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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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어긋남과 파국적 운명에 관한 우화

-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알마] (2024)

 



이 투툼한 분량의 책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 것일까? 간단히 말한다는 것은 커다란 벽처럼 느껴진다. 처음부터 몇 페이지가 지나도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문장이 이어지는 만연체는 이 벽을 무한히 늘리는 느낌이다. 거대한 우주의 먼지 하나와 같은 인물들의 내면에서 흘러가는 의식을 몽롱한 상태로 따라간다. 그럼에도 눈에 들어오는 실마리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건 여러 등장인물들이 맺는 관계들이었다. 소설의 인물들이 서로 맺는 관계가 하나같이 소통에 실패하고 파국에 이르기 때문이다. 결코 만날 수 없는 다중우주의 세계가, 한 점에서 만나 응축된 상태로 스쳐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은 헝가리의 어느 중소도시다. 남작 벵크하임 벨러는 청소년기에 이곳에서 살다가 가족을 따라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고, 46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기에 10대 시절 잠시 벵크하임과 썸을 타던 여인 머리커가 이야기 구조상 눈에 들어오는 중심인물이다. 두 사람은 결국 재회하지만, 남작은 머리커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상대를 앞에 두고 마치 다른 사람에게 하듯 머리커를 향해 머리커에 대한 고백을 전하는 남작. 아무리 반세기가 지났다고 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옛 연인과 마주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마치 치매 증상을 겪는 가족을 앞에 둔 가족의 심정이 이러하지 않을까.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다. 마주보고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언어로는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떠올리게 해주는 듯한 장면이다.


 

또 다른 문제는 남작의 귀향으로 고향 도시 전체가 들썩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도시의 시장이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투사하여 만들어 낸 착각과 확증편향 때문이기도 하다. 도시 전체가 집단 망상에 빠져든 것 같은 상황이다. 한편 남작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우연의 유희를 즐기는 귀빈의 성향’(240)이라고 표현한 도박벽이었다. 그의 귀향을 재촉하게 했던 것도 어느 정도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도박판에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시장의 기대와는 달리, 남작은 그야말로 빈털터리 상태였다. 반면 시장은 남작이 말년에 거액의 재산을 고향으로 가져와 환원하는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작의 귀향 목적은 자신이 어릴 때 걷던 공원과 추억의 장소들을 마지막으로 거닐어보는 것이었다. 도박벽으로 몰락한 상황과는 다르게 남작의 소망은 소박하고 순수하기까지 하다. 오래전의 두 연인은 결국 재회했지만 그들이 어긋나버린 관계만큼이나, 이 도시나 시장과 남작과의 관계는 결국 거대한 파국에 이르게 될 운명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맺는 관계가 이처럼 파국적으로어긋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가 정답처럼 제시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내가 처음 주목해본 실마리는 남작의 오래전 연인 머리커에서 우선 찾아본다. 남작의 귀향 목적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오로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이 도시를 걷고, 그곳에 있던 옛 연일을 만나보는 것이었으니까. 이 소망만큼은 천박하거나 속물적이지 않다. 머리커 역시, 옛 연인이 귀향하여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서 설레는 감정으로 행복하기까지 했다. 이건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닌가. 여기까지도 큰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소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만큼 복잡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이 무한한 행복을 누군가와, 친척이나 지인과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나눌 사람을 아무도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도러에게는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허사였고 이렌조차도 이것을, 그녀 영혼의 유일한 비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276)


 

머리커가 자신의 내밀한 행복감을 나눌 사람이 없다고 여긴 대목은, 머리커가 매우 고독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녀는 자신의 피붙이였던 손녀딸 도러나 15년 이상 사귄 친구 이렌과도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나누고 공유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고립된 섬처럼 느꼈다. 이런 모습에서 머리커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을 부각시켜주는 인물로 보인다. ‘고립된 섬으로서의 인간, 나아가 고독한 현대인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 하나는, 고독한 존재인 인간들이 서로 맺는 관계와 어긋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해준다.


 

이처럼 작품의 이야기가 수많은 관계들의 어긋남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 점이 이야기의 전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 점을 생각해보다 화자가 언급한 칸토어의 원에 관한 문장이 기억에 남았다. 소설에서 언급된 칸토어는 수학에 집합 개념을 도입하고, 무한에 대한 탐구를 했던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를 가리킨다. 그가 했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칸토어가 자신의 답을 제시한 문제는 모든 것이 원을 그리며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칸토어, 상트페테르부르크 할레의 이 불운한 혜성과 함께 우리는 수만 번 출발한 그 지점으로, 수만 번 돌아간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거야...”(473)


 

원에서는 어느 한 점에서 출발하더라도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정신병원에서 고독하게 죽었던 칸토어. 그가 이야기한 처럼, 원은 무언지 모를 신비함을 품고 있는 듯하다. 특히 출발점으로 회귀하는 모티프는 고대 지중해 지역의 신비주의 전통을 떠올리게도 한다. 다만, 회귀의 특성이 기하학의 원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과연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현실에서의 삶은 기하학처럼 정확히 출발점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세계에는 늘 우연성이 개입하는 까닭이다. 이 세계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우연성, 혹은 불확실성의 요소는 우리의 삶을 오히려 출발점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요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인물들이 맺는 관계의 총체적 어긋남 역시 현실 속의 우연성때문이 아닐까. 달리 표현하면, 현실은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명의 힘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우연성의 힘이 겨루는 장이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 비가역적인 현실의 역설을, 인물들이 맺는 파국적 관계로부터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소설이나 현실에서 인물들이, 혹은 존재 자체가 서로 맺는 수많은 관계가 어긋나고, 때로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이는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고립되었다는 것, 존재의 고독감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마치 칸토어 이론에서처럼 모든 존재가 스스로를 가두는 감각의 거품과도 같은 세계 속에서 서로가 하나의 접점을 공유하며 돌아가는 원과 같은 존재로 이해해볼 수는 없을까. 각각의 존재는 이 우연성의 요소 때문에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상태다. 존재는 본질적인 고립 속에서 소통 불능이라는, 이미 불가피한 상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 현실을 극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까? 이처럼 질문해볼 수 있겠다. 따라서 소설이 내게 말하고 있는 바는, 본질적인 관계의 파국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지내고 있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정리해보자. 소설에서 내가 느꼈던 것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들의 맺는 관계는 늘 어긋나고 결국 파국에 이른다. ‘고립된 섬으로서의 존재들은 결국 이 운명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은 칸토어의 명제처럼 돌고 돌아 수동적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존재일 뿐일까 하는 문제가 걸린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어쩌면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고독한 존재로서 무기력하게만 느껴지는 이 상황을 바꿀 여지는 없는가. 나는 무모해보이긴 해도, 벵크하임 남작의 고백에서 극복의 가능성을 찾아보기로 한다.

 


나의 능력 중에서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것 단 하나가 있는데, (...) 이 도시 안에서 당신을, 마리에타를 떠올릴 때 그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오. 이제 나는 예순 다섯이 넘었소, 어쩌면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내 삶을 지탱한 두 가지를 고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소만 그것은 내가 한 도시를 알았고 그 도시에서 당신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또한 털어놓을 수 있는바 내게 이것의 의미는 오직 하나라는 것으로, 그것은 이 생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이 도시,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당신이라는 것이니 내가 여기서 무슨 대단한 비밀을 실토하는 것이 아님을 당신도 분명히 알 터인데,...”(223-224)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문장 속에서도 남작의 고백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외롭고 고독한 존재들이 각자의 무거운 삶을 지탱해갈 수 있게 한 힘이란 어쩌면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것들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남작은 곧바로 나에게도 묻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 당신을 살아가게 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남작의 경우, 그 대상은 결코 거대한 재산은 분명히 아니었다. 모든 재산을 도박판에서 다 잃고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놓지 않게 해주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작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던 도시’,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 머리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머리커의 미소와 그녀가 미소지을 때 볼에 패이는 보조개와 같은 구체적인 기억이 남작 자신을 지탱하게 해주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친애하는 부인-정말이지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저를 살아 있게 했습니다, 그 미소가요, 마리에타에 대한 저의 사랑 말고는 제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무엇 하나 가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어떤 학식에도 흥미가 없었습니다, 예술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는데, 언제나 그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368)


 

비록 현실의 우연성과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 내미는 손길로 남작은 끔찍한 결말로 세상을 뜨게 되지만, 나는 최소한 그의 인생이 불행했다라는 평가를 내리지 않으려 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에게는 머리커에 대한 기억(미소)과 용서를 구하고자 다시 만나야 겠다는 욕구를 다시 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고독하고 힘겨운 삶의 여정 속에서도 그는 최소한 존재의 고통을 견딜만한 기억하나는 지니고 간 인물이 아닌가. 우리의 삶이 무한히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듯해 보여도, 현실에서 기억을 지닌 존재가 정확히 같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의 차례를 보면, 형식상 악보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경고의 전지적 화가가 악단의 지휘자처럼 음을 따라 부르다가 마지막에는 다 카포 알 피네(Da Capo al Fine)’라고 표기해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다 카포(Da Capo, 혹은 D.C.)’처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다. 알 피네이 표기가 있는 곳에서 곡을 끝내라는 지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목차의 마지막에 도달하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작가는 지시해놓은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소설의 마지막이 인상적이다. 도시 전체가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 고아원 출신의 지체장애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급수탑에 올라 불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추어 지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지전능한 존재는 지체장애인의 육체, 곧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거대한 소멸혹은 청소를 지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우연성, 혹은 불확정성을 일거에 무화하고 다시 칸토어의 원처럼, 원점으로 되돌아가도록 지휘하는 듯한 장면이다. 실로 그로테스크적인 풍경의 정점을 찍는 장면이면서 압도적인 결말이다. 이번 기회로 작가 라슬로의 작품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 작품 전반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암울하고 비극적인 사회 현실과 인간의 고독한 운명을 기괴하거나 때로는 극단적인 과장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는 유럽적인 부조리극의 전통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남작의 사망 전까지는 곳곳에서 희극적인 요소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암울하고 비극적인 상황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희극과 비극의 공존을 통해 더욱 그로테스크한 성격이 부각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당신에게는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 살아가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가?’라고 묻는 작품이었다.








[책 속으로]

[1] "나의 능력 중에서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 것 단 하나가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이 도시를, 그리고 이 도시 안에서 당신을, 마리에타를 떠올릴 때 그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오. 이제 나는 예순 다섯이 넘었소, 어쩌면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내 삶을 지탱한 두 가지를 고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소만 그것은 내가 한 도시를 알았고 그 도시에서 당신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또한 털어놓을 수 있는바 내게 이것의 의미는 오직 하나라는 것으로, 그것은 ‘이 생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이 도시,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당신’이라는 것이니 내가 여기서 무슨 대단한 비밀을 실토하는 것이 아님을 당신도 분명히 알 터인데,..."(223-224) - P223

[2] "당신도 알다시피 마리에타, 나는 가장 힘들 때 이 도시를, 그리고 그 속의 당신을 생각하면 언제나 기운이 솟았고 실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당신을 찾아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으니 나의 사랑하는 마리에타, 당신이 있기에-그는 이렇게 썼으나 이제 종이가 피아노 책상 표면을 저절로 미끄러지다시피 하여 쓰레기통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당신의 얼굴, 당신의 미소, 그리고 당신이 미소 지을 때 아담하고 어여쁜 뺨에 생기는 자그마한 보조개 두 개는 내게 무엇보다, 다른 무엇보다 귀중했소."(224) - P224

[3] "그녀(머리커)는 자신이 느끼는 이 무한한 행복을 누군가와, 친척이나 지인과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나눌 사람을 아무도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도러에게는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허사였고 이렌조차도 이것을, 그녀 영혼의 유일한 비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276) - P276

[4] "그녀가 두 편지 중 하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단연코 아무도 없었던 것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고..."(279) - P279

[5] "하지만 너무나 실망스러운 때에 이 일이 자신(머리커)의 삶에서 한 번 더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어서, 그녀는 기적이, 그녀가 언제나 기다렸으나 언제나 실망으로 끝난 기적이 또다시 일어나리라고는 조금도 믿을 수 없었던바..."(279) - P279

[6] "친애하는 부인-정말이지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저를 살아 있게 했습니다, 그 미소가요, 마리에타에 대한 저의 사랑 말고는 제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무엇 하나 가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어떤 학식에도 흥미가 없었습니다, 예술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는데, 언제나 그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368) - P368

[7] "칸토어가 자신의 답을 제시한 문제는 모든 것이 원을 그리며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칸토어, 상트페테르부르크 할레의 이 불운한 혜성과 함께 우리는 수만 번 출발한 그 지점으로, 수만 번 돌아간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거야,..."(473) - P473

[8] "두려움이 인간 존재를 정의하는 것임은 그것이 단순한 감정이요, 쉽게 없애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인데,..."(483) - P483

[9]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에 의해 유도되는가의 문제는 우연성에, 그것도 지독하게 의존하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훨씬 철저히 다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니, 말하자면 우연성은 더도 덜도 아닌 우연성이 조건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성질이요, 이제, 사건의 지평선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덩어리로, 하지만 무한하지는 않아도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 덕에 단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덩어리로 돌아가-여기서는 우리 또한 우주의 일부라고 말해야 하는데..."(487) - P487

[10] "내가 말하고 싶은바 문화를 낳은 것은 바로 두려움과 그 무지막지한 힘이기 때문이니 (...) 네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인류 문화의 요람이 황하 유역이나 이집트가 아니라, (...) 두려움 자체라는 것이며..."(489)


"우리가 이해한다면, 모든 인류 문화의 토대가 거짓임을 우리가 정말로 깨닫는다면, (...) 그렇다면 우리의 열정을 자극한 모든 것, 인간의 창조적 정신이 낳은 모든 유일무이한 작품들이 환상에 기대고 있으며 그 환상에서 생겨났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니,..."(491) - P489

[11]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람이 왜 죽어야 하는지가 아니야,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가라고, 라고 벵크하임 벨러 남작이 곰곰이 생각하다가..."(494) - P494

[12] "그는 이 착각 덕에 숲을 통째로 독차지하고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고독을 달콤한 맛을 음미할 수 있었으며 이제 다시 이곳에 찾아와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이 길을 다시 한번 거닐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선물이라며 남작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했으나 애석하게도 다시 한번 눈에 눈물이 가득 찬 것을 느꼈는데,..."(509) - P509

[13] "그가 태어나 이 삶을 마지막 나날에 이르기까지 살아야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말하자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야 했던 것은 왜인가, 그는 이미 몇 차례 그랬듯 걸음을 멈추었는데, 마치 맞은편에서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였으나 아니었고..."(515) - P515

[14] "그렇다면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넘어서는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았고, 또한 그런 정도로는 일어나지 않은 그런 삶은 어떤 삶인가, 그 안에는 사랑이, 세상 안에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이 환상이라는 사실이 만년에야 드러난 것은 그것이 실제로도 환상이고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마도 결코 존재하지 않은 것은 실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요, 그 대상이 결코 실재일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마도 결코 존재하지 않은 것은 실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요, 그 대상이 결코 실재일 수 없었기 때문이지, 그때의 그것, 그리고 지금 그 자리를 차지한 그것은 처량하고 적막하고 공허하고 기만적이었으니 이 모든 일에 무슨 의미가 있었느냐며 남작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 좋으신 주님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죽음은, 침목 사이로 행진하면서 그가 생각하길 ‘여전히’ 지금 당장이라도 올 수 있었으나 오고 싶어 하지 않았던바..."(516) - P516

[15] "인간 본성은 사건, 풍문, 방식, 말하자면 조작으로 빚어지며 이 인간 본성은 연약해요, 에스테르..."(577) - 시립도서관장의 말 - P577

[16] "내 말은 이것일세, 도시관리사업소장이 말하길 하루 이틀만 지나면 다들 완전히 잊어버리고, 장담컨대 일주일이 지나면, 그리고 한 달이 지나면 악몽의 기억처럼 그 모든 야단법석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580) - P580

[17] "시의 공직자 중 하나라도 그들에게 정확한 짓침을 내려주었다는 말은 부정하는 바이니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 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 어디 있는지 통 모르겠습니다..."(734) - P734

[18] "첫 번째 연사가 이제 다시 묻길 이 시민 지도자라는 자들은,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다면 왜 리본을 자르고 기념식에서 축사를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냐고, 왜 시민 지도자라는 자들은 죄다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누가 말 좀 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735) - P735

[19] "며칠째 아무것도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던바 전화도 인터넷도, 죄다 먹통이어서, 바깥세상이 사라져 버렸거나 마치 똑같은 두려움 때문에 이 나라의 모든 동네, 도시, 주가 세상과 자발적으로 격리된 것 같았으니..."(748) - P748

[20] "하나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하나의 어마어마한 불 공격이, ‘도시 자체보다 훨씬 큰’ 불 공격이 도시를 강타했기에 뭔가 이야깃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으며..."(752) - P752

[21] "끝으로 그는 하늘을,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양손을 들어 누군가, 아마도 지휘자가 전에 하는 것을 똑똑히 본 모양으로, 보이지 않는 관객에게 몸짓하면서 객석을 향해 활기차게, 자 이제 다 같이."(754) - P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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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의 아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7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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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가 요청한 인간의 조건


- 모두가 나의 아들

(원제: All My Sons)


아더 밀러(Arthur Miller, 1915.10.17-2005.02.10)

최영 옮김 [민음사] (2012)



 

어제(2025.02.10)는 미국의 극작가 아더 밀러(Arthur Miller, 1915-2005.02.10)20주기되는 날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메릴린 먼로의 남편 혹은 <세일즈맨의 죽음>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집어 들어 본 작가의 연보때문인지, 대출하고 말았다. 그는 20세기를 거의 온전히 살아내고, 나와 동시대를 호흡했던 작가였기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작가 연보를 보다보니 아더 밀러가 유독 나치 수용소 생존자와 만나 대화하거나 나치 전범 재판을 직접 찾아가 참관한 행보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알지 못했지만, 그가 어떤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뉴욕 할렘가에서 출생한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 물론 유대인이라고 모두가 그처럼 적극적으로 나치의 범죄에 대해 파고들지는 않았을 테다.


 

우연히 빌려온 그의 희곡 <모두가 나의 아들 All My Sons>(1947)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희곡이다. 켈리 집안의 가장 조 켈리는 항공기 부품을 납품하는 군수업자로 자성가한 인물이다. 현재는 아내 케이트 켈리, 큰아들 크리스 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조와 케이트의 둘째 아들 래리는 군용기 파일럿이었고,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경제 대공항을 겪은 미국 사회와 이를 겪으며 살아내는 한 가정을 배경으로 한 대표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이 작품도 당대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여 작품에 녹여 내었다. 이 작품은 외형상 한 군수업자 일가의 몰락을 그린 비극이다.


 

연극의 시작은 켈리 집의 마당에 있던 사과나무가 밤새 험한 날씨에 부러진 어느 8월 일요일 아침이다. 이 때는 래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다. 래리의 형 크리스는 동생 래리의 약혼녀 앤에게 청혼을 하려고 그녀를 초대했고, 이를 직감한 앤은 이를 받아들이고자 초대에 응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오랜만에 모인 앤과 그의 오빠이자 변호사로 개업한 조지가 켈리 집안에 모임으로써 과거에 덮였던 추악한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가장인 조 켈리가 하자 있는 비행기 부품이 있음을 알면서도 군에 납품하도록 강행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의 부하 직원이자 앤의 아버지인 스티븐만 억울하게 수감된 상태였다. 조는 곧바로 혐의를 벗고 지금껏 존경받는 가장이자 경영인으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의 회사가 납품한 하자 있는 비행기 부품으로 21대의 전투기가 추락하게 된 것에는 스티븐 외에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당신을 위해서, 여보, 당신과 크리스를 위해서였어. 그게 내 삶의 목적 전부였어...”(130)

 


결국 드러나는 전말은, 조 켈리가 오로지 자신이 이룩한 모든 성공의 결실을 가족을 위해, 특히 큰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일할 뿐이다. 둘째 아들 래리가 비행기를 몰고 자살하기 전에 그의 애인인 앤에게 보낸 유서를 통해 래리의 항공기 사고가 우연이 아닌, 아버지의 추악한 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이었음이 결국 드러난다.

 


이 작품은 세상에 나온 지 70년이 지났지만, 전쟁과 자본 논리에 마비되고, 개인적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 한 인간의 양심에 관한 문제를 묻고 있다. 형식은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속의 주제 의식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한편 작품의 제목인 모두가 내 아들이라는 표현은 인간에 대한 연대의식과 책임을 요청하는 작가의 구체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연히 읽게 된 아더 밀러의 작품을, 그의 20주기에 맞춰 짧은 기록으로 남겨보았다.

 

 

 

#모두가나의아들 #아더밀러 #민음사 #비극 #최영번역가

[1] 크리스 켈리: "온종일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면, 적어도 저녁에는 삶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어요. 저는 가정을 원하고, 아이들을 원하고,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뭔가를 이루고 싶어요."(29) - P29

[2] 조 켈러: "애니. 우린 늙어 가고 있단다."(41) - P41

[3] 크리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개들이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다면 다들 오늘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다는 거. (...) 그런데 나에게 전에 없던 게 생겨난 것 같더라. 일종의 ... 책임감이라는 것 말이야.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이해하겠니?"(61) - P61

[4] 크리스: "내 말은 다들 자기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전쟁에서 얻은 것들이며, 자기 차를 몰면서도 그게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그리고 그로 인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거야."(62) - P62

[5] 조 켈러: "크리스, 내가 널 위해서 이루어 놓은 것들을 누렸으면 좋겠어..."(66) - P66

[6] 크리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도대체 아버지는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인가요? 젊은이들이 그 실린더 헤드에 의지해서 공중에 떠 있었어요. 아버지는 그걸 알고 계셨다고요!"
조 켈러: "널 위해서다, 너를 위한 사업이었으니까!"(120)
크리스: "대체 아버지는 뭐예요? 아버지는 짐승조차도 아니에요."(121) - P121

[7] 짐: "프랭크가 맞아요... 누구나 별을 하나 갖고 있다는 거요. 자신의 정직함이라는 별을요. 우린 그걸 찾기 위해 인생을 다 써 버려요. 그런데 그 별은 일단 빛이 꺼지게 되면 다시는 빛을 발하지 않거든요."(125) - P125

[8] 케이트(어머니): "여보... 가족을 위해서 그 일을 했다는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129) - P129

[9] 조 켈리: "당신을 위해서, 여보, 당신과 크리스를 위해서였어. 그게 내 삶의 목적 전부였어..."(130) - P130

[10] 크리스: "이 땅은 거물급 개들의 나라야. 이곳에서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 잡아먹을 뿐이야! 그게 법칙이지. 우리의 유일한 생존 법칙... (...) 여긴 동물원이야, 동물원이라고!"(136) - P136

[11] 조 켈리: "내가 감옥에 간다면 이 빌어먹을 나라 절반이 감옥에 갇혀야해! 그게 네가 내게 그러게 말 못하는 이유다."(138) - P138

[12] 조 켈러: "이 편지가 내게 그렇게 말하는게 아니라면 이 편지는 대체 뭐란 말이오? 물론이지, 그 애는 내 아들이었어. 하지만 래리는 그들 모두가 내 아들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생각에도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군.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아. 곧 내려오겠소."(141) - P141

[13] 케이트(어머니): "우리가 이 이상 더 뭐가 될 수 있겠니?"
크리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것과 거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아는 것 말이에요. 만일 그걸 모르신다면 두 분은 당신 아들을 저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래리가 죽은 이유니까요."(142)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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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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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자기만의 시간들

- 금지된 일기장

(Forbidden Notebook)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 (2025)

 




어느 영어 관련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기쁨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들 중 joy/pleasure/delight가 있는데, 이걸 구분할 수 있는지 물으셨다. 결론부터 말하면(내 기억에 남아 있는 대로 적어본다면) joy는 보편적이고 즉각적인 즐거움과 관련이 있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사이다를 마실 때 느끼는 쾌감 같은 기쁨을 떠올릴 수 있다. 이와 달리 pleasure는 보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다. 보다 목적성이 뚜렷하다고 할까.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하면서 얻는 쾌감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이어서 delight의 경우는 더 나아가 어떤 노력이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정의 결과 얻지는 보다 수행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있는 느낌이다. 따라서 delight이란 단어는 종교인이 고된 수행을 통해 얻는 희열에 더 가깝다. 이렇게 기쁨을 뜻하는 여러 단어들이 담고 있는 뉘앙스는 이렇게나 차이가 크다.


 

쿠바 대사였던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일기장을 읽으며 나는 이 기쁨을 의미하는 여러 단어들을 떠올렸다. 일기 형식의 이 소설에서 화자이자 43세의 주부 발레리아는 일기장을 산 소소한 기쁨(joy)에서 시작하여 몰래 일기 쓰는 시간에 대한 기쁨(pleasure),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기쁨(delight)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소박하면서도 놀라운 솜씨로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변화는 그녀가 우발적으로 산 일기장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을 위해 꽃을 사고 싶어 들어간 상점에서 우연히 검은 노트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이렇게 삶은 우연과 필연이 직조되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가족은 남편 미켈레, 법학도인 큰 아들 리카르도와 딸 미렐라로 이루어진 단란한 중산층이었다. 가족들 몰래 간직하게 된 노트를 자신만의 비밀로 하면서 발레리아의 생활에 변화도 생겼다. 23년간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자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노트의 존재가 가족에게 들킬세라 그녀는 2주 동안 한 글자도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도대체 일기 쓰기가 뭐라고 새벽 2시에 가족 몰래 고단한 몸을 일으켜 일기장을 펼치게 되었을까. 그렇다고 그녀가 더 행복해졌던가? 화자인 발레리아는 그렇지는 않다고 일기장에 고백한다. 삶에 비밀이 생기고, 새로운 활력도 생긴 듯 느껴지지만 부작용도 함께 발생했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즐거웠던 일만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괴로운 일을 상기하고, 그럼으로써 그 기억이 더 오래 남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그나마 다락방 한 구석이라도 있었으면 마음 편히 쓸 수도 있으련만, 그럴 호사까지 누릴 처지도 아니었다. 부엌에서 조심스럽게 써가는 일기일지언정 발레리아는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직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연으로 시작했으나 그녀는 일기를 쓰게 될 운명이었다.


 

발레리아에게 일기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자신에게 비밀을 만들어준 물건이다. 곧 그녀는 혼자서 무언가를 써서 채워 넣고 싶다는 욕구, 잠깐의 평화를 조금씩 욕망하게 되었다. 물론 23년이란 시간이 누르고 있는 관성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을 터였다. 처음에는 고단한 일상 외에는 쓸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저녁에 침대에 눕는 순간 밀려오는 피로감이 평안의 원천이다.”(35)라는 한 문장이 장황한 설명을 대신한다. 이 과정에서 발레리아는 자신의 처지와 존재에 대해 가격지심과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일기를 쓰기 전에 그녀는 항상 자신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 그리고 양육과 가정을 돌보는 일처럼 특별한 것이 있을까. 어쨌든 20세기 중반을 살아간 여성이 가정을 돌보는 관습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21세기 현재, 우리 사회의 가정은 어떤가. 여전히 엄마는 늘 고단한 존재. 이 소설에는 100여 년 전에 태어난 유럽 작가의 삶이 녹아 있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닿아 있는 듯하다. 발레리아의 일기장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못 다한 말들을 쓰는 빈 서판으로 기능하기도하고, 성인이 된 딸 사이의 긴장과 삐걱거리는 관계에 대해 불만과 고민을 성토하는 고해소가 되기도 했다. 일기장의 곳곳에서는 삶의 여러 국면들이 교차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삶에 따라오는 불안과 혼란스러움 까지도 번번이 등장하고 있다. “일요일 한낮의 적막에 싸인 빈집에 홀로 앉아 있자니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67)는 고백처럼,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일은 이전의 생활과는 다른 고독과 불안의 순간에 적응하는 일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몰래 쓰는 일기는 가족이 모두 잠든 시간, ‘여기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비로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을, 보다 주체적으로 향유하게 해주었다.

 


일기장의 새하얀 백지는 나를 매혹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혼자 거리를 거닐 때처럼 말이다. (...)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처음으로 나를 위해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94)


곧 발레리아에게 일기쓰기란, 그녀 자신을 규정하고 제약하는 관습의 경계를 넘어 그 바깥을 경험하게 하는 행위로 볼 수 도 있겠다. 목적지 없이 혼자 혼잡한 거리를 걸었던 경험을 떠올려 본다. 발걸음이 늦춰지고 주위의 시야가 눈에 들어온다. 발레리아도 일기를 쓰면서 때론 무의식적으로 침투하는 생각들을 따라 길을 잃기도 했을 테다. 오히려 그녀의 일기 쓰기는 의도적인 길 잃기로의 초대이기도 했다. 이처럼 실수로 산 일기장은 그녀에게 살아 있음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괴로운 기억과 마주해야 했지만 말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의 삶이 일기 쓰기 전과 후가 분명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일기를 씀으로써 일기를 떠 쓰고 싶은 욕망을 발견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계획도 떠올리게 된 것이다. 딸의 생일 파티 계획을 세우고 싶다는 소망과 더불어 처녀 시절처럼 들뜬 기분도 느낄 수 있게 된 것. 이런 내밀한 기쁨들은 기쁨의 단어 중에서 pleasure에 가깝지 않을까.


 

그럼에도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50)이라는 깨달음도 얻는다. 친정 엄마와 자신과의 관계를 떠올리다 딸 미렐라와의 삐걱거리는 관계를 돌아보며 딸의 행동을 좀 더 이해하는 길로도 나아간다. 특히 딸을 생각하며 쓴 기록은 시간의 세례를 받으며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과정이 보인다. -부인-엄마로서 한 여성의 삶이 성숙해가는 장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가족이 함께 모여 마치 하나가 된 듯한 순간을 만끽한 발레리아의 심정은 다름 아닌 delight의 감정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기쁨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아니었으므로.

 



저자 알바 데 세스페데스는 일기 형식의 이 소설을 통해, 마치 모노드라마 연극의 배우처럼 여성으로서의 삶을 내밀하게 구성해 놓았다. 비록 70여 년 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작품에 녹여 내었다. 현실의 삶에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도 하며 투옥되었던 작가로서, 그만큼 현실의 삶도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작가가 화자로 내세운 발레리아는 파시즘은 아니지만, 또 다른 사회의 관성에 글쓰기로 저항하는 인물이다. 작가의 또 다른 분신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발레리아에게 일기장은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었으며,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이기도 했다. 나아가 삶이라는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戰場)이기도 했다. 일기장은 과거의 시간 단위가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되며 연속성을 갖게 해주는 공간이기도 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가정을 지켜내면서도 자신의 존재 이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숭고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한 인간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삶의 시간들이 이토록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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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새기는 빛 - 서경식 에세이 2011-2023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연립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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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교수가 떠나신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빈자리는 크게 느껴집니다. 훌륭한 후학들이 그 자리를 많이 메워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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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
전영애 지음, 최경은 정리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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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살린다: 앎에서 삶으로 향하는 공부

- 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

 

전영애 지음 | 최경은 정리 [문학동네] (2024)

 



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이하 괴테 할머니)을 읽는다. 책을 통해 저자인 괴테 할머니전영애 교수의 발자취를 여러 방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러 발자취 가운데 언제나 만나게 되는 모습이 있다. 무엇보다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간절함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괴테 할머니를 이해하려면 그의 배움과 앎에 대한 간절함에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무언가에 대한 간절함은 결핍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며,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우선 저자는 한결같은 간절함으로 평생 공부해 왔다. 그에게 공부란 무엇이었을까? 짐작컨대 공부가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책을 통한 지식을 얻는 행위보다 넓은 의미로 이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괴테 할머니는, 공부란 결국 삶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것”(22)이었노라 말한다. 진실로 살아있다는 것은 곧 부단히 공부하는 일이라는 말로 들렸다. 이 행위가 모여 한 개인에게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으며, 그가 마주하게 된 세계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던 셈이다.


 

뿐만아니라 저자가 실천해 온 삶의 태도는 괴테에 빚진 바가 크다. 괴테가 삶을 대했던 태도는 저자가 실천해온 삶의 행보마다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괴테 할머니의 소개에 따르면, 괴테는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열어 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괴테 할머니는 이렇게 일러준다. 놀라며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려 있음을 인간이 지닌 최상의 부분으로 보는 것이지요. 괴테는 이를 파우스트가 가진 추동력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29) 괴테가 얼마나 열린 인간이었는지는, 그가 관심을 갖고 평생 공부한 분야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괴테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분야만 해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학, 회화, 색채론, 식물학, 광물학 등이다. 무엇보다 괴테의 삶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호기심이란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워하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괴테는 여기에서 나아가 자신의 결핍을 자각한 상태로 둔 적이 없었던 것같다. 자신의 결핍을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차이일지 모르지만, 무엇보다 평생 자신의 부족함을 부단히 극복해 갔던 초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였다면 모든 걸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며 자기합리화를 했을 법한데 말이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여우의 신포도와 같은 상황으로 곧잘 돌아가곤 하는 나의 습관을 돌아보게 한다. 이는 우리가 늘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괴테 할머니는 나의 마음을 이미 들여다보셨는지, 괴테의 말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준비하지 않고, 기다려내지 않고, 쟁취하지 않았던 좋은 것과 마주친 일은 나의 인생행로에는 없습니다.”(49)


 

괴테는 이미 청년 시절부터 그냥 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그 인내와 기다림의 가치를 일찍 이해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내 독서 감상이 다소 자기계발서 같은 교훈 찾기가 되어버린 감이 있지만, 괴테라는 인물의 태도와 행보를 볼 때마다 항상 배울만한 점을 찾을 수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나의 삶은 언제나 결핍투성이였지만, 대부분 기다려내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일깨워준다.


 

견뎌내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극복해 내는 일’, 괴테의 태도는 나의 삶뿐만 아니라 책읽기도 되돌아보게 한다. 책을 막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시기에는 읽은 책이 너무 없어서 그저 많이 읽어보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책만많이 읽는다고 그 사람이 건전한 상식과 윤리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었다고 말한 명사들 중에 어떠한 형태의 권위나 권력의 논리에 동조하거나 심지어 혐오에 앞장선 이들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책읽기란 자신의 결핍(타인에게 보여지는 욕망)을 메워주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자격처럼 여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본래텍스트는 그 자체로 엘리트주의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에게 애초에 자연스러운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텍스트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텍스트에 익숙한 능력은 돈과 다를 바 없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이른바 책읽기혹은 독서행위를 통해 축적된 지식이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권위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독서 혹은 독서를 통한 지식이 이른바 물신화된 사례를 여러 차례 보고 있다.


 

이와 달리, 괴테 할머니가 소개하는 괴테의 모습에서 공부는 책읽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공부가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괴테의 공부는 분명히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그의 지향점이 아니었을까. 그에게는 이것이 인생의 우선순위였던 것 같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더라도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곳, 익숙하고 안락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보고 느끼며 살아봐야 겠다는 결심으로 마차에 올랐을 한 서른일곱의 괴테를 생각해 보았다. 삶의 관성을 과감히 물리친 청년 괴테의 모습을 말이다. 괴테 할머니는 괴테의 선택을 기존 규범으로부터의 떠남’(98)이라고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괴테 할머니에서 저자가 소개한 괴테의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표현을 꼽으라면, “리벤 벨렙트 Lieben belebt."(50)를 들 수 있겠다. 이 문장은 사랑이 살린다는 뜻이다. 두 단어로 이루어진 이 간결한 문장은 죽어 있는 것을 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괴테가 60여 년 간 손보았던 작품 파우스트는 결국 우리의 삶에 사랑이 남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표현은 80대의 괴테가 인간을 바라볼 때 느꼈던 마음가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때론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를 내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80대의 대문호가 인간을 바라본 시선에는 분명 사랑이 담겨 있었으리라. 괴테의 사랑이 살린다라는 표현은 한강 작가의 감동적인 노벨상 수락 연설을 또다시 떠오르게 해주었다. 대문호가 남기고 간 작품들을 관통하는 배움은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느꼈다. 한강의 연설을 듣다보면 그는 자신의 어느 작품에서든 기도하듯 사랑을 담고자 했던 작가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잔인할 수 있는 인간에게서 여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다니 말이다. 괴테 할머니가 보여준 괴테의 삶은 모두 앎에 대한 간절함에서 출발한 공부가 결국 삶으로,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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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19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작년인가? TV에서 전영애 교수 다큐멘터리 본 적이 있는데 꽤 인상적이었죠.
자그마하신 분이 낮에는 땅을 일구고 밤에는 번역하시고.
항상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궁금하더라구요.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나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