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 시인, 호색한, 전쟁광 걸작 논픽션 15
루시 휴스핼릿 지음, 장문석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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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시인, 호색한, 전쟁광》

(원제: The Pike: Gabrielle D’annunzio, Poet, Seducer, and Preacher of War)

루시 휴스핼릿(Lucy Hughes-Hallett) 지음 | 장문석 옮김 | [글항아리]

 

 

 

 

 

 

[1] 단눈치오는 어떤 사람인가?

 

사람의 이면을 온전히 글로 묘사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단눈치오와 같은 인물에게 가지 키워드 만으로 인물을 특정짓는다는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한다. 단눈치오는 17 시인으로 자신을 먼저 세상에 내놓았다. 단테, 페트라르카, 레오파르디를 위대한 이탈리아의 시인으로 꼽았던 단눈치오는 16 이미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편지를 썼던 언어의 귀재이기도 했다. 반면 여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세상에 있는 모든 재화를 소비할 것처럼 게걸스럽게 가산을 탕진하며 인간으로서 누릴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한 사람이기도 했다.

 

저자는 단눈치오의 다채롭고 복잡한 명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는 성적으로 난잡한 연인이자 고급스런 탐미주의자, 호전적인 민족주의자, 이탈리아 건축물의 복원 캠페인에 나서는 호고주의자, 최초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창공으로 비상했을 뿐만 아니라 연대적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든 크고 소음이 심한 자동차를 타고 토스카나의 길들을 누빈 근대성의 찬미자였다.”(352)

 

진술에 단눈치오라는 인물의 가지 주요 특징이 간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타인의 제안에 거절을 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던 인물이 삶의 모험에는 불나방처럼 단호히 자신을 던져 넣는 모습은 자체로 매우 분열적이다. 저자는 부단하고 분열적이기까지 인물의 특징을 책에서 크게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자연과 신화를 서정적으로 노래하는안전한 단눈치오와 자신을 따르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세상을 피로 흠뻑 적시라고 요구하며 위험한 애국주의와 영광의 이상을 내세우고 강탈 행위의 서막을 열어젖힌위험한 전쟁광 단눈치오. 가지 상반된 페르소나는 분명 사람의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시기는 사람들에게 어느 노선을 취할 것인지 강요하곤 한다. 종교 전쟁에서는 신교의 편에 것인지 아니면 구교의 편에 것인지, 교황과 왕권의 대결에서는 교황의 편에 것인지 아니면 왕권을 지지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혹은 냉전의 시기에 자본주의의 편에 것인지, 공산주의의 편에 것인지를 개개인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단눈치오는 이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잠시 어느 노선을 지지한 적은 있어도, 어느 편의 선봉에 서서 이들의 명령을 받는 일은 거부했다. “내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나는 일용한 양식을 포기할 것이다.”(543) 단눈치오라는 인물은 이처럼 혼돈과 폭력의 세기에 스스로 특정 노선에 한정되지 않는 특이점으로서 끊임없이 부유했던 인물이었다. “나는 개인주의자이고 그렇게 남을 겁니다. 철저하고도 극단적으로 말이지요.”(342) 사회주의를 찬성했다가 이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 단눈치오는 본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어느 노선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단눈치오는 17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한 , 자신이 말을 타다 낙마해서 요절했다는 가짜뉴스를 익명으로 신문사에 투고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유명인사로 만드는 자기 홍보의 달인이기도 했다. 단눈치오가 피우메로 입성하여 권력을 잡은 가장 먼저 자신의 보도 부서 만든 일은 그에게 지극히 당연한 절차였다. 단눈치오에게 가장 우선하는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었다. 단눈치오의 행동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동인은 모든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구심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단눈치오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세심한 신경을 쓰거나 자신의 연인이 어떤 옷을 입는지 관여하고, 값비싼 여러 수집품들로 실내를 장식하는 행동을 이해할 있다. 나아가 단눈치오가 탐미주의자이면서 지극한 쾌락주의자였다는 저자의 평가 또한 수긍이 것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탁발승'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아. 그저 내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야."(824면)

단눈치오는 1년 남짓한 피우메 정부 시절 이후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의 마지막 은둔처 '비토리알레'에서 말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는 특히 무솔리니의 감시와 선물을 동시에 받게 된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지는 않는다. 반면 무솔리니는 단눈치오를 여러 번 방문하여 단눈치오가 무솔리니를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기위해 노력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러한 기회를 철저히 이용했다. 사실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단눈치오는 자신이 원하는 일이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유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는지 모른다. 단눈치오는 말년에 집에서 은둔한 채 44권에 달하는 전집 출간 작업을 하며 비교적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단눈치오는 비행기가 세상에 나온지 채 15년도 안된 시기에 이미 비행에 매료된 인물이기도 했다. 심지어 대공포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의 상공을 날아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선전물을 투하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일에 스스로 극적인 배역을 선택하여 맡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배역을 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어떤 욕구도 없었다. '삶이란 목표를 향해 던져져야 할 작살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오직 다음 번의 예정된 출격이었고, 그것만이 '전부'였다."(532면) 이 책의 원제 <The Pike>가 암시하듯,  '' 또는 '작살'의 이미지는 단눈치오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사 또는 궁수의 이미지)이자 본인 스스로를 창의 목표물(희생자) 곧 '순교자'(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이미지)로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 루시 휴스핼릿이 단눈치오에 대한 평전을 기획하면서 떠올린 주제 이미지가 바로 창과 순교자가 아닐까.

 

 

[2] 단눈치오의 시대

 

단눈치오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단눈치오가 태어나기 직전인 1861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공식 출범했다. 시기의 이탈리아는 통일 이탈리아에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구심점 중의 하나가 국왕을 중심으로 힘을 모을 있는 강력한 민족주의였다. 단눈치오가 젊은 시절 민족주의에 그토록 경도되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리발디의 추종자가 이탈리아가 위대한 민족으로서의 지위를 입증하려면 피의세례 필요하다 외쳤듯이 외곬수적인 민족주의는 구성원의 희생을 예비하며, 이들의 요구한다. 특히 19세기 , 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통해 이탈리아의 호전적인 민족주의가 힘을 크게 얻은 정황을 휴스핼릿은 묘사하고 있으며, 단눈치오의 시대에 나라 전체가‘거대한 전쟁’으로 향해가는 배경을 포착하여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단눈치오의 피우메 정부 시절 이후, 그리고 1 대전이 끝난 이탈리아 내부는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였다. 정부와 군대에 대한 분노와 불신으로 이탈리아는 분열 양상을 보였으며, 정치적 불안 증세가 심화되었다. 재정침체와 전쟁으로 국채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실업자가 넘쳐나던 국면이었다. 이렇게 사회가 아노미 상태에 있던 상황을 탈출할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것이 파시즘이었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할 있다. 파시즘의 지도자였던 인물 이탈로 발보의 견해에 따르면 파시즘은 전후 남은 분노를 표출할 대안적 출구를 제공하였으며, 이탈리아를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구했다”(635)라고 하며 파시즘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의 출현은 양상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파시즘과 나치즘이 공유한다. 독일의 경우도 1 대전 이후 국내 정치경제적 불안 요소가 만연해 있던 위기상황에서 국민들의 절망과 분노를 표출할 기회를 마련했다.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구현해내었듯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도 파시즘의 강령을 비롯한 많은 부분을 가져다 충실히 활용했다. 여기에서 나치와 파시스트들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단눈치오라는 사실이다.

 

책은 놀라운 초인’(비호감이긴 하지만) 일대기를 조명한 책이면서 동시에 인물이 살았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세계사의 부분도 함께 아우르고 있다. 단눈치오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세기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한 발달을 가져온 기술의 혜택을 받아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던시기였다. 기차를 타고 장거리를 여행하거나, 전신을 이용하며 대서양 너머로 소식을 전하고, 커다란 증기선을 이용하여 대서양을 건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여러 차례 미래주의 운동 주목하고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1902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는 프랑스의 < 피가로> 1면에  미래주의 선언 게재했다. 마리네티는 선언을 통해 새로운 세기를 열며 산업혁명의 성공적인 결과물, 특히  매끈한 금속, 강력한 기계,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강철 철로를 달리는 열차 속에서, 강물과 바닷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속에서, 그리고 노동과 부를 낳는 모든 기계 속에서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잉태되고 있다.(420) 미래주의자들의 이러한 표현들에서 퇴폐주의적이고 상징주의적인 움직임은 분명히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무모한 젊은이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마리네티가 단눈치오와 만날 있었던 접점 당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자동차와 비행기(모두 강력한 엔진과 빠른 속도를 상징한다) 대한 관심에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시대의 분위기와 정서는 많은 지식인들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셀 프루스트나 앙리 베르그송 등도 에어쇼를 보고 감명을 받거나 에어쇼를 보기위해 여행을 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미래주의자들의 주장을 보면 이들의 미래 산업혁명의 시대가 낳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발명-개념으로 이해된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비판은 있을지언정, 다가오지 않은 미래, 특히 인간이 이룩할 성취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느껴진다. 이러한 무모함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리네티가 피우메 시절 단눈치오 곁을 떠난 이유도 결국 사람이 생각하는 미래 접근하는 태도 또는 관점에 메워질 없는 간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눈치오는 자신의 영광 위해 오히려 지극히 철저하게 현재를 살고’, ‘현재에 집착했던인물이었다면, 마리네티는 단눈치오처럼 몽상가였지만 미래주의자들의 무모함과 산업기술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기술문명의 힘과 잠재성은 오히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보여주던 폭력성과 호전성에 부합했던 같다. 그러므로 분명 단눈치오와 마리네티 사이에 미래 보는 관점에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같다. 현실정치에 기반을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현재를 기반으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 있었다면, 단눈치오는 어쩌면 미래에 무관심한, 오로지 자신의 현재적 관심을 유지하고 현재를 향유하는데 보다 근본적인 관심이 있었던 같다. 물론 전쟁 정화 수단으로 보고 전쟁이 유럽의 위생학이라고 주장한 마리네티의 견해에 단눈치오는 분명히 공감을 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눈치오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우선 전제가 되어야하며, 이것이 마리네티의 공감을 얻지 못했을 같다.

 

19세기 후반 통일 이탈리아가 강력한 구심점을 민족주의로부터 구했다면, 20세기 들어 호전적인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평화를 지향하던 사회주의가 대척점에서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했던 같다. 저자 휴스헬릿은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라틴민족 우수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던 호전주의자들과, 신중하고 평화를 지향하던 사회주의자와의 대립이 심심치않게 존재하며 꿈틀대던 당대의 이탈리아를 세심하게 그려내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민족주의 사회주의의 대립 구도는 급속하게 균형을 잃게 된다. 파시스트 정권은 공갈협박과 폭력을 통해 통해 등장하여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제거하며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황도 분명히 확인할 있었다.

 

단눈치오가 살았던 시대는‘조국’이라는 절대 기호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하여금 개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19세기가 낳은 신낭만주의 성향의 젊은 시인이 점차 민주주의 정부에 도전하는 급진주의적 우파 반란선동가로 변모하는 모습을 묘사해내고 있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당대의 사회와 시대 속에서 만들어지기마련이다. 모든 인간은 이들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피우메 정부 시절 단눈치오가 기초했던 정치 조직의 모든 면모를 철저히 표절했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단눈치오를 예수의 등장을 알린 세례자 요한처럼 파시즘의 메시아로 만들어 놓았다. 예수의 잉태를 수태고지한 천사 가브리엘의 이름을 지닌 단눈치오는 파시즘의 잉태를 수태고지한 인물로도 이용된 셈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를 성실히 참고한 히틀러의 나치 정권 또한 단눈치오가 의도치 않게 만들어둔 문화의 착실한 수혜자였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로 통용되는 홀로코스트 사실 유대교에서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에게 바치는 번제 의미했다. 단눈치오의 문학적 상상력은 자신의 피우메 시절 피우메를 가장 아름다운 번제(holocaust) 도시 명명한 데서 정점을 찍었다. 파시즘의 성격에 인종주의가 강하게 결합한 나치즘은 분명 단눈치오의 상상력을 흡수하며 용어 홀로코스트에서도 주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파시즘의 등장이 단눈치오 사람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니다. 휴스핼릿은 파시즘이 예외적인 역사 운동의 기형적 산물이 아니라 유럽의 지적·사회적 삶에 깊이 뿌리내린 경향들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해 나온 어떤 것임을 알게 된다.(16)라고 하며 사회적 맥락을 잊지 않고 언급한다. 모든 현상은 당대의 시대와 사회가 구성원들 함께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결과물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단눈치오가 누누이 주장하던 자신의 정치 기조, ‘시학의 정치 피우메에서 꿈꾸었던 자신의 유토피아는 철학자- 국가를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더하여 단눈치오가 니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볼만 하다. 현재 신보수주의 불리는 네오콘 사상적 기반 또한 다름아닌 플라톤 니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 순수한 진리의 세계 몽상가 단눈치오가 주목했던 이상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역사이래 서양인들의 정신구조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세상에 하나의 진리 존재한다는 일원론적인 시각과 부합하며, 유일신을 상정하는 서양의 기독교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단눈치오가 매료되었던 세바스티아누스역시 황제를 섬길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받았고, 세바스티아누스는 신을 믿기로 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서양문화의 이러한 단일성 배타성 정신구조는 플라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단눈치오의 정치적 사유에 토대를 제공한 다른 인물은 니체였다. 단눈치오는 여러 철학자들의 견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를 내놓았는데, 니체로부터는 엘리트주의 니체의 저술에서 보이는 선언문의 형태, ‘초인 이미지와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정황을 저자 휴스핼릿은 기록하고 있다. 나는 신보수주의자들이 단눈치오의 사상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단눈치오의 정치적 사유와 신보수주의자들이 기반하는 사상가들이 플라톤과 니체라는 점에 주목해보고 어떤 연관성을 찾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100여년 단눈치오가 의도치 않게 뿌린 씨앗은 분명 파시즘과 나치즘에 이용된 있다. 역사 속에서 돌연변이를 거치고 구체성을 띠어 현재의 신보수주의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부분이 있으리라 충분히 예상할 있겠다.

 

 

 

[3] 저자의 균형 감각과 글쓰기

 

시대를 관통하듯 자신을 몸소 시대 속으로 던져넣으며 살았던 단눈치오. 인물의 다층적인 인물됨과 시대 상을 900페이지가 넘는 원고에 담는 , 그것도 지루하지 않게 담아내는 작업을 마주하는 일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대체로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책의 첫머리는 인물의 정치적 삶에서 정점을 이루던 시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저자는 단눈치오가 활동했던 극적인 시기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저자의 연극적 상상력으로 독자들은 단눈치오가 활동했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돈의 시대상을 함께 목격하는 것같다. 어느 순간 독자들은 단눈치오가 시인으로 등단하던 17 당시로 돌아간다. 등단한 젊은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자신이 낙마하여 사망했다는 거짓 뉴스를 퍼뜨리게 된다. 독자는 단눈치오가 만들어내는 거짓 뉴스의 생산 현장을 상상하게 된다.

 

개인의 인간적인 면모만을 살펴보았을 , 단눈치오는 단연코 호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사람들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전쟁광이면서,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던 호색한이자, 무분별한 낭비가이고, 정치 지도자로서는 현실 감각이 전무한, 신뢰하기 힘든 몽상가였다. 그러나 저자가 이러한 인물을 조명하는 방식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균형잡혀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저자는 단눈치오를“단순히 혐오스럽거나 광적인 인물로만 치부될 없으며 (…) 완전히 정상인 존재”라고 평가한다. 단눈치오를 비판하면서도 저자는 그의 문학성과 예술적 재능, 그리고 섬세한 감수성을 충분히 조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의 복잡다단한 층위를 보여주려고 의도했음을 읽을 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우선 단눈치오가 남긴 방대한 양의 수첩때문이기도 하다. 휴스핼릿의 구체적이고 섬세한 인물 묘사는 분명 메모광 단눈치오가 남긴 유산에 힘입은바 크다. 단눈치오에게는 글쓰기의 모든 원천과 글감이 결국 자신이 보고 관찰한 모든 것을 담은 수첩 안에 있었다. 저자 역시 방대하고 자세한 단눈치오의 메모를 따라가며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것이다.

 

그의 공적인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전체적인 윤곽을 가늠할 없는 모자이크 조각처럼 미세한 관계들을 포함한 사적인 삶과 공존했다.(524) 저자가 평가하는 단눈치오의 삶의 양태(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공존) 단눈치오의 삶을 담은 책의 글쓰기 방식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눈치오라는 인물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모자이크 조각처럼 번갈아가며 독자에게 제시하여, 방대한 글이 가져올 있는 지루함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책의 차례를 다시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1부는 단눈치오의 정치적 경력이 정점이던 시기부터 시작하여, 시인으로 등단하던 시절, 그리고 스스로 전설을 만들던 인물의 주요 시기를 스케치하듯 빠른 전개로 보여준다. 2부에서는 단눈치오의 다양한 면모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여러 키워드를 장의 제목으로 하여 인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니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엘리트주의 초인”,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에 대한 열망을 암시하는 생명 같은 ()  설정해놓은 부분을 있다. 혹은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한 단눈치오의 생각을 엿볼 있는 () 고향”, 단눈치오가 되고자 했던 귀족 대한 취향, 그리고 단눈치오가 유달리 관심을 보였던 혹은 페티시적인 대상을 암시하는 순교”, “질병”, “”, “속도등과 같은 장들도 인물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3부에서는 1부에서 보여주었던 정치 경력의 정점기에 전쟁 영웅으로서 활약하던 시기와 피우메 점령 시기, 그리고 물러나 말년의 은둔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끌어내며 인물의 일대기를 마무리짓고 있다. 정치 무대에서 물러난 , 단눈치오는 은둔지 비토리알레에서 자신만의 세계 속에 매몰되어 살아갔다. 코카인과 아편, 수면제 진통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무솔리니가 종종 보내주던 선물을 받거나 장군 서열로 진급되면서 자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단눈치오가 파시스트 정권에 길들여지며 잊혀져가는 말년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의 권력을 점점 장악해가는 파시즘 세력의 행보와 교차되며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정리하며

개인은 누구나 당대의 사회 속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개개인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단눈치오의 분열적이고 극단적인 이면들은 마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닮기도 했다. 특히 책은 단눈치오라는 인물이 허물어져가는 모습과 함께 1 세계 대전 이후 정치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광기로 치닫고 있는 이탈리아 사회를 묘사해내고 있다. 역사의 가운데에 스스로를 던져 세상과 긴밀하게 호흡하던 단눈치오는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만큼, 단눈치오는 점점 권력을 잠식해들어오는 파시즘 정부에 모든 것을 강탈당하듯 이용되기도 하였다. 무솔리니 파시즘의 거의 모든 현현은 단눈치오의 상상력에 기원한다. 나아가 나치 독일에도 단눈치오의 상상력은 바이러스처럼 전이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나아가 플라톤과 니체로부터 받은 사상의 관점에서 단눈치오의 상상력은 소멸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보수주의에도 이어지고 있지 않은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니체와 단눈치오에게 동시에 영향을 인물이 바로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라고 저자는 언급했다.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니체의 초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하는 점이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단눈치오의 소설 <무고한 존재>(문학과지성사, 윤병언 옮김, 7쪽에서 인용한 부분을 재인용함)에서 단눈치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정의는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세상의 어떤 법정도 나에게 판결을 내릴 없을 것이다.바로 초월한 인간’, ‘정복되지 않은 ’, ‘초인으로서의 인물상과 유사한 맥락이 증거이다.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어느 문인이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스스로를 들이밀며 시를 쓰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던가. 시인으로서 단눈치오는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걸고 처럼 세상을 향해 스스로를 밀고나가며 삶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단눈치오는 어쩌면 평생을 자신이 꿈구는 문학적 환상의 영역에서 살아간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19세기라는 시대의 무대에서 스스로 주인공을 맡아 공연하는 연극 배우이자 광대이기도 했으며, 세계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로 보아도 무방할 같다. 물론 단눈치오를 미화하거나 현재의 도덕적 기준으로 그를 소급하여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판단기준 너머에 존재했던 사람이다. 옮긴이는 단눈치오를 가리켜 초인으로서 지상의 맥락을 벗어난 기호라고 표현했다. 그는 탈맥락화된 기호-인간이었다는 말이다. 현실 정치에 뿌리는 내리고 있던 무솔리니와는 달리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무관했던 단눈치오는 어디에도 안착하여 뿌리를 내리지 않는 부유하는 기호였기에 오히려 파시즘에 도구로서 이용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눈치오는 분명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어떤 교훈이나 배움을 얻을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인간이 누릴 있는 가능성의 극한을 시도해본 사람이자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저자 루시 휴스핼릿이 단눈치오에 주목하고 오랜 시간을 책에 할애한 이유가 바로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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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맑음 - 청소년과 함께 읽는 5.18 민주화 운동 이야기 창비청소년문고 33
임광호 외 지음, 박만규 감수, 5.18 기념재단 기획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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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맑음

임광호/배주영/이민동/정수영 지음  |  [창비]

 

 

지난 3 11 88세의 전두환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법정 앞에 섰다. 2017 4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하여 전두환은 시민단체와 유가족에 의해 고소되었고 불구속 기소로 재판받게 되었다.

(참고 기사 출처: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232160#08gq )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처럼 여전히진행중이다. 이번 재판에서 전두환은 법정에서 사과없이 5.18 당시 헬기의 기총소사는 없었다고 여전히 주장했다. 참고로 기사에 따르면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검찰 조사 등을 통해 5.18당시 헬기 사격은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기사는 나치가 집단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죽인 일이 없다고 주장했던 어용 역사가의 주장에 맞서 법정에서 진실을 두고 공방했던 실제 사건을 토대로 제작된 영화 <나는 부정한다> 떠올리게 했다. 영화는 진실을 왜곡하려는 집단에 맞서 역사를 올바른 사실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었다.

 

 

오늘은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모여 청소년을 대상으로 5.18 민주화 운동(이하 5.18)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5 18, 맑음> 만난다. 책은 크게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전반부는 5.18 전후의 국내 분위기와 5.18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간결하게 기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역사의 진실 찾기노력에 대해 국내외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며, 5.18이후 시민들이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5.18 증언하는 세세한 자료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5.18 당시의 상황에 대해 모르고 있던 일반 독자에게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시간이 모든 문제의  약은 아니다]

이번 재판 기사를 보고 역사의 사건으로 세기 가까이 지나 관련자를 법정에 세운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여전히 진실을 부정하고 있는 책임자들의 한결같은 태도 역시 대다수 시민들의 마음을 더욱 헛헛하게 만든다.  사람이 대개 괴로운 일을 겪고나면 주변에서 시간이 답이다라고 말해주곤 한다. 일면 수긍하게 되는 말이긴 하지만, 인간이 겪는 모든 괴로움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 아닌 같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의 경우, 특히 5.18 같이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경험은 경험자(생존자 혹은 유가족)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기 마련이다. 몸에 각인된 기억은 평생을 걸쳐 살아남은 이들을 괴롭히고 삶을 갉아먹을 있는 존재다.

 

 

5.18 당시 임신 8개월인 어느 부인은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배속의 아이와 함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가족 곁을 떠났다.   근처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중학생 아이들이 공수부대가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 계엄군에 직접 총을 들고 맞서 싸우지는 못해도 시민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을 했던 어느 여학생은 헌혈 귀가하다 총에 맞고 다시 병원으로 실려온 사례도 있었다. 당시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평생 얼마나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야 했을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5.18 사람 사람의 희생자로 인해 유가족들은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광주 시민,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집단에 던진 트라우마를 낳은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공권력의 정점인 국가의 군대 조직을 무방비 상태의 무고한 시민들에게 어떤 예비 조치도 취하지 않은 휘둘렀기에 더욱 충격을 준다.

 

 

많은 기성세대들은 떳떳하지 못했던 집단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당연히 예상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집단이 공유하는 트라우마는 진실을 덮는다고 하여 잊혀질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나 전두환 회고록 처럼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사람이 회고록의 주장으로 진실이 드러나거나 집단의 트라우마가 해소되길 기대하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반면 아직도 직장에서 업무로 만나게되는 어르신 중에는 아직도 5.18 빨갱이 소행으로 진압과정에서 희생자가 생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놀랄 때가 있다. 가짜뉴스에 세례를 받고, 정보가 신념 내지는 교리가 되어버리면 정말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5.18 더더욱 현재진행형인 역사라고 말할 있다. 유가족 이들의 친구 동료들에게는 시간을 약으로 삼아 과거를 덮는 것으로 개인과 집단의 트라우마가 치유되기 보다는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을 시작으로 하여 진실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

 

 

 

[우리가 있는 일이란]

책을 읽으며 평범한 시민으로서 우리가 5.18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우선 역시 5.18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체적인 이해를 갖지는 못하였지만 <5 18, 맑음> 통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처럼 막연하게 5.18 알던 사람들은 우선 5.18 대해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일반 시민으로서 있는 번째 선택일 같다.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고 손을 내밀어 맞잡아 주는 일도 있지 않을까. 책에 소개된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어머니회 광주의 오월어머니집과의 연대도 그러하고, ‘5.18엄마가 4.16엄마에게보내는 메시지 또한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의 손을 내미는 일이다. 언론은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독자 사이를 매개하는 필터의 역할도 하고 있으므로, 시민들은 언론의 기능을 이해하고,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언론의 기사를 보다 비판적인 안목으로 판단하는 시민의 태도 또한 필요하다.

 

 

책에서 저자들은 언론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하며 기자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5.18현장을 최초로 담은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막연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책에 힌츠페터에 대해 보다 자세히 소개가 되어 그가 남긴 사진 장과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알게 되었다. “우리 독일인이 2 대전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는 만큼 5.18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84)라고 언급하기도 했던 그는 기억하기 중요성을 알았던 기자였다. 책의 저자들도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언론은 진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킬 있는 존재이면서도, 시민들을 연대하게끔 해주는 도구, 매개체의 역할도 한다. 힌츠페터 이후 다른 국내외 기자들의 사명감과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의 세부사항이 전달되어 공유되지 못했을 것이다. 올바른 언론의 역할을 이해하고 의식있는 언론이 사회에 본분을 있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2부에서 특히 주목하게 부분은 일반 시민이자 탄광의 카나리아같은 역할을 하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글을 쓰는 문인들을 비롯하여 영화감독들 그리고 화가와 음악가들은 5.18민주화 운동을 모티브로 하여 각자의 재능을 발휘했다. 저자는 책에서 예술의 사명을 밝히고 있는데, 하나가 기억의 재현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사명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가의 것으로 보는 편이다. 예술가들이 담당하는 기억의 재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앞서 언론의 역할이 연대를 위한 도구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듯이, 예술가들 또한 자신의 작업을 통해 감상하는 시민들에게 다른 정서적인 연대를 촉구한다고 있겠다. 어쩌면 언론은 이성적인 연대, 예술가들은 감성적인 연대 가능하게 해주는 창문이 된다고 있다. 특히 예술가들은 사회 현상에 대해 아무런 사리없이 바라보고, 비판할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표현이 글이든, 영상이든 혹은 음악이나 그림이든 예술가들은 모두 집단의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론을 비롯하여 예술가의 역할은 개인 집단의 역사를 간직하므로써 집단의 기억을 강화해주며, 집단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존재라고 말할 있겠다.

 

 

 

[글을 나가며 - 이제 다시 시작이다]

5.18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압 작전명이었던 화려한 휴가 같은 이름의 영화 <화려한 휴가> 처음 보았을 받았던 충격, 영화 <박하사탕> 보았을 받았던 충격을 기억한다.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너무나 모른 살아왔음에 부끄러웠던 기억도 난다. 이후 나는 예술인들이 남긴 작업들을 통해 5.18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번 <5 18, 맑음> 통해 보다 많은 참고 리스트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5.18 대해 좀더 알아가는 ,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개인으로서 소박하게나마 있는 일이란 생각을 한다.

 

 

책을 읽으면서 반인륜 범죄에 공소시효란 없다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는 모리스 파퐁 재판부분이 또한 기억에 남는다. 사건 또한 내가 모르던 것이었는데, 파퐁은 비시 정부 시절 나치에 적극 협력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비시 정부 시절 당시 파퐁은 보르도 지역 유대인들 16,000 명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87세의 파퐁을 법정에 세웠다. 법정에서 그는 명령을 수행했을 공무원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나는 위에서 시키는 일을 했고, 나치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178)라며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진술은 한나 아렌트가  기록하고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진술과 너무나 흡사하다. “(아이히만) 자신이 맹세한 대로 모든 명령에 복종했고, ‘자신이 의무를 항상 완수하는데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주장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58) 아이히만도 역시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 위해 성실히일했던 공무원이었다. 파퐁이나 아이히만 역시 집단 속의 개인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말인데 논리가 이들에게 일말의 면책 사유가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례는 내게 우리가 스스로 비판적인 사유와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있는가를 또한 있기도 하다.

 

 

의식있는 사회 각계층의 노력으로 5.18 기록한 각종 기록물들이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많은 숙제가 남아있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같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한다. 5.18 사례는 우리가 살펴보아야할 과제의 출발점이 있을 것이다. 오늘 만난 <5 18, 맑음> 통해 여러 희생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들을 있었다. 나는 여러분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야겠다.

 

 

 

#5월18일맑음 #518민주화운동 #창비 #청소년도서 #한국현대사

#네이버원탁의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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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 세상의 통념을 저격하다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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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고등학교 시절까지 나는 책을 읽지 않는 학생이었으나 우연히 알게된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마디가 나에게는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면 대략 이렇다. “모든 가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의심하는 자유(freedom to doubt).” 파인만이 언급했던 의심 당연히 합리적 의심 말한다. 평생 미신적인 유사과학에 대한 비판을 했던 파인만에게 의심의 대상은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이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러한 사고의 자유 내지는 정신을 확장하여 적용해보는 것은 사회의 관습과 규범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교양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에 만나게된 도서는 강양구 기자의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이다. 저자는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관점을 제시한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실린 저자의 글들은 청소년 논술 잡지에 연재되었던 글을 다시 수정하여 엮은 것이다. 현직 기자로서 사회와 과학기술에 대한 당대의 현안에 주목하고 우리가 받아들이고 굳어져버린 생각들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럴까?’, ‘만약 (…) 이런 경우라면?’하고 독자에게는 다른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면 어떨지를 제안한다. 분명 인간 사회의 조건들은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람의 삶에도 여러 가지 다른 정치경제적 사안들과 무관하지 않다. 책에서는 다양한 화제에 더하여 독자로하여금 추가로 생각해볼 연관 주제나 깊이 있는 탐구를 위한 관련 서적을 제시한다. 다양한 소재를 대상으로하는 만큼 자세한 설명 보다는 관련 주제에 대한 소개 깊이 있는 주제 탐구를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미세먼지 주범찾기

 

최근 한반도는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얼마 전에 미세먼지 기단이 중국에서 서해를 거쳐 한반도로 이동하는 위성자료를 공개한 기상청 발표가 있었다. 많은 이들은 발표에 힘입어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인식이 정말 그럴까?’라고 의문을 표하고 좀더 자세한 정황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봄철만 되면 중국 내륙에서 날아오는 황사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미세먼지보다 입자가 크다. 그리고 중국 내륙의 사막지역에서 날아오고 있다는 점에 크게 이견이 없는 듯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미세먼지라고 부르는 적혈구 수준의 크기(10-20 μm)보다도 작은 입자이다. 미세먼지는 자동차, 난방 화석에너지의 연소 과정에서 발생한 질소 산화물이 공기 중에서 반응하여 생성된 질산염과 황산염의 성분을 갖는다 한다(97).

 

그렇다면 과연 미세먼지는 황사처럼 중국에서 대부분 건너오는 것일까? 최근 신문 기사를 보니 야당의 정치인은 미세먼지의 원인인 중국에 항의하나 못하고 있다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상당수의 국민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미세먼지는 중국탓이라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에 따르면 미세먼지의 상당 부분은 국내에서 만들어낸 오염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한반도의 미세 먼지가 대기 정체 경우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한반도 상공의 대기가 정체되는 시기에 미세먼지 문제가 심해지고 있으며 이는 국내에서 발생되고 있는 오염물질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지 않고 기상청의 발표(중국에서 건너오는 미세먼지) 야당의 입장과 의도를 여과없이 수긍해도 되는 것일까. 물론 기상청은 미세먼지가 전부 중국에서 건너오는 오염물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과 입장 표명에 어떤 정치적 맥락이 개재해있지는 않은지 배경에 대한 의문을 가져볼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건너오는 미세먼지를 부인할 수는 없으나 국내에서 유발되는 오염물이 상당한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미세먼지를 중국탓이라고 하는 입장과는 간극이 존재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대기의 특성에 비추어볼 ,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건너온 부분과 국내의 오염물에 의한 비율을 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미세먼지의 주범을 중국탓만 하고 있을 , 우리는 정부의 환경 관리 책임에 대해 면제부를 주거나 환경에 대해 무관심해질 있게된다. 미세먼지에 대해 과연 우리는 책임이 없는가는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세먼지와 관련하여 생각해보게된 것은 저자가 언급한 마디이다.

때로는 충남 화력발전소 굴뚝에서 나온 미세먼지가 북쪽으로 확산하면서 수도권 뿐만 아니라 서해 상공이나 강원도로 가기도 합니다.”(97)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현재 국내 여러 화력발전소의 가동률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매년 전기에너지 수요는 증가하고 있으나, 환경문제에 대한 정책 사안 결정과 관련하여 원자력 화력발전소의 확장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에너지 수급 문제가 특히 수요가 많은 여름에 비상이 걸리는 이유다. 자동차 뿐만 아니라 미세먼지에 영향을 있는 난방 전력 공급(지역 난방 시설, 화력발전 ) 시설에서는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핵발전소에 대한 축소방침을 갖고 있는 정부의 영향으로 화력발전소의 가동율과 에너지 의존율은 상당히 높은 상태이며, 이것이 특히 최근 수년 사이에 심해진 미세먼지의 원인일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금융 대출제도 차량 대여 서비스 등의 다양화로 개개인이 외제차를 비롯한 차량 소유가 대폭 증가한 것도 미세먼지 증가에 속도를 더해주었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에서 건너오는 미세먼지의 오염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발생하는 오염물 증가에 대해 분명히 주목하고 대책을 세워야하는 것이 맞다. 정치권에서 소리 높여 미세먼지가 중국탓이라고 주장하는 사이, 우리 국민들은 국내의 오염 유발 사항에 무관심한체 여러 질병의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석탄을 이용하는 화력발전소의 가동율이 높아짐에 따라 발전소의 컨베이어 벨트는 석탄을 쉼없이 나르며 가동중일 것이다. 최근 화력발전소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점검중이던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문제는 미세먼지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좀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미세먼지 문제와 화력발전소 노동자의 죽음은 화력발전소를 매개로 서로 얽혀 있는 문제이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전력 수요를 맞추기 위해 쉼없이 컨베이어벨트를 가동하는 환경에서, 미세먼지 오염물을 생산해냄과 동시에 현장 작업 노동자는 좀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안전사고에 크게 노출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학교에서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가공되거나 이송되어 우리에게 오는지 배운 기억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에너지와 환경의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사고를 확장하여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최근 고통을 주는 미세먼지 문제는 우리가 고립되어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나라를 떠나 지구 전체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해주는 사안이기도 하다. 사회의 통념에 의문을 던져보는 일은 우리의 삶이 정부의 정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이슈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기회를 마련해주기에 중요하다.

 

 

 

과학기술과 결부된 인간의 새로운 욕망 유전자 변형 그리고 새로운 우생학

 

20세기 초반 양자물리학의 성공과 함께 20세기 중반에는 과학자들이 DNA 존재 구조를 규명해내어 미시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환원주의적 시각이 힘을 얻었다. 인류는 자연의 근본을 이해하는 일이 자연을 분할하여 이해하는 일과 다르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는 크리스퍼라고 하는 유전자 편집 기술로 원하는 유전체 부위의 염기를 잘라내고 다른 염기쌍으로 대체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성형수술로 대변되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욕망의 분출은 이제 유전자 변형을 통해 만들어진 배아를 통하여 출생한 인간, ‘GMO사피엔스까지 확장되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자신감과 욕망은 이제 생명을 조절하고 제어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맬서스의 인구론과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한 다윈주의가 결합하여 근대의 우생학이 등장했다면, DNA구조의 해명 이후 유전자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새로운 현대 우생학이 출현할 단계에 있다고 할만하다. 강양구 기자가 소개하고 있듯이, 영화 <가타카>에서 묘사한 상상력의 세계는 이제 보다 그럴듯한 핍진성을 얻게 되었다. <가타카>에서는 유전자 변형(편집)여부가 인간을 우열로 분류하는 기준이 되고 있지만, 유전자 변형을 통해 태어난 진리치(GenRich) 신분도 사고로 불구가된 이는 다시 열등한 등급으로 재분류되고 있다.

 

 과학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고 믿지만, 결국 과학기술을 적용하는 주체는 (현재까지는) 사람이며, 따라서 적용되고 있는 과학기술은 이미 가치중립적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평가 분류의 기준들을 제시하는 , 기준 설명이 인간의 가치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유전자 변형 인간의 등장은 과학기술의 힘을 이용해서 정상 비정상 가르는 새로운 시도”(220)라고 하였다. 나아가 유전자 변형 행위는 유전되기 때문에 성형외과 시술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안고 있다. 새로운 신분 형성과 고착화에 대한 우려는 영화 상상만은 아닌 것이다. 영화 <가타카>에서 불구가된 진리치신분의 인간은 결국 비정상으로 분류되어 도태되고 만다.  

 

지구의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온 생명체는 유사한 (species)이라면 어떤 기준에 따라 분류되더라도 대개는 (bell)’모양의 정규분포를 따를 것이다. 우리가 폭넓게 분포해있는 (species) 대해 정상 비정상’, ‘우열 나누는 행위는 분명 객관적 사실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포함된 규범적 규정에 따른 것으로 봐야만 한다. 현대의 우생학은 가치의존적 개입 활동임과 동시에 생물체의 정규분포 양단에 존재하는 개체들을 제거하려는 극단주의적인 선택으로 있다. 생명체의 다양성은 진화기작의 가장 중요한 전략이기도 한데, 우생학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메커니즘에 정면으로 반하는 인간의 가치 의존적 개입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리고 생명체 자연에 있어 정상이란 무엇인가를 반문하고 논의해 봄직하다.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매우 중요한 질문거리가 있다. 과연 정상 비정상이란 무엇일까?

 

 

 

다시, 의심하는 자유에 주목하며

 

강양구 기자의 질문하는 ,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따라 읽으며 다시금 학창시절 발견했던 의심하는 자유 생각해보았다. 책에서 저자는 상당히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있지만 우선 현재 나의 관심을 가지 사항들을 다시 추려 생각을 보태보았다. 다양한 문제들이 좀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서로 더욱 긴밀히 얽혀있음도 이야기해볼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에너지 관련 이슈에는 탈핵 정책과 관련하여 핵에너지 공급 유지 문제와 함께 화력발전소 가동 상황, 그리고 미세먼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배경 속에서 노동자, 인간은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가를 함께 생각해볼 있을 같다. 핵발전소를 짓는다는 것은 분명 정치적으로 소외된 어떤 장소, 사람들의 희생이 따르게되는 구조를 연관지어 이해를 넓힐 있다.

 

한편 효율성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설계하는 문제를 생각할 , 본문에 제시된 마강래 교수의 압축도시개념과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 등장하였다. 개념이 서로 상통함을 말할 , 우리의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칠 있는지 의문을 던지는 기회가 수도 있겠다. 과연 효율성만으로 압축도시 설계한다면, 도시 외곽에서 농사를 지어야만 하는 농민들 혹은 공장 노동자의 삶의 질은 누가, 어떻게 보살펴야하는가 등의 문제도 남게될 것이다. 사고 실험은 누구나 있으나 인간의 삶은 다양하고 수많은 변수가 내재한다. 이론과 실재의 간극을 어떠한 기준으로 보완하는가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것이다. 

 

밖에도 저자가 기부 문제와 관련하여 언급할 , 미국의 철학자 피터 싱어나 윌리엄 맥어스킬의 효율적 이타주의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기부를 전제한 돈벌이가 남을 돕는 효율적인 방법’(273)이라는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소개하는 효율적 이타주의개념에는 아직 수긍이 되지 않는다. 현실적인 윤리의 문제를 판단할 ,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주장하는 윤리적 문제 판단의 상대성에는 수긍하지만, 윤리적인 문제와 효율성 결부시키는 문제는 아직 나의 통념으로 효율적 이타주의 개념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런 나의 의심은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확장해서 읽기를 위한 도서를 이해한 다시 점검해볼 있겠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에서는 사회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이해 하려는 태도가 중요함을 다시 발견할 있다. 우리 사회는 사회 현안들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해보는 문화가 아니기에 개개인의 의견 차이가 종종 감정적인 충돌로 이어지곤 한다. 책을 읽고 개개인이 의문을 갖는 자유를 떠올리면서, 아울러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구성원들이 주체적으로 의견을 조율하고 사안을 결정하는 일이 바로 정치 개념이며, 결국 우리의 삶의 조건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상한질문위험한생각, #강양구, #북트리거, #지학사, #네이버원탁의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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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된 불평등 - 첨단 기술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분석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가
버지니아 유뱅크스 지음, 김영선 옮김, 홍기빈 / 북트리거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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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된 불평등

(원제: Automating Inequality: 

How High-Tech Tools Profile, Poilice, and Punish the Poor)

버지니아 유뱅크스(Virginia Eubanks) 지음 | 김영선 옮김 | [북트리거]

 

 

 

인간이란 위대한 존재다. 인간만이 위대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확인하고자하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확신과 긍정을 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인간의 근원적인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할 것이다.

 

범죄자요. 단지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지.

 

누군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느끼고, 그것도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말한다면 화자는 분명 사회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인간의 실존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증거이다. <자동화된 불평등> 읽고 빈곤 대한 나의 생각이 좀더 구체화되었다. ‘빈곤 막연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탈은 더더욱 아니다. 빈곤은 우리 사회에 반드시존재하는 장치이자 사회구조라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빈곤 기본적으로 인간이 거대한 집단을 이루고 생활해나가야하는 이상 인간이 개발한 발명품이 아닐까. 인간이 부족을 이루어 사냥과 채집을 공동분배를 하던 소규모 공동체에서 빈곤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농경 생활이 시작되고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동생산-공동분배하던 공동체는 기존의 소규모 집단으로부터 분기되어 새로운 사회의 구심점과 구성원의 역할이 필요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빈곤 애초에 지배층의 사회구속력을 만들어내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고 있다.

 

<자동화된 불평등> 저자 버지니아 유뱅크스는 책에서 1662 보스턴에서 세워진 미국 최초의 구빈원으로부터 공공부조의 역사를 언급한다. 그러나 책의 주요 관심은 기술혁명 이후 급속하게 발달한 인간의 도구들, 컴퓨터의 발달과 소프트웨어, 방대한 데이터 처리 기술과 알고리즘의 구현까지 결합된 첨단기술이 빈곤에 어떻게 대처하고, 공공부조의 성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어떻게 심화시켰는지를 보다 깊숙이 들여다보는데 있다. 공공부조는 기본적으로 구성원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하지만 구성원이 누구인지 알려주어야하는 개인정보 노출 공유에 대한 동의를 전제한다. 공공부조는 지원 조사라는 공통적인 틀을 갖추고 있다. 전통적인 구빈원이 그러했고, 현대의 디지털 구빈원이 그러하다. 문제는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디지털 구빈원이 인간의 실존적인 위기를 더욱 공고히 만든다는데에 있다. 결과 빈곤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인권과 평등이 침해받을 있다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조건 위기에 처해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미국 근현대 시기의 공공부조 형성 배경 역사적 맥락

 

저자는 주로 미국 사회의 공공부조 전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근현대 시기 미국 사회의 배경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첨단기술과 접목된 여러 공공부조의 모습을 살피는데 유용할 것이다. 아울러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공공부조의 양상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 최초의 공공부조 형태로서 탄생한 구빈원은 1600년대 중반 이후로 점차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국가가 나서서 빈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가난한 이들을 공공 기관에 귀속시키는 방식은 1820년대 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분명 산업혁명의 여파로 효율성 향상를 위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는 공포는 오늘날 인공지능이 인간을 많은 산업영역에서 대체하고 심지어는 인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공포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는 이미 이런 대중의 공포심과 사회 구조의 중심인 중산층의 두려움(실업과 빈곤층이 되는 두려움)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사회에 도입, 정착 시켰다. 우리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에 대해 많이 알고있지만, 1800년대에도 여러 차례 대공황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해양봉쇄 정책을 계기로 발발한 영국과 미국의 1812 전쟁 이후, 미국 토지 관련된 과도한 부동산 대출과 자본 투기 그리고 대출 규제가 이어지면서 미국의 은행이 파산하고, 기업들은 도산하였으며, 자유민 성인 남성의 4분의 일에 해당하는 50만명이 실직한 사례가 있다. 나아가 번의 19세기 미국 대공황은 1873 과잉 철도 투자로 인한 시장 왜곡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서부로 나아가려는 수요, 철도 건설 사업이 붐을 이룬 이유는 1820년대 서부에서 금이 발견된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19세기 중반 부터 1920년대 까지 이어졌던 고아열차 미국사회의 철도라는 사회기반구조를 통해 고아와 집없는 취약 계층 아이들을 동부 도시로부터 중서부의 농촌 지역 가정에 위탁하던 형태의 공공부조 사업이었다.

 

사회가 대공황을 겪고나면 취약한 계층이 늘어나고, 빈민이 증가하기 마련이다. 국가 주도 하에 통제의 성격을 갖는 미국 근현대 시기 공공부조에 대한 이해는 디지털 구빈원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국가는 사회의 불안계층인 빈곤층을 통제하기 위하여 다른 타개책을 고안해 내었다. 이것이 바로 자선이다. 특히 과학적 자선 운동 이를 주도한 사회 엘리트층은 다윈 진화론의 왜곡된 형태인 우생학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생학은 과학에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인간의 편견이 결부되는 과정에서 변질되어 인간의 삶을 위협하게 되었다. 우생학의 기본적인 논리는 자격을 갖춘 빈민과 그렇지 못한 빈민이 유전적 차이 있다는 믿음이다. 논리가 미국적 맥락에에서 백인 우월주의와 접목이 되면서 특히 1880년대 미국사회를 휩쓸게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우생학이 인종적인 편견과 결부되면서 미국의 엘리트 계층이 가난한 노동자 계층 6 여명에 대한 강제 불임시술을 주도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우생학 연구를 통해 미국 최초의 빈민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00년대 미국사회는 공공부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20세기 미국 공공부조의 틀을 형성한 시기로 있다.  한편 미국 근대에서 나타난 구빈원의 전통은 자본가와 지배층의 이익극대화라는 욕망에 희생된 계층에 대해 이들이 갖는 불안감을 일소시키기 위한 통제 장치로 이해해볼 있다.  

 

공공부조의 관점에서 20세기는 근대의 틀을 이어받으면서도 좀더 다른 자각이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4 대공황 타개책으로 추진된 뉴딜 정책으로 빈민 구제 제도가 개개인의 도덕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저자의 평가대로 뉴딜 정책의 결과 사회보험과 공적부조가 구분됨으로서 경제 불평등의 씨앗을 뿌리고, 백인 우월주의에 굴복했으며, 빈곤층과 노동자 계층의 갈등을 조장하였으며, 여성의 노동을 평가 절하 측면이 있다. 또한 루즈벨트는 보편적 복지 혜택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여 과학적 자선의 조사와 감시, 견제를 부활하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공공부조의 기본 형식인 지원 조사라는 구도는  다시 미국 사회로 부활되어 힘을 얻게 된다. 반면 1960년대에 전미복지권단체의 탄생으로 강력한 복지권 운동이 등장하게 되면서 복지 혜택의 개념을 복지 혜택은 수급자의 개인 재산이라고 재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부양아동 가정지원의 확대에 대한 백인 중산층의 반감과 1973 1 석유 파동의 영향으로 불어닥친 경제 불황으로 1976년에는 디지털 구빈원 결국 탄생하게 되었다. 나아가 컴퓨터의 보급으로 공공부조를 받는 가정에 대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 저장, 분석할 있게 되었다. 이로서 디지털 구빈원은 1960년대 기반이 갖추어진 복지권 운동의 성공적인 결과와 복지 혜택에 대한 재정의를 70년대에 뒤집어 놓았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1996 제정된 개인의 책임 노동 기회의 조화를 위한 으로 미국사회는 이른바 복지의 종언 맞이하였고, 1996년에서 2006 사이 거의 850만명의 수혜자가 복지 명부에서 제외되었다. 저자는첨단기술과 도구의 결합으로 수혜 대상자 개개인에 대한 사생활 침해와 감시 추적이 강화되고 가혹한 기준을 요구하며 엄격한 처벌을 낳게 되었다고 경고한다.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의 유사점과 차이점

 

저자에 따르면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은 모두 공적 혜택으로부터 빈민들의 주의를 돌리고, 이들의 노동을 강제하며, 가족을 해체하고, 정치적 권리를 상실하게 한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생존을 불법화하는 측면이 있고, 실험 대상으로 이용하기도하며, 중산층과 구분하는 윤리적 거리를 만들어내며, 심지어는 인종차별적이고 계급차별적인 위계를 재생산한다’(282)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전통적 구빈원은 산업적 실업에 대한 중산층의 두려움 대응하며, 디지털 구빈원은 전문직 중산층의 추락에 대한 두려움 대응한다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공공부조의 존재는 공교롭게도 중산층의 필요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으로도 있다. 사회지도층은 사회 구속력을 획득하기 위해 중산층의 두려움 이용하여 빈민을 통제할 명분을 얻은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빈곤이란 개념이 사회지도층을 위해 고안된 그들의 발명품이라는 생각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다.

 

물론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에 두드러지는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전통적 구빈원에는 하나의 시설에 다양한 인종, , 출신국을 넘어 함께 수용함으로써 계층 결속의 결과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다만 제한된 시설과 사회 자본의 제한으로 규모가 확대되는 것에는 한계가 필연적이었다. 반면 디지털 구빈원은 감시와 알고리즘에 의한 사회적 분류 과정으로 기존의 공동체 구성원을 개개인으로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시말하면 디지털 구빈원은 빈곤층의 연대를 약화하고, 이들이 다양한 공격과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방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디지털 구빈원의 성격은 전통적인 구빈원 보다는 공적인 빈민 구제 방식에 대항하여 등장한 과학적 자선 운동 계보를 잇는 것으로 있을 것이다. 과학적 자선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는 우생학 연구와 결합하여 최초의 빈민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낸 강제불임 시술에서 있다. 나아가 디지털 구빈원이 전통적인 구빈원과 달리 새롭게 갖게된 중요한 특징은 첨단기술 도구의 발달과 함께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예측 모형이 결합하여 보다 은밀한 속성을 띄며 보다 영속적이라는데 있다. 한편 감시라는 관점에서 구분되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전통적인 구빈원에서 보이는 아날로그 방식의 감시 시스템은 감시 대상을 먼저 선별하여 추적한다. 반면 디지털 감시 시스템은 감시 대상을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로부터 알고리즘이 제시한 기준에 근거하여 선별한다. ‘감시표적 특정 기준에 의해 걸러낸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감시 시스템은 가난한 사람들을 추적하는 빈곤 프로파일링으로 본질을 이해할 있다. 빈곤 프로파일링은 개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개인의 조건, 가난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가난한 개인을 추가 조사 대상으로 포함시킬 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범죄자로 표현한 노숙인 게리의 자조적이고 상실감이 담긴 진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세상이 만들어낸 무형의 감옥 그리고 고립과 추방

 

빈곤 관리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경제 불안에 대한 국가의 두려움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혐오에 의해 만들어지고, 차례로 빈곤의 정치학과 빈곤에 대한 경험을 형성한다.”(27)

 

저자는 빅테이터 활용기술과 알고리즘과 같은 기술-도구는 중립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기술과 도구 자체는 자체로 의지가 없으므로 중립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두려움과 혐오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기술 도구들을 적용하는 주체가 누구이냐에 따라 양날의 칼로 기능할 있을 것이다. 다만 수학자이자 테이터과학자로 알고리즘을 개발했던 캐시 오닐의 견해를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캐시는 내부고발자로서 역할을 자신의 책에서 (수학적) 모형들은 수학에 깊이 뿌리내린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있다.”(<대량살상 수학무기>, 45)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알고리즘 개발에는 모형을 만든이의 우선 순위에 대한 가치 판단 선입관 반영된다는 태생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아가 이러한 모형을 적용하는 단계에서 차례 인간의 의도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낳게 것이다.

 

결국 이렇게 인간의 선입관, 편견이 결부된 모형들을 통해 주요한 감시 표적이 되는 대상은 어김없이 빈곤층이다. 가난한 이들은 디지털 통제 시스템의 감시에 투명하게노출되어 있다. 이는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했던 원형감옥(파놉티콘) 역할을 디지털 알고리즘이 대신하는 형국으로 있다. 바로 감시자는 방대한 개개인의 데이터를 있으며, 심지어는 개개인들을 지속적으로 추적할 있다. 이는 디지털 세계가 만들어낸 무형의 감옥(디지털 파놉티콘)이라 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공공부조 시스템은 디지털 파놉티콘으로서 가난한 계층에 대한 감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류과정이 더해 공동체로부터 고립 추방이라는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알고리즘에 의한 예측 모형으로 어느 가정을 고위험가정으로 분류한다면, 가정은 서비스, 지원, 공동체 등을 제공하는 네트워크로부터 물러나게 만들 있다. 이것은 첨단 디지털 시대에 사회 구성원에 대한 추방행위 이면서 새로운 형태의 정치·사회적 격리를 낳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홀로 살아갈 없는 존재임을 안다면, 정치·사회적 배제 기작(고립 추방)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위협을 안겨주는 행위다.  

 

인디애나주에서 시행된 공공부조 프로그램의 적용사례를 살펴보자. 사례는 기존에 수혜 자격 판정을 사람이 진행했던 것을 알고리즘을 통해 자동화한 인디애나주 주민들이 겪어야했던 재앙을 상세히 보여준다. 특히 자동화 과정이 민영화 과정에서 예산 절감의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 나타날 있는 문제점들과 사례들을 열거한다. 자동화된 공공부조 적격성 판정 시스템은 효율성 극대화 부정 수급 차단이라는 명분으로 실행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해볼만하다. 한편 예측 모형이 적용된 앨러게니의 알고리즘 사례를 보면 예측 모형의 근본적 한계가 이를 적용하는 인간의 부주의와 결합하면 초래할 있는 불행한 사건들을 일깨워준다. 아동청소년가족국의 지원을 받으려면 감시가 심해지고 엄격한 행동 준수 요건이 따르는데, 아이의 부모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부모가 지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먼저 다른 가정에 위탁해야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는 첨단기술과 사회제도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기능해야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모순되는 결과이다.

 

데이터과학자가 매우 성공적인 예측 모형 개발했다고 가정하자. <자동화된 불평등> 읽은 이상 우리는 진술이 의미하는 상황을 짚어보고 숙고해볼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알고리즘의 선별 대상 개인이나 가정은 저자의 지적대로 보다 엄격한 조사와 처벌 조치의 대상이 것이다. 따라서 표적 대상 기관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엄격한 심판관 앞에 서야 한다는 의미다. 가정의 부모가 알고리즘에 의해 정밀 조사 대상이 되고, 이들이 기관의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하게되면 아이가 부모로부터 강제 분리되어 다른 가정에 위탁될 것이다. 그러나 위험예측 모형 알고리즘은 매우 성공적인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알고리즘의 예측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행복했던 가정이 알고리즘에 의한 법집행으로 아이가 부모로부터 강제분리 경우, 부모와 아이가 받을 스트레스와 정신적 외상은 누가 돌보아 있을까? 인디애나의 적격성 판정 프로그램처럼 일주일에 30분도 미치지 못하는 정신과 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개인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데는 커다란 한계가 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복지 제도를 적용할 , 인간의 부주의와 편견으로 아이들을 가정으로부터 자동분리시키는 기계가 되지는 않을지 미리 점검해봐야 한다. 저자의 지적대로 수학적 모형에 근거한 프로파일링은 빈곤한 가정의 양육 빈곤한 양육으로 치부하고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부인’ vs. ‘잊힐 권리 대해

 

앞서 빈곤은 인간 사회에 필수적인 장치이자 발명품 같다고 언급했다. 저자의 말대로 미국에는 부와 빈곤이 공존한다. 찰스 디킨스가 소설에서 묘사한 도시’, 런던과 파리에도, 조지 오웰이 몸소 체험한 파리와 런던에도 빈곤은 부와 공존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빈곤은 부와 함께 지구촌 어디에나 공기처럼 퍼져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매체의 제한적인 보도와 사회적·개인적 무관심과 외면으로 빈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저자는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의 용어를 빌어 사회와 구성원이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기작을 문화적 부인(cultural denial)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외면 기작은 개별적이거나 심리적인 속성이 아니라 학교 교육이나 통치 체제, 각종 제도와 대중 매체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 과정이라고 하였다.

 

문화적 부인 다른 사례로 이해해볼 있을지 궁금해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례가 있다. 일본의 지식인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가 지구촌이 당면한 문제들(난민, 테러문제 세계화 ) 대해 나눈 대담을 담은 <위험하지 않은 몰락>에서 사례를 있다. 대담에서두 지식인은 2 대전 이후의 프랑스 사회, 특히 지식인들과 사회의 과거사 외면 사례를 이야기한다. 이들에 따르면 프랑스는 2 대전 당시 비시정부 시절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패전국이다. 여기서 패전국이라는 의미는 나치 독일과 다름없는 전범국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랑스 비시정부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한 자국인들을 탄압하고, 유대인들을 나치 독일 넘긴 활동을 하였다. 문제는 프랑스 사회와 지식인들은 어느 누구 하나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자기 반성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미군정이 들어서고 친일파 정리를 골든 타임을 놓친 것처럼, 프랑스 또한 비시 정부가 일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사회와 지식인들이 묻어둔 지금에 이르렀다. 이는 문화적 부인 적절한 사례로 생각해볼 있다. ‘문화적 부인 과거 기억을 회피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대담에서 현대 프랑스 지성사회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를 과거의 실패와 과오를 돌아보지 않는 순간 지성은 쇠퇴한다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사르트르와 카뮈 이후로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잠깐 과거사를 언급한 적은 있으나 프랑스 지식인들은 문화적 부인 사례를 보여준다.

 

<자동화된 불평등>에서 저자는 문화적 부인이 가져다주는 중요한 폐해를 정치적 공동체로서 갖는 사회적 연대 의식을 약화하기라고 덧붙인다. 문화적 부인은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들에 대해 공동체가 문제를 상대화하고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을 타자화하는 과정의 전제가 된다. 다시말하면 사회의 문제를 나와는 무관한 치부하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말이다. 기관의 조사와 감시를 받는 빈곤층의 경우 공적 자원 수급을 거부당하거나 가족이 해체되면 삶의 기본적인 조건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빈곤층의 결속을 고려할만한 여유도 이들에게는 사치일 있다. 빈곤층과 중산층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에서도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이는 가치 중립적인 첨단기술이 인간의 편견과 부주의로 부적절하게 적용되었을 야기하는 평등권의 침해와 불평등의 심화를 불러온다. 저자는 디지털 구빈원은 현재 소수 권력 집단의 손에 행정 권한을 집중시키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분류하기 위한 자동화 도구를 그대로 두면 불평등을 낳을 것이다.”(306)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문화적 부인과 관련하여 가지 주목해본다. 다시 40 여년 프랑스로 되돌아가보자. 당시 프랑스의 정보자유구가위원회가 개개인의 데이터가 공공 시스템에 무기한 저장되어서는 안된다 제안하고 확립한 잊힐권리원칙에 관해 생각해본다. 논의는 디지털 구빈원이 영구적이며 디지털 데이터가 무기한 보관되는 경우 개인 정보의 유출 위험 또한 높아질 있다는 우려에서 나왔다. 한편 사람의 과거가 전적으로 그의 미래를 제한해서는 된다 전제에서 나왔는데, 잊힐권리 나타난 배경을 <위험하지 않은 몰락> 언급된 현대 프랑스 사회의 정황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2 세계대전 프랑스 비시정부에 협력하여 일했던 프랑스 공직자들(정치인, 경찰, 군인 포함) 자신들의 과거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잊힐권리라는 우아한 원칙을 일찍이 확립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전후 어디로 갔을까? 물론 나의 추측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비시 정부에 협력했던 공직자들은 나치 세력과 유사하게 남미를 비롯한 세계로 피신했다는 기록도 보이지만, 해방된 프랑스에서 이들과 자손들이 살아가기에 사회에 남아있을 개인에 대한 기록은 껄끄럽게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잊힐권리 일견 납득할만하고 중요한 원리를 기반으로 하지만 잊힐권리 해당하는 대상이 분명 프랑스의 빈곤층 아닐 것이다. 버지니아 유뱅크스가 지적하는 미국의 사례만 보더라도 잊힐권리 빈곤층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빈곤층은 애초에 국가에 의해 잊혀진 존재이나 감시망에 붙들려 있을 뿐이다. 아니 빈곤층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디지털망에 불들려 절대 삭제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캐시 오닐이 <대량살상 수학무기>에서 수학 모형은 본질적으로 과거와 기존 패턴들이 반복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둔다라고 지적하듯, 이런 맥락에서 알고리즘에 기반한 디지털 구빈원은 우리, 특히 빈곤층을 과거의 패턴 속에 가두게 된다. 나는 프랑스 사회에서 논의된 잊힐권리 대한 논의는 맛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외면 속에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은 프랑스 지도층의 수작이며 허구라고 본다.

 

아래는 불평등 구조를 공고하게 하는 디지털 구빈원을 거미줄로 설명한 훌륭한 은유다.

 

디지털 구빙원을 시선(視線)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집이라고 생각해 보라. 거미줄은 마이크, 카메라, 지문 인식기, GPS추적기, 경보용 철망 , 수정 구슬 역할을 한다. 어떤 거미줄 가닥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페타바이트(100 기가바이트) 단위의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망을 만든다. 우리의 움직임이 망을 흔들어 놓아 우리의 위치와 방향을 노출시킨다. 이들 필라멘트는 스위치가 켜지거나 꺼질 있다. 거미줄들은 역사를 거스러 올라가고 미래로 나아간다. 이들은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관된 망에 우리를 연결한다. 우리의 사회경제 등급이 내려갈수록, 가닥들은 빽빽이 짜이고, 많은 가닥들에 스위치가 켜진다. ”(290)

 


【나가며 땅의 모든 소피 기억하기 위해

 

새로운 첨단 기술도구는 보다 정밀한 평가와 추적, 나은 정보의 공유, 표적 집단의 가시성 증대를 가능하게 한다. (…) 현재 복지 제도에서는 자동화된 의사 결정이 오래된 본능적인 형태의 처벌 통제와 아주 비슷하게 작용한다. 그것은 걸러내고 견제한다. 그것은 조력자가 아니라 문지기이다.”(131)

 

디지털 구빈원은 최전선에 있는 사회복지사의 때로 편향된 결정을, 첨단 기술 도구의 합리적인 차별로 대체한다. (…) 권력 집단의 계층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수학으로 세탁하는 것이다.”(295)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공공부조의 형태를 조사하고, 데이터과학자 고통을 겪었던 빈곤층과 폭넓은 인터뷰 자료 조사를 통해 디지털 구빈원의 본질을 통찰하고 이를 책에서 여러 강조하고 있다. 저자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이다. 다만 책은 여러 종류의 디지털 구빈원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보다 집중하여 저자가 주장하는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를 위한 보다 구체적인 대안은 부족해 보인다. 저자가 제시하는 연대 필요성은 전통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결속 수단이다. 이는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의 문화적 부인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 행위 이기도 하다.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다만 저자가 당부하는 것은 거대한 임무가 아닌 우리가 불편해하는 점을 서로 이야기 하는 이다. 저자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특히 사회 구성원이 개별화, 원자화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구성원들을 결속시킬 있는 연대의 실마리를 어떻게 구할 있을 것인가도 만만치 않은 숙제가 것인데, 저자는 이야기 하기에서 찾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연대 이야기 하기 통해 접착력이 발생한다.   

 

저자는 디지털 구빈원 해체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보다는 개개인의 보다 근본적인 인식 변화를 촉구한다. 어쩌면 이것이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법일지 모른다. 특히 앞서 이해해 바와 같이 전통적인 구빈원이든 디지털 구빈원이든 사회지배층은 중산층의 두려움 이용하여 빈곤층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명분을 얻는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대안은 중산층과 빈곤층이 서로 간의 이해와 결속을 통해 연대하는 것이 같다.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중산층이 보이지 않는 디지털망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언급한다. 자동화된 불평등은 중산층 빈곤층 모두에게 해를 끼치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서로에게 모두 이익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거시적으로는 디지털 구빈원의 존재가 국가가 보장하는 기본 가치인 자유, 평등, 통합의 가치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고 기업의 역할이 극대화된 현대 금융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더욱 위협적이다. 중산층이 보수화되는 것은 이들의 두려움을 이용한 지배층의 정치공학 결과일 수도, 사회 지식인들과 중산층의 문화적 부인 수도 있다. 공동체에서 살면서 불평등으로 배제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고 공감하는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중요한 시민의 책무가 같다.

 

문득 책의 페이지를 보고 소피에게라는 저자의 헌정사를 발견한다. 아마도 소피는 책에서 메디케이드 혜택의 수혜가 거부되었다가 회복한 스타이피즈 가족의 딸일 것이다. 소피는 저자와의 마지막 인터뷰를 끝낸 8 심장마비로 사망한 소녀이다. 사회에 존재하는 불편함과 우리 삶을 위협하는 조건들에 보다 민감하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다른 소피를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맞이하는 출발점이 같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없는 존재다. 인간의 편견과 부주의로 마련된 기준으로 누군가 공동체로부터 배제가 된다면 구성원은 곧바로 실존적인 위기에 직면한다. 다른 소피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외면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것이다.

 

책을 덮는데 문득 저자가 인터뷰를 했던 젊은 엄마와의 대화가 다시 떠오른다.

 

사람들(개별사회복지사) 대단해요. 그걸 (사회복지사업) 이외에 추적 장치로도 이용해요. (…)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좋을 거에요. 다음은 당신들 차례니까.”(27)     

 

그녀는 생활보호대상자였으며, 디지털 구빈원의 도움과 감시를 동시에 받았다. 우리 사회가 다른 소피 잃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가 기억해둘만한 경고다










#네이버원탁의서평단

(https://cafe.naver.com/book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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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의 철학
엠리스 웨스타콧 지음, 노윤기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단순한 삶의 철학

(원제: The Wisdom of Frugality)

엠리스 웨스타콧(Emrys Westacott) 지음 | 노윤기 옮김 | [책세상]

 

 

이번에 읽게된 <단순한 삶의 철학> 대한 글은 기존의 독후감과 유사한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보다 간결하게, 내가 받은 인상을 책은 어떤 책이다라는 방식으로 정리해보려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생각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다.

책의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에 대해 출판사에서 제시한 자료를 보면 미국 뉴욕 소재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서 본인 자신은 지독한 구두쇠로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나 책에서는 독자에게 검소한 삶만이 길이다라고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소박하고 단순한 선배 철학자들이 주장했고, 이를 찬양했다고 하여 우리도 여기에 따라야하는가를 묻는다. 책의 원제(검소함의 지혜) 고려하면 결국 저자의 입장은 소박하고 검소한 손을 들어주고 있긴 하지만, 이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을 공개하듯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인상을 받는다.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대해 의심하기, 일상에서 철학하기를 우리에게 책전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견해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선택은 각자의 논리와 철학에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저자가 제시하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하나하나 따라가며 자신의 견해와 비교해보면 것이고,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천천히 읽는 책이다.

저자가 어떤 관점에 대해 소개할 , 다양한 견해를 제시해준다고 말했다. 동전의 양면을 모두 면밀히 살펴보듯, 해당 관점에 대해 저자는 반론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뚜렷한 주장이 없이 저자의 논점이 없어보이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반론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은 긴장의 이완이 없이 지속적으로 긴장상태에 있는 같아 속도감있게 진행되지 않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책은 소박하고 검소한 삶과 우리의 행복한 , 의미있는 삶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소개해주는데, 고대의 철학자 뿐만 아니라 알랭 보통과 같은 동시대의 저술가도 소환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제시하는 문장의 의미는 저자가 정리한 고대 철학자나 동시대 철학자의 저서에 대한 서평이기도 하다. 책은 독자의 수준에 따라 저자가 제시해주는 견해들을 이미 알고있다면 빠르게 읽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천천히 읽을만한 책이다. 어떤 점에서는 <단순한 삶의 철학>  검소한 삶의 미덕으로 가기 위해 저자가 오랜 시간 함께해온 책들과 삶의 철학이 함께 녹아든 독서에세이라고 수도 있겠다. 저자의 폭넓은 독서 경험과 검소한 삶의 미덕 대해 생각해온 저자의 고민이 들어있는 만큼 천천히 읽으며 독자 자신의 생각을 부추기는 책이기도 하다.

 

 

<단순한 삶의 철학> 유연한 윤리학을 보여준다.

윤리학/철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우선 자신이 책을 읽으며 받은 인상은 책이 북미의 실용주의 윤리학의 전통을 잇는 실천윤리학적 맥락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실천윤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피터 싱어의 철학과 생각하기의 방식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치에 대해 우리의 일상의 실례를 다양하게 고찰하고, 다양한 관점을 모두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서양철학사 2000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는 영국 철학자 화이트 헤드(White Head) 말을 떠올려본다. 플라톤 철학의 전통은 이데아 철학임을 인정한다면, 이데아 영원불변의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다. 여기서 플라톤을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단순한 삶의 철학> 원제가 의미하듯 소박한 삶의 지혜라는 (저자의) 기준을 가진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전통을 잇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길에 이르기 위한 과정은 상당히 유연하고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 또한 우리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어떤 가치 대해 다시 들여다보기를 실천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경제를 북돋우기 위해 지역 농산물만을 구매하여 섭취하는 것이 좋다라는 주장을 놓고 , 피터 싱어가 그의 <죽음의 밥상>에서 다양한 입장을 모두 고찰하던 모습을 책의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도 유사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 측히 후기 자본주의로 대두되는 지구촌에서 물질적 풍요와 소비의 향유는 성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풍요속의 빈곤, 공허감을 이야기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책은 결국 이러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검소한 사람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고, 우리의 일상에서 각자가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실천의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책이 아닐까 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읽고 옆길로 흔적 단상들

저자는 고대 철학자, 사상가들의 시대와 현대 시대는 분명 삶의 양태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이 인식하고 제시한다. 가진 것이 부족하고, 소수의 특권 귀족 계층만이 부를 누리던 고대 사회에서는 귀족 계층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금욕주의 칭송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금욕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다’(49)라고 저자도 주장하고 있듯이, 저자는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한 고려를 놓치지 않는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역시 2년에 가까운 속에서의 생활에 기반하여 <월든>이라는 책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역시 전세계가 긴밀히 인터넷과 전화 등의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소로의 실험적인 삶은 사실 접근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2018 현재, 자본주의적인 경제구조가 지구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잡리잡을 있었던 이유 하나는 서구의 자본주의가 지구촌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개성이란 개념을 발명(?)하고 주입시킨데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욕구 가지고 있다. 생물체로서,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말이다. 자본주의는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점으로 우리에게 안심시키며, 우리가 자신들의 욕망 충족하기 위해 자유의지 갖고 이를 추구하도록 독려한다. 저자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그른 일일까를 반문해보면서도, 보다 중요한 것은 욕망 모습이 어떤 양태를 가지며,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따져보라는 것이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 교수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간결히 말하면,  어떤 가치 주장에 대해 단순히 수긍하기 전에 각자가 따져보라 것이다. 그리고 판단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다. 저자는 끝없이 의심하고 소소한 반론을 제기한다. 저자는 심지어 끝없는 욕망이 불행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127)라고 까지 주장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높고 강렬하고 광범위한 행복의 동력이 되는 경우도 있다’(127) 점이다.

 

그러나 책의 후반에서 다루고 있듯 우리 현대인들은 개성 표출, ‘욕망 충족을 위해 많은 시간을  일해야만하는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차혁명이라는 화두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공지능에 기반한 삶의 혁명은 우리의 삶의 질을 보다 높여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당장은 우리의 삶을 좀더 편하고 일처리를 빠르게 해주는 자동화 과정에서 현대 기술은 인간의 생산성을 더욱 압박하는 양상도 무시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자동화 설비를 통해 일주일하던 임무를 하루만에 해냄으로써 기존의 작업방식을 혁명적으로 개선했지만, 이는 또다시 노동자로하여금 일주일 내에 일곱배의 일을 완수하도록 강요하는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현대인들, 특히 노동자들의 삶은 노동시간이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 내에 많은 일을 하도록,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모순을 가져왔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저자가 소박한 사람또는 검소한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노동시간을 언급하는 것도 분명 검소한 에는 삶의 대한 고려도 분명 포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있었다.  

 

저자가 보여주는, 혹은 저자가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검소한 모습을 글로 모두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를 글로 표현하고 타인에게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책의 가치는 저자가 독자들을 각자 나름의 고유한 점과 보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한번 면밀히 들여다보라고 권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낯설게 보라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책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성찰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라는 주장에 대한 실천적 가능성이라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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