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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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비이성을 만날 때,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2024)

 




매니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벵하민 라바투트의 전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때 받은 인상을 다시 소환해보자면, 전작은 완전히 SF는 아니라도 테드 창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 단편집이었다.


 

특히 라바투트의 단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의 인생 이야기에 실린 단편 영으로 나누면을 떠올리게 했다. 테드 창의 영으로 나누면은 천재 수학자가 수학의 세계에서 만난 지적 파국의 순간을, 부부관계라는 인간사와 오버랩시키며 해법이 없는 두 세계 속 비이성의 영역을 마치 평행우주처럼 다루었다. 내가 좋아하는 단편이기도하다. 이와 유사하게 라바투트는 그의 단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에서 천재 물리학자가 물리학의 세계에서 만난 지적 파국의 순간을 다루었던 것이다.


 

이 두 단편 작품은 각각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특이점(singular point)’라는 문제를 다룬다는 소재적인 공통점이 있다. 이 특이점이 지니는 공통적인 속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정의내리기 불가능함(hard to define)’일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기 힘든, 자연의 근본적인 틈새를 알아본 천재 과학자의 지적 위기를 말하고 있었다. 이런 국면은 매니악에서 등장하는 천재적인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나 수학자 존 폰 노이만에게도 찾아왔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던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야심만만했던 천재 폰 노이만은 한때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통제하고자 꿈꾸었다. 무엇보다 수학으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길 열망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첫 소설집부터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큰 주제이기도 하다. 번뜩이는 지성으로 우주를 이해하려 했던 현대의 이카루스들이 지적 파국의 순간 어떤 고뇌와 행동을 하게 될지 고민했다. 안타깝게도 세계의 모든 현상을 수학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노이만의 열망은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만다. 물론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넓고 깊게 이 세계에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 놀라운 일이다. 이 뜨거운 지성에 관한 숨은 역사가 바로 라바투트의 두 번째 팩션 매니악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저자는 처음 만나보는 스타일로 자신이 고민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의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게 되었다.


 

다만 이번 장편소설 매니악은 테드 창의 스타일(내가 느낀 판단으로)을 훌쩍 넘어 자신만의 목소리로 한 발 더 나아갔다는 인상을 주었다. 벵하민 라바투트라는 작가를 모르고 지나갔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저자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야기할 때 많이 소환되는 오펜하이머나 리처드 파인먼, 엔리코 페르미와 같은 물리학자 보다 조금은 덜 주목받았던 존 폰 노이만에 주목했다. 그는 거의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던, 내폭형 원자폭탄(플루토늄을 사용)을 현실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원자폭탄 개발 이후 진행된 수소 폭탄 개발, 컴퓨터 이론을 토대를 놓았고, DNA구조의 발견보다 10년도 전에 자기 복제의 기본 메커니즘을 정확히 설명해내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적인 인물들(특히 존 폰 노이만)을 깊이 탐구했다. 읽는 내내 신선하고 흥미진진한 독서경험이었다.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알고 있던 과학사의 에피소드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저자가 자료조사를 얼마나 치열하게 하며 이야기를 구성해나갔을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에피소드를 읽고, 그동안 크게 관심을 갖거나 잘 알지도 못했던 AI기술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AI알고리즘 마스터에 이르는 인류 이성의 발전과 인공지능 현실이, 파울 에렌페스트와 같은 작고 오래된 특이점과 같은 사건들부터 주목하며, 이 사건들이 결국은 모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들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면 가느다란 한 줄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다만 이세돌-알파고 대국 사건에 기반한 이야기는, 바둑과 같은 두뇌 게임이자 유희이기도 한 인간의 활동에서 인간의 심리/마음이 빠질 때 다다를 수 있는 장면을 미리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사고 실험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오로지 서구적인 이성의 정복만이 남게 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첨단 기술에 무지한 독자의 우려일뿐일지도 모르겠다.


 

성경에는 자연을 정복하라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셈어든 히브리어든 원래 성경에 나온 표현을 정복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섬기다라 번역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비교문학 연구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다만 초기 서구 지배 세력은 이 번역어에서 정복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뿐이다. 번역이란 어떤 의미에서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지, 혹은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그러니 번역이라는 이 정치적행위는 하나의 역사적 초기 조건이 되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만들었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렇든 무수히 가능한 경로 중 하나인 시뮬레이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이성만을 앞세운 서구적 정복의 도도한 역사와 그 진행과정을 생생히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대의 과학자나 대중은 스티븐 호킹이 ‘AI는 극히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며 경고한 것을 비웃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런 우려를 느끼고 우리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AI알고리즘이 근본적으로 지니는 결함 혹은 오류의 가능성을 말이다. 검은 타인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도구이지만, 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물건인 것이다. 다만 수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었던 현대판 파우스트에게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폰 노이만의 행적과 그가 남긴 유산을 검토해보면 말이다.

 


AI알고리즘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것들을 데이터삼아 학습하고 모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AI알고리즘은 없다. 이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 데이터의 성격에 대해 우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 데이터라는 것이 과연 객관적이고 공평한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 내가 던진 이 질문에도 가치를 묻는 표현이 들어가듯, 인간이 만든 데이터에 인간의 편견과 왜곡이 빠질 수 없을 테다. 그럼 이를 학습하는 알고리즘은 결국 어떻게 될까? 나도 답은 모른다.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네 번째 대국에서 망상에 빠졌던 것처럼, ‘정신줄을 놓게될 것인지 아니면 어떤 문턱을 넘어서 인간의 이해로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초이성의 존재가 나타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벵하민 라바투트의 이야기는 새로운 궁금증과 물음을 독자에게 던져주는 듯하다.


 

파울 에렌페스트는 어쩌면 지나친 공감능력과 연민의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유대인과 장애인을 학살하던 나치 시대에 장애아들을 먼저 죽이고 자살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폰 노이만은 시대를 앞서 태어난 AI 알고리즘과도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암으로 죽어가던 말년에 딸이 질문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련에 핵 공격을 먼저 단행해 수많은 이를 몰살할 방안을 태연히 고안했으면서, 자기 죽음을 대면할 때는 왜 평정심과 품격을 차리지 못하느냐”(283)고 묻는 딸에게 노이만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지”(283)라고. 그에겐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을지 모르나, 인간에 대한 존중, 곧 연민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은 AI알고리즘을 다루는 서구의 과학자들이 오로지 인간을 이기기 위해 바둑을 학습하는 AI를 만든 사례와 다를 바 없을 테다. 과연 인간은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나 역시 결론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으로 감상을 마무리해본다. 어쩌면 아주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과학자가 비이성의 덫에 걸릴 때, 우리의 손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 곧 연민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연민 혹은 공감 능력을 습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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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신저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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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하루키가 있다면, 미국에는 매카시가 있었다

- 패신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지음 | [문학동네] (2024)

 




코맥 매카시의 스텔라 마리스에 이어 패신저를 읽었다. 이 이야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텔라 마리스에서는 수학 천재인 얼리샤 웨스턴이 정신병원에서 담당 의사와 나눈 대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한편 패신저는 얼리샤의 오빠인 보비 웨스턴과 먼서 사망한 얼리샤 웨스턴 두 명의 이야기가 시간차를 두고 교대하는 형식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보비 웨스턴의 이야기는 현재, 얼리샤의 이야기는 과거를 대표하며 이 두 남매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왕복운동하며 진행된다. 마치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이 교차하며 나아가듯, 두 남매의 서로 다른 현실이 과거와 현재라는 씨실과 날실이 직조하며 구성되어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특히 패신저는 쉽지 않은 소설이지만 초반에는 추리소설처럼 긴장감이 느껴져 몰입하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코맥 매카시는 과작의 작가라고 한다. 게다가 대중 앞에 자주 나서지도 않는단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평가할 단서는 작품 속에 있다. 작가의 유작이라는 이 두 작품을 읽으며 나는 밀란 쿤데라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들을 자주 떠올렸다. 이들의 작품에서 받았던 인상이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카시의 작품과 어딘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까닭이다특히 수많은 다중 세계 가운데, 얼리샤와 보비의 세계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하는 듯한 형식은 하루키의 최근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와 라는 화자의 현실이 교대로 나아가는 1부의 형식마저 떠올리게 했다. 물론 형식뿐만 아니라 좀더 차근차근 찾아보면 매카시의 작품을 닮은 작품들을 더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접한 좁은 문학작품의 범주 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짧은 독서 경험이나마 하루키나 쿤데라의 작품들과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이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죽음 같은 상실을 경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누군가 이런 경험 없는 사람이 누가 있냐고 묻는다면 뚜렷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실의 경험은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도 할 테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가들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상실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며, 때론 이들이 겪은 상실에도 제때에 애도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들은 살았던 시대의 역사나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크건 작건 배경이 되는 역사 속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깊은 내상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고보면 애초에 문학이란 것은, 이런 사람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러한 관심은 자연스레 작가의 사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쿤데라는 68혁명과 러시아의 체코 침공 시기에 개인들이 겪은 고통과 슬픔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처럼 동시대의 세계사적 상황을 일본에서 목격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직조해낸다. 특히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전체주의의 흔적을 유지하고 심지어 이를 다시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던 일본 사회 속의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으로부터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발생한 전쟁들을 통해 재기하기에 이른다. 특히 한국 전쟁과 베트남전에서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의 대리자로 자처하며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것이 일본 경제가 세계의 경제 대국으로 초고속 성장하게 된 배경인 셈이다. 이것은 극우 성향의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일본 사회가 타국의 전쟁을 발판삼아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에 개개인들은 이 성장에 발맞추어 행복감을 느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개인들은 점차 소외되어 갔고, 심지어 국가주도 사업의 부속품이 되어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 결과 살아남은 이들은 상실의 경험을 안고 더 고립되거나 표류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이런 개개인의 상실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하루키가 대학 신입생 당시 겪었던 전공투 사건이 그에게는 이후의 세계관을 결정할만큼 커다란 사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루키 세대의 상실과 좌절을 직접 체험한 청년으로서 그가 이를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삼은 것이 이해가 된다. 하루키의 소설은 국가가 주도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고도성장의 시대에 고립되고 상처를 입은 채 표류하던 개인들의 삶에 주목한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들이 받은 시대의 상처로 고통 받으면서 치유해나가는 과정 혹은 이들이 탈출구를 찾고자 방황하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스키너박스로 대표되는 행동주의 심리학이 60년대 세계인들의 무의식에 미친 영향은 미로에서 출구를 찾는 실험쥐들을 연상하게 하는 하루키의 초기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가 40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깊은 우물 속의 어딘가에숨겨 놓았다가 꺼내온 것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상처받은 인물들의 출구 찾기 여정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매카시의 작품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20세기에 세계 제일의 경제 및 군사 대국으로 급부상한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전무후무한 거대 국가프로젝트와 이어지는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 이와 동시에 시작되는 냉전시대와 맞물린 세계 공멸의 위기. 이제 미국은 적국뿐만 아니라 자국민들까지 실존적 위험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국가라는 괴물은 개인들의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때론 애국심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보비 웨스턴과 얼리샤의 아버지 역시 이런 미국의 행보에서 선두에 섰던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에서는 웨스턴의 아버지를 언급할 때, 끊임없이 아버지의 업보, 혹은 아버지들의 죄를 언급한다. 나치 독일에 투하하려던 원자폭탄은 갑작스러운 독일의 패망과 항복으로 그 사용 명분을 잃고 만다. 미국은 대신 원자폭탄을 일본에 떨어뜨리고 본격적인 냉전 구도를 설계하며 세계 패권을 쥐고자 했다. 이렇듯 미국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서구 백인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과 반성의 시각이 작가의 시선에서 줄곧 느껴진다.


 

얼리샤와 보비의 할머니는 웨스턴의 집안에 저주가 들었다고 우려한다. 암을 고치러 멕시코까지 갔던 남매의 물리학자 아버지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홀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보비는 아버지가 묻힌 곳을 결국 찾지 못한다. 영원한 상실. 이는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패신저의 시작이 얼리샤의 자살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 그리고 오빠 보비가 동생의 죽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 역시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었던 보비와 얼리샤 남매 아버지의 업보가 집안의 저주가 되어 전해지고 있다고 여길 만 하지 않은가. 이제 남은 사람은 보비 하나 뿐이다. 그는 가까운 두 사람을 잃는 상실을 겪으면서도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한 채 슬픔에 잠식되어 버린 듯하다. 상실의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웨스턴 집안이 겪는 불행(상실의 슬픔)은 백인들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 같아 보인다. 백인 가문의 자녀인 얼리샤와 웨스턴은 집안의 저주라고 여겨진 상실의 고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전도유망하던 보비 웨스턴이 미국 최고의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다가 심해잠수부가 되는 설정에도 주목해볼만 하다. 물질세계의 질서에 주목하는 물리학이 아니라 깊은 바다 아래로 내려가는 직업을 택한 보비. 이 설정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우물과 비교해볼만하다. 무의식의 세계를 암시하는 우물 아래 무의식의 세계와 깊은 바다 아래로 내려가는 보비의 상황이 유사한 심리학적 설정이라 간주할 수도 있지 않은가. 보비는 깊은 바다로 잠수하면서 자기 내면의 깊은 속에 자리 잡은 무의식에 가 닿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다 속에 잠긴 비행기에서 블랙박스와 한 명의 행방불명된 승객은 어쩌면 보비가 알아낼 수 없는 상실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저히 찾지 못하는 아버지의 묫자리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보비 웨스턴은 아버지의 죽음에 합당한 애도를 영원히 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얼리샤도 결국 비슷한 상황인 셈이다.

 


하루키 소설의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제대로 애도할 기회마저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애도는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면서도 자신과 분리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애도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깊은 내상을 입은 채 살아간다. 일상적인 삶은 불가능에 가깝다. 슬픔에 압도되어 허우적대기도 하는 것이다. 하루키나 쿤데라처럼 매카시 역시 애도하지 못하고 치유되지 못한 인간들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조금 달리 볼 여지도 있겠다. 이런 상황은 백인들이 느끼는 죄의식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독자에 따라서는 일본인들처럼 희생자 코스프레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문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작가는 한 백인 가족이 입은 상처와 슬픔에 주목하고 있으나, 예컨대 원폭 피해자들의 상실과 슬픔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시선은 백인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시선이 드러나긴 하지만 한편으론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관점이라고 볼 여지도 있겠다. 혹은 내가 문학을 이야기할 때 너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다른 독자와의 토론을 통해서 더 이야기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한편 보비의 부모 한 명만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은 유대인에 대한 (앵글로색슨) 백인들의 혐오와 비난을 어느 정도 차단하려는 장치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대인은 오랜 역사를 통틀어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어온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죄의식을 느끼는 인간은 또 다른 희생양을 찾기 마련이다. 코로나-19 시기에 아시아인이 서구사회에서 공격과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 대부분이 유대인인 상황에서 보비의 부모 중 한 명만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은 매카시의 사려 깊고 치밀하게 고려한 결과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튼 하루키나 쿤데라의 작품들처럼 매카시도 거대한 역사 속에서 상처받고 표류하는 사람들이 치유되어가는 과정 혹은 가능성을 살짝 열어두긴 하는 것 같다. 물론 답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인물들이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출구를 찾는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패신저스텔라 마리스를 읽는 동안 종종 하루키를 떠올렸던 것이다. 일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면, 미국에 코맥 매카시가 있었다고 말이다.


 

책을 덮으면서 기억에 남는 문구 하나는, 죽은 친구 존 셰던이 웨스턴을 찾아와 건네는 한 마디, “가볍게 여행해”(717)였다. 아마도 이 말의 앞에 생략되어 있는 단어가 바로 나그네처럼이 아닐까 싶었다. 이 말이 의외로 작은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정영목 번역가는 코맥 매카시가 말을 많이 하는 작가가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매카시는 우리가 자신과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고, 최대한 서로를 보살펴주도록 무언의 당부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부터라고 말이다. 나아가 우리에게 닥친, 불가피한 상실에 대해 애도하며 조금씩은 앞으로 나가는 일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내게 이야기해주는 듯했다. 그 자체가 삶이라고 말이다. 인간이란 엄청난 능력을 지닌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현실에선 무척이나 나약한 존재들이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취약한지 것인지 놀라곤 한다. 하루아침에 우리의 삶은 세계가 뒤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누군가 불치병 선고를 받는다고 생각해보라. 우리가 사회적 안전망 속에 대비를 든든히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런 불시의 습격은 이에 대한 대비를 얼마나 잘 했는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삶을 갉아먹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처럼 취약한 인간 존재를 향한 인간적인 관심과 연민, 공감의 시선을, 하루키뿐만 아니라 매카시에서도 발견한 것은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므로 한도 끝도 없이 무거울 수 있는 인간의 삶이지만, 내일부터는 조금 가볍게 산책도 해보는 삶을 살아가보고 싶어진다






[1]
(657-659) [존 셰던이 웨스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글]
"스콰이어에게,
이 편지는 존슨시티 참전용사 병원에서 보내는 건데 좋은 소식은 아니야. 말을 탄 자가 내 문에 백묵으로 표시를 한 것 같아서 이 편지가 너한테 닿았을 때면 - 닿는다는 가정하에 - 나는 이 필멸의 똬리를 벗어버리는 중일지도 몰라."(657)
- 존 셰던이 웨스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글
- P657

[2]
"어디든 우리가 내리는 곳이 늘 기차의 목적지였어. 나는 공부를 많이 했지만 배운 건 거의 없어. 그래도 최소한 친근한 얼굴 하나 정도는 합리적인 바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침대 옆에 내가 지옥에 가기를 빌지 않는 누군가가 있는 거. 시간이 더 있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고 우리가 영원히 포기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그것은 처음에 생각하던 그게 절대 아니라는 게 거의 확실해. 됐어. 나는 이 생이 특별히 살기 좋다거나 자비롭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왜 내가 여기 있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한 적이 없어. 내세가 있다면 - 없기를 정말 간절히 빌지만 - 노래는 하지 않기를 바랄뿐이야."(658)
- P658

[3]
"담대하라, 스콰이어. 이건 초기 기독교인들의 지속적인 권고였는데 적어도 이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어. 네 역사가 불필요하게 쓰라리다고 내가 늘 생각했다는 건 알았겠지. 고난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고 견뎌야 해. 하지만 불행은 선택이야. 네 우정에 감사해. 이십 년 동안 비판의 말 한마디가 기억나지 않으니 이것만으로도 너에게 깊은 축복이 있기를. 우리가 만에 하나 다시 만난다면 그곳에 술 빠는 데 비슷한 게 있어서 내가 너한테 한잔 살 수 있기를 바라. 아마도 너한테 그 동네 구경을 시켜주겠지. 맞춤 가운을 입은 키가 크고 좀 건달기가 있는 녀석을 찾아오라고."(659)
- P659

[4]
"웨스턴은 자기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손.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나한테 물은 적이 없어. 나와 상의한 적이 없어.
- 너 자신의 인생에 발언권이 없구나.
-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모든 게 사라진다면 내가 자유롭게 식료품점에 갈 수 있든 아니든 무슨 차이가 있겠어?
-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럴 거고.
- 그래.
-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680)
- P680

[5]
"그는 이비사의 문구점에서 줄이 쳐진 작은 공책을 한 권 사왔다. 곧 누레져 바스러질 싸구려 펄프 종이. 그는 공책을 꺼내 안에 연필로 썼다. 내 앞에는 시간이 없었고 내 뒤에도 없을 것이다."(688)
- P688

[6]
"그는 칼라사비나의 보데가 마당에서 자전거를 챙겨 망태기를 손잡이에 걸고 산하비에르와 라몰라의 곶으로 향하는 길로 나섰다. 길가 어둠 속에서 들판 가득한 새 밀이 부드럽게 허공을 베고 있다. 위로 소나무숲을 뚫고 올라간다. 자전거를 민다. 세상에서 홀로."(689)

[7]
"다가올 몇 년 동안 그는 해변을 거의 매일 걷게 된다. 가끔 밤에 해초가 밀려와 그린 선 위의 마른 모래에 누워 옛 뱃사람들처럼 별을 살핀다. 혹시 그도 자신의 항로를 그릴 방법을 알 수 있을까 해서. 또는 그 검고 영원하고 광대한 공간 위로 별들이 천천히 기어가는 모습에서 지상의 어떤 일이 유리한지 읽어낼 수 있을까 해서. 그는 건너편 해안을 따라 한 줄로 늘어선 피게레타스의 불빛들을 볼 수 있는 곳까지 건너나갔다. 검은 바다가 찰싹인다. 그는 바짓자락을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물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런 밤의 캐롤라이나 해안. 여관 건물과 진입로를 따라 빛나는 불빛들. 그녀가 밤 인사로 입을 맞출 때 뺨에 느껴지던 숨결. 마음속의 공포."(692)

[8]
"여기 이야기가 있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동안 우주에 홀로 서 있는 모든 인간 가운데 마지막 인간. 하나의 슬픔으로 모든 것을 슬퍼하는 인간. 한때 그의 영혼이었던 것이 소진되고 남은 애처로운 찌꺼기에서는 이 마지막날들을 안내해줄 신 비슷한 존재라도 만들 재료는 전혀 찾지 못할 것이다."(693)

[9]
"아버지. 절대적인 흙으로부터 악의 태양을 창조했고 사람들은 그 빛에 의지하여 서로의 몸에서 자신의 종말을 알리는 어떤 무시무시한 전조를 보듯 옷과 살 너머의 뼈를 보았다.
그는 멕시코 북부 쥐의 땅에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다녔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696)

[10]
"그는 곶을 다라 걸어나갔다. 멀리서 천둥이 상자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어두운 수평선을 가로질러 굴러갔다. 특이한 날씨. 번개는 여위고 빠르다. 땅 가운데 바다. 서양의 요람. 연약한 촛불이 어둠 속에서 비슬거린다. 모든 역사는 자기 소멸을 위한 리허설."(697)

[11]
"왜 그 사람을 묻지 못하는 거야? 그 사람 두 손이 그렇게 붉어? 아버지들은 늘 용서받아. 결국은 용서를 받아. 여자들이 이 세상을 질질 끌고 이런 참상을 통과해 왔다면 그 여자들한테는 현상금이 걸려 있을 거야."(700)

[12]
"한순간의 회상에 다 담을 수 있는 오랜 세월의 방랑. 텅 빈 극장은 너도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모든 게 텅 비어 있는 거야. 이건 과거라는 비워진 세계의 은유야. 어쨌든 새 소식을 찾아서 올 법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지."(710)

[13]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바닥은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선택할 여지가 적다고 생각하게 됐어. 그리고 걷는 내내 우리가 거의 알지도 못했던 과거가 수상쩍은 투자금처럼 우리 삶 속으로 다시 굴러들어오지. 이 시대의 역사는 정리되려면 오래 걸릴 거야, 스콰이어. 하지만 우리의 이해에 공통의 용골이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 결함이 있다는 거야. 그게 우리의 핵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혐오한다고 생각하는군.
-우리에 대한 응분의 벌로는 부족하진, 물론. 하지만 맞아."(714)

[14]
"내가 이따금 신랄하게 굴긴 했지만 네가 사별을 그런 높은 위치로 끌고 가는 방식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늘 감탄스러웠어. 슬픔을 그것이 슬퍼하는 것을 초월하는 지위로 들어올리는 것. 아니, 스콰이어. 내 말을 끝까지 들어. 그게 상실이라는 관념이야. 그 관념이 모든 상실 가능한 것들의 무리를 포괄해. 그건 우리의 원초적 공포이고,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마음대로 뭐든 갖다붙이지. 그게 우리 삶에 침입하는 게 아니야. 그건 늘 거기 있었어. 네 방종을 기다리며, 네 양보를 기다리며.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너를 싸게 팔아버렸다는 느낌이 들어."(715)

[15]
"하지만 잘 들어, 스콰이어. 어떤 것의 내용이 불확실할 때는 형식이 상황을 더 좌지우지할 수가 없어. 모든 현실은 상실이고 모든 상실은 영원해. 다른 종류는 없어. 게다가 우리가 탐구하는 현실은 우선 우리 자신을 포함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우리가 뭐야? 십 퍼센트의 생물과 구십 퍼센트의 밤소문nightrumor이지."(716)

[16]
"-너한테 다른 말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 스콰이어. 어떤 투쟁을 준비하는 것은 대체로 자신의 짐을 벗는 일이야. 싸움에 과거를 지니고 가는 건 곧 죽음으로 달려가는 거야. 내핍은 마음을 고양하고 비전에 초점을 맞추지. 가볍게 여행해. 몇 가지 생각이면 충분해. 외로움에 대한 모든 치료책은 그걸 미루는 것에 불과해. 그리고 치료책이란 것이 아예 없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어. 물이 잔잔하기를 바라, 스콰이어. 늘 그걸 바랐어."(717)

[17]
"해변에서 동전 하나를 발견했다. 수백 년 동안 씻겨서 맨들맨들하게 닳고 일그러진 구리 원반. 그는 동전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 외딴곳에 남은 사라진 세계들의 잔재. 북쪽 먼 바다의 암초들 사이에 있는 배의 뼈들처럼. 사람의 뼈들처럼."(720)

[18]
"그에게는 그녀의 사진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자신이 그녀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떤 모르는 사람이 어느 먼지 낀 가게에서 발견한 학교 앨범에서 그녀의 사진과 우연히 마주치면 그녀의 아름다움에 그 자리에서 발을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 페이지로 돌아갈지도. 그 눈을 다시 들여다볼지도. 오래된 동시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세계. 그녀가 채석장을 떠난 뒤 그는 혼자 앉아 있었고 마침내 깡통에 든 작은 불들이 펄럭거리다 하나씩 꺼졌다. 그러자 오직 전원지대의 어둠, 그 정적. 멀리 고속도로에서 트럭이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721)

[19]
"그는 램프 불빛에 의지해 작고 검은 책에 글을 썼다. 자비는 홀로 있는 사람의 영역이다. 집단적 증오가 있고 집단적 슬픔이 있다. 집단적 복수와 심지어 집단적 자살도. 하지만 집단적 용서는 없다. 오직 네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물을 붓고 이름을 지어준다. 아이를 우리 마음이 아니라 우리 손아귀에 고정한다. 남자들의 딸들은 어두컴컴한 옷장 안에 앉아 면도칼로 팔에 메시지를 새기고 잠은 그들 삶의 일부가 아니다."(729)

[20]
"그는 팔꿈치 옆 램프의 심지를 올리고 상자에서 공책을 꺼내 펼쳤다. 그러다 멈추었다. 오래 그렇게 앉아 있었다. 결국, 그녀는 말한 적이 있었다. 모방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리고 그게 특권의 마지막 박탈이 될 거야. 그게 다가올 세계야. 어떤 다른 세계가 아니라. 유일한 대안은 콘크리트로 검게 타들어간 사람들의 그 기괴한 형태가 주는 놀라움뿐이야.
무덤에서 무덤으로 뻗어 있는 인간의 시대들. 점판암에 새긴 회계. 피, 어둠. 나무판 위에서 죽은 아이들 씻기기. 형태와 수를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한 화석 자국들을 간직한 세계의 돌 척층물. 내 아버지의 현대판 암면 조각과 벌거벗은 채 울부짖는 길 위의 사람들."(724)

[21]
"마침내 그는 몸을 기울여 유리 등피 쪽으로 손을 오므려서 불을 불어 끄고 어둠 속에 드러누웠다. 죽는 날 그녀의 얼굴을 볼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지상의 마지막 이교도가, 그 아름다움을 어둠 속으로 데려가기를 바랄 수 있었다. 짚자리에 누워 미지의 언어로 작게 노래하면서."(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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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13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와 하루키, 코맥 매카시를 한 쾌에 엮으시다니
묵직하고도 얻어 갈 것이 많은 리뷰네요.
한동안 멀리했던 하루키를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인간 본연의 욕망과 맹점을 간파한 몰리에르의 유쾌한 희곡

- 《스카팽의 간계》

 

몰리에르 지음 | [디다스칼리] | (2024)

 

 


 

몰리에르의 희곡 《스카팽의 간계》을 읽고, 출판사에서 궁금해하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고 답변을 정리해보았다.

 

 

 

 

1. [캐릭터 분석] 작품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캐릭터는 누구였나요? 그 캐릭터는 작품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며, 어떤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고 있나요? 캐릭터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비교해볼 수도 있겠죠? 만약 단원님이 연출가/배우라면, 그 캐릭터를 무대 위에서 표현할 때 어떠한 점에 주안을 두어야 할까요?

 

 

 

단연 스카팽이 눈길이 가는 캐릭터이겠지만, 저는 한 사람 더 꼽으라면 제롱트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롱트는 레앙드르와 배다른 딸 이아생트의 아버지이기에, 연극을 이끌어가는 문제의 장본인들인 옥타브와 레앙드르가 친 사고에 어쩔 수 없이(혹은 운명적으로?) 엮이게 되는 인물입니다. 한편 스카팽의 속임수에 실컷 당하고 나중에 그 사실을 모두 알게 되지만, 마지막까지 한 번 더 스카팽의 손에 놀아나는 캐릭터이기도 하지요. 스카팽의 연기는 제롱트의 상대역이 잘 조응하여 맞장구를 치는 연기가 받쳐주지 않으면 그 재미와 힘을 잃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땐 제롱트야말로 유머연기도 잘하는 노련한 배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한다면, 제롱트의 명대사 “도대체 망할 놈의 군함은 왜 탔어?” 한 마디에 관객의 마음을 모두 얻을 수 있을 만큼 명연기를 해내는 배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2. [무대 연출] 작품이 담고 있는 분위기와 사건을 무대 위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무대가 적합할까요? 무대의 형식(원형, 프로시니엄 등)과 소도구, 장치, 의상, 배역의 동선 등 단원님이 생각하는 독창적인 무대를 이야기해 주세요.

 

 

 

연극의 각 장면이 빠른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같은 무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백이 많아 이 차이가 잘 구분되는 무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제가 생각한 것은 회전하는 원형 무대에 케잌처럼 4등분 되어 있는 장치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혼자 말하는 방백이 있는 장면에서 근처에 있는 상대 인물이 듣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케잌처럼 가볍게 나뉘어 있는 무대의 반대편에 위치하여 구분을 해주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3. [사랑과 웃음] 희곡은 사건과 갈등의 표현이 두드러지는 예술입니다. 작품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두 연인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스카팽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요, 사랑을 웃음으로 연결시키는 이 작품만의 특징 또는 매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또 작품 속 사랑과 오늘날의 사랑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를까요?

 

 

 

어떤 면에선 딸보다 아들을 더 중시하는 가부장적인 제도의 모순도 살짝 드러나는데요, 두 아버지들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집착으로 ‘스카팽의 간계’에 여실히 이용되고, 돈까지 빼앗기기도 하지요. 그리고 심지어는 자루 속에 들어가서 하인의 몰매를 맞기도 하니 재미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우리 나라 전래 동화의 장면 같아서 친근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매력중의 매력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스카팽의 속임수가 모두 들통나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제롱트는 한 수 더 뜨고 있습니다. 우연히 유종의 미를 거두고 있는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내거든요. 게다가 곧 죽을 것처럼 연기하면서도 주인의 저녁 식사 자리에 자신의 자리를 맡아 놓고야 마는 이 능청스러움과 집요한 생존본능을 보면 웃음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마지막 장면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작품에 나오는 사랑은 우리의 모습과 닮은 데가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여성이 결혼을 하려면 엄청난 지참금을 준비해야하는 관행은 지금 현대인의 삶과는 다르지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랑하는 당사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시대와 장소를 떠나 다양한 갈등과 이해의 충돌을 낳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도 순수한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류의 영원한 꿈이 아닐까요.

 

 

 

 

4. [기타 주제] 작품과 관련해 새로운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계신다면 무엇이든 이야기해주세요.

 

 

 

저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제롱트의 명대사 “도대체 망할 놈의 군함은 왜 탔어?”를 말하고 싶지만, 아마 다른 분들이 많이 하실 것 같아서요. 저는 다른 문장을 더 찾아봅니다. 제게 대본집을 덮으면서 마지막까지 웃게 해준 것은 스카팽의 능청스러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카팽의 마지막 대사 “저는 식탁 끄트머리로 데려가 주세요, 거기에서 죽을 자리를 볼게요.”를 저의 베스트 대사로 꼽습니다. 이 문장에는 스카팽의 간계뿐만 아니라 그의 능청스러움과 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모두 응축되어 담겨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한 문장으로 《스카팽의 간계》에서 느끼는 지배적인 분위기와 감정들을, 대본을 읽는 독자는 대본을 덮으면서 한번 더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스카팽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귀여운’ 속임수로 자신의 주인을 속이고 잇속도 챙기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실수로 등통이 나버리고 맙니다. ‘스카팽의 간계’는 기본적으로 문제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의 관습의 문제를 잘 파고들어 틈새를 이용합니다. 곤란에 빠진 사람들의 심리를 간파하여 이들이 지닐법한 일종의 공포를 해결책에 대한 기대와 잘 버무려, 상대방을 자기 자신에게 기대게 만드는 일종의 ‘가스라이팅’ 방식을 서슴치 않고 사용하지요. 물론 유쾌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희곡을 쓴 몰리에르는 인간의 보이지 않는 심연에 누구나 지니고 있는 욕망과 일종의 맹점(blind spot)을 감각적으로 찾아내어 이야기를 만든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몰리에르의 천재성이라면 바로 이 점에 있지 않을까요.

 

 



#스카팽의간계 #몰리에르 #디다스칼리 #안세하번역가 #사소서사 #극단디다스칼리1기 #북클럽 #대본집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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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07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질문들에 답을 !
전문가들의 대담인가요?

초란공 2024-02-07 23:23   좋아요 1 | URL
질문은 출판사에서 준 것이고 답은 제가 대담하듯이 꾸며보았습니다. ^^;; 이제 곧 텀블벅 북펀드 시작할듯해요.
 
단순한 과거 을유세계문학전집 131
드리스 슈라이비 지음, 정지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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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출구를 찾아 분투하는 무슬림 흑인 청년의 저항

- 단순한 과거

 


드리스 슈라이비 지음 | 정지용 옮김 [을유문화사] | (2024)

 




모로코 상인의 아들인 드리스 슈라이비의 소설 단순한 과거를 읽었다.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내게 미세한 분자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우연하고 우발적인 촉매제를 첨가하여 이루어지는 격렬한 화학반응을 관람하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화자인 드리스는 이슬람군주로 대표되는 굳건한 가부장제도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했다. 여기에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의 제국주의 및 인종차별적 역사가 뒤섞여 요동과 교란,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작중 인물 드리스는 핫지 파트미의 둘째 아들이었다. 드리스가 군주라고 부르는 핫지 파트미는 부유한 상인이다. 그가 식민지 상태인 조국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이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한 결과다. 이 배경에 이미 문제의 씨앗과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일찍이 군주의 지목을 받은 화자 드리스는 프랑스 학교에서 제국주의의 문화와 지식을 습득하고, 기독교에 접할 수 있었다. 총명했던 드리스는 이슬람 문화의 가부장제가 지닌 억압과 폭력성을 자각하고 이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구 문명을 동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내 제국주의의 모순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믿음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경험. 드리스는 이 폭풍과도 같은 내적 갈등을 경험하며 방황한다. 혼돈과 혼란의 과정이 반항으로 분출되어, 반응의 세기는 강렬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다.


 

저녁 식사 전에 가족이 군주 앞에 모여 대기하는 장면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대령할 준비를 하며 배고픔을 참고 있었다. 일곱 명의 아들은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사다리꼴대형을 갖추어 대기하고 있었다. 프랑스 문명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된 드리스는 집에서 벌어지는 풍경에 환멸을 느끼고 규율에 저항하기로 한다.


 

하미드는 샌들 한 작을 들어서 이를 때려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사다리꼴 속으로 되돌아가, 자기 자리에 앉아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때 나는 파문당하기로 마음을 먹었다.”(30)

 


화자 드리스가 군주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와 싸움기로 결심한 순간이다. 이것은 철학자 스피노자가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한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오늘의 네덜란드가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던 유대계 철학자 스피노자도 드리스처럼 지역 사회에서 자수성가한 상인의 아이들이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교육에 힘을 쏟은 부모의 영향으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종교 지도자 랍비가 되기보다 교조화 된 종교적 관습과 해석을 거부하고 스스로 기존의 질서를 판단했다. 그가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 절차인 헤렘을 선고받기로 각오했을 때의 심정이 바로 드리스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파문이란 공동체로 이름 지어진 기존의 안에서 밖으로 추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스피노자의 경우는 정말 무시무시한 저주의 말까지 들으며 추방되었다고 한다.


 

드리스가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고 기꺼이 파문당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는 자신이 발을 딛는 대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한편으로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상징적인 의미에서 아버지를 죽여야만 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내부에 일종의 폭탄이 있음을 자각하게 된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이 폭탄을 던져 터트려야 한다는 것도 직감했을 테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계속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

 


본문에는 가는 선이란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가는 선은 무엇을 뜻할까. 선이라고 하면 일단 경계를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은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말이다. 소설에는 기존의 전통적인 질서(가부장제도)와 새로운 질서(제국주의)가 뒤섞여 있다. ‘이쪽이라 함은 이 질서의 내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반대로 저쪽에는 프랑스의 표어로 대표되는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적인 세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리스는 아버지 군주와의 격렬한 충돌, 작용과 반작용의 과정에서 이 경계 너머에 또 다른 부조리함이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가는 선은 쉬지 않고 나를 흔들었다. 가는 선은 선명해졌다. 모든 선이 눈앞에서 흐려지면서, 선은 매우 선명하게 보였다. 가는 선이 나에게 말했다. 너는 흑인 남자다. 너는 몇 세대 전부터 백인과 교배해서 만들어진 흑인이다. 너는 지금 선을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 너는 알라를 전혀 믿지 않으며, 전설을 파헤쳐 분석할 수 있고, 프랑스어로 생각하고, 볼테르를 읽고, 칸트를 찬양한다. 그렇지만 너는, 네가 도달하려는 서양 세계도 어리석음과 추악함이 퍼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네가 탈출하려는 그 추악함과 어리석음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134)


 

선 너머의 세계를 들여다보노라면, 마찬가지로 인간 세계의 모순이 발견된다. 이 세계 가운데 인간이 만든 추악함과 어리석음이 없는 곳이 있을까? 드리스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동안 그는 서양 세계에 대한 동경을 키워왔고, 서양 문명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가부장제를 타파할 수 있는 실마리와 힘을 지녔다고 믿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산한 군주는 결코 나약하지 않았다. 제도의 모순을 이용하여 다시 부정한 부를 축적하며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군주로 대표되는 기존의 세계는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질서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드리스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고 분투한 아버지, ‘군주의 인간적인 면모를 새롭게 발견한다. 남자가 대개 서른이 넘으면, 아버지를 다시 떠올리고 재평가하는 시기가 온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나이에 이르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가 반드시 한 번은 오기 마련이다. 미숙했던 이전과 달리 일방적으로 비난만 하던 시기를 벗어나, 가장의 입장에서 그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드리스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군주 죽이기를 결심했음에도, 여전히 마음 속 한 곳에서는 오랫동안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에게 존경과 찬사를 바치는 것을 멈출 수 없었, 모순적이고 복잡한 심경에 상당히 공감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농장의 여자 하인을 사랑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군주의 모습에서, 맨발로 농장 일을 하던 군주의 모습에서, 드리스는 부조리한 제도 속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 분투했던 군주의 모습을 알아보게 된다. 드리스는 아버지에 대해 무엇보다 인간적인 연민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비로소 아버지의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자신의 닮은 모습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계기로 드리스가 군주에 대한 저항하기를 체념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대신 지금까지 드리스가 거부해왔던 가는 선안의 세계, 원 안의 세계에 기꺼이 머무르며 군주와의 일전을 보다 본격적으로 준비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이해한다. 세계는 아직 건재하고, 자신의 욕구대로 세계가 움직일 리가 없음을 깨닫게 된 셈이다. 그러니까 드리스가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모와 고통까지 감지하고 발견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겠다. 그는 훗날의 교전 수칙과 무기를 새롭게 정비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막내 동생 하마드와 어머니의 죽음이 촉매가 되어 격화된, 군주에 대한 저항과 공격이라는 격렬한 화학반응은 프랑스로 떠나는 장면을 끝으로 훗날을 기약하는 셈이다.


 

앞서 드리스가 대립한 군주와 교사, 친구들은 모두 기존의 질서, 원 안에 머무르던 사람들이었다. 반면 드리스는 이 원 밖의 세계를 동경했고, 안과 밖을 구분하는 을 넘고자 했다. 다만 이때는 아직 미숙한 존재였을 뿐이다. 견고한 제도와 관습이라는 막다른 벽을 만났고, 이를 넘고자 한 일탈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시 원 안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19세 흑인 무슬림 소년이, 자신을 가둔 원을 자각하고 탈출구를 찾고자 한 시도를 담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느 더운 여름밤, 집에서 추방당해 밖을 배회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그는 오히려 추위를 느꼈다. 제도와 관습 안에서 따뜻함에 길들여진 자신의 모습을, 단독자로서 새롭게 체험하는 장면이었다. 추위를 느끼면서 그는 끊임없이 출구를 찾고자 했다. 드리스는 집에서 추방당한 이 밤의 시간을 스스로 생생히 각인해두었다. 마치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처럼 보이는 그래서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니?”(230)라고 되뇌는 장면은 그가 처한 실존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설의 제목인 단순한 과거는 문법 용어 단순 과거복합 과거의 용법을 떠올리게 한다. 단순 과거는 과거에 이루어진 행위, 다시 말하면 지금은 그렇지 않은, 혹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과거와의 단절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드리스가 말하는 단순한 과거는 어쩌면 순진했던과거와의 결별인 동시에, 새로운 탄생을 예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드리스가 프랑스에 가서, 나 자신을 단련시킬 것이다”(360)라고 다짐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는 그가 단순했던 과거에 자신이 믿던 자유, 평등, 박애가 충만한 세계가 아니라, 여전히 어리석음과 추악함, 부조리가 만연해 있는 세계임을 알고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대신 바로 자신의 자리에서 훗날 다가올 군주 죽이기의 일전에 대비하기로 하는 것이다. 그동안 스스로 단련하고, 무기를 갖추기로 한 것이다. 화자인 드리스가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고 출구를 찾는 과정을 거쳐, 이제 그는 이 모순 속에 머무르며 투쟁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건 화자가 새로운 차원으로 성숙해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나는 연금술사로서 살았다. 아마도, 몇 년, 20, 60년이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화학자로 살 것이다.”(360)


 

이 마지막 독백 역시 상징적이다.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이 성장하며 훗날 기존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자 투사의 역할을 자각하며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달리 표현하면, 과거의 연금술사에서 벗어나 화학자되고자 선택하는 과정, 일종의 상전이(phase transition)를 경험하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한 청년의 서사로 읽힌다. 드리스가 프랑스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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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1] "하미드는 샌들 한 짝을 들어서 이를 때려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사다리꼴 속으로 되돌아가, 자기 자리에 앉아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때 나는 파문당하기로 마음을 먹었다."(30)
- P30

[2] "그가 이번에 나한테 뱉은 침도, 그가 그전까지 뱉었던 침, 주먹질, 발길질, 따귀, 짓밟기 등에 더해질 것이다. 그 목록은 이미 길고, 저울은 기울어지고 있었다. 군주님, 나는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37)
- P37

[3] "이 남자는 근본적으로 강하다. 그는 강한 남자를 만드는 두 가지 요소인, 시간과 망각을 결합해서 가지고 있다. 내가 언제나 보아 왔던 그의 모습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에게 존경과 찬사를 바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57)
- P57

[4]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내 방은 어둠에 젖어 있었다. 나는 빛을 보고 싶지 않았다. (...) 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다. 가는 선, 가는 선, 불면증이 있는 아이가 엄마에게 자장가를 불러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나는 너를 불렀다."(77)

"나는 가는 선을 통해서 탈출했다. 그 선은 방 안에 섬광처럼 떨어졌다. 군주여, 당신의 꼭두각시를 보시오."(78)

"잠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하면서,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감았다. 처음에는 거미줄같이 가느다란 실이, 너무나 미세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선이 나타났다. 그 선은 글자나 숫자, 또는 끊어진 선이었다. (...) 그리고 마지막에는 달리는 기차의 거대한 아우성 같아졌다."(79)
- P78

[5] "이곳저곳, 거의 모든 사거리마다, 거리의 어둠 속에서 오븐이 붉게 빛나고 있다. 이 도시는, 이 시간이 되면, 떨어진 말똥의 매콤함과 젖은 흙내가 뒤섞여 난다. 곧 가난한 사람들의 향기가 퍼질 것이다. 이 향기는 오래된 옷, 초록색으로 칠해진 오래된 벽, 광장을 뒤덮는 오래된 갈대에서 나온다. 구역에 따라, 이 향기는 속을 뒤집어 놓는 따뜻한 빵과 달콤한 과자의 냄새, 군중의 땀 냄새, 바부슈와 향신료 가게의 곰팡내와 섞일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이 향기가 퍼질 것이다."(92)
- P92

[6] "나는 유대 부족에게 기름통을 붓고, 과거 중세 서사시에 나온 것처럼, 그들이 횃불에 산채로 타서 죽는 것을 구경하는 자들이 더 이상 아니었다. 또 메디나의 대추를 핥고, 화석을 숭배하는 자들도 더 이상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는 로슈 선생님이었고, 나의 형제들은 베라다, 뤼시앵, 치쵸였다. 나의 종교는 반항이었다."(96)
- P96

[7] "개도 공포와 같은 강한 감정을 인식한다고 한다. 분명하게, 나는 폭력이 설사처럼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106)

"이 남자가 갑자기 비굴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학 교과서를 떠올렸다. (...) 로슈 선생님이 말했다. ‘너 같이 조용히 있는 사람이 폭력을 부른다. 더운 지방에서 가장 흔한 그림이 만년설을 그린 그림인 것처럼 말이야."(111)
- P111

[8] "나는 눈을 감았다. ‘아무 마라부나 좋습니다. 저는 당신께 애원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파산했습니다. 무엇이라도 해 주세요.’ 나는 눈을 다시 떴다. 가는 선은 쉬지 않고 나를 흔들었다. 가는 선은 선명해졌다. 모든 선이 눈앞에서 흐려지면서, 선은 매우 선명하게 보였다. 가는 선이 나에게 말했다. 너는 흑인 남자다. 너는 몇 세대 전부터 백인과 교배해서 만들어진 흑인이다. 너는 지금 선을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 너는 알라를 전혀 믿지 않으며, 전설을 파헤쳐 분석할 수 있고, 프랑스어로 생각하고, 볼테르를 읽고, 칸트를 찬양한다. 그렇지만 너는, 네가 도달하려는 서양 세계도 어리석음과 추악함이 퍼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네가 탈출하려는 그 추악함과 어리석음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134)
- P134

[9] "어머니는 주먹으로 문을 치고 이마를 찧었다. 어머니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이슬람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는 끔찍했다."(170)
- P170

[10] "그리스인과 러시아인의 성자들이시여, 나는 당신들에게 간청했습니다. 당신들은 소원을 이루어주시고는, 저의 막냇동생을 빼앗아 갔습니다...... 유대인과 타타르인의 성자들이시여, 사람들은 당신들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하지요. 그러니 저 문을 열어 주세요...... 당신들이 원하신다면, 저는 유대인이 되고, 당신들이 원하신다면, 저는 타타르인이 되고, 개새끼, 쓰레기, 개똥이라도 되겠습니다. 제발 저 문을 열어주세요!" (171)
- P171

[11] "저를 입으로 불어서 한 줌의 연기로 날려 버릴 것인가요? 저는 천일야화를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저는 말씀드립니다. 제 조건은, 당신이 신정 통치를 부성애로 바꾸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가족이 필요합니다. 또, 관용과 자유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저의 교육을 위해서는 쿠란 학교까지만 보내셨어야 했습니다."(208)
- P208

[12] "나는 떠났다. 크고, 꼿꼿하고, 삐쩍 말랐었다. 그게 전부였다. 두 가지 오해였고ㅛ, 두 개의 탈출구였다. 나는 저주받았고,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나는 독특했다. 좋은 옷을 입었고, 소화 기관은 비었고, 땀구멍에서는 향기로운 기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반쯤은 야성적, 반쯤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문을 박차고 나와, 사막과 같은 길과 밤 안으로 들어갔다. 우연히 세 번째 행인을 붙잡았다. 나는 추웠다."(229)
- P229

[13] "나는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지만, 식물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만 하는 모든 존재를 사디스트라고 부른다. 또, 나는 자신의 다른 능력, 경향, 가능성을 모두 희생시키면서, 자신을 특수하게 만드는 모든 존재를 사디스트라고 부른다. 나는 둘 다였다. 나는 내 안에 증오를 축적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이것은, 예를 들자면, 나의 다른 모든 능력을 희생시키고, 유럽식 교육 덕분에 발전한 나의 지식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였다. 이 역시 나는 무시했다. 나는 문학을 통해서 성장하지 않았다."(259)
- P259

[14] "저의 친구 중에 레몽 로슈라는 이름을 가진 늙다리가 있습니다. 그가 어제저녁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프랑스인은 너희 아랍인을 문명화하는 중이야. 고통스럽고, 기만적이고,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일이지. 왜냐하면 만일에 정말로 너희가 우리와 동등하게 된다면, 내가 너에게 묻겠는데, 우리는 누구와 비교해서, 아니면 무엇과 비교해서 문명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니?"(271)
- P271

[15] ""나는 저 여자를 사랑했다." 이번에는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거기에 내 입술을 힘껏 비볐다. 나는 갑자기 그가 나와 닮았다고 느꼈다. 그는 고통을 느꼈고, 그 고통속에서, 그는 더 진실하고, 더 완벽하고, 더 인간적이었다."(307)
- P307

[16] "아버지는 속이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느꼈습니다. 과인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 군주의 권위를 포기하고, 저에게 술을 따라 주고, 속내를 이야기하고, 현재의 문제를 함께 이야기했죠. 아버지는 속이고 있습니다.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저를 가두었습니다. 저도 가두게 내버려두었죠. (...) 이런! 돌대가리를 연기하고 싶었던 고집덩어리인 것이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신격화가 남았습니다. 그 차 사건을 바로잡은 놀라운 능력 말이죠. 저는 원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332)
- P332

[17] "나는 생각했다. 무대 위에서 예술가는 박수를 받거나, 아니면 야유를 받는다. 핵심은 예술가는 완전한 무관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354)
- P354

[18] "나는 내가 지나온 과거에서 단 1그램도 놓치지 않았다. 나의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단순했다. 나는 게임을 했고, 내가 이겼다. 나는 반항했다. 나는 궁핍했고, 궁핍한 자의 반항이었다. 궁핍할 때 사람들은 반항하지 않는다. 프랑스 총영사관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봉건 영주들 앞에서, 그리고 또 무관심한 사람들 앞에서, 나는 궁핍하고, 천하고, 탈렙이라도 짓밟아 버릴 수 있는 지푸라기에 불과했다."(358)
- P358

[19] "프랑스에 가서, 나 자신을 단련시킬 것이다. 사람들은 앞다퉈 나에게 체념하고 사는 낡은 삶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사회개혁, 노동조합, 사회복지, 파업, 테러리즘과 관련된 사상의 더미 속에서, 그 무엇이라도 흡수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연금술사로서 살았다. 아마도, 몇 년, 20년, 60년이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화학자로 살 것이다."(360)
- P360

[20] "군주, 당신에게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곧 봅시다!"(360)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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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5주년 에디션, 확장판, 양장) - 우리도 그렇게 만났잖니
하정 지음 / 좋은여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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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할머니' 5주년 에디션과 인연들

- 장래 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하정 지음 [좋은여름] | (2024)




 

이 책이 처음 나온 지 벌써 5주년이라고 한다. 무려 90여 페이지가 추가된 빨간색 양장 에디션이 다시 나왔다. 초판이 나왔을 때 책에 담긴 사연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책 만드는 분께 소프트 커버와 양장본의 제작 방식이 또 다르다는 말을 듣고, 신기하기도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냥 소프트커버용으로 만든 파일 그대로 양장본 제작에 사용하는 줄 알았던 나는,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손길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즈음 ''이란 물건이 만들어주는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물론 이건 대개 독자에게 해당될 것이다. 작가로서는 사람과의 인연이 책으로 이어진다. 이 책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가 그렇다. 그것도 이 우주에서 아주 희귀한 확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인연이 죽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나온 귀여운 할머니’ 5주년 에디션은 이 인연이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동안 저자는 이 인연을 어떻게 돌보고 가꾸어왔을지 내심 궁금하다.


 

초판과 5주년 기념 에디션 모두 작은 독립서점에서 구입한 것은 묘한 우연이자 인연이다. 책방과의 인연, 그리고 책방지기와의 인연이 이 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이 나를 알아본 것이라 하겠다. 책 속의 인연이 내게도 살짝 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건 분명 책이 마련해준 인연이다.


 

요즈음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아파트의 벽이 얇아 이웃집 방귀 소리나 전화벨 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기도 하다. 반면 이웃과 진심어린, 때론 시기어린 대화라도 나눌 기회가 드물다. 이런 팍팍하고 단절되어가는 도시 생활 속에서 '귀여운 할머니' 이야기는 독자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어 준다. 우리에게는 이미 서로 이어지고자 하는 연대의 유전자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거나 잃어가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내 장래희망은... 그러니까, 귀여운 할머니와 매일 만나는 것이다.

각자 온전한 존재로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함께하는 일상이 하나의 즐거운 의식(ritual)으로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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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17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15년 전만해도 누구네가 이사 오면 시루떡 한 팩씩 돌리기도 했는데 그런게 없어졌어요. 그때 넙죽 받아 먹지만 말고 답례도 하고 그럴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ㅋ
얼마전 양장본이 재활용이 안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양장본을 포기하고 살아야하나 싶기도 하고. 출판사도 고민이 많겠어요.
세상에 모든 여자들이 귀여운 할머니가 되면 좋겠는데 울엄마 보면...ㅎㅎ

초란공 2024-01-17 23:25   좋아요 1 | URL
아 그렇네요. 떡돌리고 음식 오고가고 했는데요. 층간/세대 간 소음이 심해서 예민해지긴 쉬운것 같고요. ˝어제 밤에 전화벨 소리 너무 크더군요˝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말이죠.

양장본 재활용 문제도 있군요. 저는 편집 방식이 양장본하고 소프트커버용하고 완전히 다르다는 내용만 들었거든요. 그리고 귀여운 할머니는 앞으로 많아져야 할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