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도둑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 박선영 옮김 |  [흐름출판]

 



 

소설인 알고 읽기 시작했으나 실화를 바탕으로 나온 책이라고 한다. 이라크 난민이 재정착을 있게 돕는 일을 하던 커크 월리스 존슨은 골치 아픈 문제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플라잉 낚시를 하곤 했다. 어느 저자는 플라이 낚시 가이드로부터 해괴한 깃털도둑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곧바로 사건에 집착하게 되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영국 왕립음악원의 유학생이자 장래가 촉망받던 플루티스트가 희귀한 조류 가죽 299점을 훔쳐 달아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점이라도 훔치려고 해도 어떻게 가능했을까 의문을 가졌을 텐데말이다. 책을 통해 영화에서 플라이 낚시 외에 플라이 낚시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내가 송어와 연어를 잡는데 다른 플라이를 써야 한다는 사실도처음 알게 되었다. 새로 알게 이들의 세계는  정말이지 상상 이상의 세계였다.   



     문제는 플라이 낚시 자체가 아니었다. 연어나 송어의 습성과 생태까지도 면밀하게 고려한 미끼, 그러니까 화려한 색의 깃털을 사용한 플라이 제작이 하나의 오타쿠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정작 문제는 플라이를 만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깃털이 문제였던 것이다. 실제 새들 중에서도 깃털 색이 아주 화려한 극락조, 집까마귀, 케찰 등의 새들이 욕망의 대상이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집까마귀의 경우는 가슴팍에 조금 있는 빨간 깃털을 플라이 제작에 사용하기 위해 많은 집까마귀가 필요하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여인들의 모자에 박제 처리된 극락조 마리를 통째로 올려 놓은 패션마져 등장한 것을 보면 오싹하게 전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깃털도둑 이야기는 인류가 이성으로 대표되는 자신감의 극단적인 사례, 예컨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있다는 자신감과 같이 인간의 독단이 얼마나 강력하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 보면 미국인들이 수많은 들소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저자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19세기 말에 미국 들소는 6 마리에서 300마리까지 줄었다고 한다. 길게 잡아 19세기 후반부 50 동안 이루어진 일이라고 계산해도 50 매일 3 마리가 넘는 들소를 죽여야 나올 있는 수치이다. 이것은 기차를 타고 가던 개척민들이 심심풀이로 들소들을 쏘아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십억 마리였던 여행비둘기는 1901년경 거의 멸종될 정도로 총질을 당했는데, 1914 마지막 여행비둘기가 동물원에서 죽었다고 한다. 여행비둘기는 이제 멸종하고 없는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이런 일들의 맥락은 중단되거나 의식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가 되풀이 된다고 말하듯, 인간의 과오, 아니 인간의 오만한 독단은 되풀이 되어 역사에 등장할 뿐이었다. 극락조 마리를 모자 장식으로 죽이게 , 그리고 책에서 등장하는 플라이 제작에 희귀한 깃털을 사용하는 등의 사례는 여행비둘기나 들소에게 심심풀이로 총질을 해대던 인간의 빗나간 인간중심주의, 독단이 다소 다듬어진 사례에 불과하다고 보인다.

 


    깃털도둑 흥미로운 소재와 스토리텔링을 전달하는 논픽션이다. 실제 사건을 통해 희귀한 깃털에 대한 집착과 욕망, 그리고 오래된 (혹은 이미 멸종되었을지도 모르는) 동물들의 가죽을 보관하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더해져서 발생했다고 있다. 하지만 가지 부분은 다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영화처럼 초반에 사건이 벌어지고, 저자가 책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부분이 나온 뒤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나 로스차일드 경의 박물관에 대한 배경 설명이 다소 장황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아울러 저자가 조사하여 제시한 여러 배경 지식이나 사건을 재구성하여 연결함에 있어서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점이 존재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글이 장마다 따로 존재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훔친 새들이 사람들에게로 팔려나간 저자가 이를 다시 추적하는 과정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팔려 어디론가 사라졌기에 되돌릴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해도 작업의 마무리 혹은 결론을 보다 분명하게 정리해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인간은 앞으로도 인간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어느 동물을 멸종의 위기로 몰아넣게 것이다. 책은 우리의 모습을 거울에서 확인하듯 그릇된 욕망을 품고 있는 인간의 단면을 비추어 주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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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를 울린 과학책

이지유 외 9명 지음 |  [바틀비]



요즘 들어 서평글을 읽는 일이 많아졌다. 우선 이유는 내게 익숙한 독후감과 서평과의 차이가 무엇일지 궁금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도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은 느낌 뿐만 아니라, 책에 언급된 사항에 대한 서평자의 생각이 궁금했다. 과학책에 대한 서평을 읽어보는 최근에 시도해보는 일이다. 과학도 결국 사람의 일이기에 과학지식이라는 결과물만이 아니라 과정을 들여다보면 곧바로 인간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있다. 최근에 알게 과학책방 갈다’(갈릴레이와 다윈에서 따온 말이기도 하고, 밭을 갈다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에서 여러 과학자 과학 저술가들이 읽은 과학책 혹은 과학에세이에 대한 서평을 모은 과학자를 울린 과학책 틈틈이 읽고 있다. 오늘은 여러 작가 중에서 과학 논픽션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지유 작가의 서평글을 읽었다.  호프 자런이라는 과학자가 랩걸 읽고 이지유 작가가 서평이었다.  오늘 내가 서평을 선택한 이유는 아무래도 다른 저자들이 읽은 책들 보다 책의 제목을 많이 들어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2017 국내에서 출판된 책은 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식물에 대한 과학적 발견 뿐만 아니라 과정을 그려내는 스토리텔링으로 인기를 얻었다. 책을 저자의 이력을 보니 지구물리학자로 보이는데, 하와이에서 화석삼림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분야에 대한 글쓰기와 여성 과학자라는 모델이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은 같다. 아울러 과학자로서 경험을 쌓은 이지유 작가의 이력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기에 더욱 책을 주목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지유 작가가 서평에서 관심을 부분은 과학 지식이나 험난한 과학적 발견의 서사, 혹은 여성 과학자로서 어려움을 극복한 승리의 과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지유 작가가 서평에서 언급한 것은 과학자를 과학자로 만들어준 요소였다.   요소는 바로 호기심이라는 것이었다. 호기심은 자기를 둘러싼 모든 대상, 모든 세계가 자신에게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도록 하는 감수성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이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과학 연구가 당장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야 하고, 쓸모가 있어야 한다면 인류가 달에 있었을까?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우주의 다양한 기본 입자들에 대한 정보도 여전히 가설로 존재했을 것이다. 쓸모를 갖춘 무언가를 얻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쓸모를 얻는 과정에도 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직 랩걸 읽지는 못했지만, 책을 읽게 되면 이지유 작가가 지적하고 있는 과학자를 과학자로 만들어주는 호기심 관한 관점도 염두에 두고 읽게 같다.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호프 자런의 연구는 되는 연구가 아닌연구라고 한다. 하지만 연구에는 돈이 필요하다. 모든 연구자들에게 공통되고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일 것이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호기심과 연구비 마련이라는 현실적인 목표사이에서 고민한다. 호프 자런과 같이 호기심 쫓으려면 그만큼 어려운 여건과 비판적인 견해를 극복해야할 일이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앎에 대한 욕구, 의지 같다.

 



수능시험이 치러지고 오래되지 않았다. 요새 부쩍 주변 사람들의 자녀들에 대한 고민거리를 많이 듣는다. 학교 현장에 관한 이야기며, 학원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기만 해도 나의 학창 시절과 다른 장면들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에 가서야 삐삐라는 것을 보았던 시절이다. 내가 요즘들어 부쩍 안타까워하는 중의 하나가 공부 대한 오해다. 내가 의도하는 공부는 시험 공부 아니다. 자신을 위한 진짜 공부 학창 시절에 맛보았으면 어땠을까 아쉬워한다. 그리고 그보다 전에 혹은 공부를 하며 스스로가 앎에 대한 의지 발견하는 경험이 학창 시절에는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나는 이런 부분을 알고 싶다라거나, ‘평생 이것에 대해 천착해보고 싶다라는 뜻을 세우고 의지를 두텁게하는 말이다. 혹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명이 물론 학업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자신의 발견하고 이를 단단하게 다지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도 늦었지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진짜 공부 해보고 싶다. 오랜 시간 호기심이란 영역이 내게는 무관한 영역인 느껴지는데, 이제는 사회 경험과 독서 경험이 다시 호기심 되찾게 해주는 같다. 내가 겪은 일들, 사회현상은 이렇게 되었을까 궁금해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고민한 발자취를 발견할 것이다. 아마도 거의 예외가 없을 것이다. 나는 다소 늦게 치열하게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발자취를 이제야 발견하고 따라가기 시작했을 뿐이다. 물론 늦게 시작한 것이 아쉽지만, 내가 보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지점에 호기심을 갖고 몸을 움직였을지는 의문이다. 이지유 작가가  랩걸에서 찾은 호기심 요소는 인생 후반의 화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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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전에 읽었던 시인의 중에서 기억에 특히 남았던 부분은 독일의 시인 라이너 쿤체에 대한 부분이었다. 저자인 전영애(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 선생과의 따뜻한 만남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쿤체 시인이 방한하여 한국 학생들과의 교감을 나눈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쿤체 시인이 어느 한국 학생의 질문을 받고 대답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학생은 쿤체 시인이 지은  <자살>이라는 시를 언급하며 죽음 대한 시인의 생각을 물었다. <자살>이라는 짧은 시의 전문은 이렇다.

 


모든 문들 마지막

그렇지만 아직 번도

모든 문을 두드려본 없다.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시는, 자신을 자신을 자제하기 위한, 자신을 엄격히 지켜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그렇게 아마 다른 분들께도 격려가 있지 않을까요. 누구도 이미 모든 문을 두드려 보지는 않았거든요. 인생은 본질적으로 아주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정은 오로지 고달픔입니다. 그런데 길을 자꾸 가노라면 사는 것이 만하게, 값지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옵니다. 지점들 사이의 구간이 길면 길수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삶이 살만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그만큼 소중하고 값지게 다가옵니다.시인의 (199)

 


시인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의 경험을 지켜보면서 자살 대한 태도를 짧은, 어쩌면 하이쿠를 닮은 절제된 문장에 온전히 담았다. 젊은 나이에 자살한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 앞에 닫혀 있는 문들 뒤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과 기대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시인은 시를 읽는 이들에게 고달픈 여정에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을 한번씩 두드려보길 제안하고 있다. 죽음을 이야기했던 시인이 이제 인생의 행복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더한다.

 


정말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백분의 초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특히 남녀가 함께 산다는 것은 백분의 초에 다가가고자 함께 노력하고, 백분의 초를 향해 살아가고, 백분의 초를 위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가 해당되지 않는 순간이 있기는 합니다. 몹시 나이가 들었거나 불치의 병이 들었을 말이지요. 외에는 그런 순간은 언제나 계속 있습니다. 순간을 위해서 일하고 살고 생각해야 것입니다.시인의 (199)

 


우리는 나이가 들거나 불치병에 걸렸을 비로소 우리 삶에 그동안 행복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지 깨닫게 되지 않을까?   행복한 순간은 카메라 셔터 속도 만큼이나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짧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사는 방법은 순간을 위해 일하고 살고 생각하는 이라고 이해해도 될지 모르겠다. 쿤체의 부인 엘리자베트 쿤체는 체코 출신의 의사였는데, 사람의 소설같은 만남과 아름다운 인연을 가꾸어온 이야기를 모처럼 읽었다. 책에서 쿤체 시인과 부인에 대해 부분을 읽노라면 이들 부부처럼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극진히 대하며, 인간에 대해 깊은 신뢰를 보여주었던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정도다. 해를 마무리하며, 12월이 시작하는 삶에 대한 진실한 애정이 담긴 쿤체 시인의 말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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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9] 설교 (The Serman)


 

[9장의 기본 줄거리]


고래잡이 예배당 들어온 매플 목사가 배의 선두 모양을 설교단위로 올라간 이후 예배가 시작되었다. 자리정리를 하고 기도를 목사는 요나의 이야기를 담은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시작한다.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요나가 구원받은 이야기 통해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기쁨을 얻을 것을 주문한다.

 




이번 9장의 배경은 고래잡이 예배당이며, 매플 목사는 구약 성서의 요나서 나오는 이야기를 담은 찬송가를 부르며 설교를 시작한다. 설교의 소재는 역시 요나서 나온 이야기이다. 목사는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던 요나의 구원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 통해 교훈을 주고자 한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은 요나에게 어서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쳐라 주문한다. 요나는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하늘의 명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도망치려 했다. ‘인간이 만든 타고 머나먼 카디스(오늘날의 스페인에 위치)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요나가 하느님을 피해 배를 타고 도망치려던 부두는 요파(Joppa)’라고 되어 있다. 매플 목사는 요파가 현대의 자파(Jaffa)’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자파라고 하면 가지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자파에 얽힌 이야기


자파(Jaffa) 현재의 지도상으로 지중해의 동쪽 해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도시로 북쪽의 대도시 하이파(Haifa) 남쪽 이집트 경계 근처의 가자(Gaza) 지구 사이의 중앙에 위치한 해변 도시다. 아래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의 지중해 해안에 자파(Jaffa) 확인할 있으며, 지중해의 서쪽 반대편에 스페인이 있음을 있다. 상당한 거리다. 요나는 이렇게 곳이라면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래 사진들은 내가 올해 출장업무로 잠시 들렀던 이스라엘의 자파 지역 해변가 모습이다. 해변의 남쪽은 자파의 지역(해안 절벽이 있는 부분) 위치하고, 해변의 북쪽은 여러 나라의 대사관들과 호텔이 모여 있는 현대적인 관광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방문한 시기는 2월이었으므로 북반구의 겨울이었지만, 이곳에는 커다란 야자나무가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은 이곳이 겨울에 풍요롭다고 했다. 들판은 푸르렀다. 대신 여름에는 메마르고 황량하다고 했다. 방문한 자파지역은 날씨가 맑았지만 비가 왔다가 해가 비치기를 반복했다. 이곳의 기후는 으레 그렇다고 한다. 변덕스러운 기후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법하다







 

'야파' 혹은 '자파'라는 지명을 듣고 지명이 등장하는 문헌이 생각났다. 독일 작가 W.G. 제발트의 이민자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174-180) 보면 지명이 나온다. 소설에서는 화자 할아버지의 비망록에 나온 행적을 따라가는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 터키를 지나 레바논 지역을 지나는 대목이었다. 기억으로는 서쪽 항구도시 자파 지역에서 동쪽의 예루살렘까지 차로 2시간 정도면 있었는데, 아델바르트는 말을 빌려 12시간을 달렸다고 나온다. 아마 제대로 길이 없고, 언덕과 계곡이 많은 지역이라서 그랬을 법하다. 이들이 쓰레기로 즐비하며 똥을 밟으며 걸어갈 밖에 없다라고 묘사하는 예루살렘의 거리는 자파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낮은 언덕들이 많았다. 소설의 화자는 언덕 사이의 협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늘날 협곡들은 대부분 천년의 역사가 남겨놓은 폐기물로 가득하다. 어디서나 오물들이 흘러 든다. 그래서 수많은 우물의 물은 이제 마실 없게 되어버렸다. 한때 실로암의 못으로 불렸던 샘물은 이제 썩은 웅덩이나 오물 구덩이에 지나지 않으며, 수렁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온다. 매년 여름 도시를 덮치는 전염병의 원인이 바로 독기일 것이다. 코즈모는 도시가 너무 역겹다고 거듭 말한다.” 


자파든 예루살렘이든 황량하고 불결한 여름에 특히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을 거역하고 예수를 죽이는데 일조했다고 비난받았던 유대인들에게 불결한 삶의 조건과 무시무시한 전염병의 징벌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일까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의 원형이라는 영감을 제공했던 이탈리아의 문인이자 정치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평전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루시 휴스핼릿 지음, 장문석 옮김, 글항아리](815)에서도 자파 나폴레옹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폴레옹은 1798 이집트 원정을 떠나 인근 지방을 공략했는데, 바로 자파에서 페스트가 돌아 프랑스 병사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1799 3 11 전염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병원을 방문, 희생자들을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평전의 저자 루시 휴스핼릿은 나폴레옹이 실제로 희생자들을 만지거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퇴각하여 희생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한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나폴레옹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이야기로 자주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나폴레옹의 측근 혹은 숭배자들, 후대인들이 만들어낸 신화임을 우리는 알지만, 서구인들에게는 유명한 이야기이고, 여러 문헌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이다. 동양의 고사성어에 배경이 되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후대의 단눈치오가 사례를 지도자가 자신을 광고하는데 기가막히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홍보의 달인단눈치오가 이야기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궁금해진다.  평전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에서 부분을 인용해본다.

 

(단눈치오) 페스트가 피우메에 창궐했을 태연히 병원을 방문함으로써 일찍이 자파에서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질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서 명성을 날린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814)

 


이탈리아 정부와 대항하여 북부의 피우메 지역에서 자신만의 도시를 세우고 일종의 괴뢰정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단눈치오. 이탈리아 역사상, 아니 세계사적으로도 특이하고 독특한 인물의 행보에도 나폴레옹 얽힌 이야기를 자신에게 활용하는 천재성을 지녔다. 그리고 배경에 바로 자파 관련한 이야기가 있었다



 

자파라는 지역에서 있었던 나폴레옹과 페스트의 이야기는 롤랑 바르트의 저서에도 등장한다.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기록인 밝은방에서 스쳐가듯 나폴레옹의 자파 이야기 언급한다.

 

예컨대 보나파르트가 방금 자파의 페스트 환자들을 만졌다. 그가 손을 떼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진은 순간적인 작용을 이용하여 빠른 장면을 결정적인 순간 속에 부동화한다.”(49)

 


밝은방현장에서 포착하기 제목의 14장에서 바르트는 사진을 감상자에게 상처를 주는 요소인 푼크툼과는 다른 충격 주는 요소를 이야기한다. 사진이 전해주는 놀라움 충격이라는 범주를 다섯가지로 정리했다. 중에서 시야의 일부에만 초점을 있는 인간의 주시성과 다른 사진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자파와 나폴레옹의 이야기 언급한 것이다. 사진을 보면 사진가가 주목한 대상, 예컨대 나폴레옹이 페스트 환자를 만지고 손을 떼는 장면 외에 인화를 시야의 구석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알려진 이라고 바르트는 이야기하지만 회화와 사진의 기본적인 차이는 시간성의 전개가 개입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것이다. 화가는 바르트가 누멘(영력)이라고 표현한 능력으로 순간의 동작을 표현하지만, 과정에는 시간의 흐름이 개입되어 있다. 반면 사진에는 순간에 모든 것이 고착화되어 인화물에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이 개입되지 않는다. 다만 회화나 사진에서는 사람의 눈이 주시할 있는 영역을 벗어난 부분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이질감과 같은 놀라움의 충격 주는 것인데, 바르트는 사진의 이러한 특성을 고찰하면서 자파와 나폴레옹의 유명한 이야기를 언급했던 것이다.

 



자파와 관련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다시 매플 목사의 설교로 돌아가본다. 자파 부두에서 배를 타고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요나는 우여곡절 끝에 뱃삯을 내고 타르시시로 달아나려 했다. 타르시시는 오늘날 카디스라고 부르는 지브롤터 해협, 그러니까 요나는 지중해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인 스페인 남쪽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지도 참조). 아무런 짐도 없던 요나로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선원들은 요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멜빌은 매플 목사의 설교를 빌어 당시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황금만능주의라는 세상의 원리를 비판하고 있다. 매플 목사는 선장은 상대가 무일푼일 때만 사람의 범죄를 폭로하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하며, ‘ 세상에는 죄인도 돈만 내면 여권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마침내 요나는 통상 운임의 배를 요구하는 선장에게 운임을 치르고 승선한다. 참고로 구약 성경의 요나서에는 이렇게 자세한 사항은 나오지 않는다. 설교자의 상상이 가미된 이야기로 보면 되겠다.


 

소설 속에 묘사된 요나는 비싼 운임을 냈지만, 선장은 문이 잠기지 않는 데다 홀수선보다 밑에 있는 구멍같은 좁은 방을 요나에게 배정한다. 홀수선은 배의 수위를 알아보는 표시로, 여기서 요나가 배정받은 홀수선 아래의 방은 해수면 아래에 위치한 방이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창문도 없이 외부의 풍경도 없는 방이기도 하다. 이윽고 출항한 배는 무서운 폭풍우를 만나 요동치고, 깊은 잠에 빠졌던 요나를 선장이 깨운다. 배의 선원들은 이들이 처한 모든 위기가 도망자 혹은 죄인이라는 의혹이 있는 요나 때문임을 의심한다. 요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과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은 사실을 고백한다. 선원들은 요나를 동정하면서도  폭풍우가 가져온 난국이 요나 때문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결국 요나는 선원들에 의해 바다에 내던져지게 된다. 매플 목사의 해석에 따르면 고래의 모습으로 변한 하느님이 요나를 삼키고 바다 한가운데 데려가는 것이다. 고래 뱃속에서 회개한 요나는 지옥의 있다가 고래가 다시 공기와 땅이 있는 곳으로 올라와 요나를 밷어버린다. 홀수선 아래(심연의 세계) 있던 요나는  폭풍우 속에서 바다로 내던져지고, 이어서 고래 속에 삼켜진 요나는 다시 바라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바다라는 심연 공간, 회개의 공간, 지옥의 공간에서 세속의 세계, 빛이 있는 육지, 구원의 공간으로 나오는 구조에 주목해볼 있다


 

이제 매플 목사의 설교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화가 있을 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동시에 오직 주님을 받드는 이에게 최고의 기쁨 함께 한다고 말하며 신에게 귀의하라는 교훈으로 설교를 마무리한다. 이제 조만간 각자 목숨을 기나긴 고래잡이 생활을 시작해야하는 사람들에게 매플 목사가 신에게 모든 것을 믿고 신에게 귀의하라는 설교는 유일하게 기댈 있는 안식처가 것이다. 이들은 목사의 설교를 의심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요나의 구원과 기쁨을 통해 오히려 이들의 운명을 책임지는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가지 , 지난 8장에서 나는 매플 목사의 설교단 뒤에 걸려있던 폭풍우 그림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 그림과 많이 닮았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폭풍우 그림은 이번 (9)에서 목사가 이야기하는 설교 (성경의 요나서’) 격랑의 바다에 던져진 요나의 이야기와 연결이 되고 있으며, 다시 병들거나 죽은 흑인 노예들이 바다로 던져지는 장면이 담긴 터너의 그림을 연상케한다. 물론 이러한 모티프는 작품으로서 모비딕 결말과도 연결되며 일종의 복선으로서 사용되고 있음을 짐작해볼 있겠다.

 


 



 

참고서적


[1]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루시 휴스핼릿 지음/장문석 옮김 [글항아리]

[3]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 [대한성서공회]  요나서

[4] 이민자들 W.G. 제발트 지음/이재영 옮김 [창비]

[5] 밝은방 롤랑 바르트 지음/김웅권 옮김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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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를린

이은정 지음 |  [창비]

 

 

[독서 일기]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와 만남을 통한 신뢰 구축에 주목한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아닌 주제에 대해 우리의 연구자와 저술가들이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펴낸 결과물은 언제나 반갑다.  다시 말해 번역을 거치지 않고, 우리나라 연구자가 소화하고 판단하여 나온 글과 연구물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은 우리 나름의 지식과 지혜로 이어지기에 점점 기대를 하게 된다. 우리 나름의 관점이란 프리즘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지적 성숙도를 높여줄 있기 때문이다. 국내의 어려운 출판 시장과 독서 인구의 감소라는 우려에도 이번에 읽고 있는 베를린, 베를린 같은 도서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한편 베를린, 베를린 독일에서 오래 생활하며 연구를 해오고 있는 이은정 교수의 연구 결과물이지만, 학술서적이라기 보다는 대중교양서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오늘까지 절반정도 읽었는데, 책이 대중서라고 해도 다소 아쉬운 점은 남아있다. 문학이나 소설이 아닌 이상 이런 성격의 도서에 참고문헌이나 주석, 그리고 용어 색인 정도의 구성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 국내 연구자들이 대중교양서를 저술할 이런 부분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출판사의 정책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선 책의 구성면에서 살펴볼 이런 부분이 눈에 보인다. 도서의 주제는 흥미로운데 구성상 미흡해 보이는 점이 있기에 많이 아쉽기 때문이다. 참고문헌이나 주석 등의 구조가 갖추어 져야 개인적으로 나중에 다시 참고를 하거나 찾아볼 내용이 있을 , 혹은 참고 문헌을 알고 싶을 추적하여 도움을 받을 여지가 있을 것이다


 

내용에 관한 보다 자세한 감상은 나중에 리뷰에서 고민하겠지만, 특히나 역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2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들이 상당히 흥미롭다. 다만 서술방식면에서 우선 시간순으로 전개가 되고 있지만, 베를린이 겪어온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배경 설명이 유기적인 이야기로 엮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반복 설명되는 부분은 내용을 되새김하기에 좋은 반면, 비교적 얇은 도서에서는 보다 간결하게 진행하면서 사건 간에 보다 유기적인 설명이 있다면 더욱 효과적이고 재미있게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며 읽을 있을 같다.

 


아직 책을 절반밖에 읽지 못했지만 베를린이란 공간의 특수성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2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의해 분할 통치된 독일의 동독 지역 가운데 베를린이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베를린이 다시 4개국(승전연합국) 의해 분할 점령된 내막에 대한 점은 사실 자세히 알진 못했다. 아마 내가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많이 졸아서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어쨌든 오늘 독서를 통해 저자가 전달하는 간결한 설명으로 배경이 되는 역사를 이해할 있게 되었다. 특히 베를린 주민들이 겪은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민감한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물론 베를린의 상황은 이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정치경제적으로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유형, 무형의 교류는 거의 항상 지속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같다. 저자는 특히 분단을 겪고있는 대한민국의 분단 상황과 베를린의 분단 상황을 비교하며 차이점을 부각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분단된 독일이 통일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민간 차원에서 교류가 끊이지 않았고, 협상을 시도했다는 점은 처음 알게 사실이다. 독일인들은 저자가 제시하는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원칙을 통해 동독과 서독 정부가 수용하고 노력을 했다고 전한다. 물론 동독의 경우, 서독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아져갔지만 서독 측에서도 동독이 끝없이 요구하는 경제적 지원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기 보다  인내심을 갖고 경제적인 지원을 지속하여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모색한 점은 분명히 우리가 고려하고 배울 만한 부분일 것이다.

 


물론 베를린의 상황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구체적으로 다른 점이 많다. 베를린은 동독 정부가 관할하는 영토의 가운데에 섬처럼 존재하는 특수성에, 도시가 분할되어 동서 베를린 양측이 상당기간 왕래를 하고 있던 상황도 무시할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조건에 맞는 합리적인 방법을 궁리하고 모색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여겨 볼만한 것은 만남 없이 신뢰를 쌓을 없는 법이다”(177)라는 원칙이다. 어렸을 적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뉴스에서 기억이 있다. 감격한 베를린 시민들이 장벽 위에 올라가 기쁨을 나누거나 무너뜨리는 장벽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보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람들은 제한적이나마 서로 만나 교류하고 교감했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아왔다는 점이 책의 전반을 읽는 동안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 이해된다.   

 


2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은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와 미국,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진영의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특수한 공간이 되었다. 이런 기본적인 구도는 한국전쟁으로 대표되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냉전 구도가 발현되었다는 점이 유사하다. 다만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전쟁이 발발하여 남과 북이 분단되었고, 엽서 왕래하기 어려웠던 시간을 오래 인내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는 분단 상황과 우리의 상황 사이의 차이점이다. 그러므로 독일인들이 겪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이점에도 주목하고 화해와 공존의 실마리를 찾아야 것이다. 특히 베를린 주민들이 베를린을 중심으로 수많은 문제점을 제한적이나마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분리가 불가능한 사회적 인프라망 존재했다는 점이다. ‘공존을 통한 협력 대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기회라고 대목에서 나의 아쉬움과 부러움이 교차했다. 우리에겐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책의 절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베를린 장벽 붕괴와 통합의 과정) 다루어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베를린과 독일 현대사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기대가 남아있다. 우리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부르는 서독 정부의 경제 부흥은 분명 동서 대결 구도 속에서 서방세계의 물적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한국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 부흥에 힘입은 크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세계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더불어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진행된 냉전 구도의 영향이 전방위 적인 위력을 발휘했음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독일작가 W.G. 제발트는 작가 나름의 독특한 소설 양식을 통해 전후 독일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드러냈지만, 사회의 이면에는 나름의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노력들이 많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특히 정치인 브란트(서베를린 시장과 연합정부 수상을 역임한 인물) 원칙, 베를린 시민의 고통을 완화한다 원칙을 통해 이루어진 경험이 통일된 독일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여겨 볼만한 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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