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음악의 세계적인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의 마지막 콘서트 같은 기록 영화 <오퍼스 opus>를 보고 왔다.



암투병의 여파인지 젊은 시절의 인상과 많이 달라 보였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연주에 몰입하는 모습에 안타까웠고 숙연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카메라 앵글이 관람객들에게 들이미는 악기 브랜드 “야마하 YAMAHA"의 텍스트가 영화 내내 거슬리고 힘들었다. 결국은 불쾌하기까지 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느낀 점은, 이 영화가 거장을 이용한 악기 광고 같다는 인상만 받았던 것. 이 점이 가장 아쉬웠다. 상업적으로 영상에 상품명이나 브랜드를 노출시키는 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당연히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다. 나는 이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류이치 사카모토나 그를 좋아하는 팬들, 관람객들이 있던 것이 아니라, 악기에 대한 기업의 자부심과 잠정적인 고객만 있을뿐이란 생각만 들게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배회하는 악기 브랜드명. 화면의 중앙이나, 화면의 경계 언저리에 배회하는 ‘야마하‘ 상표는 시종일관 나의 시선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화면 처리, 연주자를 잡는 앵글, 편집 방식 모두 왠지 모를 경박함이 느껴지는 영상이었다. 악기 브랜드에 대해 개인적인 악감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영화감상을 끊임없이 방해했던 시간이었다.



카메라 감독이나 편집한 이는 과연 거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앞에 있었다면 뒷통수를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들이 관람객에게 들이미는 악기 브랜드의 텍스트는 심지어 폭력적이란 느낌도 받았다. 내가 예민한가보다. 끊임없이 들이미는 브랜드명이 나를 압박하고 답답하게 했다.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반응은, 우수한 악기를 만드는 한 회사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는 시각 언어를 감상자에게 어떻게 제시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며, 한 거장 음악가에 대한 존중의 문제인 동시에, 타인-감상자를 얼마나 배려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이 영상을 만든이들 마음 속에는 자신들의 CV나 이력서 말고 거장이나 관람객들이 과연 얼마나 자리잡고 있었을까 묻고 싶다.



<오퍼스>의 영상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라틴어 문장,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란  키치스러운 문장이 내게는 이렇게 보였다.


“인생은 짧아도 야마하는 길다.” 


내게 이 영화는 거장을 이용한 악기 광고처럼 보였다.

거장의 생각을 담은 책을 읽거나 OST나 들어야겠다.








































#오퍼스 #류이치사카모토 #류이치사카모토오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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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정영목 지음 / 소요서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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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타계 33주기, 한국적 모더니스트의 마음 풍경 산책하기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정영목 지음 | [소요서가] | (2023)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매년 말이 되면 이렇게 인위적으로 구분한 시간에 남다른 감회와 마주하는 상황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진다. 올 한해는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해보다가, 특별한 문제없이 지내온 것만 해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미술관을 찾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장욱진 화백의 회고전가장 진지한 고백전이 전시 중이었다. 전시와 관련하여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소개하는 책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을 읽어보았다. 이 책은 철학서점 소요서가에서 두 번째로 출간한 책이다. 책을 읽다가 우연히 오늘(20231227)이 장욱진 화백이 타계한지 33주기 되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간단한 리뷰를 남겨보고자 한다.


 

덕수궁 전시장을 처음 들어섰을 때 나와 마주한 장욱진 화백의 그림은자화상(1951)이다. 황금들판이 출렁이는 들판을 뚜렷하게 가로지르는, 황토처럼 붉게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왔을 법한 화백의 모습이다. 엽서 크기보다 작아 보이는 실제 그림 속 화백은 검은 색 연미복과 실크햇 모자, 검은 우산을 든 서구적 신사의 모습이다. 당대의 시대 분위기와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는 복장이다. 당시에 그의 나이 35. 조국이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519월에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충남 연기군으로 귀향할 즈음 그린 작품이라 한다. 혈기왕성한 가장으로서 고향으로 오면서 어떤 기대를 했을까 궁금해진다.


 

그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나의 그림 감상은 이렇게 작가의 연보와 연대기적인 정보를 참고하여 짐작하거나,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나름의 정보를 찾고 때론 상상하는 데 그치고 만다. 그림을 아예 감상하지 않는 것보다야 나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나의 그림 감상은 금방 한계에 도달하곤 한다. 나는 그림 해설을 읽고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기에, 아마도 작가에 대한 에피소드를 접하며 작품을 감상한 것으로 착각했던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이번에 읽은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은 미술사학을 전공한 정영목 교수가 집필했다. 만약 그라면 나의 감상 방식을 작가론에 치우친 감상 방식이라고 진단할 듯하다. 미술이론을 잘 모르는 내가 미술을 감상할 때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아마도 작가론중심의 감상방식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싶다.


 

저자는 작가론중심의 감상을 벗어나 작품 자체의 가치를 탐색하는 작품론위주의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점이 저자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기존의 작가론위주의 감상을 단순히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가론적인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했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한계를 이렇게 지적한다. “소설 쓰듯 단순한 문학적 서정성의 수상(隨想)”(43)에 그칠 수 있고, “개별 작품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존재가치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질 소지”(45)가 있으며, “상대성의 잣대는 형태의 외형적 결과를 신봉하는 피상성”(45)에 빠지기 쉽다고 말이다. 다시 정리하면 저자는 장욱진의 작품 세계를 감상할 때 작품 자체의 미학적 가치, ‘진정한 작품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보다 절대적인 존재 가치, 객관적인 가치를 찾으려면 이 기준에 부합하는 합당한 기준이 있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작품 감상의 큰 틀은 작품에 대한 형식주의적 해석에 기초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형식이 단순히 외형적 형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가 감상에서 근거로 사용하고자 하는 단서는 형식의 진정성이라고 말한다.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낙담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장욱진 화백의 그림 대부분을 감상하다보면, 사실 감상자가 사전 지식이 없이도 무엇을 그린 것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저자는 화백의 그림이 지니는 가장 직관적인 특징은 친근감’(235)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지만, 어떤 화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미술책을 읽기도 한다. 반면 장욱진의 그림에는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사적 틀과 지식이 아니라도 장욱진의 그림에는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미술비평가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인에게 장욱진 화백의 작품들은 해석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감상하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번에 책을 읽다보니, 내가 부실한 지식을 지녔음에도 얼마나 서구적인 기준에 치우쳐 우리의 그림을 바라보곤 했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작가론보다는 작품론위주의 해석과 감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장욱진의 작품 자체가 지니는 진정성이 작품 그 자체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 같다. 특히 일반 대중에게 작가론방식의 이해가 피상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향의 평가와 관점의 해석이 필요함을 절감했을 것 같다. 다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 역시 작가의 개인적인 면모나 가족 배경에 관한 사항들, 저자의 말이나 가족과 있었던 일화를 곁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작품론위주로 해석을 시도하지만, ‘작품작가에 대한 정보를 엄밀히 구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저자의 입장은 이 두 가지 방식의 접근법 가운데, ‘작품에 더 중심을 두고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하려는 인상을 준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그들(한국적 모더니스트들)의 존재가 돋보이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의 인간적 면모나 그들의 작품에 드러난 진정성 때문이다. 심지어 이 진정성은 작가와 작품 혹은 이 둘 모두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과 함께 발견된다는 점이 핵심이다.”(48)


 

그러므로 저자 역시 장욱진 화백을 포함하여 김환기, 백영수, 유영국, 이중섭 화백들의 작품을 평가하고 감상할 때 작가와 작품, 그리고 시대적 맥락을 모두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미술사적 방법론으로 형식주의적 해석을 채택한 이유는, 절대적인 작품 자체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장욱진의 경우 그의 작품에는 일생을 통해 반복되는 라이트모티브가 있다. , 해와 달, 나무, 집과 사찰와 같은 자연 풍경 및 집, 까치나 닭, , 돼지, 강아지와 같은 동물들, 여인과 아이,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다. 서구적인 관점에서 화백의 그림을 평가한다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림 속 대상에 혼란스러워하거나 매너리즘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저자는 무엇보다도 화백의 그림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반복되는 대상과 조형 형식 이면의 독창성과 진정성을 읽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화백의 작품이 보여주는 진성성은 무엇보다 그의 삶과 작품이 일치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고, 그림 속의 대상들은 곧 작가의 분신이나 다름없다고 일러준다. 평생 화백이 그린 수많은 대상들은 곧 작가의 마음 속 풍경을 보여주는 구성물들이지, 단순한 장식물로서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 서구의 미술사적 관점에서 작품은 예술을 위한표현, 혹은 신앙이나 삶에 관한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화백의 작품은 보다 정신적인 면, 구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화백의 그림에 나오는 까치나 나무, 동물 등의 대상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은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이 아닐 것이다.


 

내가 저자의 설명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저자가 화백의 작품에 있어 불교와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아본다. 화백이 평생 작업한 작품 가운데 불교적인 소재 혹은 대상이 나오는 그림은 먹그림을 비롯하여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불교 집안에서 성장한데다, 고등학생 시절 6개월 간 절에 가서 정양하는 동안 성철스님을 지도한 적 있는 만공 선사 밑에서 몸과 마음을 회복했던 경험을 참고해보면, 그의 그림에 불교가 준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불교보다) 노장 사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 작품세계는 노장사상뿐만이 아니라 불교와 전통적인 무속과 민화, 설화 등의 요소가 자전성을 바탕으로 서로 종합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럼에도 나의 판단에는 장욱진이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이며, 그것은 작품 자체의 도상이나 주제보다는 작가적인 인식과 태도, 그리고 예술이라는 개념에 관한 부분에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205)


 

다시 말해 불교가 장욱진의 작품세계에 미친 영향은 소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예술관 혹은 작업 방식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특징 때문에 외국의 미술사학자들이 장욱진 화백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몰라 곤란해 했을 것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화백의 삶과 작품의 일치가 보여주는 진정성에 주목하고 이를 높이 평가한다.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나의 눈에는 그저 간단한 선을 사용한 아이 그림 같아 보인다. 하지만 화백은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언어를 어떻게 찾아냈을까 궁금하다. 어두컴컴한 새벽에 산책을 나갔다 돌아와 조그마한 화폭 앞에서, 어떤 생각을 채울까를 고심했을 화백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붓을 수없이 들었다 놓기도 했을 법한 그는 자신이 바로 그림이 되는 길을 찾아 또 다시 마음 속 풍경을 산책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스님에게는 불경을 외우고 참선하는 구도의 길이 있듯이, 화백에게는 작은 화폭을 채우는 구도 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때론 마음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붓을 내려놓으며,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225)라고 스스로를 달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감상하는데, 작가가 직접 쓴 산문과 더불어 그림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감상하는 데 중요한 주춧돌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책 속으로]




[1] "개별 작품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존재가치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질 소지가 충분히 있다. 또한 시각예술에 있어 이러한 상대성의 잣대는 형태의 외형적 결과를 신봉하는 피상성에 빠지기 쉽다."(45)
- 개별 작가의 독창성과 고유성을 평가할 때 상대적인 접근방식이 갖는 문제점 지적.

[2] "작품의 외형적 형식보다는 형식의 내재율에 흐르는 진정성, 즉 형식의 진정성을 찾는 것에 더욱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45)

[3] "장욱진은 그리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형식의 문제가 아닌, 자연과 삶 그리고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걸쳐 있는 일종의 ‘진실’을 추구하는 문제로 보았다. 또한 조형으로서의 ‘압축’과 변화하지 않는 ‘반복’의 조형은 자신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표상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같은 스타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이미 조형 이전의 문제인 것이다."(47)

[4] "여인 이미지에 대한 장욱진의 태도는 그의 어머니와 부인을 정점으로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한 인물만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딸들에 대한 심상이 복합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 화가의 여인상은 매우 자전적이며 심리적이다."(140)

[5] "이러한 나무는 노장사상과도 같이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 동양적 사유의 관념을 보여준다. (...) (나무는) 아이와 새를 품에 안고 키우는가 하면 인간에게 휴식을 주고, 아예 마을 전체를 위에 얹어놓고 보살피기도 한다."(156)

[6] "그러니까 항상 자기의 언어를 가지는 동시에 동시대인의 공동한 언어를 또한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164)
- 장욱진 화백의 말

[7] "참선의 수행처럼 몸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으로 자신의 몸을 다 소모한 장욱진은 구도자처럼 삶과 예술에 대한 불교적 실천을 보여주었다."(189)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190)
- 그림에 임하는 장욱진의 말

[8] "예술을 향한 작품들이 서구의 미술 개념이며 모더니즘이었던 반면, 장욱진은 예술을 뛰어넘어 도를 향했다. 이 점에서 장욱진은 불법(佛法)에 연결되어 있다."(207)

[9] "문화유산으로서의 전통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새로운 시대정신과 맞부딪쳐 박제화 될 위험성이 농후하다. 이것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항상 재해석되어 우리의 현재와 함께하는 생물처럼 살아 움직여야 한다."(220)

[10] "작가는 그 세계의 주변 사물들을 애정으로 보듬는다. 생명은 생명의 고귀함으로, 무생물에게도 애정을 담아 정성껏 의미를 부여한다."(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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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양화가이자 1세대 모더니스트라고도 불리는 장욱진 화백의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에 다녀왔다.


전시된 작품이 많아 꼼꼼하게 관람하지 못했는데도 3시간이 걸렸다. 

현재 알려진 그의 작품들만 보아도, 유화730여 점, 먹그림 300여점이나 된다.  


장욱진 화백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역시나 책을 통해서였는데, 그 책이 바로강가의 아틀리에였다. 화백이 쓴 산문집이었다. 화가는 그림으로만 말해야 한다고 언급한 그 역시 자신의 산문을 줄곧 대단하지 않은 글이라고 줄곧 낮추지만, 나는 한 마디 한 마디 귀를 쫑끗 새우고 듣는 학생처럼 조심스레 읽었다. 



















회고전 입구를 처음 들어가면 관람객을 맞는 그림이 바로 댄디한 검은 양복을 입고 붉은 황톳길을 터벅터벅 걸어온 듯한 화백의 자화상이었다. 그는 액자의 그림 속 반대편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관찰하는 듯 나를 맞았다. 이 초상 작업을 한 해가 1951년이었다. 전쟁 중이던 조국의 황금들판을 가로질러 화백은 어디로 향하고 있던 것일까?



독립서점이면서 책을 만들기 시작한 청계천의 소요서가에서 두 번째로 만든 책이 도착했다. 바로 이 초상화의 그림이 담긴 엽서와 함께! 이 책은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명예교수 정영목이 집필한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삶 장욱진이다. 



책을 처음 받아 처음 펼쳐보고 감탄했던 것은 단순히 광택이 덜한 고급지를 사용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책을 완전히 펼칠 수 있게 제본되어 두 지면에 걸친 그림을 보기에 좋다. 양쪽 지면에 그림이 배치되어 있는 경우도 각 지면이 활짝 펴져 각각의 그림이 작은 벽에 걸린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책에 수록된 자화상을 전시회장을 들어서자마자 만나 반가웠다. 화백은 붉은 황톳길을 걸어 어디로 향하고자 했던 걸까. 그 실마리를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싶어 조바심이 난다. 이 그림이 책에 수록된 그림 크기 정도보다 작아보여서 놀라기도 했다. 


문외한의 눈으로 본 장욱진 화백의 그림에는 반복되는 주제가 있었다. 

사람(가족), 새(주로 까치), 황소, 강아지(특히 검은 강아지)와 같은 동물들, 나무와 화분 등의 식물들, 그리고 해와 달이 반복적인 주제를 이루는 듯 했다. 이 '흔해보이는' 대상으로 그토록 다양하게 그림의 방법을 실험하며 이들 주제에 천착했던 이력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 같다. 이 모든 구성원들이야말로 세계를 이루며 그의 가족이 된 존재들이었다. 동시에 이 '가족'들은 고 그 자신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집에 와서 다시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을 펼쳐 전시장에서 보았던 그림들을 떠올리고, 그 때의 감흥을 다시 떠올려본다. 이 책에 수록된 그림의 발색이 꽤나 좋은 것 같다. 다만 몇몇 이미지는 확대와 크롭을 해서 그런지 해상도가 다소 아쉬운 부분도 보인다. 


무엇보다 그림에서 전해지는 화백의 따뜻하고 때론 천진난만한 시선이 작은 아쉬움을 무마해주는 듯 하다. 또 대부분 유화 작품인데도, 물감을 유기용매에 상당히 희석해서 사용해서인지 수채화 내지는 수묵화의 농담을 구현한 듯한 느낌을 처음 보았던 부분도 인상깊다. 


여기에 책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 말고도 전시회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림을 담고 있는 액자다. 아마도 화백이 그림을 완성한 후 당시에 만든 액자들이 꽤 있는 듯한데, 많은 작품이 캔버스에 직접 그렸기 때문인지 작은 액자를 보다 큰 액자에 넣은, 2중의 액자 형식을 취한다. 그러니까 큰 액자 속에 작은 액자 전체가 하나의 입체작품처럼 통째로 끼워져 있다는 말이다. 말만으로 이해하면 꽤나 둔해보이기도 할 것 같은데, 의외로 이런 액자가 독특하고 참 아름다웠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전시회에서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도록이나 책에는 잘 나오지 않는, 아름다운 액자의 모습, 그리고 그림과 조화된 액자의 선택과 관련한 사항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것. 그러니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전시장을 직접 찾아 보시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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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논, 김현준의 재즈+로그
김현준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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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재즈 현장을 비추는 거울, 캐논

- 캐논, 김현준의 재즈 + 로그

 

김현준 지음, [한울] (2022)




책을 통해 재즈비평가 김현준을 처음 알게 된 건 25년 전의 일이다. 우울증인지도 모르고 내 안의 세계에 갇혀 있던 시절, 나는 어떤 음악도 듣지 않는 아이였다. 우연한 만남. 재즈는 나를 세상으로 향하도록 처음 문을 열어주었다. 새끼 새가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올 때 어미 새는 밖에서 알을 쪼아 도와주기도 한다던가.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문을 잡아준 것에는 김현준의 재즈 파일(1997)과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도 있었다. 군 시절 라디오로 그가 진행하던 재즈 프로그램을 듣던 기억이 난다. 점호가 끝난 한 밤중, 고참들이 잠든 시간.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눌러 그가 진행하던 방송을 테이프에 녹음하곤 했다. 내무반에서 방송을 녹음 한 테이프를 늘어져라 듣고 지우기를 반복하던 기억도 새롭다.


 

캐논, 김현준의 재즈 + 로그(이하 캐논)18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책이라고 한다. 책에 담긴 이야기가 무르익는 동안 그는 어떻게 지냈을까 궁금했다. 간간이 그가 번역했던 쳇 베이커마일즈 데이비스 평전을 서점에서 만나면 반가웠지만, 나는 나대로 생활에 매몰되어 오랫동안 음악을 잘 듣지 못했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는 여전히 재즈비평가로, 또 공연기획자와 프로듀서로, 그리고 교육자로 치열하게 자신의 역을 맡아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출간된 캐논은 그가 지난 세월 함께 했던 국내 재즈 현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기에 저자가 가상의 피아니스트 한세영과 대화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을 도입했다. 비평가만이 아니라 음악과 연주자에 대한 애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가슴에 꾹 눌러 담았던 이야기였다. 그가 써야할 책이었다고 말할 때, 재즈 클럽의 문을 여는 순간 떠들썩한 공기의 떨림과 실내의 열기가 살갗을 때리는 듯 느껴졌다. 여기에는 지난 20여 년 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을 것이다.


 

책 전반에서 저자가 비평가로 지내는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 되물었을 법한 화두를, 재즈곡의 중요한 프레이즈(phrase)처럼 만나게 된다. 바로 비평가란 누구인가?’, ‘비평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저자에 따르면, 비평가의 역할이란 물밑에 감춰진 이슈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눅눅하게 처져버린 우리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일”(7)이다. 그에게 비평이란 짝사랑하기다. 그렇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포기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을 주어본 이만이 상대방을 미워할 수도 있는 법이라고 이해한다. 조금 과장해본다면 배교자라도 한때는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의 비평은 연주자의 상처를 덧나게 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재즈 연주자들에게 여러 가지 해법을 제시하고 대안과 자성의 소중함’(125)을 지향한다. 이런 내막으로 그동안 그의 눈길은 줄곧 무대 위 연주자의 표정과 몸짓을 향하고 그의 숨소리 하나까지 듣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왜 비평을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나의 비평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게 해준데 대한 감성의 화답이다.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미학적 신념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이성의 손길이다.”(125)


비평가는 무엇보다 먼저 연주자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대상 없는 비평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124)이다. 지난 25년간 재즈계 현장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연주자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당부가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이 말들이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의 당부가 재즈 음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서 재즈나 재즈인이라는 표현을 다른 분야의 예술로 대체해보라. 여전히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미술가는? 사진가는 또 어떤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느 예술 분야를 떠올려보아도 대상 없이존재하는 분야는 없다.


 

또한 저자는 연주자의 궁극적인 목표가 스타일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과 주변 세계를 면밀히 관찰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예술가는 세상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으로 대상의 상태를, 특히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입은 상처와 슬픔을 제일 먼저 감지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의 상처와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 상처를 어루만짐으로써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27)을 갖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은 각자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는’(172) 존재들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가로서 그가 재즈계에 전하는 당부를 나는 모든 예술인들에게 전하는 정언명령으로 읽는다. 이 길이 고귀한 길인 반면,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코로나 시국으로, 또는 기득권이 들어앉은 높은 성벽에 가로막혀 재즈인의 길을 걷지 못한 연주자들의 사연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손에서 놓아 버린 가슴 아픈 사연들이 찬바람 이듯 지나가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재즈라는 서브컬처는 굽은 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저자는 음악이 경력을 쌓는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이유’(264)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이 말을 읽고 어느 작가가 언급한 표현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의 글쓰기 수업 중 언급한 표현을 대강 옮기면 이렇다. ‘글쓰기는 결코 직업이 아니다. 글쓰기는 여러분이 좋아하기 때문에, 나아가 쓰지 않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라고. 물론 음악인의 경력을 쌓는 문제는 중요하다. 다만 여기에 선행되어야 하는 건, 음악가가 자신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다. 달리 말해, 저자는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지 당신이 음악을 좋아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음악가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연주가가 아니기에 이런 말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비평가가 후배 연주자들에게 하는 말은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보다 먼저 재즈 현장에 뛰어든 사람으로서 그는 새로운 세대에 대해 무한한 관심과 지지를 보내면서, 음악을 가까이하는 대중에게는 국내에서 왜곡되어버린 재즈의 위상을 바로 알리고자 한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나름의 위치에서 분투해온 시간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10년 전 즈음의 기억이다. 이탈리아 재즈계의 거장 트럼페터 엔리코 라바의 공연에 간 적이 있다. 2012년 즈음이므로 당시에 라바는 이미 73세 정도였다. 젊은 시절만큼의 에너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분한 연주였지만, 특히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연주 중에 빈번히 젊은 연주자들에게 연주할 기회를 더 주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좋은 작품을 인정하는 기준으로 표현력(연주력), 독창성, 진정성을 들었다. 엔리코 라바의 연주 기량이나 독창성은 비평가의 입장에서 인상적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까마득한 후배 연주자의 소리를 정성껏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며 배려하는 모습은 선배 연주자가 보여주는 진정성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재즈를 여전히 잘 모르는 나에게도 그 날의 연주가 뭉클한 감동으로 남아있는 이유다. 저자가 책에서 들려주는 진정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이 날의 연주를 떠올리며 읽었다. 언제 그의 연주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기약할 수 없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저자가 한국 재즈계와 후배 연주자들에게 하고자했던 말은, 문학을 하고 싶었던 중학생시절의 저자에게 친척이 해준 말에 아마도 모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의 고향을 잃지 마라.”(109) 앞서 이야기한 선배 연주자 엔리코 라바의 사례처럼 이미 정상에 오른 이들이 후배들에게 더 많이 배려할 때, 후배들은 새로운 마음의 고향을 얻게 될 것이다. 선배 연주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혜를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후배 연주자들에게 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재즈 1세대는 그야말로 어려운 여건에서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만든 세대다. 아울러 후배들을 많이 챙기고 배려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이제 그 몫은 다음 세대에게 주어졌다. 여기에 더하여 후배 재즈인들이 해야할 일은 마음의 고향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이들에겐 힘겨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대로 대한민국에서의 재즈는 앞으로도 서브컬처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한 소수 음악이 사회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로부터 그 존재를 인정받을 때 젊은 연주자들은 최소한 마음의 고향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책을 읽는 동안 재즈비평가가 오랫동안 묵혀놓았던 이야기들을 밤새 옆에서 들은 느낌이다. 자연 생태계가 건강한지의 여부는, 생태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서로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종의 다양성 확보에 달려 있다. 한국 재즈계도 그렇다. 젊은 재즈연주자들이 마음의 고향을 잃고 존재 이유인 음악을 손에서 놓아버린다면, 한국 재즈 생태계의 다양성이 감소하고, 나아가 언젠간 대한민국 재즈의 미래 역시 소멸 위기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 오래도록 음악과 멀어져 있던 나 역시 한국 재즈계에 침묵의 봄이 오지 않길 바란다. 음악은 음악인 혼자 수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속한 생태계는 건강해야만 한다. 예술은 국내 어느 한 기업가가 말했던 것처럼, 한두 명의 천재가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분야가 결코 아니다. 효율성과 성과를 기준으로 예술인들을 평가하고 지원하는 것은 다양성이 확보된 생태계를 만드는 데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생명력을 잃고 하나의 화석처럼 되어 버린 퓨전 국악의 사례를 떠올리면 된다.


 

책을 덮고서 책에 등장하는 가상의 피아니스트 한세영을 다시 떠올려본다. 한세영이란 인물은 대한민국에서 소수 음악을 어께에 짊어지고 고군 분투해온 이 땅의 모든 재즈 음악인들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책에 제시된 한세영의 경력이 피아니스트인 점을 제외하면 저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닮았다는 점에서, 한세영은 저자를 비추고 있는 하나의 거울상으로도 읽힌다. 따라서 한세영이 하는 말은 비평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할 테다. 나아가 저자가 또 하나의 자신한세영과 대화할 수 있게 해주었던 이 거울이야말로 하나의 캐논’(예술가들이 삶과 창작 과정에서 지켜야할 규범, 176)이었다는 생각도 해본다. 저자가 지향했던 삶과 마찬가지로, 그가 바라보던 연주자는 오늘도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 길을 헤매기도 할 것이며,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고 있을 것이다. 또 어디선가는 마음의 고향을 지키며 자신의 작품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마음의 고향을 지키며 자신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는 모든 예술인들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하느니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전영애 역, 도서출판 길, 91)









[책 속으로]

[1] "나는 재즈가, 수많은 이들의 갈채 속에 시대를 풍미하는 상업 음악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재즈를 그렇게 만들려는 시도가 되레 그 가치를 왜곡하기 쉽다는 점도 현장에서 몸으로 배웠다."(9)

[2] "삶과 동떨어진 음악은 현실 속에서 생명력을 얻지 못하며 울림의 폭도 좁다. 그리고 만드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음악은 온몸으로 느끼지 못하면, 음악은 없다."(70)

[3]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의 고향을 잃지 마라."(109)
- 문학을 하고 싶었던 저자의 중학생 시절, 친척 한 분이 저자에게 했던 말.

[4] "비평은 짝사랑이다. 비평가로 세상을 산다는 건 설렘의 포로가 된 채 ‘마냥 기다림‘의 끈기를 요구받는 일이다."(124)

[5] "비평가는 그대가 꿈에 그렸던, 그대의 작품을 누구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마주했던 열렬한 짝사랑의 주체였다."(125)

[6] "건강한 서브컬처로서의 소수 음악이 사회에 의해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건 견디기 힘든 폭력이다."(126)

[7] "연주자로서 눈여겨봐야 할 재즈의 교훈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는 태도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 있어요."(172)

[8] "세상 그 누구도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모든 이들에게서 사랑받지 못한다. 그러니,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은 생을 바쳐라."(231)
- 재즈 연주자 앤드루 시릴이 2014년 사천 국제 재즈워크숍에서 저자에게 건넨 말.

[9] "우리는 그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351)

[10] "(연주자는) 조건 없이, 자기 작품을 아낌없이 무조건 사랑하라."(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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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레이터 더 가까이
사울 레이터 지음, 송예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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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사진: (c)사울 레이터




평범한 일상에서 놀라운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

- 사울 레이터 더 가까이

(원제: The Unseen Saul Leiter)

 


사울 레이터(사진), 마깃 어브 & 마이클 파릴로(편집/) | [윌북] (2022)

 



언젠가 뉴욕 맨해튼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도시의 모습이 궁금하여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랬다. 제한된 시간과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대략 18시간을, 도시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북쪽의 200번가에서 무역센터가 무너졌던 남쪽의 그라운드제로까지, 그리고 강 건너 브루클린까지 말이다. 12시가 다 되어 가던 맨해튼의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후드 티를 입고 마주 오던 사람과 지나칠 때 등골이 서늘했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일부러 이런 경험을 하진 마시길. 나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제는 시간과 돈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다니질 못할 테지만, 그 때는 내게 그런 절실함이 있었던 것 같다.


마천루 사이로 비치는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떠다니던 하얀 구름들, 군데군데 영원히 계속 이어질 것 같은 도시의 보수공사 현장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던 하안 연기들, 도로 위로 아치의 일부처럼 뻗어 있던 노란 신호등 기둥과 여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신호등, 노란 택시, 노란 백열등이 켜져 있던 집과 가게의 실내, 빨간 색의 우체통과 코카콜라 광고, 붉은 벽돌집, 차이나타운의 붉은 글씨나 가게 천막, 가끔 볼 수 있는 붉은 코트나 드레스를 입은 여인, 아일랜드와 이탈리아계 사람들이 많이 쓰던 초록색 등등. 내가 기억하던 도시의 색이 있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기억에 남아 있는 도시의 색은 대략 흰색,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이 모든 색들을 사울 레이터의 슬라이드 사진집 사울 레이터 더 가까이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소 빛이 바랜 상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내 기억 속의 맨해튼과 여러 색들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은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출간된 사진집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영원히 사울 레이터는 이미 공개되어 있던 그의 대표작을 보여주는 도록 같은 느낌에 흑백 사진이 섞여 있어서 다소 아쉬운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컬러 사진집은 1만장이 넘는 슬라이드 사진 가운데 76장이 선별되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책 전체는 마치 레이터의 사진을 환등기에 꽂아서 그가 직접 보여주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이번 사진집은 좀 더 사진집다운 모습을 갖추어 더 마음이 간다. 사울 레이터가 생전에 친구들에게 자신의 사진을 환등기로 비추어 보여주길 좋아했다는 편집자의 글을 보니, 다른 이들도 사진집을 펼치면 환등기로 슬라이드 사진을 보는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지금까지 공개된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보면, 그가 깨어 있던 시간이라면 줄곧 세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면밀히 바라보고 있었을 것 같다. 철학자들처럼 삶을 추상적으로 통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오감과 직관을 총 동원하여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차 안에서 창밖을 보거나, 유리창 너머의 풍경이 반사된 상과 만나는 새로운 형태를 찾아낸다. 혹은 거리의 난간 뒤에서 숨죽이며 바라보았을 사진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사울 레이터가 분수대에서 물이 솟구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양산을 든 여인이 멀리서 지나가는 장면을 목격하는 사진을 보자(98). 현상되어 마운트에 끼워진 필름을 라이트박스 위에 올려놓고 웅크린 채 루페(loupe)로 이 사진을 들여다보았을 사진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분명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놀라워했으리라.


레이터의 사진에 남아 있는 빛바랜 뉴욕의 색은 눈 오는 길거리에서 차가 지나가는 사진(27)에도 남아 있다. 형체가 분명하진 않지만 노란색과 초록색이 있는 전경의 차와 원경의 빨간 차가, 그리고 길게 늘어진 흰 눈의 이미지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줄 뿐이다. 이어지는 몇 장의 사진들도 마찬가지다. 거리의 붉은 리본과 노란색 차나 빨간색 글자, 어느 가을날 거리 벤치에 앉아 연인에게 키스하는, 빨간 코트를 입은 여인의 모습에서 내가 기억하던 맨해튼의 색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강렬하지만 오래된 코다크롬 필름 특유의 빛바랜 상태로 말이다. 20대에 입성하여 집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해외 전시나 강연을 제외하고는 거의 뉴욕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레이터에게 이 지역은 익숙한 장소, 익숙한 거리였을 테다. 하지만 업으로 패션 사진을 찍던 사람의 눈이 거리로 향했을 때, 그 눈은 뻔해 보이는 일상에서 새로움을 지치지 않고 발견해나갔다.


사울 레이터 재단의 이사장이면서 이번 사진집 제작에 참여했던 마이클 파릴로는 레이터를 아주 평범한 것들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게 즐겁다”(67)라고 말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화가의 재능을 지니기도 했던 레이터가 나에게 일러주는 삶의 깨달음은 일상의 삶 속에 놀라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분수사진에서처럼 서로 무관한 사건, 이를테면 멀리서 양산을 들고 가는 여인의 이미지와 가까운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분수사이의 우발적인 관계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하듯 말이다. 하지만 분수사진은 전통적인 흑백 사진의 문법이 강하게 엿보인다.


여기에 이라는 요소가 더해진다. 레이터의 사진을 흑백으로 바꾸어보면, 대부분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발견의 즐거움이나 잔잔한 감흥을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반면 나와는 무관한 대상들을 찍었지만 오래된 슬라이드 필름 특유의 빛바랜 사진들은 내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아픔의 기억이나 상처를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이 작용이 레이터의 사진과 내가 연결되고 내가 비로소 그의 사진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색은 추상적인 요소다. 누군가에겐 우리의 유한한 삶의 덧없음을 일깨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에겐 흑백사진의 명암 변화에 버금가는 사진의 정서와 분위기를 더해주며 컬러 사진을 완결하기도 한다. 내겐 사울 레이터의 아름다운 컬러 사진들이 바로 그렇다.


물론 이 사진집은 사울 레이터가 직접 편집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운 감은 있다. 하지만 그가 우선 골라놓은 사진 중에서 사진가를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선별한 것이기에 같은 사진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 차이가 크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독자가 레이터의 사진으로부터 받는 즐거움과 감동이 덜하진 않을 것이다. 문자텍스트로 이루어진 다른 책들의 운명처럼 원고 혹은 책이 작가의 손을 떠난 이상, 이를 즐기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것이 레이터가 대중들에게 자신의 사진에 대한 설명이나 분석하는 일을 거절했던 이유일 테다.


10여 년 전에 사울 레이터를 알지 못했지만, 그의 말년에 그가 살던 장소, 그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도시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신기한 느낌이 든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하고 방황했던 시절, 그의 존재를 알았다면 필름 카메라를 메고 한번쯤 그를 찾아가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레이터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고 대뜸 이렇게 말해줄 것 같다. ‘나도 필름카메라를 꽤 오래 썼지.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 써. 디카로 찍기 시작한지 한 10년쯤 되었을 거야. 필름카메라로 찍고 결과물을 볼 때가 더 재미있긴 했었어. 필름카메라를 쓰고 있다면 익숙한 주변에서 계속 찍어 보라구. 시간은 사진가의 편이니까!*’(마지막 문장은 사울 레이터가 한 말(98)에서 인용함.)






[번역에 관한 사항]

121면에 사울 레이터가 <에스콰이어> 작업용으로 촬영한 슬라이드 500여 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어서 재즈 연주자 찰리 파커에 관한 기사 새의 발라드(Ballad of the Bird, 1957)’를 언급하는데, 아마 번역가는 찰리 파커의 별명이 (the Bird)’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 같지만 여기에 주석을 더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the Bird'를 단순히 로 번역했는지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신 찰리라고 번역해두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단순히 라고 번역을 해두면 이 가 찰리 파커와 무슨 상관인지 그 뉘앙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번역자와 편집자의 결정일 테다. 아쉬운 것은 모든 독자가 이런 점을 알지 못할 테니, 주석을 달아 주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1] "우리는 색채의 세상에서, 색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67)

[2] "어째서 색을 홀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색은 삶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사진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합니다."(67)
- 2002년 뉴욕 유대인 박물관 강연에서 사울 레이터가 ‘색’에 대해 한 말

[3] "아주 평범한 것들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게 즐겁다."(67)
- 내가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

[4] "컬러 슬라이드는 벽에 영사해 볼 수도 있고, 인화해 볼 수도 있어요. 네거티브 필름과는 다르죠. 라이트테이블에 올려만 놓아도 그 고유하고 특별한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인 컬러 슬라이드는 라이트테이블 위에 올리는 순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입니다."(68)

[5]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는 그 나름의 고귀함이 있습니다."(68)
- 아마도 이 말의 진의는 사진의 본질 외에 사진을 꾸미려고 의도하거나 감상자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주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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