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와 사회적 죽음
올랜도 패터슨 지음, 김혁.류상윤 옮김 / 이학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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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렸는데 마침내 나왔군요. 노예제도의 오랜 역사에 대한 책 같아 참여했습니다. 19세기 조선의 노비 인구 비율은 19세기 노예제 의존도가 최고조에 달했던 미국 남부 오예 인구 비율보다 높았다는 대목부터 흥미를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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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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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꾼에 사는 세상을 꿈꾸며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2022)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상상을 해본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이하 해방일지)의 화자(아리)의 아버지가 아리를 번쩍 들어 올려 목말을 태우고 어머니 마중 나가던 순간. 화자의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입산하기 전, 사시도 아니었던 10대의 의기양양한 아버지의 모습을 사진에서 확인하던 장면처럼 말이다. 내게도 아리처럼 나의 전부였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목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해방일지를 읽고 나니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이 좀 더 너그러워질 수는 있겠다 싶었다.


 

정지아의 소설 해방일지는 어느 노동절 아침, 과거에 구례 지역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여든 두 살의 남자 고상욱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이 남자의 딸, 그러니까 빨치산의 딸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조문 온 사람들을 처음 마주하며, 굵거나 가늘게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로부터 비로소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하게 된다. 결국 화자는 빨치산 아버지가 아닌, 나의 아버지를 찾게 되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1948년의 여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아리의 아버지는 이 사건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곧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때 고문후유증으로 사시가 되었다. 이는 개인에게 드리워진 우리 현대사의 상흔이었다. 아버지의 사시는 시대와 반목하고 시대에 부적합했던, 한 남자의 운명을 보여주는 듯했다. 사시의 특징 하나는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타인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6년 동안의 수감 후 출소하는 날 함께 찍었던 가족사진에서도 어딘가를 응시하지만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불분명한 시선을, 딸은 기억해냈다. 아버지는 이제 곁에 없었지만 사진 속 아버지의 골똘한 응시는 내게 이렇게 묻는 듯했다. ‘너희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 라고. 소설을 읽는 동안 이 질문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다.


 

장례식장에 조문 온 사람들은 아버지의 생전에 어떠한 식으로든 그와 얽히고 엮인 인연들이었다. 70년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의 동생(작은아버지)은 망자의 영정을 마주보게 되었다. 여기에 빨치산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창창한 미래가 족쇄 채워진 삶을 살아야 했던 아리의 사촌 오빠 길수, 빨치산 동료의 동생으로 월남전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온 절름발이 노인은, 이들이 지나온 이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증언한다. 물론 아버지의 관계망에는 안쓰럽고 애처로운 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심지어 목숨을 살려준 인연도 있었다. 아버지의 담배 친구였던 슈퍼마켓집 10대 소녀도 조문을 와 눈물을 훔치는 기이한 상황은, ‘빨치산의 딸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숨은 세계를 보여준다.


 

이렇듯 화자가 확인하는 아버지의 여러 인연들은 그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촘촘한 그물망이었다. 이 관계의 그물망에는 무참한 시절,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어 낸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득했다. 아리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깔끔하고 매끄러운 인연이 아니라, 질퍽하고 끈적거리며 질긴 인연들의 세계가 아버지의 세계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온 구례라는 상징적인 장소는, 오랜 인연이 만들어 온 작은 감옥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 (...) 질기고 질긴 마음,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이어진 세계이기도 했다. 부모 세대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그랬다. 이렇듯 잘 보이지 않는 인연들의 그물망으로 서로 돕고 의지하며 때론 서로 일으켜주며 살아온 세계를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197)던 심정으로 읽었던 것이다.


 

화자 아리는 장례식장에서 비로소 제대로 마주하게 된 아버지의 인연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빨치산의 딸임을 항상 억울해했던 만큼 아리는 이제 아버지의 인연들 각자의 사정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나아가 이들로부터 결국 아버지의 수많은 얼굴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혁명가 아버지, 경우 바른 아버지를 넘어, 어머니에게 하자고 조르기도 했던 인간아버지의 모습을, 따스해진 유골을 통해 느꼈다. ‘생각이 다르면 안 보면 되지, 맨날 싸우면서 왜 맨날 같이 놀아요?’라고 묻는 딸에게 늘 해주는 아버지의 말은 긍게 사램이제였다.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 용서도 한다”(138)는 아버지는 늘 누군가의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아버지의 이 하염없음, 신념보다는 사람의 도리로서 그러했다. 그가 죽는 날까지 인간임을 잃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마주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게 된 시절이다. 다시 소설을 읽는 동안 아버지의 초점 없는 시선을 환기해본다. 어딘가에 멈추지 못하고, 머물지 못했던 가족사진 속 그의 시선을. 우린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또 우린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까? 이들은 뚜렷한 정답이 없는 물음이었지만, 해답의 실마리는 보인다. 한때 서로 총을 겨누기도 했던 박선생과 아버지의 공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상대방도 나와 같은 인간임을 잊지 않는 일, 또 아버지가 말한 사람의 도리이기도 하다. 완전무결하지 않은 나,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하지 않은 상대방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을 간직하는 일. 아버지의 인연들이 응시하는 지점에는 바로 이렇게 인간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었다. 이는 아버지의 동창 박한후 선생의 한 마디, “항꾼에(함께) ... 올라네”(50)에 담겨 있었다. 아리에게 아버지 없는 노동절의 아침은 꿈결처럼 낯설었을 것 같다. 대신 아리는 이제 항꾼에 사는 세상을 새롭게 꿈꾸기 시작했을 테다.





[책속으로]

[1] "작은아버지의 사정은 작은아버지의 사정이지,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모르쇠로 딴 데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42) - P42

[2] "항꾼에, 올라네, 말 사이의 짧은 침묵이 마음에 얹혔다. 저런 말이 하염없이 인생을 살았던 한 남자의 애틋한 정일지 몰랐다."(50) - P50

[3]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 긍게 사램이제. (...)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138) - P138

[4] "무엇에도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가 몇마디 말로 정의해준다 한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147) - P147

[5]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일지도 모른다."(163) - P163

[6]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181) - P181

[7]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ㄴ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197) - P197

[8]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198) - P198

[9]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 - P231

[10]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252) - P252

[11]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265) [마지막 문장] - P265

[12] "사램이 오죽하면 글것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을 받이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268) [작가의 말 중에서]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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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와 베타 (반양장)
로저 젤라즈니 지음, 조호근 옮김 / 데이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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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데미우르고스의 인간-되기 여정

로저 젤라즈니의 프로스트와 베타(2025)

 




SF장르의 거장 아서 C. 클라크는 문학 장르로서의 판타지와 SF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SF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다루지만, 판타지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을 다룬다고 말이다. 달리 말하면 SF는 주로 과학적 법칙이나 원리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세계를 다룬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또한 과학기술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이 디스토피아적인 작품이 많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아마도 작가의 비판적 의식과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작품에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SF의 거장이자 시인이었던 로저 젤라즈니의 단편 프로스트와 베타역시 다소 암울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인류가 핵전쟁으로 멸망한 이후의 세계, 인간 없는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다소 암울한 배경에서 출발하지만. 전개 과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여기 프로스트라는 이름의 의식을 지닌 기계(혹은 AI 로봇)가 인간 없는 지구의 북반구를 관할한다. 남반구를 관할하는 기계는 베타-머신이라 불렸다. 프로스트는 북극점에 머물며 하늘 위의 영구 궤도에서 돌고 있는 솔컴이라는 기계의 명령만을 받는다. 솔컴은 인간이 멸망할 경우 지구 재건 계획을 인간으로부터 위임받은 기계다. 만약 솔컴이 재건 계획을 수행하기 어려워지면 그 권한은 깊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는 디브컴이 넘겨 받게 되어 있었다. 디브컴은 솔컴의 대체자였다.


 

오래 전 인간의 핵무기에 솔컴이 타격을 받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재건 작업 재개를 위해 디브컴이 활성화되었다. 문제는 디브컴이 재건 작업을 지휘하기 시작했지만, 솔컴의 타격이 크지 않아 스스로 손상을 복구하여 재건 작업을 재개한 상황이었다. 지구의 재건 작업을 맡은 지휘자가 이제 둘이 되었기에 지휘 체계에 혼선이 있을 수밖에. 이들은 각자의 세력을 키워 서로의 재건 작업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지구에 인간이 없다보니 이 두 존재의 지휘권 분쟁을 정리할 제3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인간의 명령만을 받는다는 모순과 직면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단연 프로스트다. 그에게는 아주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기계가 취향을 가졌다는 점이다. 어떤 대상이나 활동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취미 대상은 이미 멸망한 인간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도도새의 흔적을 찾는 생물학자처럼 말이다. 프로스트는 어느 날 찾아온 디브컴의 수하 모르델로부터 인간의 유물인 책을 입수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그의 인간 탐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모르델의 도움으로 지구에 남아 있는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스캔한 프로스트는 이제 인간의 본성을 알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친다.

 


하지만 모르델은 오래 전 인간과 대화를 해본 적이 있던 기계였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계측을 알지 못했지만, 기계의 도움으로는 계측할 수 있었던 존재라고 프로스트에게 알려준다. 이후 이어지는 두 기계의 만남으로부터 본격적인 인간 탐구가 진행된다. 모르델에 따르면, 기계는 세계를 측정하고 수치화된 정보를 데이터로 구조화할 수 있지만, 얼음이 차갑다와 같은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없는 존재다. 이처럼 인간만이 지니는 특성이 유일한 화두가 되면서 인간에게는 기분과 감정도 있었음을 이야기하지만, 이를 지금껏 스캔한 정보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면 자신도 차가움을 인식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온 우주의 모든 데이터를 모아도 당신(프로스트)은 인간이 될 수 없을 것”(21)이라는 모르델의 말도 순순히 동의하지 않은 프로스트는 데이터 수집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를테면 프로스트는 취향과 고집(의지)을 지닌 기계였던 셈이다.


 

이후 프로스트는 인간의 을 닮은 감각 기관을 만들어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를 하거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나는 인간이 지닌 취미/취향은 보다 중립적인 의미에서 광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하는데, 프로스트는 말하자면 이런 인간적인 면모에 상당히 다가간 기계였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관할 구역도 아닌 남반구의 브라이트 디파일까지 방문하여 인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곳은 핵전쟁으로 절멸한 인간의 마지막 도시로, 안데스 산맥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프로스트는 이곳을 다녀온 후 여러 가지 조각 작품도 만들어보는 데, 인간의 미적 취향에 대한 탐구행위인 셈이다. 그는 단순한 모방 작업을 통해서도 프로스트는 예술이 무엇인지,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뚜렷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인간은 단지 방대한 정보의 총합도, 감각 기관을 통한 계측 정보의 방대한 총체도 아니었던 것이다. 감각만으로 인간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북극점에 머무는 프로스트가 얼음층 밑에서 발굴한 인간의 시체를 통해 생명을 품은 점을 실험실에서 배양하는 설정은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프로스트의 의도는 결국 인간이 직접 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토록 집요한 기계라니, 분명 무모한 목표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집요함, 혹은 광기를 가진 기계라 할만 했다. 이제 프로스트는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또 모르델과 대화를 통해 인간성의 본질은 인간의 생리 구조에서 비롯된다.”(65)는 결론을 얻었다. 달리 말하면, ‘을 가진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프로스트에게 명령을 내리던 솔컴의 반대, 그리고 프로스트의 인간-되기가 실패할 경우 디브컴에게 데리고 갈 검은 로봇을 대동한 모르델.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로스트는 마침내 인간 프로스트로 태어난다. 제대로 서지 못해 실험대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기에 이른다. “나는...두렵다라고 첫 마디를 내뱉었지만, 그가 정말 인간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프로스트의 변신을 지켜본 모르델과 베타 머신은 프로스트가 인간이라 주장했다. “그는 계측할 수 없는 개념인 두려움과 절망을 아는 존재요. 프로스트는 인간이요.”,“그는 탄생의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니다.”(75)라고 말이다. 이제 인간 프로스트는 감각마저 더 이상 계측할 수 없이 부정확해졌다.


 

그렇다면 저자인 젤라즈니는 인간성의 본질을 두려움과 절망의 인식 여부에 두었던 것일까? 인간의 이러한 특징은 인간이 어떤 정보의 총합, 혹은 총체가 아니라 감정과 더 많이 결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은 인간에 대해 매우 중요한 단서를 환기한다. 계측하고 수치화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생리적 구조, 즉 몸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달한 단계의 AI라고 해도 몸과 결부된 의식이 없는 존재는 결국 기계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몸이 전제되어야만 이와 결합된 의식이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몸은, 그리고 이와 결합된 의식은 주체의 정체성 형성의 근간이라는 해석을 더해본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본질로 거론된 두려움과 절망이라는 감정은 몸과 의식의 상호작용을 먼저 겪어야 가능하다고 본 것 같다. 이제 보니 프로스트는 취향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고자 한 용기와 인내심을 가진 기계이기도 했다.


 

프로스트와 더불어 주목한 캐릭터는 남반구를 주재하던 베타 머신이다. 그는 허락 없이 남반구에 들어온 프로스트의 인간 탐구 과정에 흥미를 느낀 듯하다. 프로스트와의 대화가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짐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베타는 프로스트의 인간-되기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인간 프로스트가 인간임을 인정하고 지지했던 기계다. 이후 인간 프로스트의 요청으로 둘은 인류가 멸망한 최후의 장소 브라이트 디파일에서 만날 것이었다. 소설의 마무리에서 베타는 그녀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프로스트의 이브로 탄생하는 것일 게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사라진 그라운드 제로에서, 인간 프로스트와 베타(AI 기계)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예비하는 설정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 프로스트와 베타를 신인류의 조상으로서 ‘AI 데미우르고스라 불러본다. 데미우르고스는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를 만든 신으로 등장한다. 인류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바로 그 장소에서 그녀로 거듭나는 프로스트와 베타는, 신인류의 아담과 이브로서 세계를 다시 설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인류가 멸망한 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 않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프로스트의 인간-되기여정은 인간다움의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해준다. 최근 인간 vs. 기계라는 대립구도로 인간에 대한 기계능력의 우월함을 비교하는 사례를 많이 접한다. 특정한 기능 영역에서 이제 기계/AI와 경쟁하여 인간이 이길 방도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에게 지워진 논리, 책임, 의무만이 아니라 두려움, 절망 그리고 자부심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인간이 이런 존재라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새롭게 곱씹어본 독서였다.





[책속으로]

[1] "그들은 그를 프로스트라 불렀다. 솔컴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프로스트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대하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5, 첫 문장)

"그들은 그를 프로스트라 불렀다. 그들은 그녀를 베타라 불렀다."(79, 마지막 문장) - P5

[2] "그의 취미는 인간이었다."(8) - P8

[3] "내가 곧 논리다."(13)

"인간은 논리를 창조했다."(14, 솔컴의 말) - P14

[3]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본성을 지녔고. (...) 인간은 계측을 모르는 존재였다오."(18, 모르델의 말) - P18

[4] "인간에게는 기분과 감정이 존재했소."(20)

"감정에는 환산계수가 존재하지 않소."(21, 모르델의 말) - P21

[5] "기계란 인간에 비하자면 안팎이 뒤집힌 존재요. 기계는 인간과는 달리 과정의 세부 사항을 서술할 수 있지만, 인간처럼 그 과정 장체를 경험할 수는 없소. (...) 온 우주의 모든 데이터를 모아도 당신은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오, 강대한 프로스트여."(21, 모르델의 말) - P21

[6] "나는 그 인간에게서 유래한 파괴된 상징 살해자이자 고대의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 나는 지구의 마지막 인간을 파쇄했다. 고의로 한 일은 아니었다."(38, 광석 파쇄기의 말) - P38

[7] "저는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으러 왔습니다."(48) - P48

[8] "나 자신이다."(51, 자신을 모방한 조각을 만든 프로스트의 말) - P51

[9] "당신은 인간의 논리적 피조물이오. 예술은 비논리요."(55, 모르델) - P55

[10]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프로스트?
나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64, 프로스트와 베타의 대화)

"이것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입니다."(65, 프로스트)

"나는 ... 그저... 인간이 될 겁니다."(67, 프로스트) - P67

[11] "... 나는... 두렵다."(72, 인간 프로스트의 첫 마디) - P72

[12] "두려움을 아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73, 솔컴의 말)

"인간 외에 절망을 아는 존재가 또 있겠습니까?"(74, 베타 머신의 말)

"그는 계측할 수 없는 개념인 두려움과 절망을 아는 존재요. 프로스트는 인간이오."(75, 모르델의 말) - P75

[13] "내가 아는 것은 계측과 ... 의무뿐이오."(76, 모르델의 말) - P76

[14] "그(인간 프로스트)는 더 이상 예전처럼 계측을 알지 못했다."(77)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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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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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개별성을 잃는다면, 우리는/나는 누구인가?

- 우리들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6/2006)

 



매일 아침 육륜(六輪)의 정확성으로 동일한 시간, 동일한 분에 우리 -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18)


 

29세기의 지구를 지배하는 단일제국의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다. 매일 오전 7시에 단일제국 찬가를 합창하며 기상한다. 이들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집에서 살아가는 반면, ‘녹색의 벽너머에는 불투명한 고대관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다. 이곳은 200년에 걸친 도시와 농촌 사이의 전쟁으로 삶의 공간이 파괴된 곳이다. 하지만 단일제국의 하루는 일사분란하다. 마치 여섯 개의 바퀴에 의지한 채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거대한 증기 기관차처럼 말이다. 이들의 취침 시간은 정확히 222분의 1(오후 1030)이다. 그러고 보니 이들의 생활 패턴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군 생활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풍경을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은 디스토피아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당시 36세의 젊은 작가는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20년에 집필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작품 전체를 통해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이 전면에 등장하기에 당시 러시아 국내에서 출간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에 작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스탈린 집권 이전에 집필되었기에,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 보다는, 경제 체제의 지배와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독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특히 거대한 생산 라인의 부품처럼 최대의 효율성을 위해 일하도록 길들여진구성원들의 소외와 자유의 박탈 문제를 꽤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자본을 가진 거대 기업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막강해진 지금 시대의 현실과 더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일제국의 구성원들은 녹색의 벽 너머의 인간들처럼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거대한 유리 반구로 경계 지워져 있는 이 곳에서 이름 대신 여자는 알파벳 모음, 남자는 자음 한 자로 시작하는 번호로 불린다. 이를테면, 소설의 화자는 D-503이고, 화자와 맺어진연인은 O-90으로 불리는 식이다. 이 곳의 구성원들은 개인성 자체를 의식하도록 길들여진 듯하다. 획일적이고 평균적인 존재로 살아갈 뿐이다. 반면 단일제국을 지배하는 존재는 번호 대신 은혜로운 분으로 불린다. 이는 특정한 이름이 부여된 인간과 달리, 막연하고 불가해한 이름으로 불림으로서 스스로를 구별 짓고 있다.


 

우리는 심지어 생각까지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중의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동일한 것이다.”(12) 그러므로 각자가 자각하는 자신은 언제나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닌”(8) 상태에 머물 뿐이다.


 

수백 년 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인간들의 고대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처럼 건물들이 불투명하다. 반면 단일제국의 건물들은 모두 투명한유리로 되어 있다. 상상이 되는가? 7시에 기상하여 눈길을 옆으로 돌리면 옆집 사람이 무엇을 하는 지 볼 수 있고, 때론 눈길도 마주친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는평소에 사생활없이 살아간다. , 사랑을 나눌 때에만 국가에 신고를 하고 이를 증명하는 분홍색 감찰을 얻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때에야 비로소 커튼을 내릴 수 있는 허가가 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사람들은 성생활까지도 국가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는데 익숙하다. 나아가 사랑에 있어서 희열(분모)/질투(분자)로 정의되는 행복의 공식에서, 질투를 무한히 작게 만들면 행복을 무한히 증대시킬 수 있다는, 기계적이고 우려스러운 믿음을 신봉한다. 이때 질투를 무한히 작게 만드는 방법으로서 국가는 모든 파트너의 자유로운 공유를 제도화한 것이다. 100여 년 전의 소설 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제도가 보다 구체적이고 파격적으로 설정되어 이어지는 모습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사람과 깊이 맺는 인간적인 관계가 오히려 의심스럽고 불순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인 D-503은 단일제국의 수학자이면서, 건조중인 우주선 인쩨그랄의 조선 담당 기사이다. 학창 시절 친구이자 시인이기도 한 흑인 R-13은 여인 O-90와도 파트너다. 곧 이 세 사람은 삼각관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인간들과는 달리 이 세 명 사이에는 서로에게 질투를 품지는 않는다. 화자는 오히려 자신들의 관계를 완벽한 삼각형이라고 만족하기까지 한다. 이들 각자는 단일제국의 업무를 분담하는 개미혹은 거대한 기계의 규격 부품과 같은 의무를 다하고자 할뿐이다.


 

단일제국의 철학은 테일러 주의(Tayorism)와 포드주의(Fordism)이라는 표현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메커니즘의 아름다움이란 진자와 같이 정확하고 불변하는 리듬에 있다. 그러나 사실 어려서부터 테일러 시스템에 의해 길러진 당신들은 진자처럼 정확하게 되지 않았는가? (...) 메커니즘에는 환각증이 없다.”(175) 단일제국에 스며들어 있는 공기에서는 미래와 이성에 대한 낙관을, 오차 없는 기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감지할 수 있다. 생산성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들(그러니까 각각의 번호들)은 밤에 반드시 잠을 자야 한다. 이것은 의무이기에, 밤에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것은 심지어 범죄가 된다. 이 단일제국의 번호들에게는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의무는 인간다운 생활과 행복 추구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생산 목표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개인의 개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와 달리 영혼이 내면에 형성된 번호들,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여겨지는 꿈을 꾼 이들’, 제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불순분자들환각증을 가진 사람들로 진단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단일제국은 이들에 대한 처리방법을 알고 있다. 환각증을 가진 사람들은 소위 위대한 수술을 받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수술이란, 간단하다. 엑스레이로 대뇌 하부의 뇌신경 마디를 3회에 걸쳐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수술 받은 번호들은 결국 화자처럼,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을 가진 본래의D-503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단일제국의 번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체의 일부로서 스스로를 자각하는 데 머문다. 어쩌면 화자가 건조에 참여중인 우주선 인쩨그랄의 이름도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이 명칭은 영어의 인티그럴(integral)에 해당할 텐데, 이 용어야말로 전체의 일부로서 필요불가결한’, ‘완전한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 분수(fraction)에 대항하는 정수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인티그럴총체라는 의미나 적분, 혹은 적분 기호로의 의미도 함의한다는 점에서 우주선 인쩨그랄의 명칭 하나에도 소설 전반이나 화자와 관계된 다의적인 상징성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은 다양한 상징성을 구현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수 있는 특징은, 화자 D-503의 의식 변화다. 그는 동질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어느 순간 점점 더 혼자됨을 자각해간다. ‘나는 혼자다.’라고 생각하는 장면은 꽤 많이 반복된다. 그리고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내가 정말 나인지 알 수 있다면.”(69)이라고 말할 정도로 화자의 내면은 자아분열에 가까운 균열과 정처 없음을 경험한다. 결국 그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의식은 질병임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고유한 개인으로 드러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사회의 관습이라는 것이 그렇듯, 관습의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단일제국의 의사는 화자의 내부에 영혼이 형성된 것이 틀림없으며, 자연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린다. 따라서 이 환각증을 제거하려면 수술을 받는 길밖에 없다는 처방을 내린다. 이 수술은 앞에서 언급한 신경 마디를 태우는 수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진단에도 화자 D-503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의식하고 결국 나는 단독체”(153)라는 자각에 이르는 것이다.


 

화자가 스스로를 단독체로 자각하는 분열과 고뇌의 양상은 화자가 여성 I-110과 만난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I는 단일제국의 구성원들에게 존중을 받는 인물이지만, 벽 너머 인간들의 장소인 불투명한 고대관에서 금지된 술과 담배를 하며 화자를 유혹한다. 물론 화자를 유혹한 주된 이유는 화자가 참여하는 우주선 인쩨그랄을 탈취하고자 하는 혁명 활동의 포섭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I는 혁명 세력의 일원이었다. 우주선 인쩨그랄을 탈취하여 단일제국의 우주 진출을 막으려는 계획에 참여해왔던 것이다.

 


소설에서 예기치 못한 반전을 꼽는다면, I가 참여하는 혁명 활동이 다이나믹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흐지부지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I에 단단히 빠져 있던 화자는 혁명 활동에 참여하는 듯 했지만, ‘인쩨그랄탈취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며, 결국 어처구니없이 실패하고 만다. 급기야 화자 D-503은 국가로부터 수술까지 받아 마치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다. 화자는 단일제국의 충실한 개인이 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내게는 극적인 반전도, 기대도 개의치 않는 듯한 반전이었지만 결국은 디스토피아적인 마무리다. 마치 녹색의 벽너머 인간의 세계로 넘어갈 것만 같았던 화자가 다시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고 은혜로운 분의 영향력 아래 복귀하는 설정. 내겐 오히려 상투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현실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지만, 현실에서 패배하는 개인의 모습을 통해 어쩌면 오히려 더 실감나는 정서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 자먀찐은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전체주의적 사회 속 개인의 문제를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나 된 전체로서의 개인을 강요하는 공동체에서 오히려 극도로 소외된 인간 존재에 대해 고찰했다. 5월의, 제국 상공의 푸른 하늘과 녹색의 벽’, 그리고 노란 꽃가루가 넘어오는 인간들의 사회, 불투명한 고대관의 모습을 상상하다보니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렸던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초기 작품을 떠올렸다. 특히 키리코의 그림 이탈리아 광장’(1913)처럼 고독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혹은 그의 그림 가운데 마찬가지로 인기척 없는 광장 풍경을 담은 그림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소설 속의 묘사처럼, ‘마졸리카 도자기를 닮은 파란 하늘 아래 누런 흙바닥이 있는 광장,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원형의 성이 있는 풍경처럼 말이다. 그리고 늦은 오후인 듯 길게 들어진 동상의 그림자. 그림의 광장은 소설에서 불투명한 건물이 늘어서 있는 고대관의 모습을 닮은 듯했다. 인기척뿐만 아니라 사람이 현재 살고 있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 왠지 모르게 황량하고 고독해 보이는 세계,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이 팽배한 그림이 소설의 분위기와도 꽤나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비밀 없이 모든 것이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는 작품 속의 사회에서 개인은 균일한 부품으로, 전체의 일부로서만 존재한다. 투명한 다이아몬드처럼 말이다. 반면 녹색의 벽너머의 인간 거주 구역에서 모든 건물은 불투명하다. 이들의 존재 조건은 불투명한 흑연을 닮아 있다. 하지만 이로써 각자에게는 사생활이란 것이 생겨나고, 이로부터 사람들은 혼자됨의 시간과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일단 개인성을 자각하게 되면, 그는 단독체로서 다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테다. 화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혼자됨을 자각하는 인물이었다. 인간이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존재이자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이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 그리고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들이 비록 실수하고 실패하며 방황을 수반하더라도 자신을 객관화하고 타자에 보다 더 공감하고 연민할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존재의 불투명성은 타자를 바라보는 마음가짐을 보다 겸손하게 하고, 타자를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극단적이고 경직된 도덕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개개인이 숨 쉴 여지를 남겨 놓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전체와 개인성의 발현, 소외와 고립, 그리고 자유의 문제를 견주어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1]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니다."(8) - P8

[2] "‘녹색의 벽’ 너머, 보이지 않는 황량한 평원에서 달콤한 황색의 꽃가루가 바람에 실려 온다."(9) - P9

[3] "우리는 심지어 생각까지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 중의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동일한 것이다."(12) - P12

[4] "매일 아침 육륜의 정확성으로 동일한 시간, 동일한 분에 우리 -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18) - P18

[5] "국가(인류)는 한 개인의 살인은 금지했으되, 수백만을 절반 정도 죽이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 즉 인간 생명의 합산을 50년 축소시키는 것은 범죄이지만 인간 생명의 합산을 5천만 년 축소시키는 것은 범죄가 아니었다는 얘기다."(19) - P19

[6] "다시 말해서 사랑이 조직화되고 수학화된 것이다. (...) 모든 번호에게는 다른 어떤 번호라도 성적 산물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26) - P26

[7] "지고의 희열과 질투란 행복이라 불리는 분수의 분자와 분모라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겠는가."(26) - P26

[8] "이 모든 일은 무엇 때문인가? 어째서 나는 여기 있는가?"(34) - P34

[9] "독창적이란 것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따라서 독창적임은 평등을 깨뜨리는 거죠..."(35) - P35

[10] "우리는 꿈이란 심각한 정신질환임을 안다. (...) 그들(고대인)의 생이란느 것은 전체가 그토록 끔찍한 회전목마가 아니었던가."(38) - P38

[11] "나는 저 거대하고 강력한 단일체의 한 부분으로서 나 자신을 인식한다. 그토록 정확한 아름다움이 또 있을까."(38) - P38

[12] "당신도 아시다시피 당신은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43)

"밤에, 번호들은 반드시 자야 한다. 그것은 의무다. 낮에 일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낮에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야 한다. 밤에 자지 않는 것은, 범죄다..."(63) - P63

[13] D-503: "나는 (...)앞으로도 지식을 위해 봉사할 걸세."
R-13: "자네의 그 지식이란 것이야말로 비겁함일세. (...) 그러나 벽 너머로 시선 던지기를 두려워하고 있어."(46) - P46

[14] "그래, 수학자 선생.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평균적인, 산술적인 존재들이지..."(49) - P49

[15] "아름다운 것은 오로지 이성적이고 유익한 것들이다."(54) - P54

[16] "창백한 유리 하늘, 녹색 빛이 도는 부동의 밤. 그러나 그 고요하고 서늘한 유리 밑에서 소리 없이 맹렬한 털북숭이의 무언가가, 적자색의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62) - P62

[17] "털북숭이의 야만적인 제2의 나. (...) 나는 혼자 남았다."(68)

"나는 혼자다. (...) 저 높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내가 정말 나인지 알 수 있다면."(69) - P69

[18] "그대는 안개가 자신보다 강력하기에 두려워해요. 그리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증오하지요. 또 정복할 수 없기에 사랑하지요. 사실상 우리는 정복할 수 없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죠."(76) - P76

[19] "사실 나는 우리의 이성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유해한 고대의 세계에... 의 세계에 살고 있다."(81) - P81

[20] "인간화한 기계와 기계화한 인간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86) - P86

[21] "그러나 나는 혼자였다. 난 파도에 떠밀려 무인도로 내팽개쳐진 인간이었다. 나는 찾고 있었다. 청회색의 파도 속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90) - P90

[22] "인간은 최초로 벽을 세웠을 때에야 비로소 야생동물의 상태에서 벗어났다. 우리가 녹색의 벽을 세웠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야만인이 아닐 수 있게 되었다. 즉 우리가 녹색의 벽으로 우리의 기계적이고 완벽한 세계를 나무, 새, 짐승 등의 비이성적인 흉측한 세계로부터 격리하게 되었을 때."(95) - P95

[23] "인간이 호모사피엔스라는 이름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의 문법에 의문부호가 절대로 없으며 있는 것은 다만 감탄부호, 쉼표, 그리고 마침표일 때에 한해서다."(118) - P118

[24] "나는 유쾌하고 건강하게 결박당한 느낌이었다."(121) - P121

[25] "우리는 늘 아시리아의 기념비에 그려진 투사들처럼 걷고 있었다. 천 개의 머리. 그러나 팔과 다리는 마치 한 사람의 것처럼 흔들렸다."(124) - P124

[26] "그만해요, 그만./ 그녀는 이미 더 이상 번호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인간이었다. 그녀는 다만 단일제국에 가해진 모욕적인 형이상학적 실체에 불과했다."(125) - P125

[27] "나는 나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 스스로를 느낀다는 것, 스스로의 개인성을 의식한다는 것, 그것은 먼지가 들어간 눈, 종기가 난 손가락, 충치를 의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강한 눈, 손가락, 이빨은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지므로. 그렇다면 개인적인 의식이란 단지 질병임이 확실하지 않은가."(127) - P127

[28] "모든 것이 특별하고 서럽고 부드럽고 장밋빛이고 축축했다."(128) - P128

[29] "(고대인들은) 어째서 그 모든 비밀이 필요했을까. (...( 우리에겐 숨길 것도 수치스러워 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135) - P135

[30] "나는 끝없는 복도에 혼자 서 있다. 그때의 그 복도 말이다. 말 없는 콘크리트 하늘."(149) - P149

[31] "나는 나였다. 개별적인 존재, 세계, 나는 여느 때처럼 구성 분자가 아니었다. 나는 단독체였다."(153) - P153

[32] "그들의 몸은 털로 뒤덮이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대신 털 아래에 따뜻한 붉은 피를 보존했어요. 당신의 경우는 훨씬 나빠요. 당신은 숫자로 뒤덮여 있으니까요. 숫자가 마치 이처럼 당신 위를 기어 다니고 있어요. (...) 공포와 기쁨, 불같은 노여움, 추위 때문에 전율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160) - P160

[33] "다양성만이, 체온의 다양성, 열량의 대비만이 생명을 구성한다는 걸요. 만일 우주 도처에 동일하게 차갑거나 동일하게 뜨거운 것만이 있다면 그것은 없어져야만 해요. 불과 폭발과 지옥을 위해서죠."(171) - P171

[34] "‘국가 과학’의 최신 발견에 따르면 환각증의 중심은 대뇌 하부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뇌신경 마디라는 것이다. 엑스레이로 그 마디를 3회에 걸쳐 태우면 당신들의 환각증을 치유할 수 있다."(175) - P175

[35] "그러나 내게는 구원이란 게 없었다. 나는 구원을 원치 않았다..."(182) - P182

[36]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너무도 뜻밖이라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 안에 팽팽하게 조여 있던 용수철이 곧 망가져 버렸다. (...) 나는 그때 개인적 경험을 통해 웃음이 가장 무서운 무기임을 알게 되었다. 웃음으로 모든 걸 죽일 수 있다. 살인까지도 할 수 있다."(206) - P206

[37] "어호, 우린 행동을 개시했어요!/ 우리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215) - P215

[38] "이전에 나는 웃음에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다. 웃음이란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의 먼 메아리일 뿐이다."(216) - P216

[39] "나는 미소 짓는다.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다. 내 머리에서 무슨 가시 같은 걸 뽑아냈으므로 머릿속은 가볍고 텅 비어 있다."(227) - P227

[40] "우리는 40번가의 횡단로에 고압 전류가 흐르는 임시 벽을 건축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우리가 승리하길 희망한다. 아니, 그보다 나는 우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이성은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이다."(228)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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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위험한 생각
대니얼 C. 데닛 지음, 신광복 옮김 / 바다출판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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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받았습니다! 데닛의 세계에 조금씩 다가가는 중! 말로만 들었던 유명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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