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과 '전염병 문학'을 생각해보며



코로나19가 올해 세 번째 유행을 시작했다고 한다전염병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버렸는지 이번 기회에 충분히 실감하고 있다개인사업자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특히 여행업과 관련한 제반 사업이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모양이다반면 출판계는 한동안 도서관과 학교가 제한적으로 운영을 해서 그런지 대체로 잘 버티고 있는 업종에 속한다 한다물론 작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언제는 넘어야할 도전이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올해 팬데믹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역사적으로 여러 전염병이 최소 2년 정도는 지속되며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을 떠올리면이번에도 쉽게 끝날 것 같진 않다특히 지금 겨울철이 되어 다시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코로나19가 나와 주변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버렸는지 생각하다가 스페인 독감이 떠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즈음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스페인독감은 1918년 2월부터 1920년 4월까지 만 2년 2개월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위키피디아 참조). 감염자가 대략 5억 명(당시 전 세계 인구의 대략 3분의 감염)이었고이로 인한 사망자는 1억 7천만 명에서 5천만 명 사이로 추산되는 모양이다코로나19는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전 세계적으로 감염자 수가 이미 5천만 명을 넘었으니 안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런 상황을 보니 이 작은 바이러스 혹은 병원균(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이 인류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염려하지만인류는 지구상에 나타난 이후 줄곧 전염병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기억해둘만 하다.

 

     최근에 우연히 국내의 단테 연구자가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의 자취를 쫓아 여행한 기록 단테를 읽게 되었다단테는 1265년 피렌체에서 출생한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35세 였던 1300년에 공직에 선출되어 공적활동을 시작했고능력을 인정받아 피렌체 최고위원이 되었다그런데 1302년에 교황을 배후지지 세력으로 둔 정적에 의해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이후 사망할 때까지 19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식객으로 망명생활을 한 셈이다단테의 삶을 따라간 이 책 중에서 내가 눈여겨보았던 부분이 단테가 말년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대목이었다마지막에 라벤나라는 도시의 외교사절단으로 베네치아에 파견을 나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1321년에 56세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우리가 읽고 있는 단테의 신곡이나 철학서 향연과 같은 저서는 그가 망명생활 중에 본격적으로 작업한 결과물이었다그가 말라리아에 걸려 일찍 사망하지 않았으면 피렌체로 교황의 사면을 받아 귀향할 수 있었을까그리고 단테가 만약 더 오래 살았다면그를 흠모하고 존경하던 조반니 보카치오를 만나 교류하며 더 풍성한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우리에게 데카메론으로 잘 알려진 그 보카치오다그 역시 피렌체(이탈리아 중부인근 체르탈도라는 곳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니유명한 단테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보카치오가 태어난 1313년에는 단테가 추방당한지 이미 11년이 지난 시점(단테는 48)으로 단테의 망명생활 중반에 해당한다단테가 객지에서 사망했을 때보카치오가 8살이었으니두 사람이 지나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단테가 오래 살았다면단테와 보카치오 두 사람도 괴테와 에커만과처럼 교류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독일의 대 문호 괴테가 노년에 이르러 요한 페터 에커만이라는 조력자가 나타나 43년의 나이차를 넘어 서로 멘토-멘티 관계를 이룬 것처럼 말이다요한 페터 에커만은 괴테와의 대화를 쓴 인물로보카치오처럼 괴테의 작품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푹 빠져있던 젊은 문학도였다고 한다노 문호에 대한 존경심으로 에커만은 10여 년에 걸쳐 괴테 옆에서 지켜보고그와 대화하며 이 기록을 남겼다단테와 보카치오 역시 48년의 나이차이가 있었으니 단테가 말년에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고 평온한 삶을 살았다면단테를 흠모하던 젊은이로 보카치오는 노년에 이른 단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그러면 후세인들은 단테의 망명생활과 고뇌에 대해서 작품을 통해서만이 아니라단테와 보카치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또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보카치오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 데카메론이 전염병의 영향으로 쓰게 된 작품이라는 것이다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는데 책 소개에 따르면이 작품은 1327년 14세의 보카치오가 1340년에 피렌체로 돌아온 뒤, 1348년에 유행했던 흑사병(페스트)의 참상을 목격하고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데카(deca-)’라는 접두사가 숫자 10을 의미하듯이이 책의 제목은 젊은 남녀 10이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 교외로 가서 자연을 벗 삼아 어울리며 열흘간 100편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이라고 한다말하자면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를 떠나 교외에서 자가 격리를 하던 젊은이들이 스스럼없이 나눈 대화록이라고 예상해본다당대(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과도기)의 젊은이들이 삶을 어떤 식으로 향유하고 바라보았을지 엿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전염병이 등장하는 다른 문학을 떠올릴 때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빼놓을 수 없다사실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는 소설이라 읽어보긴 했는데처음 읽었을 때는 다소 밋밋하게 다가오긴 했다이 책에는 베네치아에 유행하기 시작한 전염병이 등장하는데나는 단테 역시 베네치아로 가던 길에혹은 베네치아에서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걸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베네치아에 물이 많아서 그런지 향후에 이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모기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이 소설의 주요 모티프는 노작가의 소년에 대한 동성애적 집착(파이데라스티아소년애)이다작가 토마스 만의 동성애적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고 보다 이해가 되었다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와의 플라토닉’(동성애관계를 떠올려보면서 말이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전염병은 작품의 주제와는 무관할지 모르지만이야기를 끌고 가는 가장 주요한 장치 혹은 제한조건으로서 기능한다고 이해된다.

 


     











     또페스트하면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 카뮈의 페스트이다소설의 배경은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 서북부의 도시 오랑이다오랑 시는 카뮈가 27살에 파리에서 결혼하고 이듬해에 돌아와 교편을 잡았던 도시이기도 하다카뮈는 교편을 잡으면서 동시에 페스트를 준비하고 이방인을 출간했다도시에 어느 순간 쥐들이 나타나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도시에 페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한다인간의 거주지에서 함께 사는 쥐의 벼룩이 인간에게 전염시켰던 것인데코로나19가 발병했을 당시에 우한 시가 봉쇄되었던 것처럼 오랑 시가 봉쇄되는 것이다소설에서 죽음과 마주한 고립된 오랑 시의 시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들을 읽을 수 있다나는 인간과 자연이 대립하는 시공간에서 연대하고 인간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다고 읽었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전염병과 관련한 소재가 등장하는 작품에 우루과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가 있다이 단편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된 주제는 삶과 죽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그리고 그 사이에 광기라는 것이 매개한다작품 중에는 인간과 자연과의 대결에서 여지없이 패배하는 인간의 이야기도 나오지만기이한 사랑의 이야기도 있다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광견병에 걸린 개가 그것이다모두 단편이므로 줄거리를 이야기하지는 않겠다다만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배경은 모두 병원균와 관련이 있다. ‘뇌막염은 대개 혈관을 타고 뇌에 침투한 바이러스나 세균(박테리아)에 의해 발병된다고 한다이 바이러스나 세균을 전달한 매개체는 아마도 모기나 벼룩진드기와 같은 녀석들일 것이다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기이한 사랑이야기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와 관계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해준 단편이다.

 

     키로가의 광견병에 걸린 개역시 광견병이 주요 모티브인데우리가 흔히 개가 물을 무서워하는’ 공수병이라고 부르던 것이다광견병 역시 광견병 바이러스가 중추신경계를 감염시킴으로서 발병한다광견병이 무서운 것은 광견병에 걸린 개나 야생동물(너구리오소리박쥐 등)에 물리면대개는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전염병이기 때문이다광견병 바이러스는 스스로를 전파시키기 위해 숙주를 상대적으로 빨리 죽이는 대신공격적으로 다른 동물을 물어서 자신을 전파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물론 정확히 말하면 이런 의도를 가졌다고 의인화해서는 안되겠지만결과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전염병이 숙주를 상대적으로 오래 살도록 하는 대신다양한 방법(설사재채기기침콧물 등)으로 자신을 다른 숙주에게 전파시키도록 진화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광견병은 특히 개가 인간 사회(수렵-채집 사회)에 사냥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지면서 함께하게 되었을 것이다야생에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의 침범(사냥)을 계기로그리고 이 개를 매개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허버트 조지 웰스는 우리에게 워낙 유명한 공상과학 소설 작가이지만기본적으로 과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특히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한명이었던 토마스 헉슬리로부터 직접 진화론과 생태학 등을 배웠다고 한다웰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19세기 말에 핵전쟁과 세균전광선총로봇 등을 예견한 것으로 유명한 SF소설 우주 전쟁(1898) 때문이다전염병과 관련하여 주목해보면이 세발 달린고대 그리스의 세발솥 같은 로봇을 타고 파괴를 일삼던 화성인들이 갑자기 전멸하게 되는 이유가 지구의 세균에 대한 면역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이긴 하지만박테리아와 면역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었다면 쓰지 못했을 놀라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책의 전반부보다는 후반부에 작가의 문명 비판적인 시각이 많이 드러나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소설이다톨스토이의 소설들처럼 작가의 말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공상과학 소설에서 작가의 비판적인 철학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개인적으로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작품에서 작가가 직접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이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하고자하는 말을 많이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전염병과 관련하여 떠올린 작품이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가 쓴 장편소설 최후의 인간이다아직 이 책 역시 읽지는 못했지만조만간 읽어보려는 목록에 들어있다불치의 전염병으로 인류가 전멸하고 한 명이 살아남는, SF의 고전이 된 이야기라고 한다프랑켄슈타인에서도 그렇지만뭐랄까 메리 셸리 역시 죽음대한 강박 같은 것이 있었을까 추측해본다전류를 흘려주어 죽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장면을 직접 보았을 메리 셸리를 상상해본다프랑켄슈타인이 죽음에서 생명을 주는 이야기라면반대로 최후의 인간은 인류의 생명이 사라져가는 풍경을 묘사했던 것 같다이 두 이야기의 중심에 모두 죽음에 관한 문제가 자리한다메리 셸리의 어머니 역시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사망했으니작가에겐 이 죽음이 평생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지 짐작해볼 수 있겠다죽음에 대한 강박이 작품에 드러내는 작가는 앞서 언급한 오라시오 키로가도 만만치 않다.

 

     메리 셸리 역시 작가 소개란을 보면 죽음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첫 아들이 출생 직후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자녀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부모보다 자녀가 먼저 죽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을 상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게다가 25세에 남편이 익사하여 미망인이 된 그녀는 시인 바이런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소식 이후 최후의 인간을 완성했다고 한다문학사상 최초로 세계 종말을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가 따르는 이 소설에 불치의 전염병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만 남고 먼저 사망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언제나 갖지 않았을까성인이 된 메리 셸리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책을 하기도 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추측이지만 첫 남편의 사망 이후평생 홀로 살았던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과 관련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이런 배경을 이해하면 최후의 인간을 읽을 때인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의 고독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혼자 남은 그 사람이 바로 메리 셰리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코로나를 극복하자는 구호로 많은 것을 감내하고 있는 상황이지만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이 코로나19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우울한 결론일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냉엄한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전염병과 관련하여 암울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장회익 명예교수의 저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보면 고전 물리학을 정립한 뉴턴에 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기적의 해 1666’(103)이라는 소제목을 단 글에서 뉴턴이 고전 물리학을 정립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1665년에 학사 학위를 받고 혼자 공부하던 뉴턴은 그 해에 영국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던 역병(페스트)를 피해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역병이 유럽을 2년 가까이 휩쓸고 지나가버린 후 정상화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왔을 때그는 이미 고전 물리학을 정립해냈던 주요 연구를 고향집에서 이루어냈던 것이다이 결과에 간접적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역병(페스트)라고 할 수 있다그러니 페스트가 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과학사에 있어서는 기적의 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역병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신화 만들기에 활용한 사람도 있다바로 나폴레옹과 파시즘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알려진 시인이자 선동적인 정치가군인호색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다파시즘의 서곡단눈치오에서 단눈치오는 도시의 사령관으로 지낼 때, ‘야파(오늘날 이스라엘의 자파 지역)에 창궐했던 페스트 환자들에게 과감하게 손을 내밀었다는 나폴레옹의 신화를 떠올렸던 것이다그리고 나폴레옹의 신봉자였던 단눈치오 역시 전염병이 돌던 병사들의 막사를 돌면서 나폴레옹이 했던 것처럼 정치적인 쇼를 하기에 이른다전염병이 신화만들기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이 정도 사례는 아니라도 비슷한 전략은 오늘날 국회의원 선거철만 되면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광경이긴 하다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진 않았지만여기에도 야파를 비롯한 이스라엘 지역에 창궐한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들이 심심치않게 등장한다아울러 여러 문학작품에도 이 야파그러니까 지리학적으로 비옥한 초승달지역의 지중해 연안 지역에 속하는 이스라엘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도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흑사병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흑사병의 귀환이다이 책도 다음 기회에 읽을 목록으로 생각해두었는데역사학자와 동물학자가 함께 써내려간 흑사병 연대기라 할 수 있다한스 홀바인의 그림이나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그림에 자주 등장하곤 하는 해골은 중세인에게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 삶의 요소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특히 당시에는 원인도 모르는 전염병등을 통해 언제 죽을지 모를 상태에서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죽음에 관해 많은 성찰의 기록을 남겼던 수상록의 작가 몽테뉴도 책에서 자신의 마을을 휩쓸어버린 역병에 대해 이야기 한다역병이 자신의 마을을 휩쓸고 있을 때몽테뉴는 자신의 몽테뉴성에서자가 격리를 하며 삶과 죽음에 관해 성찰하고 에세이를 썼다는 말이다이렇게 전염병과 관련한 문학 작품도서를 생각하다보니 전염병이야말로 인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던가 싶다중세 유럽에 페스트가 휩쓸고 가버린 후살아남은 이들은 신의 자비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지 않았을까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배경에는 유럽인이 세계로 퍼져나가고무역을 통해 신흥 귀족이 부를 축적한 물질적인 배경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전염병을 통해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극적으로 뒤바뀌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본다.

 



     










     전염병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상상하다가 여기까지 왔다올해 읽은 책들을 정리하지 못해 이 기회에 전염병과 관련한 도서전염병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을 떠올려 보고 몇 가지 읽어볼 도서도 모았다물론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이 더 많을 것이다발견하는 대로 전염병 문학리스트에 추가해나가려고 한다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콰먼의 책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를 읽고 새롭게 알게 된 것은전염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와 세균의 관점에서 인류를 최종 숙주로 삼은 것은자연스럽고 최선의 선택으로 보인다는 점이다인간은 자신의 편리함을 위해 지구의 모든 자원을 착취 활용하며 그 수가 유례없이 증가하고 있기에인간은 바이러스에게 숙주로서 좋은 조건을 다 갖추었다다시말해 인간은 바이러스와 세균에게 가장 핫한숙주다무엇보다 인간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무한정한 이윤추구 활동으로 인해 바이러스와 병원균의 숙주되기를 자초하고 있다.



      











     특히 인간과 동물이 함께 걸리는 이런 인수공통’ 전염병의 경우인간이 이 전염병을완전히’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이점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인간과 기타 숙주 동물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종하여 사라지지 않는 이상인간이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역사적으로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전염병과 함께’ 살아온 셈이다그러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바이러스 및 병원균과 함께 생존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특히 과도한 이윤추구를 위해 아프리카의 자연과 아마존 밀림을 파헤치고 무단으로 침범하여 훼손하지 않는 것언제든 자원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무모하게 이용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방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더 많은 비닐과 플라스틱을 사용하며더 많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단순히 경제가 파탄난다는 것을 우려하기 전에 우리가 맞물려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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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로런스 웨슐러(Lawrence Weschler) 지음 | 양병찬 옮김 | [알마]

&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김승욱 옮김 | [알마]




호기심과 인간애가 충만한 삶을 보고 싶다면, 올리버 색스를...



오늘은 올리버 색스에 관한 두권을 위주로 살펴보려 한다. 올리버 색스의 사망(2015) 이후 이제 5년이 지났다. 와중에 작년(2019) 미국의 문학 중심의 잡지 <뉴요커> 전속작가였던 로런스 웨슐러가 올리버 색스 평전 And How Are You, Dr. Sacks? 세상에 내놓았다. 국내에는 그리고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 나왔다.  박식하고 박물학자와 같은 면모를 지닌 색스는 평생 호기심어린 관찰자로서 지냈다.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엉클 텅스텐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노년에 성인이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반추해본 자서전 무브 흥미롭게 읽었더랬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며 타인이 바라본 올리버 색스의 모습을 상상해볼 있었다.


     올리버 색스의 평전을 저술한 로렌스 웨슐러는 색스가 30대일 처음 만나 그가 82살에 세상을 때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교류를 인물이다. 올리버 색스의 임상기록보다도 개인적인 일기(오악사카 저널) 3자가 기록한 평전을 동시에 읽으면서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보다 선명히 그려볼 있었다. 다만 대상에 대한 묘사를 사후 기록만으로 파악하여 전달하는 경우보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조심스럽고 부담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대방을 옆에서 오래시간 지켜보고 교류해왔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글에는 거짓이나 지나친 미화가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상대방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습관, 성향 등을 파악하고 있기에 평전을 읽게 독자에게 대상이 어떤 이미지로 남게 것인지를 분명히 고민했을 같다. 저자는 책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솔직하게 색스의 면모를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리고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다른 평전과 달리, 저자가 색스와 세기에 가까운 교류를 통해 모아둔 메모와 함께 색스가 지인들과 나눈 대화를 제공하고 있고, 저자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와 가정사가 색스와 함께 하나의 직물처럼 짜여 있다. 저자의 가족들도 색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올리버 색스라는 인물을 재구성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할 있다. 저자인 웨슐러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점은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이자 글을 쓰는 올리버 색스와 많은 점에서 통했을 같다. 오랜 시간 나누던 사람의 대화 기록과 메모는 계속되었지만, 처음 색스의 전기를 쓰려던 1984년에 색스의 요청으로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무려 30년이 지나 색스가 사망하기 직전인 2015년에 색스는 저자에게 전기를 마무리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웨슐러가 쓰려고 했던 전기에 30 년에 걸친 교류가 이번 평전에 추가된 셈이다.


     웨슐러가 그려내는 색스의 모습은 무엇보다 엄청난 다독가로서의 모습이다. 자신의 전공인 신경학은 물론이고, 시와 소설 등의 문학과 철학, 밖의 논픽션 등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가의 이미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저자가 기록하는 색스의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독서의 유일한 가치는 지식 습득하기 아니라 새로운 의문 품기였어.”(282)


올리버 색스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그가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인물의 천진난만한 호기심과 상상력뿐만 아니라 강박증도 발견할 있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색스의 독서는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강박적인 독서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중시했던 것은 결국 저자들이 제공하는 지식의 권위에 압도되기 보다 여기에 맞서는 , ‘의혹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더욱 중요하다는 말로 요약해볼 있다.


     종종 등장하는 색스의 강박증적인 모습은 본인이 저술한 책들을 통해서 독자가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겠지만, 3자가 평전을 통해서도 그려볼 있었다. 자신이 남다르며, 뛰어나다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인지하고 고민했을 내밀한 생각들은 이렇게 웨슐러가 모아둔 메모를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


영재는 허영과 나르시시즘의 끔찍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법이야. (…) 나는 때부터 그런 압박감을 느꼈던 같아.”(460)


이런 표현을 자신의 자서전에서 쓰기란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웨슐러가 색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바라본 것은 재능이 많고 완벽해 보이는 인물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라는 점이다. 웨슐러는 때로 엄살과 지나친 강박증 건강 염려증을 보이며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내면의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이를 신뢰와 애정어린 시선으로 색스를 한결같이 바라보았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지 궁금했던 저자가 올리버 색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기쁨 눈물을 흘렸던 이유였다. 정서는 과연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일까? 내가 공감이나 상상력이 부족해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독후기록을 쓰면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있었다.


1984 말에 쓰려던 올리버 전기를 2019년에 마무리하게 것은 바로 때문이다.”(523)


만약 내가 유명인인 누군가와 세기 가까이 교류하며 사람의 많은 일상, 장점 단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사람에 대해 인간적인 애정과 존경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데 이제 30년이 넘게 시간이 흘러서 지인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사람에 대한 전기를 오랫동안 쓰고 싶었는데, 진전없이 중단되었다가 사람의 죽음에 앞서 다시 시작할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대상보다 먼저 사망하지 않고 그에 대한 전기를 마무리할 있게 것이 기뻤을 같다. 그렇지 않을까? 나는 사람의 삶을 정리해보겠다는 일생의 목표가 다시 생기고, 사람과의 좋았던 추억을 다시 떠올리며 상대방의 현존을 놓치지 않고 계속 함께 있게 것이다. 나는 아마도 점에 우선 감사한 마음이 같다. 웨슐러가 올리버의 부음 소식을 들었을 기쁨의 눈물을 흘린 배경에는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이런 감정과 소회가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웨슐러가 나를 압도한 번째 감정은 반가움과 고마움이었다.’(625)라고 대목에서 이를 다시금 확인할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앞서 잠깐 언급했던 보다 개인적인 텍스트로 가본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아마추어 식물 애호가로서, 특히 소철과 같이 오랜 역사를 품은 양치식물을 좋아했던 색스의 색다르고 개인적인 여행 기록이다. “나는 지금 양치류 탐방여행을 위해 식물학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을 마난려고 오악사카로 가는 중이다.”(13) 시작하는 문장에서 있듯이, 저자의 흥분감과 기대감을 그대로 느낄 있다. 색스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가의 면모를 지녔지만, 무엇보다 개인적인 이야기와 학문적인(지적인)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는 글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19세기 박물학 연구자들의 여행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다윈의 저서들 뿐만 아니라 다윈에게 영향을 주었던 알프레드 월리스와 알렉산더 훔볼트의 탐사여행기를 좋아한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있다.


     책은 양치류에 열광하는 식물 덕후들이 멕시코의 오악사카로 날아가서 다양한 양치류를 살펴보고 자신들의 애정을 확인하는 여행에 관한 책이다. 물론 저자는 식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멕시코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멕시코에 1500 명이던 아즈텍인들이 50 이내에 300 정도로 감소한 역사에도 주목한다. 정복자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노예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백인의 입장에서 색스는 반성적인 입장에 있는 편이었던 같다. 물론 색스의 다른 저서에서도 이런 점들을 짧게 내비치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문제를 텍스트에서 풀어내지는 않는 같다. 내가 이해하는 색스의 입장은 백인으로서 이러한 역사의 문제를 예민하게 주시하고 인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를 독자에게 제시해주는 질문하는 , 생각거리를 던지는 가깝다.  


     책은 식물과학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통찰이 담겨있지만, 인간에 대한 관심과 관찰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집단 속에서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빼놓지 않는다. 색스가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136)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평소에 담아두고 있던 심정을 엿볼 있었다.  10일간 함께 무리 속에서 색스는 유일하게 동행인 없이 홀로 참가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글쓰는 사람으로서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도 보인다. 내성적인 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다소 불안해하곤 하는데, 유명인이면서 수많은 환자를 대하던 색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악사카에서 그가 만난 집단에 대한 감정은 무엇보다 기쁨이었다. 소속감에 대한 기쁨. 일행에는 레즈비언, 게이 커플도 있었는데, 참가자들 모두 서로 다른 조건과 무관하게 식물학에 대한 사랑만으로 상대방을 포용하고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 색스의 평전에서도 발견할 있었지만, 내가 보았던 색스의 관심받고자 하는 내면의 어린아이 덕후들의 모임에서 비로소 편견 없는 관심을 받고 만족감을 느꼈던 같다.


     한편 나는 여행일기를 읽으면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자연과 얼마나 괴리되어버렸는지도 느낄 있었다. 색스는 오악사카에서 술을 전문으로 담그는 마을, 염색을 전문으로 하는 마을 1,000 넘게 나름의 기술을 전통으로 유지해온 마을을 인상깊게 기록하고 있다. 소위 문명 사회에서 사람의 눈에 비쳤던 점들에 주목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색스는 이렇게 자신의 소회를 밝힌다.


발전되었다는 우리 문화와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 문화에서는 누구도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법을 모른다. 펜이나 연필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필요한 경우에 우리가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 있는가?”(156)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즘도 거리를 걷거나 어느 장소에 가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때가 있다. 우리 얼마나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지 모른다. 나의 생존 하나 하나가 타인의 손에 지나치게 달려있는 형국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요소를 지나치게 외주화해버린 것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 살면서 타샤 튜터 할머니처럼 스스로 사과를 재배하여 수확하여 사과주스를 만들고, 양초를 직접 만들며, 다양한 채소를 키워서 식탁에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도시는 우리의 자연 되어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젊은 세대가(전자기기를 다루는 능력 외에) 때로는 우리의 부모 혹은 조부모 세대와 달리 일상에서 스스로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하는 의구심이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던 것을 너무나 쉽게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생각해볼 문제다. 책의 맥락과는 조금 벗어나게 되었지만, 색스가 말에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경이로운 면을 발견할 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란 자체로 완전할 없다는 것도 함께말이다. 자체로 불완전한 대상으로서(사실 표현 자체도 불합리하다) 인간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이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해결될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색스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식물 탐사 여행기에서 역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호기심이 전체에서 드러나는데, 모습은 우리가 사람, 타인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특히 색스의 여행기록에서 그의 어린이 같은 호기심과 관심이 경탄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모습을 통해 이러한 단서들을 확인해볼 수도 있겠다.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어쩌면 자연과 현대인을 이어주는 유일한 에테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은 우주의 시간에 비해 지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을 사는 존재다. 나는 인간이 남긴 유산을 찾아보고 나의 삶을 돌아볼 있다는 사실에도 경이로움을 느낀다. 특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다른 이들이 남긴 궤적을 찾아보면서 남은 나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내가 올리버 색스의 평전과 여행 기록 권을 통해 깨닫게 것은 나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애정과 돌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당한 노력 역시 필요하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나는 삐딱한 사람, 도덕률 폐기론자, 변절자, 영지주의자 등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었던 적이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도덕률 폐기론의 전통 - 사실은 전통 자체 - 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 (올리버 색스의 말)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191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독서의 유일한 가치는 ‘지식 습득하기’가 아니라 ‘새로운 의문 품기’였어." (올리버 색스의 말)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282

"내 경험에 비춰보면, 사람들이 ‘타인의 노예’처럼 행동하기를 멈추고 ‘자신에 대한 주인’이 되려고 노력할 때, 열정이 폭발하여 모든 ‘순간의 기억’들을 줄줄이 소환하여 이어 붙이게 된다." (저자 로런스 웨슐러 말)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538

"우리는 죽음에 직면하여 기뻐해야 한다. ‘삶의 난제’에 열정적으로 당당해 맞서 죽음을 얻어내리라 다짐해야 한다."
(저자의 딸 사라가 올리버의 부음을 듣고 저자에게 보낸 제임스 볼드윈의 구절)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627

"나는 지금 양치류 탐방여행을 위해 식물학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을 마난려고 오악사카로 가는 중이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첫 문장 - P13

"더 ‘발전’되었다는 우리 문화와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 문화에서는 누구도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법을 모른다. 펜이나 연필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꼭 필요한 경우에 우리가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는가?"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 P156

"데이비드와 나는 마지막으로 우리들 사이의 인사를 나눈다.
‘황이철석!’
‘웅황!’
‘계관석!’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마지막 문장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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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1632) 렘브란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in, 1606-1669) 1606년에 태어난 네덜란드의 위대한 화가이다. 오늘은 렘브란트의 그림 점에 얽힌 생각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선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갖게 것은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 읽던 중에 이와 얽힌 이야기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해부학 수업이 있던 (1632 1),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를 열심히 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이야기하고 있는 제발트는 소설에서 우선 상황의 의전적 성격에 주목한다. 저자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해부 행사는 레이덴 대학의 해부학 실험실이 아닌, 암스테르담의 화물계량소에서 공개 해부행사가 열렸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관대했던 네덜란드의 분위기로 인해 당시에는 암스테르담의 하우트흐라흐트에 있는 유대인 구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무역이 활발했으며, 따라서 수입과 수출하는 물류의 계량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구역에서 1639년부터 1658년까지 19 살았다고 한다.

 


다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자. 니콜라스 튈프 박사가 직접 시연하던 해부 행사의 실험 대상인 시신은 해부 행사 당일 새벽에 절도죄로 사형을 당한 사형수 아드리안 아드리안스존, 일명 아리스 킨트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그는 교수형을 당한 직후 그의 시신이 화물계량소로 이송되어 공개 해부 행사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시신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모자를 쓰고 깔끔하게 입은 튈프 박사의 옷차림과, 해부 과정을 관찰하고 있는 다른 참관자들(의사들) 또한 호화로운 정장차림이다. 소설가 제발트는 자료 조사를 통해 의전적인 해부 행사의 성격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 주목하는 부분은 일반적인 해부 절차가 하복부를 절개하고 가장 먼저 부패가 시작되는 내장을 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시신의 손과 부분의 해부를 먼저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절도죄로 사형을 내린 정황도 황당하긴 하지만, 제발트가 주목한 부분은 해부작업이 범죄를 저지른 손을 먼저 해부함으로써 의식이 갖는 보복적인 성격과 대중 교화적인 목적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자연스럽게 뒤틀려 보이는 손은 시신에 가해진 폭력을 표시한다 제발트는 지적하고 있다. 행사가 의전적인 성격이라는 점은 해부작업이 끝난 엄숙하고 상징적인 연회가 개최되었다 사실이 뒷받침해준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왕립미술관에 있는 가로 2미터 세로1.5미터에 달하는 그림을 보면 보다 실감나게 느낄 있을 같다.

 


한편 참관자들의 시선은 대개 시신의 해부 부위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튈프 박사 너머의 해부학 서적에 주로 향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유가 그림에서는 시신의 중심을 천으로 가리고 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알몸으로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제발트는 이유보다는 시신의 부러진 목과 뒤틀어 놓은 손이라는 육체성이 이미 해부학 교과서에서 보이는 하나의 도표, 하나의 인간 도식으로 환원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을 읽을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시 그림을 보고 생각을 해보니 의미를 조금 깨달을 있었다. 시신의 해부에는 이미 죄인의 몸을 사용한 것이고, 하나의 식은 물체에 불과하다. 교과서에 부분적으로 그려진 육체의 도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일 것이다


 

토성의 고리 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대목은 행사 당일(1632 1), 당시 36세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참석했다는 점이다. 그림에서는 데카르트의 초상을 참조해볼 , 데카르트가 그려져 있지는 않은 같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학문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저서 방법서설  5 41세가 되던 1637 출판했을 ,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해부학에 관한 내용을 여러 쪽에 걸쳐 언급할 있었던 것도 바로 당시의 경험과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축적되었기 때문임을 있다.

 


하나 흥미로운 연결점은, 렘브란트가 그린 해부학 행사가 이루어진 10개월 후인 1632 11월에 렘브란트가 7 살게 하우트흐라흐트의 포르투갈-유대인 공동구역의 같은 블록 내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렘브란트이 공동구역에 1639년부터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스피노자가 7 되던 해에 이미 사람은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렘브란트가 스피노자보다 26 연상이므로, 아마도 렘브란트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고 유명한 상인인 스피노자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자들과 대화가가 이런 공간에서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보면 무척이나 흥미롭다. 스피노자보다 36 연상이었던 데카르트와는 아마도 만났을 가능성 보다는 당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데카르트의 저서를 통해 그를 멀리서 보았을 같긴하다. 하나의 그림과 텍스트를 가지고 옆길로 빠져 나름의 상상을 엮어보았다. 오늘은 렘브란트의 그림 점을 가지고, 해부학 행사가 있던 , 데카르트(당시36) 렘브란트(당시26) 같은 공간에서 각자 자신의 활동에 몰입했을 광경을 아울러 상상해보았다





[참고도서]

[1]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 이재영 옮김 | [창비]

[2] 스피노자 스티븐 내들러 지음 | 김호경 옮김 | [텍스트]

[3] 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지음 | 이현복 옮김 |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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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8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엔가 오래 전에 만났던 <토성의 고리>
를 다시 읽었습니다.

제발트 전작읽기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경건
하게 읽었는데 이전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
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캄포 산토>도 작년에 이어 올해 다시 읽고
이번에는 리뷰를 쓰야지 싶었는데... 생각대
로만 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초란공 2019-12-08 23:55   좋아요 0 | URL
저도 동감합니다. 이번에 렘브란트의 그림이 나왔던 부분을 다시 보니 새롭게 보였어요. ^^ <캄포 산토>는 저도 읽고 싶네요. <기초시>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영국에 있다는 ‘제발트 길‘도 걸으면 제발트가 묘사한 우울한 분위기가 다시 떠오를것 같네요.
 




깃털도둑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 박선영 옮김 |  [흐름출판]

 



 

소설인 알고 읽기 시작했으나 실화를 바탕으로 나온 책이라고 한다. 이라크 난민이 재정착을 있게 돕는 일을 하던 커크 월리스 존슨은 골치 아픈 문제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플라잉 낚시를 하곤 했다. 어느 저자는 플라이 낚시 가이드로부터 해괴한 깃털도둑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곧바로 사건에 집착하게 되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영국 왕립음악원의 유학생이자 장래가 촉망받던 플루티스트가 희귀한 조류 가죽 299점을 훔쳐 달아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점이라도 훔치려고 해도 어떻게 가능했을까 의문을 가졌을 텐데말이다. 책을 통해 영화에서 플라이 낚시 외에 플라이 낚시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내가 송어와 연어를 잡는데 다른 플라이를 써야 한다는 사실도처음 알게 되었다. 새로 알게 이들의 세계는  정말이지 상상 이상의 세계였다.   



     문제는 플라이 낚시 자체가 아니었다. 연어나 송어의 습성과 생태까지도 면밀하게 고려한 미끼, 그러니까 화려한 색의 깃털을 사용한 플라이 제작이 하나의 오타쿠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정작 문제는 플라이를 만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깃털이 문제였던 것이다. 실제 새들 중에서도 깃털 색이 아주 화려한 극락조, 집까마귀, 케찰 등의 새들이 욕망의 대상이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집까마귀의 경우는 가슴팍에 조금 있는 빨간 깃털을 플라이 제작에 사용하기 위해 많은 집까마귀가 필요하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여인들의 모자에 박제 처리된 극락조 마리를 통째로 올려 놓은 패션마져 등장한 것을 보면 오싹하게 전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깃털도둑 이야기는 인류가 이성으로 대표되는 자신감의 극단적인 사례, 예컨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있다는 자신감과 같이 인간의 독단이 얼마나 강력하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 보면 미국인들이 수많은 들소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저자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19세기 말에 미국 들소는 6 마리에서 300마리까지 줄었다고 한다. 길게 잡아 19세기 후반부 50 동안 이루어진 일이라고 계산해도 50 매일 3 마리가 넘는 들소를 죽여야 나올 있는 수치이다. 이것은 기차를 타고 가던 개척민들이 심심풀이로 들소들을 쏘아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십억 마리였던 여행비둘기는 1901년경 거의 멸종될 정도로 총질을 당했는데, 1914 마지막 여행비둘기가 동물원에서 죽었다고 한다. 여행비둘기는 이제 멸종하고 없는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이런 일들의 맥락은 중단되거나 의식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가 되풀이 된다고 말하듯, 인간의 과오, 아니 인간의 오만한 독단은 되풀이 되어 역사에 등장할 뿐이었다. 극락조 마리를 모자 장식으로 죽이게 , 그리고 책에서 등장하는 플라이 제작에 희귀한 깃털을 사용하는 등의 사례는 여행비둘기나 들소에게 심심풀이로 총질을 해대던 인간의 빗나간 인간중심주의, 독단이 다소 다듬어진 사례에 불과하다고 보인다.

 


    깃털도둑 흥미로운 소재와 스토리텔링을 전달하는 논픽션이다. 실제 사건을 통해 희귀한 깃털에 대한 집착과 욕망, 그리고 오래된 (혹은 이미 멸종되었을지도 모르는) 동물들의 가죽을 보관하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더해져서 발생했다고 있다. 하지만 가지 부분은 다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영화처럼 초반에 사건이 벌어지고, 저자가 책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부분이 나온 뒤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나 로스차일드 경의 박물관에 대한 배경 설명이 다소 장황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아울러 저자가 조사하여 제시한 여러 배경 지식이나 사건을 재구성하여 연결함에 있어서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점이 존재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글이 장마다 따로 존재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훔친 새들이 사람들에게로 팔려나간 저자가 이를 다시 추적하는 과정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팔려 어디론가 사라졌기에 되돌릴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해도 작업의 마무리 혹은 결론을 보다 분명하게 정리해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인간은 앞으로도 인간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어느 동물을 멸종의 위기로 몰아넣게 것이다. 책은 우리의 모습을 거울에서 확인하듯 그릇된 욕망을 품고 있는 인간의 단면을 비추어 주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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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를 울린 과학책

이지유 외 9명 지음 |  [바틀비]



요즘 들어 서평글을 읽는 일이 많아졌다. 우선 이유는 내게 익숙한 독후감과 서평과의 차이가 무엇일지 궁금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도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은 느낌 뿐만 아니라, 책에 언급된 사항에 대한 서평자의 생각이 궁금했다. 과학책에 대한 서평을 읽어보는 최근에 시도해보는 일이다. 과학도 결국 사람의 일이기에 과학지식이라는 결과물만이 아니라 과정을 들여다보면 곧바로 인간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있다. 최근에 알게 과학책방 갈다’(갈릴레이와 다윈에서 따온 말이기도 하고, 밭을 갈다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에서 여러 과학자 과학 저술가들이 읽은 과학책 혹은 과학에세이에 대한 서평을 모은 과학자를 울린 과학책 틈틈이 읽고 있다. 오늘은 여러 작가 중에서 과학 논픽션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지유 작가의 서평글을 읽었다.  호프 자런이라는 과학자가 랩걸 읽고 이지유 작가가 서평이었다.  오늘 내가 서평을 선택한 이유는 아무래도 다른 저자들이 읽은 책들 보다 책의 제목을 많이 들어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2017 국내에서 출판된 책은 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식물에 대한 과학적 발견 뿐만 아니라 과정을 그려내는 스토리텔링으로 인기를 얻었다. 책을 저자의 이력을 보니 지구물리학자로 보이는데, 하와이에서 화석삼림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분야에 대한 글쓰기와 여성 과학자라는 모델이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은 같다. 아울러 과학자로서 경험을 쌓은 이지유 작가의 이력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기에 더욱 책을 주목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지유 작가가 서평에서 관심을 부분은 과학 지식이나 험난한 과학적 발견의 서사, 혹은 여성 과학자로서 어려움을 극복한 승리의 과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지유 작가가 서평에서 언급한 것은 과학자를 과학자로 만들어준 요소였다.   요소는 바로 호기심이라는 것이었다. 호기심은 자기를 둘러싼 모든 대상, 모든 세계가 자신에게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도록 하는 감수성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이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과학 연구가 당장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야 하고, 쓸모가 있어야 한다면 인류가 달에 있었을까?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우주의 다양한 기본 입자들에 대한 정보도 여전히 가설로 존재했을 것이다. 쓸모를 갖춘 무언가를 얻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쓸모를 얻는 과정에도 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직 랩걸 읽지는 못했지만, 책을 읽게 되면 이지유 작가가 지적하고 있는 과학자를 과학자로 만들어주는 호기심 관한 관점도 염두에 두고 읽게 같다.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호프 자런의 연구는 되는 연구가 아닌연구라고 한다. 하지만 연구에는 돈이 필요하다. 모든 연구자들에게 공통되고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일 것이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호기심과 연구비 마련이라는 현실적인 목표사이에서 고민한다. 호프 자런과 같이 호기심 쫓으려면 그만큼 어려운 여건과 비판적인 견해를 극복해야할 일이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앎에 대한 욕구, 의지 같다.

 



수능시험이 치러지고 오래되지 않았다. 요새 부쩍 주변 사람들의 자녀들에 대한 고민거리를 많이 듣는다. 학교 현장에 관한 이야기며, 학원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기만 해도 나의 학창 시절과 다른 장면들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에 가서야 삐삐라는 것을 보았던 시절이다. 내가 요즘들어 부쩍 안타까워하는 중의 하나가 공부 대한 오해다. 내가 의도하는 공부는 시험 공부 아니다. 자신을 위한 진짜 공부 학창 시절에 맛보았으면 어땠을까 아쉬워한다. 그리고 그보다 전에 혹은 공부를 하며 스스로가 앎에 대한 의지 발견하는 경험이 학창 시절에는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나는 이런 부분을 알고 싶다라거나, ‘평생 이것에 대해 천착해보고 싶다라는 뜻을 세우고 의지를 두텁게하는 말이다. 혹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명이 물론 학업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자신의 발견하고 이를 단단하게 다지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도 늦었지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진짜 공부 해보고 싶다. 오랜 시간 호기심이란 영역이 내게는 무관한 영역인 느껴지는데, 이제는 사회 경험과 독서 경험이 다시 호기심 되찾게 해주는 같다. 내가 겪은 일들, 사회현상은 이렇게 되었을까 궁금해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고민한 발자취를 발견할 것이다. 아마도 거의 예외가 없을 것이다. 나는 다소 늦게 치열하게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발자취를 이제야 발견하고 따라가기 시작했을 뿐이다. 물론 늦게 시작한 것이 아쉽지만, 내가 보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지점에 호기심을 갖고 몸을 움직였을지는 의문이다. 이지유 작가가  랩걸에서 찾은 호기심 요소는 인생 후반의 화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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