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 - 판사들의 판사에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거장의 시선 1
제프리 로즌 지음, 용석남 옮김 / 이온서가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erg, 1933.03.15 - 2020.09.18)





평등의 원칙 아래 세상을 포용하고자 했던 법조인

- 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


: 판사들의 판사에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원제: Conversations with RBG)


제프리 로즌(Jeffrey Rosen) 지음 | 용석남 옮김 | [이온서가] | (2023)

 



서로가 잘 모르지만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공동 관심사로 시작된 인연이 평생 이어진다면 정말 멋진 일일 것이다. 게다가 상대방이 많은 이들의 롤모델로 삼고자 하는 인물이라면? 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는 미국의 법조인이자 국립헌법센터의 수장인 제프리 로즌이 20대 청년일 때 우연히 만난 이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과 나눈 대화들을 기록한 책이다. 두 사람은 음악, 특히 오페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라는 공통점으로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친구로서 존중하는 관계를 긴즈버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유지했다. 이 책은 단순히 한 법조인의 업적을 일별하거나 긴즈버그의 일에 대한 철학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성평등,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 음악, 삶과 사랑 등의 주제를 아우른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무엇보다 성평등과 관련하여 헌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킨인물로 꼽힌다. 그가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평등 구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성별에 근거한 법으로 차별당하는 남성과 여성들을 모두를 위해 변호하고자 했다. 억압받거나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이 남성들과 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여성들을 고려하고자 마련된 사회적 장치가 어떤 경우에는 여성 혹은 남성마저 가두는 기능도 한다는 점을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길은 여성만을 고려하는 것에서 나아가 대등한 존재로서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긴즈버그가 변호사가 되고자 했던 1950년대의 사회는 지금과 많은 점에서 달랐다. 우선 그녀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음에도 로펌에서 변호사가 되지 못했던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긴즈버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점. 둘째, 여성이었다는 점. 셋째, 결혼한 여성이었다는 점. 특히 그녀가 로스쿨을 졸업했을 때, 자녀까지 있었다는 점 때문에 로펌에 취직하지 못했다고 한다. 긴즈버그는 당시에 자신에게 해당한 이 세 가지 조건을 삼진아웃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당시에 이런 불리한여건 속에서도 그녀는 변호사가 되고, 럿거스 대학의 법대 교수로 임용되어 당당히 자신의 꿈을 이루어나가기 시작했다. 이후의 행보는 부분적이나마 이 책에 담긴 대로다.


 

성평등의 관점에서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했던 긴즈버그는 자신의 삶에서 이 신념을 구현하고 실천해왔다.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대목은 긴즈버그가 평생의 동반자인 남편 마티와 함께 했던 56년의 결혼생활에 대한 언급이었다. 두 사람은 1950년에 코넬 대학에서 만나 음악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점에서 시작하여 서로의 지성을 존중하며 친해졌다고 한다. 부부가 평생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 긴즈버그는 이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가 써둔 결혼식 주례사 초안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서로의 재능과 경험에 진실로 감사합시다. 그 감사함에 뿌리를 두고 서로 헌신하십시오. 인내, 좋은 유머, 상대방에게 주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여지껏 배워왔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은, 마치 마법과 같이, 혼자일 때보다 두 사람을 더욱 지혜롭고 행복하고 풍요로운 경험으로 영원히 이끌어줄 터입니다.”(48)


 

미국의 전통적인 모토 중에 다음과 같이 라틴어로 된 말이 있다고 한다. “에 플루리부스 우눔 E pluribus unum”. 긴즈버그의 말에 따르면, 이 말은 여럿이 모여 하나(one out of many)’란 의미라고 한다. 미국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이룬 한 국가다. 미국이 물질적인 풍요 말고도 정신적인 풍요를 성취한 이유를 꼽으라면, 한 때 이러한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지금은 미국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청과 존중이 사라진 것만 같아 안타깝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언젠가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책에서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포용에 관한 저자 제프리 로즌과 긴즈버그와의 대화였다.


 

로즌: "포용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긴즈버그: "포용이란 것은, 소외된 사람들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두 팔을 벌려 공공체의 일부로 껴안는 것입니다."(268)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긴즈버그야말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9명으로 이루어진 연방 대법관으로 일할 때, 자신과 자주 의견을 달리하는 스캘리아 대법관과의 오랜 우정과 존중의 관계가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의견이 그렇게 다른 사람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 저자가 묻자, 긴즈버그는 스캘리아 대법관의 좋은 점으로 답을 대신했다. 스캘리아는 누구보다 멋진 유머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말이다. 긴즈버그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장점을 찾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상대방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경청할 줄 아는 태도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사실 이건 당사자 혼자만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방 역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인물이어야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이 사례 역시 긴즈버그가 평생 삶 속에서 보여준 포용의 정신을 발 보여준다는 점이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연방 대법원에서 소수의견을 가장 많이 낸 법조인에 속했다는 사실도 그녀의 포용 정신을 고려하면 이해가 잘 된다. 그녀는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인 대법원이라도 실수를 할 수 있으며, 나쁜 결정을 하기도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녀가 지지한 소수의견의 핵심 개념은 상식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면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이 때 긴즈버그는 우리가 끊임없이 비기득권에 속한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살아가는 한, 우리는 한없이 배울 수 있습니다.”(151) 이는 불완전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나와 다른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는 일에서 출발할 것이다. 특히 법조인은 법의 적용에 있어 누가 더 큰 고통을 받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그의 눈길이 언제나 가난하고 기득권에 속하지 못한 이들, 특히 여성들에 좀 더 머물게 되었을 것이다.


 

긴즈버그가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나와 마주한 불평등한 현실을 회피하거나 불평만 하지 않고 직접 변화시켜 가는 일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후손들은 행운아들인지도 모른다. 그가 없었다면 여전히 사회에 불평등의 잔재가 남아있긴 하지만, 지금의 정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녀는 2020년에 병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을 지냈다. 책의 저자와 긴즈버그가 나눈 대화를 따라가 보면, 두 사람이 반평생 나눈 우정의 대화가 얼마나 풍요로운 시간이었을지 상상해본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두 사람만의 사적인 대화를 넘어 한 시대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혹은 한 사회에 커다란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실제로 그의 존재가 사회를 조금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긴즈버그 대법관이 자신의 꿈을 말한 대목이 인상적이어서 인용해본다. 상식적인 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한 꿈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부모 역할과 직장 생활을 꾸려가는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 그 방식으로 사회가 굴러가도록 남녀가 같이 노력하는 것입니다.”(1984년에 언급






[참고 - 오탈자]

[1] 34면, '우리임을 것을 밝히는'  ==>> '우리임을 밝히는'


[2] 87면, '1984년, 페미티스트'  ==>> '페미니스트'





 


[1] "긴즈버그는 추상적인 원칙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들, 성별에 근거한 법으로 차별당하는 남성과 여성 개인들을 위해 변호하며 정의를 구현해나갔다."(33)

[2] "제 목표는 여성들을 떠받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 받침대가 실은, 모두를 가두는 우리임을 밝히는 것이었죠. 한 번에 한 걸음씩 법원이 깨닫게끔 하고 전진시키는 일이 그 당시 제 목표였습니다."(34)

[3] "궁극적으로는, 시민들 스스로가 조직해야 합니다. (...) 사람들에서부타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종류의 추진 없이, 입법부는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74)

[4] "여성과 남성이 존재하는 방식을 일반화시키면, 고유한 각 개인에 대한 결정을 바르게 내릴 수 없다."(106)

[5] "그게 바로 릴리가 한 행동이죠. 소수의견의 핵심 개념은 상식의 정신입니다."(177)

"전통적으로 소수의견이 장차 이 나라의 법이 되어왔습니다. (...) 법원이 잘못했다는 걸 인식한 소수의견이 있었습니다. (...) 법원이 틀린 판단을 내렸음을 인식하고 옳은 판결을 써내려간 사람들을 한번 돌아보세요. 처음에는 소수의견으로 출발하지만, 그 다음 세대에서는, 법원을 대표하는 의견이 되었다는 것을."(178)

[6] "의료보험 또한 사회안전망의 결함을 보완한다고 봅니다. 사람은 늙거나 파트너가 사망했을 때 사회보장 혜택을 받습니다. 의료보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정부는 국민들의 기본적인 필요 사항이 채워지고 있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습니다."(187)

[7] "법원은 일이 일어난 뒤에, 사후에 대응하는 기관입니다."(195)

"법원이 사회적 변화를 선두에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방향으로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했다."(198)
: 법원의 역할에 대해

[8] "평등이란 개념은 처음부터 존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회에서 실현되어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투표권을 가지기까지, 우리 여성은 1868년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긴 시간을 걸어왔습니다."(206)

[9] "‘넌 안돼’라는 대답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꿈이 있고, 추구하고 싶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을 기꺼이 할 의지가 있으면, 누군가 ‘넌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게끔 내버려두지 마세요."(235)

"진짜로 실현하고 싶은 꿈이 있다면, 기꺼이 그걸 이루는 데 필요한 노력을 하세요."(272)


[10] "좋은 시민이라면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가 있다는 조언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의무란, 우리 민주주의가 적절히 작동하도록 돕는 것이겠지요."(27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03-22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3-03-22 11:24   좋아요 1 | URL
앗~!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긴즈버그와 저자가 든 판례 관련 배경을 잘 몰라서 헌법에 대한 긴즈버그 대법관의 존중과 여기에 담긴 깊은 의미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대화 속에 저도 함께한 것처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기득권에 속하여 안락한 삶을 누릴수도 있는 위치에서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이들을 진심으로 ‘포용’하는 일이 사회를 얼마나 더 좋게 바꿀 수 있는지....대화 속에서 작은 희망도 보았습니다.
 
장강일기
정정화 지음 / 학민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압록강을 건너 거대한 부조리에 맞섰던 여인

- 독립운동가 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장강일기 長江日記를 읽고

 



몇 년 전 정동의 한 극장에서 본 연극 한 편이 기억에 생생하다. 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모노드라마였다. 그녀의 이름은 정묘희.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태어난 그녀는 열 살이던 1910, 동년배인 김의한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라를 잃었다. 독립운동을 하러 먼저 떠난 가족을 만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간 후에는 정정화로 개명했다. 나는 여사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전하는 연극을 통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녀가 남긴 회고록 녹두꽃(후에 장강일기로 바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정화 여사는 처음부터 빼앗긴 조국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집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집안의 며느리로서 시댁 어른을 모시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이에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 26년 간 이어진 그녀의 독립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내에 잠입했으며, 시댁 식구와 임시정부의 어른들을 모시고 임정의 안살림을 맡았던 여사의 삶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이기도 했다. 장강일기에는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임시정부의 속내뿐만 아니라, 이런 여건에도 항일 저항 활동을 이어간 임정 요인들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곳곳에 담겨있다. 저자의 기억에는 무장활동을 지휘하던 꿋꿋한 모습의 백범과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라며 아이와 놀아주던 백범의 격의 없는 모습까지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정정화 여사의 발걸음을 머나먼 타향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릴 때 어른들은 우리가 미국의 도움으로’, 혹은 일본이 원자폭탄에 항복하여해방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곁에는 국내 및 해외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일 활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이 개인의 안위에 앞서 무엇이 옳고 그른 길인지 먼저 헤아릴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옳은 길로 향하고자 했던 여사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디나 저항의 장이자 삶의 장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세계사 속의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했던 이들을 증언하고 있다.


회고록에서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저자가 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억한 대목이다. 역사책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저항의 장으로 뛰어들었던 이들이다. 양복점을 하며 독립 운동가들의 비밀 연락을 맡은 이세창, 한인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다 전장으로 나간 김철,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임정을 찾아온 박재희나 고구마라는 별명을 가졌던 윤씨 같은 이들이었다. 저자는 임시정부의 어머니들과 아내들의 이름도 호명했다. 이들은 쫒기는 길 위에서도 임정의 살림을 돕고 서로를 보살폈으며 자녀들을 가르쳤다.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문제와 싸우며 가족과 임시정부를 지켜낸 이들 역시 독립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장강일기는 우리의 독립이 결코 외세에 의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저자는 독립은 독립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223)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많은 이들이 일제에 부역하며 변절해갈 때, 어떤 이들은 승산 없어 보이던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분연히 저항했다. 후자의 존재야말로 우리가 당당히 독립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묵묵히 나아갔던 이름 없는 영웅들에 빚지고 있음을 말이다.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되찾아주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1] "첫 아이를 잃은 갓 스물 아낙네의 말 못할 심정, 남편없는 시댁에서의 고달픈 시집살이, 며느리를 늘 친딸처럼 감싸주시고 귀여워해 주시던 시아버님의 구국이라는 대의를 위한 망명. 이 모든 조건이나 상황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판단을 흐리게 하는 안개였다. 도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방으로 둘러쳐진 장막이었다."(45)

[2] "이 길은 한 여인의 길이다. 열 한 살에 시집와 세상 문을 닫고 규방에 갇히고, 열 아홉에 첫아이를 낳아 잃고, 남편을 떠나보낸, 가슴 얼어 오는 그 모든 사연을 십대의 나이에 모두 치른 한 여인의 길이다."(49)

"이 길은 모진 풍파로부터의 도피도 아니며, 안주도 아니다. 또다른 비바람을 이번에는 스스로 맞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49)

[3] "상해에 발을 붙인지 달포 남짓 지났을 때였다. 좋게 말하면 대담하고, 아무리 잘 봐준다 해도 당돌하기 그지없는 내 기질이 또 한번 살아나기 시작했다. (...) 국내에 들어가서 돈을 구해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55)

[4] "열차에 오르기 직전 친오라버니같은 그분이 미소를 띠며 거센 평안도 사투리로 내게 한 말을 되씹어 볼수록 독립운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나라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60)

[5] "밤의 강 소리는 사람을 위협한다. (...) 전혀 으르렁거리지 않으면서도 사방에서 사람을 옥죄고 들었다. (...) 방향을 알 수 없는 이 곳 저 곳에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물소리는 좌우편에서 속삭이듯 달려들어 양어깨를 짓누르다가도 어느새 뒷덜미를 파고들곤 했다. 목청높은 협박이 아니라 사람을 은근히 겁에 질리게 하는 고요한 위협이었다."(64)
- 처음 어두운 밤에 압록강을 건넌 여사의 소회

[6] "1924년 12월에 나는 다섯번째로 본국에 들어오게 됐는데, 이 다섯번째의 본국행에서는 임정의 공적인 임무는 띠지 않았다. (...) 이 기간 중에도 나는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문학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책을 늘 손에 잡고 있었는데, 학교 교육의 부족을 메우느라 내 나름대로 무진 애를 썼다."(89)

[7] "여기저기 다니다가 배가 출출하면 서너 시쯤 백범이 우리집으로 온다.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암요. 해드려야죠. 아직 점심 안 하셨어요? 애 좀 봐주세요. 제가 얼른 점심 지어드릴께요.‘"(96)
- 임정의 어른 백범을 가까이 모신 여사가 기억하는 백범의 소탈한 모습

[8] "강소성에서 출발하여 안휘, 강서, 호남, 광동, 귀주성을 거쳐 사천성에 이른 장장 5천 킬로미터의 피난길은 중공군이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쫓겨난 만리장정과 견주어질 만한 것이었고, 사실 우리끼리도 이 피난 행각을 만리장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68)

[9] "상해에서 시아버님을 모시던 일, 독립운동자금을 품에 감추고 가슴조이며 거룻배로 압록강을 건너던 일, 일본군에 쫓겨 아슬아슬하게 상해를 빠져나와 기강까지 허겁지겁 도망왔던 일. 그 20년은 숨어 산 20년이었고 쫓겨다닌 20년이었다."(173)

[10] "우리의 독립이 세계질서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적으로 우리들의 의지에만 달려 있지는 않다는 것이 냉엄하고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열강들에게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결국 독립은 독립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223)

[11] "조국의 독립이라는 절대 절명의 대명제 아래 항일투쟁에 뜨거운 피를 뿌려 식혀 가며 몸을 불사른 혁혁한 이름의 투사들에서부터 성명 삼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 이름모를 낯선 골짜기에서 항일이라는 돌덩이 하나만을 머리에 베고 숨을 거둔 무명열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장하고 엄숙한 숨은 뜻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의 이 순간이 있었을까? 이름이 났건 이름이 없건간에 그들의 의기와 그들의 피가 없었더라면 결코 8월 15일은 오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233)

[12] "토교로 돌아온 후 중경으로부터 전해 듣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안타깝고 가슴 답답한 이야기들이었다. 남쪽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의 앞잡이들을 그대로 관리로 임용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울분이 복받쳐 올랐다."(236)

[13] "불혹이라는 사십의 나이에 비로소 조국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조국의 이름으로 이역에서 산화한 이들을 동정호 물에 흘려보내면서 조국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달았다. 나는 아들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 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255)

[14] "간다. 돌아간다. 이제야 나 살던 산천에 간다. 전쟁난민이라고 미군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어떠랴. 돼지우리같은 엘에스티 난민선을 타면 어떠랴. 거룻배라도 좋다. 주낙배라도 좋다. 고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일엽편주인들 어떠랴. 우리는 난민이었고 거지떼였다. 그렇게 추방당했다."(265)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지만, 우리를 마중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쓸쓸한 귀국이었고, 참담한 귀향이었다."(269)

[15] "인간만사 새옹지마. 이 한마디는 아흔 살 가까이 살아온 내가 지금 늘 가슴 한켠에 품고 있는 말이다. 사람의 일이란 잘 되고 잘못되고를 따질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먼저 헤아려야 되지 않을까."(287)

[16] "백범은 갔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어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라고 말했던 백범은 갔다."(294)

[17] "6.25라는 거목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회한의 잔뿌리를 내려 박았다. 그리고 이 나라의 땅덩어리뿐만 아니라 사람과 정신마저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런 6.25는 내게 처참하거나 극악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슬그머니 성엄(남편)을 빼앗아 갔고, 맹랑하게 나를 한 달 동안 감옥에 집어 넣었었다. 그리고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315)

[18] "올해 들어서 갑자기 몸이고 정신이고 예전같지가 않으니 나이는 속일 수가 없는가 보다. 그래도 그나마 머리 속에 박혀 있고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길래 없는 글 재주며 부족한 소견으로 원고지를 메웠다."(323)

[19] "아범이 성엄의 일지와 사진들,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을 따로 정성들여 싸놓았다. 내가 내 손으로 들고 갈 것들이다. 성엄의 일지 안에는 시아버님을 비롯해서 임정에 몸 담았던 혁명투사들의 이름이 낱낱이 적혀 있다. 내가 본국을 드나들던 때의 기록도 빼놓지 않았다. 그 일지만큼은 내가 내 손으로 들고 갈 것이다."(325)

[20] "비록 셋방이었지만 집안의 흔적이 묻어나는 짐들을 차곡차곡 꾸리는 게 참 보기좋다. 나도 거들어야겠다. 이 아침에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싸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와 손녀에게 내 손길을 주어야겠다.

조국의 타오르는 아침을 맞게 될 그들에게."(325)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하수 2023-01-30 1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말들입니다!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 시대의 아이콘 평전시리즈 2
앤 C. 헬러 지음, 정찬형 옮김 / 역사비평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두운 시대에 이방인이 된다는 것

-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



C. 헬러 지음, 정찬형 옮김, [역사비평사] (2021)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은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대한 짧고 강렬한 평전이다. 잡지 편집자이면서 인물에 관한 논픽션작가인 앤 C. 헬러의 군더더기 없는 글이 돋보인다. 간결한 평전인 만큼 아렌트의 대표적인 정체성을 규정하는 세 가지 사항에 크게 초점을 맞추었다. 저자는 먼저 아렌트를 세계적인 논란의 중심에 서게 했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어서 철학자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던 젊은 시절을 조명한다. 특히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공적·사적 관계, 그리고 유럽 대륙이 나치의 광풍에 휘말린 1930년대에 아렌트가 자신의 운명과 마주해야했던 경험 및 그가 지나야 했던 삶과 죽음의 경계로 독자를 이끈다. 마지막으로 아렌트가 미국으로 망명 한 후 그를 다시 깨어나게 한 사건, 곧 유대인 여성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를 언급하고, 이어서 그를 지식인 사회에서 인정받게 했던 역작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배경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단지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32) 이 말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 중에 남긴 유명한 말이다. 아렌트는 <뉴요커>지의 기자 자격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고 생각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그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썼다.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한 것”(44)이라고 말이다. 아이히만 자신은 상부에서 시키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렌트의 기준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복종은 나치를 지지한 행위나 다름없다는 말이 된다.



어렸을 때 흔히 볼 수 있었던 학교 폭력 현장을 생각해보자. 눈앞에서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을 경우, 이 상황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방관자로 있었다면, 이 방관자는 결국 폭력에 대한 지지나 다름없다는 경고가 된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왔을 때는 또 어떤가. 집단 자체가 하나의 모순 덩어리인 상황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종종 거대한 생산 장치를 이루는 하나의 작은 부품처럼 되어야 한다. 부당한 것, 불합리한 것들이 있을 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 방관자로서 살아갈 때 결국 우리는 우리 삶을 규정하는 거대한 부조리를 지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아렌트는 현대 사회와 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유형을 진지하게 고찰하여 우리에게 경고를 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우리를 어떤 선택의 경계로 내몬다. 더 이상 방관자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문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각 구성원의 판단과 행동 그 자체가 곧 정치라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우리 삶의 문제점을 보다 더 진지하게 마주할수록 우리는 방관자일 수 없다.


 

저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요약해놓았다.

 


아렌트의 숨은 의도는 아이히만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대중사회의 인간’, 즉 사회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외롭게 표류하며 경제적으로는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로, 허무주의와 전체주의의 표적이 되기 쉬운 특성을 지닌 후기 산업주의 사회 특유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인간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7)


 

이 문장만을 본다면 아렌트는 시대를 너무 빨리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아렌트는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고 비추어 놓은 것만 같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의식은 그가 미국으로 망명을 한 이후 쏟아낸 글들을 거치며 보다 총체적인 시각을 형성해 갔고, 결국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발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한편 아렌트에게 재능을 갖춘 유대인 여성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는 또 다른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듯하다. 아렌트가 유대인의 문제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야말로 비로소 그에게 고유한 문제, 그와 불가분의 관계인 정치적문제가 되었던 셈이다. 유럽 역사에서 유대인에 대한 혐오/증오는 꽤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어느 사회든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개신교를 비롯한 현지의 종교 및 문화에 대한 동화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유대인에게 동화의 문제는 꽤나 다층적이고 복잡한 문제였다. 단순히 종교를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경멸의 시선을 바라보곤 했는데, 이들에게 동화의 문제는 곧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내면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06). 이는 곧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이 상황이야말로 창과 방패의 관계, 곧 모순이었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동화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태어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야만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단순히 고향을 떠나고, 고향을 상실하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는 것, 곧 언어도 잃어버릴 위기를 에 놓이는 걸 의미했다. “가장 간명한 표현 수단인 ... 언어도 잃어버렸다.”(162) 이 말은 아렌트의 어머니 마르타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고립된 생활을 하며 남긴 하소연이었다. 표류하는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이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렇게 다층적인 삶의 조건이 아렌트에게는 자신과 전혀 무관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당면한 문제들을 마주하며 치열하게 사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렌트가 미국으로 망명 한 후 9년 째 되던 1949년에 발표한 전체주의의 기원이 바로 치열한 사유의 결과물인 셈이다. 저는 이 책을 고독, 뿌리, 소속의 상실에 관한 명상록’(164)이라는 문구로 요약하면서, 책의 목적이 사람을 잉여란 존재로 만드는 사악한 의도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체주의는 인간의 고독과 소속감의 상실이라는 경험에 터 잡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격렬하고 절망적인 경험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165)

 


이 대목을 읽는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고독’, ‘소속감의 상실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게 목격할 수 있는 징후가 아닐까 해서다. 계층과 세대 간 갈등과 소외, 역사 및 전통과의 단절과 괴리가 이토록 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런 증상은 이미 뚜렷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후기 산업사회의 모습, 이를테면 고도의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한 노동자의 소외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와 여건이 70여 년 전 아렌트가 했던 경고를 떠올리게 하지 않은가. 우리 삶을 점점 더 좌지우지하고 정치력을 거머쥔 대기업은 현대적인 맥락에서 전체주의 세력과 다를 바 없다는 자각을 준다. 아렌트가 말한 상황과 현재 우리 사회의 조건이 잘 부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얼마나 취약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아렌트의 사상에 비추어 더욱 실감하게 된다.


 

저자 헬러는 아렌트가 가장 어둡고 위험했던 시대에도 언제나 이방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아렌트의 행보는 어린 시절부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라 이해된다. 그럼 어두운 시대에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밝힌 바를 이용하여 정리해보면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내 안의 작은 아이히만과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다. 아렌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우슈비츠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 순간, 그리고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이런 문제들은 그에게 고유한 문제,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다. 그가 단순히 방관자로만 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어두운 시대의 삶은 아렌트의 사상과 저작들에 이미 익숙한 독자들보다는 입문자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아렌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표 저작 몇 가지를 중심으로 여기에 영향을 준 아렌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 앤 C. 헬러는 태생적 조건(20세기 전반 유럽의 유대인)으로 경계인이 된 아렌트가 단순히 방관자로만 있지 않고, 이방인이 되고자 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익숙함과 구태와 거리를 두고 새롭고 공정한 시각으로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했던 한 정치철학자의 삶을 소개해주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래픽노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도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수 있겠다. 이 책은 탈출이라는 키워드로 미국으로의 망명 이전의 한아 아렌트에 좀 더 초점을 맞춘 책이다. 이 그래픽노블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좀 더 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책 속으로]


[1] "나는 단지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32)
- 재판을 받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말

[2] "아렌트의 숨은 의도는 아이히만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대중사회의 인간‘, 즉 사회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외롭게 표류하며 경제적으로는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로, 허무주의와 전체주의의 표적이 되기 쉬운 특성을 지닌 후기 산업주의 사회 특유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인간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7)


[3] "사람들이 모두 내면에 작은 아이히만을 갖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바로 그것이었다."(42)

[4]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한 것이다."(44)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마지막에 쓴 문장


[5] "최소한 하이데거가 아렌트의 장점들을 강화시키고,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여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 변호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인물임은 분명하다."(111)


[6] "단순히 방관자로만 살 수는 없었다."(117)
"유대인이라는 것이 나의 고유한 문제가 되었고,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그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었다."(121)


[7] "내 삶을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계기는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알게 된 날이었어요."(156)


[8] "(대규모) 만장일치는 합의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광신과 히스테리의 표현과 다름이 아니다."(159)


[9] "전체주의는 인간의 고독과 소속감의 상실이라는 경험에 터 잡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격렬하고 절망적인 경험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165)


[10] "가장 어둡고 위험했던 시대에도 그녀는 언제나 이방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199)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2-10-03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픽 노블로는 좀 아쉬었는데
최근에 나온 새로운 평전이 인기
라 해서 일단 수급은 해두었답니
다.

<아이히만>도 다시 읽고 리뷰
를 써야지 했는데 결국 다시 읽
지도 리뷰도 남기지 못했네요.
 
팡세 : 분류된 단장 (프랑스어 원전 번역, 양장) 기독교 명작 베스트 6
블레즈 파스칼 지음, 김화영 옮김 / 선한청지기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도전해보는 파스칼의 호교론

- 팡세 - 분류된 단장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지음 | 김화영 옮김

[선한청지기] (2022)

 



몇 년 전에 파스칼의 팡세를 읽어보려고 책을 펼쳤지만, 오래가지 않아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고전이라는 이유도 시도해보았지만, 아무런 맥락 없이 시도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기대치는 높은 반면 분절된 단상 형식의 글에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책을 무작정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단번에 이해해보고자 했던 것이 중단의 이유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이 고전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번역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번역자이자 파스칼 연구자인 김화영 교수가 이전에 참여했던 번역 작업에서 남겨놓았던 글들이 기억났다. 그의 글은 서문이나 에필로그 혹은 역자의 말 형태로 만났던 것인데, 언제든 작품에 대한 역자의 깊은 이해와 존중, 그리고 독자에 대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팡세를 읽다보면 역자의 주석에 몽테뉴의 에세에서 가져온 문장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출생으로만 따지면 90년 늦게 태어난 파스칼이 몽테뉴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몽테뉴의 글을 읽어본 기억을 떠올려보면 인간에 대한 그의 정밀한 관찰과 이해가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곤 했다. 39세의 생애로 삶을 마감했던 파스칼 역시 인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팡세에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거의 4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다. 인간에 대한 적나라하고 놀라운 통찰이 담긴 파스칼의 문장과 만날 때마다 밑줄치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번역자의 상세한 해설에 따르면, 파스칼은 진보적인 수학자이자 과학자로 이른 나이에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31세가 되던 1654년의 어느 날, 그는 성경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회심을 하게 된다. 이 일생일대의 경험은 파스칼의 글이 몽테뉴의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특징이 된다. 몽테뉴의 글은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집필되었지만, 파스칼은 유신론자의 확신으로 써나갔다. 두 사람의 글이 갖는 공통점은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는 점이겠다. 몽테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대상을 진실로 이해하고자 면밀히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주목했다. 따라서 에세의 근간을 이루는 관심사를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라는 몽테뉴의 질문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이렇듯 몽테뉴의 관심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점이 자기 자신을 향한다. 이런 맥락에서 몽테뉴의 글이 회귀적이고 성찰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파스칼의 글이 몽테뉴와 마찬가지로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관심은 결국 신을 향해 나아간다. 역자의 표현을 사용하면, 기독교적 신앙을 옹호하고 이를 되찾기를 바라는 호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몽테뉴의 관심이 자신을 향하는 회귀적인 글이라면, 파스칼의 글은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며 독자를 설득하여 기독교 신앙으로 안내하는, 점진적이고 직선적인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신앙을 설파하는 글로는 상당히 인식론적이고 지적인 방식을 취하는 셈이다. 여기에서 파스칼은 일반적인 수학자 혹은 과학자들처럼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혹은 이성이 지니는 우월함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을 경계한다. 파스칼이 파스칼의 정리같은 수학적 업적이나 진공의 존재에 대한 실험을 통해 과학적 사실을 증명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의 누구보다도 이성의 힘과 그 한계를 잘 인식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회심의 경험 이후, 인간의 이성만능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신 앞에 보다 겸허한 자세를 취했던 것 같다.


 

팡세에는 파스칼이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 인간이 위치한 지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서 그는 이중적인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바로 비참하고 비열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위대하고 유일무이한 존재인 인간의 모습이다. 상반되고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의 모습은 바로 이성만능주의에 대한 경계와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한 과정에서 제시된 인간의 조건이다. 이 점에 대해 파스칼이 인간이란 얼마나 괴이한 존재인지 이야기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인간이란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가? 얼마나 진기하고 괴기스러우며, 혼돈하고 또 얼마나 모순투성이이며, 얼마나 경이로운가? 만물의 심판자이면서 쓸모없는 벌레, 진리의 수탁자이면서 불확실한 오류의 시궁창, 우주의 영광이면서 우주의 폐기물 같은 존재다.”(114)


 

파스칼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촌철살인의 통찰을 가끔씩 꺼내 독자에게 보여준다.


 

한편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통찰에서 놀라움과 감탄을 느끼면서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파스칼이 적어내려 갔던 생각들에 모두 동의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파스칼이 거역할 수 없는 기독교 권위 위에 수립된 신앙의 진리 두 가지를 언급한 대목이 그렇다.


 

하나는 인간은 창조의 상태에서든, 은총을 입은 상태에서든 모든 자연 만물보다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신성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죄와 타락의 상태에서 인간은 처음 상태에서 추락하여 짐승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명제 모두 견고하며 확실한 것이다.”(118)


 

우리는 인권과 더불어 동물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논의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맥락에서 독자가 파스칼의 생각과 만나면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여럿 나올 것이다.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성찰에 감탄하는 부분이 훨씬 많이 나오지만, 이런 대목은 시대적인 변화와 역사적·문화적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본성은 400년 만에 변할 리는 없다.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깊은 이해를 여전히 참고하고 배울 수 있는 이유다. 반면 독자가 신앙을 회복하도록 의도한 파스칼의 접근 방식은 지금과 달리 당대에는 어떠했는지 이해하는 차원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파스칼이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다른 종에 대한 인간의 우월적 시각은, 파스칼이 비판하는 데카르트의 세계관과 더불어 현재 독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파스칼의 글이 단상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빠르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일관된 사고의 흐름 속에서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했던 주제가 뒤의 단장에서 다시 변주되면서 반복되곤 한다. 따라서 팡세는 오히려 책의 첫 장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지 않아도 충분히 접근이 가능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부터 읽어나가면 주석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읽어나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제1부에서 권태라는 소제목으로 묶인 단장을 읽고 나서 이번에는 오락/기분전환이라는 소제목 아래의 단장들을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치워두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읽으며 이해를 더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책에 좀 더 흥미를 느끼고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번역자의 서문과 세심한 해설 때문이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평생 프랑스 문학, 특히 파스칼을 연구해왔던 역자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적극적으로 가미된 번역본이 다른 번역본과 다르게 느껴졌다. 한 번 도전 했다가 덮었던 파스칼의 책이 이번 기회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면 무엇보다 역자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역자는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대한 번역 표현을 위해 서양의 코에 대한 미학적·관상학적 측면까지 고민하고, 파스칼의 육체적 질병에 대한 사항까지 염두에 두고 번역을 했다. 고전 번역은 일반 독자로서 엄두가 잘 나지 않는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나아가 역자의 꼼꼼한 해설은 파스칼의 시대와 팡세가 집필된 이유와 맥락을 파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수학과 과학에 큰 기여를 하며 영민함과 오만함이 흘러 넘쳤을 청년 시절뿐만 아니라, 회심 후 인간에 대해 이해하여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설파하며 신에게 다가가고자 했을 30대의 파스칼까지. 이번 독서를 통해 파스칼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무리하면서 책의 구성에 대한 생각을 추가해본다. 우선 주석이 본문과 분리되어 책읽기가 편하지 않았다. 독자마다 책 읽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주석을 읽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고, 주석이 너무 많다고 평점을 낮게 주는 독자도 보았는데, 나는 책을 천천히 읽더라도 주석을 대체로 다 읽는 편이다. 그러므로 팡세와 같은 책을 읽을 때는 본문 내에 주석이 괄호 안에 삽입된 형식이나 책 뒤에 주석이 들어가는 형식은 문장을 놓치게 되거나 피로감을 쉽게 느끼게 된다. 앞에서 끊어진 문장 뒤에 이어지는 지점을 찾거나, 책장을 계속 앞뒤로 들추어야 해서 읽는 흐름을 놓치고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역자의 주석이라면 나는 각주 형태를 선호한다. 책장을 넘기지 않아도 궁금한 점을 곧바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석이 편집되어 있는 형태 중에 가장 피곤한 구성은 주석이 분리되어 각 장 뒤에 달린 형태인데, 아쉽게도 팡세-분류된 단장이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폰트 크기가 작아서 읽기도 쉽지 않다. 주석의 폰트를 좀 더 크게 하고 각주 형태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1] "상상력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49)

[2] "(우리는) 과거와 미래 속에서 헤매면서도 자기에게 속한 유일한 시간, 즉 현재를 고려하지 않는다."(52)

[3] "자신을 알아야 한다. (...)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다."(71)

[4] "생각하는 갈대. 나의 가치는 공간적 차원이 아니라, 생각을 조절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 우주가 공간으로 나를 포함하면 나는 하나의 점처럼 삼켜진다. 반면, 나는 생각으로 우주를 포함한다."(100)

[5]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만한 이성의 떠들썩한 움직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겸허한 굴복에 있다."(118)

"이성의 굴복과 활용. 참된 기독교는 이에 근거한다."(168)

[6] "인간 본성 전체를 이해한 다음에. 어떤 종교가 참된 것이 되려면 우리의 본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위대함과 비루함, 그리고 각각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 이외에 어떤 종교가 그것을 알고 있었는가?"(207)

[7] "성경의 유일한 목적은 사랑이다."(245)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09-08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추석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09-08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2-09-08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팡세 엄청 어려워보입니다 ㅡㅡ 그래도 역시 당선! 축하드립니다 초란공님~!!
 



















20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할버슈타트에 무슨 일이?

-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습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 지음 | 토마스 콤브링크 주해

이호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그 상품들은 아래 도시로 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주 비싼 물건들이지요. 실용적 관점에서 보아도 고향에서 많은 노동력을 들여 생산한 것을 산이나 빈 들판에 그냥 버릴 수는 없습니다.”(81)

 

인용문만을 보면 UN이나 국제인권단체에 속한 사람이 난민들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의 사람들에게 구호물자를 전하는 임무를 맡은 상황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숭고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의 자부심 어린 진술처럼 보이니 말이다. 여기에서 상품이란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는가? 바로 폭격기에 매단 폭탄을 의미한다. , 다시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자.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 말을 한 인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8공군 여단장이었던 프레드릭 L. 앤더슨으로, 그가 한 독일 기자와 했던 인터뷰에서 가져왔다.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습의 작가 알렉산더 클루게는 독일의 소도시 할버슈타트 출신이다. 독일 작가이자 영화감독, 방송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무엇보다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여겨진다. 유대인 철학자 테어도어 아도르노와도 아주 가까운 교우관계를 맺었고, 그를 통해 프리츠 랑을 만나 영화계에도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클루게가 1932년 생이므로, 고향 할버슈타트가 연합군의 폭격기가 떨어뜨린 값비싼 상품으로 불타오를 때 겨우 13살이었다. 이 책은 할버슈타트 폭격 당시 살아남았던 여러 시민들의 증언도 기록하고 있다. 클루게의 경험담은 이 책의 해설을 담당한 토마스 콤브링크의 재인용으로 등장한다.


 

고폭탄의 폭발은 깊게 파인 자국을 남긴다. (...) 194548일 그런 것이 떨어져 파고드는 것을 나는 10미터 떨어진 곳에서 경험했다.”(197)





지금의 체코지역에서 태어난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1912년에 이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 할버슈타트를 방문하면서 자신의 일기에, ‘완전히 오래된 도시로 묘사했다. 사람들이 창 안에 기대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고도 기록해 놓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 도시는 서기 804년에 카를 대제로부터 주교령으로 지정되어 종교적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오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던 독일 북부의 작은 도시는 194548, 30분 가량 이어지던 공습으로 고폭탄 504톤과 소이탄 50톤이 투하된 후 도심의 80%가 파괴되고, 2000명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작가 클루게는 이 폭격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시청사를 포함하여 도심부가 빈터로 변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숱한 잔해와 수많은 시신, 피의 냄새를 맡았으리라. 이 기록들이 소위 연합군의 적국 시민이 남긴 기록이므로, 그 피해가 과장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시 연합군에 소속되어 있던 미래의 유명 작가의 말도 들어보자.

 


내가 떠올린 이 작가는 바로 커트 보니것이다. 그는 제2차 대전 당시 육군 정찰병으로 참전했다가 치열했던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이후 그는 독일의 동부 지역 도시인 드레스덴에서 전쟁포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여기 있을 때 저 유명한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 경험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25년 후에 쓴 소설이 바로 5도살장이다. 지금은 드레스덴이 독일의 반도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첨단 도시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방공호도 거의 없었고, 담배 공장이나 클라리넷 공장 정도가 전부였던 낙후된 중소도시였다고 한다. 폭격이 시작되자 보니것은 지하 2층의 거대한 고기 저장소로 몸을 피했는데, 폭격이 끝나고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도시가 사라져있었다고 했다. 참고로 작가 맬컴 글래드웰은 어떤 선택의 재검토에서 영국 공군이 수행한 3일간의 폭격으로 65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드레스덴 중심지를 파괴하고 민간인 25000명을 죽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구약 성경창세기에는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느님이 보기에 이 도시의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질러 의인이 남아있지 않았기에, 유황과 불을 소나기처럼 퍼부으며 도시를 멸망시켜버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해버리는 도착적이고 모순적인 신에 관한 이야기는 제쳐두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힌두교의 신들 역시 창조와 파괴 행위를 하나의 우주 원리처럼 받아들이고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적국의 시민 클루게와 연합군 소속 보니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값비싼 합성 마그마에도 끄떡없이 하느님이 지켜주었던 의인이었던 것일까. 물론 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오로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이 운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주제의 책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클루게의 전후 기록문학의 성격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한다.



 

전쟁과 자본주의의 논리


 

위에서 인용한 미 8공군 여단장 앤더슨의 말에는 전쟁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진실이 담겨있다. 클루게는 본문에서 할버슈타트의 여러 시민들이 남긴 증언과 자신이 기록한 내용을 종합해두었다. 하지만 이는 공습에 대한 분석보다는 1차 사료로서 중요성이 드러난다. 클루게의 기록들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은 주해를 맡은 콤브링크의 도움으로 좀 더 생각해볼 수 있다. 콤브링크에 따르면, “클루게는 공중전이 수요와 공급 체계를 통해 규율된다는 점과 이것이 경제 분과의 하나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공중전을 도덕적 이유에서 좀처럼 정당화할 수 없을지라도 사람들은 실업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222) 이 진술은 클루게가 주목하고 지적하고자 했던 전쟁의 본질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말하자면 할버슈타트 공습을 포함한 폭격전, 나아가 전쟁은 전쟁을 치르지 않는 후방의 고향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산업이라는 말이었다. 이는 전쟁이 어떤 근사한 명분을 내세우든, 혹은 얼마나 참혹하고 잔인할 수 있든, 우리의 일자리가 보전되고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한 전쟁에 한쪽 눈을 감고 찬성표를 던질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클루게는 전쟁 뒤에 가려진 자본주의의 논리를 이토록 생생하게 간파해내고 있었다.


 

그러면 연합군의 폭격 정당성을 주장하는 연합군 측의 진술도 살펴보자. 당시 준장이었던 로버트 B. 윌리엄스는 도시를 파괴함으로써 거기 사는 주민들의 저항 정신을 없애버려야 합니다”(185)라고 말했다. 일견 그럴듯한 견해다. 전쟁은 한편으로는 심리전이기도 하다는 맥락에서 그렇다. 그리고 전쟁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빠른 시기에 종결짓는다면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이들의 논리도 그럴듯해 보인다. 이 논리는 독일 도시들을 폭격했던 미 공군의 두 군부집단(폭격 마피아)의 논리를 보여준 맬컴 글래드웰의 저서 어떤 선택의 재검토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논리다. 이 두 집단의 차이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 논리는 제2차 대전, 혹은 지금까지도 적국의 시민들로 하여금 사기를 떨어뜨림으로써 전쟁을 더 효과적으로 빠르게 종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준다. 곧 적국의 시민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이들을 폭격대상으로 삼는 데 어떤 도덕적 논의도 불필요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맬컴 글래드웰도 책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듯이, 연합군이 독일 도시를 폭격할 때 우선 적용했던 폭격 방식으로 우선 도살자 해리스라고 불렸던 영국 공군 사령관 아서 해리스의 융단 폭격방식을 꼽을 수 있다. 해리스는 앞서 보니것이 경험했던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 지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 폭격의 효과를 보다 높이기 위해 불에 잘 타는 목재가 많은 지역, 특히 구시가지의 빈곤한 지역을 중심으로 폭격이 계획되고 작전이 수행되었다. 할버슈타트의 구시가지는 30여년 전 이곳을 방문했던 카프카가 자신의 일기에 남겼던 것처럼 중세식 목골조 건물이 많고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었다. 여기에 고폭탄뿐만 아니라 합성 마그마나 다름없던 소이탄(화염방사 폭탄)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해보라. 소이탄은 하버드 대학의 화학 교수가 점성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달라붙어 복사에너지를 전달한다는 목표로 일본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무기다(맬컴 글래드웰, 어떤 선택의 재검토 7장 참조). 이를 쉽게 풀어 이야기하면 소이탄은 불꽃이 작게 나뉘어져도 불을 끄기 매우 어려워 달라붙은 모든 대상을 끊임없이 태우는 무기다.


 

또 소이탄(혹은 네이팜탄)은 베트남 전쟁 당시 숲과 민간인을 불태우는데 무수히 떨어졌던 폭탄인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이 인천의 월미도와 주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 사용했던 무기이기도 하다. 이 무기는 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두렵기도 하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문제는 이 무기가 적국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과 모순이 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우군이었음에도 우리 시민들은 소이탄으로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한 마을에 함께 살던 일가친척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에는 미 군부가 주장하는 어떤 엄정한 도덕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보기에 폭격 마피아들에게는 오직 현재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이 어디인가만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도시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82) 이 말은 앞에서 언급했던 미 8공군 여단장 앤더슨의 진술이다. 클루게의 기록에 앤더슨은 이런 말도 덧붙인다. ‘폭격에 침착한 접근이란 없으며, ‘의심 속의 접근만이 존재 한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앤더슨으로 대표되는 폭격 마피아들의 논리는 적군이거나 적군과 내통할 수 있다고 보이는 모든 시민들을 싹쓸이하듯 폭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다. 여기에 어떤 도덕적 정당성이 들어갈 여지가 있을까? 이들이 하는 말이 다 개소리라고 여기는 이유다. 오히려 앞에서 값비싼 상품(폭격기에 매단 폭탄)을 산이나 빈 들판에 그냥 버릴 수는 없다고 했던 프레드릭 앤더슨의 대답이 솔직하게 들린다. 이 폭격 마피아들이 주장하는 도덕적 정당성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며 부실한 주장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만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콤브링크의 해설에 따르면, 클루게 역시 사기 저하용 폭격이라는 생각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근거는 당시 폭격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가 지적하는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클루게는 폭격을 당하는 도시의 시민들이 처한 극단적이고 무력한 상황을 언급한다. ‘방어력이 전무한 상태에 있는 시민들과 폭격기 비행단 사이에 존재하는 동등하지 않은 부당한 관계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콤브링크가 곁들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주민들은 항복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공격자와 공격당하는 자 사이에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접촉을 할 수 없기’(211) 때문이다.

 


또 현실적으로 폭격을 위해 값비싼 상품을 잔뜩 싣고 이륙한 폭격기들은 실제로 주민들이 항복 신호를 보내와도 발견하기 어렵고, 항복 신호를 보았다고 해도 이들이 현장에서 폭격을 중단할 권한은 없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오가는 이 순간에, 몇 시간이나 걸릴 수 있는 비행단 책임자들의 판단을 기다릴 수 있는 폭격수는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폭탄을 잔뜩 싣고 돌아와서 착륙하는 행위는 또 다른 자살행위나 다름없이 위험한 행위다. 그러니 이 상품들은 이륙한 이상 반드시투하되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의 제약은 보다 큰 범주에서, 그러니까 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전쟁이라는 범주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다. 파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후방의 고향에서 일자리를 유지하고 경제를 부흥한다는 실질적인 효과에 비하면 논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클루게의 할버슈타트 공습은 바로 서방에서 수행하는 전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이런 맥락을 제공한다.



 

전후 독일인들이 안게 된 도덕적 딜레마


 

독일 시민에 대한 공습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 위에서 언급한 도살자 해리스’(영국 공군 사령관 아서 해리스)의 논리는 독일이 먼저 도시들을 공습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독일 시민의 이익에 관해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이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도덕적 감수성의 수준은 딱 이정도 수준에서만 작동했다. 얼마나 좋은 학교를 졸업했고,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은 것과 무관하다. 또 이들이 가정에서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훌륭한 가장이자 부모였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조건과 별개로 현실은 보니것이 포로로 있던 드레스덴에 융단 폭격으로 싹쓸이하도록 지시했던 지도자의 도덕성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1942년 영국 공군 선전 영화에서 아서 해리스가 구두로 한 표현을 콤브링크가 재인용한 대목을 다시 보자.


 

나치들은 마음대로 다른 누구나 폭격할 수 있는데 절대로 거꾸로 폭격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상당히 유치한 미신을 가지고 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로테르담, 런던, 바르샤바와 거의 반백(半百)에 가까운 다른 장소에서 상당히 어리석은 자기 이론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바람의 씨를 부려놓았는데, 이제 그들은 폭풍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189)


 

나는 이 대목이 특히 소름이 돋았는데, 문득 생각나는 장면에 대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구약 성경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아의 홍수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느님이 물로 세상을 멸망시킨 이후 노아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서다. 영어판 성경에는 이 대목이 The fire next time!이라고 적혀있다. 이 표현은 이번에는 물로 했지만, 다음에는 불로 멸할 것이라고 전하는 하느님의 경고의 메시지였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해리스의 모습이 보복하는 신과 오버랩되었다. ‘도살자 해리스는 자본주의를 작동시켜주는 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서다. 아서 해리스는 내가 좋아하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 등장하는 한 인물도 떠올리게 한다. 누구와 닮았을까? 나는 해리스의 진술을 읽으면서 나의 다리를 물어뜯어 갔으니 너는 나의 복수를 받을 것이다라고 외치던 선장 에이해브의 광기를 떠올렸다.


 

전후 기록문학으로서 클루게의 공습 기록을 높이 평가한 인물은 같은 독일인이었던 W.G. 제발트(Sebald)였다. 이 책의 해설을 담당했던 콤브링크의 언급에 따르면, ‘제발트는 공중전에 관한 모든 소설과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숫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중전에 대한 질적 분석이 더 중요하다’(200)면서 클루게의 할버슈타트 공습을 높게 평가했다고 말한다. 실제로도 연합군의 독일 도시 공습에 관해 강연하고 정리한 공중전과 문학에서 제발트는 클루게의 기록을 상당히 비중 있게 언급했다. 제발트는 할버슈타트 공습가운데, 폭격 직후 방공삽을 들고 영화관을 치우려 했던 영화관 직원 슈라더 부인의 이야기를 인용하는데, 이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슈라더 부인은 영화 상영이 시작될 오후까지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영화관을 치우려고 했다. 그녀는 영화관 지하실에서 발견한 불에 탄 시체 부위를 모아 빨래용 솥단지에 담으며 주변을 정리했다는 것이다(공중전과 문학, 61). 이 이야기의 진실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불타는 도시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았지만 판단이 중지된 인물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이었다면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제발트가 제기하는 또 다른 물음 가운데 전후 독일인들이 안게 된 도덕적 딜레마가 있다.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민족이 이를 응징하려던 연합군의 폭격을 받은 상황에서 시작해보자. 콤브링크는 히틀러를 권좌에 올려놓은 이 독일인들이 가해자인가 아니면 피해자인가를 물었던 제발트의 문제의식을 가져온다. 콤브링크는 이런 도덕적 책임에 관한 질문이 할버슈타트 공습과 같은 사건들에 대해 독일인들이 이야기를 꺼내길 주저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희생자는 자신에게 벌어진 부당함을 고발할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그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자기 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기 힘들다.”(189)고 말이다. 이런 상황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인권을 유린하며 자원과 재화를 약탈했던 일본 정치계 및 군부의 입장과도 조금 다른 결을 갖는다. 이들은 피해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언제나 자신들도 피해자임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야기하는 피해자에는 순수한 일본인들만이 포함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까다롭고 안타까운 상황 속에 있다.


 

제발트는 공중전과 문학에서 공중전에 대한 양적 분석 말고도 질적 분석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그 이유 가운데 한 가지를 생각해보면, 피해 보상에 대한 문제보다 희생된 자국 국민에 대한 애도가 전무한 상황 때문이다. 제발트는 희생자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 이들에 대한 애도가 없는 독일 사회에 분노하고 이를 비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폭격을 받는 도시의 시민들은 이 순간 항복 할 수 있는 길이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또 폭격 이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망각되어 갔다. 할버슈타트 공습 당시에 불 폭풍한 가운데 있던 당사자로서 클루게는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를 자신과 당시 시민들의 증언으로서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공중전과 폭격에 대한 양적 분석만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결코 논할 수 없다. 콤브링크가 인용한 볼프강 벤츠의 국가사회주의 백과사전에는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공습으로 독일 시민 약 60만 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188). 우리는 나치에 의해 사망한 600만 명의 유대인과 독일 시민의 희생자 수를 단순히 비교하여 도덕성을 결정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국이 일본에 두 개의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기 전에도 1945년의 6개월 간 일본의 도시 67개국을 공습했으며, 원자폭탄과 더불어 수 십 만 명의 희생자를 낸 것도 일본이 적국이어서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제발트의 지적을 염두에 두고 이런 문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이를 계속 이야기해야만 한다.



 

전쟁에 당연한 것이란 없다: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


 

클루게가 할버슈타트 공습을 발표한 이후 제발트와 같은 지식인들의 인정을 받았겠지만, 많은 이들의 비판과 의구심도 받았을 테다. 특히 가해국의 시민이 제기하는 이런 문제는 특히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할버슈타트의 영화관 직원 슈라더 부인의 이야기는 믿기 힘들거나 과장된 이야기라고 의심할 수도 있겠다. 반면 기록문학으로서 그리고 폭격이 이루어지고 있던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작가의 이야기이므로 독자는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기록문학, 다큐멘터리 작업은 으레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여겨지지만, 콤브링크는 기록문학의 본질적인 문제도 놓치지 않고 언급한다. 바로 여러 사건과 글의 소재를 작가가 선별하고 조합한다는 문제다. 콤브링크는 작가가 개입하기 때문에 작가의 주관적인 관점이 융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문제에 대한 클루게의 입장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무언가 더 그럴듯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더 미심쩍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항상 현실인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저는 현실이란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자라고 보기 때문에 저에게는 종종 오류들이야말로 소위 팩트로서 더 정확한 증거가 됩니다.”(207)


 

따라서 아무리 핍진성을 전제로 하는 기록문학, 다큐멘터리 작업이라고 해도 내게는 작가가 어느 지점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는가를 독자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만약 절대 현실이라는 것이 있다면, 다큐멘터리의 현실은 이 절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어느 지점에서 형성된 하나의 구성된 현실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전쟁의 현실에서 당연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기에 기록문학 작가에 의해서 재구성된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건을 제시해도 누군가에게는 그렇다면 다른 방식의 폭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공중전을 정당화한 이들의 논리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아마도 이들이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이 불합리해서가 결코 아니다. 다만 당신이 자본주의가 어때서? 라고 묻는다면, ‘자본주의만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은 것이다. 오로지 모비 딕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이 한 가지에만 미쳐 있는 에이해브 선장의 일신주의적 광기와 무엇이 다른가 묻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 알렉산더 클루게나 제발트뿐만아니라 독일인들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마주하고 극복해야할 문제이기도 하다. 클루게가 기록해놓은 대목 가운데 한 독일인 기자가 미 공군 여단장 프레드릭 앤더슨과 했던 인터뷰 중 질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기자는 독일 도시 폭격에 대한 대화를 나눈 후, 앤더슨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 공격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 상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83)라고. 물론 이들은 폭격 전에 면밀하게 상상해보긴 했을 것이다. 불에 잘 타는 목재가 많이 있는 구시가지에 집중적으로 폭격할 때 만들어지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가져오는 굴뚝효과에 대해서 말이다. 이 거대한 불기둥은 도시 주변의 신선한 공기를 계속 화재 지점으로 끌어와 부채질할 것이라는 점을 치밀하게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 기자가 정말로 물었던 것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타게 될 도시에 있던 수많은 죄인들이 폭격으로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았냐는 질문이었다.


 

다시 정리하면, 전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들여다보아야 하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공중전과 공습은 산업화된 문명을 굴러가게 하는 바퀴의 한쪽 축이었다. 자본의 논리는 전쟁의 국면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무화시키는 절대 교리인 셈이다. 그럼에도 폭격에 희생당한 모든 이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 이점이 알렉산더 클루게의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습이 내게 준 강력한 메시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8-07 17: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 반갑네요
읽으려고 쌓아놓고 있거든요
다른 일정에 밀려서 조금 늦춰지긴 했는데 조만간 읽으려구요

노아시대 불의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날까지는 이런식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아는데...;;;
그 전의 전쟁과 고통은 인간들로부터 비롯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 2022-08-07 20:34   좋아요 1 | URL
불의 심판 모티브를 따오긴 했는데 제가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군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이 워낙 다르게 느껴지긴해요. 요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신의 설계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