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23년 가을호 - 통권 183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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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계간지 녹색평론


2023년 가을 183

 



고등학교 시절에 기억나는 영어 선생님 한 분이 있다. 남학생들만 바글바글하던 교실(당시 한 반에 50명 넘었음. 연대 추정 금지!)은 언제나 산만한 편인데, 어느 날 그 영어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갑자기 책 한 권을 꺼내서 글 한 편을 읽어주겠다고 하셨다.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나는 영어는 못해도 수업을 집중하던, 겉보기 모범생이었는데 그날 선생님이 읽어주신 이야기에 꽤나 몰입했던 것 같다.

 


책에 실렸던 글은 짧은 여행기였는데,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거대한 대륙을 횡단하며 보고 생각했던 것들을 적었던 글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나중에 대학에 가서 그 선생님이 읽어주신 책을 다시 기억해냈던 것이다.


 

당시에 그 영어 선생님이 읽어주셨던 책이 바로 녹색평론이었다. 이 책이 생태, 기후, 자연에 관한 글들이 주로 실리는 계간지임은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이후에 꼼꼼하게 읽지는 않았지만 녹색평론을 정기구독해서 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나의 생각과 관심사가 형성된 과정에는 이 잡지의 영향이 제법 클지도 모른다. 책과의 만남이 길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꽤나 중요하다고 믿었던 이슈들에 대해 이 책은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어서 좋았다. 환경문제나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 녹색평론의 공이 클 것이다.


 

오랜만에 녹색평론을 구입해보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 이 잡지를 내고 글을 쓰셨던 김종철 선생이 돌아가신 후, 몇 년 간 발간이 중단되었다가 최근에야 다시 복간되었다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 잡지가 최악의 상황에서 복간된 것이지 모른다.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하여 세금을 들여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런 엄혹한 시대에 녹색평론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구 온난화나 환경오염 등의 문제가 이제 더 심각해졌지만, 녹색평론과 같은 책을 예전만큼 구입하지는 않을 듯하다. 관련 주제를 다루는 책들이 예전보다 훨씬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회가 주어지면 자주 녹색평론을 읽어볼까 싶다.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기후, 생태,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입장에서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이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 183호는 내가 큰 관심을 갖고 있는 후쿠시마 오염수에 관한 글을 포함하여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가 큰 주제인 듯하다. 이제 기후와 환경은 정치와 분리불가능하다. 오늘날 모든 실천적인 학문의 분과가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는이유다. 천천히 읽어보려 한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에 녹색평론의 글 한 꼭지를 읽어주셨던 영어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하다. 나에게 녹색평론과의 느슨한인연을 만들어주신 분이다. 지금은 은퇴하신지 꽤 되었을 것 같은데, 어디서든 건강하시길 빈다.





 

#녹색평론 #후쿠시마오염수 #녹색평론183#녹색평론사 #오염된바다흔들리는민주주의

#출판예산삭감반대 #독서진흥예산삭감반대 #지역서점활성화예산삭감반대

#문학나눔예산축소반대 #출판이곧문화다 #책과함께하는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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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11-01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언니가 고등학교 때 한 반이 60명이라고 카든데
50명이면 저의 언니 보단 연배가 아래신가 봅니다.ㅋㅋㅋㅋ
와, 그러고 보면 녹색평론이 꽤 오래된 잡지네요.
저도 요즘 이런 쪽에 부쩍 관심이 많아집니다.
한번 사 봐야겠네요.^^

초란공 2023-11-01 22:59   좋아요 1 | URL
‘상대적인‘ 연대 측정 방법을 미처 생각 못했군요....ㅋㅋㅋ
녹색평론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잡지네요.
오랜만에 진지한 글을 봤더니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나봅니다. ^^;;
 
무법의 바다 - 보이지 않는 디스토피아로 떠나는 여행
이언 어비나 지음, 박희원 옮김 / 아고라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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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언 어비나의 말 “바다는 숨이 멎도록 아름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암담한 비인도적 행위가 난무하는 디스토피아적 공간이기도 하다.”는 말에 이 유동적인 공간을 둘러싼 문제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인권, 환경오염, 자원 남획 등등의 문제들..여기에 인간은 핵 오염수까지 더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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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스파이 -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은 과학자와 스파이들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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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스파이

: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은 과학자와 스파이들

샘 킨(Sam Kean) 지음 |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3)





원자 스파이에서 보리스 패시가 이끌던 알소스 부대의 활약(?)이 자세히 소개된다. 나치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두려움은 유럽 전역과 미국의 긴장을 야기했다. 이를 막기 위해 얼마나 미국과 영국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투입했는지 엿볼 수 있다. 보리스 패시 대령은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를 비롯하여 맨해튼 프로젝트의 정보를 적에게 넘겨줄 수 있는 인물을 집요하게 뒷조사하는 인물로 나온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하던 그로브스 장군도 군부 내에서도 아웃사이더에 속했던 패시를 성가셔하고, 지나친 뒷조사를 막고 패시가 잘 할 수 있는 첩보 임무를 맡겨 유럽으로 보내버린다. 패시가 유럽에 가서 한 일이 바로 알소스 부대로 이름 붙은 첩보 부대를 이끌며 나치 과학자들을 납치하여 데려오거나, 소련에 두뇌가 유출되는 일을 막는 임무였다.  

  


(188) 발터 보테가 실험을 망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는지 몰라도, 졸리오(그리고 파리에서 다시 만난 이렌)는 고통스러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파리는 시간이 갈수록 물자 부족 사태가 심해지면서 점점 더 우울한 곳으로 변해갔다. 세상에서 손꼽히는 이 식도락 도시에서 사람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길고양이까지 잡아먹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먹은 설취류 때문에 전염병에 걸릴 위험도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을 막지 못했다. 나치는 또한 군수 공장 가동을 위해 모든 연료를 징발해갔다.

 



(552)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관련) 긴급 속보가 끝나갈 때, (양자 스핀을 처음 발견한 물리학자) 가우드스밋에게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몇 달 전에 독일의 원자폭탄 계획이 한참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안 뒤, 가우드스밋은 그로브스의 한 부관에게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아주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원자폭탄도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부관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 우리에게 그런 무기가 있다면, 우린 그걸 사용할 거요. 그 예언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원자폭탄은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 핵무기를 보유한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 무기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위협이 사라지자, 단순히 방어 무기로 사용한다는 개념도 사라졌다.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하지만 불가피하게 원자폭탄은 다른 성격의 무기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무기 로 변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리란 것을 가우드스밋은 직감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맨해튼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히틀러가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고, 일주일 후에 독일은 항복을 하게 된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이 상황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나치의 핵개발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우월한 카드를 손에 넣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독일에 대항하여 무기를 사용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아직 결사항전을 하고 있었으나, 당시 정세를 파악하던 정치 및 군부 인사들은 대부분 일본의 항복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독일이 항복하고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은 기뻐했으나, 오펜하이머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실제 핵무기의 사용 여부가 그 나름의 명분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윤리적인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트리니티 테스트로 시연을 하는 것으로 일본의 항복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상당수의 군부 및 정계에서는 원자폭탄을 사용하자는 입장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는 이미 패색이 짙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데 반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며는 생전에 UN과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핵무기 사용 협약을 통해 전쟁에서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트루먼 대통령(게리 올드먼 연기)이 오펜하이머에게 실망한 이유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570)  전쟁 전에 물리학자들은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더 큰 세계의 일에는 아무 관심없이 온순하게 연구실에서 빈둥거리며 살아갔고, 세상 사람들도 그들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후에는 (크게는 원지폭탄 때문에) 물리학은 너무나도 중요한 분야가 되어 물리학자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장군과 정치인이 물리학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연간 예산은 수백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가우드스밋의 표현을 빌리면, 값싸고 부실한 재료로 실험을 하던 실과 봉랍 시절, 그리고 두 엉뚱한 대학원생이 양자 스핀과 같은 기본적인 발견을 우연히 하던 시절은 먼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가우드스밋의 한 동료는 샘은 전쟁 전에 재미있고 편안하게 하던 일로 결코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라고 말했는데, 졸리오-퀴리 부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모 버그, 케네디가 사람 등을 비롯해 원자 첩보전에 휘말린 사람들은 거의 다 그랬다.



(571) 핵분열은 20세기 물리학의 획기적인 발견 중 하나였지만, 그것은 단지 중요한 과학 현상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회 현상으로 떠올랐다. 미치광이의 수중에 들어가는 걸 막으려는 절박한 노력에서 연합국 과학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광기를 뿜어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말할 것도 없고, 중수 공장 습격, 지질 조사를 위한 특공대, 암살과 방사능 치약에 이르기까지 그 광기가 온갖 것으로 뻗어나갔다. 모든 단계에서 관련 당사자들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원자를 쪼갬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분열시켰다.




  개인적으로원자 스파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모 버그가 나치 과학자들을 만나 미국으로 데려오거나 최소한 소련으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막는 첩보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치의 핵개발을 책임지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만나 암살을 시도할지 고민하던 에피소드였다. 만약 하이젠베르크를 만났던 인물이 앞서 언급했던 보리스 패시(오펜하이머와 주변 인물들을 집요하게 뒷조사 했던 정보장교)이었다면, 인정사정없이 하이젠베르크를 암살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패시 같은 인물에겐 노벨상 수상 경력은 무의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새뮤얼 가우드스밋에 관한 에피소드도 소설 못지 않다. 부모님은 나치 집단 수용소에서 학살당했고, 전쟁으로 다른 편에 서게 되었던 그는 하이젠베르크와의 우정도 끝나 더 고립된 삶을 살게 되었다. 물리학자가 참여한 나치 과학자 납치 임무에 가우드스밋 같은 물리학자가 함께 참여하여 적진을 뚫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된다. 원자 스파이는 여타의 역사서에 나오지 않는 배경과 인물들에 관해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와 함께 미국이 나치의 핵개발에 대항하여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료다.


 

 흥미있게 책을 읽었지만 특히 마지막 문장 "원자를 쪼갬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분열시켰다."(571)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양자 스핀 개념을 처음 제안했던 물리학자 새뮤얼 가우드스밋. 나치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첩보 활동에 참여했다.


한 때 가우드스밋(왼쪽)과 우정을 나누던 독일의 핵개발 책임자 베르터 하이젠베르크(가운데), 그리고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활약한 엔리코 페르미(오른쪽에서 두 번째)



[1] "발터 보테가 실험을 망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는지 몰라도, 졸리오(그리고 파리에서 다시 만난 이렌)는 고통스러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파리는 시간이 갈수록 물자 부족 사태가 심해지면서 점점 더 우울한 곳으로 변해갔다. 세상에서 손꼽히는 이 식도락 도시에서 사람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길고양이까지 잡아먹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먹은 설취류 때문에 전염병에 걸릴 위험도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을 막지 못했다. 나치는 또한 군수 공장 가동을 위해 모든 연료를 징발해갔다."(188)

[2] (552)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관련) 긴급 속보가 끝나갈 때, (양자 스핀을 처음 발견한 물리학자) 가우드스밋에게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몇 달 전에 독일의 원자폭탄 계획이 한참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안 뒤, 가우드스밋은 그로브스의 한 부관에게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아주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원자폭탄도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552)

[3] " 부관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샘, 우리에게 그런 무기가 있다면, 우린 그걸 사용할 거요." 그 예언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원자폭탄은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즉, 핵무기를 보유한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 무기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위협이 사라지자, 단순히 방어 무기로 사용한다는 개념도 사라졌다.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하지만 불가피하게 원자폭탄은 다른 성격의 무기 —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무기 — 로 변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리란 것을 가우드스밋은 직감했다."(552)

[4] "전쟁 전에 물리학자들은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더 큰 세계의 일에는 아무 관심없이 온순하게 연구실에서 빈둥거리며 살아갔고, 세상 사람들도 그들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후에는 (크게는 원지폭탄 때문에) 물리학은 너무나도 중요한 분야가 되어 물리학자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장군과 정치인이 물리학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연간 예산은 수백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570)

[5] "가우드스밋의 표현을 빌리면, 값싸고 부실한 재료로 실험을 하던 ‘실과 봉랍’ 시절, 그리고 두 엉뚱한 대학원생이 양자 스핀과 같은 기본적인 발견을 우연히 하던 시절은 먼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가우드스밋의 한 동료는 "샘은 전쟁 전에 재미있고 편안하게 하던 일로 결코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라고 말했는데, 졸리오-퀴리 부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모 버그, 케네디가 사람 등을 비롯해 원자 첩보전에 휘말린 사람들은 거의 다 그랬다."(570)

[6] (571) "핵분열은 20세기 물리학의 획기적인 발견 중 하나였지만, 그것은 단지 중요한 과학 현상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회 현상으로 떠올랐다. 미치광이의 수중에 들어가는 걸 막으려는 절박한 노력에서 연합국 과학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광기를 뿜어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말할 것도 없고, 중수 공장 습격, 지질 조사를 위한 특공대, 암살과 방사능 치약에 이르기까지 그 광기가 온갖 것으로 뻗어나갔다. 모든 단계에서 관련 당사자들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원자를 쪼갬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분열시켰다."(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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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문명의 종말에 대한 성찰
로이 스크랜턴 지음, 안규남 옮김 / 시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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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지혜를 기억하고, 문명의 죽음을 직관하라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문명의 종말에 대한 성찰

로이 스크랜턴(Roy Scranton) 지음 | [시프] | (2023)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30년 이상 추적 기록된 자료를 기반으로 198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진 주제다.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지질학적 힘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인류는 이전의 환경으로 되돌아갈 길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구온난화는 우리의 실존을 크게 흔들 정도로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그 이유는, 단지 온도가 1-2°C 올라가는 현상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모한활동으로 인하여 모든 동·식물 종의 생존 역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식량과 에너지 환경의 혼돈을 필연적으로 예비한다.


 

우리가 매일 먹는 과일이 식탁에서 영영 사라진다고 생각해보자.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럼 기후변화로 우리가 자주 먹는 채소를 구하기 힘들어 졌다고 생각해보자. 대신 육식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고? 에너지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동물은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에너지 소비자다. 에너지 소비자는 에너지 생산자를 찾아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를 섭취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공짜란 없다. 식물이 바로 에너지 생산자다. 식물은 태양의 에너지와 대기 및 토양 속의 성분을 매개로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 저장한다. 식물과 동물로 분류되지 않는 균류는 어떨까. 균류 역시 동물처럼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에너지 소비자다. 외부의 다른 존재에게 의지해야만 양분을 얻을 수 있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균류 역시 에너지 생산자에 의존해야 한다. 동물이나 균류가 에너지 생산자를 섭취하지 못하면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럼 인간은? 식물과 동물이 사라지고 죽어갈 때, 인간만 살아갈 수 있는 방도는 없다. 모든 종류의 식량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스트레스를 줄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협한다. 식량이 자판기처럼 돈을 낸다고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닌 이상, 돈을 가진 이들이라고 가난한 이들보다 상황이 조금 더 나을지 모르나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지구온난화 문제는 빈부나 계급의 차이가 무색함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고려할 때,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 로이 스크랜턴이 전 지구적 기후변화가 어떤 위협보다도 강력한 위협이라고 경종을 울리며 시작하는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기후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구의 극지 주변 바다 혹은 내륙의 빙하나 빙상이 녹아내리는 양상은 앞으로 계속 녹아내리는 일 외에 되돌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국제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주목하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대처 방안을 고민해왔지만, 지금까지 얻은 답은 답이 없음뿐이다. 그 이유는 지구적 탈탄소화가 지구적 자본주의와 사실상 양립 불가능”(63)하다는 데 있다. 기업과 정부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는 탈탄소에 대한 노력과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탄소(석탄과 석유)에 기반 한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러 청정에너지기술을 제시하지만 이는 현재 우리가 기반하고 있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지구 경제를 탈탄소화 하는 일은 전 세계 전력의 80%가량을 대체해야하는 일이다.


 

어느 정치가도 현재 작동하는 전 세계의 경제활동 방식에서 석탄과 석유를 대체하기 위해 저렴한 탄소에 대한 의존을 끊으면서까지 자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상황을 감수할 이는 없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기에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8%를 차지하는 미국, 러시아, 중국은 탄소세 도입마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엄혹한 무한 경쟁 구도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이렇게 국가의 근간을 흔들면서 무리하게 탈탄소화를 이룰 수 있는 국가는 없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암울한 미래가 있다. 우리는 기후 정책에 있어서 언제나 경제 성장 논리가 승리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국가의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자. 인류의 대다수는 지구 전체의 환경적 위기를 인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대인의 다수는 이미 안락한 소비 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이동 전화기나 노트북, 대형 TV등을 모두 없애고, 여름에 에어컨을 폐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자는 현대의 정보 사회 역시 탄소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지구의 온도를 올리는 데 참여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처럼 기후 변화 문제는 너무나 방대하고 우리의 생활양식과 깊숙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한 사람만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지 않으며, 다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그리고 되돌릴 길이 없다는 것만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시점에서 탈탄소를 외치는 일은 그저 순진한 구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은 모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일뿐이다.


 

이 책은 이처럼 우울한 진실을 담담하게 전한다. 심지어 저자는 이 모든 문제의 문제는 바로 우리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럼 우리는 이 허무하고 공허하게 예비 된 미래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문제의 본질을 직시한 다음,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묵시록적 의미로 개인의 죽음에 대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문명의 죽음을 숙고해야한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탄소에 기반 한 문명의 종말이라는 운명과 마주하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배움으로써 이를 더 잘 맞이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죽음이란 현상은 전대미문의 사태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배우고 성찰하고자 대화체로 철학서 파이돈을 썼다. 뿐만 아니라 미셸 몽테뉴도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격언에 주목했다. 몽테뉴가 자신의 수상록 에세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154)이라 언급하지 않았던가. 죽음은 언제나 삶의 주변에서 서성이던 현상이며,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 현상이다.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할지 모른다. 죽는 법을 배우고자 하더라도 실제로 겪지 않는 한, 그 때마다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배우라고 해놓고 이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니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 저자는 죽음을 배우고자 하는 부단한 실천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지혜라고 말한다.


 

말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저자가 스토아 철학자의 말에 주목하고, 여기에서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까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죽음이라는, 이 불가항력의 사태로부터 피할 길은 없다. 그렇다면 이 필멸의 현상을 정면으로 직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탄소에 기반 한 현대 문명은 종말을 구할 수밖에 없고, 이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문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자기기만과 거짓된 욕망을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문제임을 인정하는 데서 다시 출발한다. 이때 지구온난화가 사실인지의 여부나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대신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문명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 세계에서의 삶에 어떻게 적응해나갈 것인가를 성찰하는 일이다.


 

암담하고 충격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인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문명의 죽음을 숙고하기는커녕,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기만 할 것이다. 이련 논의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물론, “인류는 화석 연료 문명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 폐허 속에서 어떤 폭정, 어떤 야만 상태가 출현하든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다. (...) 아마 우리의 후손들은 지구의 나머지가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이고 찌는 듯한 밀림이 되더라도 북극해의 해안에 새 도시를 건설할 것.”(183)이라고. 대멸종이라고 해도 인류의 일부는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문제로부터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고 해도 우리의 운명이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숙고해야만 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현실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저자는 인류세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것으로 기억을 제시한다. 먼저 살다 간 인류의 지혜가 담긴 기록들, 죽은 자의 유산을 기억하는 일이 죽음을 고하는 우리 문명에 대한 성찰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어떤 기술적인 해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내자고 촉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은 다시 말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오히려 저자는 죽음을 배우기위해 인류가 남긴 유산, 인문학적인 전통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 새롭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인용문으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이 인상 깊어 인용해 본다.


 

모든 사유가 기억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기억도 응결, 정제를 통해 개념적 사유의 틀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스스로를 더욱 단련시킬 수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안전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이 행하고 겪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이야기도 거듭해서 언급되지 않으면 생활 세계와 생활 행위에 내재하는 덧없음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유한한 인간의 일을 그 본질적인 덧없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러한 끊임없는 언급도 만일 그로부터 미래의 기억을 위한 그리고 순전히 참고용으로라도 쓰일 만한 개념들, 지침들이 생겨나 떠오르지 않는다면 결국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한나 아렌트, 혁명론)(168)

 


다시 말해, 우리가 받은 유산을 단순히 기억 장치나 도구에 저장해놓는다고 끝이 아니다. 이 유산을 끊임없이 호명하고 이를 기억하고자 시도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지혜의 유산은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저자는 이러한 기억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말하고 이를 가공할 것을 주장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문명의 죽음과 마주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술적인 방주를 건설하는 것에서 나아가 지혜를 실어 나를 문화적 방주를 건설해야한다. 앞서 죽은 이들의 지혜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던 것처럼, 여기에 우리의 지혜를 더하여 미래 세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이어지는 저자의 말에 계속 주목해보자.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류세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기억 없는 삶의 덧없음 속으로 침몰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엄청난 역경과 싸워 힘들게 얻어낸 수천 년 동안의 지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버려서는 안 된다.”(183)


 

한나 아렌트의 말과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오른 소설이 있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수도원 내의 장서관은 전 세계의 지혜를 모두 담고 있는 지식의 보고였고, 장서관이 바로 세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인류의 지혜를 품은 책들은 비밀스러운 공간에 은폐되어 있었고, 접근도 제한되었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수도원의 책들은 여러 필경사들에 의해 필사되고 복제되었지만, 이는 소수의 관심사를 위한 기계적인 기억 저장용 활동이었을 뿐이다. 인류의 방대한 지식이 비밀스러운 공간에 저장되기만 하고 공유되지 못했다. 사람들에 의해 거듭 이야기 되거나 기억되지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인류의 지식은 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미약한 촛불에 거침없이 불타올라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은폐되었던 인류의 과거는 구원되지 못하고, 하나의 세계 전체가 덧없이 소멸되었던 것이다.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는 80대인 화자가 10대 소년 수도사 시절 겪었던 사건을 회고한 기록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소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생각났던 이유는 소설의 마지막에 있다. 화자는 수도원의 장서관이 화마에 사라져버리고 수도원이 폐허로 된 사건을 기억해내면서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 소설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소설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삶과 죽음을 성찰한 것과 관련이 있다. 존재가 사라질 때, 이름도 함께 사라질 수는 있다. 단 우리가 존재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남기 마련이다. 다만 명예는 덧없는 것일 뿐이다. ‘장미의 이름이 덧없게 여겨지는 이유는 장미의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처럼, 우리는 죽음을 배우는 일에 결코 성공하지 못할 테지만, 누군가는 시도하고 실패해도 또 다시 시도할 것이다. 그게 우리의 삶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장미는 삶과 죽음이라는 우주적 진리를 일깨워주는 존재이자 생명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 장미의 이름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에서 하는 이야기는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모두 죽음혹은 존재의 필멸을 진지하게 고찰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 본인은 실천의 하나로서, ‘죽음을 배우기 위해 스토아 철학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호명하고, 다시 이야기하며, 우리의 현재에 맞게 이 철학을 가공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저자는 죽음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신념을 붙들고 있다. 그러므로 문명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문명의 거듭나기를 상상하는 시도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책 속으로]

[1] "지구온난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구온난화와 관련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던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분명해 보인다. 많은 정책 전문가, 기후학자, 국가 안보 관료의 견해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지구온난화가 사실인가 혹은 지구온난화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 뜨겁고 급변하는 세계에서의 삶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다."(18)

[2] "인간의 세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나
운명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의 모습은 변함없이 영원히 그대로다."(20)
- 윌리엄 블레이크의 글 재인용.

[3] "문제는 지구적 탈탄소화가 지구적 자본주의와 사실상 양립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63)
- 저자는 대체 에너지원 없이 지구 경제를 탈탄소화 한다는 것은 전 세계 전력의 80%가량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언급한다.

[4] "자국의 경제에서 대놓고 석유와 석탄을 몰아내려는 정치가는 어떤 종류의 민주 정부나 과두 정부에서도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 더욱이 값싼 탄소에 대한 의존을 종식시키기 위해 긴축과 재분배를 강요한 지도자는 자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약하고 고립된 처지로 내몰게 될 것이다."(83)

"(문제는) 오늘날 전 세계의 많은 나라가 긴밀하게 통합된 하나의 경제로 연결되어 있는 거이 석탄과 석유 덕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84)

[5] "누구도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강력한 영향력과 개념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 위험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만한 계획을 떠올리지 조차 못하고 있다. 문명을 위한 어떠한 ‘리셋’ 단추도 없고, 향후 10, 20년 안에 전 지구적 인프라, 농업, 에너지 네트워크를 바꿔놓을 실행 가능한 계획도 없다."(108)

[6] "전 지구적 정보·소통 생태계는 석탄에 의지하고 있다. 당신이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당신은 지구의 온도를 올리고 있다. (...) 우리는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109)

"문제는 기후변화 문제가 너무 거대하다는 데 있다. (...) 문제는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110)

[7] "석탄 및 석유회사와 그들의 정부 내 대리인은 자신들을 지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군사력도 기꺼이 사용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노동 전쟁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자국민을 상대로 벌인 전쟁은 셸과 셰브론의 노골적인 지원으로 시작된 것이었다."(126)

[8] "적은 바깥 어딘가에 있지 않다. 우리 자신이 적이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우리, 시스템, 벌집이."(141)

[9] "우리는 어떤 것을 실제로 행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정말로 알지는 못하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지막 날까지 끊임없이 실천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천 자체가 지혜다. 도겐 선사의 말로 하면, ‘그 길을 올곧게 실천하는 것 그 자체가 깨달음’이다."(156)

[10] "인간이 살아 있는 시간은 순간에 불과하고, 실체는 흐름 속에 있으며, 인식은 무디고, 육신은 썩게 마련이며, 영혼은 혼란 속에 있고, 운은 예측하기 힘들고, 명예는 덧없다. 한마디로 말해 신체에 속한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고, 영혼에 속하는 모든 것은 꿈과 공상이며, 삶은 전쟁이고 잠시간의 체류이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다."(157)
-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

[11] "(우리는) 최고의 보물이자 가장 강력한 적응 기술을 가져왔다. 이미 죽은 자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류세에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것을 가져왔다. 바로 기억이다."(161)

[12] "모든 사유가 기억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기억도 응결, 정제를 통해 개념적 사유의 틀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스스로를 더욱 단련시킬 수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안전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이 행하고 겪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이야기도 거듭해서 언급되지 않으면 생활 세계와 생활 행위에 내재하는 덧없음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유한한 인간의 일을 그 본질적인 덧없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러한 끊임없는 언급도 만일 그로부터 미래의 기억을 위한 그리고 순전히 참고용으로라도 쓰일 만한 개념들, 지침들이 생겨나 떠오르지 않는다면 결국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168)
- 한나 아렌트, 《On Revolution》에서 재인용

[13] "인문학 연구의 오랜 전통을 살아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 명상, 철학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자극의 스트레스를 중지시켜야 하고, 과거를 계속 살아 있게 하고, 아카이브의 정보를 가꾸고,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읽고 해석하고 분류하고 돌보고 특히 재가공함으로써 현재에 대한 집착을 중단해야 한다. (...) 디테일에 대한 관심, 논증에서의 엄밀성, 주의를 기울여 읽기, 깊이 있는 성찰 등을 가르침으로써 인간이라는 동물 안에 사색의 진동을 주입시켜야 한다. 죽은 자들과의 교감을 지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는 죽은 자들이듯 그들이 곧 우리이기 때문이다."(182)

[14]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류세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기억 없는 삶의 덧없음 속으로 침몰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엄청난 역경과 싸워 힘들게 얻어낸 수천 년 동안의 지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버려서는 안 된다."(183)

[15] "우리는 방주를 건설해야 한다. 멸종 위기에 놓인 유전적 데이터를 실어 나를 생물학적 방주만이 아니라 절멸의 위기에 놓인 지혜를 실어 나를 문화적 방주를 건설해야 한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를 이루고 있는 모든 언어로 된 사유의 구체적 기록은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지적 성장을 위한 씨앗이자 토양, 원천, 자궁이다. 현대 문명의 종말을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인문학의 운명은 다름 아니라 인류의 운명이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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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을 중심으로 시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 영화 <오펜하이머>의 개봉을 앞두고



 

지난 20세기에 일어났던 제2차 세계대전은 과학자, 특히 물리학자들의 전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원자폭탄 개발과 레이더 기술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원자폭탄 개발은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나치의 핵개발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두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와 아인슈타인이 당시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보낸 청원 편지로부터 추진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수장을 맡은 이가 물리학자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였다. 그는 원자 폭탄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인물이다.


 

이번 달 15, 그러니까 일본의 패전일이면서 우리에게는 해방일이 되는 날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제작한 영화 <오펜하이머>의 개봉을 앞두고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78년 전 오늘(86)은 인간이 인간에게 최초의 원자 폭탄을 사용했던 날이다. 이날 미군은 길쭉한 모양의 원자 폭탄 리틀 보이를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우리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원자 폭탄 피해자 후손과 더불어 역사 속의 오늘을 기억하는 행사가 진행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만한 것은 원폭 피해자에는 일본인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도시에 살았던 조선인을 비롯한 여러 국적의 사람들도 있었음을, 원자 폭탄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45년 7월 16일에 시행되었던 트리니티(Trinity Test) 핵실험 당시의 폭발 모습. 실험 후 휘어진 철근 구조물 앞에 서있는 오펜하이머.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모자를 쓰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에 투하 된 두 종류의 원자 폭탄. 처음 투하된 폭탄이 길쭉한 모양의 '리틀 보이'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3일 후인 8월 9일에 럭비공 모양의 '팻 맨'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맨해튼 프로젝트는 20세기 과학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 역사에서도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내외의 과학자들을 비밀리에 한데모아 국가의 중대사를 추진했던 거대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과학사에서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이는데, 오펜하이머를 비롯하여, 엔리코 페르미, 닐스 보어, 한스 베테, 존 휠러, 리처드 파인먼, 필립 모리슨(오펜하이머의 제자), 에드워드 텔러 등등의 쟁쟁한 과학자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주목해볼만한 또 다른 점은 이 프로젝트에 크게 기여했던 과학자들 상당수는 유럽에서 나치를 피해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순수한 독일인보다는 유대계 과학자, 혹은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이 큰 역할을 맡기도 했다. 오펜하이머 본인 역시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역시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을 동시에 다룬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며도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다. 이 책의 저자 실번 슈위버는 물리학자이자 과학사가이기도 하다. 두 천재 과학자를 비교하며, 이 책에서 이제는 다소 진부해 보이기도 하는 천재성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기도 하다. 그는 또 다른 유대계 미국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과 교류하며 그를 인터뷰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역사 속의 인물들과 직접 교류했던 저자의 경험과 폭넓은 인터뷰를 통해 인물을 이해해볼 수 있는 책으로 기대된다.



















 































이달에 개봉될 영화의 원작이자 영감을 준 도서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처음에 빨간색 띠가 들어간 하드 커버 판이 나왔고, 최근에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에 맞추어, 소프트커버 판의 특별판(검은 표지)이 나왔다이 책의 저자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은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영화에는 오펜하이머 외에, 과학사에서 등장하는 여러 과학자들의 모습도 등장할 것으로 기대해본다. 그 중 한 명은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다. 그는 원자 폭탄 실험이 진행되어 충격파가 도달했을 때, 떨어지는 종이 조각의 낙하 시간과 거리에 관한 정보만으로 원자 폭탄의 폭발력을 추산했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론과 실험 모두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영화 속에서 그의 모습도 볼 수 있을까 궁금하다.




(엔리코 페르미. 이론과 실험 분야 모두에서 탁월한 과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뿐만 아니라 젊은 대학원생으로 이론 개발 분과에 참여했던 리처드 파인먼의 모습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기밀문서를 보관해놓은 금고를 모두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원자 폭탄 실험이 진행되기 직전에 아내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파인먼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정황에 대한 에피소드는 올해 출간된 제임스 글릭의 파인먼 평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 책에서 한 가지 기억나는 장면은 미국 뉴멕시코 앨러모고도(Alamogordo)의 사막 한 가운데에서 시행된 최초의 원폭 실험인 트리니티(Trinity) 테스트 당시, 이 장면을 유일하게 맨 눈으로 지켜 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단순히 젊은이의 치기로 결정한 행동이 아니라, 빛과 열의 물리적 특성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생생하게 예측하고 내린 결정이었던 셈이다. 또 이 책은 원자 폭탄 개발 전후,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직후에 물리학자들이 갖게 된 권력과 권위에 대해 저자는 저널리스트로서 평가하며 이를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보다 궁금한 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다. 지난 겨울(202212) 어느 신문 기사에서 원자폭탄의 아버지로버트 오펜하이머가 68년 만에 소련 스파이혐의를 완전히 벗었다는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과학자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대가를 국가는 어떤 식으로 갚았으며, 역사에 오점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참고기사: https://v.daum.net/v/20221218171232607)




(1946년 당시의 로스 앨러모스 연구 그룹. 사진 가운데 가장 어두운 상의를 입고 있는 이가 로버트 오펜하이머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인물이 엔리코 페르미이며, 페르미의 뒤쪽, 오펜하이머의 왼쪽 자리에 앉아 뭔가 몰두하는 젊은이가 리처드 파인먼이다. 얼굴은 가려졌으나 오펜하이머의 오른쪽 자리에 훗날 안보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에드워드 텔러가 앉아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다시 오펜하이머의 평전으로 돌아 가본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다. 인간에게 금지된 불을 가져다 준 죄로 제우스에게 미움을 받고 벌을 받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커다란 바위에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로 손과 발이 결박된 채,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라는 이름이 미리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임을 고려할 때,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도 인간에게 불을 비롯한 문명을 가져다준 존재로도 여겨진다. 사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물과 흙으로 인간을 빚은 다음, 제우스 몰래 회향풀의 줄기에 불을 감추어 두었다가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배경 속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왜 인간에 대한 애정을 지닌, 인본주의적인 신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 말이다. 곧 프로메테우스는 신화에서 인간의 창조자였다. 기독교의 등장 이전에 물과 흙으로 인간을 빚은 모티프는 유대교의 골렘 신화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골렘은 카발라(Cabala)라는 전통적 유대교 신비주의의 산물이며, 종교적 마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생명을 얻은 인공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모티브가 결국 기독교 신의 인간 창조 신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 모티브가 훨씬 이전의 수메르 문명에 빈번했던 대홍수와 관련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 도서: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프로메테우스의 야망)





 

























이런 의미에서 인류에게 원자폭탄이라는 공멸의 가능성을 지닌 원자폭탄을 가져다준 인간으로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 이름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최초의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민간인 수십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후 오펜하이머가 보인 행보다. 그는 가공할만한 원자 폭탄의 파괴력을 확인하고, 이 무기가 지닌 잠재력과 정치적 의미를 간파한다. 이후 계획되었던 수소 폭탄 개발 계획에 반대하여, 미 군부 집단의 눈 밖에 나게 된다. 50년대에 미국 전체를 흔들었던 매카시 광풍의 여파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으나 이후 원자 폭탄의 사용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던 과학자들을 뒷조사하고 사상검증을 하는 등 후폭풍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 프로젝트의 수장이었던 오펜하이머에게 큰 생채기를 남겼다. 그는 비밀인가 취급 권한을 박탈당했고, 공식적인 자리로부터 모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청문회에서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군부가 좋아할 수소 폭탄 개발을 적극 지지했던 에드워드 텔러와의 행보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이런 민감한 문제들이 얽혀있기에, 이번에 개봉되는 영화 <오펜하이머>가 과학사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현재 미 정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두툼한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속에는 20세기 인류사의 한 획을 그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수장의 절정기와 내리막길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으나, 그는 거대한 집단 속에서 자신이 한 일의 의미를 되묻고 검토하였으며 멈춰 설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여기에 거대한 흐름에 맞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유례없는 이 인물에 매력을 느낀다. 나는 앞서 제2차 대전은 물리학자들의 전쟁이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 진실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과학기술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양날의 검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원자 폭탄을 투하할 것이냐의 결정은 정치의 영역이다. 물론 그렇다고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로 사망하게 된 피해자와 파괴된 도시와 전혀 무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다. 이들도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검토하고, 책임 있는 의식도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은 때로 잘못된 길을 가기도 하고 실수도 하지만,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자신이 가는 길을 되짚어 가거나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펜하이머의 행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줄 수 있다.


 

이번에 영화 개봉으로 읽어볼 만한 관련 도서들을 떠올려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논픽션 작가 리처드 로즈의 원자 폭탄 만들기수소 폭탄 만들기가 있다. 특히 원자 폭탄 만들기1988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분을 수상했고, 전미 도서 비평가협회상 및 도서상(1987)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은 바로 오펜하이머가 수장으로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반면 수소 폭탄 만들기는 원자 폭탄 보다도 더 강력한 수소 폭탄을 개발하는 과정을 담고 있어서, 오펜하이머 이후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원자 폭탄의 위력을 실감하고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냉전 시대의 포문을 연 수소 폭탄 시대를 조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큰 기획을 집요하게 담아낸 작가 리처드 로즈의 문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로스 앨러모스에서 ID사진으로 사용했던 오펜하이머의 사진과 수소 폭탄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군부의 편에 섰던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 개발'을, 텔러는 '수소 폭탄 개발'을 이끌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또 원자 폭탄 개발에 큰 기여를 한 물리학자로 엔리코 페르미를 들 수 있다. 엔리코 페르미 평전의 저자 지노 세그레는 페르미의 제자이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에밀리오 세그레의 조카라고 한다. 또 다른 저자 베티나 호엘린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물리학자인 아버지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의 자녀다. 이 책의 저자들은 페르미의 면모를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재구성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페르미에 관한 또 다른 책으로 엔리코 페르미,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사람을 주목해본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슈워츠 역시 눈에 띄는 배경을 지니고 있다. 저자의 아버지 멜빈 슈워츠는 198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항한 과학자인데, 아버지는 페르미의 제자가 될 뻔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유품에서 발견한 페르미에 관한 글로 이 작업을 시작했다는 설명이 호기심을 더한다. 엔리코 페르미 평전이 과학자가 쓴 과학적 평전이라면, 엔리코 페르미,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사람은 정치학자로서 페르미의 유산에 주목한 인물 평전의 성격으로 볼 수 있겠다. 특히 기존에 공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기록 자료나 인터뷰 등이 담겨 있어 주목해볼만한 책이다. 두 저작 모두 페르미에 대해 보다 친밀하게 알고 있던 이들에 대한 접근성을 잘 활용한 저작으로 볼 수 있겠다.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원자 폭탄 투하 전 116일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카운트다운 1945도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탐사 보도를 해온 저널리스트 크리스 월리스와 미치 와이스의 결과물이다. 이 책에 따르면, 최초의 원자 폭탄 투하 직전의 상황은 불황실성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최초의 원자 폭탄 투하 시에는 한 달 전(716)에 이루어 졌던 트리니티 테스트 실험에서 사용되었던 둥근 모양의 내폭형 원자 폭탄(플루토늄 사용)이 아니라, 실제 작동조차 불확실했던 총류형(혹은 포신형)리틀 보이’(우라늄235 사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기술로는 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 농축기술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인가했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프랭클린이 4월에 갑자기 사망한 사건은 당시의 급박하고 안개 속 같은 정국을 보여주는 불안한 징후였다. 프랭클린 대통령 이후, 부통령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어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던 것도 또 하나의 불확실한 변수였다. 이 책은 원자 폭탄이 최초로 투하되기 전 약 4달 간의 기간에 워싱턴 정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정황을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여기에 더하여 원폭 투하라는 모티브에 관계된 여러 작품들을 더 모아볼 수 있겠다. 우선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가 떠오른다. 이 소설은 원자 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사건(194589)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의 특징은 원자 폭탄의 참상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보다 절제된 서술이 인간 내면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 존 허시의 1945 히로시마가 있다. 194586,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 폭탄이 터진 사태로 순식간에 8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고 한다. 저널리스트로서 존 허시는 원폭 투하 1년 후 파괴된 도시를 방문하여 생존자 여섯 명을 만나 증언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앞서 언급한 도서들은 주로 과학사적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한 셈이지만, 문학과 논픽션/다큐멘터리 결과물의 관점에서는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옮겨, 피해당자사의 입장을 들여다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특히 이 점에서 서경식 교수가 어느 칼럼과 책에서 상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올해 기상이변과 집중 호우로 남부에 피해자가 속출하고 상당한 재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인원이 적어 기준에 미치지 못하므로재난 선포하기가 어렵다는 정부의 대응은, 관련 책임자들의 도덕적 무책임과 공감력의 빈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피해자 수는 그저 정보로만 여겨졌을 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경식 교수가 반복해서 글로, 말로 이야기해주는 것은 바로 피해자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말이다. 이 작업은 고통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래야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참고기사: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25406.html)



마르그리트 뒤라스의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책도 눈에 들어온다. 이 소설은 동명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히로시마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원자폭탄 투하라는 참상을 모티브로 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 프랑스 여인의 비극적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 또 실타래처럼 떠오르는 책은 20세기 일본의 지성으로 여겨지는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 자신의 회고를 담은 이 책에서 의사이기도 한 저자는 히로시마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일본의 패전을 지켜보았던 지식인이었다. 한쪽에서는 원자 폭탄을 개발한 이야기와 투하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면, 다른 쪽에서 원자 폭탄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책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에 아직은 번역이 되어 있지 않으나국내에도 여러 권의 저서가 번역 출판 된 물리학자이자 과학 저술가 짐 배것(Jim Baggott)의 The First War of Physics(미국판), Atomic: The First War of Physics and the Secret History of the Atom Bomb 1939-49(영국판)이라는 과학사 서적도 주목해본다. 그 밖에 원자 폭탄을 주제로 한 역사서나 과학기술서등은 훨씬 많을 것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관심에 이어 다양한 관점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면 흥미로울 것이다.



 

처음에 생각했던 도서 소개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항상 옆길로 새어 버린다. 여전히 두서가 없다. 하지만 최근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기대를 받고 있는 영화의 개봉을 기회로 함께 읽어볼만한 책들을 모아보았다. 원자 폭탄 개발과 투하라는, 인류사에서 전대미문의 이 사태에 대해 이를 단순한 정보로서만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이 국면을 상상해보는 일은 앞으로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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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8-06 1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엄청난 글이네요 ㅋ 오펜하이머 영화도 보고 싶고 이 책도 읽고 싶네요.
초란공님의 소개책 중 <창백한 언덕풍경> 만 읽어봤네요 ㅋ

멘하튼 프로젝트에 이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군요. 완전 흥미롭네요 ㅋ

초란공 2023-08-06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른 유명 과학자들도 영화에 등장할지,... 유명 배우들이 많이 등장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