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관점
짐 알칼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윌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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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해하는데 물리학이 필요한 이유

-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2022)



 

과학 대중화의 시대다. 인류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어느 때보다 과학의 힘을 등에 업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어느 국가나 과학 기술은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다. 특히 과학 교육은 국가의 중대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영국의 과학자이자 과학저술가로 과학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짐 알칼릴리가 지적하듯이 과학은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과학 활동은 결국 인간이 개입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역사의 숱한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나아가 인간이 그릇된 의도로 과학을 활용하면 과학은 다시 인간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정황은 과학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과학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물리학이 인간의 그릇된 의도를 견제하고 걸러낼 수 있는 물리학만의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현재 영국의 대표적 과학저술가이자 과학자인 3인방을 꼽으라면, 존 그리빈(John Gribbin), 필립 볼(Philip Ball), 그리고 짐 알칼릴리(Jim Al-Khalili)를 떠올릴 수 있겠다. 그동안 알칼릴리가 참여한 물리학 영상 몇 편 본 적은 있었지만,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서 몇 권을 포함하여 읽은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를 읽으면서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담담하게 설명하던 저자의 모습을 함께 떠올려 보았다. 이 책에서는 물리학 덕후가 보여주는 물리학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물리학은 이 세상, 온 우주를 이해하는 도구라는 믿음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하긴 이런 신념 없이 그 어려운 공부를 해내고 40년 넘게 연구를 지속하며 사람들에게 그 애정을 전파할 수 있을까.

 


본격적인 물리학 지식을 열거하기 전에 저자는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명분삼아 선언한다. “세상을 이해하는데 물리학이 결정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싶습니다.”(12) 이것이 저자가 책을 쓴 목적이기도 하다. 저자의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물리학이야말로 실재의 진정한 이해로 가는 길”(287)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 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물리학 대중서로는 부담스럽지 않은 두께에 현재 이루어지는 물리학의 다양한 연구 주제를 포함시키느라 주제별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물리학이라는 신념을 설득력 있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목적을 위해 제시하는 근거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내용은 과학의 검증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물론 이 특징은 과학을 공부한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결코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하지만 이 검증가능성이야말로 과학을 다른 학문 분야와 구별 짓는 과학만의 가치를 대변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알칼릴리가 과학의 진정한 가치는 확실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개방성으로부터 나옵니다”(273)라고 한 말에 새삼 공감한다. 일반 독자로서 과학에 대해 갖는 막연한 믿음, ‘과학은 확실함에 있다라는 주장에는 주의가 필요하다는 의미로도 다가온다. 내게는 과학이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검증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저자에 따르면 과학은 관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를 입증 가능해야 한다. 나아가 합리적인 설명에 입각하여 새로운 현상에 대한 예측도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를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에 따라 당장 검증이 불가능한 이론도 있을 수 있지만, 저자의 경우는 이 점에서 매우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듯하다. 현재 인간의 힘으로 검증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검증을 추구하여 보다 깊은 이해에 다가가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번 독서에서 또 다른 저자의 인상적인 견해는 수학적 이론을 찾는 것만큼이나 올바른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144)는 언급이다. 그는 이론물리학자이면서도 수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무엇보다 도출된 결론으로부터 물리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이 책 전체에서 저자는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실재를 가장 심오하고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192)에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실재론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리고 이 실재론의 입장에서 양자역학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때 저자가 언급하는 실재론이란, ‘인식의 대상이 주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견해’(137)를 말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인식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대상이나 현상을 실재한다고 인정하는 관점이다.


 

이 맥락에서는 양자역학적 실재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아인슈타인과 물리학사상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코펜하겐 해석과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현상학적인 입장에 서있는 코펜하겐 해석과 거리를 두며, 우리가 대상을 측정하지 않아도 대상은 존재한다고 본다. 반면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여러 상태가 중첩되어 있던 대상을 측정한 후에는 측정 전의 상태가 붕괴되어 버리고 사라진 다음, 하나의 결과로 도출된다는 입장이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 코펜하겐 해석은 측정 전과 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주목하지는 않는 듯하다. 반면 저자를 포함한 실재론자의 입장에서는 측정 전후에도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된다. 이 부분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견해가 모두 대상,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다른 해석, 다른 입장이라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교과서에는 코펜하겐 해석이 우선적으로 소개가 되어있다. 반면 저자는 이 견해와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교과서에 나온 지식이라도 우리가 과연 현상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활동은 역시 과학에 대한 저자의 강한 신념에서 나왔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제기된 개념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말이다. 아랍의 후예이기도 한 저자는 17세기 초 아랍 학자 이븐 알하이삼이 전개한 운동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알하이삼이 제창한 알슈쿡(al-Shukuk)을 제시한다. 이것은 의심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알하이삼이 과거의 지식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증거 없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73)고 주장하며 전개했던 철학운동이었다. 이 견해는 물리학을 비롯한 현대의 모든 과학 분야가 성립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들어있다. 바로 지식에 대한 검증가능성을 중요한 가치로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태도는 과학뿐만 아니라 현대의 모든 학문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자 토양이 아닐까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자는 물리학이야말로 실재에 대한 이해로 안내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으로부터 일반 독자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무엇보다 이븐 알하이삼의 태도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바로 합리적인 의심을 갖는 태도 말이다. 이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과거의 지식을 시험대에 올려놓아보려는 자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체가 부분의 합이라고 보는 환원주의자의 면모를 강하게 보이는 저자가 비판한 필립 앤더슨의 견해도 궁금해진다. 저자에 따르면 노벨상 수장자인 이론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은 극단적인 환원주의에 반대하는 논문을 썼다. 짐 알칼릴리는 필립 앤더슨의 논리가 약하다고 비판하는데, 환원주의적인 면모에 가반을 두고 있는 물리학자가 극단적인 환원주의를 경계하는 시도 자체가 신선했기 때문이다. 물질세계를 이해하려는 두 물리학자가 환원주의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가지고 각자의 주장을 주고받는 일 자체가 내게는 인상적이고 유의미하다고 본다. 이런 전통이 우리 사회에서는 얼마나 뿌리내리고 있는지 점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짐 알칼릴리는 물리학의 가능성에 대해 강한 신뢰를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 도구의 한계 역시 분명히 인식한다. 그는 물리학 지식은 아직 설명되지 않은 거대한 바다에 둘러싸인 섬과 같다”(288)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평생 몸담아온 물리학은 세계를 이해하며 얻는 경외감으로 보답하는 지적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흔한 비교나 비유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대체로 단도직입적인 스타일로 설명한다. 하지만 그가 물리 현상에 대해 의인화된 비유를 사용한 대목이 재미있다. 일반상대성이론을 소개하는 장에서 그는 중력이 강한 곳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소개하고자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이 가장 느린 곳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천천히 늙으려고 하는 것이죠.”(89) 그러면서 그는 정말 아름다운 설명 아닌가요?’라며 스스로 만족해한다. 이 문장을 쓰고는 좋아라하는 물리학자라니.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독자는 이 책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여러 첨단 연구 분야에 대한 이해를 다 하지 못하더라도, 저자의 물리학에 대한 신념과 사랑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무엇보다 과학이 오랜 역사를 통해 검증을 거쳐 만들어져왔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분야라는 점 하나를 배워간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1] "세상을 이해하는데 물리학이 결정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싶습니다."(12)

[2] "아랍학자 이븐 알하이삼은 17세기 초에 ‘의심‘을 뜻하는 ‘알슈쿡 al-Shukuk‘이라는 철학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특히 고대 그리스인들의 천체역학을 지적하면서 과거의 지식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증거 없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적었습니다."(73)

[3]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항상 시간의 흐름이 가장 느린 곳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천천히 늙으려고 하는 것이죠."(89)

[4] "수학적 이론을 찾는 것만큼이나 올바른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144)

[5]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실재를 가장 심오하고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192)

[6] "과학의 진정한 가치는 확실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개방에서 나옵니다."(273)

[7]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주에 대한 모든 ‘왜‘와 ‘어떻게‘를 알고자 한다면, 물리학자들이야말로 실재의 진정한 이해로 가는 길입니다."(287)

[8] "물리학 지식은 아직 설명되지 않은 거대한 바다에 둘러싸인 섬과 같다."(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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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07 0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합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

mini74 2022-05-07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저도 축하드려요 ~~

이하라 2022-05-07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기쁜 주말되세요.^^

thkang1001 2022-05-0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되시길 기원합니다!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 한국 사회는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김승섭 지음 / 난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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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치료고통을 말하는 자에게 듣는 자의 배려가 필요하다

- 김승섭의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2022)



 

김승섭 교수는 질병에 관계된 사례들을 들여다보고 통계 자료를 살펴보는 보건학자다. 이번에 그는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에서 트라우마에 주목했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책에서 1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일명 PTSD에 대해 이야기했다. 흔히 PTSD는 베트남 전쟁이나 아프간 전쟁, 9·11 사건과 같은 큰 사건을 경험했던 이들만 겪는 증상으로 여겨지기 쉽다. 나도 막연하게 이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정과 같은 일상적인 생활환경에서도 겪을 수 있는 증상이었다. 강간과 구타, 학대와 같은 가정 폭력이 대표적인 원인이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건에서 외상을 경험한 이들이 소외와 고립을 겪는 상황에 주목했다. 피해자들은 말하지 못하는 슬픔과 고통을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이 홀로 감내하곤 했다. 최근에 언론에서 많이 다루었던 가정폭력 사건 피해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저자는 실제로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을 만나고 이들이 마주했던 현실을 들여다보았다.


PTSD 증상에 대해 무지했던 시절에는 의학 연구자들마저 피해자의 결함을 의심했다고 한다. 군인의 경우, 나약함의 증표로까지 여겨졌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의 원인을 이들의 내부에서 찾았던 셈이다. 하지만 두 번의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의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 결과는 PTSD의 원인이 외부에서 온 것임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통계자료에 따르면, 천안함 침몰 생존자들이 겪은 트라우마 증상의 유병률이 아프간 및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보다 월등히 높았다. 이 자료는 우리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기억의 고통만이 아니었다. 많은 피해자들은 뜻하지 않게 사회의 편견과 비난, 그리고 이로 인한 수치심까지도 마주해야 했다. 그나마 세월호 사건의 경우, 극심한 심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학생들 곁에 너희들이 원할 때 상담할 수 있다라며 곁을 지켜준 의사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피해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저자는 피해자들과 심리치료 현장 관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주목한 현실은 PTSD를 겪는 피해자들이 홀로 맞서 싸워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음을 보여주었다. 피해자들이 치료과정의 중심에 있지 않았던 행정절차는 피해자들에게 2차적인 고통까지 전가했다. 이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내면에 받은 충격과 고통의 에너지가 언어를 통해 외부로 발화되는 과정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다. 트라우마 치료는 고통을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의 신뢰 위에 양쪽이 함께 손을 잡는 과정이었다. 고통을 말하는 자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할 듯하다. 트라우마 치료는 단순히 피해자에게 손길을 내미는 행위로 끝나지 않았다. 듣는 자가 고통을 말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손을 내밀지도 고민하고 배려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1] "PTSD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극심한 외상 경험 후 생겨날 수 있는 불안장애 중 하나인 정신과 질환이다."

[2] "강간과 구타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성폭력과 가정 폭력은 여성의 삶에서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험의 범주 바깥에 있다."
- 주디스 허먼의 저서 《트라우마》에서 재인용된 문장.

[3] "PTSD 치료에서 트라우마 사건을 경험한 직후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도 당사자에게 안전함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트라우마는 삶의 통제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경험이기에, 그 회복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안정을 취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4] "PTSD 치료의 핵심은 생존자를 지지해주며 그가 준비되었을 때 트라우마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5] "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다."
-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 「에이즈와 사유」, 167면에서 재인용된 문장.

[6] "트라우마는 예상해본 적 없는 외부 힘에 의해 자아가 손상당하는 경험이다. 삶의 통제권을 빼앗긴 기억이다."

[7] "피해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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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5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08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환각 -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올리버 색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알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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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은 신체 및 신경계를 들여다보는 문이다

- 올리버 색스의환각(2013)

 



올리버 색스가 지난 2015830일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한 지 6년이 다 되어 간다. 신경과 의사이자 저술가였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환각 증상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심지어 약물을 직접 체험하여 증상을 기록하거나, 환자의 소견을 면밀히 듣고 기록했다. 오늘 읽은 환각은 색스가 여든이 다된 시기에 집필하여 80세가 되던 2012년에 출간한 책이다. 1958년에 그가 의사자격을 취득하고 신경학자가 되었으므로, 의사가 된 지 54년이 지난 시점에 출간한 책이다. 내 나이보다 더 긴 시간을 오로지 이 분야에 종사하면서 환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며 공부한 결과를 정리한 책이다. 책을 덮은 후 이런 정황을 생각해보니 더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성인기 전체가 오롯이 담겨 있는 결과물이었다.


이번 환각은 꽤나 더디게 읽었다. 환각과 관련한 개념 및 용어가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환각(hallucination)'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거나 듣는 현상을 말한다.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환각 증상 중에서 내가 경험한 것으로 보이는 증상은 죄수의 시네마라고 알려진 감각 박탈 현상, 귀울림/이명, 몇 가지 편두통 전조 증상(안내 섬광, 요새 무늬와 같은 것), 부분(초점) 발작, 입면 환각(잠이 들 때 무늬와 형체가 만화경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환각), 수면마비 정도다. 물론 문외한인 내가 책에 소개된 증상만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환각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체 증상들이었다.


구정 연휴 전에 갑작스럽게 대상포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대상포진이라는 녀석은 어렸을 때 몸에 들어왔던 수두 바이러스가 신경절에 잠복해 있다가 건강상의 균형이 깨지는 경우, 이를 테면 피로가 쌓였을 때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러한 단순포진 바이러스가 후각 신경을 포함한 신경을 공격할 때 환각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바이러스가 신경에 손상을 입히거나 자극하면서, 예를 들어 후각 환각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매우 둔한 편이라 대상포진을 겪기 직전에 전조 증상으로 특정한 냄새 환각을 경험했는지 잘 모르겠다. 특별히 불쾌한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다. 따라서 이 바이러스가 내 후각신경에 영향을 주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중요한 점은 환각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흔히 간질로 알려진 뇌전증에 관한 설명이었다. 뇌전증은 뇌 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키고 과도한 흥분 상태를 유발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이로부터 나타난 의식 소실, 발작, 행동 변화 등과 같은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은 만성적, 반복적으로 뇌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뇌에서 비정상적인 전기 방전이 갑자기 발생하여 일시적으로 뇌 기능에 마비가 오는 상황이다.


우리는 역사상 여러 위인들이 간질을 겪었다고 알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다. 색스에 따르면, 그는 무아경 발작을 겪었다. 이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고통과 두려움만 맞는 것이 아니라 황홀감과 같은 초월적 기쁨을 공통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한 가지 주목한 곳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역자가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 시절, 어느 부활절 밤최초의 간질 발작이 있었다는 다분히 시적인술회를 남겼다.”(문학동네, 2020, 제2권 446)라고 소개한 부분이다. 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최초로 간질 발작을 경험한 시점이 총살형 직전에 살아나 수감된 시베리아부터라고 언급했다.


반면 색스는 환각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최초 발작 시기를 다르게 이야기한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발작은 유년기에 시작되었지만,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돌아온 후 40대에 들어서야 빈번해졌다.”(198)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이미 유년기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도스토옙스키)의 친구인 소피아 코발레프스키가 유년의 기억 Childhood Recollections에서 쓴 것처럼, 최초의 발작은 어느 부활절 전야에 일어났다(알라주아닌은 도스토옙스키의 간질에 관한 논문에 이 책을 인용했다)."(198-199)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부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을 최초로 유발한 원인이 총살형의 공포로 인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 아니면 유년기의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색스의 설명이 옳다면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총살형의 공포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번역자의 해설에는 올리버 색스가 제시한 두 가지 사실이 뒤섞여 버린 것 같다. 그러니까 번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유년 시절 어느 부활절 전야에 최초로 경험했던 간질 발작에 관한 언급과 시베리아 유형 시절에 본격적으로 겪기 시작한 발작 사례를 섞어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정리하면 색스가 진술한 부분이 옳을 경우, 죄와 벌(문학동네, 2020) 번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최초로 발작을 겪은 시기를 총살형 집행 경험 이후 시베리아 감옥에 수감된 기간 중으로 오해한 듯하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에 영향을 준 것이 총살형의 공포인지, 아닌지를 나누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생물학적/유전적 원인인지 아니면 심리적/문화적 경험이 원인인지, 혹은 어느 쪽이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판단하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색스의 서술이 옳다면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은 총살형의 공포로 처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아마 유형지에서 경험한 발작에는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는 이미 어렸을 때에 발작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생물학적인 원인 혹은 어렸을 때의 어떤 심리적/문화적 경험이 원인이 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번역자 혹은 출판사에서 사실관계를 다시 검토하셨으면 하는 부분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뇌전증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신경학자 게슈빈트의 논문 내용이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성격을 논문에 이렇게 묘사했다. “도덕성과 예의 바른 행동에 점점 집착하고 몰두한 점, ‘사소한 논쟁에 말려드는경향이 갈수록 강해진 점, 유머의 부족함, 상대적으로 성에 무관심한 점, 그리고 높은 도덕적 어조와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사소한 모욕에 쉽게 화를 낸 점”(200). 게슈빈트는 이 증상을 발작 휴지기 성격 증후군이라고 언급했는데(현재는 게슈빈트증후군으로 알려짐), 이 증후군을 겪는 환자들은 종교에 대단히 열중하고, 때로는 강박적으로 글쓰기 혹은 강한 예술적 열정을 보인다고 한다. 색스는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이 증상을 보고 떠오른 사람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그 역시 간질을 앓았다. 또 고흐에 관한 영화, 그가 남긴 편지와 관련 서적에 기록된 고흐의 행동을 떠올려보면, 그 역시 종교에 대한 열정, 강박적인 예술적 열정과 사소한 모욕에 쉽게 화를 내는 행동을 보였다. 색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무아경 환각을 수반한 증상은 측두엽 발작 초점의 활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측두엽 부위의 특정 부위에서 과도한 흥분 상태를 보인다는 말이다.


환각에는 환각 증상과 관련한 다양한 증세와 관련 설명이 나온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섬망이 기억난다. 이 증상은 고열을 수반한 감염병 또는 신부전, 피질환, 당뇨 조절 실패 같은 문제들로 인해 의식이 요동치는 상태”(227)를 말한다. 이 섬망을 겪는 경우 대개는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는 징후라고 한다. 색스는 마이클이라는 사람의 사례를 소개했는데, 그는 중증 간염으로 간에 손상과 경변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신체는 단백질 소화 과정 및 부산물의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색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치즈를 권고량보다 많이 섭취했다. 그 결과 그는 꿈을 꾸듯 불안정하고 무의식적인 운동을 경험했다. 단백질 소화 과정에서 나오는 성분들이 뇌신경을 중독시켜 섬망 증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올리버 색스가 소개하는 다양한 환각 증상은 섬망처럼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경우 경험하기도 하지만, ‘입면 환각과 같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환각 증상이 있다. 특히 색스는 편두통과 같은 여러 신체 징후와 이를 통한 환각 증상을 몸의 신경계를 보여주는 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또 문외한인 내가 혼동할 수 있는 꿈과 환각은 엄연히 다르다고 덧붙인다. 그의 관점에서 환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인데, 여러 가지 감각 신호를 처리하는 뇌의 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색스는 신체가 드러내는 여러 징후가 신경생리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신체가 사회적·문화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사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색스는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에 자신이 경험한 출면 환각경험을 이야기했다. 출면 환각은 잠이 깨면서 겪을 수 있는 시각 환각이다. “잠에서 깨어보니 턱수염이 까맣고 소심하다기보다 싱글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마흔 살의 내 얼굴이 보였다. (...) 선명하지 않은 파스텔색으로 희미하게 공중에 떠 있었다.”(263) 여든 살에 가까운 저자가 잠에서 깨어보니 마흔 살 즈음인 자신의 모습을 환각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는 이 출면 환각경험에서 40년의 세월을 건너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출면 환각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자신의 신체가 드러내는 증상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는 저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편두통을 앓았고, 이 증세가 신경계를 보여주는 창으로 여기게 되면서 신경과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문외한인 나는 그와 같은 관심사를 신체의 신비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몸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몸에 드러난 증상은 나의 신경계를 비롯한 신체 현상의 보편 원리와 자연의 원리를 몸소 보여주는 기회였다


환각을 읽고 좋은 점 한 가지를 더 들 수 있겠다. 그건 문학작품에서 유령/환영 혹은 환각에 관련한 장면이 나올 때, 인물에 관한 심리적 문화적 배경을 한 층 더 깊이 짐작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일리아드, 오디세이, 성경에 등장하는 환영과 환청 사례에 다른 맥락을 가지고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에드거 앨런 포, 드 모파상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과 만나게 될 때, 색스의 아이 같은 호기심을 떠올리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 "암페타민이 주는 김빠진 조증과는 달리, 책을 쓰면서 얻은 기쁨은 진짜였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질적이었다. 나는 다시는 암페타민을 먹지 않았다." (158)

[2] "나는 자신의 편두통 경험을 일종의 자동적인(그리고 운이 좋게도 거꾸로 복기할 수 있는) 자연의 실험, 신경계를 보여주는 창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신경과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169)

[3] "편두통의 기하학적 환각은 신경계 기능의 보편 원리뿐 아니라 자연 자체의 보편 원리를 몸소 경험하게 해준다." (172)

[4] "발작이 다른 형태의 의식, 다른 시공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고 느낀다." (185)

[5] "지금은 기억이 프루스트의 식료품실에 진열되어 있는 절임과일 병처럼 고정되거나 동결된 것이 아니라, 회상이라는 행위를 할 때마다 변형, 해체, 재조합, 재분류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7)

[6] "상기는 고정되어 있고 죽어 있는 파편의 흔적들을 다시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상기는 조직화된 과거의 반응이나 경험의 살아 있는 덩어리 전체와 우리의 태도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형성되는 상상력이 가미된 재구성 또는 구성이다. (...) 그러므로 상기는 사실 거의 정확하지 않다." (197)

[7] "입면 환각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나 어둠 속에서 보이고, 가상의 공간에서 조용히, 쏜살같이 지나가며, 대개 물리적으로 방 안에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출면 환각은 눈을 뜬 상태에서 밝은 조명에서 나타나고, 외부 공간에 투사되는 경우가 많으며, 완전히 입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느껴진다." (260)

[8] "유령, 죽은 자의 돌아온 망령을 보는 환각은 특히 폭력적인 죽음 및 죄의식과 관계가 있다. 유령 출몰과 환각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문화의 신화와 문학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286)

[9] "애도 과정에서 환각이 나타나는 것은 정상이며 유족에게는 도움이 된다." (290)
- 웨일스의 일반의 W.D. 리스의 말.

[10] "드 모파상은 소설을 쓸 때 자신의 분신, 즉 자기 환각의 상을 보았다고 한다. (...) 드 모파상은 당시 신경매독을 앓았고, 병이 악화됐을 때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하고서 거울 속의 자신에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고 악수까지 하려 했다고 전한다." (327)

[11] "뇌의 신체 표상은 서로 다른 감각들의 입력 정보를 간단히 휘젓기만 해도 깜빡 속아 넘어가기 일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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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05 0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리뷰는 어제 앱으로 읽고 댓글을 바로 못 올렸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도 초란공님께서 많은 문장을 할애하신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이력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초란공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발병 시기에 대한 정확한 특정이 ˝생물학적/유전적 원인인지 아니면 심리적/문화적 경험˝ 때문인지, 즉 문화인지 생물인지 혹은 얽힘인지의 문제까지 끌어가셨네요.
중요한 지적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팩트체크(?^^) 해볼 가치가 있겠는데요.


그런데, 곁가지 이야기지만, 제가 작년에 올리버 색스 책들 한 달 정도 집중해 읽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올리버 색스가 본인의 기억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향정신성 물질과 친해진 이후 기억력이 확 나빠졌는지를 회상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책 2권에서(어떤 책들인지 기억 불명확하나 [온 더 무부]는 그 중 한 권으로 확실할 것 같습니다) 에피소드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더라고요. 당시 책 읽으며 저는, 이렇게 머리가 좋으신 분도 자기 이야기하는데 기억이 혼란스러우시구나. 연세드셔서 그런가...하며 지나갔습니다. 간질 발병 시기에 대한 팩트체크가 의외로 싱거울 수도 있겠다는 경솔한 생각도 해보고요.

초란공 2022-02-05 09:26   좋아요 0 | URL
네^^ 책에서도 본인이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ㅋㅋ^^;;

얄라알라 2022-02-05 0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환각> 읽으신 후, 좋아하시는 문학 작품 속 환영 환청 사례를 다른 각도에서 보실 수 있을 거라는 말씀, 긍정의 말씀, 같이 책 읽는 온라인 친구로서 좋습니다.

저는 <환각> 읽은 후 <장판에서 푸코 읽기> <나, 나자신 그리고 그들> 등의 책을 읽을 때 확실히 질문이 풍부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제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1/2정도 다시 읽었는데, 역시나 올리버 색스는 ˝병˝을 상실이나 쇠락이라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보았더군요. 그런 관점이 <환각>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고, 제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행복한 주말 아침 시작하시기를.

초란공 2022-02-05 09:29   좋아요 1 | URL
<장판애서 푸코 읽기>는 궁금하던 책이네요. 이 책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저는 확실히 책을 빨리 못읽지만 또 다른 책이 정해지면 열심히 따라가보겠습니다~! 정성껏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얄라알라 2022-02-05 0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대상포진 이겨내시느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몸 힘드신 와중에도 <환각> 읽으시며 리뷰 약속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상포진 성인이 어린이와 같이 생활할 경우, 수두 예방접종 여부와 별개로 수두 옮길 수 있다 합니다. 하지만 괜찮으셨을테니, 참 다행입니다.

초란공 2022-02-05 09:4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ㅜㅜ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로가 풀리는 정도가 이젠 다르더라고요 ㅋ

얄라알라 2022-02-05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쉬시는 주말이신데...^^;;

제가 제 서재에 ˝라 & 라 &란˝이라고 이름붙여 보았답니다.

여유되실 때,https://blog.aladin.co.kr/757693118/13317879
클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치명적 동반자, 미생물 - 병원균은 어떻게 인간의 역사를 만들었는가
도로시 크로퍼드 지음, 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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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동반자, 미생물

: Deadly Companions

도로시 크로퍼드(Dorothy H. Crawford) 지음 | 강병철 옮김

[김영사] | (2021)

 



미생물의 관점에서 인간을 본다면

 


새해가 시작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를 찾아온 지 2년이 넘었다. 마스크를 하고 다니고 예전 보다 손 씻기를 자주 해서 그런지 대신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기나 독감 바이러스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와 세균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물량을 형성한다고 한다. 적어도 40억 년 전부터 이들은 이어져오고 있으니, 지구의 진정한 주인은 미생물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지구의 역사에서 단지 뒤늦게 등장하여 조금 튀는 존재들일 뿐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세균을 비롯한 미생물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바이러스학 분야 전문가 도로시 코로퍼드의 치명적 동반자, 미생물은 어쩌면 당연한 진리를 인류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지구의 진정한 주인인 미생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책을 읽으면서 미생물에게는 인간이 매우 탁월한숙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도시라는 공간에서 과밀한 상태로 존재하는 이 동물은 숙주로서 매우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다. 게다가 이동 속도와 이동 범위는 전 지구적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확장된 이동성(mobility)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이 동물들은 미생물들이 바다 건너 새로운 세상으로 진출하는데 유일무이한 도움을 준다. 호주와 영국 사이의 거리를 오가는 데 1년 걸리던 인간은 300년이 안 되는 시간동안 이동시간을 하루로 단축해놓았다. 이보다 더 기특한 숙주가 어디 있을까. 뿐만 아니라 개발과 탐험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숲에 제 발로 찾아와 숲을 들쑤시고 미생물을 모셔간다. 각종 야생 동물을 먹거나 밀거래를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다니. 인간이라는 숙주는 미생물의 증식과 점유 활동에 이용될 수 있게 끊임없이 초대장을 보내고 있다.


 

치명적 동반자, 미생물을 읽다보니 인간이 영웅을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미생물의 관점에서 얼마나 가소로울까 싶은 생각이 든다. 마치 인간의 역사는 미생물이 건드리고 조종해온역사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아즈텍 문명과 페루 잉카 문명은 유럽인들의 침입과 파괴로 몰락했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존재는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용맹무쌍한 기병과 보병들이 아니라, 이들이 구세계에서 들여온 천연두였다. 1980년에 전 세계에서 천연두의 박멸을 선언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감염자 3분의 1이 사망하는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한 가지 더 인상적인 사례를 들자면, 나폴레옹에 얽힌 역사를 떠올려볼 수 있다. 카리브해지역의 국가, 특히 아이티는 프랑스인들이 주를 이루는 백인들이 5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납치하여 데리고 와 이룬 국가나 다름없다. 백인들의 가혹한 폭력과 열악한 환경에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고 흑인 노예 지도자 투생을 체포하여 사망케 한 이는 나폴레옹이다. 하지만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은 황열(yellow fever)'였다.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보다 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병사들은 순식간에 떼죽음을 맞았다. 막대한 전투력 및 재정 손실로 프랑스는 뉴올리언즈를 포기하고 소유하던 루이지애나주를 헐값에 미국에 매각하기에 이른다. 이는 미국 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준 사건이다.


 

나폴레옹의 욕망이 신대륙에서 좌절된 후, 이번에는 유럽 정복에 대한 야망을 새롭게 불태웠다. 유럽 정복을 위해 동진하여 모스크바를 친다는 무모한 계획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선 것이다. 나폴레옹은 50만 명 이상의 병사들과 출정했지만, 모스크바에서 생환한 병력은 겨우 35천 명이었다. 무엇보다 90%가 넘는 병력 손실은 그가 치열한 전투를 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발진티푸스때문이었다. 이듬해에 다시 50만 명을 징집하여 독일과 전쟁을 하면서도 결국 유럽 정복을 실패하게 만든 가장 큰 방해요인이 바로 발진티푸스 리케차라는 미생물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좀 더 높았더라면과 같은 가정이긴 하지만, 나폴레옹이 미생물의 영향 없이 자신의 야망을 이룰 수 있었다면 세계사의 모습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다른 예로 아일랜드 대기근이 있다. 이 사례는 전쟁 상황이 아니더라도 미생물과 인간의 삶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신대륙에서 유입된 감자는 대부분의 기후와 토양에 잘 견뎌내었기에 유럽, 특히 아일랜드에서 매우 중요한 작물이었다고 한다. 1845년에 찾아온 감자잎마름병으로 첫 해에 수확량이 40% 감소하기 시작, 이듬해에는 90%가 감소했다. 이렇게 비극의 연쇄효과는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수입과 먹거리가 줄어 소작료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가족이 굶게 된 상황에서 지주는 수익이 줄어들어 하인과 마부까지 해고했다.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실업자가 많아지면 생산품에 대한 구매력이 급격히 감소한다. 상점이 문을 닫고, 도매상과 대규모 제조업자가 도산하게 되었다. 감자잎마름병은 아일랜드에 3년간의 대기근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아일랜드 인들을 굶주리게 하여 1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다. 살아있던 이들도 130만 명이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민을 떠나게 했다. 열악한 환경과 위생 불량, 의료 서비스의 부족, 과밀한 인구, 빈부격차와 계급 문제와 같은 사회 구조적 문제 등은 서로가 복잡하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가 바로 미생물이었다.


사태가 이 정도라면 인간이 미생물에 대한 지식을 쌓아 나가면 과연 언젠간 이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분명한 건 인간이 미생물에게 가장 탁월한 숙주라는 점이다. 저자는 인간이 천연두 바이러스를 완전히 박멸한 것처럼 다른 병원성 미생물에 대한 박멸이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이 만든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세균이 등장한 것은 잘 알려진 사례다. 저자는 인간의 어설픈 시도는 미생물이 수십 억 년 동안 형성해온 상호의존적 군락에 형성된 관계를 파괴하고 미세한 환경을 교란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미생물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제 이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따라서 인류가 미생물과 싸운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오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어떻게 미생물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와 역자가 한 목소리를 내는 부분은 미생물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는 사실, 곧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의 모든 삶의 양식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에서 절박하게 나오는 결론이다. 몸은 떨어져도 의식은 모이고 뭉쳐야 살 수 있다. 지금처럼 편협하고 거만한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미생물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는 숙주가 좀 더 생존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아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1] "지구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화학적 과정은 독립생활을 하는 세균에 의존한다. 세균은 지구의 모든 생명에 필수적인 원소들을 재생 및 순환시킬 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과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상호의존적 관계, 즉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40)

[2] "기후 변화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종들이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 당시 이 대멸종의 이유로 지구온난화와 미생물에 의한 전염병의 대유행을 들기도 하지만, 이런 요인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해도 인간의 무분별한 사냥이 주 원인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각 대륙에서 동물의 멸종이 인간의 정착과 시기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100)

[3] "항상 옮겨 다니는 수렵채집 생활에서 정착하는 농경 생활로의 전환은 인류사의 큰 이정표인 동시에 새로운 미생물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05)

[4] "대부분의 역사가는 기근과 궁핍의 시대에 찾아온 흑사병이 사회적 및 경제적 변화를 앞당기고 가속화하여 결국 근대를 열어젖혔다는 데 동의한다. (...) 진실이 어느 쪽이든 살아남은 농도들은 분명 덕을 보았다. 인구가 크게 감소한 후 300년간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은 갑자기 훨씬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일거리도 넘쳐났다." (168)

[5] "신대륙에 집단 감염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이 없었던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구세계에서 이들 미생물은 가축화된 동물에서 사람으로 종간 전파되었지만, 수렵채집인에 의해 야생 동물이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춘 신대륙에는 가축화하기 적합한 동물종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180)

[6] "파스퇴르는 실험실에서 오랫동안 증식시킨 세균은 ‘약화’되며, 약화된 세균은 질병을 일으킬 수 없지만 여전히 면역을 유도하므로 이상적인 백신이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277)

[7] "우리가 만들어낸 현재의 상황은 절대로 지속할 수 없다. (...) 현재 전 세계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원에는 인간의 탐욕과 더불어 끊임없이 팽창하는 인구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인구 과잉은 잠재적인 대재앙의 목록뿐 아니라 신종 병원체의 끊임없는 등장이라는 문제의 핵심이기도 하다." (290)

[8] "최근 출현한 신종병원체이 목록을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대부분 야생 동물에서 유래했음이 분명하다." (290)

[9] "항생제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에서 다제 내성균이 많이 발견된다." (302)

"모기 살충제 내성은 여전히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약제(클로리퀸) 내성 원충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313)

[10] "아직도 우리 곁에는 수많은 치명적인 미생물이 활동하고 있으며, 아직도 우리는 완벽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다." (323)

[11]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대부분의 병원성 미생물에 대해 그런 목표(슈퍼 항생제 개발)는 달성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326)

"미생물은 다른 미생물이 생산하는 다양한 물질과 수백만 년 간 상호작용을 해왔으므로 우리가 어떤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더라도 견딜 방법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다." (327)

[12] "미생물은 국가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으며, 국경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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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처럼 2022-01-05 13: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생물의 세계에 기생하는 주제에 너무 오만방자했지요. 좋은 책이네요. 어느 때보다 미생물의 관점이 절실할 때. 인간이 꼭 배울 수 있기를. . .
 
The Adventures of Alexander Von Humboldt (Hardcover)
안드레아 울프 / Pantheon Books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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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dventure of Alexander von Humboldt

안드레아 울프(Andrea Wulf) 지음 | 릴리안 맬셔(Lillian Melcher) 그림

[Pantheon Books] | (2019)

 


[독서일기]

인류가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 인물, 알렉산더 폰 훔볼트

 


오랜만에 자연과학 분야로 돌아왔다. 이 책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소개한 그래픽노블로서, 원서는 2019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저자 안드레아 울프가 훔볼트의 일대기를 정리한 The Invention of Nature라는 책에 기반하여 제작한 책이다. 국내에는 2016년에 자연의 발명: 잊혀진 영웅 알렉산더 폰 훔볼트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그럼 훔볼트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독일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훔볼트 대학이 있고, 남미에 서식하는 홈볼트 펭귄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1790년대에 독일의 대문호 괴테와 교제하면서 벼락에 맞아 사망한 농부 부부를 함께 해부한 적이 있는 인물이다. 이 정도만 해도 평범한 인물은 아닐 듯하다. 우리 중에 찰스 다윈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없을 테지만, 훔볼트의 이름은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생소할 것이다. 다윈은 인류에게 비글호 항해기 종의 기원이라는 유산을 남겼지만, 그는 홈볼트가 발견한 지식과 통찰을 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다윈이 인류에게 남긴 유산의 모습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훔볼트라는 인물은 당대의 서구 과학자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훔볼트는 대서양을 건너 서인도제도와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고 자연을 탐험했다. 그야말로 지구의 모든 것을 알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여행한 지역에서 방대한 양의 정보와 지식을 수집했다. 현대의 등반 장비도 없이 당시에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부피가 컸던 각종 측정 기구를 지니고 6000미터가 넘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고산들을 오르기도 했다. 또 수많은 산과 물을 건너 탐험한 결과, 오늘날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한 사람이 이루어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지식의 기초를 다진 인물인 셈이다.

 


앞서 괴테와 사망한 농부를 해부한 것과 더불어, 동물 전기에도 관심을 가졌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가 죽은 동물에 전기를 가하는 실험에 영감을 받아 소설을 썼던 것처럼 당시 이 주제는 유럽에서 큰 관심과 흥미를 끌었던 것 같다. 훔볼트는 남미를 여행하면서 만난 전기뱀장어를 잡아 해부하기도 하면서 유기체에서 전기가 발생하는 기작에 대해 연구를 하기도 했다. 18세기 전후가 동물 전기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던 시기였다고 짐작해볼 수 있는 정보다.

 


훔볼트는 항해를 하면서 각종 동식물의 표본을 만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많은 자료가 현재 남아 있다. 그래픽 노블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기록물은 바로 훔볼트 본인이 남긴 노트였다. 책을 보면 훔볼트는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대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높은 산이 있다면 직접 올라가서 기압과 온도, 물의 끓는 점 등을 측정하여 기압과 끓는점 사이의 관계를 주목하고 검증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대에 알려진 지리상의 적도와 달리 자기 적도(magnetic equator)’의 위치는 적도에서 약 500마일 남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최초로 발견하기도 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각종 측정 장비를 지니고 꼼꼼히 기록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지식은 훨씬 후대에나 발견되어 정리되었을 것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베스트셀러 코스모스 Cosmos는 이미 훔볼트가 먼저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칼 세이건 역시 지구에 대한 탐구 열정을 담은 훔볼트의 책과 업적에서 영감을 받았을 법하다.


 

이 밖에도 훔볼트의 업적은 무수히 많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특히 분류학자 린네는 동식물에 대한 분류체계를 새롭게 정리했는데, 훔볼트는 린네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린네는 자연에 존재하는 동식물은 신이 내려준 목적과 절차를 지니고 적정한 수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홈볼트는 자연에 신의 존재를 배제하고 자연이 그 자체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살아있는 전체로 보았다. 여기에서 그는 생명의 그물’(web of lif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자연에서 동식물이 어떤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무엇보다 각 개체는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먹고 먹히며 긴밀하게 얽혀있음으로써 유지되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에게 자연이 보여주는 균형과 조화의 기작에 신이 개입할 자리는 없었던 셈이다.


 

이런 관점으로 자연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는 당시 미국이 건국에 힘을 모으던 시기에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인물들에게 직접 무분별한 개발로 삼림 및 자연의 황폐화를 경고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업적과 일대기가 오늘날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싶다. 지구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 환경파괴, 지구 온난화 등으로 인한 복합적인 문제와 인류의 위기는 이미 200년 전의 지식인이 예견했던 일인 셈이다.


 

그래픽노블은 글이 많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또 풍부한 그림과 훔볼트가 수집한 각종 자료와 노트가 등장하기에 천천히 즐기면서 훔볼트라는 인물과 행적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다만 그래픽노블에는 훔볼트가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한 이후의 행적은 생략이 되어 있다. 그는 유럽 대륙의 동쪽으로 가서 지금의 시베리아지역까지 탐험했던 인물이다. 이 부분은 안드레아 울프가 쓴 훔볼트의 본격적인 일대기 자연의 발명을 읽으면서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1] "This is a web of life entangled in a bloody battle."
- 이에 반해 분류학자 린네의 시각은 각 동식물이 신이 내려준 목적과 절차를 지니고 적정한 수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존재였다.

[2] "All plants and animals are bound together by a web of complex relations."
- 훔볼트에게 자연은 ‘긴밀하게 연결된 전체‘였다.

[3] "The Advancement of science demands some sacrifices."
- 자연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고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는 서구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원주민들의 조상 무덤에 들어가 이들의 유골 몇 점을(원주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나온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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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6 15: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2021년 서달인 추카 합니다 ^ㅅ^

그레이스 2021-12-16 15:43   좋아요 2 | URL
저도 함께 축하합니다

초란공 2021-12-17 21:58   좋아요 1 | URL
scott님, 그레이스님~ 모두 ‘서달인‘ 축하드려요~

이하라 2021-12-16 15: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편안하고 행복한 연말 되세요^^

초란공 2021-12-17 22:00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세요!

mini74 2021-12-16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저도 축하드립니다 *^^*

초란공 2021-12-17 22:01   좋아요 1 | URL
mini74님 감사합니다. 저도 mini74님의 서달인 선정을 축하를 드립니다~

쎄인트saint 2021-12-16 16: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1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1-12-17 22:0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 쎄인트님도 올해 ‘서재의 달인‘ 선정 축하 드려요! 오래전부터 선정되셨네요~

새파랑 2021-12-16 23: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서재의 달인 선정을 축하합니다^^

초란공 2021-12-17 22:0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도 서달인 선정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