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전에 읽었던 시인의 중에서 기억에 특히 남았던 부분은 독일의 시인 라이너 쿤체에 대한 부분이었다. 저자인 전영애(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 선생과의 따뜻한 만남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쿤체 시인이 방한하여 한국 학생들과의 교감을 나눈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쿤체 시인이 어느 한국 학생의 질문을 받고 대답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학생은 쿤체 시인이 지은  <자살>이라는 시를 언급하며 죽음 대한 시인의 생각을 물었다. <자살>이라는 짧은 시의 전문은 이렇다.

 


모든 문들 마지막

그렇지만 아직 번도

모든 문을 두드려본 없다.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시는, 자신을 자신을 자제하기 위한, 자신을 엄격히 지켜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그렇게 아마 다른 분들께도 격려가 있지 않을까요. 누구도 이미 모든 문을 두드려 보지는 않았거든요. 인생은 본질적으로 아주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정은 오로지 고달픔입니다. 그런데 길을 자꾸 가노라면 사는 것이 만하게, 값지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옵니다. 지점들 사이의 구간이 길면 길수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삶이 살만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그만큼 소중하고 값지게 다가옵니다.시인의 (199)

 


시인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의 경험을 지켜보면서 자살 대한 태도를 짧은, 어쩌면 하이쿠를 닮은 절제된 문장에 온전히 담았다. 젊은 나이에 자살한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 앞에 닫혀 있는 문들 뒤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과 기대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시인은 시를 읽는 이들에게 고달픈 여정에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을 한번씩 두드려보길 제안하고 있다. 죽음을 이야기했던 시인이 이제 인생의 행복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더한다.

 


정말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백분의 초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특히 남녀가 함께 산다는 것은 백분의 초에 다가가고자 함께 노력하고, 백분의 초를 향해 살아가고, 백분의 초를 위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가 해당되지 않는 순간이 있기는 합니다. 몹시 나이가 들었거나 불치의 병이 들었을 말이지요. 외에는 그런 순간은 언제나 계속 있습니다. 순간을 위해서 일하고 살고 생각해야 것입니다.시인의 (199)

 


우리는 나이가 들거나 불치병에 걸렸을 비로소 우리 삶에 그동안 행복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지 깨닫게 되지 않을까?   행복한 순간은 카메라 셔터 속도 만큼이나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짧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사는 방법은 순간을 위해 일하고 살고 생각하는 이라고 이해해도 될지 모르겠다. 쿤체의 부인 엘리자베트 쿤체는 체코 출신의 의사였는데, 사람의 소설같은 만남과 아름다운 인연을 가꾸어온 이야기를 모처럼 읽었다. 책에서 쿤체 시인과 부인에 대해 부분을 읽노라면 이들 부부처럼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극진히 대하며, 인간에 대해 깊은 신뢰를 보여주었던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정도다. 해를 마무리하며, 12월이 시작하는 삶에 대한 진실한 애정이 담긴 쿤체 시인의 말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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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9] 설교 (The Serman)


 

[9장의 기본 줄거리]


고래잡이 예배당 들어온 매플 목사가 배의 선두 모양을 설교단위로 올라간 이후 예배가 시작되었다. 자리정리를 하고 기도를 목사는 요나의 이야기를 담은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시작한다.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요나가 구원받은 이야기 통해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기쁨을 얻을 것을 주문한다.

 




이번 9장의 배경은 고래잡이 예배당이며, 매플 목사는 구약 성서의 요나서 나오는 이야기를 담은 찬송가를 부르며 설교를 시작한다. 설교의 소재는 역시 요나서 나온 이야기이다. 목사는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던 요나의 구원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 통해 교훈을 주고자 한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은 요나에게 어서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쳐라 주문한다. 요나는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하늘의 명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도망치려 했다. ‘인간이 만든 타고 머나먼 카디스(오늘날의 스페인에 위치)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요나가 하느님을 피해 배를 타고 도망치려던 부두는 요파(Joppa)’라고 되어 있다. 매플 목사는 요파가 현대의 자파(Jaffa)’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자파라고 하면 가지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자파에 얽힌 이야기


자파(Jaffa) 현재의 지도상으로 지중해의 동쪽 해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도시로 북쪽의 대도시 하이파(Haifa) 남쪽 이집트 경계 근처의 가자(Gaza) 지구 사이의 중앙에 위치한 해변 도시다. 아래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의 지중해 해안에 자파(Jaffa) 확인할 있으며, 지중해의 서쪽 반대편에 스페인이 있음을 있다. 상당한 거리다. 요나는 이렇게 곳이라면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래 사진들은 내가 올해 출장업무로 잠시 들렀던 이스라엘의 자파 지역 해변가 모습이다. 해변의 남쪽은 자파의 지역(해안 절벽이 있는 부분) 위치하고, 해변의 북쪽은 여러 나라의 대사관들과 호텔이 모여 있는 현대적인 관광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방문한 시기는 2월이었으므로 북반구의 겨울이었지만, 이곳에는 커다란 야자나무가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은 이곳이 겨울에 풍요롭다고 했다. 들판은 푸르렀다. 대신 여름에는 메마르고 황량하다고 했다. 방문한 자파지역은 날씨가 맑았지만 비가 왔다가 해가 비치기를 반복했다. 이곳의 기후는 으레 그렇다고 한다. 변덕스러운 기후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법하다







 

'야파' 혹은 '자파'라는 지명을 듣고 지명이 등장하는 문헌이 생각났다. 독일 작가 W.G. 제발트의 이민자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174-180) 보면 지명이 나온다. 소설에서는 화자 할아버지의 비망록에 나온 행적을 따라가는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 터키를 지나 레바논 지역을 지나는 대목이었다. 기억으로는 서쪽 항구도시 자파 지역에서 동쪽의 예루살렘까지 차로 2시간 정도면 있었는데, 아델바르트는 말을 빌려 12시간을 달렸다고 나온다. 아마 제대로 길이 없고, 언덕과 계곡이 많은 지역이라서 그랬을 법하다. 이들이 쓰레기로 즐비하며 똥을 밟으며 걸어갈 밖에 없다라고 묘사하는 예루살렘의 거리는 자파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낮은 언덕들이 많았다. 소설의 화자는 언덕 사이의 협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늘날 협곡들은 대부분 천년의 역사가 남겨놓은 폐기물로 가득하다. 어디서나 오물들이 흘러 든다. 그래서 수많은 우물의 물은 이제 마실 없게 되어버렸다. 한때 실로암의 못으로 불렸던 샘물은 이제 썩은 웅덩이나 오물 구덩이에 지나지 않으며, 수렁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온다. 매년 여름 도시를 덮치는 전염병의 원인이 바로 독기일 것이다. 코즈모는 도시가 너무 역겹다고 거듭 말한다.” 


자파든 예루살렘이든 황량하고 불결한 여름에 특히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을 거역하고 예수를 죽이는데 일조했다고 비난받았던 유대인들에게 불결한 삶의 조건과 무시무시한 전염병의 징벌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일까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의 원형이라는 영감을 제공했던 이탈리아의 문인이자 정치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평전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루시 휴스핼릿 지음, 장문석 옮김, 글항아리](815)에서도 자파 나폴레옹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폴레옹은 1798 이집트 원정을 떠나 인근 지방을 공략했는데, 바로 자파에서 페스트가 돌아 프랑스 병사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1799 3 11 전염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병원을 방문, 희생자들을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평전의 저자 루시 휴스핼릿은 나폴레옹이 실제로 희생자들을 만지거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퇴각하여 희생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한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나폴레옹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이야기로 자주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나폴레옹의 측근 혹은 숭배자들, 후대인들이 만들어낸 신화임을 우리는 알지만, 서구인들에게는 유명한 이야기이고, 여러 문헌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이다. 동양의 고사성어에 배경이 되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후대의 단눈치오가 사례를 지도자가 자신을 광고하는데 기가막히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홍보의 달인단눈치오가 이야기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궁금해진다.  평전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에서 부분을 인용해본다.

 

(단눈치오) 페스트가 피우메에 창궐했을 태연히 병원을 방문함으로써 일찍이 자파에서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질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서 명성을 날린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814)

 


이탈리아 정부와 대항하여 북부의 피우메 지역에서 자신만의 도시를 세우고 일종의 괴뢰정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단눈치오. 이탈리아 역사상, 아니 세계사적으로도 특이하고 독특한 인물의 행보에도 나폴레옹 얽힌 이야기를 자신에게 활용하는 천재성을 지녔다. 그리고 배경에 바로 자파 관련한 이야기가 있었다



 

자파라는 지역에서 있었던 나폴레옹과 페스트의 이야기는 롤랑 바르트의 저서에도 등장한다.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기록인 밝은방에서 스쳐가듯 나폴레옹의 자파 이야기 언급한다.

 

예컨대 보나파르트가 방금 자파의 페스트 환자들을 만졌다. 그가 손을 떼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진은 순간적인 작용을 이용하여 빠른 장면을 결정적인 순간 속에 부동화한다.”(49)

 


밝은방현장에서 포착하기 제목의 14장에서 바르트는 사진을 감상자에게 상처를 주는 요소인 푼크툼과는 다른 충격 주는 요소를 이야기한다. 사진이 전해주는 놀라움 충격이라는 범주를 다섯가지로 정리했다. 중에서 시야의 일부에만 초점을 있는 인간의 주시성과 다른 사진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자파와 나폴레옹의 이야기 언급한 것이다. 사진을 보면 사진가가 주목한 대상, 예컨대 나폴레옹이 페스트 환자를 만지고 손을 떼는 장면 외에 인화를 시야의 구석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알려진 이라고 바르트는 이야기하지만 회화와 사진의 기본적인 차이는 시간성의 전개가 개입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것이다. 화가는 바르트가 누멘(영력)이라고 표현한 능력으로 순간의 동작을 표현하지만, 과정에는 시간의 흐름이 개입되어 있다. 반면 사진에는 순간에 모든 것이 고착화되어 인화물에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이 개입되지 않는다. 다만 회화나 사진에서는 사람의 눈이 주시할 있는 영역을 벗어난 부분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이질감과 같은 놀라움의 충격 주는 것인데, 바르트는 사진의 이러한 특성을 고찰하면서 자파와 나폴레옹의 유명한 이야기를 언급했던 것이다.

 



자파와 관련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다시 매플 목사의 설교로 돌아가본다. 자파 부두에서 배를 타고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요나는 우여곡절 끝에 뱃삯을 내고 타르시시로 달아나려 했다. 타르시시는 오늘날 카디스라고 부르는 지브롤터 해협, 그러니까 요나는 지중해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인 스페인 남쪽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지도 참조). 아무런 짐도 없던 요나로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선원들은 요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멜빌은 매플 목사의 설교를 빌어 당시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황금만능주의라는 세상의 원리를 비판하고 있다. 매플 목사는 선장은 상대가 무일푼일 때만 사람의 범죄를 폭로하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하며, ‘ 세상에는 죄인도 돈만 내면 여권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마침내 요나는 통상 운임의 배를 요구하는 선장에게 운임을 치르고 승선한다. 참고로 구약 성경의 요나서에는 이렇게 자세한 사항은 나오지 않는다. 설교자의 상상이 가미된 이야기로 보면 되겠다.


 

소설 속에 묘사된 요나는 비싼 운임을 냈지만, 선장은 문이 잠기지 않는 데다 홀수선보다 밑에 있는 구멍같은 좁은 방을 요나에게 배정한다. 홀수선은 배의 수위를 알아보는 표시로, 여기서 요나가 배정받은 홀수선 아래의 방은 해수면 아래에 위치한 방이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창문도 없이 외부의 풍경도 없는 방이기도 하다. 이윽고 출항한 배는 무서운 폭풍우를 만나 요동치고, 깊은 잠에 빠졌던 요나를 선장이 깨운다. 배의 선원들은 이들이 처한 모든 위기가 도망자 혹은 죄인이라는 의혹이 있는 요나 때문임을 의심한다. 요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과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은 사실을 고백한다. 선원들은 요나를 동정하면서도  폭풍우가 가져온 난국이 요나 때문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결국 요나는 선원들에 의해 바다에 내던져지게 된다. 매플 목사의 해석에 따르면 고래의 모습으로 변한 하느님이 요나를 삼키고 바다 한가운데 데려가는 것이다. 고래 뱃속에서 회개한 요나는 지옥의 있다가 고래가 다시 공기와 땅이 있는 곳으로 올라와 요나를 밷어버린다. 홀수선 아래(심연의 세계) 있던 요나는  폭풍우 속에서 바다로 내던져지고, 이어서 고래 속에 삼켜진 요나는 다시 바라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바다라는 심연 공간, 회개의 공간, 지옥의 공간에서 세속의 세계, 빛이 있는 육지, 구원의 공간으로 나오는 구조에 주목해볼 있다


 

이제 매플 목사의 설교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화가 있을 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동시에 오직 주님을 받드는 이에게 최고의 기쁨 함께 한다고 말하며 신에게 귀의하라는 교훈으로 설교를 마무리한다. 이제 조만간 각자 목숨을 기나긴 고래잡이 생활을 시작해야하는 사람들에게 매플 목사가 신에게 모든 것을 믿고 신에게 귀의하라는 설교는 유일하게 기댈 있는 안식처가 것이다. 이들은 목사의 설교를 의심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요나의 구원과 기쁨을 통해 오히려 이들의 운명을 책임지는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가지 , 지난 8장에서 나는 매플 목사의 설교단 뒤에 걸려있던 폭풍우 그림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 그림과 많이 닮았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폭풍우 그림은 이번 (9)에서 목사가 이야기하는 설교 (성경의 요나서’) 격랑의 바다에 던져진 요나의 이야기와 연결이 되고 있으며, 다시 병들거나 죽은 흑인 노예들이 바다로 던져지는 장면이 담긴 터너의 그림을 연상케한다. 물론 이러한 모티프는 작품으로서 모비딕 결말과도 연결되며 일종의 복선으로서 사용되고 있음을 짐작해볼 있겠다.

 


 



 

참고서적


[1]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루시 휴스핼릿 지음/장문석 옮김 [글항아리]

[3]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 [대한성서공회]  요나서

[4] 이민자들 W.G. 제발트 지음/이재영 옮김 [창비]

[5] 밝은방 롤랑 바르트 지음/김웅권 옮김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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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를린

이은정 지음 |  [창비]

 

 

[독서 일기]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와 만남을 통한 신뢰 구축에 주목한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아닌 주제에 대해 우리의 연구자와 저술가들이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펴낸 결과물은 언제나 반갑다.  다시 말해 번역을 거치지 않고, 우리나라 연구자가 소화하고 판단하여 나온 글과 연구물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은 우리 나름의 지식과 지혜로 이어지기에 점점 기대를 하게 된다. 우리 나름의 관점이란 프리즘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지적 성숙도를 높여줄 있기 때문이다. 국내의 어려운 출판 시장과 독서 인구의 감소라는 우려에도 이번에 읽고 있는 베를린, 베를린 같은 도서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한편 베를린, 베를린 독일에서 오래 생활하며 연구를 해오고 있는 이은정 교수의 연구 결과물이지만, 학술서적이라기 보다는 대중교양서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오늘까지 절반정도 읽었는데, 책이 대중서라고 해도 다소 아쉬운 점은 남아있다. 문학이나 소설이 아닌 이상 이런 성격의 도서에 참고문헌이나 주석, 그리고 용어 색인 정도의 구성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 국내 연구자들이 대중교양서를 저술할 이런 부분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출판사의 정책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선 책의 구성면에서 살펴볼 이런 부분이 눈에 보인다. 도서의 주제는 흥미로운데 구성상 미흡해 보이는 점이 있기에 많이 아쉽기 때문이다. 참고문헌이나 주석 등의 구조가 갖추어 져야 개인적으로 나중에 다시 참고를 하거나 찾아볼 내용이 있을 , 혹은 참고 문헌을 알고 싶을 추적하여 도움을 받을 여지가 있을 것이다


 

내용에 관한 보다 자세한 감상은 나중에 리뷰에서 고민하겠지만, 특히나 역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2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들이 상당히 흥미롭다. 다만 서술방식면에서 우선 시간순으로 전개가 되고 있지만, 베를린이 겪어온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배경 설명이 유기적인 이야기로 엮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반복 설명되는 부분은 내용을 되새김하기에 좋은 반면, 비교적 얇은 도서에서는 보다 간결하게 진행하면서 사건 간에 보다 유기적인 설명이 있다면 더욱 효과적이고 재미있게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며 읽을 있을 같다.

 


아직 책을 절반밖에 읽지 못했지만 베를린이란 공간의 특수성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2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의해 분할 통치된 독일의 동독 지역 가운데 베를린이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베를린이 다시 4개국(승전연합국) 의해 분할 점령된 내막에 대한 점은 사실 자세히 알진 못했다. 아마 내가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많이 졸아서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어쨌든 오늘 독서를 통해 저자가 전달하는 간결한 설명으로 배경이 되는 역사를 이해할 있게 되었다. 특히 베를린 주민들이 겪은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민감한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물론 베를린의 상황은 이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정치경제적으로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유형, 무형의 교류는 거의 항상 지속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같다. 저자는 특히 분단을 겪고있는 대한민국의 분단 상황과 베를린의 분단 상황을 비교하며 차이점을 부각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분단된 독일이 통일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민간 차원에서 교류가 끊이지 않았고, 협상을 시도했다는 점은 처음 알게 사실이다. 독일인들은 저자가 제시하는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원칙을 통해 동독과 서독 정부가 수용하고 노력을 했다고 전한다. 물론 동독의 경우, 서독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아져갔지만 서독 측에서도 동독이 끝없이 요구하는 경제적 지원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기 보다  인내심을 갖고 경제적인 지원을 지속하여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모색한 점은 분명히 우리가 고려하고 배울 만한 부분일 것이다.

 


물론 베를린의 상황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구체적으로 다른 점이 많다. 베를린은 동독 정부가 관할하는 영토의 가운데에 섬처럼 존재하는 특수성에, 도시가 분할되어 동서 베를린 양측이 상당기간 왕래를 하고 있던 상황도 무시할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조건에 맞는 합리적인 방법을 궁리하고 모색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여겨 볼만한 것은 만남 없이 신뢰를 쌓을 없는 법이다”(177)라는 원칙이다. 어렸을 적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뉴스에서 기억이 있다. 감격한 베를린 시민들이 장벽 위에 올라가 기쁨을 나누거나 무너뜨리는 장벽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보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람들은 제한적이나마 서로 만나 교류하고 교감했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아왔다는 점이 책의 전반을 읽는 동안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 이해된다.   

 


2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은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와 미국,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진영의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특수한 공간이 되었다. 이런 기본적인 구도는 한국전쟁으로 대표되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냉전 구도가 발현되었다는 점이 유사하다. 다만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전쟁이 발발하여 남과 북이 분단되었고, 엽서 왕래하기 어려웠던 시간을 오래 인내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는 분단 상황과 우리의 상황 사이의 차이점이다. 그러므로 독일인들이 겪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이점에도 주목하고 화해와 공존의 실마리를 찾아야 것이다. 특히 베를린 주민들이 베를린을 중심으로 수많은 문제점을 제한적이나마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분리가 불가능한 사회적 인프라망 존재했다는 점이다. ‘공존을 통한 협력 대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기회라고 대목에서 나의 아쉬움과 부러움이 교차했다. 우리에겐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책의 절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베를린 장벽 붕괴와 통합의 과정) 다루어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베를린과 독일 현대사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기대가 남아있다. 우리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부르는 서독 정부의 경제 부흥은 분명 동서 대결 구도 속에서 서방세계의 물적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한국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 부흥에 힘입은 크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세계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더불어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진행된 냉전 구도의 영향이 전방위 적인 위력을 발휘했음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독일작가 W.G. 제발트는 작가 나름의 독특한 소설 양식을 통해 전후 독일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드러냈지만, 사회의 이면에는 나름의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노력들이 많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특히 정치인 브란트(서베를린 시장과 연합정부 수상을 역임한 인물) 원칙, 베를린 시민의 고통을 완화한다 원칙을 통해 이루어진 경험이 통일된 독일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여겨 볼만한 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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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으로

(원제: Reader, Come Home )

매리언 울프 지음 |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읽는 에서 저자인 매리언 울프는 난독증과 창조성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에서 뇌의 가소성(plasticity)’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던 같다. 독서를 하게 되면 뇌의 여러 부위가 활성화됨을 알게 되었다. 뇌의 신비함은 이런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신경 세포의 연결 방식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일 것이다. 저자는 수많은 지성인들 중에 (말이 아닌) 글을 늦게 깨우친 사람들, 심지어 난독증으로 읽기에 어려움을 가졌던 사람이 많음을 언급하고 있기도 한다. ‘읽기 행위가 우리의 유전자에 예비된 기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문화적으로 익히고 만들어주어야 하는 기능이라는 말이다


 

요즘 모든 부모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아이들이 언제부터 글자를 배우고 책을 읽도록 해야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조카들이 여럿 있는 경우도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독서에 관한 사항에 보다 관심있게 주목해 지켜보고 있다. 왜냐하면 돌도 지나지 않은 조카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의 화면에 몰입한 손가락으로 영상을 넘기며 보거나 전화를 하는 광경을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당장은 아이가 울지 않고 조용히 있으니 부모는 안심하지만, 스마트폰의 화면이 아이의 관심을 붙들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면 어렸을 때부터 전화기를 소유하면서 화면과 또다시 떨어질 없는 사이가 되고 만다. 나는 매리언 울프의 책을 읽고나서 이런 부분이 염려스러웠는데, 최근에 출간한 두번째 다시, 책으로 바로 이런 부분에 대한 염려와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라고 보인다. 아직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중에서 젊은 세대의 공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눈에 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공감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대다수가 몰랐던 불안한 현실입니다. (…) 지난 20년간 젊은이들의 공감 능력은 40펴센트 감소했다고 합니다. 특히 지난 10 사이에 말입니다.”(88)

 


어딘지 익숙한 내용이 아닌가. 물론 여기서 나는 흔히 요즘 젊은이들은 이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주변 지인들로부터 젊은이들에게 무언가 공통적인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 시작했다. 이런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의문을 저자인 매리언 울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연구자들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 보이고 있다. 저자가 언급한 터클 교수의 말에 따르면 젊은 세대가 온라인 세상에서 현실 속의 대면 관계를 희생시킨 것이 공감 능력을 급감시켰다 한다. 이어서 저자는 결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개인적 정체성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까지 바뀌고 있습니다(89)”라고 이야기한다. 광고의 카피문구나 과학자들이 하는 중에 기술이 사람들을 연결시킨다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인터넷 기술을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물리적 연장(extension)으로서의 연결성은 증가했지만 마음(공감) 이러한 기술의 전개방식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이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증가시켰지만 한편으로 기술이 사람들 간에 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공감은  타인을 동정하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타인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에도 관계한다고 이야기한다.  뇌영상 연구를 통해 느낌-사고의 신경망 전체가 공감에 관여한다는 결과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특히 우리가 어떤 소설을 읽는다고 , 다시 말해 집중해서 읽을 ,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묘사를 감각적으로 상상할 있게 되고, 심지어는 등장인물들의 느낌과 행동 관련된 영역도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설 속의 인물, 혹은 실생활에서 상대방에 대한 공감능력은 이런 독서를 통해 분명히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개인적으로 보았을 어렸을 때부터 연극 활동 한다면 책을 깊이 읽고 타인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을 폭넓게 키워나갈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사를 외움으로써 몰입과 텍스트에 대한 깊이 읽기의 바탕이 되고, 이를 행위와 감정을 상상하고 이를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 저자가 이야기하는 공감하는 뇌를 형성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작품의 의미에 대해 계속하여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연극에 참여한 경험은 없는 이들에게는 책을 깊게 몰입하여 읽으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공감하며 읽는 과정으로 효과를 얻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 저자는 내부의 배경 지식 외부 지식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부의 배경 지식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책을 깊이 읽고 얻은 지식과 느낌의 경험 모두를 의미한다고 이해된다. 그리고 외부 지식 (진위가 명확하지 않은) 검색을 통한 정보나 인터넷 뉴스 등을 염두에 두면 같다. 저자는 점점 내부의 배경 지식 줄어들고 외부 지식 대한 의존도가 커져가는 상황을 우려한다. ‘외부 지식 대한 의존도가 크다는 것은 진위 구분기능이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있다. 부분은 최근에 읽은 미치코 가쿠타니의 저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서 사실 거짓 정보혹은 개인적인 의견 가려지는 현상과 연결 지을 있겠다. 가쿠타니는 이런 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 대한 비판으로 접근하고 있다. 대다수가 가쿠타니의 견해를 비판하고(예를 들어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다 같은 비판) 동의하지 않아도 나는 그녀가 용기 있게 제기하는 의문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99.9% 주장하는 어떤 결론 혹은 암묵적인 사회의 공통 관념에 대해 딴지를 걸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외부 지식 과연 맞는지에 대해 검토해보라는 요구를 받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부 지식 점점 의존하게 되는 현상을 저지할 있는 관점이자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책읽기의 전문가 답게 매리언 울프는 책을 깊이 읽기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우리의 배경지식과 깊이 읽기의 호혜적 관계 주목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부분을 역설적으로 어휘의 마태 효과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의도하는 마태 효과 신약 성서 마태 복음(25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어휘의 부익부 빈익빈효과라고 있다. 달리 말하면 책을 폭넓게 제대로 읽은 독자는 앞으로의 읽기에 적용할 자원이 점점 많아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용할 자원이 적어져 추론과 연역, 비유적 사고의 기초가 부실해지고 결국에는 가짜 뉴스든 날조 뉴스든 불확실한 정보의 희생물로 전락하기(97)”쉽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책을 제대로 깊이 읽으면 우리가 가짜 뉴스의 희생물이 위험을 줄일 있다는 의미가 된다.

 


매리언 울프의 글은 번역과 무관하게 술술 읽히지 않는다.  특히 읽는 조금 읽기 힘들었는데, 아마도 생소한 분야의 개념에 접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군더더기 없이 촘촘하게 얽힌 저자의 글쓰기 방식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번에 나온 다시, 책으로 읽기 편하다. 아무래도 저자의 번째 책을 공들여가며 읽어서 수도 있다. 그녀의 대로 번째 책을 천천히 깊게 읽은 경험을 통해 내부의 배경지식 조금 마련되었고 이어서 새로운 지식이 들어와 이해되는 과정에 도움이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읽는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분명 다르다고 말할 있겠다. 독자로서 책을 읽는 과정은 저자와 대화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지 신빙성 있게 다가온다. 아직 책을 읽어가는 과정이지만 오늘 하루 메모해둔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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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자리에

(원제: Everything In Its Place)

올리버 색스(Oiver Sacks) 지음 | 양병찬 옮김 |  [알마]

 



도서관 읽으며 아날로그는 에피파니의 경험을 예비한다

 

언젠가 아날로그(analogue) 에피파니(epiphany)라는 단어를 써둔 메모지를 최근에 발견한 적이 있다. 내가 단어를 써두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상 앞에 메모지를 붙여 놓고 있다가 이유를 다시 깨닫게 순간이 있다. 바로 신경과 전문의로 활동하며 수많은 글을 썼던 올리버 색스의 모든 것은 자리에 Everything In Its Place 읽을 , 메모지의 진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었다. 자서전 온더무브 On The Move 자신의 인생을 연대기적으로 돌아보며 정리한 글이라면 책은 자신이 평생을 걸쳐 애착하던 모든 대상 담았다. 생소한 의학용어가 등장하곤 하지만 올리버 색스의 글쓰기와 옮긴이의 정성어린 주석을 통해 용어에 집착하지 않는 충분이 읽어 나갈 있다.

 

중에서  도서관편을 보면 올리버 색스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자신의 실험실외에 아버지의 서재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면이 책으로 빼곡히 들어찬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슬렁거리며 발견 책들과 책들을 읽으며 저자가 경험했던 달콤하고 강렬한 희열을 전한다. 3-4 이미 읽는 법을 익힌 올리버 색스에게 부모님의 서재는 어린 시절 기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말한다. 짜여진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학교보다 도서관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는 올리버 색스는 아마도 이러한 자신만의 주도적으로 찾고 발견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 도서관에는 많은 책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상 물성을 가진 책을 찾지 않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 위해 책들을 줄곧 보관하지는 않을 같다.

 

올리버 색스가 1990년대에 이르러 느낀 변화도 바로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 놓고  책을 읽곤 하던 올리버와 달리 젊은 학생들은 서가를 외면하고 컴퓨터로 도서를 검색해서 바로 찾아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는 오래된 책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먼지가 쌓여 있던 도서들을 처분하고, 넘쳐났던 서가가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런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정말 오래된 고서들이 파손되거나 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관심있는 이들에게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디지털화가 도움이 되는 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이 디지털화되었기에 책을 처분해도 된다는 생각을 올리버는 일종의 분서갱유 비유한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  Fahrenheit 451에서 책을 소유하는 모든 시민을 죄악시하고 책을 말그대로 불태우는소설 속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던 올리버에게 책과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대한 상실감은 대단히 컸을 터이다. 태어나서부터 태블릿을 손가락으로 넘기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 올리버가 느꼈던 상실감을 이해할 있을까. 이것은 나만의 노파심일까?

 

무엇보다 올리버처럼 도서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는 경험, 권의 책으로 인해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게되는 가능성을, 디지털 도서관을 이용하며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20여년 중고서점에서 잠시 일할 때를 기억한다. 마침 중고서점에서는 찾는 책을 검색할 있게 전산 목록을 만드는  데이터베이스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사실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때이고, 약간의 관심만 있었을 때였다. 1년에 읽는 책이라곤 4-5 정도 되었을까. 중고등학교 학교 도서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중고서점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느 위치에 어느 분야가 주로 모여 있으며,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이후 내가 좋아하게 인문분야 책장에 주로 관심을 갖고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책을 재배열하기도 하며 일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때의 경험이었을까, 나는 검색으로 원하는 책을 찾더라도 책방 주위를 배회하며 서가마다 정리된 책들을 구경하곤 다. 그리고 그 결과 내가 호기심을 가지게 된 주제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는 어린시절부터 도서관에 머물며 책이 꽂힌 대부분의 서가를 거닐면서 우연하고 새로운 책과의 만남을 즐겼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아날로그 에피파니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언젠가 내가 단어들을 메모지에 적어둔 이유는 아날로그 (종이에 인쇄된) 신문과 디지털 신문을 생각해보다가 떠오른 단어였다. 내가 신문 구독을 언젠가부터 중단하게 이유는 사실 요즘 신문 구독자가 줄어들다보니 새벽에 배달되던 신문이 출근시간이 한참 지나 배달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피곤에 지쳐 저녁에 집에 돌아와 맞는 신문을 읽을 기력이 없을 때가 많았다. 신문만 점점 쌓여가고, 신문을 보관하는 공간이 부족하기에 가족들의 원성만 높아져갔기 때문이다. 디지털 신문의 장점은 원하는 과거의 기사를 검색하여 효율적으로 찾아볼 있다는 점이 내게는 가장 장점으로 보인다. 반면  1면부터 종이를 넘기며 훑어보게 되는 아날로그 신문에서 나는  새로운 사건, 흥미로운 책이나 행사에 관한 정보, 사회의 이슈들을 우연히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올리버 색스의 도서관 경험과 비교하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신문을 훑어보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을 줄을 쳐가며 읽고, 스크랩하였고, 관련된 책을 찾아보거나 사회의 현상에 의문을 가져보던 때가 나의 호기심이 최고로 성장했을 때였다. 새로운 생각거리, 지식 습득의 기회를 만들게 되는 우연한만남이 아날로그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가능했다. 자신의 관심과 호기심에 따라 산책하고 소요하는 과정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나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 사이의 우월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가 내게는 전혀 다른 매체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매체는 서로가 갖는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 보완적일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이유로 내가 메모지에 아날로그 에피파니 적어두었던 것인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올리버의 책을 읽다가 다시 이러한 에피파니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도서관에서 책은 물론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대해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책에는 대체될 없는 무엇, 겉모습, 향기, 중량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67)  

 

서로 보완적일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방식을 함께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이라는 명목 하에 아날로그 매체를 곧바로 폐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까. 올리버 색스도 정기간행물과 책의 물성이 우리 몸과 상호작용하며 각인되어버린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아울러 물성을 가진 매체를 통해 호기심을 불러내는 우연한만남의 가능성을 상실해버린 허탈감을 말하려 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강력한 즐거움은 많은 책을 읽는 것에 있지 않다. 나는 중년이 되어 좀더 진지하게 독서를 생각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싶은 생각에 조바심을 적이 있다. 이제는 주변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이들을 보아도 부럽지 않게 되었다. 늦게 독서를 시작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어온 독서가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올리버 색스처럼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저작을 우연한기회에 발견하고 인생의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만나는 경험을 소망하게 되었다. 느릿느릿 소요하며 좋아하게 혹은 흥미를 유발한 책들을 우연히 만나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나아가 저자의 존재를 느끼며, 책을 읽고 읽음으로써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경험을 있기를 바란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정보를 효과적으로 찾아내고, 화면을 통해 어디서든 수많은 책에 접근할 있을 몰라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우연한 만남, ‘에피파니 순간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에 디지털 매체와 다른 아날로그 매체만의 고유한 성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이 최상의 혜택을 얻기위해서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매체들이 공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매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지털 매체가 아날로그 매체를 대체하는 성격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여기에 새로운 지식과 지혜에 대한 우연한 만남, 그리고 에피파니 순간이 아날로그 매체에만 예비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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