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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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원제: Manifestly Haraway)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지음 | 황희선 옮김 | [책세상]



우선 책을 겨우 읽어낸 내게 남은 인상은 흥미롭지만 아직은 매우 낯설음이었다. 좀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무엇보다 페미니즘의 담론에 생소한 독자로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통시적으로  또는 공시적으로 여러 층위의 맥락들이 한데 어우러져 표현되는 도나 해러웨이의 사상은 자신이 진창(muddling) 속에서, 진창이 되고 있다 표현하듯, 실천적인 의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담론은 둘째 치고, 심지어 푸코의 생명정치에 관한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페이지부터 커다란 벽과 만난다. ‘포기할까 그래도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라는 마음이 팽팽히 맞서며 갈등을 하고 있던 와중에, 반려종 선언에서  언급된 말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다.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반면,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친밀한 타자를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과정에서 별수 없이 겪게 되는 우습고도 비극적인 실수들은, 타자가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한 무생물이건 간에 존경심을 자아낸다.”(161)

 

부분을 내가 해러웨이의 책을 끝까지 읽겠다는 선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익숙하지도 않은 대상()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완전히 이해하길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착각이다. 반면, 골치 아픈 글을 계속 읽어내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타인의 오랜 사유를 오롯이 담은 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들은 자체로 유의미한 위대한 시도다.’라고 말이다. 내가 책에게 아무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데, 책이 나에게 보여줄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공들여 읽기 게을러진 나에게 해러웨이의 마디는 읽기에 관한 사랑론으로 우선 다가온다.    

 

읽어서 모든 내용이 이해되는 책이라면 오히려 던져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물론 지금까지 그런 책은 없었다). 나는 해러웨이의 책을 읽으며 내가 새로운 세계와의 희미한 경계 어딘가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자각하며,   경계는 내가 속해 있는 세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 시도중이다. 그리고 나는 헬렌 베란의 표현대로 ( 세계 속에서 타자와) ‘함께 지내기 위한하나의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나에게 타이르며 끝가지 읽어나갈 있었던 같다. 물론 온전한 이해라는 상태는 현재 요원한 일이긴 하지만, 머리를 싸매고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기회가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문 들어있는 <사이보그 선언> <반려종 선언> 생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한 과학자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서 해러웨이 교수가 이런 관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개인과 사회의 관계성 혹은 정치성 혹은 타자성에 대해 다시 바라보기) 대한 통찰력있는 진단과 면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사이보그 선언>에서 사이보그는 인공두뇌 유기체이자 순수하지 않은,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자, 사회현실의 상상적 피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이보그는 단순히 생명과 기계의 모호한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무언가는 아닌 것같다. 개념에는 무엇보다 젠더 개념과 인종, 계급 개념이 결부되어 있다. 또한 사이보그 개념에는 하이테크 첨단 공학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정치적 정체성에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정보가 우리의 삶을 단단히 지배하며, 전쟁의존적인 경제와 강한 유착을 보이는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은 푸코의 생명정치를 벗어난 무엇이다.

 

기술이 인간의 전반을 새롭게 바꾸어줄 것이라는 약속이 앞서 말한 젠더와 인종, 계급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빗겨나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선언이 나왔던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던 여성들에게 있어 노동, 문화, 지식 생산, 섹슈얼리티, 재생산의 모든 양상과 맺는 관계의 함의가 순전히 우울하기만 것은 아니”(67)라고 분석한다. 대신 해러웨이가 지적하는 일말의 희망은 범주들 자체가 다채로운 변환을 겪고 있기 때문이며, ‘현재의 패배보다 정치가 발휘하는 모순적 효과에 주목하고 기대해볼 있다 입장에 근거한다. 저자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의 시대에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의 발사 성공의 여파로 해러웨이 같은 재능있는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을 있었다. 게다가 오히려 정부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지식인으로 가능성을 내포하는 모순적 효과 대한 희망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해러웨이의 낙관적인 입장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언급한 인권선언과 마그나카르타를 대비하여 발견해내는 희망과 유사한 인상을 준다. 덧붙이자면, 1789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인민이 주권자라고 선언한 화려한 인권선언 대비하여 지나친 노동시간을 줄여 표준노동일 제정했던 마그나카르타(노동법 관련 협정) 마련한 사건이 오히려 마르크스에게는 위대한 변화 다가왔던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의 발견이다. 자본가의 계약에 눌려 비인간화된 노동 기계와 같은 처우를 받았던 노동자들은 저항행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패배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숱한 희생과 고통을 통해 표준노동일이라는 작은 변화를 지켜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로서 해러웨이도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 주목하지는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분명 해러웨이도 이런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 주목하고 희망의 근거를 찾았을 것같다. 바로 이런 사소한 것의 변화에 인간적인 위대함 깃들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반려종 선언> 앞서 소개하고 있는 <사이보그 선언>보다 좀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반려종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양치기 품종견 카옌과  파수견 롤런드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생물의 함께 살기에 대해 다양한 층위에서 고찰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이보그 선언> 기술과학 현대의 삶이 내파하는 현상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이해’(119)하려 시도한 글쓰기였다면,  <반려종 선언>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특수한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내파하는 현상과 관련’(136) 되어있다고 글쓰기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언 모두 문명-문화와 인간사이의 공진화의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좀더 간결히 표현해보자면 <반려종 선언> 개에게 홀닥 빠진 과학자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반려종으로서의 개는 함께 살기위해존재한다는 맥락에서 나온다. 당연한 듯하면서도 다시금 음미해보면 다양한 가능성과 틈이 잠재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무언가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관계속에 내재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가능성이 어느 쪽으로 뻗어나갈지는 존재의 존재론적 안무 양상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대상들은 관계 선행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상들 사이의 존재-관계에는 소중한 타자성 깃들어 있으며, 여기에는 아직 발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의 창발된 실천 소통이라는 과정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라고 이해된다. 인간과 , 여성과 암캐, 교수와 파수견의 존재로서 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각자가 연결된 타자성으로서의 역할(저자는 이를 존재론적 안무라고 표현하는 같다) 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관계를 주목해야한다는 의도로 읽힌다. 그렇기에 저자는 아기 대신 친족을 만들자!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우선적으로 흥미를 갖게된 부분은 저자가 반려종 반려동물 구분하는 지점에 있다. 반려종의 species개념은 무엇보다 차이 인식하고 정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반려종 반려동물보다 크고 이질적인 범주라는 표현도 새롭게 다가왔다. 해러웨이가 의도하는 사랑은 보다 상호관계적이며 동시에 상호참여적 양상을 띤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저자가 의미하는 반려동물 개념에는 존재 사이의 차이 대한 분명한 인식과 존중보다는 그저 무조건적인 애착관계로 있을 같다. 무조건적인 귀여움과 보살핌을 받는 일방적인 관계 말이다. 여기에는 창발적 실천이 들어설 여지가 매우 적다.

 

반면 반려종이라는 개념에는 존재의 차이 대한 인정과, 따라서 소중한 타자성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사랑의 양상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대한 존중 신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개념을 떠올릴 저자가 부를 있는 좀더 정밀한(혹은 구체적인) ‘사랑 개념이 이해가 된다.     

 

개를 아기로 만들며 차이의 존중을 거부하는 문화적 관행으로 오염된 말이 아닌 한에서는,  사랑이라는 말로 매케이그가 개를 다루는 방식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66)

 


내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자면, 중학교 때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국어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랑-소망-믿음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물으셨다. 학생들 여러 명에게 물으셨고, 친구들 각자 나름의 대답을 했다. 나는 믿음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선생님의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내가 말한 믿음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세 가지 성경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세대는 소중한 타자 혹은 차이의 존중에 대한 경험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정답사랑이란 무엇일까 다시금 궁금해지기도 한다. 반면 나는  해러웨이의 반려종관계에서는 신뢰-믿음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울러 이 신뢰의 실천적인 행위를 오히려 사랑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해러웨이의 반려종에 대한 사랑이란 나의 보살핌에 기대고 나에게 의지하는 종에 대한 보답, 나의 자비 행위에 합일되는 타자로서의 관계는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서로의 다름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귀찮고 머리아프지만 서로의 존재영역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서, 온전한 두 존재를 지켜낸다는 개념이 분명 들어있다는 점이다. 무심코 생각했던 반려동물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새롭게 검토해볼 수 있었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공진화적인 관점에서 이 사랑의 개념이 함께-되기가 되어야한다는 해러웨이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면 해러웨이의 사랑개념은 남성 중심의 과학분야에서는 다소 낯설은, 오히려 기독교적인 사랑의 개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냉담하는 신자라는 표현 대신, 스스로를 세속적인 천주교인이라 말하는 저자는 상대 종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은 바로 함께 잘 살기를 통해 나의 자유 혹은 구원에 이르는 일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단계를 이어주는 것은 물론 사랑-배려가 될 것이다. 물론 이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것은 이 반려종에 깃든 사랑의 개념이 다시 말하지만 철저하게 양방향적이라는 점이다. 반려종은 함께 빵을 나누어 먹는 존재(company 어원 cum panis)로서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있으며, 서로에게 얽힌 채, 함께 만드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반려종의 존재와 관계를 통해 나 또한 변화하며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창발적 실천).

 


이외에도 이 책 해러웨이 선언문에는 아직은 알듯모를듯 하지만 낯선 개념, 신선하고 진지한 생각들이 양피지처럼 겹겹이 싸여 있다. 하지만 개에 관한 글쓰기가 페미니즘의 한 갈래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선언은 무엇보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사실 <반려종 선언>에서 나타난 해러웨이의 글쓰기는 개에 관한 지식을 전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무수하게 적용될 수 있는 차이의 관계를 개라는 반려종을 통해 설파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보다 보편적이고 모든 이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함의를 찾아낼 수 있겠다. 아직도 생소하지만, 다시 책장을 들쳐보며 눈에 띄는 문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 더 익숙해지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은 페미니즘과 생명정치의 담론에 전무한 지식을 가진 나같은 독자에게 친절히 길을 안내하는 책은 분명 아니다. 대신 해러웨이 선언문은 반려종과의 관계 만들기에 관한 비유를 빌려온다면, 골치아프지만 시행착오와 오독의 과정을 감수하면서 조금씩 의미의 확장을 경험해가는 독서의 경험을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책의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책이 어려운 이유가 결코 번역에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많은 숙고 끝에 나온 결과물임을 느낄 수 있었으며, 번역자의 주석을 보면 독자들을 위해 최선의 배려를 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책이 이해되지 않았다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좀더 들여다보고 고민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번역은 독자에게 여러 모로 배려를 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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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
김경화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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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紋章)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

김경화·고봉만·이찬규·안상원·김연순·김문석 지음 | [글항아리]

 


 

문장(紋章) 가문 혹은 단체의 계보나 권위를 상징하는 시각적인 체계이다. 본격적인 문장의 기원은 중세 유럽문화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특히 문장은 중세의 전쟁터에서 각각의 진영을 표시하여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는 표시였다. 최소한 아군의 등에 칼을 꽂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적인 상징은 중세 이전, 고대 국가의 군인들이 전쟁터에 들고 나가던 방패에도 등장하기도 한다. 문장(紋章)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이하 문장(紋章) 산책)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 시각적 상징체계인 문장(紋章) 대한 연구를 대중 독자에게 소개하는 국내 연구진들의 결과물이다. 문장은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일상 곳곳에 침투해있다. 우리가 열광하는 유럽 축구 클럽의 엠블럼이나 기업에서 널리 사용되는 회사 로고 등은 모두 문장이 보유한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나게 문장(紋章) 산책 유럽사에 등장하는 문장이라는 키워드로 인간이 만들어온 독특한 시각적 상징체계를 역사적으로 조명한다. 책은 크게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역사의 여러 장면을 통해 문장 기능과 역할을 개관하고 역할의 변화를 소개한다. 그런 다음 보다 본격적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형태와 색채의 조합을 통해 문장을 만드는 문법 기본을 정리한다. 문장에는 조형적인 요소와 색채의 배합이 중요하며, 이들 간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현대에서 만날 있는 문장의 흔적을 찾아 가지 사례를 정리하고 문장 연구의 의의를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문장(紋章)연구일까?     

 

그렇다면 하필 중세 유럽의 역사에 기원을 문장연구일까? 그리고 우리와 무관해 보이는 유럽의 문장 연구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자에 따르면 문장은 문장이 사용되던 시기의 보편적인 관념과 시대적 감수성이 드러나는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한다(163) 한다. 그렇다면 문장의 본격적인 기원으로 보고 있는 중세 유럽 이래로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럽인의 의식과 감수성을 지배한 팔레트(105)로서의 역할을 이해하는 일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있겠다.  

 

책의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고 문장연구의 의의를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문장은 인간이란 존재가 사회적 관계망 속의 관계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실마리라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이러한 시각적 상징체계를 만들리 없다. 문장은 인간의 관념과 의도를 밖으로 드러내어 알리는 도구이자 연장의 역할을 하는 압축된 상징체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장은 유럽에서 오랜 역사를 거쳐 사용된 간결한 메시지 전달 수단이기도하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의 모든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문장이 인간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해온 만큼 다양한 사람들의 의도와 생각이 투영되었고, 의미와 역할에 무수한 변형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인간을 연구하는 어느 학문이라도 문장 대한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문장 이제 전세계 어디에서든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문장(紋章) 역할 변화     

 

저자에 따르면 문장은 중세 시대에 본격적인 주목을 받아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는 기호로서 사용되었다. 분명 같은 진영을 규합하고, 아군에 의한 죽음을 방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개인이 사용하는 문장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세에는 자신을 소개하고 신분을 드러낼 있는 명함의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언젠가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명함을 적이 있는데, 한자문화권인만큼 한자위주로 사용되어 정보 전달의 역할에 충실한 명함이었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명함처럼 그림이 들어간 디자인적인 요소는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한자 자체가 상징적인 기호체계로서 그림을 대신하는 디자인적인 요소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오랜 시간 발달해온 서예의 전통으로 글자 하나에도 조형미와 균형미의 요소가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동양의 명함에는 한자만 나오는 대신 글자 자체의 균형감과 명함 내에 여백과 조화를 이루는 배치가 중요해진 반면, 중세의 명함에는 이를 문장이 대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최근에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마담 퐁파두르 초상>이란 제목의 그림을 어느 책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림에 나온 퐁파두르 부인의 결혼 이름은 -앙투아네트. 결혼 마담 에티올르라고 했다. 그림의 인물 설명을 따라가다가 문장(紋章)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에티올르 부인은 남편과 이혼한 이웃에 있는 사망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라는 사람의 칭호와 집안의 문장을 사들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있는 사실은 문장이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신분과 지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신분을 주장하는 기능에 기꺼이 자신의 재력을 투입하고 있다. 문장이 개인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양반의 지위를 사고 팔던 유행과 유사한 같다.  

 

개인의 신분을 드러내는 역할과 관련하여 또다른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문장이 방계표시(자녀들의 서열표시) 하기도 했다는 . 아버지의 문장에 덧붙여 자녀들의 위계를 문장에 추가하고 있으며, 여기에 나름의 규칙과 약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16세기에 미혼 여성의 문장에 마름모형 문장이 사용되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저자에 따르면 가지 현상이 가부장적인 제도가 확립된 상황뿐만 아니라 이혼과 재혼이 보다 자유로워진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문장이 당대의 보편 관념과 감수성이 드러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는 말은 바로 이런 역할을 가리킨다.      

 

 문장을 중심으로 유럽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보다 풍성한 이야기를 얻을 있다. 1789 프랑스에서 있었던 프랑스 혁명 당시, 문장은 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과거의 산물로 취부되어 뭇매를 맞았다.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의 분위기처럼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는 문장이 폐기되어야 과거의 산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이후 프랑스에서는 문장과 관련된 모든 전통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물론 문장 자체라기 보다는 왕실을 상징하던 백합 프랑스의 민중을 상징하는 수탉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다. 문장은 이렇게 역사를 통해 부침을 거치며 역할과 기능이 분화되어 왔음을 있다. 현재 프랑스 축구팀의 심벌이 수탉 현재 남아있는 문장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대로 문장의 역사는 현재로 까지 이어지고 여전히 진행중인 것이다.  

 

 


문장(紋章) 현대인의

 

문장은 유럽에서 태동했다고 하지만, 세계가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의 지구촌이 오늘날 문장은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나라가 사용하는 국기의 모태 또한 문장이며, 이는 단체를 대표하고 국가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다양한 색채와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로고는 어떤가. 이들 모두 문장 역사가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사례이다. 구상적이든 추상적이든 모든 문장에는 시각적인 상징체계로서의 기능이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오늘날 문장은 분명히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 국가를 초월하여 범지구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문장의 기능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문장과 결부되어 이야기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문장이  없다면 거대한 서사 판타지는 작동이 불가능했을 것이다(210)라고 한다. 책에서 말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하는 인터넷 게임 개발과 관련하여 언급된 표현이지만, 게임의 이야기 구성을 위해 문장이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은 이렇게 다양한 맥락에서 적용된다. 국가에 적용되면 국가의 역사라는 서사를 상징하는 체계로 사용될 있다. 앞서 언급한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저자가 언급하는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내지는 신부족주의 고려해볼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비슷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끼리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공동체적 충동(197)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역할을 두드러지게 있는 것이 유럽 축구 클럽의 심벌들이다.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나 FC바르셀로나를 응원하는 팬들은 각자 응원하는 축구팀의 심벌이 박힌 옷과 수건 등을 들고 하나로 뭉치게 된다. 현대 가족은 해체되고 핵가족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렇게 다양하고 집단으로 해쳐모여 있는 데에 문장 역할은 무시하기 힘들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엠블럼이 박힌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면 하나의 가족 따로 없다. 가족대신 각자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모이는 동호회를 비롯하여, 유사한 취향을 가진 집단과 단체의 형성은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또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그리고 시대를 들여다보는데 문장 연구가 중요하게 활용될 있는 사례다.

 

문장(紋章) 산책에서 문장의 문법과 언어편에 이르면, 문장(紋章)에는 형태와 색채의 조합 배열에 나름의 규칙이 있음을 있다. 동양의 경우와 달리 서양의 문장에는 시각 디자인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함을 있다.  저자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문장 연구가 점차 부활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문장에 관한 사항이 유럽인들에게는 역사의 일부인 만큼 보다 폭넓은 사료와 연구 기반이 갖추어져있을 터이다. 문장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문장의 구체적인 형태와 색이 있다. 조형적인 형태에 비하여 색채에는 보다 강한 추상성과 모호하면서도 하나에 국한되지 않은 상징의 개방성이 존재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미 자신의 저서 색채론에서 6가지 기본 색에 따른 색채 심리학적인 탐구를 진행한 적도 있다. 책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면 여러 가지 모순점과 비과학적인 부분을 찾아낼 있지만, 심리학적인 관심으로 본다면 흥미롭고 색이 인간에게 주는 정서적인 효과 시사하는 바를 여럿 찾을 있을 것이다.

 

한편문장(紋章) 산책 저자들이 여러 언급하는 색채 연구에 관한 미셸 파스투로의 연구는 우리 기억 속의 (안그라픽스, 최정수 옮김)이라는 책을 통해 이해를 깊이 있다. 책을 읽노라면 색채가 갖고 있는 상징성이 이토록 풍부했던 가에 놀라게 된다. 아울러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색채에 대한 인상도 역사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된다. 다시말하면 색의 상징만 하더라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되고 새롭게 의미부여가 되어 왔다는 말이다. 문장(紋章) 산책에서도 중세에는 초록색이 악마의 색이었으며 현대에 들어 상징적인 의미가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기업의 로고에도 활용되고 있음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파란 색도 처음에는 부정적인 이미지였다가 중세 프랑스 왕가에 의해 채택되어 왕가의 색으로 사용되었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파스투로의 연구를 첨가하여 읽노라면 문장에 사용되는 색의 상징성은 오히려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문장의 요소로서 색채 그만큼 풍부한 역사적 배경과 상징성 갖는 추상적인 개념임을 확인할 있으며 문장 연구에 빼놓을 없는 부분이다.

 

문장에는 디자인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상징 체계가 문화와 시대상과 결부되어 파악될 있다는 점이 중요할지 모른다. “문장은 무의식의 창고(155) 여겨질 있을 정도로 당대 사람들의 보편 관념과 감수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여 간단히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적 관념을 담은 상징성은 분명히 인간이 지닌 상상력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적 발명품은 인간의 상상력 결부되어 무한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전파되었다. 비록 유럽의 문장이 18세기에 들어 급격히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쇠퇴한 것이라기 보다 상상력의 힘으로 의미와 기능이 분화되고 변용되어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 문장의 변형된 형태를 만나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문장 연구의 가치는 단순히 역사 연구의 하위 장르로서가 아니라 포괄적인 문화 연구의 키워드로서 시대를 이해하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술에 배부를 있을까. 문장(紋章) 산책 군데군데 편집과 내용상의 아쉬운 점이 보이긴 하지만 서양의 역사를 이해하는 다른 경로로서도 의미를 갖는다고 있다. 나아가 동양의 문화 연구에서 서양의 문장과 유사한 사례를 비교해볼 있는 비교문화연구적인 목적에서도 나름의 길을 열어놓은 책이라고 있겠다. 물론 문장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위상을 지니는지에 대한 문화연구도 빼놓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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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서점의 오월 - 80년 광주, 항쟁의 기억
김상윤.정현애.김상집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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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 서점의 오월

김상윤·정현애·김상집 지음  [한겨레출판]

 

 

 녹두 서점의 오월 서점 주인과 가족들이 5.18광주 항쟁이라는 역사의 국면을 온전히 겪어낸 기록이다. 물론 서점은 우연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것은 아니다. 서점 주인은 대학 운동권에 재정적, 정신적 도움과 지지를 주던 인물이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역사의 불운한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책의 이야기는 녹두 서점의 일가족 3명이 5.18이라는 사건의 전과 후로 나누어 각자 기억을 가다듬어 정리해내었다.   

 

녹두 서점의 주인 김상윤 씨는 광주 대학가 운동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로 보인다. 박정희의 유신시절이 막바지에 이르던 1977, 녹두 서점이 개업했다. 김상윤 씨는 서울의 청계천 중고서점을 통해 사회과학서를 구하여 광주의 운동권과 지식인들에게 공급하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는 5.18 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5 17 새벽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어 줄곧 취조와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수차례의 재판을 통해 1년이 훨씬 지난 1981 12 25 0,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된다.

 

녹두 서점의 다른 주인이었던 정현애 씨는 사회운동을 하는 남편 김상윤 씨를 곁에서 돕기로 마음먹고 결혼한 사람이다. 그녀는 책에서 무엇보다 여성들이 항쟁의 중심에서 어떤 역할을 해내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총을 들고 싸우진 않았으나, 아기 포대기 속에 <투사회보> 같은 인쇄물을 넣고 시민과 지도부에게 전달하거나, 헌혈에 동참하거나 식사를 준비하여 시민군에게 나누어주는 , 그리고 시민들에게 방송을 통해 힘을 모아달라는 호소를 했던 여성들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건이 끝나고 재판 과정에서 남편 김상윤 씨를 비롯하여 사형수들을 살려내는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녹두 서점의 오월 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정현애 씨를 비롯하여 5월의 어머니들이 절실한 마음으로 구속자 석방운동을 전개하던 과정이었다. 5.18사건을 담은 영화나 다른 기록에서는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것을 인정했을지 모르나, 무엇보다 중심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던 같다. 이들의 눈물어린 노력이 없었다면, 혹은 구속자 5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그대로 주저앉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면 이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현애 씨가 직접 고통스런 기억과 싸우며 남긴 기록은 다른 저자들이 남긴 부분 못지않게 소중한 기록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저자인 김상집 씨는 서점 주인 김상윤 씨의 동생이다. 1980 51 부로 전역한지 일주일도 안된 상황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생이었다. 그런데 전역한지 3주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건 당시 시민들에게 발포를 했던 헬기 부대 소속이었던 것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5.18항쟁이 군인들에 의해 진압이 이후, 김상윤 씨와 김상집 씨는 구치소에서 끊임없는 구타와 고문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그리고 정현애 씨는 체포된 100일만에 출소하여 가족과 다른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며 각자의 시선에서 거대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책에서 주목해보는 5.18항쟁의 성격

 

우선 5.18 사건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일반 시민이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남녀노소 없이 언론의 거짓과 눈앞에서 벌어지던 군인들의 만행에 분노하여 거리로 뛰쳐나왔던 이들이다. 여기에는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퇴근하던 시민들, 그리고 상당수의 중고생들도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있다. 특히 김상윤 씨가 들은바에 따르면 1980 5 19 당시 금남로에 모였던 시민 시위대 3분의 1 가량이 중고생이었다고 한다. 정확한 비율보다 중요한 것은, 5.18당시 상당히 많은 중고생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있는지 고민하고 행동했다는 점이. 총을 다루지도 못하면서 총을 들고 싸우겠다고 나선 학생들을 포함하여, 화염병을 만들기 위한 기름을 구해오거나, 시신을 수습하고, 헌혈에 동참하기도 하던 이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5.18항쟁을 기억할 점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가지  잊지 말아야할 것은 김상윤 씨가 지적하듯, 참혹한 공간을 목숨걸고 지킨 이들이 기층민중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터미널에서 구두닦이를 하다가 공수부대의 만행을 보고 총을 들게 시민이 한가지 예이다. 저자는 운동권 세력만으로 부족했던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때문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나는 기층민중들이 지도부도 없이 이렇게 장렬하게 싸울 있다는 사실을 상상해 적이 없다.(339)

 

녹두 서점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정황은 대학생과 이들의 연장선에 있는 운동권 참여자들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초기에는 학생들의 행동에 동감하고 거리로 나선 교수들 지식인들의 참여도 눈여겨보게 된다. 현재 대한민국의 교수 사회는 사회문제에 대해 책임의식을 느끼고 나서는 지식인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는 대목이다.  

 

저자들 각자 경험한 5.18항쟁의 기록을 읽어나가며 안타까웠던 점은 지방 유지 원로들이 중심이 재야수습대책위원회의 행보였다. 이들은 시민들이 마련해온 무기를 강제로 회수하고, 도청에서 대거 철수했다는 점이었다. 김상집 씨는 이들이 모두 철수해버린 것이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의한 이들에게도 불안감을 더욱 고조시킨 요인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김상윤 씨는 남아있던 사람들끼리도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사람도 혹시 나가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밖에 내지 못했을 뿐이다.”(133)라고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사건 이후 39년이 지난 지금에야 당시 정황을 검토해보며 무기를 회수하는 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를 고민해볼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 다르게 전개되고 있던 급박한 상황아래, 역사적 현장에서 어느 것이 최선의 방법인지 판단하고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한다. 절대적인 힘의 우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기와 시민 참여자가 줄어든 정황은 이미 정해진 결말을 더욱 앞당길 뿐이었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시간이 지나 역사의 판단에 맡길 있을 것이다. 다만 무기를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고민하며 판단할 있을 것이다.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됩시다

 

1980 5 21 낮에 계엄군은 다시 광주시내로 진입하며 대낮부터 시민들에게 발포를 하기 시작했다. 상황에서 김상집 씨와 대책회의를 하던 선배들이 이상 투쟁을 지속해나가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각자 헤어지며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됩시다(181)라고 말한다. 윤상원 씨는 몇일 도청을 지키며 군인들과 교전을 벌이다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다른 이들은 체포되어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받다가 자해를 하기도 하는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서점 주인 김상윤 씨는 취조와 고문을 받으며 죽어버리고 싶은데 죽음을 결단할 만큼 독하지 못했다(242)라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아무리 심한 고문을 당해도 이를 악물고 정신츨 차려야 했다(241)라고 마음을 다잡고 고문을 버텼다. 동생 김상집 씨도 윤상원 씨의 죽음과 김영철 선배의 자살 기도를 떠올리며 여기서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나가야 한다(321)라고 당시의 다짐을 기록하고 있다. 녹두 서점 가족은 모두 5명이 잡혀서 조사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고 말하고 있다.

 

개개인이 역사적인 사건 한가운데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을 엄밀하게 기록하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녹두 서점의 오월 첨부된 해제에서 김정한 교수는 점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거대한 사건을 몸소 겪은 당사자들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을 아니라 나중에 구성되기도 하며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 (…) 세사람의 기억도 마찬가지로 사실과 다를 수도 있고 온전한 역사가 아닐 있다(347)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어서 당사자들 각자가 경험한 기록을 읽으며 이들이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했으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생생하게 들여다볼 있고, 각자가 기억하는 진실을 통해 우리는 5.18 진실에 다가갈 있다고 전한다. 다시 말하면 후세가 이들이 남긴 기록을 자료들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지, 5.18 다른 각도에서 진실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기억의 왜곡 가능성을 염두해두면서도 당사자들에게 진실이었던 5.18항쟁의 모습을 보다 생생히 따라가볼 있다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가치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은 이러한 기록들이 후손에게 전해지고 읽히는 일이다.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라도 시간과 공간의 간극이 넓어질수록 사건들을 직접 전해줄 있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게 마련이다. 남는 것은 결국 다양한 당사자들이 남긴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정리하며

 

5.18항쟁의 가운데에서, 그리고 시민군의 곁에서 역할을 했던 녹두 서점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서점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5.18사적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녹두 서점의 일가족 3명의 저자가 남긴 5.18 기억은 자체로 소중하다. 그러나 5.18항쟁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직도 행방불명으로 남겨진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 처우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책임자에 대한 책임규명도 여전히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당시 헬기를 조종했던 사람의 증언이 최근 있었으나 여전히 전두환은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포함하여 광주 시민들에게 5.18 여전히 진행형일 것이다.

 

녹두 서점의 식구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보면서 생각해보는 것은, 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기록이 남겨졌으면 한다는 점이다. 월남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온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당시 보안대에 잡혀왔던 시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던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39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대개 60-70대일 것이다. 이들은 지금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자상한 할아버지로 살아가고 있을까. 짐작컨대 대개는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을 같다. 사람이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다. 이들에게도 시민군에게 동정적이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분노한 시민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다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도 결국은 역사의 피해자일 있다. 이들도 각자 경험한 5.18사건이 있을 것이며, 이들의 기록도 아울러 남겨졌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5.18항쟁 당시 광주 시민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버스에 앰프를 설치해주던 전파사 주인도 그러하고, 시민군에게 해줄 밥이라는 것을 알고 후하게 퍼준 쌀집 주인도 그러하다. 하지만 저자는 5 27 새벽, 애절한 방송을 듣고도 뛰쳐나가지 못했던 많은 시민들에게는 마음의 병을 지우기도 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광주는 아직도 (마음의) 병이 완치되지 않아 신음하고 있는 도시(339)라고 말이다. 광주가 얻은 병을 돌보는 일은 대한민국 전체가 겪어야만 했던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길이기도 것이다.  





#녹두서점의오월 #김상윤 #정현애 #김상집 #한겨레출판 #원탁의서평단



"‘어쩌면 교사라는 직업도 잃게 될 것이고, 잘못되면 엄청난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각오는 하지 못했다."(정현애) - P103

"도청에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저 사람도 혹시 나가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입 밖에 내지 못했을 뿐이다."(정현애) - P133

"우리는 대한민국 군인이 무장하지도 않은 국민을 향해 대낮에 발포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김상집) - P180

"하지만 그 때 나는 작금의 사태가 포고령 위반 정도의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거대한 역사의 파고에 휩쓸리고 있다는, 그리고 그 파고를 견뎌내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엄습하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고문을 당해도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려야 했다."(김상윤) - P241

"우리는 뭉쳐서 싸울 때만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경험했다."(정현애) - P295

"피바다를 이룬 참혹한 공간을 목숨걸고 지킨 사람들은 실로 기층민중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기층민중들이 지도부도 없이 이렇게 장렬하게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에필로그) - P339

"5.18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온몸으로 겪었던 세 사람은 그 경계를 견디며 사람다운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고귀함이다."(김정한 교수의 해제)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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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필리프 J. 뒤부아 외 지음, 맹슬기 옮김 / 다른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Petit Philosophie des Oiseaux)

 필리프 J. 뒤부아(Philippe J. Dubois) & 엘리즈 루소(Elise Rousseau) 지음

맹슬기 옮김 | [다른]

 


얼마전에 새로운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실내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창문을 여는 순간, 가까이서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느낄 있었다. 바로 뒤에는 작은 공원이 있는데,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아침마다 새들의 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새에 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내게도 새에 관한 짧은 인연이 있다. 초등학교 아버지가 데려온 십자매 한쌍을  떠올렸다. 특히 오랜 시간 함께했던 십자매 쌍을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과묵한듯하면서도 가끔씩 지저귈 때면, 무슨말을 하고 있는 걸까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횃대에 앉았다가 분주히 물을 먹거나 물을 튀기며 목욕을 하고, 조를 쪼아먹는 모습을 한동안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조그마한 여러 개의 알을 둥지에서 확인하고는 신비로움에 감탄했던 기억도 있다. 작은 몸집에서 이런 알이라니. 비록 새장이라는 좁은 공간이긴 했지만, 내겐 십자매 쌍을 통해 새의 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볼 있었던 인연이 있었다.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조류학자이며 출판사 편집장이기도 필리프 뒤부아와 환경보호에 관한 글을 쓰는 기자이자 작가인 엘리즈 루소가 참여한 결과물이다. 자연에 대한 애정과 오랜 관찰을 바탕으로 새에 대한 고찰을 보여준다. 이들이 보여주는 시선은 인간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새와 자연으로부터 보고 배우는 짧은 철학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따라서 사변적으로만 끝나는 철학적 단상들이 아니다.   책의 제목을 보고 나는 어린 시절 십자매와 맺은 짧은 인연을 떠올렸다. 새들은 한때 어느 어린아이가 감탄의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던 것을 느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일상과 일탈 -지금 여기 여행사이에서


저자는 새들이 오로지 지금을 산다라고 말한다. 알듯 모를듯한 문장은 곧바로 저자가 제시하는 새들의 삶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우리가 아는 진실은 하나다. 새는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 새는 그저 행복을 경험할 뿐이다.”(138)  

 

현대인은 우리가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행복에 대한 물음을 하며 우리는 곧바로 불행할 이유를 찾는 존재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곧바로 우울해지곤 하니 말이다. 사랑에 관해서도 새들은 인간들처럼 사랑에 대한 상처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의 심장은 한순간도 멈추는 일이 없다”(76) 깨달음을 전한다. 카르페 디엠 철학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 지금 순간,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새들과 같이 행복에 대한 물음대신 행복을 경험하라 말한다. ‘행복을 경험하라 표현은 간결하지만 내게는 매우 강력한 진술로 다가왔다.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경험하는 소박한 전복의 기술일 터이다.   

 

지금 여기 대한 가르침은 사실 모든 존재가 지니는 유한성 다른 표현으로 이해된다. 서양의 그림에 그토록 많은 죽음 유한성 상징(해골, 시계, 썩어가는 음식 ) 텍스트가 존재하는 이유는 죽음을 기억하라 주문을 통해 자신의 삶을 환기하라는 숨은 제안일 것이다. 저자는 새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보유한 삶의 양태를 반추해보고 있다.

 

우리는 후회로 가득한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새들처럼 강렬한 현재를 살려고 하지 않는 걸까? 새들은 미래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 단지 현재의 삶을 위해서 움직이고, 열심히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이다.”(190)

 

새들에 관한 짤막한 생태에 이어지는 저자들의 깨달음은 내겐 아주 생소한 것이 아님에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는 복잡한 철학보다 죽비로 내려치는 순간의 깨달음이 일상에 필요한지 모르겠다. 새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동물에 대해 어떠한 (지적, 도덕적) 우월감이라도 느낀 적이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인간본위의 생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고찰을 통해 지금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금 배우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나아가 일상에서 작은 습관들 마련해두라고 조언을 하기도 한다. 바로 기운을 돋우는 오전의 커피 주말에 보는 영화 같은 소소한 습관을 자신의 바쁜 속에 마련해두라고 말이다. 복잡한 현대인의 , 예기치 않은 인생살이에서 습관 일상의 중요한 버팀목이 있다는 조언은 우리가 눈여겨볼만 하다. 습관의 범주에는 각자 취향이나 관심에 맞는 취미 규칙적으로 향유하는 일도 포함될 같다. 우리의 일상을 단단히 붙들어줄 있고, 버틸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의식하고 적용해볼 있는 삶의 기술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상만 있다면 지구 상의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취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든일 있지 않을까. 저자가 말하듯 새나 인간이나 개중에는 고집스러운 여행자도 있지만 환경의 변화를 싫어하는 유형도있기 때문이다(121). 다시 말해 바다의 부름 답하는 유형과 익숙함과 편한함 좋아하는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민할 필요없이 후자이다. 저자에 따르면 올빼미가 자신이 태어난 숲을 평생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올빼미 형이다. 반면 유럽칼새와 제비는 날수 있게 되자마자 모험을 떠나는 방랑자 형이다. 나는 여행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을 멀리 떠나는 것에 대한 부담이 과거보다 더해지는 중이다. 하지만 여행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르다. 우리는 여행지에 나를 조금 내려놓고, 돌아올 많은 것을 가져온다. () 여행 중에는 불편한 일이 많고, 잠도 부족하며, 적응하고 인내해야 것이 넘쳐난다. 모든 피로함과 함께 습관처럼 조이고 있던 긴장의 끈이 풀리고, 쓰고 있던 두꺼운 가면이 어느 순간 벗겨진다.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골들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자신의 맨얼굴을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떠난다.”(122-123)

 

여행은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보는 일탈로 있겠다. 여행은 낯선 대상과 접촉하게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새로움과 조우하고, 자신을 흔드는 경험을 하게되면 분명히 여행을 마친 나는 여행 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것이다. 어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내가 다르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행위도 여행과 일면 유사한 면이 있을 것이다. 한편 불편을 감수하고 여행을 떠나본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따르던 자신의 습성과 습관을 바라볼 기회를 가지기도 한다. 나와 같은 사람들과 내가 익숙한 문화가 지배적인 환경에서, 나와 다르고 나에게 생소한 문화가 주를 이루는 환경에 서보면 나의 고립감과 고독은 극대화될 것이다. 때야 비로소 자신을 의식하고 새롭게 바라볼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는 여행을 통해 우리 자신의 참모습 마주하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한 여행의 의미를 속에, 일상에서 적용하면 어떨까 생각해보게 된다. 일상에서 작은 일에 새로이 관찰하고 낯설음을 경험하는 . 바로 일상으로의 일탈이다. 특히나 방법은 나처럼 집을 멀리 떠나기 싫어하는 올빼미 유형의 사람들에게 괜찮은 방법이 같다. 앞의 화단에 있는 관목의 형태나 나뭇잎의 무늬를 들여다보고 감탄하거나, 아침에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의 패턴을 구별해보는 일과 같은 소소한 것들도 가능하지 않을까. 봄엔 야생화에 대한 책을 읽고, 숲길 구석에 있는 야생화를 발견하고 감탄하던 기억이 난다. 너무나 작아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내게는 숲길을 걸을 조심스럽게 걷게 경험이 있다. 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수풀 구석에서 바람에 작게 떨고 있는 야생화를 발견하는 순간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전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던 존재들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또한 일상을 새롭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 있음을 알았다. 우린 때때로 이런 일상으로의 일탈이 필요하다.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


저자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어느 출연자가 예술은 전적으로 인간에게만 속하는 이라는 발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말은 일견 옳은 점이 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인간이 정해놓은 기준이며, 여기에 한해서 진실이다. 내게는 말이 어느 외국인을 가리켜 한국어를 못하니 야만인이며 무식한자들이라고 폄훼하고 우월감을 느끼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놓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둔 기준으로 인간만이 여기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오류다. 예술은 전적으로 인간 본위의 개념인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성 인간 고유의 것은 아니다.

 

새를 관찰해보면 아름다움이 새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있다. 비록 아름다움이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일 때에도, 바로 아름다움의 ‘수단’으로 선택되었다는 의미심장한 것이다.(87)

 

여기에서 저자는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극락조의 예를 들고 있다.

 

춤과 몸의 장식으로 극락조는 예술을 극대화한다. 물론 춤은 ‘창조’한 것이 아니다. 흔히 말하듯, 모든 것은 진화의 결과다. 또한 자연의 선택이기도 하다.(88)

 

여기에서 극락조가 보여주는 예술 인간적인 의미에서의 사유하거나 착안한 예술의 범주에 드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진화과정 속에서 형성된 생존 수단이다. 하지만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제시한 자연선택이론만으로 극락조의 진화를 설명할 없다. 화려한 깃털과 춤은 천적에게 쉽게 발각되기 쉽고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컷 극락조가 목숨을 걸고자신을 화려하게 돋보이려 노력하는 데는 바로 기능적인 또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일명 성선택 이론이 요구된다. 극락조는 성선택 이론 표본이 된다. 이론은 다윈이 이미 자신의 저서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제시한 기본 개념이다. 하지만 자연선택론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성선택 중요성이 한동안 가려져 있었다. 심지어 다윈은 자신의 성선택이론으로 다른 진화론자들의 숱한 비난을 받았다. 성선택이론이 현대에 들어 다시 주목을 받게 것이다. 가지 주의할 부분은, 저자가 극락조의 춤이 진화의 결과이며 자연의 선택이기도 하다 표현이다. 저자가 말한 자연의 선택 자연선택설의 영향을 받은 진화이기 보다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성선택 염두해둔 자연의 선택으로 보아야 옳을 같다.

 

화려한 깃털에는 대체로 위험이 따른다. 따라서 깃털이 화려한 데에는 분명히 다른 목적이 있다. 바로 암컷을 유혹해 번식을 하는 것이다. 암컷은 깃털을 가장 과시하는 수컷을 선택한다. 그게 수컷의 생명력과 건강함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 자신을 보여주는 수컷이 좋은 수컷이란 이야기다.(182)

 

커크 윌리스 존슨의 《깃털 도둑》에도 극락조의 성선택이론을 염두해둔 언급이 나온다. 극락조는 1 내내 거의 짝짓기 준비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필리프 뒤부아와 엘리즈 루소가 언급했듯이, 화려한 장식(깃털) 춤으로 암컷 극락조를 유혹하는 것이다. 극락조가 보유하는 화려한 깃털과 춤의 리듬은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 범주에 들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들 역시 아름다움 대한 나름의 기준이 있으며,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는 존재라는 점이 중요하다. 최대한의 번식 기회를 누리는 것이 모든 생물의 최대 명제라고 한다면, 극락조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수단으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사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하나의 선택기준이 되는 성선택 기작에는 진화의 경제학(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의 번식을 추구하는 ) 숨어있는 셈이다. 결국 모든 생명체는 자연 성선택 어느 기작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며, 모든 존재는 또한 미적욕구로 가득한 성적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한편 저자는 새들의 생태로부터 우리의 삶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술가만이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터이다. 예술을 창작해내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마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빼놓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적 감수성 대한 문제다.

 

인간의 예술은 두말할 없이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 그런데 시작은 소리, 리듬, 빛깔, 물질과 관련된 모든 아름다운 것에 대해 감탄하는 본성에서 비롯되었다. 예술가가 된다는 무엇보다 관찰할 아는 것이다. (91)

 

예술은 인간중심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예술의 기원에는 우리 주위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관찰행위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는 모든 대상에 대한 반응이 예술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자의 고찰을 따라가다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내지는 인식이 인간 고유의 본성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든, 사유를 통해 창조된 것이든 우리 외부에 있는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고 이해해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저자들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창조성 일깨우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분명히 무한한 창조성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며 - 새로움으로 가득한 우리의 일상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


책에서 저자들은 가볍게 사랑과 가족, 여행과 일상, 아름다움과 예술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주제는 사실 가볍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암탉이 날씨 좋은 모래땅에 뒹굴며 햇볕을 즐기는 것처럼 행복을 경험하는 일이 아닐까. 행복을 의심하기보다 지금 순간, 행복을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오로지 지금을 사는 새들처럼 우리도 현재를 사는 일이 저자의 깨달음이자 독자에게 바라는 바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새들에게 배워야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우리의 삶을 자연과 다시 연결하고, 그리하여 다양한 감각과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거라 답할 것이다!(38)

 

저자의 결론에 가지 유념해볼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보라는 조언이다. 그러고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과 호기심에 눈으로 우리의 일상을 관찰할 있을 것이다.  








#새들에관한한짧은철학 #필리프뒤부아 #엘리즈루소 #맹슬기 #다른 #네이버원탁의서평단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뜻밖의 사건들로 채워진다. 바로 이렇게 삶의 모험 한가운데에 있을 때 작은 습관들을 심어두는 게 좋다. 기운을 돋우는 오전 11 시의 커피 한 잔, 일요일 저녁을 느긋하게 만드는 영화 한 편처럼 말이다."

"예기치 않은 경험으로 꽉 찬 삶을 살고 있을 때 습관은 버팀목, 표지판, 좌표의 역할을 한다. 위대한 모험가들도 지극히 사소한 자신만의 습관을 지니고 있다." - P37

"만약 우리가 새들에게 배워야 할 단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우리의 삶을 자연과 다시 연결하고, 그리하여 다양한 감각과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거라 답할 것이다!" - P38

"새들은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애정, 존중, 끌림, 호의, 그리고 상대방을 생각하는 섬세한 마음이 모두 합쳐진 것이라고. 좋은 것만 주고, 상처는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고." - P73

"가장 숭고한 사랑조차 우리의 동물적인 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물적인 측면을 부정적으로 볼 때가 많지만, 동물성은 바로 멧비둘기 연인의 부드러운 애정과 회색기러기의 상부상조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P74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은 사랑하기를 거부한다.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애정을 품지 않기로 다짐하고, 사랑에 빠질까 봐 그리고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새의 심장은 단 한순간도 멈추는 일이 없다." - P76

"새를 관찰해보면 아름다움이 새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 아름다움이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일 때에도, 바로 그 아름다움이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일 때에도, 바로 이 아름다움의 ‘수단’으로 선택되었다는 게 의미심장한 것이다." - P87

"예술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창작하는가’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단순한 마음, 이것도 예술에 빠질 수 없는 요소다." - P90

"인간의 예술은 두말할 것 없이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 그런데 그 시작은 소리, 리듬, 빛깔, 물질과 관련된 모든 아름다운 것에 대해 감탄하는 본성에서 비롯되었다. 에술가가 된다는 건 무엇보다 관찰할 줄 아는 것이다. " - P91

"그리하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르다. 우리는 여행지에 나를 조금 내려놓고, 돌아올 때 많은 것을 가져온다. (…) 여행 중에는 불편한 일이 많고, 잠도 부족하며, 적응하고 인내해야 할 것이 넘쳐난다. 이 모든 피로함과 함께 습관처럼 조이고 있던 긴장의 끈이 풀리고, 쓰고 있던 두꺼운 가면이 어느 순간 벗겨진다.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골들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자신의 맨얼굴을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떠난다." - P122

"우리가 아는 진실은 하나다. 새는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새는 그저 행복을 경험할 뿐이다." - P138

"새들의 관점으로 보면 깃털의 아름다움은 기능적인 것이며 아주 중요한 목적이 있다. 즉, 새들에게 깃털은 소통과 구애를 위한 수단이다. 물론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아름다움을 뽐낼 때도 있지만 말이다." - P180

"우리는 왜 후회로 가득한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새들처럼 강렬한 현재를 살려고 하지 않는 걸까? 새들은 미래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 단지 현재의 삶을 위해서 움직이고, 열심히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이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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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 - 넛지부터 팃포탯까지, 심리와 세상을 꿰뚫는 행동경제학
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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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

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인간의 삶이란 인류의 등장 이래 원래부터 팍팍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도면 괜찮은 것인지 혹은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볼 때가 있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무난히 헤처나가려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부수적으로 알아야만 것만 같다. 모든 기술을 뒤늦게 접하고 언제나 따라가기 바쁜 나는 아날로그 주의자라고 변명은 하지만, 첨단 기술에 익숙한 이들의 삶을 보아도 현대인으로서의 삶은 여전히 팍팍해보인다. 인간이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거쳐야하는 통과의례를 제대로 거치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다. 학업, 취직과 결혼, 육아 등등의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과 의식주와 같은 삶의 기본 양식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작은 단위의 개개인에서부터 국가단위의 삶을 지배하는 경제활동이 자리잡고 있다. 경제는 공부하기 어렵다거나 싫다고 하여 담을 쌓고 사회를 수는 없는 분야이다. 경제는 이제 현대인이 어느 정도는 알아야할 상식과도 같은 분야가 되었다. 심지어 무인도에서 혼자 사냥을 하며 먹고 산다고 해도 결국 희소 자원 얻을 있는 보상(음식), 식량을 구하는 효율성을 따지는 이상, 그리고 최소한 사람 이상 살아가야 하는 경우, 부족한 자원의 분배와 교환 활동이 있는 이상 우리의 삶은 경제활동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서두가 이렇게 길어진 것은 현직 경제 분야 기자가 대중에게 쉽게 소개하는 경제서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다. 이완배 기자가 저술한 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은 독자들에게 주류 경제학과 다른 인간관에 기반한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를 소개한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을 이기적인 결정을 하는 존재로 보는 주류 경제학과 다른 인간관을 바탕으로 사회의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분야다. 기존의 주류 경제학에 대항하는 비교적 새로운 시도라고 이해된다. 무엇보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과의 긴밀한 연계와 학제간 연구를 통해 자리잡고 있는 분야로 보인다. 곧 인간이 언제나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가정에서 벗어나 인간은 실수도 할 수 있고, 비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주류 경제학과 다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기만한 존재가 아니라 이타적인 존재이므로 타인을 위해 손해를 보기도 하고, 집단을 위해 개인이 손해를 보면서도 협동을 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본문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여러 경제학 이론은 복잡한 수식을 배제한 심리학 이론처럼 느껴진다. 최근 생물의 진화에 대해 현대 생물학이 제시하는 다양한 담론 중에서 인간의 이타성에 대한 부분이 주목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행동경제학도 이렇게 최근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경제학과 긴밀한 학제간 연구를 통해 탄생한 경제분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다양한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 대한 경제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우선 책의 전반을 바라볼 때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인간이 정말 복잡한 존재라는 점이다. 심리학과의 학제간 연구로 자리를 잡은 행동경제학이 제시하는 연구들은 복잡해지는 인간 조건을 중심으로 반응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현상론이라는 인상을 처음 주었다. 물론 저자가 복잡한 경제학의 수식과 분석론을 걷어내고 대중을 위해 쉽게 정리한 사항만으로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무모하거나 턱없이 부족해보일 수 있겠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점은 인간에 대한 관점을 주류 경제학과 달리 좀더 유연하게 두고 있다는 점이다. 스놉 효과처럼 인간이 사치품을 구입하는 행위는 빈부격차와 계급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나오기 힘든 설명일 것이다. 차별성(또는 개성)은 오히려 자본주의적인 개념에서 발명된 인간의 욕망에 기인할 것이다. 빈부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놉 효과는 더욱 강력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아울러 동수저, 흙수저 사람들이 금수저의 소비를 욕망하는 사이 우리의 삶은 더욱 팍팍해지지 않을까. 자아 고갈 이론의 교훈이 전해주듯,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는데 물리적인 에너지가 많이 들긴 하지만 반복 훈력을 통해 통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순환오류처럼 느껴지지만, 자본주의는 계급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욕망하라는 메시지는 보낸다. 흙수저들은 자본주의 구조가 끊임없이 개개인에게 강요하는 차별성을 견뎌내기 위해 인내하고 통제력을 발위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 흙수저들의 삶이 팍팍해지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라는 관점의 연장선에서,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 복잡함에는 타고난 본성의 측면 말고도 인간이 속한 집단이나 살고 있는 환경의 영향 또한 지배적이기도 하다. 곧 인간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들도 환경만 조성이 되면 타인에게 잔인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루시퍼 이펙트의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연구처럼, 인간은 어떤 규정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현대 심리학의 연구에 힘입은 인간에 대한 충격적인 이해는 우리가 어떤 사회, 집단에서 마법의 완장을 차게 되면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 점은 불법주차한 차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있을 때 다른 결과를 줄 수 있다는 범죄의 경제학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교훈을 준다. 나아가 프리모 레비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처음 겪은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폭력, 프란츠 파농이 이야기한 수평 폭력은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일깨워 준다. 분명 심리학의 영향을 긴밀하게 주고 받아 등장한 행동경제학은 보다 단순하게 인간을 바라보았던 주류 경제학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저자의 소개대로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이타성 가진 존재이며 협동하는 존재라고 바라본다. 결국 경제학이 다른 종류로 나뉜다면 이는 각각이 갖는 인간관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이성에만 관심을 두던 주류경제학에 인간의 감성, 심리적인 요인을 추가로 고려하여 주류 경제학과의 차별성을 내세운다. 여기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지극히 복잡한 인간 개체와 인간 사회의 모습을 고려해볼 때다. 이성에 주로 주목하던 주류경제학이나 여기에 인간의 심리를 고려한 행동경제학은 크게 보아 배다른 형제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다시말하면 경제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관찰할 고려할 변수(parameter) 하나 추가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문외한이기에 용감하게(?)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나아가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심리라는 추가 변수를 도입함으로써 사회경제 현상을 관찰하고 결론을 내리기 위한 어떤 집단심리의 전형 가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당수가 입으면 다시 벗기 힘들다는 꽃보다 화려한 등산복 입고 둘레길을 걸으시는 부모님들을 떠올려보자. 행동경제학은 이런 현상에 문장으로 결론을 있는 집단의 심리를 이미 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사회현상은 분명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고 전제한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한편 행동경제학이 심리학과 긴밀한 교류를 통해 발전되는 것은 결국 기업 마케팅에 매우 유용할 같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 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에서 쓸모 누리는 주체가 팍팍하게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이 아니라 기업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분명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행동경제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좀더 넓혀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소비자의 집단심리를 관찰하고, 기업의 판매전략을 세우는데 오히려 유용한학문은 아닐런지. 인간의 심리를 고려한 게임 이론 기반한 경제학을 알면 우리는 보다 주체적으로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통상적으로 보았을 , 행동경제학자들이 분석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 내지 인간 집단의 대상 그리고 혜택을 받을 있는 대상이 빈곤층 아닐 같다는 점이다. 과연 행동경제학은 빈곤층의 삶에 무기가 되고 쓸모를 전해줄 있을까? 집단의 소비 심리에서, 명품에 집착하는 이들을 다룬 스놉효과 베블런 효과 대상으로 빈곤층 기본적으로 배제될 것이다. 이는 빈곤층과 무관한 현상일 것이다. 마시멜로 테스트처럼 개개인의 노력이 인생을 바꾸는 것보다 부모를 만나는 것이 성공에 유리하다라는 다소 허망한 결론을 알게된다고 우리의 삶에 무기로 사용할 있는 점이 있을까는 의구심을 갖게된다.  앞서 언급한 자아 고갈 이론처럼 자본주의가 개개인에게 차별성 강요하는 메시지(혹은 광고) 끊임없이 보내고 있을 ,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부단히 노오력해야만 한다. 어찌보면 행동경제학은 우리에게 팍팍한 삶을 벗어날 방도를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다. 행동경제학은 우리에게 무기를 주는 대신 현재 놓여있는 문제를 개개인이 해결하도록, ‘해결책의 개인화 맞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행동경제학은 팍팍한 삶을 벗어날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분야는 아닌 같다.  

 

 

행동경제학은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실수를 하고, 사기를 당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됨을 알려준다. 아무리 천재적인 경제학자든, 철학자든, 심리학자든 이들의 연구는 인간 개체 인간 사회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결론을 얻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들이 제시하는 각종 이론들은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인류가 쌓아온 지혜의 보고에 이미 내재하던 인간관 간단히 모형화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말로 정리한 것은 아닐까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현대인의 삶은 과거보다 복잡해지고 다양화해졌으며, 첨단기술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소재의 등장과 이를 둘러싼 인간 사회의 동력학 관찰하고 분석하지만,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그리 복잡하거나 새롭지는 않은 같다. ‘하늘 아래 새로운 없다 말처럼, 인류가 관찰하고 경험해온 지혜를 그렇게 많은 현대의 경제학자들이, 지구 역사 이래 최초로 제시하는 이론일 것인가. 그렇다고 믿기는 힘들다. 경제 이론의 결론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이미 오랜 문학작품과 철학서에서 발견할 있을 같다. 그러므로 내가 행동경제학을 좀더 알게되어 저자의 말대로 삶이 보다 나아질 있는지, 아니면 기업의 매출 증대에 더욱 도움이 있는 학문인지는 앞으로 좀더 지켜보고 판단해야할 숙제가 것이다.

 

 

 

#네이버원탁의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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