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호 특이점 - 정규 2집 바람 불면
최성호 특이점 연주 / 미러볼뮤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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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재즈를 잘 모른다. 조금 안다고 하기에도 부끄럽다. 하지만 내 말은 틀렸다. 재즈를 ‘안다–모른다‘의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최성호의 즉흥음악을 어떤 이해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까?

어떤 음악이 좋다, 나쁘다의 정도로 반응하지 못하는 나, 특히 재즈를 잘 모르는 나는 그저 그의 연주를 듣고는 오만가지 딴생각을 하며 옆길로 샌다. 어떤 대목에선 서정적인 느낌을 받다가도, 과거의 추억으로 살며시 빠지기도 한다. 다른 어느 부분에서는 연주자들의 순수한 열정이 느껴지다가도 또 다른 부분에서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소리‘라고 느끼는 것이다. 글세다. 묘하게 자유스러운 구성과 음색에서 음색이 한마디로 ‘예쁘다‘라고 느끼는 것은 나보다도 연주자들이 더할 것 같다.

이들 연주자의 음악을 이반 일리치의 언어로 말하면 철저히 ‘자급자족적 음색‘이라 할 수 있을까. 획일화된 언어를 만인을 위한 통치로 적용하려했던 중세 언어학자 네브리하의 경우가 떠오른다. ‘표준화된 언어‘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적 지배 내지는 통제를 원했던 그의 오랜 사례처럼, 우리는 이미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노골화된 편견의 속박 속에서 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 체 타인을 평가하고 선언하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특이점과 같이 실험적인 팀이 국내에 많지 않은 것 같아 아쉽지만, 과거보다는 많아졌다는데 안심해야할까. 재즈는 특히 즉흥연주는 많은 이들의 ‘공감‘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이성에 너무 호소하며 대상을 ‘이해‘해야한다는 강박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난 특이점의 음악을 듣고 그저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상상하기도하고, 드럼 박자에 나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딴짓‘을 한다. 이들의 음악을 ‘이해‘하려하기보다 이들의 음색을 들으며 떠오른 그 때 그 때의 단상을—그리고 곧 사라져버릴—오롯이 나만의 ‘딴 생각‘을 소유해볼 뿐이다. 어쩌면 클래식과 다른 재즈의 ‘자유로움‘이라 하면 들을 때마다 나의 ‘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2집 앨범이 나온지 얼마 되지 읺은 모양이다.

특이점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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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쓰는가?>  

폴 오스터 지음 |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폴 오스터의 책을 단지 몇 권만 읽어보았지만, 이 책들 을 다시 떠올려보면 출판사나 얼론에서 그의 글쓰기를 왜 “우연의 미학”이라 소개하고 있는지 이제서야 조금 수긍하게 된다. 아무리 작고 소소한 이야기라도 삶에 내재된 수많은 우연성과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이를 이야기로 만들며 듣는이가 귀를 쫑긋 기울이고 듣게 만드는 그는 확실히 당대의 탁월한 이야기꾼임에 분명하다. 폴 오스터의 책은 무엇인지 모를 묘한 분위기(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를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이 묘한 작품 속의 정서는 초현실적인 느낌마져 들게하는데, 폴 오스터가 이야기로 만들어내면 마치 사실과도 같이 느껴진다. 심지어는 소설 속의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능력마져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 만들기는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우연을 발견하는 작가의 능력(세렌디피티: serendipity)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 속에서 우연을 발견하는 감수성과 겸허함이 겸비되어야한다.


 

<빵굽는 타자기>에서 폴 오스터는 자신의 지난한 글쓰기 역정의 단면을 드러낸다. 전업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점들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는지를 묻고있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집안이었음에도 스스로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경제적으로 부모와 독립하기로 하면서 오랜기간 동안 ‘뼈빠지게’ 노동하는 삶을 선택해야만 했던 작가를 떠올려볼 때, 삶의 불확실성에서 발견하는 우연한 관계와 아이러니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겸허함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를 써서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패트와(죽음의 선고)”를 받았다. 살해 위협으로 도피중이던 살만 루슈디에 대한 견해를 밝힌‘살만 루슈디를 위한 기도’에서 폴 오스터는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의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같은 클럽(국제 문학인 단체 ‘펜클럽’을 말함)에 속해 있습니다. 단독자, 은둔자, 괴짜들, 작은 방에 틀어박힌 채 종이 위에 글을 써넣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인생의 태반을 보내는 자들의 비밀결사인 것입니다. 그것은 기묘한 생활 방식이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만이 그것을 천직으로 선택합니다. 그것은 너무 힘들고, 대가는 형편없고, 실망이 거듭되는 생활 방식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작가들은 다양한 재능과 야심을 가지고 있지만, 제몫을 하는 유능한 작가라면 모두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할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88)


 

대학교 신입생 때, ‘우연히’ <스모크 Smoke>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누가 만든 영화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항상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영화는 담배로부터 나오는 자욱한 연기를 보여주며 시작하는데, 브루클린에 있는 작은 담배가게 주인이 작가인 단골 손님에게 들려주는 ‘괜찮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매개로 하고 있다. 매일매일 수십년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자신의 유일한 필름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워두고 사진을 한 장씩 찍는 유형학적 사진을 찍는 담배가게 주인의 캐릭터는 다소 생뚱맞긴 하지만, 일상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이 <스모크>가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끽연가인 작가가 담배가게 주인집에 초대받아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담배가게 주인의 취미인 사진찍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인은 수십 년간 모아둔 앨범 더미들을 작가에게 보여준다. 매일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모아둔 앨범은 작가에게 모두 동일한 사진으로 보일뿐이다. 작가가 건성으로 사진을 보며 넘기는 모습에 담배가게 주인은 사진 한 장 한 장을 음미하며 천천히 보라고 조언한다. 이는 <왜 쓰는가?>에서 폴 오스터가 유대계 미국시인 찰스 레즈니코프를 만난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해준다. 레즈니코프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뉴욕에서 매사추세츠 주의 케이프 코드까지 걸어갔던 여행을 언급하며 ‘중요한 것은 너무 빨리 걷지 않는 것’이고 ‘시속 3 킬로미터 정도의 속력을 유지해야만 보고 싶은 것을 모두 볼 수 있다’라고 젊은 폴 오스터에게 전해준 시인의 지혜를 연상케한다.




 

 

또 다른 우연 – 폴 오스터가 작가가 된 이유


폴 오스터가 작가가 된 이유에 대해 아이들에게 즐겨말하는 에피소드도 인상깊다. 초등학생일 법한 나이에 이미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을만큼 조숙했던 그였지만, 무엇보다도 좋아했던 것은 야구, 특히 뉴욕 자이언츠 그리고 소속 선수 들 중 윌리 메이스를 무척 좋아하는 어린아이였을 때의 이야기다. 야구가 끝나고 ‘우연히’ 윌리 메이스를 선수들 락커룸 근처에서 발견한 어린 폴 오스터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 ‘사인을 해달라’고 청한다. 하지만 본인이나 아버지, 윌리마저도 연필이 없었던 상황에서 그는 결국 윌리 메이스의 사인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날 밤 이후, 나는 어디에나 연필을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주머니에 연필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 연필로 뭔가를 하겠다는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싶었다. 빈손일 때 한 번 당했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 () 주머니에 연필이 들어 있으면, 언젠가는 그 연필을 쓰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크다. 내 아이들에게 즐겨말하듯, 나는 그렇게해서 작가가 되었다.(41)

 

‘우연’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다른 이름일 것이다. 앞으로 나의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물론 내가 어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면, 그 시험을 보게 되어 합격 또는 불합격 결과를 통해 그 다음 삶의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에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개연성을 있을 수 있지만, 언제나 인과관계로만 파악할 수는 없을 것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우연’한 계기가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다시 이 지점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중년이 된 나도 언젠가 부터는 이러한 삶의 아이러니와 ‘우연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우리가 자주 ‘삶이란 우리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바로 폴 오스터가 민감한 촉을 지니고 찾게되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의 삶은 진실로 수많은 우연과 그 전환점 내지는 방향을 제시하는 수많은 시작점(계기)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폴 오스터의 인간애


폴 오스터의 글쓰기를 ‘우연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한다고 해도, 이 표현으로는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그의 글에서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살만 루슈디를 위한 기도’에서와 같이 타인에 대한 고통에 민감하고 이를 함께하고 배려하는 정서를 작가의 에피소드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앞에서 시인 찰스 레즈니코프로부터 젊은 시인 폴 오스터가 받은 진심어린 격려의 말을 보면 폴 오스터가 얼마나 큰 감명을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는지 느낄 수 있다.



시인 레즈니코프가 젊은 폴 오스터에게 말한다.


자네가 보내 준 글 말인데…’ 그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 글을 읽으면, 언젠가 우리 어머니한테 일어난 일이 생각난다네. 하루는 길거리에서 웬 낯 선 사람이 어머니에게 다가오더니, 사뭇 상냥하고 우아한 어조로 어머니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칭찬했지. 어머니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적도 없었고, 머리카락이 다른 부위보다 특히 돋보인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네. 하지만 그 낯선 사람의 칭찬 덕분에 어머니는 그 날 온종일 거울 앞에 안장서 머리를 매만지고 치장하고 감탄하면서 시간을 보냈지. 자네 글도 나한테 꼭 그런 역할을 해주었어. 나는 오후 내내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을 찬탄했다네.(52-52)



 

폴 오스터의 글쓰기에는 이렇듯 보편적인 인간에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작고 우연한 사건 하나가 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하루의 존엄을 지켜주었다면 그것이 바로 폴 오스터가 주목하고 드러내는 그의 유일한 특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리하면 폴 오스터의 글쓰기는 뼈대가 되는 우연의 미학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더해졌기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 소설만이 아니라 작가를 드러내는 글을 통해 우리는 그 작가의 작품에 더욱 공감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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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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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아니 에르노의 책을 한 권만 읽어보면 누구나 에르노의 글쓰기를 오래 기억할 것같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는 철학을 갖고 글쓰기를 하는 작가로서 에르노의 강한 개성은 저자의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한인상을 받을 것이다. <단순한 열정>도 중년의 나이에 이미 성년이 된 아들이 있는 저자는 파리에 파견나온 한 외국 영사관의 유부남 직원과 연애한 경험을 글로써서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 작품이었다. 자신은 사실을 기반으로 썼으나, 저자가 겪은 경험을 통해 이를 회상할 때(글을 쓸 때) 떠오른 이미지의 말들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지금 표지를 다시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인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삶들을 생각할 때 썼던 그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저자의 강한 개성이 드러나는 글쓰기를 떠올려볼 때, <남자의 자리> 역시 저자가 겪지 않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책은 자신의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젊은 시절 아버지에 대한 딸의 시선, 아버지와 딸의 관계, 그리고 저자 자신의 불가피한 근원에 대해, 그리고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의 오랜 자신의 열등감과 치부의 흔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어서 강한 인상을 남긴 책이었다.


책의 절반은 분명 에르노가 담담하게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아버지에 대해 에르노가 느끼는 흔들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이 역시 책을 읽고 내가 다시 나의 기억을 더듬어갈 때 떠오른 단상의 말들일 뿐인지 모른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부모님을 방문하며 어느 새 늙어버린 아버지에게 로션 한 병을 선물하며 '아빠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거야!'(110면)라고 적은 부분처럼 아버지가 병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로서 에르노의 부모님은 평생을 줄곧 일만 했고, 교양이 부족함을 언제나 부끄러움으로 여겼던 에르노의 고민이 곳곳에 묻어난다. 자신의 '근원'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을 그녀는 그러면서도 교양을 갖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이 곳에 속한 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에르노는 늘 아버지의 변함없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에 대한 시선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유형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와 딸의 관계와는 또 사뭇 다른 무언지 모를 애틋함과 거리감이 존재하는 그런 유형이 있고, 이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공통점이 있는 모양이다. 


또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은, 롤랑 바르트의 책을 많이 접했을 에르노의 이 <남자의 자리> 또한 어떤 점에서 바라보면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과도 같은 계기(어머니의 죽음)를 가지고 부모를 회상하는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남자의 자리><밝은 방>에 대한 하나의 오마주와 같은 글쓰기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서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며 사진이 주는 감정을 돌아다보고 있다. 회상의 어느 특정한 부분이 주는 '찌를 듯이 아픈' 기억들과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 그리고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이 모든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남자의 자리>에서도 보인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오랜 옛날 헌팅캡을 쓰고 카메라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젊은 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에르노의 심정이 느껴진다. 아울러 이 사진첩에 아버지가 스크랩 해놓은 에르노에 관한 신문기사 스크랩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뿐만 자신의 열 여섯 살 당시의 사진(아마도 dust cover에 나온 사진으로 보이는 이 사진)에 드리운 아버지의 그림자를 발견하며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니 에르노가 결핍으로 가지고 있었던 교양있는 집안의 '교양'은 그녀의 부모가 평생 접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세계였다. 톨스토이의 귀족 사회를 엿보면서도 느꼈던 점은 이 '교양'이라는 이름의 허구의 모습을 프랑스의 '교양있는' 집안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대화에서 항상 '재치있게 말하는' 법을 알고 있다던가, 심지어는 감탄사를 연발할 때도 누구의 시에 나온 대사를 자연스럽게 체화된 것처럼 내뱉는 그런 교양에 나는 주목한다. 이러한 '스펙'은 노동자 가족의 딸로서 갖지 못한 특질로서 언제나 에르노에게 스트레스이자 컴플렉스가 되었던 모양이다. 한 사회가 불편해하면서도 공유하는 이 '교양'이라는 허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것일까. 배운 사람들과 노동자와 구분하기 위한 혹은 이들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도록해주는 자위장치였을까. 하지만 이제 현대사회에서 이런 모든 것을 다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것은 자본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자의 자리>에서 프랑스 사회의 또 다른 단면(그러나 내가 속한 사회와 크게 다를바 없는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남자의 자리>를 단순한 '사부곡'으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이 책의 원제는 <La Place> 곧 공간, 장소, 자리의 의미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을 지켜온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발견이자 회상이며 애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공간은 아버지가 평생을 지켰던 '물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영역이며 존재에 대한 분명한 흔적일 것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 대한 재발견 내지는 회귀는 어머니에 대한 집요한 애도를 보여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과도 너무나 닮아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93면)

글을 왜 쓰고 있는지 에르노는 끊임없이 되물었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경험한 일만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제약이 있는 그녀의 글쓰기는 오히려 더 엄정하게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고 반문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이 한 문장에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이유와 아버지와 딸인 자신의 관계의 양상을 간접적이나마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이 힘을 갖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아니 어느 딸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번역에 관하여)

피에르 르메트르의 흥미로운 소설 <오르부아르>를 번역한 임호경 번역자의 번역으로 만나는 <남자의 자리>는 역시 번역이라는 것은 쉽지 않다는 자각과 함께, 무난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잘 된) 번역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물론 딸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버지에 대한 관점과 자신의 치부의 드러냄을 얼마나 섬세하게 잘 드러내었는가라고 묻는다면 글세,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기교나 거슬림없이 무난하게 읽어나갈 수 있게 도와준 번역이라면 나는 그것이 잘된 번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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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롤랑 바르트의 <밝은 > 만나는 접점에서 머무르기

 

 

한병철 교수의 <에로스의 종말> 다시 읽는다. 전체에 대한 서평을 정도의 실력이 나에겐 없음을 통감하지만 책읽기의 매력이 책의 어떤 부분에서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에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롤랑 바르트의 <밝은 (영어판 제목: Camera Lucida)>에서 카프카(Franz Kafka) 말했다는 대목에서 멈춰서 저녁 내내 생각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목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사물에서 의미를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감기다.”(79)

 

저자 한병철 교수는 이에 사물의 내밀한 음악 눈을 감을 비로소 울려 나온다. 눈을 감는 순간에야 사물 앞에서의 머무름 시작된다.”라고 덧붙이고 있다.(5 환상, 79)

 

롤랑 바르트가 인용했다는 카프카의 말과 한병철 교수가 덧붙인 말은 얼핏보면 서로 연관성이 희박하다. 나는 대목에서 과연 부분이 서로 어떤 연관성에서, 어떤 맥락에서 이렇게 병치되어 나오게 되었는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카프카의 말이 인용되는 롤랑 바르트의 <밝은 > 맥락은 이 책 22장에서 롤랑 바르트 자신이 사진을 보는 행위를 언급하며 맥락에서 나온 말로, “사실 또는 결국 하나의 사진을 보기 위해서는, 머리를 치켜들거나 혹은 눈을 감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며 야누흐(Janouch) 카프카의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이미지에 선행하는 조건은 시선이다.’라고 야누흐는 카프카에게 말하곤 했다. 카프카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사물을 촬영하는 목적은 그들을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쫒아내기 위해서이지.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법이네.’ 사진은 말이 없어야 한다.

 

책에서 롤랑 바르트가 썼던 동일한 문장에 대해 사뭇 다른 느낌의 문장이 나왔다. 한병철 교수는 롤랑 바르트의 독일어판 <밝은 >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밝은 > 불어판 번역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독일어 판으로부터 나온 번역은 매우 간결하다.

 

카프카의 인용구가 있는 <밝은 > 22장은 현대 사진론에 영향을 끼친 바르트의 스투디움 푼크툼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가지 사진을 이야기 한다. 1882 나다르라는 사진 작가가 찍은 이태리계 프랑스 탐험가의 사진으로부터 바르트 자신의 푼크툼 언급하며 시작하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 푼크툼 사진 관람자에게 고통의 확실한 징후 되는 것으로서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환기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같다. (모두 사망했을)타인의 오래된 가족사진에서 인물이 신던 구두 혹은 목걸이로부터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요소가 바로 푼크툼 요소라고 있겠다. 바르트가 생각하는 사진(혹은 사진 감상)이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평범한 세부가 홀로 (푼크툼을 발견하게 해주는) 감정적인 의식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내버려둠을 통해서 가능한 행위인 같다.

 

다시 카프카의 (밑줄 인용구) 돌아가자면, 롤랑 바르트에게 사진’은 사진에 담긴 대상이 전달하는 정보, 의미를 사진 관람자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강요 하나의 폭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런 정보, 의미 수다스러움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사진은 수다스러움 제거된 사진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수다스러움 범주에 테크닉’, ‘현실감’, ‘르포르타쥬’, ‘예술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에로스의 종말>에서는 사치스러움' 현대 사회의 과도한 가시성(혹은 정보)이라는 보다 확장된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한병철 교수가 언급한 사물의 내밀한 음악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이미지 혹은 단상 정도로 이해할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이미지 혹은 단상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도움이 만한 부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은 프랑스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소설 <단순한 열정> 마지막 부분에 있다. 작가 아니 에르노는 50 중반이던 1990년대 초에 30 후반의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을 나눈 체험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 그녀는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적은 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이라고 말하며 평생 글을 써왔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사건이 사실이므로 소설이라기 보다는 '시간 개념이 없는 일기'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같지만 아무튼 그건  책의 분류를 '굳이' 원하는 사람의 몫이다.

 

<단순한 열정>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사람의 존재 자체로 인해 내게로 단어들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사람이 읽으라고 글을 것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내게 어떤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대목에서 언급된 작가가 떠올린 단어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실존적 인식 한병철 교수의 사물의 내밀한 음악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에로스의 종말> 돌아간다. 책의 옮긴이에 따르면 독일어 눈을 감는다라는 동사는 닫다, 끝내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동사를 사용한다고 한다.  눈을 감는다 종결 의미를 내포한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시각적 정보의 결핍을 의미하며 이는 에로틱한 환상을 자극한다고 한병철 교수는 말한다. 여기서 에로틱한 환상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을 매개로 타자 갖는 욕망을 대변한다고 있다. 한병철 교수는 쿠스타브 플로베르(Gustav Flaubert) 소설 <마담 보바리>에서 보바리와 레옹이 달리고 있는 마차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인용한다. 대목에서는 사랑의 행위에 대한 어떤 시각적 묘사도 나오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에로틱한 환상을 자극하는 것이다. 대목은 <시를 읽은 그대에게> 정재찬 교수도 '가장 에로틱한 장면'이라고 손꼽는 장면이기도 한데, 여기에 시각적 정보가 자세하게 주어진다면, 에로틱한 환상은 곧바로 파괴될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얘기한 혼란되고 균열된 포르노로서의 성애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지나친 정보가 주는 환멸 떠올리자면 나는 언제나 소개팅에 나가기 전에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 통해 상대방의 사진을 검색하는 젊은 세대를 떠올린다. 개인에 대한 과도한 정보와 가시성(프로필 사진, 셀피 사진 ) 확보한 이들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 커지거나 아니면 환멸 따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인간다운 매력에 대한 환상(또는 상상력) 머물 여유가 정보 검색과 더불어 곧바로 박탈당한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상대를 결정지어버린다. 이처럼 과도한 정보가 주어지는 세대에게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관심이 머물 여유가 사라진 세대가 것이다.   

 

오늘날 무한한 긍정성 양상이나 과도한 가시성 성과주체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런 가속화 사회에서 눈을 감는 행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병철 교수가 언급한 눈을 감는 행위 문자 그대로 눈을 감고 거부하는 행위에서 나아가 종결 형식으로서 사색적인 머무름 또는 사색적인 안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도 주목해야 것이다.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의 성과주체는 자기착취적인 존재이다. ‘과도한 긍정성의 강박 성과주체를 소진시키는 원인이 되며, 이는 오늘날의 우울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우울증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의 특징적인 질병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에로스 환상( 상상력) 매개로 하는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타자 경계가 분명한 것이다. 반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기에 이는 타자 침식이 진행되어 결국 타자 소멸로 이어진다고 한다. 나아가 자아 타자 경계가 해체되어 사라지게되면, ‘타자 대한 환상 사라지며, 이는 에로스의 종말 의미한다는 ,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이 된다고 한병철 교수는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에로스의 종말이란 사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병폐라고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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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느릿 느릿 읽기 [2]

 

 

 

 

 

 

 

 

 

 

 

 

   청년 레빈은 여전히 키티에게 청혼을 주저하고 있다. 1부에 보면 레빈이 키티를 만나기위해 스케이트장에 가는 장면이 있다.

   네시에 레빈은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동물원 입구에서 세낸 썰매를 세우고 스케이트장으로 가는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입구에서 쉬체르바쓰키네의 사륜 여행마차를 보았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틀림없이 그녀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환희와 두려움으로 그녀가 거기 있음을 알아챘던 것이다. 그녀는 한 부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스케이트장 건너편 끝에 서 있었다. 그녀의 복장이나 자세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레빈에게는 이러한 군중 속에서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쐐기풀 속에서 장미를 찾아내는 것처럼 손쉬웠다.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온갖 것을 환하게 밝히는 미소와 같았다. (1 62-63)

   흔히 내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으로부터 같은 아우라가 퍼져나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130년도 전에 톨스토이는 우리가 이야기하듯 그런 빛이나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키티의 사촌오빠가 레빈을 알아보고 러시아 제일의 스케이터!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대목을 통해 레빈은 스케이트를 매우 잘 타는 것으로 나온다.

   역시나 오늘은 처음부터 삼천포로 빠지자면,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문득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 즈음 기숙학교에서 쫒겨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여자 친구 샐리를 만나기전 뉴욕 맨하탄을 배회하면서 스케이트장에 이르는 장면이 나왔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사건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도 찾아낼 길은 없지만, <샐린저 평전>(케니스 슬라웬스키 지음)을 보면 꽤 젊은 나이에 단편 소설로 데뷔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1941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폭격한 이후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군 복무 중(1943년 즈음으로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책을 열심히 읽어댔다(104)라고 적힌 대목이 보인다. 샐린저는 실제로 맨하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실제로도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 콜필드가 나도 어렸을 때 똑같은 장소에서 스케이트 타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라고 혼자 생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무의식 중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레빈이 스케이트장에서 키티를 만나는 장면이 <호밀밭의 파수꾼>과 연결되었을 뿐이다.

  

   딸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지어주어야 한다는 프랑스의 관습은 배척당하고 비난받았다. 딸에게 완전한 자유를 줘야 한다는 영국의 관습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중매쟁이를 고용한다는 러시아식 관습은 뭔가 상스러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남들처럼 부인 자신도 그것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시집을 가야 하고 시집을 보내야 하는가는 아무도 몰랐다. 부인이 이 문제에 대해 상의했던 사람들은 모두 부인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생각해봐요, 이제는 그 낡은 관십을 버려야 할 때예요. 결혼하는 건 젊은 사람들이지 부모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둬야 해요. 딸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으로서는 딸이 사내들을 가까이하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그것도 결혼할 의사가 없는 사내나 혹은 남편감이 되지 못하는 사내를 연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95-6)

   결혼 적령기가 된 키티의 어머니인 부인의 입장에서 톨스토이가 써내려나간 이 대목을 보면 작가가 인식하는 당시 결혼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톨스토이의 표현에 의하면 프랑스의 결혼은 과거 우리처럼 부모가 정해준 결혼이 대세였을 듯하고, 영국은 자유연애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반면 러시아의 결혼문화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배우자를 선택하기도하는(물론 자유연애와 부모의 주선에의한 결혼도 혼재해있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아울러 러시아의 문화는 특히나 프랑스 문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교계 모임에서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를 쓰기도하고, 하인이 있는 자리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나 껄끄러운 이야기를 할 때 프랑스어를 쓰는 장면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의 작가)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로 꼽은 이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특정 한 사람이 주요 인물이 아니고 바로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과 운명을 대립시키고 있다. 한 쪽은 유부녀인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을 하게되는 브론스키 백작(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이 있고, 그 대척점에 키티(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와 레빈(콘스탄틴 드리트리치 레빈)이 있다. 따라서 이 두 커플이 조우하고 고백을 하는 시점이 비슷하게 나오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레빈이 키티에게 처음 고백하고 청혼을 했을 때 처음에는 키티에게 거절당하게 되는데, 반면 브론스키와 안나는 기차역에서 서로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이 두 커플의 시작은 이후 이들이 맞게되는 운명과 반대로 레빈은 청혼을 거절당하는 쓰라림으로 시작하며, 브론스키는 무난하고 좋은 분위기로 두 사람사이의 관계가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브론스키와 안나가 처음 만나는 곳이 기차역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이 처음 만난 날 기차역에서 한 남자가 열차에 치여 죽는 사건을 맞게 되는데, 안나가 불길한 징조예요.라고 하는 말은 아무 의미없이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기차역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불행을 잉태하는 장소로서 톨스토이가 사용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말년에 집을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영면한 곳도 어느 기차역이었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기차역은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을 기억하라는 톨스토이 말년의 잠언집을 읽다보면 인생이 갖는 은유적 의미(지나가는 곳으로서의 인생)또한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에게는 기차역과 부합하는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한다.

  

   여기서 잠깐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에 빠지는 인물인 브론스키 백작에대해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브론스키는 좋은 집안 배경 출신이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서 성장하는데, 초반에는 마마보이처럼 보이는 착한 아들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으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나온다. 브론스키는 유부녀인 안나 카레니나와 첫 눈에 반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열정적인 사랑을향해 나아가지만 사교계의 냉담한 시선과 사회의 관습에 고통을 받는다. 좋은 집안에 학식은 있지만 20세 연상인 남자(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와 결혼 후 무덤덤한 결혼생활을 하던 안나는 브론스키를 만나 새로운 삶에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든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촛불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런 사건을 내 주변에서 마주하게 된다면 언제나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기는 쉬운일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내게도 일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타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까? 안나의 남편인 카레닌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퍼부으며 복수와 응징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합리적 대안을 선택할 수 있을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이런 문제에 대해 당시( 130여년 전)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사회의 분문율에 톨스토이는 소설에서 질문을 던지고 편견에 도전하고 있다. 안나는 단순히 자신의 쾌락을 쫒는 여자일까? 그리고 어쩌면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쾌락을 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일까하는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갖고있는 도덕적인 기준이야말로 모호하고 자의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 정답이란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문제는 생각해볼 일이다.  

 

"인생의 온갖 변화와 매력과 아름다움은 모두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거니까."
(91면)

"All the variety, all the charm, all the beauty of life are made up of light and shade." (펭귄 북스, 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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