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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77주기, 우리에겐 부끄러움이 남아 있나

-안소영의 장편소설시인/동주밤이 선생이다를 읽으며

 



오늘이 윤동주 시인의 77주기라고 한다. 시인은 차가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216일 눈을 감았다. 몇 년 전에 읽었던 안소영 작가의 시인/동주를 들춰보다가 식민지의 땅에서 스물여덟 해를 살다간 시인의 발자취를 다시 발견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가 태어난 곳(중국 길림성 용정)과 눈을 감은 곳(일본의 형무소)이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를 떠올리면 무심한 이런 사실에도 안타까움이 더한다.

 


시인/동주를 읽게 된 것은 저자의 다른 역사소설 책만 보는 바보(2005)를 읽고부터였다. 책을 너무나 사랑하여 간서치라는 별명을 스스로 짓고 또 그렇게 불리었던 이덕무. 그의 삶 또한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울 만큼 가난하고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사람과 자연을 부단히 사랑하고 긍정했던 그는 현실에서 너무나 무력했다. 서자출신으로 오랫동안 관직을 얻을 기회도 없었다. 추운 겨울날 구멍 뚫린 창과 문으로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기 위해 소장하던 논어로 이불을 삼고, 한서로 바람을 막았다 했다. 후대 사람이 이덕무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 일화는 일견 낭만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 삶을 살아냈던 본인과 가족들에게는 그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고된 시련이었을 테다. 안소영 작가는 이렇듯 바람 부는 날 심지를 꼭 붙들고 있는 촛불처럼, 엄혹한 세계에서 삶을 견디어 내던 인물들에 눈길이 가고 손길이 더 갔던 모양이다. 시인/동주중에서 시인이 습작기에 썼던 초 한 대라는 시가 소개되어 있어 다시 눈으로 읽어 보았다.


 

초 한 대 -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시인/동주에 인용된 시 초 한 대(1934)에서 재인용함, 79)

 


시인 곁에는 머리가 비상하고 총명한데다, 신춘문예 당선까지 했던 동갑내기 친구 송몽규가 있었다. 위에 인용한 시는 송몽규가 임시 정부 군관 학교에서 독립군 간부 훈련을 받기 위해 떠난 후, 윤동주가 썼던 시라고 한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친구의 앞날을 예감했을까. 자신의 열일곱 번 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쓴 이 시에는 혼자 남은 시인의 감상이 담겨 있는 듯하다. 국사 시간에 들은 기억으로 1930년대면 일제의 수탈정책이 더욱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습작시를 썼던 소년 윤동주도 현실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쳐내야할 세력이 바로 눈앞에서 모든 이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1910년에 출생해서 1937년에 요절한 시인 이상 역시 나라가 사라져버린 땅에서 태어나 살았던 인물이다. 책 속의 여러 정보와 상황은 시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상상만으로 그의 삶을 파악했다고 하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정서 중 흔히 이야기 되는 것이 염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나라는 사라져버렸고, 친구 몽규는 보장된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독립군이 되는 길을 떠났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피지배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혜택을 받았던 지식인으로서 자신은 어떤 길을 가야할까를 자문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았을 그는 내게 거울 앞의 시인으로 보였다. 참회록(1942)이란 제목의 시에는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앞에 선 화자가 등장한다. 밤마다 녹슨 거울을 닦아보아도 부끄러운 나의 모습만 비친다. 나는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할까. 막막하고 외로운데다, 답답한 현실이 시야를 가린다. 또 일본 유학 중에 쓴 것으로 보이는 쉽게 씌어진 시. 일본식 육첩방 집에 앉아 있던 비오는 어느 날 밤, 자신의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져도 되는지 자문하며 또 부끄러움을 느꼈을 시인을 상상해본다.


 

(...)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시인/동주에 인용된 시 쉽게 씌어진 시(1942)에서 재인용함, 229)


사전에서 부끄러움과 관련한 단어를 무심코 찾아보니 여러 연관어가 나온다. 자괴감, 자괴지심, 수치심, 망신, 모욕, 수줍음, ‘볼 낯이 없다’, ‘떳떳하지 못하다등등. 윤동주 시인이 간직했던 부끄러움의 정서를 보다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있을까 궁금했다. 우선 나는 시인의 시대를 온전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그토록 싫어하고 멀리하던 시/문학을 성인이 되어 찾아 읽게 된 경위가 새삼 궁금해진다. 물론 무엇보다 책을 읽는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시를 한번 읽어보라고 권한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을 조금씩 접하면서 점점 시적 상상력이란 표현을 점점 많이 접하고 있다. 내게 문학적 상상력, 시적 상상력은 우선 공감을 통해 타인의 삶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문학 고유의 자리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이것이 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 앎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성경 속의 표현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러한 내용들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전제하기 때문에, 문학은 분명 역사 시대의 산물이다. 인간 한 명 한 명은 타인들과 이루는 사회 속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축적된 기억의 총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에 문학을 생산한 사람은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미래의 인간과 조우한다. 내가 작품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윤동주 시인의 심정을 복원할 수는 없어도, 시에 드러난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설과 시를 생산하는 방식은 구체적인 과정에서 많이 다를지 모르지만, 타인의 시선과 감정을 상당부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문학과 다른 분야와의 뚜렷한 차이점일 것이다.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정서와 시적 상상력을 떠올리다가 문학비평가 황현산의 산문 한 편이 생각났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칼럼 한 편이다. 2009년에 있었던 용산 철거 현장의 참사를 보고 남긴 글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였다. 그는 시위자 다섯 명과 경찰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졌는데도, 이 철거를 지시한 사람들이나 이 문제의 해법을 지닌 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음에 놀라고 이를 이야기한다. 이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문제의 진원지로부터 시간적·공간적으로 멀어지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황현산이 이 칼럼에서 재인용한 시인 진은영의 용산 멜랑콜리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33, 진은영의 시 용산 멜랑콜리아를 재인용함.)


 

황현산은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정작 비극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이란 것이 뭔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현대인들에게 닥친 실존적인 위기가 바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의 소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일본식 이름을 써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청년 시인의 마음이 사라져가는 것을 상정해볼 수 있다. 현대인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타인의 슬픔과 상처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간다면, 인간을 고립과 소외로 몰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 될 것이다. 인간 소외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소멸되어버린 결과라 하겠다. 타인의 슬픔과 상처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 말이다. ‘부끄러움은 바로 이러한 상상력을 지닌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될 테다. 문학 연구자는 아니지만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적 상상력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부끄러움이 뭔지 아는 능력이야말로 시적 상상력의 가장 큰 효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에게 시적 상상력은 인간이란 종의 생존에 결정적인 징후가 된다.


 

윤동주 시인의 77주기를 맞아 소설 시인/동주을 펼쳐 인용된 시인의 시들을 모처럼 따라 읽어보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시의 정서를 떠올리다가 문학 비평가 황현산의 글까지 다시 찾아보았다. 몇 년 전에 이 책들을 읽을 때는 문학/시적 상상력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 이제는 왜 시인이 용산 참사를 이야기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처럼 둔한 사람에게 황현산 선생은 친절하게 그 이유도 일러주었다.


 

이 높고도 활달한 감수성의 인간들이 용산에서 그 열정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진한 슬픔과 가장 깊은 상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과 상처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자신의 슬픔이고 상처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32)

 


이것이 바로 시적 상상력의 본질이 아닌가. 그리고 고통 받았던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함께하지 못했던 이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의 기반이 아닐까. 이 칼럼이 발표된 지 13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은 조금 나아졌을까 궁금하다. 아니면 적어도 윤동주 시인이 부끄러움을 느꼈던 80년 전보다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물론 눈에 보이는 것들’(살림살이)은 나아진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어떤가? 이렇게 적고 보니 이제 시를 읽는 일이 내게 어떤 의미와 지향을 보여주는지 조금 더 명료하게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시를 읽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부끄러움의 연대를 이루어내고 타인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들처럼 시를 쓰지 못해도 말이다



또 시를 읽는 행위는 이 부끄러움의 연대를 기반으로 집단 혹은 공동체의 기억을 형성하는 일일 것이다. 공동체의 기쁨과 긍지뿐만 아니라, 집단의 상처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덮어버리고 잊어버릴 때, 인간은 서로를 고립시키고, 서로를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 만날 여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인간과 기계는 구분이 없어지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 읽기란 개개인이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저항행위이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여전히 부끄러움이 남아있는지 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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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2-17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줄 알았으면 어제 영화 <동주>라도 볼 걸 그랬습니다.
왜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하루 지나 여기서 보다니.
부끄럽네요.ㅠ

초란공 2022-02-17 21:21   좋아요 1 | URL
아 저는 영화 제목이 생각이 안났어요. ㅜㅜ
아마 70주기 80주기에는 행사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 저기서 작은 행사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코로나 때문에 조용히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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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나들목에서 저항하기, 새로운 가능성을 긍정하기


- 보후밀 흐라발의너무 시끄러운 고독(2016)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1960년대 공산주의 체제 하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다. 모국어로 쓰였지만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판매 금지된 이 작품은 작가가 66(1980)가 되었을 때 비로소 타국의 언어로 공식 출간되었다. 소설의 화자인 는 한탸라는 인물이다.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생쥐들과 함께 삼십오 년 간 책과 폐지를 압축했다. 은퇴를 5년 앞두고 있는 그는 은퇴 후 모은 돈으로 압축기를 사들이고자 했다. 기계를 외삼촌 집의 정원에 두고 매일 폐지 한 꾸러미씩 만드는 삶을 꿈꾸었다.


소설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공산화된 체코에서 지식인들이 겪었던 수난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압축기 속의 책과 폐지처럼 억압 받았고, 자신이 몸담았던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소설 속의 철학교수, 중앙난방 제어실의 근무자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 청소부, 성당 관리자등이 그런 예다. 지식인들은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체제가 강요하는 상식과 충돌하는 존재들이었기에,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했다. 소설에는 하구수에 사는 회색 쥐와 검은 시궁쥐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하수구는 인간 사회의 또 다른 은유였다. 이곳에서 두 종류의 쥐들은 전쟁을 벌였고, 결국 검은 시궁쥐가 패배했다. 시궁쥐는 추방당한 지식인들이었다. 나치가 대학을 폐쇄되기 전까지 흐라발은 법학을 공부했던 지식인이었다. 그 역시 이런 시대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다른 지식인들처럼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폐지 작업공은 그 중 하나였다. 소설에는 시대를 관통했던 작가의 경험과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탸는 압축기의 버튼을 번갈아 누르며 책과 폐지를 정육면체 꾸러미로 만들었다. 기계가 작동하는 사이 그는 단지에 받아 놓은 맥주를 마셨고, 버려진 책들을 펼쳐 읽곤 했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10) 이것이 그의 책읽기 방식이었다. 작업 중 발견한 희귀 도서는 집에 가져가 쌓아두기도 했다. 이렇게 하기를 삼십오 년, 그는 마침내 현자가 되었다. 비록 목욕이라면 질색인데다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진동해도 가방에 든 책만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일을 신께서 축복하신 직업이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머리는 보물 같은 문장과 사유가 가득한 알리바바의 동굴이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작업 중에도 그의 상상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서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그의 고독이 너무나 시끄러웠던 이유다.


한탸는 독신으로 지냈지만 젊은 시절엔 그에게도 러브 스토리가 있었다. 비록 똥에 얽힌 사건으로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프라하 교외에 사는 옛 연인 만차를 보러 갔을 때, 한탸는 잿빛 머리가 된 그녀의 새 집을 보았다. 만차는 사랑과 온전한 의지로 자신의 집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 정신적인 열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모습을 조각하는 남자까지 곁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과 러브 스토리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는 또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쥐들이 책을 올려둔 천개를 갉아대는 소리에 잠들지 못했던 한탸는 젊은 시절 그의 삶에 갑자기 나타났던 집시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한탸의 퇴근길에 따라와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집시 여자의 이름도 몰랐지만 그녀는 저녁 장작용 널빤지를 구해와 매일 불을 지피고, 스튜와 소시지로 저녁을 차렸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났을 때처럼 예고 없이 사라졌다. 게슈타포에 붙잡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는 이처럼 온전히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인간 존재의 나들목 - 폐지 압축기


사랑이 실패로 끝나버리고 낭패를 겪을 때마다 한탸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되뇌었다. 이 말은 소설 전체에서 되풀이되어 발견된다. 무심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의 운명을 응시하는 화자의 만트라였다. 마치 냉혹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다. 한탸가 다루는 압축기에는 두 가지 색의 버튼이 있었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44) 한탸가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이 표현은 언제든 삶의 관성에 매인 인간의 모습을 직관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에겐 세상만사가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69)이었다. 현실은 한탸의 삶에 결코 다정한모습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는 압축기의 왕복운동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기 이루어지는(37) 세상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항아리에 담긴 맥주를 통째 들이키며 일하던 화자는 사람의 환영을 보았다. 성경도덕경의 주인공 예수와 노자였다. 압축기의 전진/후진 버튼에 대응하듯 예수와 노자는 각각 미래로의 전진/낙관의 소용돌이근원으로의 후퇴/출구 없는 원을 표상한다. 예수는 탄생(나옴), 노자는 죽음(들어감)에 대응하기도 한다. 폐지가 작업장에 도착하여 압축기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죽음(노자)이었고, 꾸러미가 되어 나오는 것은 부활(예수)인 셈이었다. 유명 화가의 복제화와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 페이지가 펼쳐진 책이 포개져 압축되면, 폐지 꾸러미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책이 파괴되며 만들어진 꾸러미는 이제 새로운 예술작품이 되었다. 압축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작업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였다.


물성을 지닌 책과 폐지를 맨손으로 꾸리는 작업은 한탸가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문장이 자신의 뇌와 혈관에 스며들게 하고, 자신의 상상력과 의지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할 수 있었으니까. 또 폐지 더미 속에서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으로 조기 출근과 2시간의 추가 근무를 삼십오 년째 마다하지 않았다. 압축기의 버튼을 번갈아 작동시키며 폐지를 작품으로 만드는 일은 그의 삶 자체였다. 연인과의 사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압축기와 함께하는 작업은 그에게 유일하고 온전한 러브 스토리였다. 그러므로 압축기는 그의 삶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삶의 구심점이었고, 세상만사를 통찰하게 해주는 사유의 토대였다. 세상만사의 원리가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왕복운동 하는 기계를 통해 이해되었다. 기계 속의 책처럼 존재를 억압하더라도 한탸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꾸러미처럼, 모든 존재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채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압축기는 모든 존재가 거쳐 가는 나들목이었다.




추방당한 이방인, 새로운 가능성을 선택하다


행복한 삶은 영원하지 않았다. 부브니에 거대한 압축기가 들어선 후 견고하게 보였던 한탸의 삶도 그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 압축기를 보러간 그는 폐지가 지닌 종이의 감촉, 감각적인 매력에 무감한 채 장갑을 끼고 일하는 작업자들에 모욕감을 느꼈다. 문명이 만들어낸 거대한 새 책 더미가 그대로 폐기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맥주 대신 우유와 코카콜라를 들이키는 젊은 일꾼들에 용기마저 잃었다. 휴가 및 여가 계획을 이야기하는 젊은 작업자들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는 작업량을 채우느라 한 번도 휴가를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99)라는 독백에는 평생 일해 온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하는 듯한 좌절과 체념의 감정이 배어 있었다.


거대한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 만에 한탸는 새로운 시련과 마주했다. 사회주의 노동당원 청년들이 그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기계부품처럼 다른 작업자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제 평생 일했던 직장을 떠나 백지를 처리하는 인쇄소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새로 온 일꾼들은 한탸의 압축기로 불과 한 시간에 다섯 꾸러미를 만들어냈다. 청년들을 칭찬하는 소장을 뒤로 하고 한탸는 피로감과 굴욕감에 몸이 마비되었다. 새로운 상황과 기계는 그를 배신했고 오랫동안 누렸던 그의 작은 기쁨을 짓밟았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산업 현장에 획일적이고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다. 그는 스스로 쓸모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고자 시도했지만 이내 좌절했다.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106)는 말에는 깊은 좌절감과 극도의 피로감이 묻어있었다.


한 순간 삶이 뒤바뀐 한탸에게도 변화에 필요한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 비인간적인작업 방식을 거부했다. 작업장을 나와 여러 술집을 전전한 그는 맥주와 럼주를 번갈아 마신 뒤 다시 같은 카페로 돌아왔다.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고단한 시시포스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모습은 예수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미래로의 전진’, ‘낙관의 소용돌이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노자로부터 떠올린 근원으로의 후퇴’, ‘출구 없는 원주변에서 맴도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결국, 한탸는 평생 동안 동고동락 했던 압축기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압축기 속에서 녹색 버튼을 누름으로써 그는 책과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러브 스토리에 온전한 종지부를 찍고자 했던 것일까.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131) 압축기에 들어간 한타가 절대 고독 속에서 스스로에게 외치듯 떠올린 이 말이 내게 못 박히듯 들어왔다. 평생 몸담아온 장소와 시간의 역사가 부정당한 존재가 저항하며 홀로 내뱉은 선언이었다. 그는 상상력이 소멸되어버리고 비인간적으로 변해버린 작업 조건, 나아가 생산성 향상만을 추구하는 획일적인 시스템의 모순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를 거부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은 허먼 멜빌이 창조했던 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비평가들은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에서 합리화된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노동 소외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말한다. 필경사 바틀비는 자신을 고용한 변호사가 지시한 일에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지 사흘만에 작업 거부를 통해 수동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흐라발의 소설 속 인물, 한탸 역시 새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만에 작업장 밖에서 방황하다가 작업장으로 돌아와 삶을 마감한다. 바틀비와 한탸가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 자체를 거부하고 이에 맞서 죽음을 택했던 상황은 사망한 지 사흘만에 부활한 예수의 행보와 대척점을 이룬다. 나아가 한탸와 바틀비의 비타협적인 거부 행위는 단지 행위만을 부정하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기대되었던 순응적인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 무화한 것이다. 두 인물의 저항은 수동적이나마 자본가들 혹은 권력이 만들어 놓은 게임 규칙 자체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한탸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여 백지를 처리하는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압축기로 들어가며 삶의 근원으로 후퇴하기로 한 선택, 감옥에서 식사를 거부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바틀비의 선택과 접점을 이룬다. 두 인물 모두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선택했다. 이들의 행위는 상식이 폭력으로 작용하며 존재를 소외시키고 추방하는 현실 자체를 전복하는 새로운 차원의 긍정행위다. 한탸가 간파했다는 그리스도의 냉혹한 말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37)는 바로 이 지점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두 소설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한 상황을 담은 소설이기도 하다. 흐라발과 멜빌의 소설은 정치 및 경제 여건의 변화로 추방되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다. 바틀비와 한탸는 세상의 게임을 만든 설계자·기득권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패배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들은 세상의 규칙과 상식을 거부했고, 인간적인 삶의 본질을 관통하며 흐르는 존재의 가치를 지켰다. 한탸는 스스로 선택한 고독을 끝까지 사랑했다. 모든 사람들이 한탸가 간 길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비인간적이더라도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갈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매일 소박하지만 자신만의 예술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1]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9)

[2]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10)

[3]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12)

[4]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18)

[5] "기체나 금속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생명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분열을 겪듯이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며, 세상이 통째로 휘청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37)

[6] "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바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 (44)

[7]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46)
-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문구를 풀어서 되뇌는 화자의 만트라.


[8]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내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예수가 극적인 갈등 상황과 싸우고 있다면, 노자는 도덕과 관련된 상반되는 요소들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조용히 명상한다." (52)

[9]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93)

[10]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106)

[11]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한 이유는 뭘까?" (129)

[12]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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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2-09 17: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처음 나왔을 때 한 번 읽고,
독서 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두 번 읽은 책이네요 ^^

확실히 고집스럽게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모습은 바틀
비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네요.

mini74 2022-03-08 17: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 리뷰 당선 감축드리옵니다 ㅎㅎ *^^*

초란공 2022-03-09 11:20   좋아요 0 | URL
mini74님 감사해요. 리뷰 2관왕에 동영상까지^^ 저는 mini74님만 보고 따라갑니다^^

새파랑 2022-03-08 17: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려요~!! 연속 당선이신거 같아요 ^^

초란공 2022-03-09 11:21   좋아요 3 | URL
연속 2관왕 하기는 처음이네요^^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3-09 11:22   좋아요 3 | URL
이하라님 감사드립니다. 코로나도 조심하시길요.

얄라알라 2022-03-10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3관왕 가즈아~~ 구호를^^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3-10 22:39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님 감사합니다. 3관왕 이전에 저는 가랑이 찢어집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7-11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님의 리뷰를 읽고 책을 읽는 게 더 나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ㅎ
 
카오스의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 선집 8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 그린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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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하는 행위

-모리스 블랑쇼카오스의 글쓰기(2012) 읽고



 


카오스의 글쓰기는 비평가이자 사상가 모리스 블랑쇼가 남긴 단상 형식의 글 모음집이다. 17세기의 수학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이 남긴 팡세의 형식과도 유사하다. 제목의 카오스재난, 재앙을 의미하는 désastre에 대한 번역어를 옮긴이가 무질서와 같은 국면으로 해석하여 채택한 용어로 이해된다. 옮긴이가 선택한 용어에 대해 나름의 견해와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타당하다. 그는 용어 선택을 고심하고 이와 관련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로 드러난 결과물은 저자뿐 아니라 번역가의 손을 떠난 것이고, 용어의 정합성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나는 카오스를 이따금씩 파국이라는 의미로도 읽었다. 불시에 들이 닥치는 것, 정체가 파악되거나 통제될 수 없기에 완전한 수동성을 지닌 무질서, 손을 쓸 도리가 없는 국면에 가깝다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파국에는 부정적인 암시가 있기에 온전한 대안은 아니다. 한편 카오스는 도래한 기점에서 어김없이 진행되는 상전이 현상의 경계같은 것, 하지만 존재의 비가역적인 변신이자, 환골탈태의 전조이기도 하다. 질료는 그대로이나 동일체는 사라지고 다른 성격의 존재가 되는 상황으로, 그 전후가 결코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카오스는 주체가 자신의 뜻대로 불러오거나 회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거대한 물결 속에 뒤섞여 흘러갈 수밖에 없는 쓰나미와 같다.


 


죽음과 글쓰기


이 책에서 블랑쇼는 여러 유형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언어의 부정성이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죽음존재가 사라지는 결정적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이 두 유형의 죽음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자에 따르면 언어가 가져오는 죽음이란 구체적 시공간이 추상적 관념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결정적 죽음은 몸이 구체적 공간(세계)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는것을 말한다. 따라서 두 유형의 죽음은 모두 일종의 분리현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고독을 초래하고 두려움을 가져오기도 한다. 여기에 전자는 후자를 예고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262-263).


작가가 이토록 죽음에 천착하고 이를 글쓰기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블랑쇼의 글쓰기는 그가 통과한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대인과 이들의 메시아사상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는데, 그의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실이 글쓰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동시대인으로 나치의 만행을 목격하고, 저널리스트로서 이를 고발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친구로 만나 평생 교제했던 에마뉘엘 레비나스 역시 유대인이었다. 블랑쇼는 동료가 겪은 고통과 공포를 옆에서 지켜보았고, 레비나스의 가족을 나치의 위협으로부터 피신시키고 보호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저자는 불시에 들이닥친 카오스의 공포와 죽음을 말하는 글쓰기와 결코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블랑쇼가 겪은 재난’, ‘카오스의 경험은 아주 특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카오스는 모든 것을 배려한다(The disaster takes care of everything).”(25)라고 썼다. 이 문장의 영역문에 'take care of란 표현이 보인다. 이 표현은 일차적으로 주체가 제공하는 돌봄과 배려의 의미를 갖지만, ‘책임과 영향관계를 가리키는 의미도 고려해볼 수 있다. 곧 카오스가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들이닥친다는 사실, ‘카오스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는 의미로서 말이다. 따라서 배려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카오스가 미치는 무차별적인 오지랖을 일컫는다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겪게 될 죽음을 포함하여 재난과 반드시 마주하고야 만다. 카오스’, ‘재난혹은 파국은 광야에서 칠흑 같은 밤이 다 가도록 천사와 몸싸움을 벌였던 성서 속의 야곱처럼, 불가항력으로 다가오는 무질서와 혼란의 국면이다.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면 야곱은 천사와 힘겨루기를 했을까. 어쩌면 야곱이 상대가 누군지를 알았더라도 카오스의 국면에서는 상대와 힘겨루기 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카오스’, ’재난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한 젊은이를 떠올렸다. 이 젊은이는 자기 가족을 화장터로 데리고 가야 했고, 목을 매달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구출되었다. 친위대가 총살형을 집행할 때 그는 희생자의 머리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목덜미에 총알이 잘 들어가도록 말이다(147). 이런 일을 겪었던 사람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성적으로 진술하리라 기대하긴 불가능하다. 처음에 극한 공포감이 찾아왔어도, 역치를 넘어버린 자극이 만성화될 때, 모든 것이 무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집단학살을 목격하고 기절했다는 나치의 2인자 하인리히 힘러가 학살의 빈도를 늘리고 가스실을 사용하도록 명령한 것처럼 말이다. 생명이 대상화되고 사물이 되어버린 순간, 아우슈비츠에 있던 젊은이는 공포감 대신 판단 중지가 찾아오고, 기억 상실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 젊은이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 폭력이 남긴 무()의 흔적이다.


블랑쇼에게도 재난혹은 파국의 경험이 갑자기 찾아왔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처럼, 블랑쇼 역시 총살당하기 직전에 살아난 경험이 있다. 그는 자신의 집 앞에서 나치에게 처형당하기 직전, 아군의 폭격과 레지스탕스의 선제공격으로 구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순간을 자서전적인 책 나의 죽음의 순간에 기록해두었다고 한다(12). 극한 경험을 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석방 직후 감옥에서 처음 간질 발작을 겪었던 것처럼, 블랑쇼에게도 불가항력으로 찾아온 경험은 그의 몸 어딘가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갔던 두 사람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면, 재난 속에서 재난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글쓰기라는 추방에 처해 쓰는 자. 그 추방의 장소는, 그가 선지자일 수 없는 자신의 고향이다.”(118)


앞에서 언급한 두 작가의 사례처럼 글쓰기는 일상이 전복되어버린 자들,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이 무엇보다 의지할 수 있는 영역으로 보인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등장하는 의사 아마데우 프라두는 외관상 음울해 보이는 경고(memento)가 눈 덮인 수도원의 뜰에 우리를 가두어두지는 않는다.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448)라고 썼다. 프라두에게 재난은 비밀경찰 멩지스와 함께 예기치 않은 상태로 도래했다. 죽어가던 멩지스를 살려낸 후 그를 찾아온 경고는 이웃 사람들이 뱉었던 침, 사람들의 경멸어린 언어와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유대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경계 밖으로’,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내쳐진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도 열어주었다.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던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발 디딜 수 있는 고향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광기와 글쓰기


블랑쇼는 카오스를 이야기할 때 광기에 대해 언급한다. 다만 광기가 곧 카오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카오스: 광기가 되어 버린 사유가 아니며, 아마 자체의 광기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사유도 아닐 것이다.” (25)


번역자가 재난이란 표현 대신 카오스라는 용어를 선택한 이유 역시 이것이 규정하기 힘든 무질서의 상태처럼 파악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블랑쇼가 말하는 카오스는 도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임박해 있는 것’(23)이며 재난(désastreuse)의 필연성에서 비롯된 전락(轉落)의 신호’(24). 하지만 카오스는 그 자체로 긍정과 부정의 판단과는 무관한 듯하다. 그는 카오스가 다만 재난을 가져오는 불행한 것만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한다.”(173)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카오스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는 경고처럼 작용한다. 다만 바깥에서 나아갈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뿐. 이 때 추방당한 자의 글쓰기는 광기에 대항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행위로 보인다.


카프카가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쓴다는 사실을 한 친구에게 알려 줄 때, 그는 쓴다는 것이 이미 광기, 자신의 광기이며, 일종의 의식 밖에서 깨어 있는 것, 불면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광기에 대항하는 광기인 것이다.”(89)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204)


셸링: “영혼은 인간 안의 진정으로 신성한 것이다. (...) 인간 정신이 어떤 비-존재자인 영혼과, 즉 지성이 없는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본질(영혼·신과 분리된 인간 정신)광기이다. 지성은 규제된 광기이다. 자신들 안에 어떠한 광기도 없는 인간들은 불모의 공허한 지성의 인간들이다...”(쿠르틴 옮김)(199)


블랑쇼에게 작가는 단지 깨어있는 자가 아니라, 낮에도 수면이 불가능한자다. 그들은 광기가 수반하는 고통 속에 깨어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 듯하다. 카프카의 글쓰기가 광기에 맞서는 광기의 제스처였던 것처럼, 인간의 광기에 대응한 균형유지(글쓰기)는 인간이 지불해야하는 대가였다. 이것이 인공지능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내 안의 광기와 마주하고 이에 맞섬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광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예술 위에 있지 않은 글쓰기는 우리가 예술을 애호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며, 그 자체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지운다.”(103)


글 쓰는 행위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인간의 광기를 다듬은 결과로 이해된다. 예술가들의 작업은 주로 사회 혹은 규범으로 정해지는 경계 밖에서 이루어진다. 경계 내에서 인간의 광기는 으레 규제되고 억압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일정 부분 다듬어 지고 경계 내로 받아들여진 인간의 광기로 볼 수 있겠다. 사진론을 이야기했던 롤랑 바르트가 광기를 다루는 예술로서의 사진을 이렇게 이야기한바 있다.


사회는 사진을 쳐다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할 위험이 있는 광기를 완화시키고, 사진을 조용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쓴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는 두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방법은 사진을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밝은 방, 동문선, 2006, 143)


앙리 마티스는 사진이 기록에 적합한 매체라고 규정하며 예술이 될 가능성을 부정했던 반면, 바르트는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였다. ‘완화되고 다듬어진 광기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사진이 예술임을 인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광기에 맞서는 예술 행위로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글쓰기 -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하기


나의 읽기와 쓰기의 시작은 내가 속한 사회에 내 자리가 없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내 나름의 열심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열심이 아니었다. 나는 내 안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허둥댔으나, 그럴수록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사회로부터 분리되고 부유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읽기와 쓰기는 나의 쓸모없음을 되새기는 나와 매순간 마주해야 하는 행위였다.


옮긴이 해제에서 번역자는 세르주 르클레르의 말을 빌어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하기에 대해 언급한다. 르클레르에 따르면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해 나간다는 것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혹은 사회화되어 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269). 이때 살해를 위한 무기가 바로 언어.


경계 밖에서 부유하던 나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했어야 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게 닥친 파국앞에서 나를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나를 숨기려고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나를 인정하고 긍정할 수 없었다. 타인을 원망할 수 없었고, 내 삶이 자명하게 실패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카오스의 글쓰기나의 쓸모없음, 그리고 실패한 삶에 방치되어 있는 나를 그대로 긍정할 수는 없었는지 묻는 것 같았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나의 타자와 어쩔 도리 없이 힘겨루기를 하고 기진해버린 야곱이었을 뿐이다.


르클레르의 언급을 참고하면, ‘재난의 경고가 찾아왔을 때 나는 내 안의 아이를 살해하지 못한 셈이다. 이 아이는 생명의 움직임이기에 결코 죽을 수 없음에도 나는 이 아이를 살해했어야 했다. 아이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지만 그를 살해하지 못한 것, 나아가 살해된 아이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데서 나의 위기가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제는 나에게 강력한 무기인 언어가 주어졌음을 안다. 블랑쇼에게 글쓰기는 인간을 통해 드러난 홀로코스트라는 광기에 맞서고, 고통 속에서 온전히 말해질 수 없었던 언어의 죽음과 사람들의 결정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애도 작업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다만 깨어 있다.”(101)


도스토옙스키나 블랑쇼,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 프라두는 자신의 예상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경계 밖으로 내쳐진 자들, 완전한 수동성으로 삶에서 분리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카오스의 국면에서 이들의 글쓰기는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아이를 살해하기이면서 동시에 살해된 아이를 위한 애도하기였다. 블랑쇼가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 수용소와 가스실, 홀로코스트를 빈번히 글로써 호명하는 이유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고, 이것과 분리되기 위해서 죽음을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라는 블랑쇼의 말에는 작가가 겪었던 고통이 숨어있었던 셈이다.


블랑쇼는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192)라며, 동시에 고통과 함께 사유하기를 배우라고(239) 제안한다. 나 역시 글쓰기를 통해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할 수 있기 바란다. 이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살해된 아이를 애도하는 과정을 전제한다. 이 작업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임박한 카오스앞에서 나를 긍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카오스는 모든 것을 배려한다(The disaster takes care of everything)."(25)

[2] "글쓰기라는 추방에 처해 쓰는 자. 그 추방의 장소는, 그가 선지자일 수 없는 자신의 고향이다." (118)

[3] "카오스: 광기가 되어 버린 사유가 아니며, 아마 자체의 광기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사유도 아닐 것이다." (25)

[4] "카프카가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쓴다는 사실을 한 친구에게 알려 줄 때, 그는 쓴다는 것이 이미 광기, 자신의 광기이며, 일종의 의식 밖에서 깨어 있는 것, 불면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광기에 대항하는 광기인 것이다." (89)

[5]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 (204)

[6] "셸링: "영혼은 인간 안의 진정으로 신성한 것이다. (...) 인간 정신이 어떤 비-존재자인 영혼과, 즉 지성이 없는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본질(영혼·신과 분리된 인간 정신)은 광기이다. 지성은 규제된 광기이다. 자신들 안에 어떠한 광기도 없는 인간들은 불모의 공허한 지성의 인간들이다..."(쿠르틴 옮김)" (199)

[7] "예술 위에 있지 않은 글쓰기는 우리가 예술을 애호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며, 그 자체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지운다." (103)

[8] "애도 작업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다만 깨어 있다." (101)

[9]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192)

[10] "고통과 함께 사유하기를 배울 것."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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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30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건강은 많이 나아 지셨나요?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 대신 SNS이미지 놀이 할것 같습니다 ㅎㅎ

설연 휴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ㅅ^

초란공 2022-01-30 11:06   좋아요 1 | URL
네~ 이제 통증은 없고 찐한 별자리 같은 수포자국이 남아있네요 ㅜㅜ Scott님도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이 책은 애초에 이해가 불가능(?)한 책이었다.

하지만 블랑쇼라는 사람과 그의 글을 처음 접하고 받은 인상을 

남기는 정도로 시작해볼까 한다.

훗날 오늘 쓴 글이 엉터리(?)였음을 확실히 알게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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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글을 남기는 것,

텍스트 '바깥'의 모호함이 바로 '카오스', '재난'이다.


그 가운데 언어를 붙드는 행위, 텍스트와 씨름하기.

이 텍스트와 나와의 상호작용이 곧 '내 안의 어린 아이',

'결코 죽지 않는 생명력'을 끊임없이 살해하는 행위가 아닐까.

이건 재난에 대한 부단한 긍정, 깨어있기다.


그러므로 언어를 붙드는 자, 작가는 고통 속에서 결코 잠들 수 없는자,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204)다.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의 참모습.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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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8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2-01-28 10:06   좋아요 3 | URL
저는 아무래도 이 책 때문에 대상포진이 온 것 같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주 원인이라던데요.... ㅜㅜ 그러니 지난 두 주간 피로에 쩔어 있는데 누우면 따가워서 잠이 잘 안오고 ㅋㅋ ㅜㅜ 작가는 아니지만 불면의 고통이 이 책 때문인듯 합니다 ㅋㅋ

stella.K 2022-01-28 10:10   좋아요 3 | URL
앗, 그렇군요. 이제부턴 재밌고 즐거운 책을 읽으십시오. 다시 건강해지실 겁니다.😄

초란공 2022-01-28 10:15   좋아요 3 | URL
네. 그래야겠어요^^
그런데 이 책은 덮고 나면 묘하게 다시 생각나는 매력이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신기하지요. ㅋ
stella님도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stella.K 2022-01-28 10:26   좋아요 2 | URL
ㅎㅎ 그런 지뢰가 있었네요. 앞으로 초란공님 말씀은 끝까지 잘 듣고 24시간 숙성 시간을 거친 다음 말씀 드려야겠군요.🤣
네, 초란공님도 즐거운 명절 보내십시오. 고맙습니다. 🤗

얄라알라 2022-01-28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어를 붙들다˝ 뭔 말이 이렇게 멋진가? 감탄하다가 댓글을 읽다보니 초란공님, 최근 대상포진을 앓으셨나봅니다. 후유증도 생길 수 있는 힘든 병이라고 들었는데 쾌유하셔서 컨디션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초란공 2022-01-29 07:59   좋아요 1 | URL
네 ㅜㅜ 이제 다 나아갑니다. 그나마 통증은 약한 상황이라 다행입니다^^;; 주말에는 <환각> 정리해야겠어요. ㅋ
 
리스본행 야간열차
빌 어거스트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외 출연 / 에이스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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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2014)

우리는 이따금 자신과 작별하는 여행이 필요하다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의 철학자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이름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존엄성, 자유와 예속 등의 문제를 다룬 철학교양서로 국내에도 알려진 그는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자기 존중의 문제를 다루었다. 소설은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생각과 동선을 따라간다. 57세인 그는 교사이자 고전문헌학자다. 제자였던 부인과 5 만에 이혼한 , 17년간 과거의 침묵 속에 은둔하며 살았던 남자다. 심한 근시인데다 불면증에 시달린다. 머리카락이 가닥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언제나 낡은 재킷과 자라목 스웨터를 걸치고, 무릎이 튀어나온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다니는 남자. 하지만 그는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고전어처럼 확고부동한 그의 일상을 뒤흔든 것은 한 여자의 자살기도 사건이었다. 비 오는 날 출근하던 길에 다리 위에서 마주한 우연한 사건으로 그의 세계에는 균열이 생겨났다. 좀처럼 실수하지 않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는 붉은 가죽 외투를 입은 여자가 남긴 포르투게스라는 발음의 여운을 기억하며 헌책방에서 한권을 집어 들었다. 아마데우 이나시오 알메이다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의사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책방 주인이 읽어주는 문장에 이끌려 책을 구입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28)

 


이 문장을 시작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 포르투갈어를 독학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어 CD 들으며 고전어에서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 느꼈다. 그는 작은 일탈 정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보기 시작했다. 유럽 지도를 꺼내 리스본으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망설임 없이 직장을 떠나면서 사직서를 겸한 편지를 교장에게 보냈다. 편지에는 자신이 떠나는 구체적인 이유를 대신하여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대목을 인용했다.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44)


 

여기에 인용한 문장은 소설 전반의 주제와 비교할 때 모호하게 다가온다.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면서 동시에 건너 불구경하듯 거리를 두고 이들을 비난하는 모양새다. 표현에 주목한 이유는 그레고리우스가 감행한 일탈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대목 천병희 교수의 번역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보다 드러난다.


 

영혼이여, 너는 학대하고 있구나, 자신을 학대하고 있구나. 그러면 너는 자신을 존중할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은 짧고, 인생도 거의 끝나간다. 하거늘 너는 아직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들의 영혼에서 행복을 찾는구나!(명상록 천병희 옮김, , 2005, 34p)


 

문장은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도덕적 의무감과 사회적 역할에 매몰되어 짧은 인생동안 끌려 다니는 인간의 모습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소설에 제시된 역자의 번역보다는 천병희 교수의 번역이 소설의 주제와 잘 어울린다. 아우렐리우스의 인용문은 타인과 사회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실마리를, 그리고 예속 상태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의 미망을 깨달으라는 외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레고리우스가 불시의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불가피하고 절박한 이유일 있다.



 

삶의 다양한 양태를 보여주는 도시 이야기


이제 소설의 장면은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리스본과 베른을 오간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만 해도 기차로 26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갈 의사가 남긴 책을 지치지 않고 번역하며 저자의 생각을 탐험했다. 동시에 의사의 지인들을 만나면서 남자의 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라서 소설은 리스본과 베른이라는 도시 대표되는, 서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그레고리우스의 집과 직장이 있는 베른은 알프스 산맥에 인접한 스위스 내륙의 도시다. 그에게 익숙함과 확실성, 안정감을 주는 도시다. 자신이 가르치는 고전어처럼 느리고 완만하며, 확고한 이성의 통제를 받는 세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조망되던 (127) 누리던 도시였다. 언제든 고전어 및 고전문학에서 학생들의 인정을 받으며 만족스러운 삶을 있었던 장소였다.

 


반면 리스본은 그레고리우스가 익숙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도달한 도시다. 그에겐 삶에서 예기치 않게 마주하는 낯설음과 불확실성, 불안감이 느껴지는 미지의 세계다. 과거에 도시를 강타했던 대지진과 흑사병처럼 말이다. 중세 시대까지 이 도시는 광대한 대서양을 마주한 세상의 , 인식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곳이기도 했. 한편 다리에서 만난 여인의 입에서 나온 단어처럼 빠르고 경쾌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 감정과 호기심에 이끌리는 삶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응한다.


 

여행이란 불확실성으로 떠나는 모험이다. 그레고리우스처럼 마디의 단어에 이끌리거나, 리스본의 의사가 남긴 글에 매혹되어 감행하는 한순간의 일탈이기도 하다. 2000 전의 아우렐리우스가 보았던 것처럼, 소설은 현실의 질곡에 매여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비춘다. 프라두의 부모가 그랬고, 그 역시 이런 환경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기차여행에 대한 열망을 지녔지만, 출발지에서 멀어질수록 강한 향수병을 느꼈던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확고하고 익숙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으나 두려움으로 길을 잃고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독자는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험해보지 못한 채 익숙함과 관성에 머물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있다. 사람들은 도덕과 의무감에 매여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삶을 살아가곤 한다.



죽음이 잉태한 판타지, , 상상력의


그렇다면 우리가 예속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염두에 두면, 문제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문제로도 읽힌다. 자신을 존중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부유하지 않는 일이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이는 자신의 생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단단히 발을 내딛는 이기도 하다. 때론 현실의 벽이 두껍고 높기만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다. 떠나고자 하는 열망과 향수병 사이의 어딘가에 머무는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었던 갈망을 평생 품고 살았지만, 제대로 시도해보지 않았던 약사 조르지 오켈리처럼 말이다. 삶에서 자유를 찾은 이들은 일탈을 꾀하여 소외되고 부유하는 자신의 상황 전체를 뒤흔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불가피한 일탈을 감행했다. 책방에서 구한 책의 저자가 살았던 도시로 떠났던 것이다. 그가 리스본과 여러 도시에서 프라두의 가족과 지인들을 만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의미 찾기였다. 폐교가 된 프라두의 학교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오래 전에 꿈꾸었 도시 이스파한 기억해냈다. 그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무수한 가능성이 놓여 있었음을 깨달았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에 자신이 내린 결정이 모여 도달한 결과였다. 프라두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과감한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상상력임을 깨달았고, 상상력이 발휘할 있게 해주는 힘을 ()에서 찾았다.

 


삶의 관성을 뒤흔드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 , 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판타지의 세계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할 있게 한다. 인생은 번뿐이고 모든 가능성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실패했을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있는 힘도 키워준다. 시적 상상력은 프라두와 그레고리우스의 삶이 모두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과 함께, 두 사람 긴밀히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 프라두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267)라고 썼다. 인간이 평생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의 실체란 살아 있을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넘지 못한다는 공포가 아닐까. 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실패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실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시적 상상력이 필요함을 말한다.

 


여행 중에 그레고리우스는 자주 현기증을 느꼈다. 프라두는 자신의 글에서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448)라고 썼다. 현기증은 그레고리우스를 찾아온 경고였다. 그에게 현재를 일깨우고, 시적 상상력이 필요할 때임을 알려주는 장치로서 말이다. 베른으로 돌아와 검진을 한 그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자, 친구 독시아데스는 나에게 처방전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두려움을 느낀 친구를 존엄한 삶으로 이끌어주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용감한답변이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레고리우스는 인생은 우리가 산다고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던 프라두의 말도 떠올렸다. 확고하다고 믿었던 삶에는 언제든 불확실한 삶이 찾아올 수 있다. 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불확실성에 머물 수 있는 여지와 힘을 마련해주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 이제 소설은 당신이 자신의 이스파한을 간직하고 있는지 묻는다. 때론 스스로와 작별하여 일탈을 감행해도 좋다는 메시지와 함께.




[1]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꾸어놓은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똑같이 시작됐다." (10)
- 소설의 첫 문장

[2]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
- 프라두의 글

[3]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리두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46)

[4]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93)
- 프라두의 묘비명

[5] "내 마음의 강물이 방향을 바꿀 정도로 다른 사람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177)

[6] "우리가 영원토록 우리여야 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인 이 강요된 상황에서 언젠가 벗어난다는 위안은 결코 없다는 뜻인가? 우린 여기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인데, 이런 무지는 축복이다. 불멸이라는 이 낙원은 바로 지옥임을, 그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으므로." (220)

[7]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67)

[8]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292)

[9]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357)
- 프라두의 편지글

[10] "외관상 음울해 보이는 경고(memento)가 눈 덮인 수도원의 뜰에 우리를 가두어두지는 않는다.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 (448)

[11] "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462)
- 프라두가 늘 했다는 말

[12] "존엄하게 죽는 것이란 그게 종말임을 인정하는 거야. 불멸에 관한 온갖 유치함을 극복하는 것이지." (481)
- 주앙 에사가 전하는 프라두의 말

[13] "말은 시(詩)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물에 빛을 비출 수가 있어." (529)
- 실업가 실우베이라에게 그레고리우스가 하는 말

[14] "그때 읽은 신문에서 유일하게 아직 기억하는 단어. 신기루, 환영,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 (537)

[15] "시적 진지함보다 더 진지한 진지함도 있을까? (...) 이것이 프라두와 그를 묶어주는 고리, 아마 가장 강한 연결 고리였다." (544)

[16]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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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13 00: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초란공님. 영화도 분위기 있었고 ~ 초란공님 리뷰 읽으니 아 맞아 하며 감동이 ㅎㅎ 잘 읽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

초란공 2022-01-13 00:53   좋아요 4 | URL
아 이렇게 반가울수가요! ㅋ 오래전에 영화로 먼저 봤을 땐 이게 뭔 영화여...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보니 좀 이해가 왔어요. 굿밤되시길요!

새파랑 2022-01-13 08: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셨군요~!! 제2의 인생과도 같은 여행이 재미있고, 결말도 너무 좋더라구요~!!

초란공 2022-01-13 12:36   좋아요 3 | URL
네. 속도감이 나진 않았지만 정교하게 구성된 철학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까 제가 책 정보를 연동한 것이 아니라 영화 정보를 연동해놨네요. 그런데 수정이 안됩니다. ㅜㅜ

scott 2022-01-20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스본행 야간열차!
가 아닌
리스본의 노랑색 트램! ㅎㅎ

작년에 대 유행 했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보다
이 책이 주는 삶의 교훈과 철학이 깊은 것 같습니다 ^ㅅ^

초란공 2022-01-20 08:34   좋아요 1 | URL
네~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영화에는 정작 중요한 글들이 거의 다 빠져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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