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범도 1~2 - 전2권
방현석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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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믿음의 불씨를 지켜낸 그들의 이야기다



범도


방현석 지음, [문학동네] (2023)




 

소설은 15세의 소년 포수가 꿩 사냥에 나서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훗날 대한광복군 대장이 된 소년이 나라 잃은 부대를 이끌고 북만주의 암흑 속에서 행군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영하의 혹한 속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과 함께 했던 수많은 이들을 떠올리며 추위를 견디다가도, 이들의 죽음을 자각하고 이내 몸서리쳤으리라. 나라를 되찾고자 한 기나긴 여정에서 그는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제 몸처럼 아끼던 동료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그는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펼쳐질 운명을 예감했을까. 아니면 당신이 사냥했던 동물들처럼 눈앞에 마주한 운명을 의연히 받아들이기로 다짐했을까.


 

무엇보다 그는 포수였다. 포수는 총으로 야생의 생명을 거두는 이들이다. , 아무 생명에게나 무기를 들이대지 않는다. 소년에게 사냥을 가르쳐준 신포수는 사냥꾼과 포수의 차이점을 이렇게 일러주었다. ‘심장을 맞춰 고통스럽게 낙명시키는 총잡이는 사냥꾼일 뿐이다. 포수라면 사냥감의 두부에 있는 급소를 맞추어 고통 없이 일격에 낙명시켜야 한다. 호랑이를 잡는 범포는, 호랑이와 마주했을 때 단 한 번의 실수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울러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목숨이 하나라는 것도 말이다. 그런 이유로 포수는 사냥감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이들에게 죽음은 그만큼 가까이 체감하는 현실이었다. 자신의 때가 되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말년에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해 여생을 보냈던 일흔 줄의 홍범도 역시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남은 지인과 옛 동지들을 불러 아낌없이 베풀고 떠난 그는 정녕 조선의 포수였다.


 

한 나라에 왕이 있고, 태평한 시대였다면 홍범도는 수포수가 되거나 군영에서 왕을 호위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개인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줄 국가라는 주체가 사라져버렸던 까닭이다. 부와 권력을 지닌 계급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나라의 존재 여부는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망국은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안겨주기도 했다. 일부는 가진 것 없고 미약한 이들을 착취하고 짓밟았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타인의 것을 빼앗는 도적이 되기도 했다. 도적이 되지 않은 이들은 제 살을 베어 먹어야할 정도로 가난했다. 끊임없이 유린당하는 비루한 운명에 결박당한 존재들이었다. 살아가는 일이 죽는 일보다 못한 시절이었다. 이들에게 망국은 차라리 새로운 희망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범도를 가르쳤던 신포수는 맹수보다 무서운 짐승이 인간이라 일러주었다. 범도가 동물을 잡는 포수가 아니라 인간이란 짐승을 잡게 된 까닭을, 녹두장군 전봉준이 한 말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동학의 난을 일으킨 지도자 전봉준이 관군에 붙잡혔을 때, 서광범이란 인물이 전봉준을 조사했다. 서광범은 스물 다섯의 나이에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무리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서른다섯에 법무대신이 된 서광범이 취조하자 전봉준이 대답했다.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하늘을 찌르는 백성들의 원성과 절규다. 봉기를 일으킨 것은 무너지는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함이었다.”(1291) 범도는 자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왕을 믿는 대신, 갈 곳도, 먹을 것도, 머물 곳도 잃은 사람들을 지켜주려 했다.


 

15세 때 나이를 속이고 관군에 들어가 무관이 되었다가 탈영한 소년은 어느 새 일본군을 잡기 시작했다. 타국의 군대가 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힐 때, 국가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못했다. 군주는 백성의 믿음을 스스로 저버렸고, 책임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엄연한 국가의 모습이던가. 운명은 포수나 무관으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던 한 남자의 삶도 영영 바꾸어놓았다. 현실에서 개개인은 나름의 보존 의지에 따라 욕망을 추구한다. 소설 범도는 구한말-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현실 공간, 국가가 사라진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던 이들이 각자의 욕망을 성취하고자 격렬하게 부대끼던 인간 군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소설을 읽다가 눈길이 오래 머문 부분은 계급의 높고 낮음, 지식의 많고 적음을 떠나 많은 이들이 조직이나 공동체를 배반하고 변절해간 모습이었다. 조선 유림의 거두 유인석의 부대를 배신하고 도망친 박상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일진회의 윤응순 같은 인물들, 혹은 안중근 및 홍범도와 의형제를 맺고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했지만 나중에 밀정이 된 엄인섭을 떠올려본다. 이들은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소설에서도 홍범도의 참모들은 엄인섭이 일본의 밀정이 된 이유를 궁금해 했다. 왜 그랬을까. 혹자는 세상을 바꾸려 덤벼들었지만, 세상보다 제 자신을 바꾸는 것이 쉬었기 때문일 것이라 진단하기도 했다. 삶에서 실존적 위기가 닥쳤을 때, 누구는 이웃과 나라를 배반하고 자신의 살 길을 도모했던 반면, 다른 이들은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홍범도의 눈으로 소설 속 인물들을 관찰하면서 많은 이들이 변절하게 된 이유 한 가지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다음은 의병장 유인석이 홍범도에게 한 말이다.


 

한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인의예지신이오. 어질지 않은 정치는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고, 의로움이 없는 정치는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며, 도리를 모르는 정치는 나라를 기울게 만드는 법이오. (...) 허나, 아직 조선에는 마지막 하나, ()이 남아 있소. ()은 백성들이 서로를 지켜 더불어 다시 일어서려는 믿음의 힘인바, 이 가물거리는 믿음의 마지막 불씨를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든 지켜나가야 하오.”(2, 285)


 

당시 일본군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청나라와 러시아 군대를 위협하며 동아시아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많은 조선인들이 조직과 공동체에 등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있던 믿음의 불씨가 꺼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군주가 국가와 백성을 저버린 상황에서 그를 따르던 많은 이들은 믿음의 경계에서 비틀거렸을 테다. 안중근은 단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자 단독 작전을 결심했다. 홍범도는 그에게 장총을 쓰고 퇴로를 확보하라 권했지만, 안중근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싸운 건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니까 싸우는 것이라고. 변절한 조선 관리 박상준 앞에 홍범도가 나타났을 때, 그는 오히려 홍범도를 회유하려 했다. ‘앞으로 천년은 일본이 조선을 좌지우지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건 변절한 자의 소신이었다. 그의 말에서 변절의 이유를 짐작해본다. 나라 잃은 인간에게 남아 있던 작은 믿음의 불씨가 영영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가슴 속 믿음의 불씨를 지키지 못한 이들은 냉소와 허무주의, 패배주의에 잠식되고, 새로운 지배자의 논리가 소신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지구를 정복한 생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 앞에선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인간의 역사는 불가항력과도 같은 자연의 위력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이기도 하다. 다만 인간은 판도라의 항아리에 남은 희망을 붙들었던 존재다. 아무리 무모한 희망일지라도 여기에 기대어 다시 일어섰던 것이다. 혼자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다시 일으켜 줄 수 있는 존재의 의미가 인간(人間)이란 단어에 있지 않은가.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과 위대함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불가능한 무언가를 가능하다고 믿고, 이를 위해 저를 던져 넣는 존재.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도 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인간의 유별남이 여기에 있다.


 

소설에서 내가 주목했던 이들은 불가능함 앞에서도 굴복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역사에 이름이 기록된 이들뿐만 아니라 이름으로도 기록되지 못했던 이들을 소설 속에서 상상해보았다. 이야기 속에는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 떠돌며 적과 싸워야 했던 사람들의 고단함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홍범도는 군사 조직의 지도자였지만, 무기 구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농장이나 광산, 심지어 바다에서 고기잡이로도 일했다. 그의 곁에는 적은 노임이나마 일부를 독립 자금으로 내놓은 동료 광부들이 있었다. 또 최후의 생존 수단으로 보관하던 금·은반지, 비녀 등을 독립군 후원 기금으로 내놓았던 조선 동포 부인들과 부인회 여성들도 있었다. 봉오동 전투 당시 부녀자들은 물과 주먹밥을 만들어 교전지역으로 직접 나르기도 했다. 밥 한 끼를 제공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이들은 지면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이들이 없었다면 일본군 병력의 절반 이하로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을까.

 


홍범도의 마지막 직업은 극장 수위였다고 한다.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에 있던 조선인 17만 명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당했다. 이 때 홍범도 역시 남카자흐스탄의 사나리크로 던져졌고, 이곳의 한 극장에서 3년 넘게 수위로 일했다. 그의 정체를 알아본 극작가가 홍범도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연극을 본 홍범도는 내 이야기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주시오라고 말했다. 이 말의 여운은 꽤나 오래 남았다. 홍범도가 말한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전장에서 함께 싸운 가족과 동료였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내놓은 이들이었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그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나라를 잃고 국경을 넘어 어디를 가든 학교부터 지었던 이들, 척박한 만주의 벼논에서 끊임없이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벼 베기를 하던 이들처럼. 엄혹한 현실에서 가슴에 남은 믿음의 불씨를 지켜낸 이들이 바로 그들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홍범도란 이름은 한 개인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일본과 조국을 배신하고 타자화한 대상을 짓밟았던 세력에 맞서 싸웠던 모든 이들을 대표하는 집합명사이며, 겨례의 믿음의 불씨를 지켜낸 이들을 호명하는 이름이었다.


 

마침내 안중근의 말, 성경의 문장처럼 우리의 광복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어두운 밤사이 수많은 희생을 치른 후에야 말이다. 우리는 속절없이 패배하기도 했지만,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에 싸웠던수많은 그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소박한 일상은 그들의 희생에서 빌어 왔다. 독립을 열망하며 독립 활동에 참여하고 때론 희생당한 이들에 크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변절자들은 일본이 우리의 강토를 영원히 지배하리라 믿었을 것이다. 이 믿음은 소신이 되기도 했다. 이에 맞선 이들은 스스로 싸우지 않으면 우리에게 권리도 주어지지 않음을 깨달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제 안의 믿음의 불씨를 지키고자 싸웠다.


 

나라를 다시 세운 우리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홍범도가 부탁한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잠들지 말아야 하는 날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후손인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나아가 우리가 반드시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일본의 조슈군벌이 여전히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까닭이다. 홍범도의 부대가 북만주의 혹한 속에서 행군하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도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백무아가 홍범도를 향해 수없이 속삭였을 살아 있으라는 말을,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에도 해본다. 백무아의 심정으로 한 가지 바람을 남긴다. ‘그들의 이야기여, 부디, 잠들지 말고 깨어있으라. 그리고 살아남으라.’ 이 유산은 홍범도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모두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은 강하다.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 속 믿음의 불씨를 태우는 연료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되풀이 되어 이 불씨가 꺼지지 않길 바란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거울처럼 비추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1]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하늘을 찌르는 백성들의 원성과 절규다. 봉기를 일으킨 것은 무너지는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함이었다."(1권 291면)
- 녹두장군 전봉준의 언행록에 실린 전봉준 취조서 내용

[2] "유능한 사람도 많고 선량한 사람도 많다. 하지만 유능하면서도 선량한 사람은 드물었다. 남의 객상 머슴살이로 시작해서 원산과 덕원 일대에서 손꼽히는 객상을 일으킨 여연과 선형우 부부는 그런 아주 드문 사람이었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부러운 가족이었다. 지켜주고 싶었다."(1권 491면)

[3] "우린 포수야. 포수는 포수의 목숨을 사냥감의 숫자와 견주지 않아."(2권 112면)
- 중대장으로 참여한 아들 홍양순의 청년중대가 장진 능골 전투와 다랏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의기양양한 아들에게 범도가 한 말.

[4]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오월 십팔일 열두시였다."(2권 132면)
- 홍범도가 전투일지에 기록한 아들의 전사 내용.

[5] "전쟁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쟁을 벌여야 할 상대인 일본이란 나라는 있었지만, 정작 그 일본과 전쟁을 할 주체인 우리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조선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의 주체로 나서기는커녕 일본을 상대로 싸우는 우리를 ‘비적’으로 규정했다."(2권 156면)

[6] 백무아: "이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 그렇게 할말이 없습네까? (...) 내 명치 아래에서 그녀의 심장이 파닥파닥 뛰었다. 그 뛰는 심장으로 그녀가 내게 가만히 속삭였다. ‘살아 있으라.’"(2권 162면)

[7] "전투는 깃발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허세가 통하는 전장도 아니었다. 오직 준비된 실력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기세만이 승리를 안겨주었다."(2권 190면)

[8] "제가 적의 수괴 한 두를 잡는다고 해서, 장군님게서 일본군 수백, 수천 두를 잡는다고 해서 물러날 일본이 아니겠지요. 그걸 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싸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니까 싸우는 것이지요."(2권 273면)
- 안중근이 홍범도에게 한 말.

[9] "한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인의예지신이오. (...) 하여, 인의예지가 무너진 지금의 조선은 장군의 말대로 이미 넘어졌소이다. 허나, 아직 조선에는 마지막 하나, 신이 남아 있소. 신은 백성들이 서로를 지켜 더불어 다시 일어서려는 믿음의 힘인바, 이 가물거리는 믿음의 마지막 불씨를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든 지켜나가야 하오. 여기에 남은 항일의 마지막 불씨마저 꺼트리면 아니 되오."(2권 285면)
- 유림의 거두이자 의병장을 지낸 유인석이 홍범도에게 한 말.

[10] "차라리 총칼이 유일한 법전이고, 강한 자는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왜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는가."(2권 315면)
-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가서 일본의 침략행위를 외면하는 강대국을 질타하던 23세 청년 리위종의 말.

[11]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런 노동자가 일하는 광산과 공장과 부두와 농장이었다."(2권 343면)

[12] "스스로 싸우지 않는 자에게 차례질 권리는 없단 말입니다."(2권 398면)
- 백무아가 범도에게 했던 말.

[13] "백무아가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을 순백의 눈으로 뒤덮어버릴 겨울을 기다리는 가을이라면 김알렉산드라는 찬란한 봄을 확신하고 기다리는 겨울이었다."(420)
- 백무아는 갑신정변 당시 민란 진압에 파견된 범도의 동료 백무현의 동생으로, 훗날 미국 해군성 정보국 요원이 된다.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 혁명 이후 들어선 소비에트 정권의 극동 소비에트 인민정부 외무장관이었다.

[14] "우리는 봉오동을 바쳐 봉오동에서 이겼다."(2권 560)
- 마을을 일구어낸 조선인들은 터전을 내놓고 광복군을 도았으나, 패배한 일본군은 봉오동 주민들을 학살했다.

[15] "일본군의 약탈과 방화, 강간과 살상은 잔혹하고 집요했으며, 무엇보다도 계획적이었다. (...) 공포를 전염병처럼 확산시켜 항거의 의지를 완전히 꺾는 것이 ‘불령선인 초토화 계획’의 목표였다."(2권 586면)

[16] "엿새를 꼬박 굶으며 빈총을 들고 일본군에게 쥐새끼처럼 쫓겨다녀야 했던 기억을 내 뱃가죽은 이십 년이 넘도록 잊은 적이 없었다."(2권 603면)

[17] "얼음덩어리가 되지 않으려면 걷고 또 걸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오직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북만주의 밤이었다. 다시 아침해가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잠들지 말아야 했다."(2권 636면)

[18] "그의 마지막 직업은 극장 수위였다."
"홍범도. 1939년 3월 25일부터 월 1백 루블의 봉급을 받고 고려극장의 수위로 근무한다."(2권 637면)
-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한국으로 올 때, 카자흐스탄 정부가 함께 보낸 홍범도의 취업명령서.

[19] "의로움과 생명,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을 때는 의로움을 택하라."(2권 643면)
-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의 유고 문장.

[20] "나는 조선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기에 아무 여한이 없다. 정의를 지키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한 우리의 행동은 죄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재판의 결과에 복종할 수 없다."(645)
- 거금 15만원을 들고 무기를 구하러 떠났던 철혈광복단원 한상호(21세)가 밀정 엄인섭의 밀고로 체포되어 받은 재판에서 행한 최후 진술. 함께 했던 윤준희(29세), 임국정(26세)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한 애국지사들.

[21] "대원수 폐하의 고굉(팔과 다리)으로, 황군(일본군)의 일원으로 한 번 죽음으로써 그 책무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를 완수하는 길이다."(2권 663면)
- 지청천 장군과 일본 육사 동기였던 이응준이 1943년 8월 3일자 매일 신보에 한 말. 이응준은 일본군 대좌로 승진한 후 일본이 패망하자 서울로 빠져나와 미군정청 국방사령관 고문으로 변신한 인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친일파 군인들을 주축을로 대한민국 국군 창건 작업을 주도하고 초대 육군 참모총장이 된 인물.

[22] "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신사다."(2권 667면)- 지청천 장군의 일본 육사 동기였던 신태영이 1942년 용산정차장 사령관이 되어 당시 경성일보에 한 말.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일본군 중좌로 일본에 충성한 인물. 이응준과 신태영은 야스쿠니 신사가 아니라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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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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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원제: A Field Guide to Getting Lost, 2005)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지음 |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




그는 자신의 심연을 예민하게 들여다보고 언어의 바구니에 상실과 이질성이란 우물물을 어김없이 길어내는 작가다. 리베카 솔닛의 글을 많이 접하진 않았지만, 그의 언어를 따라가다보면 가끔 작가가 내뿜는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떤 경우엔 그가 현대 문명에도 살아 남은 샤먼의 숨겨진 사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앞을 지나치는 모든 존재의 생겨남은 한 치의 어김 없이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작가는 이들 존재의 소멸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길을 잃지 않는 현대인은 어쩌면 미래에 자신의 운명을 단단히 묶어 놓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목적, 방향감각을 분명히 지니고(있다고 믿고) 나아가는 이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또는 착각)을 의심하지 않는 미래중독자들인 셈이다. 문명인들의 모든 병은 어쩌면 이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말하는 길을 잃는 사람은 자신이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이들로 보인다. 이 새롭고 이질적인 감각으로 소멸을 향해 가는 우리의 존재양식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듯하다. 길을 잃은 이들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인정하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장 자신의 한 쪽 발을 어디에 내딛을 지에만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솔닛의 글을 따라가다 책의 끝무렵 눈에 들어온 문장들이 있었다. 한 맹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맹인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자신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으로 물건을 팔러 다닌다. 처음 가보는 길을 건널 때, 그는 타인의 도움을 당당하게 요청한다. 길을 잃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들 중에는 바로 이런 기술 필요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내가 주목한 점은 나와 상대 사이에 도움을 주고 받는 행위를 의무로서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필요한 하나의 원리로서 이해하는 일이었다. 맹인은 자신의 결핍()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길 잃기의 기술을 발휘하여 자존과 자유를 얻었으며, 나아가 세상과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도움을 구하는 행위는 아주 너그러운 행위인데 왜냐하면 남들이 우리를 돕게 하고 우리가 남들의 도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이런 깨닫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럴 , 적대적인 세상은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도움이 받아들여지고 주어지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 설득력 있고 확고한 세상이 다급하고 절박한 것이 됩니다. 너그러운 세상, 도움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을 굳이 단호하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27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문명은 구성원 서로를 고립시킴으로써 길을 잃게 한다. 내가 이해하기에 솔닛의 말은 우리 윗 세대에게 이미 있던 하나의 원리, 이들이 자라면서 습득하던 도움 주고 받기의 문화를 곧바로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한 가지 도움을 받으면 때로는 이에 대한 보답을 하나의 의무로서 여기기도 한다. 나아가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하나의 삶의 원리로 되찾을 수 있다면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현재 적대적인 세상이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할 것이라 말하는 솔닛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번 독서에서 작가가 말하는 길 잃기의 기술 가운데 크게 공감하게 된 부분이다. 솔닛의 통찰은 언제나 놀랍고 근사하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도움을 구하는 행위는 아주 너그러운 행위인데 왜냐하면 남들이 우리를 돕게 하고 우리가 남들의 도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이런 걸 깨닫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럴 때, 이 적대적인 세상은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도움이 받아들여지고 주어지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 설득력 있고 확고한 세상이 덜 다급하고 덜 절박한 것이 됩니다. 너그러운 세상, 도움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을 굳이 단호하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2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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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7-10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베카솔닛을 문장도, 긴 머리칼과 음성도 근사하지만
작가에게서 현대 문명의 샤먼을 찾아내시는 초란공님 글이 근사합니다!
김명남 번역가님이 리베카솔닛 전문이신가봐요^^ 이런 문장들은 옮기기도 이해하기도, 공이 많이 들어갈 것 같아요^^

초란공 2023-07-11 10:42   좋아요 0 | URL
우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명남 번역가는 번역도 멋진데 글도 잘쓰시더라구요. 묻지마 구입하는 번역가 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 '리어 왕' 역의 이순재 배우가 인사하러 무대로 나오는 모습




우리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연극 <리어 왕> 관람하고

 



지난 주말에 연극 <리어 왕>을 관람했다. 연극은 내가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분야인데, 오래간만에 연극을 보러 나들이를 했다. <리어 왕>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4대 비극으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이번에 본 연극은 대본을 압축하지 않고 원작에 충실하게 기획되었다. 공연시간만 무려 200분이 넘었다.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는 리어 왕의 대사가 결코 만만치 않다.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 놀라운 집중력으로 맡은 배역을 열연하는 이순재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처음 이 연극을 홍보하는 광고를 보았을 때 이순재 배우의 연기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내겐 좀 더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아마도 처음 연극이라는 것을 보았을 즈음일 텐데, 당시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막 복학했던 시기였다. 대학 동기 한 명이 연극표 2장을 구하여 나에게 함께 보러 가지 않겠냐고 했다. 그 때 관람했던 연극이 <세일즈맨의 죽음>이었다. 그 때는 이 희곡의 제목이 익숙하긴 했어도 원작자가 아서 밀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 이 연극이 나의 흥미를 끈 이유는 무엇보다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빠로 나왔던 이순재 배우가 세일즈맨역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순재 배우가 열연한 <세일즈맨의 죽음>을 관람하고 연극이 끝날 때 즈음에 봇물이 터진 듯 흐르는 눈물을 줄곧 닦았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 자체가 관객의 눈물을 자극하는 요소는 있었지만, 그보다는 전역을 한 달 가까이 남겨놓고 돌아가셨던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화가 많지 않은 부자였다. 게다가 군대에 있는 아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부자간의 대화를 더욱 귀한 기회로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세일즈맨의 죽음>을 관람하고 내가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연극 한 편은 내 안에 아버지라는 미답의 영역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이 계기를 열어준 것이 이순재 배우의 연기였던 셈이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는 동안, 늙고 쇠약해진 리어왕을 연기한 배우는 정말 리어왕 자신이 되어 있는 듯싶었다.




















연극을 관람하러 가기 전에 먼저 민음사에서 출간한 리어 왕(최종철 번역)을 읽었다. 다음에 아침이슬 출판사에서 출간한 버전(김정환 번역)을 추가로 조금 읽었다. 연극을 관람할 때 작품의 내용은 이미 익숙했다. 하지만 연극 공연은 시작이 다소 불안했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횡설수설 지껄이던 광대가 움직일 때마다 마이크가 지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 끊임없이 이어지는 긴 대사 때문인지, 일부 배우는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여기에 리어 왕을 연기한 이순재 배우의 조금 낮은 목소리 때문인지 발음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극 공연이 끝난 지금까지 잔잔한 감동이 남는 것은 배우들의 투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랩에 버금갈 정도로 죽 이어지는 대사들에 더하여 문학적인 표현들로 가득차서 배우들에겐 한층 난이도가 높은 연극이기도 하다. ‘리어 왕을 제외하고 연기가 인상 깊었던 역은 왕을 따라다니는 광대와 온갖 고난을 겪고도 지위를 회복하는 글로스터의 맏아들 에드가였다. 광대는 왕에게 격식을 차리지 않고 말해도 되는 유일한 신분이었던 모양이었다. 끊임없이 왕 앞에서 횡설수설하는 광대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하는 말은 일말의 진실을 관객에게 전하고 연극이 향하는 방향을 일러주는 듯했다. 존재감은 미미할지 모르지만, <리어 왕>에서 광대의 역할은 꽤나 중요해 보인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광대의 역할은 신곡에서 단테에게 지옥을 안내하며 동행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배역을 하나 더 꼽으라면, 에드가를 떠올리겠다. 그는 글로스터 백작의 배다른 동생 에드먼드의 배신과 모함으로 왕의 큰 딸(고너릴)과 둘째 딸(리간) 세력의 추적을 받으며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미치광이 거지 불쌍한 톰을 연기한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쫓기던 에드가가 두 가지 다른 역할을 신들린 듯 능숙하게 연기하는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글로스터 백작 역시 둘째 아들 에드먼드의 모함으로 리어 왕의 둘째 딸 리건과 남편 콘월 백작으로부터 두 눈을 뽑히는 끔직한 고난을 겪는다. 어쩌면 <리어 왕>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리어 왕역의 배우뿐만 아니라 글로스터 백작을 맡은 배우의 노련한 연기도 인상 깊었다.


 

실제 공연되는 연극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면, 아마도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극작가나 배우 나름의 해석이나 장치를 곁들일 수 있는 이 존재한다는 점일 것이다. <리어 왕>이 비극이라고 하더라도 공연 도중에 유머와 위트가 보이는 요소가 여러 번 눈에 띄었다. 리어 왕에게 직언을 하다가 추방당하는 켄트 백작은 자뭇 심각한 역으로 일관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번 연극에서 켄트 백작이 보여주는 유머러스한 연기는 공연시간이 200분이나 되는 연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도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속하는 <리어 왕>에는 여러 인간들이 평생 살면서 겪을 수 있을 법한 비극적인 사건들이 응축되어 있다. 인간이 나이가 들어 신체와 정신이 쇠약해지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담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죽음의 모습을 품고 있기도 하다. 자녀의 죽음을 먼저 보아야 하는 부모의 고통, 질투와 탐욕으로 모두가 파멸하는 자매의 모습,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부모와 형제를 배신했지만 그 자신도 죽음으로부터 비껴가지 못했던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 한 작품에 담겨 있었다. 또 리어 왕 자신의 운명은 어떤가.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평생 아꼈다고 믿었던 자녀들로부터도 냉대와 멸시를 당한 채 갈 곳을 잃은 인간의 당혹감과 비애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이 특별한 건 이순재 배우의 리어 왕연기를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이순재 배우는 세계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 신청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1956년에 처음 연극 무대에 데뷔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68년 간 무대에 서온 셈이다. 마지막으로 연기하는 배역 리어 왕을 준비하고 무대에 서는 배우의 감회가 어떨지 궁금하다. 이번 공연은 무엇보다 배우 자신이 겪어온 삶의 모든 경험들이 리어 왕에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배우로서 그의 연기는, 버럭 소리를 지르던 대발이 아빠뿐만 아니라 말없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세일즈맨의 모습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제 노배우는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며 이따금씩 암흑을 몰아내던 광야를 정처 없이 헤매던, 쇠락한 리어 왕의 모습으로도 내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이나 희곡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 어떤 이유로 늦은 나이에책을 손에 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게는 삶의 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주 마련되었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고 불안정한 고용에 일하는 날만큼이나 쉬는 날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이 없을 때는 남들이 출근하던 시각에 모자를 눌러쓰고 알라딘 중고책방으로 출근할 때도 있었다. 엊그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나는 아마도 중고책방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때 나 자신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문학에 대한 옅은 관심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을 테다. 알라딘 사이트의 구매함을 검색해보니 내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세 가지 버전으로 소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이 책은 언제 샀지?’ 라고 반문할 때가 있다. 알라딘 서재에 글을 꾸준히 올리는 분들은 아마 익숙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연극을 관람하기 전에 먼저 읽은 버전은 민음사 버전이다. 평생 셰익스피어와 희곡 연구에 매진해 온 최종철 교수의 번역 및 주해 판본이다. 오랜 시간 운문 형식의 문장으로 다듬어 온 역자이기도 하다. 이따금 만나는 문장은 너무 간결하여 어색한 느낌을 줄 때도 있었다. 반면 다시 문장을 음미해볼 때 텍스트로 드러나지 않은 을 채울만한 뉘앙스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최근에는 최종철 교수가 번역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리커버 특별판도 나왔다. 성우들이 참여한 오디오 버전도 나와 있는 모양이다. 다만 독자들의 반응은 호불호가 뚜렷하게 나뉘는 것 같다. 언제나 새로운 시도에서 예상할 수 있는 반응들이다.


 

내가 구매한 민음사 버전은 2012년에 나온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세트다. 각 권의 표지는 유명 화가들이 작품을 읽고 그린 그림들이 있다. 리어 왕의 경우, 화가 포드 매덕스 브라운(Ford Madox Brown)이 그린 <리어와 코딜리아>(1848-49)가 표지로 사용되었다. 이 그림의 장면은 아마도 밤새 폭풍우 몰아치던 광야를 헤매고 정신과 기력이 쇠해버린 리어 왕을 모신 후, 침대에 누워 잠든 아버지를 바라보는 셋째 딸 코딜리아의 모습으로 보인다. 바다 건너 프랑스 왕과 결혼한 코딜리아가 직접 프랑스군을 이끌고 브리튼 섬에 상륙하여 큰 언니 고너릴와 둘째 언니 리간의 진영과 결전을 치르기 직전의 모습일 것이다. 아버지의 재산과 영토, 권력을 받기 위해 화려하지만 속이 텅 빈 언어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꾸며내던 두 언니와 달리 막내 딸 코딜리아는 할 말 없음으로 아버지의 오해와 미움을 사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코딜리아의 사랑은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진실을 품고 있는 듯하다. 해당 표지 그림은 이런 배경을 담아낸 듯한데, 막내 딸 코딜리아의 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평생 셰익스피어를 연구한 국내 정상급 학자가 원작을 비판적으로 읽어 내고 자세히 정리한 작품 해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민음사 버전의 큰 장점이다.


 
















또 흥미로운 건, 펭귄 클래식 판 리어 왕의 표지 그림 역시 같은 화가인 포드 매덕스 브라운이 그렸다는 점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코딜리어의 운명>이다. 같은 화가가 리어 왕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다지만 그림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다르다. 아마도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 보다는 인쇄된 그림의 색감에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림이 묘사하는 자체 정황도 사뭇 다르다. 민음사 버전의 표지 그림은 근경과 원경이 층을 이루며 함께 나타난 중세의 그림 스타일을 닮았다. 반면 펭귄 버전 리어 왕 표지 그림은 동화책 일러스트의 느낌이 강하다. 장면에 대한 몰입감이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물을 그린 스타일이 어떤 면에선 단테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를 그리기도 했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의 그림과도 닮았다. 정면을 향한 인물이 약간 아래로 내린 시선과 타오르는 듯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베아트리체의 모습 때문이다. 펭귄 판 표지 그림의 <코딜리어의 운명>에서도 코딜리어로 보이는 여인은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채 몽롱한 시선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린 모습이다.


 

한편 코딜리어의 왼손을 두 손으로 붙들고 있는 남자는 그녀와 결혼한 프랑스 왕으로 보인다. 옅은 코발트색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코딜리어의 왼쪽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을 오른손에 쥔 리어 왕의 모습이 보인다. 상심에 따른 분노를 억누르는 듯 의자의 팔걸이를 꼭 붙들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영락없이 노쇠한 남자의 모습이다. 이들의 바로 뒤에 보이는 인물은 코딜리어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 왕과 경쟁하던 버건디 공작일 것 같다. 이 인물은 붉은 색 점박이 옷을 입고 손을 입에 갖다 대었는데, 리어왕으로부터 아무런 재산도 물려받지 못하게 된 코딜리어 공주와 결혼을 망설이는 버건디 공작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푸른 옷을 입은 왕은 코딜리어의 손을 잡고 위를 올려다본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나온 플라톤처럼 말이다. 반면 손으로 땅을 가리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세처럼, 땅 위의 유한한 존재와 재물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던 버건디 공작은 눈을 살며시 내리고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펭귄 판의 표지 그림에 나온 장면은 프랑스 왕이 아버지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지니고 있던 코딜리어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하는 장면 같아 보인다. 이 희곡에서 프랑스왕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지만 사랑의 형이상학을 믿고 선택하는 인물이다. 이 부분은 내게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래 인간에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펭귄 클래식 버전의 리어 왕이 지닌 특징이라면, 외국의 셰익스피어 전문가가 제공하는 서문 및 주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라는 대작가를 배출해 낸 장소의 후손이 어머니의 언어로 읽어낸 작품은 어떤 것일까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국내의 학자가 해석한 작품의 의미를 또 다른 시각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왜 세 권의 리어 왕버전을 샀는지 궁금해 하다가도 각각의 버전을 다시 들여다볼 때 비로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김정환 번역가가 내놓은 아침이슬 출판사의 리어 왕버전도 있다. 이 책은 우선 크기가 작지만 책은 무척 예쁘다.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튼튼하고 부담이 가지 않는다. 표지의 간결한 그림도 마음에 든다. 아쉬운 점은 책의 크기가 작은 만큼 폰트가 작다는 점이고 역자의 해설이 짧다는 것. 그럼에도 운문 형식을 위해 엄격하게 문장을 다듬고 줄인 민음사 버전보다 문장이 친근하게 다가오고 이해가 쉬운 편이라는 장점이 있다. 글자 크기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처음 셰익스피어를 접하는 이들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판본으로 추천할 만 하다. 특히 김정환 번역가는 프로필만 보더라도 정말 다재다능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책을 번역만 한 것뿐만 아니라, 시와 산문, 평론을 쓰기도 했으며, 음악에 대한 방대한 애정과 지식을 가진 분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붉은 색 양장본이 마음에 들어서 번역가가 전부 번역해놓은 셰익스피어 작품 시리즈를 기회 될 때마다 모으고 있다. 언제 다 모을지 모르겠지만, 가끔 원작에 충실하게 기획된 셰익스피어 연극을 공연하게 되면 다시 꺼내 읽어 보려한다.

 


누군가의 번역 작업을 통해 작품과 만나는 독자에게는 어느 한 번역가의 작업이 언제나 독보적으로 월등한 경우는 아직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같은 작품을 여러 번역가가 번역해 놓은 고전 작품의 경우, 어느 문장, 어떤 장면에서는 한 번역가가 탁월하게 표현해내더라도, 다른 번역가가 또 다른 부분에서 더 멋지게 표현해내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어떤 특정 번역가가 한 작업이라서 믿고 사보는번역서라도 독자의 마음에 드는 문장과 그렇지 않는 문장은 언제나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번역가나 독자에 따라서도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만큼 번역본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명확한 기준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어떤 번역가의 특정 표현에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해석과 표현을 만날 수 있다는 마음가짐도 필요할 것 같다. 그러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라고 공감하면서도 나라면 어떤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도전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3시간이 넘는 연극 공연이 드디어 끝나고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환호를 받으며 걸어 나오는 리어 왕이순재 배우가 박수를 받으며 들어 갈 때 관객에게 보이던 그의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7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무대 위에서 관객과 교감해온 배우는 그의 존재가 바로 당신이 역을 맡았던 모든 이들을 닮았을 것 같다. 아이들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머물지 못하고 끝없이 방랑하던 가장이자 세일즈맨이었던 모습이다가도, 밤새 폭풍우 몰아치던 광야를 헤매던 초라한 왕의 그것이기도 했다. 동시에 배우의 이마와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어느 새 돌아가신 아버지의 주름을 떠올려주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부대를 나와야 했던 아들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했을까. 아들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던 아버지의 이마를 어루만져 보았다. 2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그 온기와 촉감을 떠올리곤 한다. 누구나 삶에서 가벼워지거나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란 있기 마련인가보다.


 

문학이란, 또 연극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상상하게 해주는 사고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 아닌가. 평생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배우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일생일대의 배역이라고 언급하기도 한 큰 무대를 마무리하는 배우의 심정을 상상해보려 하지만, 적어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순재 배우의 마지막 리어 왕연기를 보고 밖으로 나왔다. 무대에 서기까지 부단한 노력과 치열함을 붙들고 관객들과 만나온 모든 연극인들에게도 작은 인사와 커다란 마음의 응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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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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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새로 나온 <일리아스>와 함께 보내게 되었네요. <오딧세이아>도 새로 만나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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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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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이 추적하는 타자화의 과정

- 타인의 기원를 읽고

 


토니 모리슨을 소개하는 데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경력은 언론 최고의 상인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이다. 여기에 한 가지 정보를 덧붙인다면, 그가 평생 성차별인종차별의 문제와 마주하고 탐구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경력에서 놀랐던 부분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1993년에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수상했다는 사실이었다. ‘인종에 따라 다르게 흘러갔던 시간을 감지할 수 있었던 기록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소설가와 학자로 존재감을 분명히 남겼던 인물이다. 오늘 읽은 에세이 타인의 기원은 작가가 평생 추구해온 작업과 관심을 간결하게 정리한 글이었다.


 

저자는 무엇보다 와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일이 왜 필요했던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우선 저자는 한 집단이 강한 결속을 바탕으로 타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 구도를 유지한 채 이 집단을 지배 내지는 통제하는 데서 오는 이득이 매우 크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짐작하겠지만, 타자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인종 차별이다. 작가 토니 모리슨이 평생 관심을 갖고 허물고자 했던 공고한 성이었다. ‘인종이라는 개념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지적한 바 있는, 현생 인류의 허구 지어내기 본능에 딱 들어맞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는 토니 모리슨이 자신의 글에서 인용하는 역사가 넬 페인터의 말 인종은 관념이지 실재가 아니다.”(15)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렇게 허구적인 인종 개념에 근거한 타자화 과정은 타자화된 집단에 대한 지배권(통제권)을 장악하고자 한 집단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상황 역시 역사가 브루스 바움의 한 마디, “인종은 권력의 결과물이다”(57)라는 말로 표현된다.


 

세계사에서 대표적인 인종차별 사례는 미국의 노예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인종차별은 비단 미국인들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모든 인종을 포함하는 인간 집단에서 타자화의 과정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집단은, 권력이 있든 없든,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왔다.”(29)

 


이 메커니즘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은가? 이 타자화 메커니즘은 인간의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전쟁과 애국심, 당파간의 대결, 계급 간의 투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니 모리슨은 흑인-여성으로서 주로 백인에 의한 인종 및 남녀 차별의 문제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고민해왔다. 이는 그가 이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와 같은 작업을 평생 멈추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다만 타인의 기원에서는 주로 인종차별의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서구 백인 사회에서 이 인종이라는 개념이 권력과 통제의 필요에 의해 발명되어진 관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 관념에 공고히 뿌리내린 인종적 우월감이 이들 집단의 결속 도구, 접착제가 되어 주었음을 거듭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타자화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저자에 따르면, “타자화는 강의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배우게 된다.”(30) 이 대목을 읽고 곧바로 떠오른 기억이 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한 아이(아이는 자신이 국내 모 재벌 기업의 손녀라고 말하곤 했다)가 수업 중에 나를 보고 아파트 경비원 같아요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이는 나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어보였다. 그저 해맑게 내가 입은 검은색 바지와 남색 폴로 티셔츠를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모리슨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아이의 부모가 나와 같은 차림을 한(또는 지위에 있는) 사람을 타자화하는 모습을 바로 아이가 습득하고 내면화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토니 모리슨이 인종차별과 관련하여 언급한 타자화 과정 역시 남이 하는 것을 따라 배운다는 점에서 내가 겪은 경험과 다를 바 없을 것이었다.


 

다만 이 경험에서 내가 안타깝고 두려웠던 것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아직 들여다보고 성찰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성장 후에도 지닐 수 있는 무지의 선량함이었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습관적으로 말하거나, 상대방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성인이 되지 않길 바랄뿐이었다. 무지의 선량함이야말로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개념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따져보게 된다. 물론 나 역시 무지의 선량함을 가진 자의 범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의도적이지 않고,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선한말과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지는 않은지, 나아가 사회에 존재하는 부조리와 악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무심코 참여하는 것은 아닌지 거듭 질문해볼 일이다.


 

이제 저자는 인종차별의 정체성 정치에 관한 논의를 좀 더 정교하게 문학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간다. 그는 노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백인 집단이 동원한 방법 두 가지를 언급한다. 하나는 이미 익숙하게 보아온 폭력이라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파악하기 힘든 방법으로, 제도 자체를 낭만화하는 일이다. 제도 유지를 위해 폭력에 호소하는 방식은 이미 많은 문학에서 제시되고 있다. 당장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가 떠오른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신체적·심리적 폭력은 타자화된 대상을 통제하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이다. 작가의 분노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보다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들(백인 노예 주인들)이 채찍질을 하다가 지쳐 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가하는 처벌은 교정을 위한 행위라기보다 엄연히 사디즘 행위다.”(62)라고 말이다.


 

한편 토니 모리슨은 어렸을 때 집을 방문한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증조할머니는 방에 들어와서 바닥에서 놀고 있던 모리슨 자매를 보고 한 마디 내뱉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지팡이로 자신을 가리키며 섞였구만, 이 애들.”(24)이라고 했던 것이다. 흑인에게 섞였다는 말은 단순히 혼혈임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는 말이 아니었다. 이 말은 조상 중에 누군가가 백인 노예 주인에게 강간당했다는 표현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섞였다라는 표현은 흑인 가족에 대물림되어 상처를 주는 폭력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역시 인종이라는 허구적 개념이 흑인들에게 (후손의 자기혐오와 같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나아가 저자는 영국 귀족 토마스 티슬우드의 일기를 통해, 노예에 대한 강간을 엄연한 주인의 권리로 여기고 있었던 정황을 고발하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노예 제도 유지에 동원되는 보다 정교한 방법은, 이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을 무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선호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토니 모리슨은 문학에서 그 예를 찾는다. 하나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노예 제도의 낭만화 장치를 언급한다. 백인으로서 스토 여사의 작품은 결국 백인 독자를 위해 쓴 소설이라고 지적한다. 백인과 흑인 아이의 순수함과 같은 장치를 통해 노예 제도의 성과 낭만을 무균 상태로 만들었으며, 여기에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41)고도 말한다. 토니 모리슨의 비판적인 시각은 우리가 단순히 노예제도에 대한 묘사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정밀하게 대상을 들여다보도록 주문한다.

 


저자의 민감한 눈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밍웨이도 비켜가지 않았다. 그는 헤밍웨이의 소설에서도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낭만화하는 방식을 찾아내었다. 이를 테면 가진 자와 못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에서 럼 밀수업자 백인과 배에 탑승한 흑인이 쿠바 관리들과 충돌하여 총을 맞은 상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다. 두 사람이 모두 다친 상황에서 흑인은 더 심하게 다친 백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나약한 흑인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에덴 동산 The Garden of Eden에서는 헤밍웨이가 검은 육체는 매우 아름답다는 주제로 판에 박힌 인종적 관념을 에로틱하고 매혹적인 느낌으로 교묘히 바꿔버렸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남성의 시각에 이미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있는 독자(나를 포함하여)가 놓칠 수밖에 없는 지점을, 토니 모리슨은 정밀하고 능숙하게 짚어 독자를 일깨워준다.

 


평생 여러 방식의 차별문제에 주목하여 탐구했던 작가의 에세이 타인의 기원은 얇은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는 20세기 흑인들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상황인데도, 여전히 실제적인 위험을 마주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우며 흑인성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은 지금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고 믿는다. 이미 익숙한 성차별뿐만 아니라, 여전히 생산되고 있는 난민들에 관한 문제,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둘러싼 갈등 문제, ‘성소수자와 퀴어 축제와 관련한 문제 등에서 이 타자화의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는, 아마도 타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타인에 대해 상상해보는 일은, 나 역시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타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울러 어느새 타인이 될 수 있는존재의 연약함까지도 끌어안는 일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이 타자화과정에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허구적 관념에 기반한 권력과 통제의 욕망이 숨어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대작가가 타계한 지 4주기가 되어간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책에 소개된 그의 말 한마디를 인용하기로 한다. 어쩌면 이 두 문장에 책의 주제가 다 담겨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종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극화하기 위해 시종일관 애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종이라는 구성물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철저히 무의미한 개념인지 알리고 싶었다.”(112)





[책속으로]


[1] "인종은 관념이지 실재가 아니다."(15)
- 역사가 넬 페인터의 말

[2]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집단은, 권력이 있든 없든,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왔다."(29)

[3] "타자화는 강의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배우게 된다."(30)

[4] "(해리엇 비처) 스토는 노예제도의 성과 낭만을 무균 상태로 만들었으며, 게다가 그것에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41)

[5] "미국으로 온 이민자들은 ‘진짜’ 미국인이 되려면 태어난 나라와의 연을 끊거나 그 연을 아주 경시함으로써(자기 부정) 백인성을 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성’이 무엇인가 하는 정의는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곧 ‘피부색’과 동일한 의미가 되었다."(44-45)

[6] "인종은 권력의 결과물이다."(62)
- 역사가 브루스 바움의 말

[7] "노예를 굳이 전혀 다른 종으로 취급해야 하는 필요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자기 자아가 지극히 정상임을 확인하려는 그들(백인들)의 절박한 시도가 아닐까 싶다."(62)

[8] "헤밍웨이는 이런 판에 박힌 인종적 관념을 에로틱하고 매혹적인 느낌으로 교묘히 바꿔버리기도 한다."(84)

[9] "이탈리아나 러시아 인이 미국으로 이민 오면 ‘고향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 즉 백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 (이것은) 어쨌거나 항구적인 정체성을 갖게 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여러 장점과 특정한 자유도 따라온다. 반면 아프리카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한 번도 그런 선택권을 가져보지 못했다."(89)

[10] "오직 이타적으로 남을 돌보는 일만이 진정한 성숙에 이르게 한다."(92)

[11] "나는 기필코 값싼 인종주의를 무력하게 만들 것이며, 피부색에 대한 쉽고 간단하며 일상적인 집착을, 노예제도 그 자체를 상기시키는 이 집착을 절멸시킬 것이다. 그 신빙성조차 떨어뜨릴 것이다."(95)

[12] "나는 인종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극화하기 위해 시종일관 애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종이라는 구성물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철저히 무의미한 개념인지 알리고 싶었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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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20 0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와 다름을 통해 이루어지는
타자화를 극복하고, 상대방을
포용하기가 쉽지 않음을 다시
한 법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