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K. 딕의 말 - 광기와 지성의 SF 대가, 불온한 목소리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필립 K. 딕 지음, 데이비드 스트레이트펠드 엮음, 김상훈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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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1960년대 초 모습 / 오른쪽: 1970년대 모습)





인간의 조건을 집요하게 탐구했던 작가의 인터뷰

- 필립 K. 딕의 말


필립 K. (Philip K. Dick,1928.12.16 1982.03.02데이비드 스트레이트펠드 지음

김상훈 옮김 | [마음산책] | (2023)

 



나는 글 쓰는 게 좋네. 정말로 좋아하지. 난 내가 창조한 등장인물들을 사랑하거든. (...) 책을 탈고하면 상실감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질 정도라네. (...) 소설을 탈고한다는 건 친구들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야.”(38)

 


영화 <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토탈 리콜>의 원작자이자 SF 대가 필립 K. 딕의 인터뷰집 필립 K. 딕의 말을 읽었다. 딕은 캘리포니아의 명문 대학에 들어갔지만, 쓸모없는 지식을 배운다는 실망감과 불안증, ROTC 교련에 대한 거부감으로 대학을 중퇴했고, 곧이어 레코드 판매점 알바생이 되었다. 미래의 위대한 SF 작가에게 청년 시절은 대학을 관두고 나온 이후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십여 편의 소설을 광적으로 써댔지만 대부분 출간되지 못했던 암울한 시기였다.


 

이런 시절, 그에게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끝없는 자기 의심과 불안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유일한 안식처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쓰는 행위만으로도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그런 청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소설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소설을 쓰며 우정을 나누었던소설 속 등장인물과 영영 헤어지는 일과 같다, 라고 했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친구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에서 작가 이전에 고독한 한 인간의 모습을 대면한 느낌이었다.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잃어버린다고 상실감을 느끼는 남자. 나는 이걸 애착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가상의 인물과 형성한 긴밀한 유대감이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진다.


 

광기와 지성의 SF대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작가에게 글쓰기의 기능은 글쓰기 자체였다. 그는 글쓰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표라고 했다. 생계를 위해 끊임없이 써야 했던 그는 많이 쓰던 시절에, 5년 동안 장편 소설 열여섯 편을 썼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광기나 다름없는 작업 속도다.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던 딕의 글쓰기 생활을 엿보건데, 글쓰기(또는 그 행위)에 대한 그의 집착을 견딜 수 있는 부인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다. 훌륭한 작가와 훌륭한 남편이 양립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두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일종의 불안증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글쓰기는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글을 써댄 작가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난 아이디어가 고갈되었던 게 아니라, 에너지가 고갈되었던 거야.”(91) 어쩌면 이 위대한 작가에게 편집증은 그를 작가로 만든 원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즈음 인공지능이 큰 화두다. 하지만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가 로봇 R.U.R.(1921)에서 로봇이란 용어를 처음 쓴 이후, 그리고 아이작 아시모프가 아이, 로봇(1950)에서 로봇 공학의 3원칙을 천명한 이래로 과학자들이 뛰어난 성능의 로봇과 인공지능을 개발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사람들이 줄곧 던진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 질문들을 간단히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딕이 인터뷰 곳곳에서 강연이나 작품을 통해 하려던 작업이 곧 진정한 인간을 정의하는 일이었다고 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 딕의 작품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딕은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주제 두 가지 가운데 첫 번째 주제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첫 번째 주제는 본질적인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이고, 진정한 인간을 단지 인간인 척하는 존재와 어떻게 구별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네.”(152)


 

생물학적으로 인간일지라도 우리 가운데에는 안드로이드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었다. 작가에게 진정한 인간이란 어떤 존재였던 것일까. “예를 들자면, 그릇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걸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아니, 나는 죽이지 않을 거야.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54)가 딕에게는 진정한 인간의 전형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둘러싼 부조리에 맞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존재다. 그럼 작가가 집요하게 써나갔던 미래사회의 모습과 안드로이들에 대한 고민은 결국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던 노력으로 수렴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인 인상으로 판단하자면, 작가 필립 K. 딕은 지독히도 고독했던 인물이었으리라. 물론 스스로 자처한 면이 있긴 했지만 어떤 이유가 되었건 그에게 글쓰기란, 자신을 고립시키는 보이지 않는 망토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끊임없이 찾아오는 불안증과 우울감, 그리고 인터뷰어가 끊임없이 제기하는 일종의 피해망상이라는 증세와 마주할 수 있게 해준 삶의 조건이 아니었던가 싶다. 따라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성찰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작가는 자신이 기득권이 아니며, 강자가 아니었기에 약자에게 공감한다고 했다. 또한 이것이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루저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졌던 이유로 볼 수도 있겠다.


 

필립 K. 딕의 말에서는 작가의 생애 마지막 인터뷰와 더불어 말년의 생각들이 부분적으로 담겨있는데, 그 중에서 작가에 관해 한 언론(<악튀엘 Actuel>)이 발표한 기사 내용 중에서 인상 깊은 부분이 있어서, 이 글을 인용하며 마무리해본다.

 


놀라움은 피해망상의 해독제다. 놀라움을 많이 경험하며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은 당신이 피해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해준다.”(89)


 

원문의 놀라움이란 용어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는 이 용어를 삶에서 느끼는 경이와 같은 것으로 대체해보았다. 삶의 경이로움은 정확히 예상된 대로 일어나는 삶과 공고한 신념 체계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이다. 오히려 우연성 속에서, 예기치 못한 발견의 순간 따라오는 경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놀라움을 느낄 줄 아는 존재야 말로 작가가 줄곧 질문으로 던지던,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필립 K. 딕이 끊임없이 글을 쓰며 44권의 장편과 120편에 달하는 중단편을 발표하며 이루어낸 작업은 결국 인간의 조건에 대한 탐구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1] "나는 글 쓰는 게 좋네. 정말로 좋아하지. (...) 책을 탈고하면 상실감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질 정도라네. (...) 소설을 탈고한다는 건 친구들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야."(38)

[2]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서 내게 위안을 주는 친구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군. 나는 소설에서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네. (...) 내가 쓰는 소설은 그의 용기에 대한 찬가라고 할 수 있겠지."(39)

[3] "(자신의 강연 <The Human and the Android>를 통해) 진정한 인간을 정의하고 싶었네. 왜냐하면 우리 중에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안드로이드인 사람들이 있으니까. (..) 컴퓨터는 날이 갈수록 예민한 사고력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도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잖나."(53)

[4] "(진정한 인간이란) 예를 들자면, 그릇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걸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아니, 나는 죽이지 않을 거야.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 권위에 대한 일종의 망설임인데, 나는 이런 태도를 십대들, 이른바 ‘양아치 punk’라고 폄하되는 세대에서 봤다네."(54)

[5] "글쓰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표야.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 이를테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아내고 싶어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글쓰기의 기능은 글쓰기라고나 할까."(66)
: 글쓰기의 기능에 대해.

[6] "개인의 삶은 이제 존재하지 않아. (...)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사생활 범위의 축소야. (...) 모든 것이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간 거야."(75)

[7] "우리는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으므로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었어. 따라서 우리는 위선적으로 행동하거나, 거짓말을 할 여유 따위는 없다고 해야겠지. (...) 감시받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완전히 정직하게, 일관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해."(77)

"감시의 역기능은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겠지. 이건 인구가 밀집한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고. 무슨 얘긴지 알겠나? 고립이나, 은둔 따위는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야."(77)

[8] "놀라움은 피해망상의 해독제다. 놀라움을 많이 경험하며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은 당신이 피해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해준다."(89)
: 딕에 관한 <악튀엘 Actuel> 기사 인용 내용.

[9] "전체주의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좌파 파시즘, 심리학적 운동, 종교운동, 마약 중독 재활 단체, 권력자들, 책략가들 따위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어. (...) 내가 옹호하는 대의는 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의야. (...) 하지만 난 강자가 아니기 때문에 약자에게 공감한다네.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본질적으로 반(反)영웅들인 건 바로 그 때문이야. 거의 루저에 가까운 친구들이지만, 나는 혹독한 세상에서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특질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네."(114)

[10] "첫 번째 주제는 본질적인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이고, 진정한 인간을 단지 인간인 척하는 존재와 어떻게 구별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네."(152)
: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의 주제를 이야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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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5-04 1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10여년 사이 몰라보게 늙었네요.
작가가 된다는 건 이런 외모의 변화도 감수해야하는 건가 봅니다.
그렇게 많은 책을 냈으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탓도 있을 것 같고.ㅠ

얄라알라 2023-05-07 15:09   좋아요 1 | URL
사진 밑 캡션을 유심히 보았는데, 최대 19년 차이일 텐데 참 많은 변화가 느껴지네요.
장편 44권
120편의 중단편...후덜덜한 수준으로 창작을 하신 분이라, 산고로 치면 몇 년 내내 산고 겪으신 것과 같겠어요

얄라알라 2023-05-07 15: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한 책 함께 읽기, 올리버 색스 책을 마지막으로 요샌 겹치는 책이 많지 않았지만
저도 드디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읽으려 합니다
초란공님 올려주신 이 책은 안타깝게도 제가 사는 지역 전체 도서관에 한 권도 없어서 구매각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데, 리뷰를 너무도 이해 잘 가게 매끈하게 써주셔서 소설 읽기 전에 큰 도움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3-06-08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초란공님^^

이 페이퍼, 당선이네요. 넘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 책은 못 읽고, 다른 걸로 필립 K 딕 접했어요.
다시금 축하드립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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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새로운 표지, 양장본으로 나온 기념으로

예전에 써두었던 독후 기록을 다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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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따금 자신과 작별하는 여행이 필요하다

-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 지음 |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의 철학자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이름으로 소설가가 되었다인간의 삶과 죽음존엄성자유와 예속 등의 문제를 다룬 철학교양서로 국내에도  알려진 그는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자기 존중의 문제를 다루었다소설은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생각과 동선을 따라간다. 57세인 그는 교사이자 고전문헌학자다제자였던 부인과 5 만에 이혼한 , 17년간 과거의 침묵 속에 은둔하며 살았던 남자다또 심한 근시인데다 늘 불면증에 시달린다머리카락이  가닥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언제나 낡은 재킷과 자라목 스웨터를 걸치고무릎이 튀어나온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다니는 남자하지만 그는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고전어처럼 확고부동한 그의 일상을 뒤흔든 것은 한 여자의 자살기도 사건이었다비 오는 날 출근하던 길에 다리 위에서 마주한 우연한 사건으로 그의 세계에는 균열이 생겨났다좀처럼 실수하지 않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실수를 하기도 했다그는 붉은 가죽 외투를 입은 여자가 남긴 포르투게스라는 발음의 여운을 기억하며 헌책방에서  한권을 집어 들었다아마데우 이나시오  알메이다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의사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이었다그레고리우스는 책방 주인이 읽어주는 문장에 이끌려 책을 구입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있다면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28)

 


이 문장을 시작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포르투갈어를 독학하기 시작했고포르투갈어 CD 들으며 고전어에서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 느꼈다그는  작은 일탈 정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보기 시작했다유럽 지도를 꺼내 리스본으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망설임 없이 직장을 떠나면서 사직서를 겸한 편지를 교장에게 보냈다편지에는 자신이 떠나는 구체적인 이유를 대신하여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대목을 인용했다.


 

 영혼아죄를 범하라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44)


 

여기에 인용한 문장은 소설 전반의 주제와 비교할 때 모호하게 다가온다.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면서 동시에  건너 불구경하듯 거리를 두고 이들을 비난하는 모양새다 표현에 주목한 이유는 그레고리우스가 감행한 일탈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동일한 대목 천병희 교수의 번역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보다 드러난다.


 

영혼이여너는 학대하고 있구나자신을 학대하고 있구나그러면 너는 자신을 존중할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다우리 인생은 짧고 인생도 거의 끝나간다하거늘 너는 아직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들의 영혼에서 행복을 찾는구나!(명상록 천병희 옮김, 2005, 34p)


 

 문장은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도덕적 의무감과 사회적 역할에 매몰되어 짧은 인생동안 끌려 다니는 인간의 모습을 밝히고 있다따라서 소설에 제시된 역자의 번역보다는 천병희 교수의 번역이 소설의 주제와 잘 어울린다아우렐리우스의 인용문은 타인과 사회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실마리를그리고 예속 상태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의 미망을 깨달으라는 외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그레고리우스가 불시의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불가피하고 절박한 이유일  있다.



 


삶의 다양한 양태를 보여주는  도시 이야기



이제 소설의 장면은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리스본과 베른을 오간다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만 해도 기차로 26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갈 의사가 남긴 책을 지치지 않고 번역하며 저자의 생각을 탐험했다동시에 의사의 지인들을 만나면서  남자의  속으로 파고들었다따라서  소설은 리스본과 베른이라는  도시 대표되는, 서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그레고리우스의 집과 직장이 있는 베른은 알프스 산맥에 인접한 스위스 내륙의 도시다그에게 익숙함과 확실성안정감을 주는 도시다자신이 가르치는 고전어처럼 느리고 완만하며확고한 이성의 통제를 받는 세계이기도 하다따라서 그레고리우스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조망되던 (127) 누리던 도시였다언제든 고전어 및 고전문학에서 학생들의 인정을 받으며 만족스러운 삶을   있었던 장소였다.

 


반면 리스본은 그레고리우스가 익숙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도달한 도시다그에겐 삶에서 예기치 않게 마주하는 낯설음과 불확실성불안감이 느껴지는 미지의 세계다과거에 도시를 강타했던 대지진과 흑사병처럼 말이다중세 시대까지 이 도시는 광대한 대서양을 마주한 세상의 인식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곳이기도 했한편 다리에서 만난 여인의 입에서 나온 단어처럼 빠르고 경쾌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감정과 호기심에 이끌리는 삶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응한다.


 

여행이란 불확실성으로 떠나는 모험이다그레고리우스처럼  마디의 단어에 이끌리거나리스본의 의사가 남긴 글에 매혹되어 감행하는 한순간의 일탈이기도 하다. 2000 전의 아우렐리우스가 보았던 것처럼소설은 현실의 질곡에 매여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비춘다프라두의 부모가 그랬고그 역시 이런 환경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그는 기차여행에 대한 열망을 지녔지만출발지에서 멀어질수록 강한 향수병을 느꼈던 모순적인 인물이었다확고하고 익숙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으나 두려움으로 길을 잃고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했다하지만 이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독자는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험해보지 못한 채 익숙함과 관성에 머물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있다사람들은 도덕과 의무감에 매여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삶을 살아가곤 한다.




죽음이 잉태한 판타지상상력의 



그렇다면 우리가 예속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면 무엇을어떻게 해야 할까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염두에 두면 문제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문제로도 읽힌다자신을 존중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부유하지 않는 일이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이는 자신의 생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단단히 발을 내딛는 이기도 하다때론 현실의 벽이 두껍고 높기만 하다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다떠나고자 하는 열망과 향수병 사이의 어딘가에 머무는 것이다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었던 갈망을 평생 품고 살았지만, 제대로 시도해보지 않았던 약사 조르지 오켈리처럼 말이다삶에서 자유를 찾은 이들은 일탈을 꾀하여 소외되고 부유하는 자신의 상황 전체를 뒤흔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불가피한 일탈을 감행했다.  책방에서 구한 책의 저자가 살았던 도시로 떠났던 것이다그가 리스본과 여러 도시에서 프라두의 가족과 지인들을 만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의미 찾기였다폐교가 된 프라두의 학교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오래 전에 꿈꾸었 도시 이스파한 기억해냈다. 그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무수한 가능성이 놓여 있었음을 깨달았다현재의 모습은 과거에 자신이 내린 결정이 모여 도달한 결과였다프라두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과감한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상상력임을 깨달았고 상상력이 발휘할  있게 해주는 힘을 ()에서 찾았다.

 


삶의 관성을 뒤흔드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 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판타지의 세계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할  있게 한다인생은  번뿐이고 모든 가능성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실패했을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있는 힘도 키워준다시적 상상력은 프라두와 그레고리우스의 삶이 모두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과 함께두 사람 긴밀히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프라두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267)라고 썼다인간이 평생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의 실체란 살아 있을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넘지 못한다는 공포가 아닐까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실패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실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시적 상상력이 필요함을 말한다.

 


여행 중에 그레고리우스는 자주 현기증을 느꼈다프라두는 자신의 글에서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448)라고 썼다현기증은 그레고리우스를 찾아온 경고였다그에게 현재를 일깨우고시적 상상력이 필요할 때임을 알려주는 장치로서 말이다베른으로 돌아와 검진을 한 그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자친구 독시아데스는 나에게 처방전이 있다고 답했다이는 두려움을 느낀 친구를 존엄한 삶으로 이끌어주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용감한’ 답변이었다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레고리우스는 인생은 우리가 산다고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던 프라두의 말도 떠올렸다확고하다고 믿었던 삶에는 언제든 불확실한 삶이 찾아올 수 있다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불확실성에 머물 수 있는 여지와 힘을 마련해주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이제 소설은 당신이 자신의 이스파한을 간직하고 있는지 묻는다때론 스스로와 작별하여 일탈을 감행해도 좋다는 메시지와 함께.






[1]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꾸어놓은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똑같이 시작됐다." (10)
- 소설의 첫 문장

[2]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
- 프라두의 글

[3]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리두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46)

[4]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93)
- 프라두의 묘비명

[5] "내 마음의 강물이 방향을 바꿀 정도로 다른 사람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177)

[6] "우리가 영원토록 우리여야 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인 이 강요된 상황에서 언젠가 벗어난다는 위안은 결코 없다는 뜻인가? 우린 여기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인데, 이런 무지는 축복이다. 불멸이라는 이 낙원은 바로 지옥임을, 그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으므로." (220)

[7]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67)

[8]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292)

[9]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357)
- 프라두의 편지글

[10] "외관상 음울해 보이는 경고(memento)가 눈 덮인 수도원의 뜰에 우리를 가두어두지는 않는다.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 (448)

[11] "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462)
- 프라두가 늘 했다는 말

[12] "존엄하게 죽는 것이란 그게 종말임을 인정하는 거야. 불멸에 관한 온갖 유치함을 극복하는 것이지." (481)
- 주앙 에사가 전하는 프라두의 말

[13] "말은 시(詩)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물에 빛을 비출 수가 있어." (529)
- 실업가 실우베이라에게 그레고리우스가 하는 말

[14] "그때 읽은 신문에서 유일하게 아직 기억하는 단어. 신기루, 환영,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 (537)

[15] "시적 진지함보다 더 진지한 진지함도 있을까? (...) 이것이 프라두와 그를 묶어주는 고리, 아마 가장 강한 연결 고리였다." (544)

[16]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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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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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알’, 신화가 지니는 힘

- 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신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지역과 무관하게 이야기의 보편성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구비설화 탐색자 겸 연구자로 소개하고 있는 신동흔의 신화, 치유, 인간을 읽으면서 품었던 의문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도 호모 사피엔스의 주목할 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언급한 바 있다. ‘허구’, 곧 만들어진 하나의 서사는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신화야말로 인간의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서사다. ‘최초의 인간들을 이어준 보이지 않는 끈이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동양과 서양의 신화를 아우르며 광대한 인류의 정신세계를 촘촘한 사유로 풀어내었다.


 

저자는 신화가 인간의 실존을 보여준다고 언급한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미력한 자기를 부여안고 한없이 흔들리는 일”(113)이기도 하다는 것. 바로 나와 세계가 관계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이는 괴테가 일생동안 수정한 역작 파우스트가운데 한 마디,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파우스트, 전영애 옮김, (도서출판), 2019)란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노년의 대문호가 애정과 연민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았을 법한 구절이라 생각했는데, 신화를 이야기하는 저자의 말에서도 우리 인간의 모습을 비춰주는 표현을 만났다.


 

신화 속에서 인간의 모습, 나아가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은 세계가 나와 만나는 일이다. 이는 자연 만물과 인간이 연결되는 순간이다. (개인)와 사회(집단)서사적 연대를 이루는 접점이 신화라 할 수 있다. 개개인은 신화에서 수많은 를 발견할 수 있다. 신화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저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안에 비슈누와 브라흐마와 시바가 있는 것처럼 티탄족과 외눈박이 거인과 백수 거인과 제우스가 우리 안에 있다.”(42)

 


따라서 저자는 세계의 신화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과 인간의 생명적 연결성’(72)을 말한다. 지금 전 세계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기능적으로 지구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조직체나 다름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 개개인 점점 더 고립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어쩌면 신화를 잃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계와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끊은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는 우리 안의 자기서사에 주목하는 일을 언젠가부터 소홀히 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저자는 우리가 세계와 다시금 이어나갈 수 있는 해법이 신화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저자는 나를 세계와 연결해주는 신화가 치유의 힘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신화와 만남으로써 신화를 되새기고 나를 발견함으로써 진정한 변혁의 길, 거듭남을 꾀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변혁, 거듭남을 거쳐 결국 나 자신을 확장할 수 있게 한다. 신화는 이 과정에 필요한 역치를 넘어갈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신화는 자기 재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신화적 상상력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기 전에는 신화가 단순하고 원초적인 이야기의 모음인 줄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 신화, 치유, 인간에서 저자는 신화의 서사가 지닌 강렬한 생명력, 치유의 힘과 자기 변혁의 힘을 독자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저자는 신화의 사례를 들어 노아의 방주어머니의 자궁태초의 알이라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보니 신화야말로 인류에게 삶을 견디게 해주고 치유의 힘을 건네는 태초의 알이 아닌가 싶다.    



[1] "우리 안에 비슈누와 브라흐마와 시바가 있는 것처럼 티탄족과 외눈박이 거인과 백수 거인과 제우스가 우리 안에 있다."(43)

[2] "그 홍수는 태초의 물이며, 방주는 태초의 알이라고 할 수 있다."(55)

[3] "결국 신화를 완성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58)

[4] "신화는 자연 만물과 인간의 생명적 연결성을 말한다. 무엇하나 귀하지 않는 것들의 신령한 연결이다."(72)

[5] "마음 깊은 곳의 신명을 이끌어내서 사람들과의 서사적 연대를 더욱 강화해 가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오래 흘러온 신화가 전해주는 본원적 해법이다."(107)

[6] "관계는 존재의 분리로부터 시작된다."(177)
- 사랑의 원형에 대한 언급

"존재하는 일이란 관계하는 일이다."(178)
-끝없는 부딪침과 밀어냄의 역학을 신화는 이야기한다.

[7] "시바의 파괴는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다. 창조를 향한, 새 생명을 향한 파괴다. (...) 지금의 나를 죽임으로써 시바의 서사로 나아가는 것이 내가 찾아가야 할 서사적 길이었다. 달리 말하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적 초극이다."(234)

[8] "현실 부정을 통해 스스로를 깊은 동굴에 가둘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의 신화로 읽는다. 그러면서 문득 자신을 돌아본다. 지금 스스로 동굴에 들어와 웅크리고 있지 않은지를."(251)

[9] "덧붙여 깨닫는 것은 그러한 살아냄이 제대로 된 죽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다시 나를 죽여야 할 때다. 일어서서 거듭나기 위하여."(257)

[10] "그 우주적 연결의 중심점이 어디인가 하면 내가 있는 ‘지금 이곳‘이다. 그 연결성을 오롯이 인지하고 구현해낼 때 우리의 삶은 하나의 신화가 될 수 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나 자신의 존재성은 세상 그 누구도 지울 수 없다. 설령 그가 신이라 하더라도!"(270)
-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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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이올린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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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꿈꾸며 생()의 관성 넘어서기

- 검은 바이올린




 

검은색은 흔히 죽음과 애도의 색으로 여겨진다. 문명의 관습으로 장례식 때 검은 옷을 입기도 한다. 이에 검은색은 필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여 존재의 부재혹은 결핍의 의미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 자연에서 모든 빛을 흡수해버리는 블랙홀처럼, 검은색은 색채의 무, 나아가 대상의 식별불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결여와 무지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로 검은색은 신비스러움과 매혹을 품고 있기도 하다.


 

색채를 키워드로 하여 전개되는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검은 바이올린에는 이야기 곳곳에 검은색이 등장한다. 검은 머리와 눈동자, 검은망토나 검은 흙, 검은 암말과 검은 여왕, 그리고 검은 바이올린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주로 18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파리 출신의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 요하네스 카렐스키와 크레모나 출신의 바이올린 제작 명인 에라스무스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운명적으로 만난다. 요하네스가 군대에 징집되어 이탈리아 원정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전투 중 큰 부상을 입은 요하네스는 몇 달간 회복기간을 거친 후, 마침내 베네치아에 입성한다. 이 때 어느 민가에 6개월 간 머물게 되는데, 이 집의 주인이 바로 에라스무스였다.


 

소설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1부와 3부는 요하네스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반면, 2부에서는 주로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과거사를 들려준다. 에라스무스는 세 가지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우선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어린 시절 음악과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 결국 베네치아 최고의 바이올린 장인이 되었다. 두 번째 열정은 증류주 제조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독특한 증류주를 제조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 번도 장기에서 진 적이 없을 정도로 장기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이 가운데 요하네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에라스무스의 집 벽에 걸려 있던 검은 바이올린뿐이었다.


 

에라스무스가 검은 바이올린을 만들게 된 것, 크레모나 출신의 바이올린 제작 장인이 베네치아에 살게 된 이유, 또 평생 장기두기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된 까닭은 모두 한 여인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베네치아에 있는 페렌치 공작의 딸 카를라였다. 젊은 시절 신분 차이 때문에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눈이 먼 에라스무스는 무모한 내기를 하기에 이른다. 카를라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바이올린을 제작하겠노라 맹세했던 것이다. 검은 바이올린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신비함과 매혹을 지닌 이 악기는 불행도 가져왔다. 악기가 카를라의 목소리를 소유하게 되자, 에라스무스가 사랑한 여인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검은색은 언제든 돌아온다


 

소설 중반에 이르면 30대의 청년 요하네스가 에라스무스에게 고민을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밤에 작곡한 노트가 다음 날이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삶을 경험하고 노년에 이른 에라스무스는 청년의 고뇌를 알아차리고는 삶을 재미있게 만드는 법이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영혼은 자신의 꿈을 갖고 있기에 네 안에서 꿈을 찾아보라고 말이다. ‘청년의 열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에라스무스가 이렇게 화답한 것이다. 이때 요하네스의 눈에 들어온 검은 바이올린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검은색은 곧 인식의 구멍, 미지의 영역이었다. 청년은 꿈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물었을 때, 노인의 대답은 간결했다. “꿈을 부숴야겠지.”(75)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자가 되고자 했던 한 사람과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 두 사람이 검은바이올린을 두고 나누던 대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내게 검은 바이올린은 열망이 지나쳐 집착하게 된 꿈처럼 여겨진다. 나는 이를 검은 욕망이라 이름 붙였다. ‘검은 바이올린은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끊임없이 존재를 소모해버리는 욕망을 표상한다. 대상 혹은 대상에 대한 지배권을 소유하길 바라는 욕망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꿈이 현실이 되거나, 이루지 못할 꿈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급속히 늙어가기도 할 것이다. 베네치아의 페렌치 공작처럼 말이다. 그는 말년에 딸 카를라와 좋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것 같다. 공작이 순식간에 늙고 병들어 보였던이유도 그가 끊임없이 일에 매몰되어 스스로 소진된 삶을 살아갔기 때문일 테다. 그는 언제나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이 때가 바로 꿈을 부술 때라고 내게 말해주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꿈을 부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소설은 내게 두 가지를 일러준다. 하나는 검은 욕망이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이를 부순 이들이라면 또다시 꿈을 꾸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꿈이 현실이 되거나 꿈을 부술 때 존재가 해방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때 해방의 과정은 존재에게 절망과 허무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에라스무스의 스승 프란체스코처럼 말이다. 프란체스코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전설적인 명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아들이었다. 이미 최고 수준의 바이올린 제작 기술을 지녔지만,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 슬픔과 고통으로 생의 나날을 보냈다. 정작 바이올린 제작은 도제들에게 맡기고 말이다. 이 때가 바로 프란체스코가 아버지의 바이올린을 부수고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할 때였다.


 

인간의 삶은 존재가 품은 열정만으로 완성되긴 어렵다. 열정은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꿈에 이르는 길이 고통스러워도 집착으로 변질된 열정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렵기도 하다. ‘검은 욕망은 삶의 과정에서 언제든 돌아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꿈을 부수고 또다시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일이다. 끊임없이 꿈을 꾸며 생()의 관성을 극복해나가는 것. 이것이 에라스무스가 내게 귀띔해준 지혜다.



 

삶의 정수는 사랑과 밤의 시간을 필요로한다

 


바이올린 장인 에라스무스의 집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불편한 곳이었지만, 가장 잘 단련된 영혼의 집이기도 했다(54). 집주인은 이 영혼의 집에서 오래도록 자신의 세 가지 열정, 곧 바이올린 제작, 증류주 제조, 장기 두기에 취한 듯 살았다. 요하네스는 이 영혼의 집에서 검은 바이올린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증류주 만드는 일이 재미있는지 물었다. 집 주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요하네스의 질문에 무심한 듯 화답하는 장인의 말이었다.


 

한 방울 증류주를 얻으려면 사랑과 시간이 필요하다네.”(57)

 

그러자 요하네스가 다시 물었다. “많이 필요한가요, 사랑과 시간이?”(58)


 

사랑과 시간이 꿈을 부순 사람에게 필요한 두 번째 요소일 것이다. 삶은 욕망과 결핍그리고 때론 욕망이 지나쳐 광기의 형태로 이들이 혼재한 모양새를 띠곤 한다. 비단 소설에 등장하는 두 천재를 떠올리지 않아도 말이다.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검은 욕망은 불현 듯 삶에 뛰어들어 우리를 유혹한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세 가지 열정을 제대로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어느 정도 미쳐야 했다. 그는 54년 동안 매일 저녁 상상의 맞수와 장기를 두었다. 삶의 굴곡을 지나 온 장인에게 한 방울의 증류주란 삶이 일구어낸 정수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에는 젊은 날의 검은 욕망과 광기, 고통과 절망, 허무도 한 방울씩 들었을 테다. 그러니 에라스무스가 한 방울의 증류주를 얻기 까지는 그만큼의 사랑과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럼 도대체 얼마만큼의 사랑과 시간이 필요한지묻자, 바이올린 장인은 이렇게 응답했다.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되지. 해마다 다르다네.”(58) 에라스무스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시간에는 적절한 거리감 혹은 균형감도 필요함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 삶이 지닌 모습도 그렇다. 결핍을 전제한 욕망과 이것이 넘쳐난 광기가 이루는 긴장은 언젠가 해소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꿈들을 꾸고 살아가는데, 으레 꿈에는 한계가 없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 꿈이 현실이 되면 존재가 해방될 것이라고 말한 이는 에라스무스였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이 때는 우리 안의 검은 욕망과 광기가 만들어낸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일 것이다. 해방과 허용의 시간은 모든 이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 할 수 있는 밤의 시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시간은 꿈이 현실이 되어 돌아오는 허무감이나 꿈이 부서질 때 찾아오는 절망감, 그리고 이 때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간일 것이다. ‘한 방울의 증류주를 얻는 데 오랜 시간의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듯, 우리는 욕망으로 인한 영혼의 긴장이 해소되고 해방이 되는 밤의 시간도 필요하다.


 

모든 이가 해방감을 공유할 수 있는 밤의 시간은 베네치아의 사육제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 기간에 가면과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참여한다. 축제의 기간 동안은 신분과 계급이 식별불가능하게 무화된다. 삶에서 생겨난 꿈 또는 검은 욕망이 광기와 뒤섞이는, 거대한 밤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은 견고하고 모든 것이 드러난 에 입은 상처와 고통을 보듬고 견디는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치아의 사육제는 공동체의 긴장을 완화하고 경직된 욕망을 해방시키는 시공간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저자는 검은색이 부재와 결핍, 불확실성과 식별불가능성, 불길함과 두려움을 가져다주면서 신비함과 매혹의 힘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검은색은 이야기 전반에 등장하며 소설의 지배적인 정서와 주제에 스며들어 있다. 에라스무스가 전하는 그의 인생 이야기는, 진정한 삶이란 눈에 보이는 꿈 혹은 목표의 성취나 대상의 소유에 있기보다 이 꿈들 사이에 머물 때 있음을 말하는 듯하다. ‘구멍처럼인식되지 않는 이 사이의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꿈을 꿀 수 있는 밤의 시간일 테다. 나아가 사이의 시간은 나와 대상을 진심으로 긍정하고 바라보며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이 때 우리는 삶의 슬픔이나 고통도 견뎌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의 시간, 모든 존재가 생의 관성을 극복하고 살아가고자 지속할 수 있는 힘, 사랑의 시간이 되어 준다. 우리가 삶에서 꿈꾸기를 멈추지 말아야할 이유다




[1] "꼬마야, 너의 열중하던 눈빛이 내게 가장 많은 것을 주었단다."(15)

"매일 조금씩 더 바다로 가라앉는 베네치아. 그 고요한 뗏목에는 음악적 영혼들이 많았다."(49)

[2] "한 방울 좋은 증류주를 얻으려면 사랑과 시간이 필요하다네."(57)

"많이 필요한가요, 사랑과 시간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되지. 해마다 다르다네. 자, 장군일세!"(58)

[3] "맛보게, 요하네스! 첫 모금은 불이지! 두 번째는 비로드같네! 세 번째 모금은 꿈이라네!"(58)

[4] "장기를 제대로 두려면 약간 미쳐야 하네. (...) 광기를 요구하는 유일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지."(59)

"자네가 나처럼 54년 동안 매일 밤 상상의 맞수와 장기를 둔다면 그렇게 되겠지."(59)

[5] "너의 오페라 말이야, 쓰기 전에, 살아야해."(73)

[6] "꿈에서 아름다운 것들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꿈을 부숴야겠지."(74)

[7] "알다시피, 천재들의 그 영혼과 광인들의 그 영혼은 거의 같은 것이지."(86)

"매일 밤 같은 꿈이 잠 속으로 돌아오곤 했어."(99)

[8] "한 마디로 베네치아는 꿈과 광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벌이는 거대한 무대였지."(112)

"인생은 연극이야. 단 한 번 공연하는."(127)

[9] "카를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겠어요. 오직 당신만을 위해. 내가 당신 목소리를 소유하겠어요."(138)

[10] "자신의 일생의 작품이 불길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됐어. (...) 이제 이야기와 결별했다."(159)

[11]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천재나 광인에게만 더해지는 영혼을, 자신의 오페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그날 밤, 요하네스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었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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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2-20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합니다.^^

초란공 2023-02-20 20:19   좋아요 1 | URL
저보다 먼저 아셨네요^^ ㅋㅋ 감사합니다~
 
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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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찾아가는 여정

- 고독한 얼굴를 읽고

 



제임스 설터(James Salter) 지음 |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

 



책을 덮으니 그 산은 마치 거대한 오벨리스크 같다라는 문장이 주는 이미지가 또렷이 떠오른다.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던 작가 제임스 설터가 54세 때 발표한 장편 소설 고독한 얼굴은 이처럼 산의 선명한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이 작품은 눈과 얼음으로 덮인 채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암벽과 이를 오르는 사람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야자나무가 있는 로스엔젤레스의 해안가에서 건물 지붕을 수리하며 살아가는 버넌 랜드라는 인물이다. 20대 중반으로 등장하는 랜드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멕시코계 여인의 집 창고 하나에 세 들어 살고 있다. 언뜻 보기에 구차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랜드가 암벽을 타다가 이전에 함께 등반했던 동료 캐벗을 만나 다른 삶을 향하게 된다. 샤모니에 가보라는 캐벗의 말에 랜드는 자신이 속해 있던 곳을 떠나게 된다.

 


프랑스의 알프스 산지에 있는 샤모니에 도착한 랜드는 확고한 기쁨, 충만한 행복감을 다시 느낀다. 산악인에게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이 충만한 행복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책을 읽는 동안 줄곧 궁금했다. 호락호락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바위처럼 내게는 그저 낯선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혹한 바위는 자연 조건과 사투를 벌이며 정상을 정복한 이들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으로 보상한다. 랜드 역시 거대한 오벨리스크같다고 표현한 짙은 빛깔의 화강암 암벽 드뤼를 정복하고 만다. 함께 오른 캐벗이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등 위험한 고비를 극복하고 말이다.


 

하늘로 치솟은 얼음 암벽에 오른 이들의 내부에는 생명력이 넘쳐흐르고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행복이 채워진다.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산이란 열정을 불어넣어주고 생명력을 전하는 존재다. 다만 암벽은 이들에게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산악인들은 자신의 손과 발을 지탱해주는 홀드를 붙든 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자포자기의 심정 및 자기 번민과 반드시 싸워야 한다. 산악인들에게 자포자기의 심정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의지가 고갈된다는 것은 곧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딛고 있는 홀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이제 랜드는 거대한 첨탑같은 드뤼를 정복하고, 이곳에서 조난당한 이탈리아 산악인을 구조하는 등의 활약으로 산악계에서 유명해지고 영웅이 된다. 그는 이곳에서 알게 된 카트린이란 여성과 파리로 와서 자신의 유명세를 즐기기 시작한다. 파리의 아늑함과 행복 속에서 이따금 샤모니를 생각하던 랜드는 이곳 생활과 기만적인 자신의 모습에 역겨움을 느낀다. 한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유명세에서 생명력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결국 다시 샤모니로 돌아와 이전에 등정했던 드뤼보다 두 배 높고 험한 워커에 오르고자 했다. 하지만 파리 생활로 무뎌진 열정을 안고 워커에 오르게 된 랜드에게 암벽이 호락호락 자신을 내어줄 리 없었다. 한 인간의 내부에는 이미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는 마음이 교차하고 충돌하고 있었다.



 

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찾아서

 


두려움과 의지의 고갈은 산악인에게 치명적이다. ‘넌 할 수 있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도 결국 랜드의 내면은 두려움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는 암벽에서 물러난다. 상상하기조차 아찔한 이 뾰족한 암벽을 도대체 왜 오르는 것일까? 그리고 이 존재가 어떻게 인간에게 그토록 확고한 기쁨과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것일까, 궁금했다. 상상만으로 온전히 이해할 길은 없지만 산악인들이 느낀 충만한 행복감의 근원이 어디에 있을까 몇 가지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항상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이, 앞장서는 것이 운명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삶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 사람은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최초의 인간이다.”(188)


 

소설의 제목이 고독한 얼굴(Solo Faces)이기도 하지만, 산악인이 마주한 암벽 역시 'face'로 표현된다는 점은 소설이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될 여지를 준다. 샤모니에 우뚝 솟아 있는 험난한 암벽들은 각자 문명 이전의 고유한 남성성의 원형을 간직한 존재이자 장소로 읽을 수 있겠다. 샤모니의 암벽 드뤼를 가리킬 때 희고 거대한 존재’, ‘거대한 오벨리스크로 표현한 점은 떠올려보면 그렇다. 제임스 설터는 이 최초의 인간이 지녔을 법한 얼굴이 바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 그리고 이런 존재 자체가 바로 생명력을 지닌 인간의 모습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세상사에는 숨겨진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길이 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은 짐승의 지혜를 익히는 것이다.”(270) 여기에서 짐승의 지혜를 갖는 것은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에 집중하고 존재의 일부가 되는 일이다. 암벽과 마주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홀드 하나에 걸고,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악인들에게 산을 오르는 일은 바로 문명 이전의 인간 원형에 가 닿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이 일에는 파리에서 만난 여인 콜레트가 말했듯 누구나 대가를 치러야했다. 산악인들이 대가를 치루는 곳은 암벽이었다. 눈과 얼음에 덮여 가려진 준엄한 바위 암벽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다. 이를 마주하고 오르는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한다. 곧 암벽은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최초의 인간들이 문명을 일으키자, 문명은 이 인간의 본성을 광기로 규정하고, 이를 도덕과 규범으로 억압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여기에 길들여졌다. 문명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된 인간들은 열정을 잃고 생명력을 강탈당했다최고의 등반에 용기 이상의 것, 영감과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언급과 달리, 문명은 인간에게서 상상력마저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산악인들이 산을 찾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지만, 각자의 마음 속 보다 깊은 곳에는 최초의 인간이 지닌 생명력 넘치는 얼굴을 되찾고자 하는 본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산의 암벽은 산악인들로 대표되는 인간이 문명으로 잃어버린 남성성 혹은 인간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넘어서야 하는 경계이자 전장(戰場)으로 읽힌다.


 

산과 달리 파리로 대변되는 문명은 인간을 도덕과 규범으로 길들인 곳이다. 대신 길들여진 인간에게 아늑함을 제공하고 쾌락과 명성 같은 피상적인 행복을 건넨다. 그 결과 많은 인간들이 순수한 열정을 잃어버렸다. 본질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된 이들에게 생겨난 공허함은 단지 랜드가 파리에서 만끽했던 물질적 보상 같은 다른 기호로 끊임없이 대체될 뿐이었다. 니콜을 비롯하여 파리에서 만난 이들에게서,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운전하던 차의 백미러를 통해 갑자기 늙어버린 얼굴을 발견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역시 문명 속에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소모된 삶이라는 질병에 걸린 셈이다. 이 늙어버린 얼굴이야말로 문명에 길들여진 최후의 인간이 지닌 모습일 것이다.

 


랜드는 산에서 추락하여 하반신 마비가 된 캐벗을 찾아간다. 그런데 그가 권총으로 자신과 캐벗을 상대로 러시안 룰렛을 감행한 까닭 역시 캐벗이 생명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최초의 인간이 지녔던 얼굴을 되찾을 수 있길 요구하는 메시지였을 테다. 동료의 얼굴에 생명력과 충만한 행복감이 다시 넘칠 수 있도록 말이다. 현대 문명이 거세해버린 남성성은 소설 앞부분에서 설터가 스치듯 설정해 두었던 D.H. 로런스의 사진과도 연결된다. 이 사진은 랜드와 동거하던 여인 루이즈가 잡지에서 오려 붙인 것이었다. 로런스의 소설에서 엿보이는 주제 의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산업 문명으로 손상을 입은 남성성의 문제, 그리고 회복에의 갈망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강요하고 억누른 인간들은 매일 같이 패배하고 바수어진 채, 뿌리 없이 부유하는 존재들이다. 랜드가 찌그러지고 못쓰게 된 차들을 취급하는 폐차장을 운영한다는 설정도 이 주제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폐차장으로 들어온 차들은 모두 거세된 남성성혹은 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잃은 문명인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바로 문명에 의해 내상을 입고, 생명력을 상실한 인간들 말이다.


 

높은 곳에 올랐다가 낮은 곳으로 추락한 랜드는 날개를 잃은 새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랜드는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다시금 고독과 태양을 즐기고 있다. 여기에 설터는 랜드가 뭔가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 병으로부터,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278)라고 씀으로써 그가 언젠가는 다시 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되찾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현재 그의 삶이 미식축구 선수가 실수로 떨어뜨린 펌블 같은 상태일 지라도, 그 공을 다시 집어들 수 있는 시간은 남아 있다. 랜드가 새 연인 폴라에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견디는 거예요. (...) 두려워 하지 말고.”(281)라고 한 말은, 꼰대스러운 남자가 여자에게 충고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독백이었다. 이 말은 그가 기자들에게 나는 (산이 아닌) 삶을 사랑합니다라고 했던 말과 다르지 않게 들린다. 희망은 여전히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1] "바위는 따뜻하고 낯설었으며, 아직 호락호락 자신을 내어주지 않았다."
"바위는 바다의 표면과 같아서, 일정하긴 하나 결코 똑같지는 않다. 동일한 루트를 오르는 두 명의 등반가가 있다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등반할 것이다. 그들의 능력은 같지 않고, 자신감도 욕망도 같지 않다."(32)

[2] "침대에 누운 그는 육체적인 차분함보다는 훨씬 더 깊은 어떤 것, 삶 자체의 고동 같은 것을 느꼈다. 확고한 기쁨이, 따뜻함과 충만한 행복감이 차올랐다.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47)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이 이보다 더 가치 있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았다."(57)


[3] "산들은 희고 거대했다."(85)

"그 산은 마치 거대한 오벨리스크 같다."(87)
: 거대하고 험난한 봉우리 드뤼에 대한 표현


[4] "등반하는 사람을 벽에 매달릴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믿음이다."(108)

[5] "산을 오를 때면 그의 내부에서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그의 야망은 예전에는 평범했으나 드뤼 이후 달라졌다.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행복이 그를 가득 채웠다. 자신의 삶을 찾은 것이었다."(120)

[6] "항상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이, 앞장서는 것이 운명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삶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 사람은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최초의 인간이다.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든 남보다 앞서 배운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힘을 주고 사람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188)

[7] "파리, 그곳은 랜드가 이미 떠나고 있는 거대한 터미널 같았다. (...) 그는 잠시 그들의 주의를 끌었던 것에 불과했다. (...) 파리는 그를 버렸다."(216)

[8] "인간의 얼굴은 항상 변하지만 완전히 완벽해 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 모습을 갖춘 것이다. 그것은 불변의 얼굴이다."(227)

[9] "그는 뭔가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 병으로부터,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278)

[10]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견디는 거예요. (...) 두려워 하지 말고."(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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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2-09-26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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