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 1945 히로시마

 


존 허시(John Hersey) 지음 | 김영희 옮김 | [책과함께] | (2015)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관련된 배경을 더 이해해보려고 카운트다운 1945원자 스파이, 그리고 1945 히로시마를 이어서 읽었다. 특히나 오늘(2023824)은 일본 정부가 오후 1시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앞으로 30년간 방류하기로 하고 첫 발을 뗀 날이기에 오늘을 기억해두고자 글을 남겨둔다.


 

1930년대 말에 독일의 과학자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한이 핵분열의 가능성을 실험으로 처음 증명한 이후, 세계는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다. 특히 맨해튼 프로젝트로 인류는 핵에너지를 본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불리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핵실험이라는 희생을 기어코 치르고 말이다.


 

1945 히로시마<뉴요커>의 기자 존 허시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한 달 가량 히로시마에 머물면서 원폭 피해자들 만나 대화하고 자료를 조사한 결과다. 이 폐허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여섯 명의 인물의 증언을 담고 있으며, 이후 40년 후의 이야기까지 더해진 보도 자료이다. 카운트다운 1945의 기록에 따르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상공 580미터에서 폭발하여 78천여 명이 즉사했다. 이후 며칠에서 몇 주 동안 과도한 방사능과 열에 노출되었던 환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1945 히로시마는 한 순간 폐허로 변한 아비규환의 현장을 묘사한다.


 

19457월 즈음, 이 때는 이미 나치 독일이 항복하여 원자폭탄의 위험이 사라졌음에도, 미국은 스탈린의 영토에 대한 야욕에 주목하고, 이 무기를 일본에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이미 패색이 짙었던 일본에 대해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 아이젠하워나 맥아더가 있었지만, 빨리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을 승인한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일종의 무력시위 성격의 결정이었음을 지적한다.

 


한편 1945 히로시마에는 일본의 점령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피해에 관한 보도를 유포하거나 또는 이를 요구하는 시위 등을 신문 검열 규정을 비롯한 여러 조치들을 통해 엄격하게 금지”(234)했다. 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원자폭탄의 폐해에 대해 실감하게 된 것은 1946년에 발표된 존 허시의 1945 히로시마에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원자폭탄 개발과 성공 스토리이면에 인류가 직면하게 된 실존적이고 도덕적인 요구들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책에는 원자폭탄이 가져온 아비규환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도시를 한 순간에 폐허로 만든 것뿐만 아니라, 참혹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내가 추가로 놀란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미국은 오펜하이머가 프로젝트를 떠난 후 수소폭탄을 개발한 역사 말고도, 소련과 영국 등의 핵개발 및 실험 기록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전쟁 이후, 각 국에서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 개발이 이어지면서,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 및 정치가들이 우려한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다음 기록을 확인해보라.




[히로시마 &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의 핵개발 기록]

 

194671, 원폭 투하가 있은 지 1년도 채 안 되어 미국은 비키니 환초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그리고 1948517일 미국은 또 다른 원자폭탄 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고 발표했다.”(229)

 


195210, 영국은 첫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했고 미국은 첫 수소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19538, 소련연방 또한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238)


 

195431, 5후쿠류마루가 비키니 환초에서 행해진 미국의 핵 실험 때문에 방사능 낙진 세례를 맞았다.” (240)


 

1957515, 영국은 인도양의 크리스마스 섬에서 처음으로 수소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249)


 

1960213,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에서 핵무기를 실험했다. 19641016, 중국은 처음으로 핵 실험을 실시했고, 1967617일에는 수소폭탄도 터뜨렸다.”(250)


 

1974518일 인도는 처음으로 핵 실험을 실시했다.”(253)


 

책에 흩어져 있는 핵개발 기록을 모아보았다. 미국에 이어 영국과 소련이 핵실험을 했고, 이어서 수소폭탄을 개발하며 각 국가가 이를 또 실험까지 하며 핵개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60년대에 들어 프랑스와 중국이 핵무기 실험을 하고 수소폭탄에도 손을 대었으며, 70년대에는 인도가 핵개발에 뛰어들었다. 카운트다운 1945에 언급된 것처럼, 이제 파키스탄과 이스라엘도 핵무기를 갖고 있으며, 이제 북한도 지니게 되었다.


 

오늘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 원전 오염수를 방류한 일 역시, 이런 핵개발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앞으로 30년 이상 축적될 오염수가 가져올 문제는 핵개발 시대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의미에서, 또 앞으로 오랜 시간동안 영향을 미칠 문제라는 점에서,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는 군수공장을 비롯하여 징용된 조선인, 일본으로 건너가 터를 잡고 있던 조선인들이 7만 여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피해자에는 분명 일본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인이 원폭 피해자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강조하면서도, 피해자 보상 문제에 있어서는 조선인을 비롯한 외국인을 배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존 허시의 기록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지만, 전쟁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피해자 보상 문제에 있어서도 외국인을 차별하고 꼼수를 사용하는 관행은 원전 오염수 방류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정권은 몇 년 뿐이지만, 국제사회에서 바다에 오염 물질을 투기하고 오염시킨 범죄에 대한민국은 공범으로 기억될 것이고, 그 책임은 남은 국민들의 몫이 될 것이다. 오늘 일본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원전 오염수 방류일을 기억해두겠다.



[참고] 절판되긴 했지만, '일본인이 가장 많이 읽은 후쿠시마 원자력 비판서'라는 부제가 달린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이자 물리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책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도 추가해둔다. 지난 달에 읽었는데 리뷰로 쓸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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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8-25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암요... 공범이죠. 공범이고 말고요!!!
 
카운트다운 1945 -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 전 116일간의 비하인드 스토리
크리스 월리스.미치 와이스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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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되던 역사 속 장면들

- 카운트다운 1945



: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 전 116일간의 비하인드 스토리

크리스 월리스(Chris Wallace) & 미치 와이스(Mitch Weiss)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0)

 



최근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개봉되었다. 이 책의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더불어 영화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카운트다운 1945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한다. 이 책은 네 번째 미국 대통령을 지내고 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갑자기 사망한 1945412일부터 시작한다. 이 날은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로부터 116일 전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첫 원자폭탄이 거의 완성되어갈 무렵, 장치의 사용을 승인하기까지의 뒷이야기가 보다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서의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워싱턴을 중심으로 정치계와 군부의 움직임과 고려사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대량학살이 불가피할 이 장치의 사용을 두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를 급박하게 돌아가던 정계와 군부, 과학계 사이를 엿볼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갑자기 사망하여, 부통령으로 루스벨트와 일하기 시작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던 트루먼은 곧바로 대통령의 직을 이어받는다. 이날 트루먼은 이렇게 기록했다. ‘온 세상이 내게로 떨어진 날이라고.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한 사항을 알고 경악했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사용되기까지의 정황을 전하고 있다. 주제와 소재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카운트다운하며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그 가운데 벌어지는 사건들이 책에서 눈을 떼기 어렵게 만든다. 지난 며칠 간 이 책을 읽느라 늦잠을 자기도 했는데, 역사책을 읽는 나의 편협한 시각을 다시 확인해본 시간이기도 했다.

 





한 가지 떠오르는 예는, 원자폭탄을 개발했던 목적과 그 핵무기가 지닌 잠재적 영향력에 대한 문제, 그리고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정당성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사람마다 판이하게 달랐던 점이다. 어느 누구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발생한 참상에 대해 같은 인간으로서 애도와 두려움을 갖지 않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이미 수십 만 명의 젊은이를 잃은 미국인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저자는 여기서 한 가지 통계자료를 제시한다. 원자폭탄 투하 며칠 후 갤럽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의 85%가 이 결정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첫 폭발실험(트리니티 테스트)에 성공한 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대다수의 구성원들(소수의 참여자들은 크게 죄책감을 느꼈고, 훗날 많은 과학자들이 죄책감을 느꼈다)이 환호하며 그동안의 성취에 기뻐했던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는 국가가 전쟁의 주체였으니 말이다. 물론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핵무기 사용에 대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국제 협의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었다. 핵무기 사용에 따른 공멸의 가능성과 두려움,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는 죄책감은 점점 많은 이들이 실감하게 될 현실이었다.


 

여기서 주목해볼만한 점은 최초의 원자폭탄이 사용된 후, 60년이 지난 2005년에 또 다시 여론 조사가 시행되었는데, 그 결과가 놀랍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사용한 사실에 38%는 반대했으나, 여전히 57%는 여기에 찬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은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까지 논의된 과정을 엿볼 수 있는데, 이미 패색이 짙어진 일본에 대해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 더글러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였다. 트루먼도 당시에 참가한 독일의 포츠담 회담 당시에는 원자폭탄 실험 성공 여부에 의구심을 지녔기에, 우선은 일본에 대한 육상 침공을 염두에 있었던 정황이 보인다.


 

반면 상당수의 군사 전문가는 원자폭탄의 사용을 지지했던 것도 알 수 있다.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에 지지했던 이들의 논리는 대체로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육상 침공을 할 경우, ‘수십 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사망할 것으로 예측되었고, 원자폭탄은 한 방에 이들의 생명을 구하고, 미국의 아들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다. 대신 일본인들은 희생되어야 하는 것에는 탐탁지 않지만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다음 진술을 보면 실감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빠른 (전쟁의) 종결을 보장하고 수천 명의 미국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토머스 패럴 장군, 223)


 

20-30만 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은 일본의 도시 몇 개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트루먼 대통령, 227)

 


국가의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끌어와 전쟁에 쏟아 붓고 있던 전쟁의 주체 입장에서 전쟁을 승리로 빨리 끝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함에 있어 일본인(여기에는 강제 동원되거나 생계를 위해 살고 있던 조선인, 여러 국적의 외국인도 있었다)의 목숨과 미국인의 목숨이 비교되고, 이것이 불가피한 행위로 시행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던 미국인들과, 그럼에도 미국의 아들이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오길 바라는 전쟁 주체 국가의 국민들의 지녔던 양가적 감정도 찾아볼 수 있다.


 

인류에게 대량 학살 무기를 사용한 행위에 대한 역사가들의 반성적 평가는 이후 중요한 논쟁 주제였다. 카운트다운 1945에 따르면, 1958<내셔널 리뷰>의 한 기사에서 폭탄의 진짜 목표는 일본이 아니었다’, 라는 주장이 나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불에 탄 일본인 수만 명은 전쟁을 끝내거나 미국인 및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련에 대한 미국의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다.”(354)라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1960-70년대에 알페로비츠와 같은 역사가들의 견해와 같은 맥락을 이룬다.

 


원자폭탄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을 향한 초기 경고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트루먼은 그 카드를 쓸 태세가 돼있었다.”(354)


 

이미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19457월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에서 스탈린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항복 타진 메시지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여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다시 정리하면 일본의 표면적으로 군벌세력을 중심으로 끝까지 저항하라는 의지를 보이긴 했지만, 천황 중심으로는 항복을 소련에 타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포츠담 회담을 통해 스탈린의 영토에 대한 야욕을 재확인한 트루먼은 동아시아에도 눈길을 주던 스탈린에 대한 경고도 필요했으리라 보인다. 따라서 트루먼의 원자폭탄 사용이 전쟁을 빨리 종결한다는 보기 좋은 명분이외에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에 대해 경고할 수 있는 좋은 카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원자폭탄 사용 결정에 대해 보다 공격적으로 비판하는 역사가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 무기의 위력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일본인의 희생을 대가로 극적인 를 만들어버렸다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항복한 후라면 원자폭탄을 사용할 뚜렷한 명분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트루먼이 원자폭탄의 작동 여부에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트리니티 실험을 재촉했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당시 세계의 정황을 보여주는 기록은 포츠담 회담 이후 트루먼의 참모총장이었던 레이히 제독의 결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포츠담은 두 거대 이념의 투쟁에 대한 세계의 날카로운 주목을 이끌어냈다. 하나는 앵글로색슨의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이고, 또 하나는 스탈린주의 소련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경찰국가 전략이다. 그것은 냉전의 시작이었다.”(261)


 

트루먼의 앵글로 색슨 민주주의 정부는 소련만큼이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경찰국가였지만, 레이히 제독의 평가는 냉전의 성격을 파악하고 언급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 원자폭탄 사용과 관련한 뒷이야기에서 내가 눈여겨보았던 사항은 그 결정 과정이다. 군부와 정치권 내에서 트루먼은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사용에 반대하는 인사들의 의견도 두루 듣고 논의했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정치권도 이런 논쟁의 과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현재 우리의 경우는 보다 심각하다고 여겨진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일이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필요한 과정, 이를테면 다른 의견을 함께 들어보고 고려하는 절차가 현재 우리에게는 부재하다고 느낀다. 그것이 여기에 투입된 재정 및 인적·물적 자원의 낭비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이후 오랜 시간 이 과정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가 관여한 여러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모순 속에서, 모순과 함께 이를 견디는 관용도와 문제를 조율하며 해결해나가는 절차가 부재하다는 것이 큰 문제다. 역사책을 읽으면서 예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서술하는 역사가의 입장에 따라 도달하는 방향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이 역사책 읽기의 중요성이기도 하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이 말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그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싶기도 하다. 특히나 아픈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피하려면, 후손들은 역사를 더 잘 살펴야 할 일이다.   



1944년 로스 앨러모스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로버트 오펜하이머(가운데)와 핵물리학자 빅터 바이스코프(오른쪽)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자폭탄(리틀보이)을 싣고 투하했던 폭격기 '에놀라 게이'(B-29)의 조종사 티베츠 대령. '에놀라 게이'는 어머니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1] "온 세상이 내게로 떨어진 날"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집으로 가서 가능한 한 많은 휴식을 취한 뒤 당해야 할 일을 마주하는 것이라고."(14)
-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 쓴 트루먼의 기록.

[2] "세계는 그 기술 발전과 대비한 도덕적 진보의 현재 수준으로 볼 때 결국 그러한 무기 앞에 속수무책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문명이 완전히 파괴될 수 있습니다."(59)
- 국방부 장관 로버트 스팀슨이 트루먼에게 전한 문서 내용.

"이 폭탄은 단순한 새로운 무기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은 ‘인간의 우주에 대한 관계에서 혁명적인 변화’라고 그는 경고했다. 그것은 ‘문명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119)
- 국방부 장관 스팀슨의 말 재인용.

[3] "원자 에너지는 주요 평화 애호국이 통제하면 앞으로 수년 동안 세계 평화를 보장할 것입니다. 만약 잘못 사용되면 그것은 우리 문명을 절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71)
-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의 말.

[4] "모든 사람은 첫 번째 원자포탄 투하가 세계에 이 무기의 중요성을 완전하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극적이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들은 연합국의 폭격을 받지 않은 곳들을 살펴보았다. 일본인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여전히 번화한 도시들이다. 그들은 목표물이 될 수 있는 다섯 곳을 골랐다."(91)
- 목표물선정위원회(오펜하이머의 사무실에 모인 폭격 조종사들을 비롯한 군부인사들이 모인 회의)에서 1945년 5월 10-11일에 결정한 사항. 히로시마의 운명은 이날 결정되었다.

[5] "우리는 이제 빠른 종결을 보장하고 수천 명의 미국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됐습니다."(223)
- 토머스 패럴 장군의 말.

"스팀슨, 화약이 뭐요? 하찮은 것이오. 전기가 뭐요? 무의미해요. 원자폭탄은 분노의 재림이오."(223)
- 처칠이 미국 국방부 장관 스팀슨에게 한 말.

[6] "우리는 세계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폭탄을 찾아냈다. 그것은 노아와 그의 전설적인 방주 이후, 유프라테스강 유역 시대에 예언된 불의 파괴일 것이다."(225)
- 트루먼의 7월 25일자 일기.

"20만-30만 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은 일본의 도시 몇 개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228)
- 트루먼의 기록.

[7] "20세기의 핵무장 경쟁은 1945년 7월 24일 오후 7시 30분 체칠리엔호프 궁전에서 시작됐다."(230)
-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사용을 최종 승인한 시점.

[8] "포츠담은 두 거대 이념의 투쟁에 대한 세계의 날카로운 주목을 이끌어냈다. 하나는 앵글로색슨의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이고, 또 하나는 스탈린주의 소련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경찰국가 전략이다. 그것은 ‘냉전’의 시작이었다."(261)
- 트루먼의 참모총장 레이히 제독이 포츠담 회담에 대해 내린 결론.

[9] "프리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축하한다는 게 ‘엽기적’이라고 생각했다. (...) 그들은 여전히 자기네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338)
-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오토 프리시(Otto Frisch)에 대한 기록.

[10] "우리는 첫 번째 섬광이 지나간 뒤 안경을 벗었지만 빛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온 하늘을 두루 비추는 청록색의 빛이었다. (...) 그것은 더 이상 연기나 먼지나 심지어 불의 구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였다.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게도 태어난 새로운 종의 생명체였다."(340)
-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을 실은 B-29폭격기에 동승하여 취재했던 <뉴욕 타임스>기자 윌리엄 로런스가 묘사한 폭발 모습.

[11] "미국인은 파괴와 동의어가 되었다. (...) 그것은 우리에게 승리를 보다 빨리 가져다주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광범위하게 증오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347)
- <뉴요커>의 군사 분야 편집자 핸슨 볼드윈의 우려 메시지.

[12] "나는 내 인생에서 커다란 잘못 하나를 저질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라고 권고하는 편지에 서명한 일입니다."(349)
- 아인슈타인이 1954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한 말.

[13] "그곳은 거대한 증기 롤러가 지나가 짜부라뜨려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 듯했다. (...) 이 원자폭탄의 첫 시험장에서 나는 4년간의 전쟁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치는 폐허를 보았다."(351)
- 오스트레일리아 기자 월프레드 버쳇이 미국의 언론 통제를 피해 모스부호로 런던에 기사를 내보내 9월 5일 발표된 신문 기사의 한 대목.

[14]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불에 탄 일본인 수만 명은 전쟁을 끝내거나 미국인 및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련에 대한 미국의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다."(354)
- Mohan과 Tree가 Journal of American-East Asian Relations라는 학술지에 게재한 원폭 사용에 대한 평가.

[15] "전쟁을 벌이고 있는 세계에서, 또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나라들이 핵무기를 새로운 무기의 하나로 추가한다면 그때 인류는 로스 앨러모스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을 저주할 것입니다."(371)
- 오펜하이머의 말.

[16] "우리 군대에게 화력을 마음껏 사용하는 일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접근법이며 처음부터 써온 방법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에 대한 폭격이 좋은 사례입니다. 일본을 상대로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은 그저 이런 접근법의 최종 단계였을 뿐입니다. (...) 나는 어떠한 후회도 없으며 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해 우리가 한 일에 결코 변명하지 않을 것임을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전쟁은 모순입니다. 전쟁은 당연히 야만적입니다. 죽이는 방법이 용인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유감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전쟁의 명분과 전쟁 자체의 근절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 억제는 지금까지는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383)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가는 폭격기에 모두 탑승했던 레이저 전문가 제이컵 비저의 말.

[17] "나는 이 무기 덕분에 미국과 연합국이 일본을 침공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침공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확신합니다. 얼마나 많은 수였을지는 감히 추측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전쟁을 빨리 끝냈다고 생각합니다. (...) 폭발의 결과로 잃은 생명들은 전쟁 사상자이며, 그것은 전쟁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384)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해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385)
-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를 싣고 날아간 B-29 ‘에놀라 게이‘의 조종사 폴 티베츠 대령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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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지배 -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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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신세계의 모습

- 정보의 지배를 읽으며

 


출근하기 전에 잠시 집어 들었던 한병철의 정보의 지배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읽고 글을 남겨본다.


사회비평가이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닐 포스트먼은 죽도록 즐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요컨대 오웰은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몹시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한병철, 정보의 지배, 33면에서 재인용)


 

철학자 한병철은 헉슬리가 구축한 신세계가 오웰의 감시국가보다 여러 면에서 우리의 현재 모습에 더 가깝다고 진단한다. 저자가 말한 대목을 좀 더 들어보자.


 

멋진 신세계는 진통사회다. 거기에서 고통은 기피된다. 강렬한 감정들도 억압된다. 모든 바람, 모든 욕구는 곧바로 충족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재미, 소비, 즐거움에 휩싸여 몽롱해진다. 행복을 향한 강박이 삶을 지배한다. 국가는 주민들의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 소마soma'라는 약을 나눠준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텔레스크린 대신에 감각영화관이 있다. 그 영화관은 향기 오르간등을 써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마비시킨다.”(같은 책, 33)


 

이런 대목을 읽으면 한병철의 언급대로 우리는 지금 헉슬리의 신세계한 복판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름이 돋는다. 이 세계에서 국가가 주민들에게 나눠준다는 약(소마soma)은 그리스어로 영혼과 대비되는 육체’, ‘육신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온 것일 테다. 우리 몸, 신체의 욕망을 곧바로 충족시켜주는 쾌락의 영약이라는 의미에서 그럴듯한 이름이다. 몇 년 전 자동차 업계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한 감정 반응 자동차를 선보였던 기사가 기억난다. 이 자동차에서는 운전자 및 탑승자의 신체, 심리 상태 등을 감지하여 이들의 감정을 돌봐주는 역할을 하는 기능인 것이다. 기분이 좋으면 즐거운 음악이나 기분이 좋아지는 향을 내뿜고, 우울하거나 슬퍼 보이는 표정이라면 이 또한 감지하여 기분을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끊임없이, 잠시도 자신만의 사적 공간이 소멸된 환경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한병철의 언급대로 우리의 생활에 이미 행복을 강요하는 강박이 자리 잡은 듯하다.


 

특히 오늘 짬을 내어 읽은 대목에서는 텔레비전이 담론을 파편화한다.’(31)란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대통령 후보의 토론회를 비롯하여 사회의 문제들을 다루는 프로는 점차 단축되고 오락화된다. 나아가 일종의 쇼, 공연이 되어 가면서 이미지 정치가 되어 간다는 의미였다. 대신 시청자들은 오락프로그램이 주는 행복에 중독되어간다는 것이다. 결국 속이 빈 이미지들, 이러한 쇼들은 헉슬리의 소설에서 국가가 주민들에게 내어주는 약 소마에 다름 아닐지도. 공포의 지배 방식에서 한 층 업그레이드되어 이제 이미지 소비자들은 스스로, 능동적으로 이 약에 중독되어 간다는 진단을 저자는 내놓는다. 자가당착적이지만 매우 중독적인 도취의 형태다. 현대 SF의 거장인 필립 K. 딕이 언급한 바대로, 현대사회의 특징 하나는 공적 공간의 소멸인 것이다. 이제 공론장은 사적 공간들로 파열해버리고 있다.


 

오늘 독서는 여기까지. 저자는 자신의 진단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기대해본다.   


[1]
"(올더스) 헉슬리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요컨대 오웰은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몹시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한병철, 《정보의 지배》, 33면에서 재인용)

[2]
"멋진 신세계는 진통사회다. 거기에서 고통은 기피된다. 강렬한 감정들도 억압된다. 모든 바람, 모든 욕구는 곧바로 충족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재미, 소비, 즐거움에 휩싸여 몽롱해진다. 행복을 향한 강박이 삶을 지배한다. 국가는 주민들의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 ‘소마soma‘라는 약을 나눠준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텔레스크린 대신에 ’감각영화관‘이 있다. 그 영화관은 ‘향기 오르간’ 등을 써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마비시킨다."(같은 책,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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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 - 판사들의 판사에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거장의 시선 1
제프리 로즌 지음, 용석남 옮김 / 이온서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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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erg, 1933.03.15 - 2020.09.18)





평등의 원칙 아래 세상을 포용하고자 했던 법조인

- 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


: 판사들의 판사에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원제: Conversations with RBG)


제프리 로즌(Jeffrey Rosen) 지음 | 용석남 옮김 | [이온서가] | (2023)

 



서로가 잘 모르지만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공동 관심사로 시작된 인연이 평생 이어진다면 정말 멋진 일일 것이다. 게다가 상대방이 많은 이들의 롤모델로 삼고자 하는 인물이라면? 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는 미국의 법조인이자 국립헌법센터의 수장인 제프리 로즌이 20대 청년일 때 우연히 만난 이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과 나눈 대화들을 기록한 책이다. 두 사람은 음악, 특히 오페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라는 공통점으로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친구로서 존중하는 관계를 긴즈버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유지했다. 이 책은 단순히 한 법조인의 업적을 일별하거나 긴즈버그의 일에 대한 철학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성평등,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 음악, 삶과 사랑 등의 주제를 아우른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무엇보다 성평등과 관련하여 헌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킨인물로 꼽힌다. 그가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평등 구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성별에 근거한 법으로 차별당하는 남성과 여성들을 모두를 위해 변호하고자 했다. 억압받거나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이 남성들과 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여성들을 고려하고자 마련된 사회적 장치가 어떤 경우에는 여성 혹은 남성마저 가두는 기능도 한다는 점을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길은 여성만을 고려하는 것에서 나아가 대등한 존재로서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긴즈버그가 변호사가 되고자 했던 1950년대의 사회는 지금과 많은 점에서 달랐다. 우선 그녀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음에도 로펌에서 변호사가 되지 못했던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긴즈버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점. 둘째, 여성이었다는 점. 셋째, 결혼한 여성이었다는 점. 특히 그녀가 로스쿨을 졸업했을 때, 자녀까지 있었다는 점 때문에 로펌에 취직하지 못했다고 한다. 긴즈버그는 당시에 자신에게 해당한 이 세 가지 조건을 삼진아웃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당시에 이런 불리한여건 속에서도 그녀는 변호사가 되고, 럿거스 대학의 법대 교수로 임용되어 당당히 자신의 꿈을 이루어나가기 시작했다. 이후의 행보는 부분적이나마 이 책에 담긴 대로다.


 

성평등의 관점에서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했던 긴즈버그는 자신의 삶에서 이 신념을 구현하고 실천해왔다.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대목은 긴즈버그가 평생의 동반자인 남편 마티와 함께 했던 56년의 결혼생활에 대한 언급이었다. 두 사람은 1950년에 코넬 대학에서 만나 음악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점에서 시작하여 서로의 지성을 존중하며 친해졌다고 한다. 부부가 평생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 긴즈버그는 이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가 써둔 결혼식 주례사 초안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서로의 재능과 경험에 진실로 감사합시다. 그 감사함에 뿌리를 두고 서로 헌신하십시오. 인내, 좋은 유머, 상대방에게 주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여지껏 배워왔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은, 마치 마법과 같이, 혼자일 때보다 두 사람을 더욱 지혜롭고 행복하고 풍요로운 경험으로 영원히 이끌어줄 터입니다.”(48)


 

미국의 전통적인 모토 중에 다음과 같이 라틴어로 된 말이 있다고 한다. “에 플루리부스 우눔 E pluribus unum”. 긴즈버그의 말에 따르면, 이 말은 여럿이 모여 하나(one out of many)’란 의미라고 한다. 미국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이룬 한 국가다. 미국이 물질적인 풍요 말고도 정신적인 풍요를 성취한 이유를 꼽으라면, 한 때 이러한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지금은 미국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청과 존중이 사라진 것만 같아 안타깝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언젠가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책에서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포용에 관한 저자 제프리 로즌과 긴즈버그와의 대화였다.


 

로즌: "포용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긴즈버그: "포용이란 것은, 소외된 사람들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두 팔을 벌려 공공체의 일부로 껴안는 것입니다."(268)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긴즈버그야말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9명으로 이루어진 연방 대법관으로 일할 때, 자신과 자주 의견을 달리하는 스캘리아 대법관과의 오랜 우정과 존중의 관계가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의견이 그렇게 다른 사람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 저자가 묻자, 긴즈버그는 스캘리아 대법관의 좋은 점으로 답을 대신했다. 스캘리아는 누구보다 멋진 유머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말이다. 긴즈버그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장점을 찾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상대방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경청할 줄 아는 태도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사실 이건 당사자 혼자만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방 역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인물이어야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이 사례 역시 긴즈버그가 평생 삶 속에서 보여준 포용의 정신을 발 보여준다는 점이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연방 대법원에서 소수의견을 가장 많이 낸 법조인에 속했다는 사실도 그녀의 포용 정신을 고려하면 이해가 잘 된다. 그녀는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인 대법원이라도 실수를 할 수 있으며, 나쁜 결정을 하기도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녀가 지지한 소수의견의 핵심 개념은 상식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면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이 때 긴즈버그는 우리가 끊임없이 비기득권에 속한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살아가는 한, 우리는 한없이 배울 수 있습니다.”(151) 이는 불완전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나와 다른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는 일에서 출발할 것이다. 특히 법조인은 법의 적용에 있어 누가 더 큰 고통을 받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그의 눈길이 언제나 가난하고 기득권에 속하지 못한 이들, 특히 여성들에 좀 더 머물게 되었을 것이다.


 

긴즈버그가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나와 마주한 불평등한 현실을 회피하거나 불평만 하지 않고 직접 변화시켜 가는 일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후손들은 행운아들인지도 모른다. 그가 없었다면 여전히 사회에 불평등의 잔재가 남아있긴 하지만, 지금의 정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녀는 2020년에 병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을 지냈다. 책의 저자와 긴즈버그가 나눈 대화를 따라가 보면, 두 사람이 반평생 나눈 우정의 대화가 얼마나 풍요로운 시간이었을지 상상해본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두 사람만의 사적인 대화를 넘어 한 시대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혹은 한 사회에 커다란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실제로 그의 존재가 사회를 조금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긴즈버그 대법관이 자신의 꿈을 말한 대목이 인상적이어서 인용해본다. 상식적인 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한 꿈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부모 역할과 직장 생활을 꾸려가는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 그 방식으로 사회가 굴러가도록 남녀가 같이 노력하는 것입니다.”(1984년에 언급






[참고 - 오탈자]

[1] 34면, '우리임을 것을 밝히는'  ==>> '우리임을 밝히는'


[2] 87면, '1984년, 페미티스트'  ==>> '페미니스트'





 


[1] "긴즈버그는 추상적인 원칙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들, 성별에 근거한 법으로 차별당하는 남성과 여성 개인들을 위해 변호하며 정의를 구현해나갔다."(33)

[2] "제 목표는 여성들을 떠받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 받침대가 실은, 모두를 가두는 우리임을 밝히는 것이었죠. 한 번에 한 걸음씩 법원이 깨닫게끔 하고 전진시키는 일이 그 당시 제 목표였습니다."(34)

[3] "궁극적으로는, 시민들 스스로가 조직해야 합니다. (...) 사람들에서부타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종류의 추진 없이, 입법부는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74)

[4] "여성과 남성이 존재하는 방식을 일반화시키면, 고유한 각 개인에 대한 결정을 바르게 내릴 수 없다."(106)

[5] "그게 바로 릴리가 한 행동이죠. 소수의견의 핵심 개념은 상식의 정신입니다."(177)

"전통적으로 소수의견이 장차 이 나라의 법이 되어왔습니다. (...) 법원이 잘못했다는 걸 인식한 소수의견이 있었습니다. (...) 법원이 틀린 판단을 내렸음을 인식하고 옳은 판결을 써내려간 사람들을 한번 돌아보세요. 처음에는 소수의견으로 출발하지만, 그 다음 세대에서는, 법원을 대표하는 의견이 되었다는 것을."(178)

[6] "의료보험 또한 사회안전망의 결함을 보완한다고 봅니다. 사람은 늙거나 파트너가 사망했을 때 사회보장 혜택을 받습니다. 의료보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정부는 국민들의 기본적인 필요 사항이 채워지고 있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습니다."(187)

[7] "법원은 일이 일어난 뒤에, 사후에 대응하는 기관입니다."(195)

"법원이 사회적 변화를 선두에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방향으로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했다."(198)
: 법원의 역할에 대해

[8] "평등이란 개념은 처음부터 존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회에서 실현되어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투표권을 가지기까지, 우리 여성은 1868년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긴 시간을 걸어왔습니다."(206)

[9] "‘넌 안돼’라는 대답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꿈이 있고, 추구하고 싶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을 기꺼이 할 의지가 있으면, 누군가 ‘넌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게끔 내버려두지 마세요."(235)

"진짜로 실현하고 싶은 꿈이 있다면, 기꺼이 그걸 이루는 데 필요한 노력을 하세요."(272)


[10] "좋은 시민이라면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가 있다는 조언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의무란, 우리 민주주의가 적절히 작동하도록 돕는 것이겠지요."(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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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2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3-03-22 11:24   좋아요 1 | URL
앗~!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긴즈버그와 저자가 든 판례 관련 배경을 잘 몰라서 헌법에 대한 긴즈버그 대법관의 존중과 여기에 담긴 깊은 의미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대화 속에 저도 함께한 것처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기득권에 속하여 안락한 삶을 누릴수도 있는 위치에서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이들을 진심으로 ‘포용’하는 일이 사회를 얼마나 더 좋게 바꿀 수 있는지....대화 속에서 작은 희망도 보았습니다.
 
장강일기
정정화 지음 / 학민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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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너 거대한 부조리에 맞섰던 여인

- 독립운동가 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장강일기 長江日記를 읽고

 



몇 년 전 정동의 한 극장에서 본 연극 한 편이 기억에 생생하다. 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모노드라마였다. 그녀의 이름은 정묘희.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태어난 그녀는 열 살이던 1910, 동년배인 김의한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라를 잃었다. 독립운동을 하러 먼저 떠난 가족을 만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간 후에는 정정화로 개명했다. 나는 여사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전하는 연극을 통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녀가 남긴 회고록 녹두꽃(후에 장강일기로 바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정화 여사는 처음부터 빼앗긴 조국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집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집안의 며느리로서 시댁 어른을 모시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이에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 26년 간 이어진 그녀의 독립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내에 잠입했으며, 시댁 식구와 임시정부의 어른들을 모시고 임정의 안살림을 맡았던 여사의 삶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이기도 했다. 장강일기에는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임시정부의 속내뿐만 아니라, 이런 여건에도 항일 저항 활동을 이어간 임정 요인들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곳곳에 담겨있다. 저자의 기억에는 무장활동을 지휘하던 꿋꿋한 모습의 백범과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라며 아이와 놀아주던 백범의 격의 없는 모습까지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정정화 여사의 발걸음을 머나먼 타향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릴 때 어른들은 우리가 미국의 도움으로’, 혹은 일본이 원자폭탄에 항복하여해방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곁에는 국내 및 해외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일 활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이 개인의 안위에 앞서 무엇이 옳고 그른 길인지 먼저 헤아릴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옳은 길로 향하고자 했던 여사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디나 저항의 장이자 삶의 장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세계사 속의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했던 이들을 증언하고 있다.


회고록에서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저자가 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억한 대목이다. 역사책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저항의 장으로 뛰어들었던 이들이다. 양복점을 하며 독립 운동가들의 비밀 연락을 맡은 이세창, 한인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다 전장으로 나간 김철,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임정을 찾아온 박재희나 고구마라는 별명을 가졌던 윤씨 같은 이들이었다. 저자는 임시정부의 어머니들과 아내들의 이름도 호명했다. 이들은 쫒기는 길 위에서도 임정의 살림을 돕고 서로를 보살폈으며 자녀들을 가르쳤다.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문제와 싸우며 가족과 임시정부를 지켜낸 이들 역시 독립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장강일기는 우리의 독립이 결코 외세에 의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저자는 독립은 독립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223)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많은 이들이 일제에 부역하며 변절해갈 때, 어떤 이들은 승산 없어 보이던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분연히 저항했다. 후자의 존재야말로 우리가 당당히 독립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묵묵히 나아갔던 이름 없는 영웅들에 빚지고 있음을 말이다.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되찾아주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1] "첫 아이를 잃은 갓 스물 아낙네의 말 못할 심정, 남편없는 시댁에서의 고달픈 시집살이, 며느리를 늘 친딸처럼 감싸주시고 귀여워해 주시던 시아버님의 구국이라는 대의를 위한 망명. 이 모든 조건이나 상황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판단을 흐리게 하는 안개였다. 도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방으로 둘러쳐진 장막이었다."(45)

[2] "이 길은 한 여인의 길이다. 열 한 살에 시집와 세상 문을 닫고 규방에 갇히고, 열 아홉에 첫아이를 낳아 잃고, 남편을 떠나보낸, 가슴 얼어 오는 그 모든 사연을 십대의 나이에 모두 치른 한 여인의 길이다."(49)

"이 길은 모진 풍파로부터의 도피도 아니며, 안주도 아니다. 또다른 비바람을 이번에는 스스로 맞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49)

[3] "상해에 발을 붙인지 달포 남짓 지났을 때였다. 좋게 말하면 대담하고, 아무리 잘 봐준다 해도 당돌하기 그지없는 내 기질이 또 한번 살아나기 시작했다. (...) 국내에 들어가서 돈을 구해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55)

[4] "열차에 오르기 직전 친오라버니같은 그분이 미소를 띠며 거센 평안도 사투리로 내게 한 말을 되씹어 볼수록 독립운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나라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60)

[5] "밤의 강 소리는 사람을 위협한다. (...) 전혀 으르렁거리지 않으면서도 사방에서 사람을 옥죄고 들었다. (...) 방향을 알 수 없는 이 곳 저 곳에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물소리는 좌우편에서 속삭이듯 달려들어 양어깨를 짓누르다가도 어느새 뒷덜미를 파고들곤 했다. 목청높은 협박이 아니라 사람을 은근히 겁에 질리게 하는 고요한 위협이었다."(64)
- 처음 어두운 밤에 압록강을 건넌 여사의 소회

[6] "1924년 12월에 나는 다섯번째로 본국에 들어오게 됐는데, 이 다섯번째의 본국행에서는 임정의 공적인 임무는 띠지 않았다. (...) 이 기간 중에도 나는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문학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책을 늘 손에 잡고 있었는데, 학교 교육의 부족을 메우느라 내 나름대로 무진 애를 썼다."(89)

[7] "여기저기 다니다가 배가 출출하면 서너 시쯤 백범이 우리집으로 온다.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암요. 해드려야죠. 아직 점심 안 하셨어요? 애 좀 봐주세요. 제가 얼른 점심 지어드릴께요.‘"(96)
- 임정의 어른 백범을 가까이 모신 여사가 기억하는 백범의 소탈한 모습

[8] "강소성에서 출발하여 안휘, 강서, 호남, 광동, 귀주성을 거쳐 사천성에 이른 장장 5천 킬로미터의 피난길은 중공군이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쫓겨난 만리장정과 견주어질 만한 것이었고, 사실 우리끼리도 이 피난 행각을 만리장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68)

[9] "상해에서 시아버님을 모시던 일, 독립운동자금을 품에 감추고 가슴조이며 거룻배로 압록강을 건너던 일, 일본군에 쫓겨 아슬아슬하게 상해를 빠져나와 기강까지 허겁지겁 도망왔던 일. 그 20년은 숨어 산 20년이었고 쫓겨다닌 20년이었다."(173)

[10] "우리의 독립이 세계질서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적으로 우리들의 의지에만 달려 있지는 않다는 것이 냉엄하고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열강들에게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결국 독립은 독립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223)

[11] "조국의 독립이라는 절대 절명의 대명제 아래 항일투쟁에 뜨거운 피를 뿌려 식혀 가며 몸을 불사른 혁혁한 이름의 투사들에서부터 성명 삼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 이름모를 낯선 골짜기에서 항일이라는 돌덩이 하나만을 머리에 베고 숨을 거둔 무명열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장하고 엄숙한 숨은 뜻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의 이 순간이 있었을까? 이름이 났건 이름이 없건간에 그들의 의기와 그들의 피가 없었더라면 결코 8월 15일은 오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233)

[12] "토교로 돌아온 후 중경으로부터 전해 듣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안타깝고 가슴 답답한 이야기들이었다. 남쪽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의 앞잡이들을 그대로 관리로 임용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울분이 복받쳐 올랐다."(236)

[13] "불혹이라는 사십의 나이에 비로소 조국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조국의 이름으로 이역에서 산화한 이들을 동정호 물에 흘려보내면서 조국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달았다. 나는 아들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 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255)

[14] "간다. 돌아간다. 이제야 나 살던 산천에 간다. 전쟁난민이라고 미군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어떠랴. 돼지우리같은 엘에스티 난민선을 타면 어떠랴. 거룻배라도 좋다. 주낙배라도 좋다. 고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일엽편주인들 어떠랴. 우리는 난민이었고 거지떼였다. 그렇게 추방당했다."(265)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지만, 우리를 마중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쓸쓸한 귀국이었고, 참담한 귀향이었다."(269)

[15] "인간만사 새옹지마. 이 한마디는 아흔 살 가까이 살아온 내가 지금 늘 가슴 한켠에 품고 있는 말이다. 사람의 일이란 잘 되고 잘못되고를 따질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먼저 헤아려야 되지 않을까."(287)

[16] "백범은 갔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어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라고 말했던 백범은 갔다."(294)

[17] "6.25라는 거목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회한의 잔뿌리를 내려 박았다. 그리고 이 나라의 땅덩어리뿐만 아니라 사람과 정신마저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런 6.25는 내게 처참하거나 극악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슬그머니 성엄(남편)을 빼앗아 갔고, 맹랑하게 나를 한 달 동안 감옥에 집어 넣었었다. 그리고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315)

[18] "올해 들어서 갑자기 몸이고 정신이고 예전같지가 않으니 나이는 속일 수가 없는가 보다. 그래도 그나마 머리 속에 박혀 있고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길래 없는 글 재주며 부족한 소견으로 원고지를 메웠다."(323)

[19] "아범이 성엄의 일지와 사진들,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을 따로 정성들여 싸놓았다. 내가 내 손으로 들고 갈 것들이다. 성엄의 일지 안에는 시아버님을 비롯해서 임정에 몸 담았던 혁명투사들의 이름이 낱낱이 적혀 있다. 내가 본국을 드나들던 때의 기록도 빼놓지 않았다. 그 일지만큼은 내가 내 손으로 들고 갈 것이다."(325)

[20] "비록 셋방이었지만 집안의 흔적이 묻어나는 짐들을 차곡차곡 꾸리는 게 참 보기좋다. 나도 거들어야겠다. 이 아침에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싸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와 손녀에게 내 손길을 주어야겠다.

조국의 타오르는 아침을 맞게 될 그들에게."(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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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1-30 1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