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박태원 지음, 이상 그림 / 소전서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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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목격하고 삶을 누렸던 두 문학 청년의 환상 콜라보!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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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가 - 19세기 후반 일본 사진(들)의 시작
김계원 지음 / 현실문화A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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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가

: 19세기 후반, 일본 사진()의 시작

김계원 지음 | [현실문화A] | (2023)




이 책의 의의를 간단히 표현해보자면, 일본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사진의 쓸모 알아보고 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 탐구한 작업이라 하겠다. 사진이 기록과 보존의 역할을 담당하며 계급의 위계를 구분하고, 타민족을 타자화하는 과정에 활용된 역사가 담겨있다. 아울러 우리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기에, 책에서 주목한 문제의식에 흥미를 가질 독자들이 많을 .


 

또 하나 주목해보는 부분은, 일본의 근대화 초기에 이루어진 홋카이도 개척 사업 미연방 농업국의 위원을 지낸 미국인 기술 전문가가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사진가 도로시아 랭이 농업안정국(FSA) 의뢰를 받아 미국 시골지역의 농부와 광부들과 이들의 삶에 대해 조사하려는 목적으로 사진을 이용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사진 및 사진술의 역사를 하나의 축으로 미국의 식민-제국주의의 물결이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와 닿은 과정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런 맥락에서 과거를 다루는 역사는 여전한 현재진행형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사진사(박주석 지음, 문학동네, 2021) 역시 사진 국가에서 탐구한 일본 사진술의 전개과정과 연관지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진사의 선구자들은 상당수가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에 사진술은 서양문물에 대한 접근성이 좋았던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빛에 대한 물리적 이해, 카메라 구조와 작동에 대한 기계적 이해, 현상과 인화의 화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진 및 사진의 역사, 식민주의, 이미지 매체의 역할 등에 대한 관심이 있는 독자에겐 흥미로울 책이다.



1857년에 제직된 이 목판화에는 일본 사진의 선구자들이 대형카메라를 설치하고 인물 사진을 찍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현재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1857년 촬영) 다게레오타입의 사진





1878년 일본 육군성이 올린 경기구 사진(시아노타입)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처럼 홋카이도 개척은 미 서부 정착 사업을 모델로 삼았다. (...)

  역사학자 데이비드 하월(David L. Howell)은 홋카이도의 공격적인 이주 정책이 아이누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주권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깨끗이 삭제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한다.(277)



근대화의 이상과 낭만적 미래가 홋카이도에 투사되면서 북방 곧 기회의 땅을 의미했다.(278)



외국인 자문단의 역할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구미-일본-아이누의 발전 단계를 시각화하는 프로그램에 복무했다. (...)

  카메라는 일부러 수유하는 장면을 찍어 아이누 여성을 자연이나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반면, 두 명의 문명인 남성에게 아이누 여성을 보호, 통제할 주체의 위치를 부여한다.(279)



요컨대 홋카이도 기록 사진은 20세기 전후까지 엽서, 교과서, 신문, 자료집, 국내외 전시, 잡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복제, 유포되었고, 식민지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기능했다.(289)



사진은 사실적 재현과 정확한 정보, 신속한 소통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매체, 즉 근대화의 수사로 미래의 결합했다. 새로운 행정체(개척사)와 새로운 매체(사진술)의 결속이야말로 변방의 식민지를 미래의으로 전시, 홍보, 소비하는 추동력이었다.(291)




[1]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처럼 홋카이도 개척은 미 서부 정착 사업을 모델로 삼았다. (...)

역사학자 데이비드 하월(David L. Howell)은 홋카이도의 공격적인 이주 정책이 아이누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주권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깨끗이 삭제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한다."(277)

[2] "근대화의 이상과 낭만적 미래가 홋카이도에 투사되면서 ‘북방’은 곧 기회의 땅을 의미했다."(278)

[3]
"외국인 자문단의 역할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구미-일본-아이누의 ‘발전’ 단계를 시각화하는 프로그램에 복무했다. (...)

카메라는 일부러 수유하는 장면을 찍어 아이누 여성을 자연이나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반면, 두 명의 ‘문명인’ 남성에게 아이누 여성을 보호, 통제할 주체의 위치를 부여한다."(279)

[4]
"요컨대 홋카이도 기록 사진은 20세기 전후까지 엽서, 교과서, 신문, 자료집, 국내외 전시, 잡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복제, 유포되었고, 식민지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기능했다."(289)

[5]
"사진은 사실적 재현과 정확한 정보, 신속한 소통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매체, 즉 근대화의 수사로 ‘미래의 땅’과 결합했다. 새로운 행정체(개척사)와 새로운 매체(사진술)의 결속이야말로 변방의 식민지를 ‘미래의 땅’으로 전시, 홍보, 소비하는 추동력이었다."(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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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흐른다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영 옮김 / FIKA(피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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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해브 선장을 위한 변론

- 모든 삶은 흐른다


: 삶의 지표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다가 건네는 말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 이주영 옮김 | [FIKA] | (2023)

 



모든 삶은 흐른다를 읽다보니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비 딕을 언급한 글 한 편을 만났다. 바로 이전 글(‘깃발’)에서 저자는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에 대해 이야기했다. 돈키호테가 결투하려던 풍차를 병든 시스템, 타락한 사제, 관료를 의미’(214)한다고 말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풍차에 맞서는 돈키호테를 단순히 무모한 이상주의자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러면 모비 딕을 이야기하는 글(‘모비 딕’)에서도 에이해브 선장을 19세기 버전의 돈키호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19세기의 돈키호테,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에서 자신의 한쪽 다리를 물어 뜯어간 모비 딕에 대한 편집광적인 복수심에 불타 파멸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증오의 감정은 불길하면서도 거대한 흰 고래를 지구 끝까지 추적하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도식을 벗어나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고래에 대한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심을 단지 광기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어쩌면 모비 딕은 에이해브의 다리를 앗아가버려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버린, 사회의 부조리나 악습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나아가 좀 더 구체적인 맥락에서, 흰 색으로 상징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 있다면? 이를 거대한 서구 백인 중심의 공고한 세계 질서와 병들어버린 관습으로 볼 수는 없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지를 뻗으며 여러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 속 배경을 우리 사회와 병치시켜 보면,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는 부패한 기득권이 구축해놓은 질서에 표출해내는 정당한 분노는 아닐까 싶은 것이다. 비록 에이해브 개인으로서는 실패하지만 말이다.


 

인류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순수성에 대한 욕망이 집착이 될 때 파멸에 이르기도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허구적 개념인 인종순수성을 잣대로 내세워 이를 지키고자 했을 때, 인류가 겪어야 했던 비극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장애인 및 성소수자 학살, 백인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한 우생학의 유행과 그 결과 파괴된 개개인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또 이념적인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된 대량학살을 불러온 역사를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에이해브 선장을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 그를 자신의 생각만을 따르고 복종하는 작은 집단을 유지(‘member Yuji’)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지도자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상황은 모비 딕을 추적하여 복수하겠다는 그의 일관된 행동과 복수심이 초래한 결과에서 확인가능하다. 물론 모비 딕을 어떻게 보느냐는 독자에 달려 있다. 모비 딕을 인간 사회/시스템의 거대한 부조리라고 해보자. 고착된 부조리함 속에서 개인이 희생되었다면, 홀로 이 모순에 맞서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바위에 날달걀 던지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이해브가 표출하는 복수심이 분노에서 온다고 보았다.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할 때,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확신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감사의 표현 혹은 답례를 제대로 받지 못할 때 분노가 생긴다.”(219)라고 말이다. 저자는 에이해브 선장이 바로 이 분노를 상징한다고 본 듯하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저자는 이제 모비 딕에 눈길을 준다. 그는 모비 딕을 에이해브 선장이 당한 피해와 잔인한 운명’(220)이라고 해석했다. 에이해브는 이 운명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모비 딕에 부정적, 혹은 불길한 상징성을 부여했던 나의 해석과 다르지만, ‘가혹한 현실과 운명을 상징한다고 본 저자의 해석도 천천히 음미해볼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더 나아가자면, 모비 딕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모순, 혹은 악이라 여겨지는 부조리함과 맞서 싸울 때, 나 역시 일종의 괴물이 되어갈 수 있는 위험성도 생각해봄직하다. 어느 쪽이든 두 존재가 격렬히 대립하고 충돌할 때, 서로가 파멸적인 결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에이해브의 분노는 인간적인 한계라는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할 테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의 분노를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흰 고래는 놔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바다에는 숱하게 많은 악마와 고래가 지나간다. 분노가 악마와 고래를 물리치지는 못한다.”(223)


 

한 발 물러나 자신의 분노를 들여다볼 때, 우리가 무엇을 쫓고 있는지 자문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쫓는 대상에 대한 저자의 해석도 흥미롭다.

 


모비 딕은 손에 넣기 힘든 무엇인가를 쫓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렬하고 간절히 원한다. 그 모든 것은 흰 고래로 상징될 수 있다. 흰 고래는 복수의 대상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 알 수 없는 오래된 욕망이 될 수도 있다.”(224)

 


에이해브 선장은 분명 강렬한 욕망을 지닌 존재였다. 그만큼 그에게는 커다란 결핍이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무런 욕망이 없다면, 선장이 말한 대로 모든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땅은 거대한 제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225)


 

에이해브 선장은 지구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모비딕을 파괴하고자 했다. 지구 위의 바다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던 것이다. 달리 말해 모비 딕은 그 자체로 에이해브에게 살아가는 의미였던 셈이다. 다만 저자는 우리의 눈으로 에이해브가 품은 삶의 의미를 섣불리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주는 듯하다. 선장의 가슴 깊은 곳에 이 욕망이 없었더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와 증오를 정당한 열정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분노라는, 이 수수께끼의 정체를 밝히려는 열망으로 터질듯 한 감정의 원인을 쫓아 에이해브는 자신을 던져 넣었다. 광기어린 추적이 무모해보이긴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운명에 정면으로 맞섰다고 볼 수 있다. 분노와 증오의 원인을 쫓아 이 수수께끼를 밝히는 것은 결국 에이해브 자신의 몫이었다. 물론 한 배에 탄 선원들의 생명을 담보로, 집단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무모한 행위는 비판받을 여지가 많긴 하지만. 어쩌면 모비 딕을 떠받치는 이런 비극적인 구도는 허먼 멜빌이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부분이 아닌가 싶다. 비극은 문명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를 떠나 인간의 실존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세련된 장치로 볼 수도 있겠다. 많은 비극 작품에서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이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곤 한다.


 

결국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광막하고 망망한 인생의 바다에서 각자 자신의 성배를 추구해보라고 제안하는 듯하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수수께끼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뒤쫓는 흰 고래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모비 딕은 성배와 같다. 어마어마하고 귀한 성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름은 붙이기 힘들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욕망하는 것이다.”(225)


 

처음 모비 딕을 읽었을 때를 기억해본다. 내게 모비 딕은 불길함, 사악함의 총체였다. 그리고 흰 고래를 쫓는 에이해브 선장은 이기적이고 편집광적인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애초에 사악함이라는 특성 혹은 지위를 타고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 역시 처음부터 미치광이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본 이유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되어가는존재인 까닭이다. 모비 딕 역시 인간적 기준에 불과한 을 초월한 그 무엇인지 모른다. 물론 저자는 모비 딕을 우리 안의 욕망으로 읽었다. 내가 처음에 에이해브 선장을 의심과 비난의 눈으로 보았다면, 이제 다시 그와 만나 들여다보니 또 다른 내면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다.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를 읽으며 망망대해 같은 감상의 바다를 잠시 표류하다 돌아온 느낌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점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척이나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내 안의 결핍을 확인하고, 나의 욕망을 발견하는 일,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하거나 이 욕망이 불러일으킨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보편적인 인간의 관심사가 아닌가. 이렇게 보면 에이해브 선장은 우리 안의 길들여진 선함을 표상하는 항해사 스타벅과 대척점에 있다. 그러니 에이해브 선장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닌 한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매력적인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저자의 생각을 읽고 나니,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혹은 나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







[책 속으로]



[1] "바다는 자유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존재다. 우리는 어디에 갇히거나 무엇에 방해받지 않을 때 ‘자유롭다’고 한다. 이처럼 바다는 우리에게 삶에서 억지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준다. 늘 준비해서 대답을 할 필요가 없고, 아무 계산 없이 도와야 할 의무도 없고, 남의 말을 조용히 경청할 의무도 없다. 바다와 선원들은 따뜻하고 건강한 ‘이기주의’가 있어야 독립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200)

[2] "그리스어에서 ‘자유’는 ‘개성’을 뜻한다. 개성은 분류되는 것에 저항한다. (...)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남들과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니 남들의 기대에 맞춰 살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말고, 가택 연금에 묶여 있는 삶은 거부하자."(201)

[3] "영불해협 출신의 스페인 귀족 돈키호테는 풍차들과 결투하려고 한다. (...) 이상주의자인 돈키호테는 언제나 타협과 인정을 거부하고 비장할 정도의 고집을 보여준다. 결국 풍차들과의 결투에서 진만 빼다가 패한다. 여기에서 풍차는 병든 시스템, 타락한 사제, 관료를 의미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풍차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 인간은 혼자서 정의롭고 순수한 세상을 새롭게 만들 수 없다."(214)

[4] "복수심은 어디에서 올까? 분노다.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할 때,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확신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감사의 표현 혹은 답례를 제대로 받지 못할 때 분노가 생긴다."(219)

[5] "분노하는 사람들은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질서다. 원래의 질서로 되돌려놓겠다는 마음에서 분노는 시작된다. 에이해브 선장은 이 같은 분노를 상징한다. 그리고 모비 딕은 그가 당한 피해와 잔인한 운명이다. 선장은 이 운명에 맞서 싸우고 싶어 한다."(220)

[6] "분노에 휘감겼을 때는 결정을 하지 말고 분노부터 어떻게 든 달래는 것이 좋다. (...) 흰 고래는 놔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하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바다에는 숱하게 많은 악마와 고래가 지나간다. 분노가 악마와 고래를 물리치지는 못한다."(223)

[7] "《모비 딕》은 손에 넣기 힘든 무엇인가를 쫓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렬하고 간절히 원한다. 그 모든 것은 흰 고래로 상징될 수 있다. 흰 고래는 복수의 대상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 알 수 없는 오래된 욕망이 될 수도 있다."(224)

[8] "잘못된 것을 알아도 그대로 두고 진실보다 거짓을 선택하면 악순환만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여기에서 두려움, 대화 단절, 공격성, 원한이 자란다. 유혹하는 사람, 거짓 슬로건을 내세우는 사람, 거짓말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의존 상태로 만드는 과정이다. 여기에 걸려들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혼란 속에서 살게 된다."(231)

[9] "거짓은 전염성이 강하다. 진실보다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거짓은 반복적으로 퍼져가며 의식과 말 속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말하고, 시류에 맞는 것을 쉽게 믿는다. 그 과정에서 정신과 의지는 오염되고 썩는다.
그렇다면 거짓은 어떻게 알아볼까? 확신할수록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일수록 의심하지 않고 완고하며, 의문을 품지 않고 다 아는 체하고, 언제나 이해하는 척한다."(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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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타이완을 만났다 - 삶이 깊어지는 이지상의 인문여행기
이지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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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뒤늦은 부고를 들은 날 저녁하늘)




오직 변방으로

- 그때, 타이완을 만났다

 

이지상 지음 | [좋은생각] | (2011)


 


그저께(2023815) 내가 존경하는 한 선생님의 부고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의 읽기와 쓰기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셨던 분, 세상을 보는 눈과 글쓰기의 모범이 되어주셨던 분이었다. 내가 무심한 사이 그동안 병마와 싸우시느라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셨을까 싶었다. 선생님이 병상에 누워 지친 몸을 보여주기 싫어하셨다는 것을... 가족분이 선생님의 블로그에 남긴 글을 보고서야 알았다.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들었으나 연락을 잊고 있던 것은 나였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생업에 바쁘다는 핑계로 2년이 다 되도록 전화를 드리지 못했던 게 이제 와서 후회스럽다. 언제나 가난과 당당하게 맞섰던 분이었고, 그만큼 떳떳하셨던 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한번 씩 전하하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 더 안타깝기만 하다. 사실 선생님께 오래간만에 연락을 드리게 되었던 것도 온라인 서점에서 선생님의 신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신간 소식을 보고 선생님께 축하와 함께 안부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오전에는 아마도 한창 집필중일 듯하여 문자만 넣었던 것인데, 반나절이 지나 가족분이 선생님의 번호로 답장을 해주셨다

선생님이 한 달 전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너무 뜻밖의 답변이라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존재가 그 자리를 비우고, 이처럼 공허하게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모든 생명체라면 결국 겪게 될 이 사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진 말이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시를 읽어보고 또 읽어보았다. 결코 삶을 구걸하시는 분은 아니었으나, 하고자 하셨던 삶의 목표에 대한 체념이 느껴져 안타까웠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인사였다.


 

늦은 오후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밖으로 나가 거리를 잠시 걸었다. 저녁 하늘이 활활 타고 줄어드는 장작불처럼 붉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선생님의 짧았던 삶은, 오늘 저녁 하늘 같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의 문장은 언제나 냉철했다. 하지만 그에게 일상은 항상 뜨거운 투쟁이었을 것이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에 성역이란 없었다. 당신은 오직 변방에서, 변방에 발을 딛고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조망하셨던 분이었다. 사회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에 나 스스로가 얼마나 많이 뜨끔했었던가... 반면 타인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웠던 분. 무뚝뚝하셨으나, 제자에게는 언제나 자상했던 분이었다. 선생님이 쓰셨던 책 몇 권을 다시 들쳐보다가 내게 써주셨던 한 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변방으로


 

언제나 기득권에 기대지 말고, 변방에서 떳떳하게 세계를 지켜보고 목소리를 내라는 말씀같이 다가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제 편이 쉬시기를...





 

 

한동안 들었다 놓았다 했던 타이완 여행기를 마저 읽었다. 여행작가 이지상의 나는 지금부터 행복해질 것이다(2011)였다. 이 책은 출판사가 바뀌어 나온 개정판이 그때, 타이완을 만났다(2015)이다. 저자가 어머니를 병수발하다 돌아가신 후 지치고 삶의 의욕을 잃었을 때 홀로 떠난 곳이 바로 타이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외여행으로 간 타이완을 다시 찾아 타인들의 삶을 돌아보고 써내려간 여행기이다.

 


책의 끝 무렵에 저자가 신화학자 조셉 켐벨의 신화의 힘에 나온 문장을 재인용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사람들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요.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느끼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살아 있음의 경험’,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상기하게 해주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테다. 수행 중에 잠시 잠들 때 내리치는 죽비처럼, 혹은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며 사용하는 향의 연기처럼 살아 있는 존재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이를 명상하게 해주는 것이 여행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죽음과 부재만이 명상의 주재가 아니다. 경계의 반대쪽, 바로 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삶의 여행자가 아닌가. 아마도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묵상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도 여행을 떠나 기록을 남겨 우리에게 보여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남긴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발밑의 삶과 한 끼 식사를 사랑하는 자만이 우주의 신비를 볼 수 있다.”(398)

 


이 문장을 읽고, ‘자기 발아래를 살펴야한다’, 고 무뚝뚝하게 당부하곤 하셨던 선생님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1] "타이완의 매력은 그 작은 (낯섦과 호기심에서 오는) 긴장과 편안함 사이를 오가는 데 있었다."(396)

[2] "그러나 삶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생로병사의 고뇌와 사회적·경제적 고민은 끊이질 않는다. 여행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진 않는다. 여행은 단지 불쏘시개다. 그 불쏘시개를 장작불로 훨훨 일구는 것은 일상의 노력이다."(396)

[3] "사람들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요.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느끼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조셉 켐벨의 《신화의 힘》에서 재인용, 397)

[4] "젊을 때는 거창한 이념, 볼거리들이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며 나는 작은 것들에 매혹된다. 파편 같은 작은 것들과의 소통을 통해 우주적 황홀함을 맛본다. 발밑의 삶과 한 끼 식사를 사랑하는 자만이 우주의 신비를 볼 수 있다."(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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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도시 브뤼주
조르주 로덴바흐 지음, 임민지 옮김 / 미행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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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최초로 사진을 접목한

죽음의 도시 브뤼주를 읽고 - [단상]


 

조르주 로덴바흐(Georges Rodenbach) 지음

임민지 옮김 | [미행] | (2023)



 

소설에 최초로 사진을 접목한 벨기에 작가. 죽음의 도시 브뤼주저자 초상 사진을 찍은 나다르라는 사진작가가 초기 사진 역사에 등장하는 나다르라면, 저자는 그와 같은 당대의 초기 사진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에 그림대신사진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 보았음직하다. 당대의 프랑스 예술가들의 세계는 이미 일본 판화의 새로운 구도와 일상 소재로부터 받은 신선한 충격으로부터, 그리고 사진의 등장으로 새로운 분위기가 뒤섞어 묘한 흥분으로 뒤섞여 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화가는 세계를 그대로 복제하는 듯한 결과물을 내놓음으로써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고민하던 중이었을 것이며, 문인들은 회화를 자신의 글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바로 이런 새로운 예술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직전, 끓는점 직전의 분위기에 소설의 저자 조르주가 태어났으리라.


조르주가 파리의 문학 모임에 나가 문인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이 조르주가 자신의 초상사진을 찍으면서 나다르를 비롯한 초기 사진의 선구자들과 교류했을 법한 가능성을 더해준다. 세계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기술적 도구로서 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이 벨기에 몽상가는 틀림없이 주목했을 것 같다. 다만 프랑스인들이 벨기에인들이 쓰는 불어를 조롱하던 행위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벨기에는 프랑스의 어설픈 변방으로 취급되었을 것 같다. 프랑스인들이 벨기에 프랑스어라고 구별해서 표현하기에 이런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벨기에 작가의 소설은 프랑스어로 쓰였다. 옮긴이의 설명을 읽고 상상할 수 있는 작가는 엉뚱하기도 했지만 문학에 진심이고 그만큼이나 성실했던 작가다. 이런 벨기에인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프랑스 지식인들의 시선을 작가도 느꼈던 것일까? 사진가 나다르가 찍었다는 그의 초상 자신에 남은 눈매를 볼 때마다, 저자의 몽상가다우면서도 슬픔을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 법한 눈망울이 느껴진다.


 

소설에 실린 사진 속 도시의 건물들은 견고하고 육중하다. 남성적이고 견고한 문명과 관습의 흔적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그만큼이나 견고하게 유지되어 온 도덕의 감옥같이 느껴진다. 흔들림 없이 이 풍경들을 반영하는 고요한 호수 혹은 강은, 이 문명의 폭력을 견디며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사진은 이러한 진실을 담아내지 못하나, 소설가의 진실을 뒷받침하고 재구성한다. 19세기 당시 사진은 기술적인 이유로 긴 노출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결과 고정된 풍경 속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흔적은 지워져버린다. 마치 외젠 앗제의 파리 골목 사진처럼 말이다. 소설에 수록된 브뤼주의 풍경 사진 역시 덩그러니 건물만 보여주고 있다. 혹은 그나마도 희미한 인물들의 형상만 남아 있는 것이다. 사진에 희미하게 남은 사람의 흔적은 유령의 그것처럼 보인다. 이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에 대한 증거이면서 동시에 죽은 이의 귀환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아내의 죽음으로 주인공 위그는 벨기에의 도시 브뤼주에 살게 되었다. 그에게 도시는 그 자체가 바로 아내나 다름없었다. 이 죽음의 도시는 끊임없이 위그에게 아내를 소환한다.


 

도시, 문명, 종교, 관습, 도덕, 규범, 죄의식,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필멸성, ‘죽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영원하고자하는 갈망, 행복을 무한히 연장하고픈 세속적 욕망, 앞으로도 영원히 살 것만 같은 오늘 하루에 대한 미련, 한여름 내내 울부짖던 매미 소리가 잦아들 즈음의 아찔한 시간 감각. 반대로 이 모든 건 존재가 어김없이 죽음으로 향할 뿐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규범과 죄의식은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 이라는 일종의 광기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 던져진 수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사태는 편집증과 우울증을 낳기도 하고, 때론 혹은 언제나 흑백사진의 무채색으로 사람들의 어께를 무겁게 짓누른다. 흑백사진과 소설의 글쓰기는 모두 인간과 모든 존재의 필멸성을 명상하게 해주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아마도 저자 조르주 로덴바흐가 발견한 사진의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영원은 오직 찰나에서만 반짝이는 법이라고 말이다. 시인의 이 말은 최초의 사진이 접목된 죽음의 도시 브뤼주에서 정말 적절하게도 반짝인다. 세계의 일부만을 프레임 안에 고착시킨 사진만으로도 저자 조르주 로덴바흐는 사진이 주는 분위기와 잔상을 자신의 소설에 훌륭하게 접목하여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냈다











[책속으로]

(저자 서문)
[1] "우리가 기꺼이 선택한 이 브뤼주라는 도시는 현실에서는 거의 인간처럼 보인다... 도시가 가진 어떤 영향력이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발휘되는 것이다. 이곳의 경치와 종소리에 의해 사람들이 형성된다."(9)


[2] "브뤼주의 배경이 에피소드들에 가담하기 때문에 책의 페이지 사이에 끼워 넣어 재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9)


[3] "늦은 오후의 브뤼주 역시 어찌나 슬픈 도시인지! 위그는 그런 도시를 사랑했다! 그는 바로 그 슬픔 때문에 이 도시를 선택했고, 그런 큰일을 겪은 후 이곳에 와서 살게 된 것이다."(22)

[4] "죽은 도시는 곧 죽은 아내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지닌 엄청난 슬픔의 감정이 그런 환경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견뎌낼 수 있는 삶은 이곳에서의 삶뿐이리라."(23)

[5] "이제 이 도시는 유독 ‘여신도’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도시의 양로원과 수녀원 담벼락,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돌로 된 소백의를 입고 무릎을 꿇은 듯한 모습의 교회에서 발산되는 것은 바로 신앙과 금욕에 대한 충고였다. 도시는 위그를 지배하고 그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113)

[6] "위그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며 교회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죄에 대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맴돌았고 또 못 박혔다."(124)

[7] "아름다운 행렬은 끝난 것이다.... 존재했던 모든 것, 삶의 광경, 아침의 부활과 같이 노래했던 모든 것이 모두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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