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 사유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다
로제 폴 드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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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로제 드루아 지음 |  백선희 옮김 |  [책세상]

 

 

 

 

 

로제 드루아는 <일상에서 철학하기>, <사물들과 함께 하는 51가지 철학 체험>등과 같이 일반독자들이 철학에 친숙하게 다가갈 있도록 책을 작가이자 철학자라고 있다. 철학자라고 하면 사변적인 이야기로 책을 채우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로제 드루아는 그렇지 않은 같다. 장황하고 어렵게 글을 쓰곤 하는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과 달리 그의 글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철학책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철학에 부담없이 다가갈 있도록 안내하는 철학저술가로서 그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하다.

 

 

걷기와 철학하기의 유사성

머리만이 아닌 온몸으로 철학을 해보는 그만의 철학하기 방식은 결국 저자로하여금 우리의 가장 평범한 일상의 풍경으로 다시 눈을 돌려 우리 곁에 철학을 데려왔다. 바로 걷기와 철학을 함께 시도해보는 것이다. 드루아가 독자에게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볼 것을 권하는데, 바로 우리가 걷는다는 행위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주문이었다. 저자가 표현하는 걷기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추락하기로부터 걷기 행동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추락이 시작되다가 만회되고 다시 촉발되다가 모면되는”(106) 행위가 바로 걷기 행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발을 내딛고 몸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반대쪽 발이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지게 된다. 다른 발의 행동이 보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추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하나는 걷기의 메커니즘을 철학에 비유한다. 걷기와 철학은 항구적인 추락과 만회라는 유사한 움직임 속에 자리하고 있다. 생각은 어느 곳보다 철학의 훈련 속에서 스스로 붕괴될 위험을 촉발하며, 새로운 솟구침, 도약으로 자신에 저항하길 멈추지 않으며 나아간다.”(22)  결국 저자는 우리의 걷기와 철학하기가 무한히 균형을 잃었다가 되찾는 과정을 통해 나아가는 이라고 정리한다. 철학하기에서 균형을 깨는 계기는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이는 대상이나 사실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 내지는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가 철학하는 과정은 바로 사고의 요동, 의혹을 통해 기존의 가치를 뒤흔드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태가 걷기의 메커니즘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걷기는 철학자에겐 필수불가결한 도구이자 과정이라고 있고, 지구 위에서 이동하는 인간만의 유일무이한 특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로제 드루아는 걷기 그리고 철학하기의 풍경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서양을 넘나들며 걷기와 철학하기의 유비를 책에서 전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우리 인류가 이동 도구에 보다 의존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 영화 < 투더 퓨처>에서 미래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청소년들이 타고다니는 날으는 보드 모습과 유사한 풍경들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엿볼 있다. 불과 10 전만 해도 바퀴 하나 또는 달린 발판 이동기구, 또는 전동 자전거를 타고다니는 사람은 거의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심심치않게 도시의 한복판에서 이러한 이동기기들을 타고다니는 젊은이들을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번씩은 우리의 머나먼 미래 세대의 경우, 걷는 일을 잊게 되지나 않을까하는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로제 드루아도 분명 우리의 걷기가 우리 인류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요소로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 자신도 우리가 이상 걷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라고 단언 한다. “인간의 걷기가 점차 소멸하는 분명 모든 측면에서 인류의 소멸이 것이다.”(208)라고 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걷기행위를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중력에 저항하는 인류의 고유한 행동이라고 수도 있지 않을까. 인류가 지구의 표면에서 살아가고 있는 , 모든 인류는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없다. 하지만 인류는 발로도 서야하고, 중력에도 저항하는 방식으로서 다리를 단단한 대지 위에 버티고 서서 걷는 행동을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습득하게 되었다. 로제 드루아가 직립보행하는 인류는 걷기과정을 통해 생각하고 철학하는 일이 함께 발달해왔다고 보는 것처럼, 나는 인류가 중력에 저항하여 대지 위에 버티고 걷게됨으로써 의지(will)라는 것을 배로소 배울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된다. 바로 자신을 억누르는 무형의 존재에 대한 저항행위로서 인간이라는 개체가 스스로 의지를 발달할 있었던게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걷기란 인간이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고유한 속성이라는 드루아의 표현을 다시 확인할 수도 있다. 걷기의 리듬에 맞추어 우리의 사고도 진일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빠른 교통수단을 타고 순식간에 이동하는 현대인들에게 걷는 행위, 산책과 같은 일은 인류가 인간다움 비로소 회복할 있는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마져 해보게 된다. 우리에게 철학을 친숙하게 만들어준 로제 드루아의 책은 걷는행위 잃어가는 혹은 잊어가는 듯한 현대인들이 주목해보고 함께 사유의 풍경 걸어 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20면)
"인간은 걷기 시작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22면)
"걷기와 철학은 항구적인 추락과 만회라는 유사한 움직임 속에 자리하고 있다. 생각은 그 어느 곳보다 철학의 훈련 속에서 스스로 붕괴될 위험을 촉발하며, 새로운 솟구침, 새 도약으로 자신에 저항하길 멈추지 않으며 나아간다."

(23면)
"어떤 경우건, 생각하기와 걷기는 서로 닮았다. 생각 또한 불안정한 균형을 통해 나아간다. 무한히 균형을 잃었다가 되찾으면서 멀리 나아간다."

(106면)
"추락이 시작되다가 만회되고 다시 촉발되다가 모면되는..."
==> 인간의 직립보행이 지니는 고유한 속성의 표현

(107면)
"철학적 사유는 여러분이 지각하는 것, 그 명백한 사실을 불안정하게 흔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207면)
"걷는 모터는 자기 삶을 살 위험이, 일하는 모터처럼 돈을 벌어 오지 않을 위험이 있다."

(208면)
"인간의 걷기가 점차 소멸하는 건 분명 모든 측면에서 인류의 소멸이 될 것이다."

(210면)
"왜 여전히 걸을까? 인간의 여행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 한 발짝은 미미하나 길은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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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 테크놀로지와 기술제국 소련의 몰락
로렌 R. 그레이엄 지음, 최형섭 옮김 / 역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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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과도 같은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읽은 책을 덮으며 서서히 떠오른 것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 도시 이야기> 문장이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찰스 디킨스 < 도시 이야기> 에서 인용

 이율배반적인 삶의 역설과,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인간 사회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문구를 떠올리며, 아마도 문장은 인류가 존재하는 어느 시대이든 진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미국의 역사학자가 냉전이 한창이던 60년대 초반 미국 최초로 구소련에 교환학생으로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이후 관심을 갖게된 소련 엔지니어의 삶과 스탈린 치하의 사회상을 추적한 기록이다. 저자가 관심을 갖고 추적한 사람은 표트르 팔친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구소련 엔지니어이다. 그는 1875 10 05,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42 전에 태어나 1929 5 54세의 나이에 산업당 사건이라는 역사의 사건을 통해 다른 엔지니어들과 함께 소비에트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숙청당했다. 책의 저자는 처음 팔친스키와 관련된 정보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를 통해 폐쇄적이던 구소련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팔친스키는 어떤 사람이었나

 

표트르 팔친스키는 평범한 가정의 12 형제 장남으로 태어나 이혼한 어머니 슬하에서 어머니가 운영하던 도서관의 책을 많이 접할 있었던 환경에서 자랐다. 장남으로서 사실상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력으로 엘리트 공대에 입학해서도 생활비를 벌기위해 다른 부유한 동급생과 달리 다양한 일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엔지니어로서 정치와 예술에 또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에 이끌려 온건적인 아나키스트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과도 교류를 했다. 러시아 혁명 당시 급진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여 스탈린이 집권한 20년대 이후 소련 공산당과의 마찰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다만 팔친스키의 경우, 지도자급의 엔지니어로서 글쓰기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한 행동을 통해 체포와 석방을 여러 반복하는 경험을 했다. 아마도 작가 디킨스가 자신의 소설에서 묘사한 인간 사회의 극한 진실을 팔친스키는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팔친스키의 엔지니어링 철학을 인간적 엔지니어링으로 간결하게 요약한다. ‘기술과 노동자 모두 최적의 상태여야 한다라는 팔친스키의 주장이 보여주듯 기술 대한 신뢰와 더불어 인간으로서 노동자의 삶의 조건 주목한 점에 주목해야한다. 소련의 중앙집중식 프로젝트에서도 엔지니어의 의사 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필요가 충족된 상태를 의미했다. 인간의 요소는 나아가 인간을 위한 사회정의 기술과 동시에 고려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기술은 인간의 삶의 질을 고양하는데 활용되어야한다는 가치에 충실한 철학인 셈이다. 당대에 국가 주도의 소련 산업구조 속에서 개별 인간에 대한 가치를 중요한 요소로 고려했다는 점은 현대의 고도 산업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편 팔친스키의 엔지니어링 철학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경험들을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꾸준히 제공하고 있다. 분명 다른 많은 당대의 엔지니어들과 다른 폭넓은 식견과 인간의 가치를 주목할 있게 배경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족도서관에서 경험한 독서체험, 그리고 성장해서는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성공한 산업 컨설턴트로 일하며 다양한 삶의 양식과 문화를 접한 경험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울러 엔지니어로서의 전문지식 뿐만 아니라 정치와 예술에 관심을 갖고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있었던 인문적 교양 형성의 결과가 아닐까.

 

 

 

【스탈린 치하의 사회변화와 엔지니어의 역할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이 집권을 이후, 숱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지던 20년대 후반 유능하지만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팔친스키는 스탈린에게 거슬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특히나 현재의 시각으로 인문적 교양 지닌 팔친스키는 자신의 비판적인 시각을 글쓰기로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후 팔친스키는 스탈린의 비밀경찰에 납치되어 20년대 후반, 비밀리에 숙청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팔친스키의 숙청과 관련한 산업당 사건 스탈린 치하의 폭압적인 정부아래 어떻게 지식인들이 억압을 받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사례가 된다. 팔친스키의 체포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묘사해놓았다고 하니 이후에 보다 자세한 면모를 구소련체제 내에서 바라본 지식인의 시각으로 살펴볼 있을 것이다. 시기에 많은 지식인과 정적이 숙청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도 고통을 받게된다. 30년대에 우즈베키스탄 등의 황무지로 강제이송당한 고려인들의 기억은 팔친스키가 처형당한 이후, 구소련의 암울한 시기와 병치되고 있음도 상기해볼 있다. 

 

팔친스키가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 인하여 숙청된 이후, 스탈린은 본격적으로 엔지니어들을 생각하지 않는기술자들로 만드는 국가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스탈린 시대에 비로소 엔지니어의 인문 교양의 습득 전통이 소멸해버린 것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과정이었다. <타임머신> 작가 H. G. 웰스 스탈린을 인터뷰한 아래 대목에서 스탈린의 생각을 보다 분명히 느낄 있다.

생산 조직가인 엔지니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받은 대로 따라야 한다. (…) 기술 지식 계급이 독립적 역할을 있다고 생각해서는 것이다.

(84, Bailes, <Technology and Society>에서 재인용)

 

더욱 경악스러운 부분은 스탈린 집권 이후 엔지니어 양성과정이 지나친 전공 세분화라는 특징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계 공학 전공엔지니어가 아니라, 기계 종류별 압축기 담당 엔지니어를 양성한다던지, 구리와 구리합금을 다루는 전문가가 별개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저자가 모스크바에 자료조사차 갔을 , 근교에서 만난 여성 엔지니어가 자신을 제지공장 볼베어링엔지니어라고 소개한 상황을 믿기지 않는 듯이 묘사한 대목도 이런 소련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스탈린의 목표대로 과도한 전공 세분화는 팔친스키와 같은 생각할줄 아는엔지니어가 아닌 거대한 전체의 부속품으로 기능하는 기술자를 양성해내었다. 저자는 스탈린이 뿌린 이러한 씨앗의 재앙이 여전히 팔친스키의 유령으로 소련 내에 출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스탈린의 중앙집중식 산업화 방식은 기본적으로 이전의 레닌이 도입한 미국식 산업경영기법 (포드주의 테일러주의 기반한 경영방식) 결합되어 이루어졌다고 이해해볼 있겠다. 시기의 사회 건설 실험은 노동자를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기계 부속품으로 만들어 효율성(생산성)만을 추구하게 하는 강력한 추동을 제공했다. 나아가 금융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여기에서 나아가 인간이 하나의 상품으로,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버렸음을 상기해볼 있을 것이다. 

 

스탈린이 성취(?) 중앙집중식 산업화의 사례를 가지 떠오려보자면, 나는 백해운하 건설 프로젝트 예로 들어보겠다. 발트해-백해를 잇는 운하 건설은 스탈린 치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선전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이면은 참혹한 진실이 가려져 있었다. 백해운하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는 거의 대부분인 정치범인 죄수들이었기에, 이들의 인권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듯하다. 표트르 팔친스키와 동료 엔지니어들이 제시한 엔지니어링 원칙이 철저히 무시되었고, 폭압적으로 인권이 유린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2 미만의 공사기간 동안 20만명이 사망하여, 매달 평균 명씩 사망한 참혹한 프로젝트였다. 이것이 스탈린식 산업화와 사회주의의 진실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전문가/엔지니어들이 정치적 폭압으로 인하여 전문가로서의 소견 표명의 기회를 포기하거나 차단되는 경우, 또는 폭압적인 정치체계나 정치가들의 견해에 심지어 동조하게 되는 경우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생각하는엔지니어의 역할로서 팔친스키는 어떤 국가의 프로젝트에 대한 결정을 , 경제적·사회적·윤리적 관점 포괄적으로 검토를 거쳐야하며 특히 산업에서 노동자와 지역주민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주장한 팔친스키의 유령은 국내에서도 여기 저기 출몰하고 있다. 4대강 사업, 제주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 건설과정이나 밀양 송전탑 건설, 그리고 성주 사드 배치 과정 등을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인간, 특히 지역 주민을 고려한 사회 정의는 아예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알아볼 있다. 특히 지역주민이 완전히 배제된 의사결정 과정과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윤리적 관점 등에서 검토되지 않고 성급하게 결정된 엔지니어링이 초래하는 대가는 우리의 후손들이 짊어지고 부담이 것이다. 과연 무엇을 위한 건설이었나? 결국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졸속 국가 프로젝트의 엔지니어링 양상은 스탈린의 무리한 중앙집중식 산업화 방식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찾기 힘들다.

 

 

 

 

 【책을 덮으며】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나에게 하나의 주제를 던져주었다. 인간이라는 요소가 배제된 기술 어떤 결과를 초래할 있는가? 그리고 생각하는엔지니어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당당히 말할 없는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있는가?하는 주제들이다. 그리고 나는 주제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모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다. 팔친스키가 엔지니어들은 정치와 경제를 반드시 알아야한다는 점과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 오늘날의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인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에서 타당하다고 본다. 과학기술인은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면 안되는가? 과학기술인들도 역시 정치들과 마찬가지로 국민이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있는 사회가 더욱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스탈린 치하 국가 주도의 거대한 실험은 분명히 실패했다. 하지만 사실이 행여나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일방적 우월이라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물론 저자는 서문에서 책은 소련이 근대 산업국가가 되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언급하듯 국가의 지원을 받는 프로그램의 수혜자로서 입장을 대변하는 언급하고 있다. 부분은 물론 거슬리긴 하지만 나는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통해 스탈린 치하의 사회상을 잠시 살펴볼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동조하는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결국은 정치적 숙청을 당한 팔친스키의 삶과 당대의 사회상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음을 상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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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작은 도덕경 - 하루 한 장 나를 깨우는 지혜의 말
노자 지음, 오강남 옮김 / 현암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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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작은 도덕경

노자 지음 | 오강남 풀이 | 현암사

 

 

 

     매일 아침 들어찬 도시의 지하철 안에서기회가 때마다 <작은 도덕경> 꺼내 보았다. 노자가 지었다고 알려진 <도덕경> 많이 들어보았으나 실제로 한줄도 읽어보지는 못했던 차였다. 실제로 도덕경은 짤막한 아포리즘 또는 싯구와도 같은 문구가 81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매우 짧은 책이다. 책을 옮긴 오강남 교수의 언급대로 글자만을 따라가면 시간에도 읽어낼 있으나, 사람에 따라 평생을 읽을 수도 있다는 오묘한 책이다.

 

 

 

     포켓판 <도덕경> 한자 원문을 비롯하여 한글 번역본과 영문 번역 본을 모두 수독하되 해석 집어넣지 않은 말그대로 원전의 텍스트만을 담았다. 나처럼 처음 도덕경을 읽은 사람들에게 처음 읽는 경우,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듯한 장은 아마 20%정도는 되지 않을까 한다. 나머지는  알쏭달쏭한 내용이 많다. 더구나 옮긴이의 풀이 없기에,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우선 역자의 풀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을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힌다. 대신 독자가 적극적으로 노자가 남긴 문구의 진의를 파악하기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야하는 같다. 그래도 들어찬 아침 지하철에서 이따금 공감이 가는 <도덕경> 문구를 만나게 되면 반갑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무디어집니다.”(9, 42)

 

 

칼날을 너무 날카롭게 벼리면, 쉽게 무디어지는 약점을 가지거나 의도하지 않게 사람을 다치게 하기 쉽다. 무언가에 대한 집착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해주고, 극단에의 집착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아닐까 나는 지하철에서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중용 어떤 상황이나 입장의 기계적인 가운데 의미한다고 피상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내가 생각해본 중용 모습은 극단을 피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중용의 모습이 어떤 이에게는 일종의 기회주의자로서의 면모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회주의자 자세와 중용 자세는 사뭇 다르다. ‘기회주의 특정 주체에게 유리한 상황을 취하는 것이라면 중용 자세는 상생을 위한 것이다. 흔들거리는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손에 <작은 도덕경> 풀이가 없기에 어쩌면 나만의 창조적인 오독 허용한다. 내가 떠올린 중용 덕은 어느 극단으로 부터 일종의 거리두기 통해 어느 쪽이든 자신의 오롯한 비판능력으로 바라보는 자세를 의미하지 않을까. ‘상생을 위한 이라는 의미는 어느 쪽이든 양쪽을 차별없이 고려하여 보다 합리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에서 만난 풀이 없는 <도덕경> 문구는 나를 빈번히 옆갤로 새도록 한다. 창조적인 오독 허용하고, 또다시 새로운 생각의 고리를 만들어준다. 어쩌면 내가 <도덕경> 이전에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나만의 소요(逍遙)하기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도덕경> 저자가 바로 노자가 맞다고 한다면 노자는 대단한 자연관찰가로 보인다. 자연으로부터 거침이 없는지혜를 읽어내기 때문이다. 노자는 물이 아래로 향하는 특성에 낮춤(겸손) 지혜 이야기하고, 자연의 맑음과 고요를 추구한다. 자연의 지혜를 추구하므로 인간이 정해둔 인위적인 모든 것을 비판한다. 특히나 인위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또한 유가의 가르침인 듯하다. 유가의 가르침인 (), (), () 등을 언급하며 비판하는 대목도 보인다.

 

 

 

 

대도(大道) 폐하면 ()이니 () 하는 것이 나서고,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면 엄청난 위선이 만연하게 됩니다.

가족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면 () () 하는 것이 나서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신이 생겨납니다.  - 18(68)

 

 

 

     우리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인 인과 , 효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함을 반증한다. 지하철을 타면서 차량의 끝에 지정해둔 교통약자 배려석 우리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규칙이다. 결국 과거와는 달리 우리 사회가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가 그만큼 사라졌기에 인위적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교통약자 배려할 정도로 성숙한 사회가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양보와 배려의 미덕 사라지는 것이 이유라고 지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가끔씩 지하철에서 있는 교통약자 노인들이 교통약자 배려석 앉은 젊은이들에게 폭언 심지어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있는데, 노자는 우리 사회의 이러한 인위성을 바라보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풀이를 아직 읽어보진 못했으므로 분명히 상당한 정도의 오독이 이미 행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경> 주석서가 중국에만 1500권이 있다는 사실도 그만큼의 다양한 오독 이루어진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풍부한 오독의 가능성은 책에 나오는 말의 아낌 더욱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비우므로서 더욱 풍성해지는 이치를 <도덕경> 스스로 증명해내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간결한 지혜의 보고인 <도덕경> 서양에 영향을 미친 것은 혹시 후기 현대사회의 미니멀리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스스로 자족할 알고, 지나치지 않으며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의식하는 , 자연의 지혜를 배우는 노자의 가르침은 어쩌면 점점 비대해지고 극단으로 치우쳐가는 도시의 , 신자본주의 속에서 소진되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언제든 다시 되돌아 있는 가르침이 있을 것이다.

 

 

     책장 넘기기 힘든 아침 지하철에서 조그만 책을 꺼내들고 읽어가는 동안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옆길로 새기를 반복한다. 어떨 때는 모호하여 전혀 와닿지도 않는 문장들이 다음 다시 되돌아가면 이해가될 듯도 하다. 페이지를 들고서도 출근 내내 이해가 안되는 경우도 있다. 나도 물의 지혜를 떠올리고 나를 낮춘다. 모르면 돌아가기. 다시 <도덕경> 펼치게 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것이므로, 나의 무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편하게 읽게 된다. 천천히 책을 읽게 데에도 <도덕경> 다시금 일러준 지혜다. 여러 읽어도 모든 문구나 내용이 내게 와닿거나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삶의 경험치가 하나 쌓이면서 내게 와닿는 문장들이 하나 늘어갈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러면 나의 삶도 그만큼 산책하듯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나는 다시 내일 출근용 가방에 <작은 도덕경> 찾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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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91년 5월투쟁과 김은국의 《순교자》로 본 정치.죽음.진실
강정인 지음 / 책세상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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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91 5월투쟁과 김은국의 <순교자> 정치죽음진실

강정인 지음 | 책세상

 

 

[1]

        인생에 있어 삶과 죽음은 결국 하나의 실체/진실을 이룬다. 생명을 가진 개체에게 죽음은 삶의 종착점이자 완성이라 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실존적으로 배태되어 있으며 삶이란 끊임없는 그리고 점진적인 죽음에의 굴복과정이다.”(64)

 

      정치철학서 권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굳이 삶과 죽음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강정인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정치과정이 죽음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언급한 책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인간이라는 심연>, 성염 2), 인간이 나이가 들어 죽음에 더욱 다가갈수록, 인간의 삶에 진지함이 더해짐에는 누구나 공감할 있을것이다. 저자는 정치권력의 기원에 폭력과 죽음은 본질적으로 잠복해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정치와 죽음과의 밀접한 관계는 현재 대한민국사회라는 현장에서 예외일 없다.

 

      저자는 지난  30여 년간의 대한민국 정치현장에서 진실 죽음관계 또한 헐거워진것으로 표현하는, 이것은 그동안 대한민국 정치 의식과 수준이 향상되어 죽음이미지가 약해졌다는 의미보다는 정치권력이 정치와 관련된 죽음 탈정치화꾀하고 있기때문으로 해석된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현대의 정치적 거짓말들은 '원래 비밀이 아닌,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들'다룬다."(144)라고 언급하기도 것처럼, 오늘날 ‘(정치)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하기는 하나의 국가통치술이 되어가고있다’(145, 주석11)있다. 150수준으로 인간 최초의 정치집단을 상정하고, 이들이 강한 결속력을 가질 있게 한 매개체로서 신화, 이야기, 상상력을 이야기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정치적공동체란 진리가 아니라 합의에의해 결속력이 유지된다’(166)언급한 셸던 월린의 주장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있다.  

 

      크게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책에서는 우선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1987 6월 항쟁에 비해 종종 망각된 1991 5월투쟁을 시작으로 정치와 죽음과의 관계를 고찰한다. 91 5월투쟁은  시위도중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군이 전경들의 구타에 숨지는 사건으로 촉발된다.  그리고 박승희를 비롯하여 이어지는 청년들의 분신으로 사태가 더욱 심각해져가는 상황에서 검찰의 주도하에 꾸며진 김기설 유서대필논쟁/사건김지하,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의 자살방조배후설’, 그리고 정원식총리 서리의 봉변사건등의 사태로 인하여 당시 운동권세력이 와해되어버린 투쟁이다.

 

      저자 강정인 교수는 현상적으로 실패한’ 91 5월투쟁이 안목에서 실패한 투쟁이 아니라  87 6월항쟁 이후에도 지속된 반민중적반민주적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행위였음을 주지하고 있다. 특히 책에언급된 91 5월투쟁의 소멸에 사회지도층(검찰, 김지하, 박홍 신부)   보수언론이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할 있었는지를 있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사례로 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저술한 <사법부>에서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민낯을 공개하고 있는데, 책의  말미에보면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김기설 유서대필사건대한 간략한 평가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홍구 교수는 사건을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하며, ‘과거에는 정권핵심이나 안기부가 기획한 사건을 검찰이 법률적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면 이제는 검찰이 전면에 나서서 정권의 위기를 돌파했다라고 사건의 본질을 전하고 있다. 사건은  검찰이 권력의 하인/머슴 역할을 자처사례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김기설 유서대필사건한국판 드레퓌스사건으로 규정되는 것도 수긍할만한 해석이라 있다.

 

[2] 

     5월투쟁이 넓은 의미의 정치적 개념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사 창조에 개입, 참여함으로써 공동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활동과정에서 본질적으로잠복해 있는 죽음 진실관계를 풀어나갔다면, 번째 부분에서는 정치와 종교적 진실사이의 관계로 관심을 제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재미교포작가 김은국이 1964출간한 소설  <순교자 The Martyred>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소설은 ‘6.25전쟁으로 많이 통용되는 한국전쟁배경으로하여,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희생된 12명의 목사에 관한 진실을 중심으로 다루고있다. 번째 장은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에서 상당히 흥미를 갖게된 부분인데, 작가의 소설 이전에 작가 김은국에 관한 관심 때문이다.

 

      김은국 작가는 대학에 입학한지 달만에 한국전쟁’(1950)발발하여, 자원 군입대한  55년까지 복무하다가 도미하여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학사를 졸업하고 작가워크숍등록, 글쓰기 훈련을 보다 본격적으로하며, 자신의 번째 소설이자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준 <순교자>발표하면서, 영문학과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내가 대학생시절 인상깊게 읽고 좋아했던 인류학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번역한 장본인이 바로 김은국 작가였다는 사실, 나아가 이범선의 <오발탄>영역했다는 사실도 작가를 다시 보게한 계기가 되었다.

     <순교자>에서 재확인 할 있는 점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구분한 가지 진실-합리적진리사실적진실-중에서 정치권력에 의해 쉽게 왜곡이 가능한 사실적진실취약성이었다. 점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의 정치공학적 전략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부분이기도하다. 이러한 실례는 앞서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했던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에서 다시 떠올려볼 있다강정인 교수는 <순교자>에서 드러나는 사실적 진실왜곡 문제와 1장에서 언급한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연결지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하기는 전쟁때나 혁명기 뿐만아니라 정권의 정당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집권세력이 이른바 국면전환위해 흔히 사용하는 국가통치술이 되어가고 있다.”(145)

      우리가 좀더 실감할 있는 예로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등장할 있었던 ,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있었던 것을 상기해볼 있다. 이러한 실례들은 집단으로서의 정치적 공동체가 분명한 진리보다는 합의에 의해 결속력이 유지된다월린의 지적을 돌이켜볼 수긍할 있는 사례이다. 집단,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결속이 허구로서의 신화에 의존한다는 통찰은 강정인 교수의 <순교자> 분석을 통해 보다 주의깊게 들여다볼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3]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는 내용은 미국 반전(反戰)영화관한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미국의 반전영화가 과연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것인지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서구의 동일자중심의세계관과 이를 착실히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의 서구중심주의지적하고있다. 장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의 반전영화 <디어헌터>, <플래툰>, <지옥의묵시록>, <7 4일생> 등은 내가 학창시절에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인데, 저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서구중심주의시각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주로 베트남전과 관련하여 등장한 반전영화들이 사실은 미국인(주로 백인)인명피해에만 주로 관심을 갖고 있을 , 베트남인들은 미국의 아들 딸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미개인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보다 정제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미국 반전영화의 베트남인들은 미국인 영화관람자의 지배적 의식속에서 비인간화(타자화) 되어버린다.”(190)

      미국 반전영화에서 드러나는 시각은 과거에 제작된 카우보이영화시각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미국역사의 주체는 백인 이민자들로서  규정되고 있으며, 저자가 아메리카인디언으로 부르는 미국 원주민들은 미국사의 객체나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의 시각에서는 미국의 반전영화도 람보시리즈와 다름없이 서부활극다름아니다.

미국의 반전영화는 전쟁동기의 타당성이 아닌 수행방식의 타당성에 의거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있다. 또한 전쟁방식을 제한하는 움직임도 상대방의 피해는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피해만을 고려한 결과로,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낼 뿐이다.”(192)

점에서 미국의 반전운동은 일관성있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원칙론적 반전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중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있는 최대공약수로서의 우리의 피해방지호소하는, 집단이기주의의 발로였다. 결국 이러한 반전운동이 대중적 성공을 거둠에 따라 어떤 면에서는 성공보다도 중요한 반전의 윤리적, 원칙적 의미는 퇴색하게 되었고, 집단이기주의의 형태인 공리주의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196)     

 

      이러한 시각은 최근 유럽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테러사건들에서도 확인할 있다. 다시말해 서방국가의 무고한 시민들이 겪은 희생에는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비서방국가들의 시민들이 겪는 희생에 우리는 동일한 애도를 보였는지 자문해볼 있다. 과연 그런가? 미국의  2001 9·11사건이후, 미국내에 거주하는 무슬림 대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수년 드러나 언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미국은 여러 인종이 서로 융합되는(melting pot)아니라 여전히 백인들만의 왕국이었음은 저자가 언급한 반전영화의 사례로 다시금 확인할 있다.

      책의 군데에서 저자가 본인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단정적인 표현들은 과연 그럴까라는 의구심을 갖게하는 표현들이 간혹 나온다. 이런 부분은 자신감의 발로일 수는 있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바라보고 결론을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들은 미미하지만 지적해볼 수 있겠다. 이런 가지 점들을 제외하면 미국의 반전영화를 중심으로 우리 안의 서구중심적 가치관지적하고 있는 3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흔히 걸프전으로 불리는 미국-이라크전당시 학생으로서 나는 부끄럽지만 미국의 첨단무기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는상당히 열중했던 일을 상기해 본다. 이번 독서는 어린 나에게 이미 내면화되어있던 강자의 세계관안으로부터 꺼내어 살펴보게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저자가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에 대해 미국내 반응이 정반대였던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던지는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분명히 뚜렷한 명분을 갖지 못하고, 밀림에서 보이지 않는적을 제거해야 했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서는 버튼 하나로 목표물을 공격하는 첨단무기의 실험장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모호한 주적을 대상으로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는 후세인이라는 분명한 미국의()상정되어 있던 점도 무시할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걸프전의 경우는 보다 컴퓨터게임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후세인은 게임에서 물리쳐 제거해야하는 난이도 높은 으로서 드러나고, 전쟁을 질질끌면서 미국의 아들딸들의 희생을 증가시키는 보다는 백악관에서 버튼 하나로 미군의 희생을 최소로하면서 단기간에 전쟁을 끌어나갈있었던 것도 반전(反戰)여론의 반전(反轉)현상에 영향을 것으로 이해할 있다. 걸프전은 게임적요소로서 화면을 통해 재구성되는진실은 베트남전과는 달리 피해자(희생자)들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희생자들의 고통에 더욱 둔감해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세력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인다. 베트남전쟁을통해 배운 교훈을 다양한 각도에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은 걸프전 이후 미국내 전쟁에 대한 여론이 진실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가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미국의 정치세력이 주력하는 바는 구성원들의 비판적 기능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으로 진리/진실’ – ‘정치’ – ‘죽음상호관계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책을 읽으며 메모해둔 것들, 책을 덮고 옆길로 새며 끄적거렸던 나의 생각들을 모아보았다. 저자의 여러 학술논문을 다듬고 정리한 책은 정치철학서로서 이해할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찰하지 않는 삶은 무가치하다라고까지 언급했던 플라톤의 통찰처럼 책은 참다운살기 위한 통찰을 주고. 삶의 대척점을 이루는 죽음은 책의 전체를 통해 언급되고 있으며, 죽음우리에게 삶을 제대로 살도록 절실하게 요구한다. ‘참다운대한 기준은 매우 개별적일 것이다. ‘죽음각자에게 매우 개별적인 현상인 것처럼 말이다. 중세 판화가이자 화가였던 알프레드 뒤러의 그림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지도(화가 홀데인의 그림 버전)숨어있는 두개골(죽음)이미지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죽음문제는 인류생존의 문제와 떨어질 없는 본질적인 인간의 조건이기도하. 나는 책을 저자의 참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흔적이라고 하겠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정치세계에서 진리/진실의 지위는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듯하다.’(8)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초래되는 죽음왜곡된 진실앞에서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정치와 진실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동인은 죽음염두해둔 참다운대한 욕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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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7
문성원 지음 / 현암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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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문성원 지음 | 현암사

 

 

 철학은 어렵다. 하지만 어려울 것일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해본 없는 사고의 근육 써야하기에 서투른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삶의 경험치가 늘어나면서 과거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수긍할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늘어난다. 철학도 마찬가지 것이다. 우리의 삶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나의 보잘것 없음을 느낌과 동시에 내게 익숙하지 않은 철학서를 만나도 조바심을 내지 않는 덤덤함이 생기는 것은 분명 나에게만 해당하는 점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읽게 <타자와 욕망> 다르지 않은 것같다. 책이 다루는 책은 나에게도 생소한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철학자의 1961 출간 서적이며 그의 번째 주저라고 불리는 <전체성과 무한>이다.  그리고 저자인 문성원 교수 또한 레비나스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원전을 읽고 저자의 관점에서 이해한 레비나스 것이므로 <타자의 욕망> 또한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을 있겠다. 너무 기대와 조바심은 잠시 제쳐두고 레비나스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선 궁금해진다. 인간이란 무릇 어느 특정 장소와 시기에 살았던 배경이라는 맥락을 제외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선 레비나스의 삶을 간단히 따라가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1906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집안(책방 운영)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10 후반인 1923년에 가족을 떠나 프랑스에서 철학공부(프랑스 철학, 후설의 현상학 ) 시작하게 되는데, 20세가 되는 1926 평생의 친구가 되는 작가이자 사상가인 모리스 블랑쇼를 만나게 된다. 70년에 가까운 지기를, 그것도 친구가 모두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거목을 오랜 친구로 지낸다는 것만 해도 크나큰 자산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후 레비나스는 1928 독일로 가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강의를 직접 듣게 된다. 철학의 거장은 레비나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라고 하며, 특히 하이데거는 레비나스에게 있어 거대한 존재이자 넘어야할 산이었다. 그만큼 평생을 하이데거의 영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유학시절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레비나스는 1933 프랑스 군인으로 2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한다.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하게 레비나스는 이후 전쟁을 통해 살아남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투아니아에 있던 남동생을 비롯한 가족이 나치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만다. 레비나스에게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지녀야만 했을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

 

나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한다.”(29)

레비나스의 말을 살펴보더라도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충격과 두려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에 응답해야 한다. 응답해야 함이 우리의 책임을 이룬다.”(28)

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강렬한 호소이자 부름이 아니었을까?

     레비나스의 저서에 대한 문성원 교수의 책만을 통독하고 레비나스의 철학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 위험한 일인 것을 안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그의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또한 얼마나 다양한 오독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신중하면서도 결국 스스로 나아가야하기에 대상을 제한하여 시도해보려고 한다.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28)

     나는 문장이 레비나스 철학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전제가 되지 않을까 감히생각해본다.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인정과 인식은 평범한 인간에게 하나의 크나큰 사건일 있을 것이다. 결국 서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에서도 결국 이웃’, 타자 나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레비나스는 그러한 서양 사상의 맥락에서 나와 타자의 접점(만남) 매개로 우리의 삶이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일게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 응답해야 한다. 응답해야 함이 우리의 책임을 이룬다.”(28)라는 레비나스의 언급은 어쩌면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호소이자 부름일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 나와 동일한 차원에 있지 않은 오히려 연약하고 헐벗은 ’(32)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성원 교수는 연약하고 헐벗은 원형으로서 예수를 언급하기도 한다. 바로 서양 사상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레비나스의 경우, 그는 20세기 초에 태어나 20세기 말에 사망하여, 20세기의 수많은 비극을 몸소 겪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에게 20세기 전반의 시기가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나치의 시대를 관통한 잔혹의 시기를 목도하고 경험한 레비나스가 타자 동일자 대해 우위와 우선성을 강조한 이유는 충분히 수긍할 있을 같다.

     동일자를 우선시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경향이 동일자적 내부에서는 가혹한 경쟁을, 동일자 외부에 대해서는 동일화에 따른 복속 아니면 배제와 제거라는 폭압을 낳았다는 것이다.”(34)    

     우수한 아리안들만의 국가 건설하려했던 나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집단의 전체주의적 특성과 타자 유대인에 대한 학살도 설명해줄 있는 진술이다. 레비나스에겐 아마도 남동생을 포함한 자신의 가족이 나치에게 할살당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절실히 묻고 대답을 구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인 문성원 교수는 이에 레비나르스를 읽을 놓쳐서는 안될 초점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타인을 살해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했던 20세기의 비극적 상황, 거기에 대해 하이데거의 철학을 위시한 당시까지의 철학이 무력하고 무책임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레비나스는 이유가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인간의 얼굴 대한 외면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53)

     레비나스는 인간의 얼굴을하고 호소하는 타자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당면과제이자 책임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윤리 존재 우선하는 1원리로 삼는다고 이해해볼 있다. 달리말하면 문성원 교수의 표현대로 레비나스의 철학은 자아중심적 한계성(동일자의 확장 욕구) 벗어나 타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이해할 있겠다. 좀더 순화하여 표현해보면 우리는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 레비나스는 중심 화두로 삼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 해석에 우선하는원리가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비나스에게 윤리 시대적 명령이자 호소였을 것이다. ‘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의미를 가질 터인데, 이는 저자가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색으로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 언급하는 근거가 된다고 있다. 이는 이성에 기반한 인식 이전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감성(감수성) 우위에 두는 인식이 먼저가 아니라 반응이 먼저다.”(28)라고 하는 표현에서도 재확인되고 있다.

 

 

영화 샤인 Shine’에서 보이는 타자’, ‘환대’, 그리고 동일자의 확장

    며칠 국내에 개봉한 20년이 영화 샤인 어느 극장에서 다시 보면서 레비나스 철학의 기본 개념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는 오스트리아의 어느 구역에 살았던 유대인 가족(헬프갓 가족)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다음에 일은 우승하는 일이다.라는 신념에 가까운 고집으로 아들 데이비드의 피아노를 가르치는 아버지 피터는 레비나스가 사용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동일자의 확장 꾀하는 존재이다. 피터의 이러한 고집은 영화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유럽에 사는 20세기 초의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그림자와 이로부터 생존한 정황을 암시하고 있다. 고집스러운 아버지의 신념과 절박한 생존본능 그리고 음악을 하지 못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오랜 결핍으로 인한 욕망을 아들에게 폭력적으로 투사하면서 문제는 생겨난다. 자신의 욕망을 아들에게 투사하며 유지되는 아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는 동일자를 우선시하는 역학관계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주인공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아들에게 결국 동일화에 대한 복속을 강요하며, 이에 따르지 않고 런던의 영국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가버린 아들에 대한 배제와 제거의 기작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틈날 때마다 자신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없음을 주지시키는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명목상 안정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전지대 놓이지 못한 아들(타자)’에게 동일자의 폭력은 아들에게 있어 죄책감과 수치심을 평생토록 유발하며 트라우마를 남긴다. 우리 사회의 인간 관계, 특히 안락하게 보이는 가족이라는 제도와 테두리 속에서 유지되는 건강하지 못한 인간관계가 있는 파괴적인 결과의 모습을 찾아볼 있을것이다.

안정과 안락을 위해 쳐진 테두리들이 배타적인 것으로 공고해질 동일자의 폭력은 일반적인 것이 된다.”(36)     

   책의 저자인 문성원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 또는 예방할 있는 윤리로서 환대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환대에 대해 칸트가 사용한 조건적, 계산적 환대 비해 레비나스의 환대 무조건적 환대임을 구분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타자가 이방인이고 헐벗은 자이기에 호소에 응답하여 타자를 환대할 따름이다.’(37)라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운데서 인간성의 극적인 스펙트럼을 목격한 철학자로서 레비나스의 생애를 책을 통해 이해하고나니, 이런 무조건적인 환대의 호소를 조금은 수긍하게 된다.

     영화 샤인에서 아버지라는 울타리로부터 배제된 주인공 데이비드는 정신병원에서 일정기간 보낸 병원에 방문한 과거 데이비드의 팬의 도움으로 병원을 나오게 된다. 어느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다가 들어간 레스토랑으로부터 받은 환대 데이비드에게 새로운 삶을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데이비드를 옆에서 돌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데이비드의 재능을 알아보고 인간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은 어떤 점에서 보면 무조건적인 환대 행위를 실천한 사람들이 아닌가. 데이비드가 중년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되고, 다시 재기하여 연주무대에 서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감동을 주는 같다. 있을 법하지 않은 실화에 바탕을 타자에게 마음이 따뜻한 이들이 제공한 무조건적인 환대 새로운 사람의 삶을 꽃피게 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돌아볼 , 있을 법하지 않은 환대행위가 가능했다는 데에 더욱 감명을 받게 되었다. 

 

책을 덮으며

    문성원 교수의 <타자와 욕망> 읽으며 처음으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에 조금 가까워진 같다. 책을 읽으며 순간 순간 들었던 느낌과 불안정한 나의 이해를 다시 돌이켜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자아중심적 한계성(동일자의 확장 욕구)’ 벗어나 타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이해할 있다. 달리 표현해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 고찰하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하는 것과 구분지어 타자와의 관계에서 고려되는 윤리 전통적인 철학에서 중요시되는 존재론 앞선다는 것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 해석에 우선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 윤리 시대적 명령이자 호소였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피할 없는 책임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달리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호소한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라는 존재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여기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다시 분명히 일깨워주는 철학이다. 내가 이해한 바가 틀리지 않다면 문성원 교수도 책에서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색으로서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 언급하는 대목이 바로 점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책을 다시 덮으며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 지나쳐버린 페이지의 문구를 다시 음미하면서 마무리하겠다. 우리의 삶이 신자유주의적인 맥락에서 더욱 공고히 파편화, 원자화되어가는 지금, 각자의 가슴에 심어볼 만한 씨앗으로서 레비나스의 호소를 기억해둘만하지 않을까.

 

우리가 알고 가진 것이

바깥의 무한과 닿아 있음을 깨닫고

타자성과 외재성에 귀를 기울이는 욕망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욕망의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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