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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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날아가게 하는 공기같은 것


레티파크 Lettipark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

 



레티파크는 단편 17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짧은 감상을 남겨본다.


 

이 책은 우선 표지가 무척 인상적이다. 더스트 커버를 책과 분리하면, 안쪽에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프레임의 가운데에는 초점이 나간 노란 종이비행기의 이미지가 보이고, 초록색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걷는 여성이 비행기의 이미지와 겹쳐 있다. 문득 누군가가 건물 안에서 무심코 건너편 거리를 바라보다가 길을 걸어가는 여성의 뒷모습을 쫓는 듯한 시선같이 보이기도 한다.


 

여성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을까? 그녀는 살짝 뒤를 돌아본다. 그러다 건너편 1층 건물에서 밖을 내다보는 누군가와 우연히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같아 보이는 장면이다. 이 순간, 노란색 종이비행기가 두 사람의 시선을 가로지른다. ‘찰나의 순간이다. 삶에서 이런 순간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나머지 우리의 시선이 따라가며 보았던 장면의 잔상마저 금방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삶은 계속 이어질 뿐이다. 모호함은 우연의 연속에 덮여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소설에 들어맞는 이미지는 아닐 테지만, 표지 안쪽에 실린 사진은 일곱 번째 단편 <종이비행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미지다. 책 표지 안쪽에 이런 사진을 배치한 출판사의 안목이 신선했다.

 


단편 <종이비행기>의 주요 인물은 서구적 경제 질서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싱글맘 테스다. 가장으로서 자신의 몫을 해내고자 분투하는 사람, 혹은 소시민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때는 테스가 면접을 보러가는 아침이다. 그녀는 면접에서 오랫동안 집에 있었고 다시 나가고 싶다.”(97)라며, 절박한 진실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다. 소설은 테스의 바람대로 이루어지는지는 결국 보여주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단편은 달려라 하니의 단편소설 버전이 되었을 것이다. 혹은 억척 어멈 테스 이야기가 되어버렸을 테다.


 

옮긴이가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이 불가해한 현실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247)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소설은 어느 것도 확정된 상태나 결말을 보여 주지 않는다. 또는 그러한 방향으로 가는 듯한 암시도 나오지는 않는다. 우리의 손을 떠나 날아가는 종이비행기도 우리가 어디를 날아가도록 할지 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테스의 운명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기 보다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이 단편에서는 밤에 활짝 열린 창가에 가족이 모두 모여 있는 장면이 나온다. 테스의 가족이 그녀의 남사친닉이 날린 종이비행기를 함께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부분이 인상 깊다. 종이비행기는 중력의 영향 속에서 몇 초 동안 활공한다. 비행기가 이렇게 날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공기라는 유령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감싸고 있는 존재. 언제나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공기가 있기에, 종이비행기는 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싱글맘 테스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한, 자신을 언제나 밑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가 중력을 견디며 멀리, 혹은 더 오랫동안 날아갈 수 있으려면, 이때 필요한 공기같은 것은 뭘까. 두렵고 불안하며 취약하기까지 한 우리의 삶에서 가족의 유대감같은 것은 아닐까 싶다. 가장 작은 사회적 안전망, 혹은 최후의 안전망인 가족의 존재가 여기서 더 크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 다른테스를 삶에서 버티게 해주는 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줄 수 있는 유대감같은 것일 테다. 가족을 통한 가장 작은 연대로부터 형성된 유대감이야말로, 의심의 여지없이 종이비행기가 잠시나마 날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공기와 같은 것은 아닐지. 너무 상투적인 감상인지 모르겠다. 표지에 나온 사진을 보면서 종이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함께 보는 테스 가족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책 속으로]


[1] "그냥 거기 있으면서 사람들이랑 대화하고 그들이 다치지 않게 돌보는 거야.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거야. 그게 다야."(94)

[2] "아주 오래도록 손을, 손목을, 다시 손을 그리고 얼굴을 씻고 나서, 재킷을 벗고 나서 거실로 간다."(95)

[3] "진실. 나는 그 사람들한테 진실을 말했어, 달리 뭘 말하겠어? 나는 아이가 둘 있다고, 싱글맘이라고, 정신 병동 경험이 있다고 말했어. 나는 이렇게 표현했어. 나는 오랫동안 집에 있었고 이제 다시 나가고 싶다고. 일을 하고 싶다고. 나는 말했어. 저는 씩씩해요, 저는 투지가 있어요, 저는 낙관적이에요. 저는 안정적인 사람이고 평정심을 가졌어요."(97)

[4] "가끔 나는 모든 걸 다시 분해했다가 새로 조립하고 싶어.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아냐. 하지만 이미 있는 걸 가지고 다른 걸 만든다? 글쎄, 그건 안 돼. 새미랑 루크를 봐. 나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99)

[5] "스탠의 엽서에 뭐라고 적혀 있지, 닉이 묻는다. 이 말에 두 사람은 웃을 수밖에 없다."(99)
- 내가 꼽은 소설 속의 ‘반짝 빛나는 순간’

[6] "그가 말한다. 만약에 네가 빨리 던지면, 만약에 네가 - 바로 던지면, 너는 중력을 잠시 극복할 수 있어. 삼 초 동안 활공. 그다음엔 바람을 타고 쭉 날아야 해."(99)

[7] "비행기가 밖으로 떠간다. 거리를 넘어 선로를 향해, 높은 포플러를 향해서. 선로가 희미하게 빛나고, 하얀 날개가 어둠 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듯 보인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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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12-26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은 책을 잘 안 읽으셨다고 하시는데 책을 고르시는 안목은 전혀 안 그런 거 같으십니다. 왕년에 책 깨나 읽으신것 같다능. ㅋ
책 표지 정말...!👍

레삭매냐 2023-12-26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오자마자 사서 읽기 시작은
했는데...

모다 읽지는 못했네요 아숩...
마저 찾아서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지 다짐해 봅니다. 다짐만...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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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고통을 설명할 언어는 없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을유문화사] (2023)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타인과 비교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자녀를 지켜본 몇 가지 생리적 현상이나 습관, 기질에 대해서만 적용될 뿐이다. 적어도 자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나이라면, 이미 부모의 이해 범주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0여 년 전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던 총기 난사 사건이다. 당시에 총기와 폭발물을 들었던 가해자 2명은 이 학교를 다녔던 10대 청소년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언론 매체는 가해자들을 괴물이라고 표현하며 이들의 어린 시절을 파헤쳤다.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문제가 될 만한 기록을 찾지는 못했다. 가해자들의 부모 역시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자도 아니었고, 자녀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에 대해 무관심한 냉혈한이었을까? 전혀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주변 이웃들의 평가에서도 사건의 원인이나 동기가 될 만한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뉴스를 지켜보던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무자비한 폭력이 발생한 원인을 지목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했던 기억이 난다. 무난한 환경에서 자랐던 아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사례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서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은 바로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책이다.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10대 시절 붕괴하기 직전까지 소련(현재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지역)의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고,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한 가정의 일원이다. 국경이라는 거대한 경계를 넘고 너무나 다른 삶의 조건과 마주하게 된 저자는 그만큼 외부 세계에 대해 예민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가 성장한 환경 또한 그가 본능에 가까울 만큼 인간의 삶과 운명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체득하게 한 조건은 아니었을까. 저자의 글쓰기는 그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감지하는지, 세계가 그에게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경계를 넘은 경험을 가진 사람의 낯선 글쓰기인 셈이다. 낯설지만 그만큼 굳어진 독자의 시각을 유연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저자가 만난 여러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다룬다. 때로는 고통 받는 당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그들의 내밀한 속내도 듣게 된 듯하다. 내가 이 책에서 우선 주목한 부분은, 우리의 삶이 지극히 취약하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지역에 뿌리를 두고 활동하는 변호사로서, 가난하고 미약한 이들을 위해 변론하던 밴더와의 교류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조금 더 열어 보여준다. 삶 자체가 취약한 이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묻는 이도, 들어줄 이 마저 없었다. 이들은 관공서에서 처리할 안건으로 분류되었을 뿐이다. 당사자들은 아무에게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110) 이들은 침묵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이유다. 도움이라는 이름하에 이들의 고통과 슬픔은 공개되고 관리 받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은 왜곡되고 훼손되기 시작한다. 저자가 보여주는 여러 사례들은 우리가 어느 순간에라도 삶이 철저히 망가져버릴 수도 있음을, 그리고 특히 더 취약하고 더 큰 타격을 받는 이들이 있다는 현실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저자는 이처럼 취약한 사람들, 다시 말해 벌거벗은 상태로 완전한 외로움 속에 버려진 사람들에 대해 주목한다. 저자는 취약한 이들’, 그러니까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보호를 자처한 이들로부터 배신을 겪은 이들, 상처와 슬픔이 평생 트라우마가 된 사람들, 그리고 이를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과 고립감으로 고통 받은 이들의 사연을 듣고자 했다. 그는 이들이 지닌 고립감을 우주적인 외로움’(183)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나는 여기서 취약한 이들이라고 표현했지만, 저자는 나에게 한 가지 경고를 덧붙이는 듯 했다.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194)


 

그러니까 저자가 내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지점은, 취약한 이들(사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해당되기도 한다)이 경제적 어려움만으로 죽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재난적인 어떤 상황이 닥치게 되면, 사후 발생하는 고통과 슬픔을 말하거나 풀어 놓을 기회가 없다는 이유로도 사람들은 죽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극심한 상실의 슬픔을 놓아둘 애도의 공간이 없어서, 법원이나 공권력이 멋대로 단정하고 요약해버리는 행위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대상이 없어서 죽기도 한다는 것이다. 제도적·구조적인 절차만 마련한다고 이런 상황이 해결될 수는 없다. 개인들이 하나의 처리대상이 되거나 하나의 상징에 머물지 않으려면, 이들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저자는 이를 의도적인 무지라고 말하고 있다. 애써서 묻지 않는다면 결코 조금도 알 수 없다. 인간의 취약함은 애도의 부재와 이를 말하거나 설명할 적절한 언어의 부재로 의도적인 무지가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자가 덧붙이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 처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고통에 관한한, 인간은 언제나 미처리된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재난과 같은 현실이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를 바꾸어 가며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강하게 운명에 묶여 있다는 감각, 다르게 말해 개인에게 역사가 되풀이 되는 상황은 우리를 무력감에 빠뜨리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저자는 이 과거라는 것이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244)와도 같다고 말한다. 물을 열면 아무도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언제나 존재하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유령처럼. 저자가 보기에 과거는 고체가 아니기’(252) 때문이다. “그것(과거)은 보이지 않고 냄새도 색깔도 없는, 폐 속으로 들어와 그 안을 온통 헤집어 놓는 독성 화학 기체”(252)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고통으로 내상을 입은 이들에게 과거는 트라우마의 형태로 영원히 찾아온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당사자의 슬픔과 고통을 내려놓을 애도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반복되는 과거의 습격에 조금은 다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저자의 말하기가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이 책의 특징을 어떻게 파악하며 읽어야 할지 처음엔 난감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저자의 관점을 깨닫게 된 것은 그가 타인의 삶에 벌어진 일들을, 여러 사람들과 끊임없이 지켜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이 책의 표지나 각 장의 시작마다 제시된, 각기 다른 각도로 찍힌 암석 사진들처럼 말이다. 마치 이러한 모양으로 생긴 암석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212)는 점이다. 나도 책에 소개되어 있는 다양한 사례들을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된다. 이들에 대한 인상을 규정하기 전에 뭔가 다른 이유나 원인이 있었을까?’를 의심해보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다른 사정들을 설명해주며, 나에게도 섣부른 언어로 규정하지 말고 판단중지를 먼저 요청하는 듯 했다.

 


저자는 인간의 삶에 대해 운명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전자 혹은 가정환경과 같은 조건이 운명을 정하는 결정론자도 아니다. 다만 인간은 우주 속의 고아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저자는 인간 개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만 극히 일부라도알 수 있다는 입장에 가깝다. 사실 인간에게 씌워진 굴레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우리를 줄곧 끌어당기는 중력장처럼 우리의 인생행로에도 영향을 미친다.

 


책에 소개된 사례 가운데 20세 즈음 아버지의 자살을 겪은 아들 마틴의 이야기가 있다. 저자는 마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삶, 부모의 고난이 되풀이되려는 삶과 부단히 맞서며 살아가는 인물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 같다. 심지어 유전의 힘으로 아버지와 판박이처럼 닮은 외모는 마틴이 운명에 묶여 있다는 감각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저자는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으로부터 분리되려 애쓰며 부서진 삶을 추스르는 한 남자를 지켜보며 가슴아파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조금은 다를 수 있다는 생각, 혹은 희망이 남아 있다면, 마틴이 아버지의 나이에 다다른 시점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235)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Axiomatic이다. 이 단어에는 자명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이 제목은 우리가 타인의 사정에 있어서 자명한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환기시켜주기 위한 반어법인 것이었을까 싶다. 자명해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결코 언어로 말해질 수 없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부각시켜주는 제목은 아니었을까 싶은 거다. 이 해석이 너무 억지 같다면, 조금 다르게 해석해보자.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타인의 곁에 있어주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공리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이해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타인을, 혹은 타인의 고통을 대할 때 기초가 되는 공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지극히 취약한 존재임을 우선 알아차리는 일부터 시작해볼 수 있겠다. 불시의 재난, 불시의 죽음은 대상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장 아메리가 언급한 애도와 기억의 윤리성에 대해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저자는 책에서,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92)이라고 한 아메리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 고통을 마주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 기회, 이를 통해 고통을 조금은 덜어놓을 수 있는 기회, 곧 애도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되짚어본다. 우리가 당사자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때로 우리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들의 곁에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뱉어내는 언어를 들어줄 사람 말이다. 곁에 있어주는 이들의 역할은 당사자들의 곁에서 함께 하고, 당사자들이 결코 지워낼 수 없는 고통을 결국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독자에게 고통은 언어로 번역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동물원(C)초란공(현상/아날로그인화/스캔)





"인간의 삶은 언제나 숲속의 새 두 마리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포착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본문 331면)





#고통을말하지않는법 #도서협찬 #마리아투마킨 #암실문고 #인문 #사회문화 #도서추천 #서제인번역가 #비평 #을유문화사 







[책 속으로]


[1] "잊으려 애쓴다고 정말로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와 달리 학교의 제도적 기억 속에는 자살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34)

[2] "나는 어느-청소년의 시신을 검시하는-검시관으로부터 젊은 사람들은 최종성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무도 많은 일이 시행착오일 수밖에 없는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한번 죽으면 우리는 영원히 죽은 채로 남는다는 사실을, 어떤 일들은 지울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64)

[3] "나는 우리가 왜 죽은 이들을 살려 놓으려 애쓰는지 안다. (...) 우리가 그들을 살려 놓으려 애쓰는 건 그들을 우리 곁에 두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살려면 죽은 이들을 단념하고, 그들을 보내 주고, 죽은 채로 있게 두어야만 하는 시점이 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71)
- 조앤 디디온의 말

[4] "아메리 Jean Amery는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92)

[5] "물론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만약 물어봤더라면, 저는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대답했을 거예요."(110)

[6] "인간들은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그 고통이 참을 수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모든 선택지가 사라져 버리는 순간은 언제 찾아올까? 철조망 속에 갇힌 상황에서는 어디로 움직여야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112)

[7] "소년이 처해 있던 곤경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행위 역시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그 의도적인 무지는 어느 정도는 행정 구조적 문제였고, 어느 정도는 관료주의가 지닌 문제였고, 또한 과부하에 걸려 비틀거리던 청소년 구호 체계자체의 문제이기도 ... 아니, 좀 다르게 말해 보자. 그 체계는 좆나게 많은 애들 때문에 포화상태에 다다랐고, 결국 그 애들을 인간답게 대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122)

"이 사건을 둘러싼 의도적인 무지. 이것은 제도의 실패이며 문화의 파산이다."(135)

[8] "그때 그(옐레나 포포비치)는 치안 판사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이해하게 된 게 있다고 말했다. 바로 자기 앞에 출두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그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처한 ‘위기’ 속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150)

[9] "오스트레일리아 남성들은 자동차 사고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요. 저는 이렇게 썼어요. 각자 집으로 가서 집에 있는 남자들을 끌어안아 주자고요. 그들은 종종 우리한테 속마음을 말하지도 못한다고요. 그러니까 말해 달라고 하지도 말고, 말해 줄 거라는 기대도 하지 말고 그냥 곁에 있어 주자고요."(165)
- 지역 변호사 밴더의 말

[10] "내가 ‘미처리’라는 표현을 처음 들은 건 킴벌리 지역의 사막 근처에서였다. 그곳에서 ‘미처리’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들이 사는 땅의 현실을 설명해주는 말이다. 그 땅에서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장례식이 치러진다. 살아 있는 이들에게 죽은 이들을 애도할 시간을 주지 않는 현실. 그런 현실은 내부로부터 붕괴하면서 일종의 기능 마비를 일으키며, 그 마비 또한 타르 구덩이 속에 들어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다."(169)

[11]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194)

[12] "레이먼드 게이타가 말했듯, "고통에 취약하다는 우리의 특성을 슬픔 속에서 알아채는 일"이 "죄에 어울리는 처벌을 하라"는 슬로건보다 더 나은 행동 지침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취약함. 고통에 대한 취약함. 우연에, 불운에, 유전자에, 당신이 태어난 가족에, 당신이 사는 지역에 대한 취약함."(202)

[13] "한 인간에 관한 사실들은 대개 타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중 대부분은 애초에 타인들이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무시하면 타인들은 곧 상징의 집합체로 변해 버린다.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만 골라 담은 물통으로, 일종의 도구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의 어떤 점이 우리와 다른지 알아차리는 것이며, 또한 그 다른 점을 굳이 비틀어 숭고함에 가까운 무언가로 왜곡하지 않는 것이다."(212)

[14] "우리(저자와 변호사 밴더)는 하늘에 떠 있는 한 쌍의 풍선 같다. 그 풍선 안을 채우고 있는 건 헬륨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니다.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우리를 대기 속으로 더 멀리 밀어낸다. 때가 되면 우리는 스파게티 면발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풍선 조각으로 변해 땅으로 되돌아올 것이다."(215)

[15] "‘자살 유전자’는 ‘연쇄 자살’보다는 어감 상 더 쉽게 와 닿는 표현이지만, 여전히 나는 이 단어를 접할 때마다 움찔한다. 자살이 남길 수 있는 것들을 멋대로 요약해 버리는 무리하고 어설픈 언어들은 진짜 언어가 나타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세워진 대역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리저리 목을 꼬며 기다리지만 진짜 언어는 여기 없다."(231)
- 언론이 시인 실비아 플라스와 아들 니콜러스 휴즈의 자살에 대해 ‘자살 유전자’라는 표현을 쓰며 소비하는 것에 대해 저자가 한 말.

[16] "마틴은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신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챙겨 주지만 감정적으로 곁에 있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35)
- 20세에 아버지의 자살을 경험했던 마틴의 사례.

[17] "마틴이 맞서고 있는 문제, 즉 부모의 고난이 자식에게서 다시 되풀이된다는 그 문제는 하늘의 별들이나 율법을 써넣은 서판이 전해 주는 숙명처럼 절대적이지는 않다."(239)

[18] ""과거는 현재를 빚어낸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빚어낸다? 그보다는 과거가 현재 안으로 스며들고, 물들고, 불어넣어지는 것에 더 가까울 것 같다. 과거는 고체가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냄새도 색깔도 없는, 폐 속으로 들어와 그 안을 온통 헤집어 놓는 독성 화학 기체다."(252)

[19]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에서도 곧잘 발견되는, 인간은 타인을 조금도 알아낼 수 없다는 끔찍한 사실의 피해자."(280)
-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부모와 인터뷰한 앤드류 솔로몬이 남긴 말.

[20] "동시에, 당신은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대화는 오직 몇 명의 동료 생존자들과 함께일 때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이 아는 것은 언어로 옮길 수 없고, 따라서 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전체 경험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당신이 그것을 말해 버리면 남들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당신은 말하거나 침묵하기를 스스로 택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을 배신하게 된다. (...) 이런 말하기는 사람을 소진시키고 텅 비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은 너무나도 무거운 부담을 지는 작업이며, 심지어 그 서사 자체도 극심할 정도로 가혹하다."(327)

[21] "인간의 삶은 언제나 숲속의 새 두 마리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포착(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일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언뜻 보기에는 친절하게 느껴진다)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타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가리키는,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친절한 표현이다)할 수도 없다."(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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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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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우주의 서로 다른 시간 속에 갇힌 인간의 조건들


고전환담 古傳幻談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

 



고전환담에 실린 26편의 단편소설은, 예부터 전해지는(古傳) 기록·사실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고 있다.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사실의 뼈대를 연결하며 삶의 새로운 진실을 보여준다. 크게 3부로 되어 있는 이 단편집은 전쟁과 혁명, 역사추리 소설, 사랑 이야기를 주요한 주제로 담고 있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의 운명이 투쟁이라면, 이 소설집에 대한 인상은 신화 속 시지프스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멈추는 법 없는 모든 생명 존재의 투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싶다.


 

우리 옛 역사의 한 장면을 글의 소재로 삼았다고 하면, 먼저 식상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만약 작품집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는 독자라면 우선 첫 작품 「왜장 와키자카의 고백」만이라도 읽어보라 권하겠다. 국경을 넘나들고 육신의 경계를 넘어 왜장의 시선에서 바라보았음직한 신선한 상상력이 구현되어 있다. 때로는 광대한 스케일을 배경삼아 풀어내는 저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역사적 사실과 어우러져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단편소설임을 감안하더라도 역사에 대한 저자의 조사와 섬세함은 나의 의혹을 단번에 날려버릴 만 했다. 소설을 읽고 유쾌하고 시원한 느낌을 받은, 보기 드문 독서경험이었다. 

 


나는 3부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필멸의 삶과 불멸의 삶을 꼽아보았다. 어쩌면 소설을 포함한 모든 문학이 이 두 가지 상태 사이의 긴장과 불안정함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각 존재의 본성상 현상유지를 추구한다. 이를 존재의 유지 본능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타인의 장수(현 상태의 오랜 지속)를 기원하곤 하지 않은가. 그렇다. 생명을 지닌 존재는 그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고, 이것이 존재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가 반드시 죽기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삶의 본질 속에서 이 두 가지 상태는 언제나 충돌할 수밖에 없다.


 

단편 불멸하는 고독에서 이러한 삶의 문제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사람의 수명을 알아보는 사미승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자문해본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오늘 하루를 보다 의미 있게살아낼 수 있을까? 혹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이야기 속에서 죽지 않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던 화두타는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자신의 말벗이 모두 죽어 사라지고 남은 자의 외로운 고통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화두타는 자신의 말벗을 삼고자, 화자에게 도를 닦으면 수명을 적어도 백 년은 보장하겠다고 회유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 때 화자는 자신이 죽을 날이 바로 다음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결국 화자는 난 불멸을 원치 않는다”(63)며 화두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의 삶, 즉 필멸의 삶과 불멸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소설의 주인공들이 묻는 듯하다. 단편 어떤 하루에서도 이 문제는 그대로 서사를 관통한다. 이야기는 인조반정을 배경으로 하는데, 주인공 김유는 당파 간 투쟁으로 희생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왕에 대한 반역을 꿈꾼 자였다. 하지만 복수를 실행하러 떠난 길 위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신의 전생은 이미 수많은 생명을 반복해서 죽이는 과정 속에 있던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복수를 중단함으로써 이 끝나지 않는 업보를 벗어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불멸하는 존재의 권태라는 문제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이다. 김유는 전 그런 식으로 수없는 세월을 싸우며 살았습니다. (...) 이 투쟁을 이제 멈추고 싶습니다.”(94)라고 선언하며 왕에게 복수하러 가는 도중 탈영하기에 이른다. 단군 왕검에 관련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세상의 마지막 단군도 같은 결의 주제를 보여준다. 불멸의 삶을 바라는 유한한 존재의 열망이 불멸하는 새 이름을 얻고 싶은 욕망으로 드러난 작품이라 볼 수도 있겠다. 

 


몇 편의 사례만 보아도 인간은 필멸과 불멸의 경계 사이의 어딘가에서 각자 다른 속도와 구간에 속해 끊임없이 두 경계 사이를 왕복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은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을지문덕에 관한 호방한 작품 요동을 달리는 전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특히 불교적 관점에서 언급되는데, 우리가 삶과 죽음의 중간 지역인 중유(中有)를 떠도는 영혼”(27)이라는 것이다. 이 중유의 상태를 좀 더 밝혀주는 듯한 단편 그날 밤 성불의 재구성을 보자. 이 이야기에서는 원효와 사미승 사복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데, 원효과 의상이 함께 당나라로 향하는 배를 타려 했으나, 배가 떠나기 전에 원효는 유학이 필요하지 않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신이 성불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중유의 세계로 보이는 부분을 사복에게 설명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중 하나인 기라. 그러다 가끔 두 세상이 맞물려 양쪽 사람이 만나면 막 놀라기도 하고, 또 내처럼 깨달은 자들끼리는 인사도 나누코. 부처가 별거 아이데이.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교차할 때 고 좁은 틈으로 억만 겹 대우주의 법계를 엿보면 그게 성불인 기라.”(138)


 

어떤가? 원효는 사복에게 화엄경에서 설명하는 인드라망의 우주를 설명하는 이 장면이 내게는 현대 우주론에서 말하는 다중우주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원효의 표현을 빌려 말하는 불교적 다중우주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은가. 이는 앞에서 언급한 단편 요동을 달리는 전사에서 저자가 을지문덕으로 상정한 인물 우이치 모테르가 동료 전사 너케르에게 말하는 대목을 생각나게 했다.

 

형제 아르막 너케르여. 실은 나도 그대와 같은 운명이라네. 나 역시 그대를 만나는 이 순간으로 끝없이 되돌아오고 있지. 우린 서로 다른 시간 안에 갇힌 거라네.”(30)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전쟁과 같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다르게 이 순간이야 말로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현실의 삶과 불멸의 삶이란 키워드로 소설을 읽어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작품들의 소재는 모두 오랜 역사 기록에서 나온 것이지만, 대륙을 넘나드는 작가의 상상력이 저자의 해박한 역사 지식과 어우러질 때, 현재 우리 삶의 진실도 다채롭게 탐구할 수 있음을 고전환담은 보여준다.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무척 흥미롭고 나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했다. 개인적으로는 정조를 둘러싼 정치적, 역사적 배경을 다룬 비밀 서가, 살인자를 쫓는 밤도 몰입감 있게 읽었다. 실학파와 관련한 인물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정약용, 이덕무 등의 인물이 나올 때 더 주목해서 읽게 되었다. 한편 구한말의 정치적·역사적 배경이 치밀하게 어우러지며 추리소설처럼 펼쳐진 모리스 쿠랑 이야기 역시 도중에 멈추지 못하고 읽어갔다. 마치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단편으로 읽은 것처럼 흥미로웠다.


또 페르시와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에 관련한 단편 불과 모래의 기억도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대영박물관에서 발견된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의 대부분이 신라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는 이야기는 무척 흥미를 자아낸다. 고대의 우리 조상이 페르시아와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사실 아닌가. 고대에 이야기를 소중히 생각한 누군가가 남긴 이 이야기가 이어지고 알려져 불멸의 삶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이 이야기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고전환담은 조상이 남긴 자취에 후손인 작가의 현대적 해석과 상상력이 어우러져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의 운명을, 필멸하는 현실의 삶에서 불멸의 삶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삶의 모든 이슈가 관통하고 있다. 이 사실을 음미하다보면 때론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불멸의 권태와 외로움 보다는 낫지 않을까 애써 생각해보기도 한다. 특히 작품 속의 원효가 말해주듯 우리 인간은 억만 겹의 우주 속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이를 누구나 짊어지고 살아간다. 이 지점에서 단편 시마의 계약에 언급된 한 대목이 떠오른다. 고려시대를 대표한 문호 이규보의 둘째 아들 이함이 문학의 신 시마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문재가 다소 부족한 인물로 묘사된 이함이 문학의 신 시마에게 자신도 아버지 이규보나 형 이관이 지녔던 시마의 눈을 갖고 싶다고 청하자 시마가 거절하는 대목이다.


저는 왜 안 되는 겁니까?

가질 수 있는 것만 사랑하거든. 넌 시라무렌강과 그 강 너머 더 먼 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어. 넌 집에 집착하지. (...) 땅에 집착하는 자에겐 시가 없어. 가질 수 없는 걸 사랑해야 시가 찾아와.”(152)


이 대화가 인상 깊다. 시마의 논리에 따르면 땅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대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말이다. 그럼 이번에는 가질 수 없는 것불멸로 대체해보면 어떤가. 어느 누구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인간의 조건 아래 인간이 경험하고 겪을 수 있는 모든 운명이 영원토록 갈망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시가 찾아오는 원리가 있다고 시마는 말해주는 듯 했다. 사실 시뿐만이 아니라 문학,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학문과 예술, 혹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시마가 말하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은 적어도 중요한 시 혹은 문학의 생성 원리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건 고전환담을 읽다가 문득 필멸인 존재와 그 존재의 불멸의 삶이란 키워드로 바라보며 내린 한 가지 결론이다.


생명을 지는 존재 각자가 (다중 우주 속의)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깨닫는다면, 오히려 우리가 시간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보다 겸손해지고 보다 편해지지 지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러한 진실을 깨달은 인물 사복(단편 그날 밤 성불의 재구성에서 원효를 따르던 사미승)이 말한 한 마디가 오늘 나의 결론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복이 전 맘 편히 이 세상에서 놀아예. 스님도 확 다른 사람이 되셨으니 저랑 노시면 안 됩니꺼?”(142)라고 말한 대목. 결국 인간이란 필멸과 불멸의 경계 사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왕복하며, 이 중유(中有)의 세계를 떠도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찬란한 현재의 순간을 그대로 즐길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문득 상상의 시공간 속에서 원효와 사복이 함께 놀자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면도 떠올려보았다. 사복의 노는 마음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 했다. 내게 고전환담은 역사의 빈틈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채우며 낯선 진실을 찾아가는 모험을 오롯이 독자에게 선사한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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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 가장 진실한 허구, 퍼렇게 빛나는 문장들
존 밴빌 지음, 이수경 옮김 / 이터널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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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삶 사이사이를 채우는 아일랜드 작가 존 밴빌의 탐구와 상상력을 따라 가고 싶었습니다! 이제 책이 도착했고, 이제 저는 호기심의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기대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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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 탄생 193주년에

-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

 

크리스티나 로세티 지음 | 김군 옮김 | [별책부록] | (2023)

 



시를 잘 감상하지 못하면서도 기회만 되면 시집을 들쳐보고 시 주변을 기웃거려보는 것은 아마도 갈증을 느끼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창 시절에 국어와 문학이라면 학을 떼던 것을 생각하면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 분야는 내게 언제나 가까이하고 싶은 분야다. 그나마 성인이 되어 늦게라도 읽기 시작한 책이 있으니, 언젠가는 문학에 더 가까이 갈 기회를 엿본다.


 

나는 서점의 매장에서 책을 구태여 들쳐보지 않더라도 책의 제목과 표지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책의 디자인을 구경하고, 제목을 곱씹어 보면서 책의 내용을 상상해보는 시간이 재미있는 것이다. 대체로 사진을 책의 표지로 삼은 디자인은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드물게 표지로 사용된 사진과 책이 잘 어울린다고 느끼는 책을 만나면 반갑기도하다. 그림책의 경우, 특히 번역된 도서는 원작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종이의 선택과 글꼴의 선택을 눈여겨보기도 한다. 작은 독립 책방에서 책을 펼쳐 읽지도 않고 책만 멀뚱히 지켜보다 이동하는 중년 남자가 있다면 아마도 나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라는 작은 책도 이만큼 작은 독립 서점에서 한 달 전 즈음 이렇게 만났다. 로세티의 시 몇 편을 읽어보고 시인에 대해 알아보다가 오늘(20231205)이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탄생 193주년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사실 로세티라는 이름은 그동안 붉은 머리의 여인을 그린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단테 알레기에리의 새로운 인생의 표지 그림을 그린 사람, 또 몽스북에서 출간된 사랑의 쓸모의 표지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지점이 여기였다. 이 그림들을 그린 사람은 로세티가 맞지만 화가의 정확한 이름은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로 남자였다. 흥미로운건 그가 바로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큰 오빠였다는 점이다.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단테이가 4남매인 집안의 첫째였고, 시인 크리스티나가 막내였다. 큰 오빠 단테이는 문학사에서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지만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라고 분류된 당대의 몇몇 문인들의 모임에 속해있었다고 한다. 로세티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탈리아 가문인 로세티 집안이 영시를 쓰고 영어로 작품 창작을 한 것이 흥미로웠는데, 로세티 집안은 과거에 정치적 이유로 영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문학적 소양을 중시하여, 일상이 문학을 가까이하고 글쓰기를 장려하던 집안에서 크리스티나 로세티가 나올 수 있었다. 그녀가 193년 전 오늘,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난 배경이다.





















 

이번에 읽은 작은 시집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는 영문학을 공부한 '김군'이라는 필명의 번역가가 로세티의 시를 선별하여 번역했다. 이 책에 소개된 시의 대부분이 민음사판 고블린 도깨비 시장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이 책에 주목하게 되는 특징 하나가 있다. 바로 영국의 문인 버지니아 울프가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30125일을 기리며 쓴 산문 한 편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글의 제목이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였던 것. 이 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메리 샌더스라는 작가가 쓴 로세티 평전 The Life of Christina Rossetti(1930)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리뷰인 셈이다.



 

누구나 그렇게 느끼겠지만, 전기biography 읽기에는 저항할 수 없는 큰 매력이 있다. 주의 깊게 쓰인, 그래서 상당히 만족할 만한 샌더스의 책을 한 장 한 장 펼치자마자 오랜 착각이 우리를 엄습해 온다. 어떤 마법 통에 담겨 있듯 여기에 과거와 그 안에서 사는 모든 것이 신비롭게 봉인되어 있다.”(162p,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


 

자신만의 방에 앉아 100년 전에 태어났던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전기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었을 버지니아 울프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 리뷰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평전의 저자 샌더스가 쓴 로세티에 대한 인상을 인용하는 대목이 나온다.

 


크지 않은 몸에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갑자기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방 한가운데에 섰다. 이윽고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 I am Christina Rossetti'라고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엄숙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했다. 그리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170p,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에서 재인용)


 

버지니아 울프는 이 글에서 조용하고 원칙에 충실한 소녀였을 로세티의 모습을 상상한다. 파티라면 질색하고, 언제나 수수한 옷만 입고 다녔으며, 자신은 글을 쓰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던 한 젊은 시인의 모습을 말이다. 로세티는 사람을 피해 다니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에 둘러싸여 행복했던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평생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만큼 그녀의 작품에는 종교적 감수성과 분리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를 소개하고 번역한 김군의 소개에 따르면, 로세티는 낭만주의 시, 어린이를 위한 시, 종교 시 등 다양한 경향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여기에 종교 산문이나 소설 창작에도 힘썼다고 한다.


 

올 가을에 출간된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을 구매하기 전에 나는 로세티가 어린이를 위해 쓴 시집 Sing-Song: A Nursery Rhyme Book을 이전에 먼저 구입했었다. 아직 나는 시 읽기가 익숙하지 않지만, 어린이를 위한 시다보니 단어나 구조가 어렵지 않고 간결한 반면, 시어의 리듬감을 보다 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조금만 읽어보아도 상당히 규칙적인 운(rhyme)과 언어유희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아주 간결한 문장들이지만, 단어의 소리와 의미가 바로 그 자리에서 조응하도록 다듬은 감각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보다 긴 시 고블린 시장 역시 극도로 간결하게 다듬고 선별한 시어가 배치되어 있는 인상을 준다. 환상 동화와 같은 이야기 구조가 상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민음사에서 나온 고블린 도깨비 시장은 보다 많은 로세티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로세티의 큰 오빠인 화가 단테 로세티의 그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로세티 남매의 재능을 보다 실감나게 즐길 수 있다. 단테 로세티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붉은 머리의 여성은 누구를 모델로 그렸을까 궁금한 적이 있는데, 그의 두 여동생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여러 여성들의 초상 가운데 적어도 동생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얼굴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확실히 이탈리아인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올 법한 모습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오늘은 시인 우연히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탄생 193주년임을 알게 되어 시인과 관련한 시집, 관련 도서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평생 깊은 신앙심을 지녔으며 검은색 옷을 즐겨 입었다는 크리스티나를 생각하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본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담은 영화 <조용한 열정 A Quiet Passion>이 생각났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남성중심적인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저항했던 디킨슨이 평생 흰 옷을 입었던 것, 나아가 죽어서도 흰 옷을 입고 땅에 묻혔던 시인임이 기억났다. 여러 면에서 로세티와 대비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지금 검색해보니 에밀리 디킨슨이 크리스티나와 같은 해인 1830년인 것을 알았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긴 했지만, 동갑내기 시인으로서 두 사람의 삶과 시를 좀 더 알아 가면 좋을 것 같다. 김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번역가가 앞으로 더 로세티나 에밀리 디킨슨의 시와 같은 영문학 작품을 소개해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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