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대 담배 쏜살 문고
조지 오웰 지음, 강문순 옮김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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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품격에 대한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공격은 지성인 자신들로부터 나온다.”(37)
– 조지 오웰 <책 대 담배>

지하철에서 눈에 들어온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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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싸움 - 인류의 진보를 이끈 15가지 철학의 멋진 장면들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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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은 철학의 출발점이다

 

 

생각의 싸움에서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 상징되는 철학의 시작과 함께 철학이 다다른 반대편의 극한으로 니체를 소개한다. 신화의 언어로 이루어진 고유명사로 만물을 설명하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던 시대에서 보통명사로 자유롭게 비판하고 따져 묻기 시작하며 철학이 탄생되었다. 이런 변화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처음 확인할 수 있다. 고유명사로 세계를 설명하면서도 해소되지 않는 지적 갈증을 자각했다는 것, 그리고 감히 알려고 시도한순간이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책에서는 이렇게 발생한 철학이 이르게 된 곳의 경계를 니체의 철학으로 설정한다. 철학의 본령인 자유로운 비판과 따져 묻기의 대상을 모든 철학 자체에 적용하여 회의하고 질문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니체는 우리가 삶의 일부처럼 여겼던 도덕이 애초부터 그 자체로 옳은 것이 아니며, 언제든 새 도덕이 만들어 질 수 있다’(62)고 주장한다. 도덕의 상대성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묻고 따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니체는 여기에서 나아가 우리 각자가 도덕적 주체로서 각자의 도덕을 만들고 자신의 윤리를 만들라’(63)고 주문하며, 이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강조했다. 심지어 니체는 최초로 도덕을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도덕비판의 임무를 부여하기도 했다


     니체는 이러한 도덕이,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 왔던 가치와 추구하던 의미의 진공상태를 니힐리즘으로 표현한다. 우리 손에 붙들고 있던 의미와 가치가 근거 없음을 영원회귀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제시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동안의 도덕과 사회 규범 및 가치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목적지를 지정해주고 있었다면(-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 니체는 이 목적지를 우리 각자가 정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칸트가 언급한 의무론적 윤리학의 맥락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곧 행동의 규칙만 제시하며, 규칙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 니체는 각자가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택할 방식으로 행동하라’(72)라고 주문한다. 매 순간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삶을 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각자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이 어떠한 것이더라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만의 윤리를 만들고 이에 따르는 삶이다


     이 지점에서 떠올린 소설의 한 대목이 있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이 제2차 대전 직후 쓴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 의 한 대목이다. 이 소설은 연합국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도시 쾰른을 배경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으로 각자 의지할 가족 없이 홀로 된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게 되고 서로 가까워진다.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사라져버린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삶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삶을 받아들였고, 바로 이 자리에서 그의 삶이 집약되어 고통과 행복이 넘치는 짧은 순간의 영원을 경험했다.”(천사는 침묵했다, p158). 이 지점은 생각의 싸움에서 저자가 니체의 철학을 소개한 지점과 연결을 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이 대목은 니체가 물었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응답처럼 보였다. 삶의 기반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기존에 있던 삶의 규범과 도덕은 이제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두 남녀의 삶에 대한 의지만이 새로운 규범이며 도덕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는 주체는 바로 이 두 사람 자신들이었다


     생각의 싸움1장에서는 철학의 시작과 끝이라는 경계의 양 끝을 보여주었다면, 2장에서는 이 경계의 사이 어딘가에서, ‘이성’, 곧 로고스로 대변되는 앎의 과정이 어떻게 서양의 근대 철학을 시작한 철학자들에게 나타났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확실한 앎이란 가능한가, 그리고 이 앎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의 싸움을 벌였던 이들이다. 이런 근대 철학과 공통적인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던 것은 중세를 지배해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근대 철학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합리적 의심을 기반으로 공고하던 기존의 철학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 국면 역시 만물을 가능케 한 요소를 이라고 본 탈레스에게 왜 그러한지 비판적으로 따져 물었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근대 철학자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으로 대변되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따져 물었던것이다


     2장의 처음에 소개된 베이컨은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경험적 지식,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며 귀납법의 전통을 세웠다. 세계에 대한 지식들로부터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을 찾아내고 다시 이 규칙을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런 맥락에서 기존의 진리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베이컨과의 충돌이 불가피 했으며, 이 대결 구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신기관이었다


     베이컨은 지식을 얻는 과정을 방해하는 우상 네 가지를 언급했다. 이는 학문의 선입견이자 편견이기도 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 종족의 본래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동굴의 우상은 각각의 개인이 갇힌 틀에서 생겨나는 인식의 오류를 지칭하며, 시장의 우상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생겨나는 문제들을 설명해준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허구적인 권위에 기대는 인간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베이컨은 이런 다양한 우상들을 극복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새롭고 유용한 앎을 얻고 이를 확장해나갈 수 있음을 믿었던 철학자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대륙의 합리론 전통을 마련한 철학자다. 베이컨(경험론)이 근대 철학의 방법론적 원리를 마련한 사람이라면, 데카르트(합리론)는 확실한 앎의 토대를 세운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데카르트는 이 목표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수학과 과학에 주목했다. 반면 감각을 통한 앎을 확실한 지식의 토대에서 배제했다. 이 부분은 앎에 이르는 과정에서 베이컨과 다른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대신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실마리를 생각하는 나의 존재로부터 찾는다. 곧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바로 이것이 첫 번째 확실한 앎이 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확실한 나의 존재를 발명해내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흐름은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흄은 데카르트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천착했지만, 방법론적으로는 경험론의 전통에 있다. 이를테면 추론이라는 실험적 방법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시도에 적용한 것이다. 확실한 앎의 토대를 마련한 데카르트와 달리 흄은 세계에 대한 앎을 얻을 때 확실한 참이란 원리적으로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성의 우월성에 입각한 확실한 앎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이를 깨부수었기 때문에 흄은 회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험론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검은 스완의 사례처럼 모든 스완은 하얗다는 귀납추리의 진술이 잠정적, 확률적, 개연적으로만 참이며, 필연적으로 참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여, 세계 인식에 대한 귀납적 추론의 한계를 지적했다. 저자는 흄의 관심이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에서 시작하여, 어떤 토대 위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공동체의 윤리로 나아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이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소개하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 일부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했다


     데카르트와 흄의 철할 일부를 소개해 놓은 이 책에서도 앎에 대한 두 철학자의 상반된 입장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합리론(이성론)과 경험론이라는 근대 유럽의 두 흐름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이들의 철학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밀레토스 학파(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의 본령(비판의 자유와 따져 묻기)을 결합하여 그 결실을 맺기 시작한 사례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칸트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론과 합리론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종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칸트는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와 헤겔에 이르는 이성론의 계보에 있다. 따라서 칸트는 철학의 큰 두 흐름을 단순히 절충하는 입장이 아니라, 이성론의 입장에서 이성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칸트가 두 근대 서양철학의 흐름을 통합했던 것은 무엇보다 인식론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인식의 기원부터 고민했던 것이다


     이성론에서의 앎(지식)은 선험적 지식에 해당한다. 이러한 선험적 지식의 판단은 주어 안에 술어의 내용이 포함된 분석 명제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확실성은 보장받을 수 있으나 앎의 확장성에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경험론에서의 앎은 주어 안에 있지 않은 특성이나 성질이 첨가되어 술어에 나타나는 종합 명제로 제시된다. 이것은 감각 경험을 통한 수용으로 이루어진 앎이므로 확장성을 지니지만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흄은 앎을 얻을 때 확실한 참을 주장할 수 없으며(곧 확실한 앎은 원리상 불가능하다), 관념들의 다발인 상상에는 그릇이 없다고 언급했다. 반면 칸트는 앎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외부 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각자 우리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각자의 인식이 있으며, 이 인식의 활동에는 흄과 달리 각자의 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 틀을 통해 들어온 것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가 이야기하는 이란 인식의 프리즘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프리즘을 통한 가시광선의 색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는 우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지만 이 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내 안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틀이 모두 동일하지 않으면 앎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떠오른다. 칸트 역시 아름다움에 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인정했다. 각자의 내부에 있는 저마다의 틀은 각자에게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표상이 저마다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만 칸트의 인식은 보편 타당해야한다고 보았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이 개인 안에서 얻어지는 인식의 확실성에 대한 부분이 내 안에서 충돌하고 있지만 칸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을지가 궁금하다. 우리는 앎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하며 이야기할 수 있을까



(추가적인 감상과 정리)


이번 독서에서는 무엇보다 데카르트로 시작하여 흄, 칸트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철학이 낯설고 아직 그 철학의 지형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다. 아직 이들의 삶 일부와 불과 몇 페이지에 소개된 철학을 맛보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다만 여러 철학자들의 면모를 좀 더 알게 되고, 내게 조금 더 익숙하거나 흥미를 가진 대상과 연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가령 흄의 도덕 철학에 대한 관심, 특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은 스피노자의 문제의식과도 연결이 되며 견주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흄이 제시한 인상과 관념의 개념, 그리고 관념 연합의 작동 메커니즘은 칸트의 표상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칸트가 언급한 제시재현에 대한 이해는 회화와 사진 예술로도 확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표상을 받아들이는 감성과 표상을 다듬고 이를 자발적으로 생산하는 지성의 요소는 현대의 시각 이미지에 대한 이해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또한 저자는 칸트의 입장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생물학의 시도를 짧게나마 소개하는 대목에도 주목해보았다


     또 흄의 경우 자연주의자로서의 면모에 대한 설명은 아직 모호하게 다가왔다. 원리상 인간이 확실한 앎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 흄이 자연 전체가 한결같다고 주장한 앎은 어떻게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에 관한 내용은 추가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한편 저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언급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앎의 확실한 토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살펴본 진짜 삶과 우리가 (그렇다고) 확신하는 삶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우리는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흄이 제시한 관념 연합으로 이루어진 세계, 곧 상상의 세계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실체가 없는 무대 없는 연극같은 관념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어디까지 둘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처럼 이번 독서에서는 철학이란 모든 앎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식으로서의 앎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모든 현상과 대상을 이해하는 앎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니체는 이 과정을 바로 네가 하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씨앗은 인식의 확실성이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한 칸트의 인식론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밟고 있는 데카르트의 초상화 - 제2장에서 보여주는 이성에 입각하여 벌이는 '앎의 싸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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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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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지음 | [창비]

#친일파 #야스쿠니 #식민사관 #일본회의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활용하기 

 -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배제 관련 배경을 이해해보자

 


전염병이 세계를 뒤덮고 있는 가운데, 지난 2 21 일본 도쿄 문부과학성 앞에선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목소리로 구회를 외치고 있었다. 행사는 당일 재일조선인이 다니는 조선학교 고교 무상화 배제에 항의하는 금요행동 200회를 맞았다. 오늘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사건의 발단은 2010 4 일본 고등학교의 무상화 정책이 시행된 시점으로 돌아간다. 때까지 일본은 중학교까지만 의무교육이었지만 이제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시행하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일본인고등학생의 경우 연간 12만엔( 130만원)에서 24만엔( 260만원) 취학지원금을 지원하는 고교 수업료 무상화 정책을 도입했다. 그런데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배제되었던 것이다. 조선인 고등학교만 배제되었을까? ‘반일 북한 찬양을 교육하는 조선학교에 보조금을 지원해서는 안된다 일본 여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보조금 지원 중단을 결정했던 세력들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재일조선인 학교에 결부시키고 있다

(관련기사 [1] 참조)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를 이해하기위해서는 최소한 해방 직후 시점인 1945년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이번 고교무상화 배제 문제와 재일조선인에 얽힌 문제들에 대해서는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책은 일본 게이센여학원대 국제사회학과에서 재직중인 이영채 교수와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중인 한홍구 교수의 강연을 정리한 책이다. 책을 쓰게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우리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자각에서 나왔다. 따라서 책의 주요 목적은 일본 사회의 내면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가 인식을 공유하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앞서 언급한 재일조선인의 고교무상화배제 관련 소식들은 올해 계간문예지 창작과비평 (186, 겨울) 통해 처음 접하게 되어 관심을 갖게 문제다

(관련기사 [2]참조


 

     많은 재일조선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전염병이 유행하는 가운데 거리로 나와 한목소리로 외치게된 이유는 고교무상화 배제 사태가 그만큼 이들에게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일본사회의 독립적인 구성원으로서 부당한 차별을 고발하고 이에 대한 시정을 8 요구하고 있다. 문제를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중심으로하여 간단히 정리해보려고 한다. 해방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은 독립국의 위치가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점령 정책이라는 거대한 물줄기 속에 편입되었다고 있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38도선 원래 목적이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에 의한 일본군 무장해제였음을 통해 이를 확인할 있다.

 


     재일조선인들에게 닥친 문제는 해방후 연합군 사령부와 일본 문부성이 전국의 조선학교를 폐쇄하고 조선인을 공립학교에 다니도록 명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 측과 일본 지배층 사이에 공산주의에 대한 체질적인 알레르기가 공통적으로 반영된 정황을 이번 독서를 통해 읽을 있었다. 당시 역사적·정치적 상황에서 조선학교는 좌익성향을 보였기에 타격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패전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도 조선학교를 비롯한 외국인 학교를 각종학교 취급하면, 이들에게 보조금 지금과 각종 보호 제도를 박탈할 있다는 현실적인 방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국 측과 일본 지배층 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이해된다.

 


1948년에는  오사카와 고베 지역에서 이른바 한신교육투쟁 발생하는데, 재일조선인들의 데모를 진합하는데 경찰과 군대가 투입되어 대치하는 과정에서 16 조선 학생 김태일이 총에 맞아 사망하기에 이른다. 당시에는 조선학교 폐지를 막아냈지만, 1951 일본이 미국과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일본정부는 독립정부로서 국적조항 신설, 재일조선인의 국적을 박탈했다. 결과 재일조선인은 하루아침에 무국적자 특별외국인 되었다. 재일조선인에게 닥친 변화는 주기적으로 외국인등록을 하고, ‘국민수장이라고 하는 열손가락 지문을 찍어야만 하는 생활을 의미했다. 참고로 국민수장은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 A 전범) 설계했던 만주국에서 시행했던 제도로, 박정희가 만주국에서 배워 것을 그대로 가져와 국내에서 시행했던 제도다. 이런 상황에서 1965 한일기본조약(국교정상화) 양국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국의 압력으로성립 된다. 미국은 자신들이 조작한 통킹만 사건으로 한해 (1964), 북베트남을 폭격하며 베트남전을 시작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내야 자신들의 동아시아 지배 전략에 유리하다고 보았음직하다. 이후 조선학교는 학교로서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1970년대에 한번 다시 각종학교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일본 사회가 강경보수화되면서 2000년대에 이르러 심지어 조선학교 부지마저 뺏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2011년에는 우리가 아는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있었다. 이에 대한 부실대응으로 일본 민주당 정권은 물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선거에서 집권하기 위해 2009년에 중의원 선거에서 고교 무상화 공약을 내걸었고, 정권을 잡은 고등학교 전면 무상화(공립학교의 경우) 실현해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거론하고, 조선학교가 반일 북한 찬양을 교육한다 이유로 조선학교에 보조금 지원을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나게 되었다. 물론 여론몰이는 조선인에 대해 극심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일본 극우파의 작업이라는 것을 있지만, 침체되고 진보세력이 붕괴된 일본 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여 비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 대지진 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된 2 아베 내각은 2013년에 조선학교를 고교 무상화에서 아예 배제하는 법을 확정해버렸다. 여기에 더하여 2019 10월에는 유아교육 보육 시설에 대한 무상화 정책에서도 조선학교가 운영하는 유치원마저 제외시켜버렸다.

 


     이런  맥락을 이해한다면, 일본정부와 지방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주변 소재 학교들 중에서 유독 조선학교에 대한 피해복구 비용 지급에 차별을 두는지를 비로소 연결지을 있다. 지난 3 9일에는 코로나19’ 유행하고 있는 가운데 사이타마 현의 당국이 관내 유치원과 보육원 1천여 곳에 마스크를 제공한 일이 있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또다시 마스크 배포 대상에 조선학교가 제외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관련기사 [3]&[4] 참조) 문제는 결국 재일조선인 차별이란 역사의 직접적인 연장선에 있는 문제다. 달리 말하면, 해방 이후의 조선학교가 겪은 고난사는 바로 재일조선인이 겪은 차별의 역사, 나아가 기본적인 인권 침해의 현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특징을 있다. 나아가 재일조선인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가 침해받고 있는 현상의 이면에 한일관계와 북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이런 국제정치적인 정황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할 같다. 저자들에 따르면 지금 현재 재일조선 학생들의 기본적인 인권문제가 여러 현안에 따라 인질처럼 다루어지고 있다는데 보다 문제가 있다.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에서는 고교 무상화 배제 문제 이외의 재일조선인 문제를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우익 세력을 살펴보고, 한국의 우익이 일본의 우익에 기원하고  있다는 점과 차이점 또한 지적하고 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재일조선인 문제와 관련한 현안을 출발점으로 삼아 여기에 집중해보려고 했다. 저자들의 표현대로 재일조선인은 일본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차별 받았다. 그런데 일본의 극우세력으로부터 차별을 받은 것만이 아니었다. 패전 공간에서 반미 무장투쟁 같이 공산주의 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던 재일조선들을 일본공산당이 축출했던 것이다. 일본 공산주의 운동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이후 재일조선인들은 총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뿐만아니라 1959년에  재일조선인 북송사업(또는 재일조선인 귀국사업) 전개될 동안, 북한은 1984 까지 10 명에 이르는 재일조선일을 받아들였다. 일본은 거주지 선택의 자유와 인권 존중의 명목으로 사회문제가 소지가 있는 재일조선인을 내보낼 있었다. 북한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던 동포들을 받아들여 체제의 우수성을 홍보할 있었기에 북한과 일본사이의 명목상 이해가 맞아떨어 졌다. 재일조선인들은 과정에서도 북한과 일본으로부터도 배제와 차별, 이용을 당했던 것이다.

 


     남한의 입장에서 바라보아도 재일조선인들이 북한으로 가는 사업이 달가울리 없었다. 당시 반공에 기조한 이승만 정권에 있어 공산주의 국가의 우월성 홍보에 보탬이 되는 이런 사업은 저지해야할 사업일 뿐이었다. 당시 북송저지사업의 책임자가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였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다. 여기에 1970년대 초에는 재일조선인 유학생 간첩조작사건 발생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발표한 국내 반감을 무마하기 위한 기획으로 독재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고 갔다. 간첩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기획했던 일이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의 , 서승과 서준식 선생 역시 당시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고 오랜 시간 옥고를 치룬바 있다. 당시 문제가 일본에 알려지자 재일조선인 청년들은 대한민국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통일 위해  한국민주통일연합 (한통련) 설립하고, 이들의 구명운동과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벌였다. 이에 한통련은 박정희정권에 의해 반국가단체로 지목되었다. 정리해보면 재일조선인들은 대한민국으로부터도 포용된 것이 아니라 차별과 의혹의 눈길을 받았던 것이다. 현재 재일조선학교의 학생들에 대한 마스크 지원 제외 문제만 하더라도 일본의 식민주의와 냉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읽어낼 있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조선학교가 마스크 지원에서 제외된 사건에도 재일조선 학생들은 한국 정부의 지원 역시 받지는 못했다. 대신 민간차원에서 우려와 도움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관련기사 [4] 참조)  

 

 


연대가 관건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재일조선인 문제는 남한과 북한, 북한과 일본 사이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문제는 일본의 식민주의에 대한 역사인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현재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지키는 ”(218) 이어지는 사안이다. 재일조선인 문제는 일본 외국인들에 대한 인권 문제의 핵심에 위치해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일본 오키나와인들에 대한 야마토인(일본 본토인) 차별과 희생을 묵인하는 양상에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후쿠시마 원전을 둘러싼 생태적인 문제점들과도 논의를 연장할 있는 기본 인권에 대한 문제다. 그러므로 저자의 표현대로 재일조선인 문제가 미래 일본 사회의 모습을 예측하는 기준을 제공하는 사안이라는 언급에는 재일조선인 문제의 중요성을 가늠할 있다. 문제가 일본의 인권과 일본 사회의 미래를 진단하는 바로미터라는 것이다. 우리가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아서는 안되는 이유다.

 


     그러면 재일조선인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있는 점은 없을까? 저자들은 재일조선인들이 국경과 민족의 고정된 정체성을 넘어 다양한 자아실현이 가능한 잠재력 가지고 우리에게 도움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고통의 역사를 통해  국경이 사라진 공동체에 필요한 감각 남북한과 일본 사회에 가르쳐줄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례는 본인의 경험을 비롯하여 프리모 레비와 같은 디아스포라에 관해,  인권에 대해 폭넓은 통찰을 전해주는 서경식 교수를 예로 떠올려볼  있다. 서경식 교수는 일본인들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입장과 한국인들의 일본 사회에 대한 무지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왔다. 아울러 일본의 소위 진보세력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서경식 교수는 스스로가 ()난민이라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기에, 어느 사회든 경계에서 발을 딛고 예민하게 관찰하는  지식인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재일조선인 사회와의 교류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관점 배우고 검토해볼 있다.  

 


     일본은 과거 30 동안 진보세력의 붕괴와 극우세력의 성공적인 정치세력화로 일본 시민사회의 비판기능이 더욱 위기에 처해있다.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와 이영채 교수 한홍구 교수가 보다 절실하게 여기는 과제는 바로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 저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사회는 일본사회의 의식과 관점등을 비롯한 맥락의 이해가 우선 필요할 것이다. 한일 양국 시민사회의 상호 이해가 절실하다. 일본 정부의 조선학교 고교 무상화 배제조치를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있지만, 일본 극우세력이 강력한 정치권력을 마련한 상황에서 일본 사회는 아직 아시아 주변국의 역사 반성 요구를 받아들일 기본 토양이 부족’(44)하다. 앞서 언급했지만 아베 신조 내각은 이미 2013년에 조선학교를 고교 무상화에 배제하는 법을 확정했다. 여기에 더해 2019 10 부터  조선학교에서 운영하는 유치원마져 무상화 지원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차별을 없애려면 고령화되고 힘을 잃어가는 일본 시민사회에 우리가 있는 일을 해야할 것이다. 일본 사회 변화의 희망은 건전한 일본 시민사회의 형성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더더욱 한일 시민 사회의 연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가 중요한 다른 이유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배척하여 일본을 고립시키지 않는 것이 동아시아 평화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 자체 내의 평화 뿐만 아니라 한일간의 연대는 일본 극우세력에 대한 강력한 비판기능과 제제를 가할 있다.  저자들이 지적하는 일본 진보세력에는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가해자로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과 사죄의식이 없다. 상호간의 입장차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현실이다. 일본 시민운동가들이 내세우는 평화주의에는 가해자의식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사회가 야스쿠니로 대표되는 천황 중심의 근대국가 해체하지 않는 언제든 이들의 회피심리 혹은 망각 기작과 결부되고 한계를 극복할 없다는 의미다. 부분은 일본의 우익 세력 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세력들마저 일본인들은 피해자라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역전되는 논리에 ·간접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해 상호간의 입장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가능하다면, 이를 바탕으로 제한적이던 역사 인식을 확장하고 새로운 관계맺기의 방향으로 나아갈 있을 것이다.

 


      연대의 관점에서 저자들은 최소한 우리가 북한과 함께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고교 무상화 배제 조치에 대해 남북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정도는 가능할 ’(221)이라고 한다. 일본의 극우세력이 두려워하는 양상은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가운데, 한국이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나아가 남북한의 화해모드는 이들의 심기를 특히 불편하게 것이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극우세력이 자국 정치 기반을 마련하는데 주로 꺼내드는 카드는 북한 위협론 한반도 위기론 요소이다.   남한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통해 화해분위기를 조성하고 재일조선인들의 법적 지위에 대해 공동으로 일본 정부에 요구를 하면 국제적인 이목을 끌고 하나의 제재수단으로 작용할 있겠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재인조선인 차별, 고교무상화 배제 조치는 보다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문제는 나아가 다른 인권문제로서 일본군 위안부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여러 차원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국면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가까우면서도 사실  바다 건너 있는 이웃나라, 일본 사회의 민낯을 있는 독서경험이었다. 매우 낯설게 다가왔던 조선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의 금요행동기사는,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읽은 , 이상 바다 건너 들려오는 외침소리가 아니었다. 이들이 오랜 세월 짊어져왔던 역사의 무게는 나와 후손, 대한민국과 동아시아의 운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얼마나 소리쳐야 좋은 걸까, 줄곧 빼앗겨온 목소리가 있다.

들리는가 듣고 있는가. 분노가 지금 다시 목소리가 된다.

소리여 모여라. 노래여 오너라.

동무여 모여라. 노래 부르자.”

 

지난 2 21 도쿄 문부과학성 앞에서 참석자들이 금요행동 틈틈이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이들의 외침이 봄바람을 타고 많은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에게 닿을 있길 바란다.  



[관련기사]

[1] [경향신문

"얼마나 소리쳐야"..조선학교 무상화 배제 항의 '금요행동' 200회째

도쿄|김진우 특파원  |   2020.02.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2211752001&code=970100

 


[2] 정영환, ‘4·24교육투쟁과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창작과비평 (186, 겨울), 317p

 


[3] [오마이뉴스] (게릴라칼럼

사이타마시, 재일조선인 유치원생들 마스크 배제 후폭풍

아이들 마스크까지 차별한 일본, 일본인도 비웃는다

하성태   |   2020.03.14

http://omn.kr/1mw0x

 


[4] [연합뉴스] "차별 대우받는 조선학교에 코로나19 마스크 보냅시다"

왕길환·강성철 기자   |  2020.03.13

https://www.yna.co.kr/view/AKR20200313144200371?section=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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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를린 - 분단의 상징에서 문화의 중심으로
이은정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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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를린

이은정 지음 |  [창비]

 



겨울의 재스민차를 떠올리며

 

구동독 출신의 시인 라이너 쿤체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체제에 비판적이었지만, 그의 시는 매우 서정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독일 자유대학교에서 정치사상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이은정 교수의 신간 베를린, 베를린 읽으면서 쿤체 시인의 <한잔 재스민차에의 초대>라는 제목의 짧은 한편을 생각했다.  

 


들어오셔요, 벗어놓으셔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동독과 서독이 분단되어 대치하고 있던 시절, 동독 정부에 저항적이었던 사람들은 시를 문에 붙여 놓아 눈에 띄지 않는 저항의 표시로 삼았다고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에서 언급한 있다. 쿤체 시인이 한국을 방문하여 국내 대학생과 함께 시와 음악을 통한 교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학생이 시인의 연애담을 물었다. 시인이 학생의 질문에 본인의 연애담을 이야기해준 대목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시인이 정치적인 이유로 학위를 받기 전에 대학을 떠나 자물쇠 제작 보조공으로 일하고 있을 당시(1959), 베를린의 라디오 방송국은 쿤체 시인의 금지된 편을 방송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미래의 부인이 엘리자베트 쿤체 여사는 체코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감자를 깎고 있었다고 한다. 쿤체 여사는 체코에서 의사로 지내고 있었다.  방송이 나간 여러 달이 지나 쿤체 여사가 보낸 우편이 길을 돌아 쿤체 시인에게 도착했고, 이후 사람은 시와 음악에 대해서 장문의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직전이었지만, 사람은 직접 만날 없었다. 체코와 접하고 있던 국경은 폐쇄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쿤체 부부가 경험한 삶의 단면을 끌어와 냉전과 분단의 맥락에서 바라보니 2 세계대전 이후 승전연합국이 구축해 놓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구도 하에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실감나게 짐작해볼 있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특수성

 

승전 연합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세계대전 이후 독일 지역을 동독(소련) 서독의 연방정부(미국, 영국, 프랑스) 영역으로 분할 통치하게 되었는데, 베를린 역시 도심 지역을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공동 관리하게 되었다. 특히 베를린은 동독의 영토 가운데에 위치한 대도시로서 소련이 점령하던 동독에 완벽하게 둘러싸인 일종의 섬과 같은 지역적 특수성을 지닌다. 오늘날 베를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베를린은 분단체제의 상징이면서 분단 극복의 상징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바로 베를린 장벽으로 상징되는 분단의 역사는 2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냉전 구도의 산물이다. 부분은 우리의 분단 현실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다만 독일이라는 공간이 대한민국과 달리 분할 통치 과정에서 전쟁이 없었다는 점은 이후의 나라 재건에 다행한 일이었다.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을 양산한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와는 이렇게 다른 현실이 있었다.  

 


저자는 2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건물의 3분의 1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독일 영역 내의 모든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음을 감안하면 부분은 베를린만의 특수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동독 영역 내부에 섬처럼 존재했던 도시는 50년대 , 60년대 초에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진영 사이의 대립과 기싸움으로 위기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설치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라는 특별한 공간은 정치적으로 분단되었으나,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적은 없었다 한다. 민간 차원에서 엽서 왕래하기 힘들고 사실상 단절되다시피 했던, 그리고 현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경우를 비추어볼  어떻게 이런 조건이 가능할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저자는 베를린, 베를린에서 정치사적 관심에서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고 있으며, 동서 양측이 제한적이나마 지속적으로 교류할 있었던 정황과 우리의 상황을 곁들여 비교해보고 있기도 한다.    

 


 

베를린 장벽의 등장과 이후 상황

 

베를린 장벽은 1961 8 13 새벽에 철조망 형태로 설치되기 시작하여, 곧이어 콘크리트 벽을 세웠고, 28년이 넘은 1989 11 9일에 붕괴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동독 정부가 소련의 승인을 받아 기습적이고 일방적으로 구축하며 시작되었다. 장벽 설치의 목적은 당시에 늘어나던 동독 주민들의 동독 탈출을 막고 이들을 가두기 위함이었다. 2 세계대전이 끝나 독일 영역이 베를린과 더불어 분할통치된 1945 이후부터 1952 11 까지는 베를린 주민들도 왕래가 가능했고, 생필품도 구하러 다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벽이 설치 동서 양측의 왕래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여기서 저자가 더욱 주목하는 부분은 정치적으로 제한적이나마 삶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부분이었다. 경제나 우편, 통신이나 문화교류는 여전히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정학적인 조건을 고려해볼 섬과 같았던 서베를린은 이러한 교류가 사실 대안이 아니라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보장받는 유일한 기회였을 것이다


 

저자가 동서 양측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언급하는 사례 중에서 지하 연결망인 하수도를 있다. 2 세계대전 이전에 형성된 하수터널은 상당한 규모와 효율을 발휘하는 사회기반 시설이었다. 서베를린 하수의 대다수가 동베를린으로 흘러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장벽 설치 민간 차원에서 동서 양측의 기술적, 실리적 협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공간이 분리되었어도, 분리되지 않은 사회기반 시설을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진영의 접촉과 협업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느 진영이 하수터널을 막거나 폭파시켜서 모든 것을 분리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국민의 혈세를 모아 새로운 하수터널을 건설하는데 오랜 시간과 자금을 쏟아부었을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우리의 상황과 견주어 아쉬워하는 부분과 더불어 이런 부분들에 대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우리의 과오가 안타까웠다. 베를린의 역사를 통해 다른 진영에 있더라도 실리적인 결정을 위해 타협과 합리적 선택이 가능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눈여겨보고 고민할만한 부분이라고 본다.   

 


장벽이 설치된 이후에도 동독 주민이 탈출하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고, 과정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총격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쿤체 시인처럼 체제에 비판적이던 시민들에 대한 압박도 물론 이루어졌다. 제한적이나마 우편 서비스가 유지되었지만, 모든 우편물은 검열당해야 했다. 저자는 80년대 초에 동독 주민들이 비밀경찰의 도청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했다. 특히 국제 전화는 이미 50년대 부터 도청당했던 모양이다. 쿤체 시인의 이야기가 담긴 시인의 에서는 동독에 있던 시인이 체코에 있던 미래의 아내 엘리자베트 쿤체 여사에게 청혼하기 위해 국제전화를 했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당시(1959) 해도 모든 국제전화가 도청당했다고 쿤체 시인은 언급한다. 특히 정보국은 시인처럼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 당시에 시인이 휴가로 시골에 갔을 물을 시에 양동이를 우물에서 길었는지까지 구동독 정보부의 기록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정보국이 남긴 자신에 대한 모든 기록과 증거물들로 작성된 자료집을 참고하여 시집이 파일명 서정시(1990) 라고 한다. 쿤체 시인의 사례를 떠올리는 이유는 베를린을 둘러싼 정치사적 장면에서 시인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삶이 어떠했는지 상상해보고 싶어서였다.

 


 

장벽의 구멍들

 

 암울하고 억압적인 조건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우리는 이제 장벽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의 정황을 되돌아보고 있는데, 장벽의 붕괴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은 이미 속에 다양하게 내재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독일 최대의 라이프치히 박람회나 17세기부터 이어진 독일 최대의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장벽의 구멍 같은 역할을 했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앞서 말한 하수터널과 같은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동서 양측의 협력을 포함하여 민간차원에서의 물적, 비물질적 교류는 거의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책의 전반에서 저자는 장벽의 구멍 막히는 것을 방지하고 보다 많은 구멍을 만든 정치인으로서 브란트 수상을 주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아데나워 수상의 단절 정책과 달리 서베를린 시장 시절부터 브란트는 공존 정책 강조하고 접근을 통한 변화’, ‘작은 걸음 정책 통해 베를린 주민들의 고통 완화를 위한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브란트 수상에 대한 저자의 일방적인 평가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란트 수상의 행보는 분단 독일의 통일과정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는 점을 느낄 있었다. 특히 61년에 장벽이 설치된 이후, 63 말에 이루어진 1 2 통행증협정을 통해 동서 베를린 시민 간의 왕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려는 브란트의 의지를 엿볼 있었다. 분명히 당시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의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와 노력은 이런 결과를 낳을 있도록 그의 리더쉽에 있었다고 보인다. 물론 이런 결과를 얻을 있었던 것은 어느 한쪽의 바람만으로 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당연히 동서 양측의 실용적인 협력의 태도에도 주목해야 것이다. 이런 행동의 바탕에는 무엇보다 베를린 시민의 고통 완화 우선 순위에 놓았던 정치인이 있었음을 독일인들은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대화의 시도와 단절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1970년대 초에도 여러 가지 협력의 분위기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4대국 협정’(1971 9) 통해 무력 사용을 금지하고 평화적 수단으로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으며, ‘통과협정’(1971 12) 통해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동독 지역을 통해 민간인 화물통과를 가능하게 있다. 나아가 여행방문협정’(1971 12)으로 66 이후 거의 중단되어버린 동독 동베를린 방문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번 독서에서는 2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이 서독의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50년대 이후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으로불리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지구 반대편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내게는 새로웠다. 다시 정리해보면, 60-70년대를 거치며 베를린이란 공간을 둘러싼 동서 양측의 접촉과 실용주의적인 문제 해결 시도 노력을 저자는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라는 표현으로 정리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더욱 성장한 서독은 동독에 다양한 방식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해왔고, 동독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분명히 우리의 정서와는 많이 다른 부분이 이러한 점들이다. 단순히 정서의 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한 부분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장벽의 구멍 한편으로 영향을 주었던 요소는 68운동이었다. 저자가 근무하고 있는 독일 자유대학교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독일의 68운동은 독일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사건으로 평가된다. 특히 당시의 68세대 젊은이들은 나치 협조자들에 대한 침묵을 유지하는 부모 세대에 반대하여 더욱 목소리를 높인 세대라고 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을까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저자는 독일의 68운동이 대한민국의 1987년과 비교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분에 대해서는 이상 언급하지 않은 점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독일의 68운동과 우리의 1987년의 상황과 간단히라도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으면 좋았을 부분이었다. 특히 이런 부분은 교과서에 자세히 나오지 않는 현대사의 장면이기에 더욱 아쉬웠다.

 


독일의 68세대의 사람이라면 아마도 독일의 작가 W.G. 제발트를 떠올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968 당시 24살의 청년이었을 제발트는 부모 세대의 침묵에 분명히 불만을 품고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게 청년이 아니었을까. 소설을 비롯한 그의 다양한 글에서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은정 교수가 나치 전력으로 인해 경질되었던 인사들도 원래의 사회적 지위를 되찾았다 전하는 말에서처럼,  독일 사회에도 과거사 정리에 대한 침묵과 한계가 동시에 존재했던 같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한 모습들은 제발트와 같은 젊은 세대들이 비판적인 시각을 갖도록 하고, 이는 부모세대와 68세대 간에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 중요한 점은 동서 양측의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던 것처럼 68운동의 저항적 요소가 동독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68운동은 이후 70년대를 거쳐 신사회운동 녹색당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요인은 1989 여름, 동유럽의 서독 대사관에 동독 주민들이 대거 진입한 대사관 난민문제가 결정적이었다. 상황에서 동독과 서독, 체코슬로바키아(동독 옹호) 헝가리(서독 옹호) 사이의 긴박한 외교협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때에도 서독 정부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동독의 요구를 최대한 고려하여 수용할 있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한 정황을 있다. 서독 정부 측의 합리적이고 성숙한 접근법을 주목해보게 된다. 나아가 대사관 난민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이어진 대규모 촛불시위(1989 10)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될 같다.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시작된 촛불시위가 대규모 정치 집회로 발전하면서 동독 주민들의 바람이 모이고 이는 다시 동독 당국이 여행 자유화 조치를 내리도록 하는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베를린 장벽의 붕괴 과정에는 오랜 기간을 거쳐 쌓여온 구멍 요소들이 존재했고 요소들이 모여 장벽의 붕괴를 가져왔다.

 


 

베를린의 현재를 살펴보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오랜 시간동안 분리된 조직과 행정 단위의 통합, 그리고 사회기반 시설의 복구와 재정리 문제등은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주요 문제들이었다. 베를린을 통일 독일의 수도로 정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둘러싼 논란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독일 정치인들은 수도의 최종 결정 문제를 당론을 기본 입장으로 내세우고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라 의원 개개인의 합리적 판단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점이 돋보인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역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런 모습들을 우리 상황과 비교해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현재 있는 일과 조건을 들여다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일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양측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시작할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해질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관철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이를 수단화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려는 문제를 양측이 분명히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베를린은 테크노 음악 팬들의 성지이기도하고, 유명 건축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젊은 인구가 늘어나고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하며, 스타트업의 메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한차례 놀란 점은 독일에서 수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2015년에만 100 이상의 난민이 독일로 유입되었고, 5 5천명이 베를린에 도착했다고 한다. 세계의 어느 대도시가 순식간에 늘어나는 인구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있는 행정인력이 있을까. 내가 놀랐던 점은 많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운 사실이다. 많은 시민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난민의 정착을 도왔다고 한다. 우리는 점점 늘어나는 탈북자들도 제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사회에 새로 등장하는 구성원들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시민들이 없을 없다. 하지만 베를린 시민들은 시리아와 중동 지여에서 몰려든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우려나 두려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결국 실천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탈북자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는 피할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름을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이들을 우리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있는지를 고민하고 행동해야한다. 이미 어려운 여건에서 봉사하는 시민들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은 분단과 통합을 동시에 상징하는 도시이다. 특히 정치인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과 서독 연방정부의 수상을 지내며 접근을 통한 변화 철학을 반영한 신동방정책으로 평화와 공존을 추구한 행보에 주목해보게 된다. 물론 사람의 지도력 이면에 양측의 협력과 민간 차원에서 사실상 교류가 끊이지 않았던 점은 무엇보다 핵심적인 요소이다. 서독은 상당한 재정지원을 하며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반면, 동독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를 위한 조건을 완화했다는 저자의 지적도 우리가 귀기울여 들을 만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저자가 베를린을 바라보는 여러 방식과 정치사적인 국면을 우리의 경우와 보다 대등하게 비교하며 제시하는 작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다양한 시대적 사건이나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유기적인 연결이 가능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울러 라이너 쿤체 시인의 삶을 일부 들여다본 것처럼 개별적인 주체들이 역사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곁들여 조명했다면 이들의 겪은 삶을 깊이 이해해볼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어느 나라든 정치라는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인간의 다양한 삶을 이해하여 이를 조화시키고 조율함으로써 최적의 공존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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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 2명이 모여서 <뉴욕 타임즈>에서 오랫동안 서평가로 활동해온 일본계 미국인 미치코 가쿠타니의 신간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 대한 간단한 합평회를 가지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8월 오프 모임을 시도했을 때는 무산되었지만,
이번에는 한 분이 참여하여 모임이 성사되었습니다.^^

조촐하지만 2명이서 간단히 책에 관한 감상을 이야기하고, 각자 써온 서평/리뷰글을 다시 읽어보고 글쓰기를 할 때 어떻게 준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인 미치코 가쿠타니는 막연하게 '진실(truth)'이라고 하는 개념과 '사실(fact)'이라고 하는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두 개념을 혼용하여 모호하게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떤 맥락에서는 책에 인용된 사회학자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이의 
말에서 그가 말하는 '의견'이 가쿠타니가 말하는 '진실'에 가까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지,
 저마다의 사실을 사실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15면)

물론 가쿠타니가 이 두 개념을 혼동할리 만무하지만, 가쿠타니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했던 (반면 정희진 선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한) '진실'이 저자에게는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다소 모호하거나 오해의 여지를 만들어 두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 책의 내용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동일한 텍스트에 대해 
서로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도 발견했는데요, 아마도 제가 언급된 인물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급하게 읽어서 오독을 한 부분이 보였습니다. 좀더 비판적이고 면밀한 독서를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구요.

정희진 선생은 해제에서 가쿠타니가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아'와 주관성이 대두되어 해석의 다원성, 다원주의를 가져온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 비해, 저자 가쿠타니는 확고부동하고 보편적인 진실, 파편화된 이야기가 아닌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인,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된  '거대 서사', '거대 담론'이 존재한다고 보는 태도를 '모더니즘의 관점'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 경우 '가짜/진짜'프레임에 빠진다는 것은 모두에게 보편적인 준거가 있다는 믿음으로 이 기준에 비추어 '진위'를 판단하게 되는 함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정희진 선생이 책의 후반에 실은 해제에서 언급된 '진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도출된 결론이라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 합평회를 준비하면서 다시 읽은 정희진 선생의 해제 일부분이 일간신문 칼럼에 '디지털 치매'란 키워드로 기고되었던 글 일부 단락에 사용된 것이 보입니다.

[참고]  
경향신문 정희진 칼럼 - '생각을 빼앗긴 세계'의 디지털 치매

물론 본인의 글이므로 문제가 될 것은 없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 책의 해제를 읽을 때 다소 뜽금없는 '디지털 치매'나 '가짜 기부왕 행세하는 이'나 '어느 페미니스트에 대한 비판'부분이 왜 나왔을까, 글의 전개상 다소 어색하단 생각이 들었는데요, 위에 게제된 칼럼에서 몇 단락을 그대로 가져와 본 저서의 해제에 활용했었네요. 영향력있는 여성학 연구자로서 해제를 쓸 때, 좀 더 진지한 자세와 태도로 완성도 있는 글을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과 실망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합평회회 준비를 하고 책에 관한 이야기,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나누다보니 새롭게 보이는 부분, 오독이 있던 부분, 글쓰기에 대한 것들을 좀 더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끝으로 이 책을 읽고나서 책에 언급된 도서들 중에서 제게는 중요해보이고 읽어볼만하다고 생각되는 2차 도서 목록을 정리해봤습니다.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1] <전체주의의 기원> 한나 아렌트 지음
[2]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회고록
[3] <1984> 조지 오웰
[4] <미국의 민주주의> 또는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알렉시스 토크빌
[5] <이미지와 환상> 다니엘 부어스틴
[6]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7]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8] <중력의 무지개> 토머스 핀천
[9] <나는 증언할 것이다> 빅터 클렘퍼러의 일기
[10] <죽도록 즐기기> 닐 포스트먼
[11]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12] <라쇼몽> 또는 <나생문>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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