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 인코그니타 - 고고학자 강인욱이 들려주는 미지의 역사
강인욱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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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 인코그니타 Terra Incognita

: 고고학자 강인욱이 들려주는 미지의 역사

강인욱 지음 | [창비]



 

고고학은 현재 진행형이다’ - 테라 인코그니타를 읽고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고고학이란 학문이 단순히 새로운 유물을 발굴하고, 기록되어 있는 역사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우리의 역사, 인류의 역사에 대한 나의 편견은 보기 좋게 깨져버렸다.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자기계발과 기업인문학이 활발히 소비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기업화된 대학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인문학의 본질은 외면 받고 있다. 이 상황에서 국내 고고학자가 써내려간 테라 인코그니타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고고학이란 학문 자체에 대한 나의 무지와 만나는 과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이란 학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새롭게 환기시켜 주었다. 이 책은 지난 2018년부터 2020년 사이에 저자가 국내 일간지에 최신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연재했던 글을 모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고찰하는 시도를 한다. 우선 1부에서는 강자의 역사가 어떻게 차별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통해 편견을 심어 놓았는지 이야기한다. 특히 식인 풍습에 관한 사례들이 흥미로웠다. 2부에서는 우리 역사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보다 구체적인 진실에 접근한다. 온돌이나 고조선의 모피, 그리고 흉노와의 관계를 비롯하여 최근에 드러난 유물과 연구 결과를 통해 교과서에서 배운 우리 역사에 대한 고정된 시각을 열어준다. 3부에서는 역사 속에서 상상과 신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세계문명사적인 관점에서 고찰한다. 아틀란티스의 신화를 비롯하여 근대의 히틀러가 남긴 편견의 틀을 보여준다. 여기에선 인류의 무지가 어떻게 신화와 결합되어 당대의 삶을 규정했으며,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 4부에서는 3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고학이란 학문이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어떻게 이용되어왔는지, 그리고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제시된 구체적인 사례가 모두 흥미로웠지만, 과거의 국가들이 차별과 배제의 장치를 어떻게 이용해왔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지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로빈 던바 교수가 언급했던 것처럼, ‘정치적인 인류는 역사를 통틀어 신화와 종교의 의식을 통해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이타심과 이기심을 이야기한다. 사실 이 둘은 하나의 쌍으로 언제나 공존하는 듯하다. 개인 혹은 집단이라는 경계를 기준으로 이들의 관심이 그 경계의 안에 머물면 이타심일 수 있는 반면, 경계 밖의 존재에게 경계 안에 있는 존재의 행위는 이기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개체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공동체의 생존가능성을 늘릴 수 있다면, 공동체 전체에 있어 이득일 것이다. 이런 공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류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오리엔탈리즘으로 정의되는 서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비하의 시각뿐만 아니라 카니발리즘이란 표현은 저자의 지적대로 지극히 악의적인 왜곡에 기반 한다. 문제는 이런 편견이 오랜 시간동안 고착되어 후대의 삶에도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식인풍습에 관해 이야기해주는 흥미로운 대목을 읽다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렸다. 소설에서 화자 이슈메일은 여인숙에서 작살잡이 퀴퀘그와 같은 침대를 쓰게 된 상황이었다. 한 침대를 쓰게 된 문명인이슈메일은 식인종이자 야만인귀퀘그를 관찰하면서 저 남자도 나와 같은 인간이다. (...) 술 취한 기독교인과 같은 침대를 쓰느니 정신 멀쩡한 식인종이랑 자는 게 낫지라고 말한다. 지금이야 충격이 덜 할지 모르나, 1850년대 미국의 백인이 이 말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상당히 도발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모비 딕의 발췌문에 나온 것처럼 허먼 멜빌은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었을 것이 분명하다. 놀라운 것은 몽테뉴가 이미 500년 전에 식인종과 직접 대화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에세이에 식인 풍습에 대해 편견을 걷어 내고 기록해놓았다는 점이다. 몽테뉴는 자신이 속한 문명인들이 보여주는 우리 자신의 야만 행위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고고학자의 역할이란 결국은 500년 전의 몽테뉴처럼 편견을 줄이기 위해 경계의 안과 밖을 공평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 강인욱 역시 식인 풍습은 미개한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식인 풍습이 드물긴 하지만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고, 증오심에서 보다는 가족이나 친구가 자신에게 체화되길 바라는 사랑의 발로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식인 풍습이 점차 문명이 형성되고 신화와 종교라는 이데올로기가 더해져서 적대감으로 인간을 죽이게 되고, 나아가 대량학살에 이르게 되는 인류의 모습을 조명한다. 이 과정에서 카니발리즘이란 표현은 실제 식인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비하하여 붙여진 이름”(70)이라고 일러준다. 루쉰은 중국 역사에서 발견되는 식인 풍습에 대해 인육의 잔치는 지금도 베풀어지고 있다라고 썼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카니발리즘이 타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기작에 활용되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루쉰의 관점은 자신의 역사에 대한 비하까지도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이 주제에 관한 한, 다소 편협했거나 무지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식인 풍습을 비롯하여 다채로운 소재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줄곧 고고학이란 학문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저자는 고고학이 제국주의 열강이 약소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문화재를 강탈하면서 발달한 근대 이후의 학문”(278)이라는 고고학의 태생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현대 국가 사이의 분쟁과 약탈의 행보를 살펴보면 고고학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우리의 고고학은 서양이 규정해 놓은 차별과 배제의 프레임을 벗어나 이에 맞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아울러 우리와 가까운 중국과 일본이 만들어 놓은 왜곡되고 자기모순적인(나는 엽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역사관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는 저자의 당부에 크게 공감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오래된 유물과 유적을 발굴해내는 작업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역사란 이미 상당히 검증을 거쳐 정립된 분야가 아닌가하고 말이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현재를 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여지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단정해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강대국이 규정해버린 편견과 역사관을 어떤 의심이나 비판적인 검토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제는 고고학이 현재 활발히 진행 중인 학문이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또 고고학은 우리의 편견을 깨부수는 도끼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고학은 이 땅 위에 살다간 수많은 세대, 겹겹이 쌓인 삶의 흔적을 한 겹 씩 들어내어 인간의 삶을 정리하고 이해하는 작업일 것이다. 절대 다수가 문자로 기록된 역사보다도 유물과 유적이라는 물성으로서만 남아 그 안에 수많은 진실을 간직하고 있으며 더 폭넓은 인류의 역사를 비쳐줄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후대인의 목적에 맞게 왜곡되어 해석되고 이용될 여지도 다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테라 인코그니타에서 고고학은 우리의 역사가 고립된 것이 아니라 각 지역과 서로 활발히 상호작용하고 연결되어 있던 역사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존의 고고학적 자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재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의 방향과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풍부한 사료와 함께 보여주었다. 나아가 자국 중심의 역사를 넘어 보편성에 근거하여 세계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이를 위해 나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타자를 배제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선입견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과 새로운 자료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저자의 당부를 기억해두기로 한다.


 

"4대 문명론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활보할 때 만들어졌다." - P22

"카니발리즘은 실제 식인하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비하하며 붙여진 이름이었다." (70)

"식인 풍습은 미개함과 관련이 없다." (72)
- P70

"문명을 유지하고 번성하는 가장 큰 관건은 외모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었다." - P155

"고대에 사람들이 교류하고 공존했던 사실을 현대 국가의 영토로 치환하여 논하는 것은 오히려 고대 한국 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본군국주의 논리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일이다." - P298

"실제로 형제국가라는 표현은 터키 건국 직후 일본이 세운 ‘만주국‘과 친선관계를 수립하면서 등장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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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 - 리영희 선집
백영서.최영묵 엮음, 리영희재단 기획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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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뒤로 들고 나아간 어둠 속의 여행자를 만나다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2020)를 읽고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았으면 지금쯤 이미 선진국이 됐을 거야.” 몇 년 전 회사업무로 어느 중소기업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한 임원이 내게 했던 말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당당히 자신의 견해를 밝히던 그 임원의 역사 인식에 충격을 받았다. 이 당혹스러운 주장에 동의할 순 없었지만, 나는 대꾸할 한 마디도 떠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내 빈약한 논리와 무지를 분명하게 깨달았던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의 시민이자 생각하는 인간으로 지니고 있을 법한 기본적인 인식도, 나만의 논리나 언어마저 결여하고 있음을 절감했다.

 

이 일이 있고나서 나는 한일관계와 관련한 사건들, 예를 들면 소녀상 건립 문제나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배제관련한 기사를 더 눈여겨보게 되었다. 리영희의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는 이런 자각의 연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그의 대표적인 글을 통해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 같았다. 이제 리영희의 10주기가 되는 시점에서 3-40년 전 저자가 남긴 글이 나와 동시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가 남기고간 유산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책을 읽으며 줄곧 염두에 두었던 물음이었다.

 

우선 리영희 선생이 밟아 온 삶이 궁금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9년에 출생하여 해방을 맞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입대, 전방에서 만 7년을 복무했다. 전장에서 성직자가 하는 기도에 대해 회의했던 사례는 향후 그가 어떤 삶을 취할지 짐작하게 해주는 실마리가 되었다. 리영희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고, 나아가는 방향을 확인했던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군복무 이후에는 언론인 혹은 학자로서의 소명을 발견한 것 같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었다. 또 노신을 사상적 스승으로 삼고, 그 정신을 본받고자 노력했다. 이후 자신이 관찰한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본질을 파고들어, 주체적인 앎을 평생 추구했다. 이런 모습은 리영희의 자기 성찰적 사유와 정신이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남게 된 까닭을 설명해준다.

 

이 책에서 리영희가 사유했던 주제들을 두 가지 큰 틀에서 이해해볼 수 있겠다. 하나는 일제의 식민주의와 그 영향이며, 다른 하나는 반공주의(냉전체제)가 미친 영향이다. 물론 현대사의 여러 국면에서 이 두 가지가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 사례도 많다. 예를 들면 정치 검찰’, ‘체제 언론’, 광주민주화운동의 성격이 식민주의의 잔재와 반공주의가 구축한 질서 모두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주의와 그 영향이 뚜렷한 주제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한 임원의 발언을 떠올리며, 우선 저자의 사유와 지혜를 발견하고자 했다.

 

식민주의와 관련한 주제는 일본의 교과서 문제에 대한 저자의 논평을 참고할 수 있겠다. 저자는 문제의 시작이 한국전쟁 직후, 일본 정부에 대한 미군정의 재군비 명령에 있다고 보았다. 한 나라의 교과서는 해당 사회 내지 국가의 이데올로기의 집약이기에, 일본 제국주의·군국주의 세력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교과서를 개정하는 일은 과거를 왜곡하고 국민을 세뇌하기에 문제가 된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현재를 끊임없이 왜곡하기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작년에 일본 기업의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이후 한일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후 나타난 일본 상품 불매움직임은 이미 1984년에도 있었다. 이제 4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우리가 극일을 외치며 또다시 감정을 분출하기보다, ‘준엄한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는 저자의 당부에는 공감과 동시에 반성을 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진실로 해방되지 못했다고 우려했을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한편 저자는 해방 이후 30년간, 이 사회를 지배해온 유일한 가치관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공주의다”(40), 라고 글에서 밝혔다. 이 문제는 그의 글이 반공법에 위반되어 체포된 후 수감상태에서 작성한 상고이유서와 되풀이해서 불거지는 핵무기·미사일 위기의 원인이 된 셈이다. 무엇보다 미국의 단독 군사 패권주의의 행보로 군산복합체가 짜놓은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 한반도가 얼마나 큰 위기에 처했는지 알게 되어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특히 한반도가 미국 군사력의 실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여전히 상존한다는 정황적 인식은 충격적이었다. 곧 평화를 두려워하는 미국 주전 세력의 분열증에 전 세계의 평화가 달려 있었다. 북한에 대한 지나친 경제 제재와 편파적 태도, -미 팀스프리트 훈련을 통해 본 미국은 언제든 북한에 대한 공격구실을 마련할 수 있는 국가였다. 리영희였다면 우리가 진실에 토대한 인식능력이 있는 시민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을 것 같다.

 

결국 내가 처음 관심을 갖게 된 한일관계는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북한을 비롯하여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베트남과의 국제 문제는 무엇보다 식민주의의 잔재와 냉전체제, 특히 광신적 반공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 일본의 통치 방식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국민을 통제하는데 앞장서서 활용했던 대한민국 지도자들이 남긴 유산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들이 지금 내 삶에 곧바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리영희는 개별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현상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치열하게 파헤치고, 깨달은 인식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식민주의, 반공주의에 뿌리 내린 세계 질서에 더하여, 국경을 초월하여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산다. 이에 대해 리영희는 스스로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에게 필요한 상황을 창조할 수 있는 통찰력과 능력을 획득”(399)할 때라고 답하지 않을까싶다. 지금 내 삶을 좌우하는 사회의 관습과 수많은 당연함에 대해 그것이 왜 그래야 하는가를 따져 묻고 생각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리영희의 선집을 읽은 시간은, 그의 문제의식과 사유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하고,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낀 시간이었다.

 

선집의 글을 따라가다 헤매던 순간, 시인 단테가 쓴 신곡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당신은 등불을 뒤로 들어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현명하게 만드는,

어둠 속의 외로운 여행자셨지요.

- 단테,신곡연옥편, 22, 박상진 옮김

 

시인 스타티우스가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말하는 대목이었다. 리영희 역시 스타티우스가 묘사한 베르길리우스처럼, 뒤따르는 이들의 발길을 밝혀주기 위해 등불을 뒤로 들고 앞장서며 어둠 속을 나아간 여행자처럼 보였다.

 

 

 

 

 

 

"해방 이후 30년간, 이 사회를 지배해온 유일한 가치관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공주의다" - P40

"독서를 통해 자신의 단단한 지적 몽매가 한구석씩 깨어지는 순간의 감격은 거의 종교적 희열과 가다. 그 과정을 통해서 사람은 스스로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에게 필요한 상황을 창조할 수 있는 통찰력과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
- 자유인이 되기 위한 독서를 당부하는 선생의 말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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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 플라톤을 읽는 8가지 시선
강대진 외 지음 / 아카넷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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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플라톤을 읽는 8가지 시선

강대진  7 지음 | [아카넷]




플라톤좋음의 이데아를 향한 올바른 길을 모색한 철학자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A.N. Whitehead) 서양철학사 2천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표현은 상당히  알려져있긴 하지만 누군가  그런지를 물으면막상 명확하게 대답하기 쉽지 않은 화두다표현대로라면 2500  과거의 어느 철학자가 정리한 사상이 우리가 현재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과  자리를 규정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을  같다소크라테스의 제자로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로서 플라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철학 문외한인 독자에게는 멀게만 느껴진다최근에야 고대 철학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되었지만인류의 역사 속에 수많은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출현했고과학기술이 발전하여 과거의 편견과 상식을 전복해왔음에도우리는 여전히 고대 철학자들의 세계관과 사유에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여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와 같은 시인들과 희곡작가들의 작품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시간이 흘러도 고대 철학자들의 철학은 현대의 전문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조명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인간의 철학과 역사는 이렇게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은 국내의 고대 철학을 연구하는 정상급 연구자 8명이 저술한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만나본다 책은  저자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특강을 기반으로 한다특히 고대 사상서를 전문적으로 출판하고 연구자의 강의를 공유하기도 하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책은 다양한 관심사와 연구분야를 선택한 플라톤 연구자들이 플라톤의 철학  그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 대한 독법을 제시한다현대의 관점에서라기 보다는 현대인에게 낯선 고대 그리스 당대의 문화  가운데에서 그리스 사회를 바라보고자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연구자의 연구 주제와 관심사에 따라 8가지 키워드로 나누고이를 분석해가며 고대 서양문화의 단면을 읽어내고자 한다전문 연구자인 저자들은 주석 작업을 포함한 원전의 번역 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공동 독회  토론을 거쳐 번역본을 완성해냈기에 더욱 신뢰를 준다이책은 플라톤의 시기를 전후한 고대 그리스 사회 서양 문화의 기원이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파고들지만문화라는 현상을 독립적인 주제로 떼어놓고 이해하는 작업은 불완전한 시도로 남을 것이다인간의 삶이란 시대를 달리해도 다양한 측면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구성되기 때문이다한편  책은 고대 서양 문화와 철학의 입문자에게는 플라톤 저서의 핵심적인 주제를 선보이고 개념 익숙해지기 기회를 제공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숱한 논쟁이 이루어져 왔으며  과정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우리에게 알려진 철학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플라톤 철학이 여전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저술이 거의 대부분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아울러  대화편에서 논의되는 중심 주제 혹은 질문에 대한 답이 명료한 결말로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말하자면 플라톤의 철학은 일종의 열린 철학이라는 특징에 주목해본다그러므로  책의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을 읽는  가지 방법은  대화편의 결론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등장인물이 주고 받은 사유의 방식에 주목하는 일인  같다 대화와 토론을 어떤 논리 구조를 통해 사유를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눈여겨볼  있을  같다.



      재미있는 것은 플라톤의 저술이 단순히 철학서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상당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플라톤의 대화편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이 나와 토론과 대담을 벌이며 주제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간다 과정에서 어떤 인물은 자신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자 화를 내기도 하고마지못해 상대방의 논리에 동의하기도 한다플라톤의 저술은 상당부분이 극적 요소가  갖추어진 훌륭한 문학작품혹은 철학극이기도 하다그런데  책의 3장에서 언급되고 있듯이플라톤은 선대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작품과 시인을 비판하고,국가에서는 소크라테스 입을 빌어 시인을 추방해야한다 과격한 논리를 주장하기도 한다이런 상황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있을 것이다짙은 문학성을 보여주는 저작의 저자이자 철학자가 시인을 싫어한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지점에서 나는 플라톤의 논리 이면에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플라톤은 젊은 시절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정치가가  준비를 했다고 한다이렇게 학업을 위해 10 후반에 아테나이로 왔다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독배를 마시고 사망한 사건을 목격했을 것이다불합리한 다수결에 의해  사람의  철학자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것이다플라톤은 허깨비같은 정치가의 자리를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정치 무대로 나갈 계획을 접고 플라톤은 대신 아테네에 학당을 열었다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따르면플라톤은 그의 중기 저작인 국가에서 철인 정치가가 통치하는 최선자 정체 주장하지만후기 저작 《법률》에서는 민주정과 귀족정이 섞인 혼합정체 지향했다플라톤은 기본적으로 민주정을 옹호하지 않았다고 한다스승 소크라테스는 민주정 성격을 갖춘 환경에서, ‘다수결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게다가 민주정 하에서 융성했던 그리스 비극은 상당히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비극을 통해 토론교육의 역할이 이루어지는 것을 좋게 바라보진 않았던 모양이다그러니 (비극시인을 포함한시인을 아예 추방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책에서는 에로스에 대해 논의하는 향연(2), 용기라는 주제로 논의하는 라케스플라톤의 우주관  철학적 자연관을 보여주는 티마이오스 같이 저자들은 플라톤의 저작  편에 집중하기도 하지만국가 법률처럼 여러 저자의 논의에 교차되며 논의되기도 한다물론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저자가 논하는 주제에 맞는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하기 때문에 보다 풍부한 해석을 접할  있다는 장점이 있다이런 해석 방식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작품 일리아드오디세이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그리고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처럼 여러 맥락에서 그리스 문화에 접근할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 흥미로웠다예를 들면 3장에서 오레스테이아의 비극을 논의의 소재로 하면서비극의 형식에 주목하여 비극의 정치성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저자는 그리스 비극이 아테나이를 찬양하는 기능그리고 토론 기술을 가르치는 역할도 했음을 언급한다반면 그리스의 법과 제도  대해 이야기하는 7장에서는  오레스테이아 이야기 그리스 사회에서 획기적인 재판 제도의 성립을 알려주는 논의에  활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플라톤의 저작 중에서 가장 생소하고 흥미있게 다가온 논의는 플라톤의 자연철학이 담긴 티마이오스였다(8).  책의 번역을 담당했던 저자는 플라톤의 관심이 그의 저작에서 대우주 천체에 대한 그의 이해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소우주인 인간에 대한 이해로 돌아오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부분이 흥미로운데저자는 자연과학자의 시선이라기 보다는 철학자의 눈으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인간을 작은 우주로 보았던 플라톤의 신선한 시선에 새삼 놀라게 된다더욱 흥미로운 점은 플라톤이 천체와 인간의 그리고 건강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보다 훌륭한 인간 공동체의 설명적 기반 확립하고자 했다는 설명이었다이건 분명히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개별적인 인간 신체에 대한 궁금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플라톤은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어 좋은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찾았을  같다여기서 특히 주목해볼 부분은 바로 좋은 이라는 지점이다.



      좋은 이라는 표현은 1장에서 논의되는 좋음의 이데아 연결지을  있다고 본다저자에 따르면 플라톤의 좋음이란 영혼이 조화를 이루어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46)이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플라톤이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언급하며 철인통치자를 내세웠던 것이나시인추방론을 주장한 것도 결국 좋음의 이데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2장에서 에로스(eros) 언급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있지 않을까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누구나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든 결핍 있게 마련이다. ‘이데아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인간이 자신의 결핍을 해소할 좋음의 이데아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로 에로스를 이해해볼  있기 때문이다 점은 현대의 동성애와 달리 중장년의 연장자가 청소년인 연소자 사이의 사랑을 통해 젊은이를 이끌어주기도 했던 관계 파이데라스티아(소년애) 이해하는데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있겠다아직 미숙한 소년이 경험과 지혜를 갖춘 연장자의 보살핌과 조언을 통해 보다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할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나니 나만의 오독인지 모르겠지만플라톤의 사상이 향하는 맥락은 플라톤의 이데아 관련하여 검토해볼  있을  같다플라톤의 종교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 1장에서 플라톤이 상당부분 계승하는 종교 사상이 바로 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 비교(批敎) 관련 있다고 했다영혼 불멸을 믿었던 그의 영혼관에 당시의 비교(批敎) 내세에서의 좋음 다가가는 방안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예로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인 현실 세계에서 결핍을 느끼는 인간이 잃어버린 반쪽 찾는 본성을 떠올려   있다 범죄의 교정가능성을 믿고 모든 부정의한 행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보았던 플라톤의 인간관  정의관 역시 이런 이데아로 향하는 인간의 노력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앞으로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언급된 플라톤의 대화편 읽어나갈  입문자는  책을 통해 해당 저작의 이해에 핵심적인 윤곽을 파악할  있겠다.



     물론 플라톤 해석이 여전히 학문적으로 완전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그의 저서는 명료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대신 독자는 플라톤의 의도를 따라가며  가지 대안으로서  저자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참고해볼  있을 것이다그러므로 이번 독서를 통해 짐작해볼  있는 점은플라톤이 인간의  좋은 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검토할  있는 모든 사항을 따져물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인간은 혼자만으로 생존할  없음은 분명하다따라서 인간들 삶이 좋은  이르기 위해서 플라톤은 종교와 사랑우주와 인간용기에 대한 모든 항목을 우선 철저하게 검토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나만의 주제넘은 해석일지 모르지만이번 독서를 통해 내가 이해한 플라톤 철학의 핵심  하나는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 향하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시도했다는 점이다나의 오독은 앞으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어나가며 새롭게 검토를 하며 바로잡히길 기대해본다 



 [참고]

책을 읽으면서 플라톤의 저서들이 집필 시기에 따라 보통 초기중기후기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에서 언급되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초기중기후기로 분류한 것은 다음과 같다.


초기

《리시스》《라케스》《변론》《크리톤》《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에우튀프론》

중기

《국가》《파이드로스》《파이돈》《향연》

후기

《티마이오스》《파르마니데스》《필레보스》《노모이(법률)》《소피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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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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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ee a Mon Fils)

: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지글러(Jeon Ziegler) 지음 | 유영미 옮김 | [갈라파고스]




‘인간성 회복을 위한 단호한 선언’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가을에 발표된 노벨평화상은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 WFP)에게 주어졌다. 조직은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 관련조직으로, 1963년에 창설되어 기아와 식량 안보를 책임지는 인도주의 기관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수상은 굶주림을 전쟁과 갈등의 무기로 활용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분쟁지역에서 평화의 조건을 마련 공로로 결정되었다. 한편 이러한 국제조직의 존재와 활동은 우리가 해결해야할 과제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배고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과 배고픔이란 단어를 평생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대체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누구나 한번쯤은 의문을 가져보았을지 모른다. 이런 의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해왔다는 것일까 자문해본다. 역사 속에서 찬란했던 문명을 일군 아프리카와 남미의 고대 왕국이 오늘날 굶주린 아이들로 넘쳐나는 곳이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약속한 물질적 풍요는 지금도 10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1 굶어 죽어가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지글러의 저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러한 물음들을 나에게 던졌주었고, 책을 읽으며 나만의 답을 찾고자 했다.    


     지글러는 스위스 출생의 제네바 교수로 사회학자이자 기아문제 전문가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유엔의 WFP(세계식량계획)에서 조사 자문 활동을 하며 기아로 고통받는 세계의 아이들과 만나고 현장을 목격했다. 책을 이후에는 유엔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도 활동했다. 저자가 집필하던 당시에는 사막화 방지 협약에 소속되어 지구의 사막화 방지 활동에도 참여하는 중이었다.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유엔 기구에서 일하는 아빠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결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독자가 접근하기 쉬우며,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들의 본질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선 저자는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해, 대를 이어 고착화된 불평등에 의문을 품었을 같다. 소들에게 주는 곡물 사료는 남아도는데 인간은 굶주려야 할까? 무고한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생존의 위기에 처하고,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현실이 과연 정의로운 세계일까? 저자는 스위스인이면서 스위스 다국적 기업 네슬레의 문제를 곧바로 비판하기도하고, 유럽인이면서도 유럽을 식민지 약탈자라고 서슴없이 표현한다. 세계 현장을 누비며 목격한 인류의 삶의 단면 고스란히 저자의 문제의식을 통해 책에 진지하게 때로는 도발적일 정도로 솔직하게 담겨있다.


     책의 원저가 출판된 해는 1999년이고,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이 2007년이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세계의 기아 문제가 얼마나 개선되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세계의 빈부격차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단서나, 끊이지 않는 테러와 난민의 증가는 인간에만 주목해봐도 삶의 조건이 나아졌다는 확신을 갖기 어렵다. 특히 저자의 언급에 따르면, 2005 기준으로 세계인구의 7분의 1 달하는 8 5 명이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분명히 지구의 일정 인구는 더욱 가혹한 생존조건 속에 처해있다. 올해 전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것은 기본적인 생존 여건 속에서 살지 못했던 이들이 팬데믹 이후, 보다 어려운 생존 여건으로 밀려났음을 암시한다. 많은 이들이 관심과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여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지글러의 책은 우리가 회피하고 외면하며 추상으로만 머물던 기아문제를 독자의 안에서 느낄 있는 구체적인 모습과 질감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얼마나 심각한 부조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지구에서 그토록 많은 (인간에 의한) 비극이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아이의 얼굴이 담긴 표지를 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책에 담긴 진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장을 넘기기 전에 내가 저항감을 느꼈던 점이 바로 질문이었다. 지금 당장 나와 무관해보이는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할까? 지글러의 책을 읽으며 줄곧 질문이 나를 따라다녔다.



인간은 배양접시의 미생물이 아니다


     지글러는 기아가 순수하게 문제 자체로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북한의 사례처럼 기아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국가 테러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네슬레의 사례처럼 일개 국제 기업이 국가와 영토의 경계를 넘어, 굶주리는 아이들을 담보로 기업의 경제적 이윤을 보호하는데 기아를 이용하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CIA 같은 권력기관이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고 쿠데타를 유도하고 내정 간섭을 하도록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기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받으며 살아가야하는 이들을 이용하는 주체가 역사적으로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 인물로 토마스 맬서스를 지목한다.


     18세기 영국의 성직자인 맬서스는 단순한 수학을 분별없이 적용하여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서 맬서스는 인구수가 가난과 기아같은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조절될 있다는 자연도태설 주장했다.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25 마다 수가 두배로 성장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적으로 증가할 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가 생존 환경의 여러 조건에 의해 자연스럽게조절된다는 것을 말했다. 질병과 배고픔, 그밖의 환경적인 제약에 의해 인구수가 조절될 것이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고 지식인들 사이에 전파되어 크게 공감을 얻었다. 맬서스가 주장의 이면에는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반영되어 있다. 주장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생존하는 인구집단에 속한 관점에서 도태되는 인구 집단의 고통을,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론은 여기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이론으로 기능했다. 유럽의 백인우월주의적 관점이 노골적으로 담긴 이론이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이론이 보여준 영향력은 실제로 엄청났다. 이론의 기저를 이루는 시각은 인간을 마치 시험실에서 배양하는 미생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특정한 의도로 배양접시 속에서 수가 조절되는 미생물이 결코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던 1789년에 영국에서는 성직자였던 맬서스가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맬서스의 이론은 인류가 인간다움을 지킬 기회에서 한층 멀어지는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론에 동의하는 자본가 권력자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에 정당성을 인정해준 셈이었다. 인간을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내몰게 현실을 외면하고, 이들에게 죄책감을 덜어주게 계기가 것이다. 여기에서 맬서스의 자연도태설 자본가와 권력자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준 이론적 근거가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북미의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금욕적인 도덕관에 기반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업인들의 제한없는 부의 창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심리적인 불편함을 덜어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데에 주목했다. 기업가들이 신의 소명과 섭리 개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결과 근면 성실한신자이자 자본가들이 기업활동을 통한 부의 창출과 축적 행위를 신의 축복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었다. 이것은 북미의 기업인들이 성실하게 일한 결과 획득한 부는 신의 섭리에 의해 부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에 부유해진 자본가들은 수익의 10분의 1 혹은 이상을 기꺼이 교회에 내놓았을 것이다. 칭찬과 존경을 몸에 받으면서 말이다.


      맬서스의 이론 역시 자본 증식에만 눈이 거대기업가들의 책임과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이론적 수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의 역할과도 일면 유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볼만한 점은 맬서스의 자연도태설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적 해석의 실질적인 수혜자들이 시대를 넘어 상당 부분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자본 권력과 정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이들에게 가지 이론은 매우 유리하게 활용될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고 이해된다. 저자에 따르면 분명히 지구에는 모든 사람이 먹고 남을 있는 식량이 충분히 있다고 한다. 심지어 120 명까지도 먹여 살릴 있는 충분한 식량이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남는 식량을 공평하고 고르게 나누지 않고 있는 이유는 사회구조의 문제에 있었다. 소말리아의 사례처럼 소수의 군벌 세력이 사람들의 식량과 부를 가로채어 독점하거나, 브라질의 금융과두제에 속한 이들은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알면서도 무감각하게 회피하는 것이다. 생존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 대한 자본 정치 권력의 무감증은 맬서스와 동조자들이 지니고 있던 인종차별적, 백인우월주의적 시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문제를 곧바로 해결할 있는 이들에게 당장 내일의 삶을 기약하기 힘든 10 여명의 운명은 추상에 불과했다. 지금도 선진국의 소들은 넘쳐나는 곡물로 배를 채우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당연하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책을 읽고나서 생각은 세계를 지배하는 소수의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이 언제나 피지배층의 삶을 손안에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팽창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만 보아도 이름과 모습을 달리 왔을 여전히 피지배세력에 대한 지배세력의 영향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 권력은 제국주의 시대 이후 냉전구도를 만들어 세계를 장악했고, 신자유주의를 도입하여 이윤을 얻기 위한 자유시장의 자유 지키기 위해 지구환경 생명의 다양성을 극단적으로 이용했다. 결과 생태계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해왔고, 극심한 빈부격차를 양산해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를 이어 물려주는 빈곤과 기아, 테러리즘과 환경 난민을 포함한 제반 문제는 결국 자본과 권력을 지닌 세력이 만들어 하나의 패키지 상품처럼 보인다. 이런 현상들은 결코 신의 결정이나 신탁에 의해 주어진 운명도, 혹은 우연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힘을 가진 소수 혹은 집단이 기획한 일들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은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혹은 국제통화기금, 시카고 곡물거래소나 월가의 금융자본가들 같이 시대와 지역별로 다른 이름과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집단에 결탁하여 이들의 손발이 되고 이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소말리아의 군벌과 같은 정치 권력이 이들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분명히 해두자면 나는 기관들 자체를 단순히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다. 기관들의 권력자들이 보여주는 판단, 그리고 이들의 행보를 비판하고자 한다. 이들은 지금 당장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으면 해결할 있는 자들이다. 자신과 같은 존재들에 대한 존중과 관심 없이 이윤극대화라는 가지 원칙에만 충실한 이들의 처신을 문제삼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에서 개별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사실은 이렇게 거미줄처럼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세계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인간성의 위기에 도전을 받는 모든 현안들이 서로가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이는 사건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세계화/글로벌화, 공기업 민영화, 불평등,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난민 발생, 도시와 농촌 사회의 격차 증가, 도시인구 빈민화, 그리고 우리가 매일 관찰하는 도시의 젠트리피케에션 마저도 모두가 누군가의 이윤극대화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하나의 패키지 기획의 결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으로 세계 은행 총재의 자리에서 사임한 김용 총재의 사례를 보아도, 기관들이 자본 권력의 이익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있다. 전체에서 빛을 발하는 지글러의 통찰은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은 이해하기 쉽고 가벼운 대화체 형식으로 쓰여 있지만 저자가 전달하는 진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읽기 전에 나에게 물었던 질문은 우리가 이렇게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할까?였다. 나름의 이유를 찾아본다면, 우선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학교에서는 결코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날마다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에 관한 진실은 유럽인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처한 삶의 조건은 인류가 처해있는 인간의 조건 생태계 모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삶과 나의 삶은 결코 무관할 없다. 하지만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유로, 그리고 우리의 무지로 인한 책임 회피를 당연시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굶주림과 관련한 문제는 복합적인 문제의 가지 단면일 뿐이다. 조금만 따저보면 많은 사람들이 점에 동의할 것이다. 기아문제는 우리가 빈곤의 문제, 보건 위생 문제, 그리고 인권 문제 그리고 생태계 환경문제 등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현상을 파악하는 단계를 넘어 다양한 현상들을 보다 시각에서, 하나의 복합적인 양상으로 바라보아야 같다. 영양섭취, 기아 문제는 결국 일상에서 발생하는 개별적이고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지구적인 규모의 사회정치적 권력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을 제대로 안다는 , 또는 최소한 알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은 자본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지켜내기 위한 출발점이며, 결국 나를 돌보고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린 불편한 진실들을 알아야 한다. 알고자 노력하는 일이 하나의 사명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저자인 지글러는 세계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목격한 진실을 간결하게 책에 담았다. 당장 다음날의 생존을 기약하기 힘든 아이들을 수없이 보았겠지만, 저자는 마지막 희망을 결코 놓지 않는다. 최근에 카뮈의 소설페스트 읽었는데, 소설 속의 주요 인물이 나눈 대화 구절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 의사에게 당신에게 페스트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의사는 그건 끝없는 패배라고 답했다. 불가항력의 페스트 앞에 인간은 어김없이 패배하는 존재다. 의사는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진실로 투쟁을 중단할 이유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뿐만 아니라 인간의 , 우리의 존엄을 위협하는 빈곤과 기아 문제 역시 소설 속의 페스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라는 페스트 자본가 정치 권력자들에 의해 좌우되고, 고통받는 이들이 여전히 수많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가 좌절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중단하게 만드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지글러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한 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23) 그리고 희망을 위한 출발점은 바로 공감(진실을 아는 ) 연대(손을 내미는 )로부터 시작할 같다. 지글러의 마디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독자에게 외치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 P23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 거야." - P37

"가격은 단 한 가지 원칙에 복종해. 바로 이윤극대화라는 원칙이지."
- 시장 가격의 본질 - P75

"지금 전 세계는 ‘농촌사회의 종언과 지구 규모의 도시화‘라는 혁명 와중에 있단다."
-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빈민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며 - P125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 P152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 P153

"이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시장원리주의의 주장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 저자는 이 ‘자유‘를 ‘자본을 위한 자유‘, ‘자유시장을 위한 자유‘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 P163

"기아에 관한 한 시장의 자율서을 맹신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못해 죄악이다. 우리는 기아와 투쟁해야 한다. 기아 문제를 시장의 자유로운 게임에만 방치할 수는 없다." - P169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 서구 정치가들을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지되어야 한다." - P169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 P171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며, 국제 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다." - P176

"소리 없이 매일 많은 사람을 죽이는 기아에 대한 범세계적 투쟁이 어려운 것은 또한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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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싸움 - 인류의 진보를 이끈 15가지 철학의 멋진 장면들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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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싸움》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나는 존재하는가?

: 파르메니데스와 에피쿠로스를 중심으로


  

세 살 즈음의 나와 초등학생의 나, 그리고 대학생 시절의 나와 지난주에 지인과 함께 찍은 이미지에서 내 모습을 찾아본다. 지난주에 기록된내 모습을 제외한 사진들은 이제 오히려 낯설다. 나는 이들 네 종류의 이미지 속에 있는 인물을 모두 라고 인식한다. 공통점은 모두 시간이 흘러 과거의 나라는 점뿐이다. 나는 이 이미지들에서 나라는 자기동일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무슨 근거로 모두 같은 라고 판별할 수 있을 것인가


   고대 철학자들도 이와 같은 물음을 던졌던 모양이다. 기원전 6세기에 남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학파에 속하는 학자다. 생각의 싸움은 파르메니데스의 있음’, ‘존재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개념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남겨졌던 사진 속의 네 인물이 바로 인지 아닌지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책에서는 영어의 ‘is'에 해당하는 표현의 세 가지 용법/개념을 소개한다. 우선 주어와 서술어의 대상이 동일함을 보여주는 술어적 용법과 주어가 존재함을 말하는 존재적 용법‘, 그리고 옳다/그르다를 판정하고 있는 진리적 용법의 세 용법을 소개한다(181). 동양 문명에 속한 우리는 언어의 세 가지 기능을 의식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하지만, 서양에서는 이 세 용법이 항상 함께 고려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니까 말로 표현된 대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참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희랍인들에게 이 세 가지 용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있었다. 이 용법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변화를 겪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달리 말하면 어느 존재라는 대상은 생성과 소멸을 겪거나 흔들리지 않고, 완결되고 온전해야 한다(182). 따라서 이 대상에 변화가 생긴다면 희랍인들은 이를 존재라고 부르지도 않으며 있지 않다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희랍인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분명해 보이는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없다라는 개념은 ()’의 개념으로 이어져, ‘있다있지 않다사이를 구별하기 위한 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184). 이 개념은 나중에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에서 고입한 빈 공간(void)의 개념(320)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에서 보면, 40년이 넘도록 키가 크고 외모가 달라진 사진 속의 인물은 라는 동일 인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라고 하는 지시대명사는 어려움 없이 사진 속의 네 인물을 곧바로 가리킬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 속의 인물이 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서 외형적으로 변화를 겪는 어떤 대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언어로 진술 불가능한 사태라고까지 인식한다(183). 사진 속의 내가 나로서 존재하려면, 나는 태어난 상태에서 변함없이 그대로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엘레아학파에 속하며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이 제기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역설에까지 이른다. 언어, 곧 논리만으로 상황을 설명하면 모순이 없지만, 현실에서 관찰되는 현상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188). 지금의 관점에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문제는 궤변이나 다름없지만, 파르메니데스는 경험 세계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은 논리학자였다. 아마도 엘레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언어 혹은 논리에 우선적으로 얽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니면 이들이 살았던 시대가 아직 2,500년 전의 고대 문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할 것 같다. 아직 영원불멸인 신들의 세계가 고유명사라는 언어로도 사용되고 있었다면, 고대 희랍인들에게 불변하는 세계는 곧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그동안 사용되던 고유명사로는 감각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힘들어지며 이들이 충돌하기 시작했음을 자각한 고대인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사건일 수 있겠다.


   이 있고 없음의 존재론 문제는 후대의 철학자들을 계속 괴롭히게 되는 문제였다. 파르메니데스가 보기에 존재한다는 것에는 생성과 변화가 불가능한 것이었다(182). 플라톤은 기하학적 사고방식을 적용하여 있음 그 자체인 이데아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 곧 현실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현상들이며, 이 현상들에 공통된 어떤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아라고 하면서 변하지 않는 존재 그 자체를 변하는 현상들과 구분해 놓았던 것이다(193).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논리(언어)와 현상과의 충돌문제는 나중에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이런 시도는 유물론의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현상을 구제하라라는 표현 속에 이들이 하고자 했던 의도가 잘 드러난다(320). 원자론에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를 상정하고, 이 원자들이 우주 전체를 이룬다고 설명한다(320).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는 생성과 변화를 겪지 않는다라고 했던 반면, 데모크리토스는 세계는 부단히 변하며, 원자가 모임을 달리하여 존재를 구성할 뿐 존재의 특성은 원자가 그대로 지니고 있다’(321)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부단히 변화하는 대상도 원자들의 수준에서는 불변하는 존재로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 따라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의하면, 네 장의 사진 속에서 내가 지목한 인물이 모두 임을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비록 키가 크는 등 외모에 변화를 겪었지만, 원자적인 관점에서 나는 여전히 동일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또 파르메니데스가 경험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여 감각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는 감각에 의존하여 세상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 점이 대비된다. 다만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두 사람 모두 원자의 존재와 허공(void)을 인정하고 도입했다(320)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원자들의 운동 양상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가 기계적인 수직낙하 운동만을 하므로 원자들끼리의 충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결정론적 관점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남기고 있으며, 나아가 근대의 과학을 지배했던 결정론적인 고전 역학의 맥락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의 운동에 경로의 이탈이라고 하는 추가적인 자유도를 인정하는데(322), 이 작은 차이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비결정론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자들에 충돌의 여지를 주었다는 것은 고전 물리학에서 현대 물리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큰 역할을 했던 확률통계에 기반한 역학의 관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존재론은 변화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었다. 파르메니데스가 존재하는 것은 운동과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면 에피쿠로스는 현상의 변화는 인정하되, 원자 개념을 도입하여 존재가 불변함을 설명할 수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에서는 네 장의 사진에 나오는 각기 다른 시절의 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동일성에 대한 고민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반면 에피쿠로스의 관점에서는 내가 존재하며, 네 장의 사진 속에 나오는 인물이 모두 변함없는 란 존재임을 확증할 수 있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에서 데모크리토스와 달리 원자의 이탈(클리나멘)’이라는 자유요소를 도입했는데(322), 이것이 비결정론적 시각, 그리고 자유의지의 문제에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물론 에피쿠로스는 이 클리나멘으로 자유의지의 문제도 설명해보려 시도 했지만 실패했다


   이 부분은 자유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에피쿠로스와 일면 유사한 면(그리고 경험론자라는 관점에서도 유사한)이 있는 스피노자와도 좀 더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스피노자는 애초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334). 대신 스피노자는 앎을 통해 인간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입장은 현대 과학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입장을 공유하는데, 윤리와 법에서는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335). 자유의지의 문제는 앞으로 공부를 해나가며 관심 있게 생각해볼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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