을 발견하는 작가의 능력(세렌디피티: serendipity)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 속에서 우연을 발견하는 감수성과 겸허함이 겸비되어야한다.


 

<빵굽는 타자기>에서 폴 오스터는 자신의 지난한 글쓰기 역정의 단면을 드러낸다. 전업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점들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는지를 묻고있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집안이었음에도 스스로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경제적으로 부모와 독립하기로 하면서 오랜기간 동안 ‘뼈빠지게’ 노동하는 삶을 선택해야만 했던 작가를 떠올려볼 때, 삶의 불확실성에서 발견하는 우연한 관계와 아이러니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겸허함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를 써서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패트와(죽음의 선고)”를 받았다. 살해 위협으로 도피중이던 살만 루슈디에 대한 견해를 밝힌‘살만 루슈디를 위한 기도’에서 폴 오스터는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의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같은 클럽(국제 문학인 단체 ‘펜클럽’을 말함)에 속해 있습니다. 단독자, 은둔자, 괴짜들, 작은 방에 틀어박힌 채 종이 위에 글을 써넣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인생의 태반을 보내는 자들의 비밀결사인 것입니다. 그것은 기묘한 생활 방식이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만이 그것을 천직으로 선택합니다. 그것은 너무 힘들고, 대가는 형편없고, 실망이 거듭되는 생활 방식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작가들은 다양한 재능과 야심을 가지고 있지만, 제몫을 하는 유능한 작가라면 모두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할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88)


 

대학교 신입생 때, ‘우연히’ <스모크 Smoke>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누가 만든 영화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항상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영화는 담배로부터 나오는 자욱한 연기를 보여주며 시작하는데, 브루클린에 있는 작은 담배가게 주인이 작가인 단골 손님에게 들려주는 ‘괜찮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매개로 하고 있다. 매일매일 수십년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자신의 유일한 필름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워두고 사진을 한 장씩 찍는 유형학적 사진을 찍는 담배가게 주인의 캐릭터는 다소 생뚱맞긴 하지만, 일상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이 <스모크>가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끽연가인 작가가 담배가게 주인집에 초대받아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담배가게 주인의 취미인 사진찍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인은 수십 년간 모아둔 앨범 더미들을 작가에게 보여준다. 매일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모아둔 앨범은 작가에게 모두 동일한 사진으로 보일뿐이다. 작가가 건성으로 사진을 보며 넘기는 모습에 담배가게 주인은 사진 한 장 한 장을 음미하며 천천히 보라고 조언한다. 이는 <왜 쓰는가?>에서 폴 오스터가 유대계 미국시인 찰스 레즈니코프를 만난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해준다. 레즈니코프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뉴욕에서 매사추세츠 주의 케이프 코드까지 걸어갔던 여행을 언급하며 ‘중요한 것은 너무 빨리 걷지 않는 것’이고 ‘시속 3 킬로미터 정도의 속력을 유지해야만 보고 싶은 것을 모두 볼 수 있다’라고 젊은 폴 오스터에게 전해준 시인의 지혜를 연상케한다.




 

 

또 다른 우연 – 폴 오스터가 작가가 된 이유


폴 오스터가 작가가 된 이유에 대해 아이들에게 즐겨말하는 에피소드도 인상깊다. 초등학생일 법한 나이에 이미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을만큼 조숙했던 그였지만, 무엇보다도 좋아했던 것은 야구, 특히 뉴욕 자이언츠 그리고 소속 선수 들 중 윌리 메이스를 무척 좋아하는 어린아이였을 때의 이야기다. 야구가 끝나고 ‘우연히’ 윌리 메이스를 선수들 락커룸 근처에서 발견한 어린 폴 오스터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 ‘사인을 해달라’고 청한다. 하지만 본인이나 아버지, 윌리마저도 연필이 없었던 상황에서 그는 결국 윌리 메이스의 사인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날 밤 이후, 나는 어디에나 연필을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주머니에 연필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 연필로 뭔가를 하겠다는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싶었다. 빈손일 때 한 번 당했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 () 주머니에 연필이 들어 있으면, 언젠가는 그 연필을 쓰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크다. 내 아이들에게 즐겨말하듯, 나는 그렇게해서 작가가 되었다.(41)

 

‘우연’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다른 이름일 것이다. 앞으로 나의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물론 내가 어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면, 그 시험을 보게 되어 합격 또는 불합격 결과를 통해 그 다음 삶의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에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개연성을 있을 수 있지만, 언제나 인과관계로만 파악할 수는 없을 것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우연’한 계기가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다시 이 지점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중년이 된 나도 언젠가 부터는 이러한 삶의 아이러니와 ‘우연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우리가 자주 ‘삶이란 우리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바로 폴 오스터가 민감한 촉을 지니고 찾게되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의 삶은 진실로 수많은 우연과 그 전환점 내지는 방향을 제시하는 수많은 시작점(계기)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폴 오스터의 인간애


폴 오스터의 글쓰기를 ‘우연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한다고 해도, 이 표현으로는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그의 글에서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살만 루슈디를 위한 기도’에서와 같이 타인에 대한 고통에 민감하고 이를 함께하고 배려하는 정서를 작가의 에피소드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앞에서 시인 찰스 레즈니코프로부터 젊은 시인 폴 오스터가 받은 진심어린 격려의 말을 보면 폴 오스터가 얼마나 큰 감명을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는지 느낄 수 있다.



시인 레즈니코프가 젊은 폴 오스터에게 말한다.


자네가 보내 준 글 말인데…’ 그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 글을 읽으면, 언젠가 우리 어머니한테 일어난 일이 생각난다네. 하루는 길거리에서 웬 낯 선 사람이 어머니에게 다가오더니, 사뭇 상냥하고 우아한 어조로 어머니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칭찬했지. 어머니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적도 없었고, 머리카락이 다른 부위보다 특히 돋보인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네. 하지만 그 낯선 사람의 칭찬 덕분에 어머니는 그 날 온종일 거울 앞에 안장서 머리를 매만지고 치장하고 감탄하면서 시간을 보냈지. 자네 글도 나한테 꼭 그런 역할을 해주었어. 나는 오후 내내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을 찬탄했다네.(52-52)



 

폴 오스터의 글쓰기에는 이렇듯 보편적인 인간에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작고 우연한 사건 하나가 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하루의 존엄을 지켜주었다면 그것이 바로 폴 오스터가 주목하고 드러내는 그의 유일한 특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리하면 폴 오스터의 글쓰기는 뼈대가 되는 우연의 미학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더해졌기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 소설만이 아니라 작가를 드러내는 글을 통해 우리는 그 작가의 작품에 더욱 공감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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