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이후 사이언스 클래식 14
스티븐 J. 굴드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윈 이후 (Ever Since Darwin)

: 다윈주의에 대한 오해와 이해를 말하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독서일기] 스티븐 제이 굴드와 처음 만나다


최근에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1941.09.10-2002.05.20)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다. 여러 책에서 끊임없이 언급되어 이름만 익숙했던 과학자였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처음 읽을 책으로 1977년에 출간된 굴드의 첫 에세이집 다윈 이후 Ever Since Darwin을 골랐다. 굴드의 프로필을 보다가 그의 기일이 바로 오늘(05/20)인 것을 알게 되어, 짧은 독서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오늘이 19주기가 되는 셈인데, 굴드는 암으로 만60세를 막 넘은 시기에, 활발히 글을 쓰고 연구하던 학자로는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뜬 셈이다.


처음 읽기 시작한 다윈 이후(1977)는 굴드가 1974년부터 2001년까지 27년간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자연사>에 연재한 300편이 넘는 에세이 중 초창기 글에 해당한다. 이 책이 나온 1977년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초판(1859)이 나온 지 118년 째 되던 해였다.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대목은 다윈이 주장한 자연 선택 이론이 사실상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 1940년대였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는 이미 유전자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져 있던 시기였음에도 말이다. 나아가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발견(1953)되기 불과 10여 년 전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처럼 많이 언급된 주제이면서도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오해를 낳았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당대에는 다윈조차도 진화의 보다 포괄적이고 명료한 이해를 위한 지식(이를테면 분자수준에서의 진화 현상에 대한 이해)이 아직 온전하지 못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굴드는 다윈과 진화론에 얽힌 오해를 다시금 의혹의 눈길로 검토한다. 또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연구하는 학자답게 생명의 진화에 대한 주제뿐만 아니라, 인류의 진화, 그리고 지구의 진화에 대한 논의도 이어나간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 격렬한 논쟁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보다 정교하고 이해의 폭이 넓어진 이론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굴드는 기본적으로 이런 작업을 30년 가까이 지속했다. 그는 무엇보다 다윈주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던 것 같다. 매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놀라운 과학적 사실들이 발견되어 기존의 과학지식에 더해진다. 80년대 이후 새롭게 더해진 과학적 사실과 이해를 반영한 굴드의 견해는 이후의 저서를 계속 읽어나가면서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읽은 부분(주로 1부 다윈주의)에서는 다윈 이론의 핵심을 이야기한 부분을 기억해두기로 한다

다윈 이론의 핵심은 자연 선택이 단순히 부적자(the unfit)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 진화의 창조적 추진력이라는 점에 있다. 더구나 자연 선택은 반드시 적자(the fit)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8)


굴드는 4장에서 이 표현을 조금 바꾸어 다시 언급한다.


다윈주의의 본질은 자연 선택이 적자를 창조한다는 주장에 담겨 있다. 변이는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그 방향은 임의적이다. 그것은 소재를 공급해줄 뿐이다. 자연 선택은 진화라는 변화의 방향을 지시한다. 그것은 선호되는 변이 종들을 보전하고 점진적으로 적응도를 쌓아 올린다.”(57)


자연 선택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지적 적응(local adaptation) 이론이다. 거기에는 완성의 원리가 없으며, 전반적인 개선의 보장도 없다.”(58)


이처럼 굴드는 다윈주의에 주목하는데, 자연 선택 개념의 핵심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들을 제거하는 부정적인 역할보다는 이 개념의 창조성에 방점을 둔다. 나아가 진화의 메커니즘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지적 적응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늘은 처음 굴드의 책을 읽기 시작했으므로 이 점만 언급하기로 한다.


독자는 각자의 관심사와 당면한 문제를 책에서 발견하기 마련이다. 굴드의 글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그의 (다윈주의 Darwinism가 아니라) ‘다원주의’(pluralism)적 시각이었다. 대개 과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을 대립적인 구도에 놓고 종교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반면 굴드는 처음부터 비판 대상을 배제하지 않고, 고려할만한 주제들을 모두 링 위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굴드의 에세이에서는 대상의 어떤 점들이 설득력이 떨어지는지를 하나하나 검토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인류의 진화를 이야기하는 2부에서 저자는 진화적 변화의 은유 장치로서 사다리론관목론을 언급한다. 굴드는 진화가 종분화’(speciation)과정으로 새로운 종이 갑작스럽게출현하는 과정이 반복된다는 관목론을 지지한다. 반면 찰스 다윈의 관점은 사다리론에 해당하는데, 이 이론은 진화가 느리고 지속적인 변형을 통해 새로운 종이 나타난다는 시각이다. 저자는 이 두 개념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이론과 대척점에 있는 이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자신의 이론이 왜 더 설득력을 가지는지 차근차근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저자의 학문적 자세는 비판 대상이 다윈과 같은 대가의 주장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관점으로 봤을 때 말이 너무나 안 되어 보이는 이론에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었다.


굴드는 1장을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신에 대한 외경과 자연 과학적 지식은 다 같이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생물계의 완벽한 조화로움이 사전에 계획되지 않았다고 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감소하는가?”(30) 처음 읽을 때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독서일기를 기록하면서 다시 훑어보니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과학자로는 보기 드문 모습인데, 굴드의 에세이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 부분이 굴드의 글쓰기에서 하나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겠다. 비판하는 대상의 위상을 단순히 축소하고 배제하지 않고, 대상 혹은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거쳐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굴드의 책은 절판이 많이 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절판되었다고 원가보다 높게 중고책을 판매하는 분들....그러지 마시길. 여러 출판사에서 절판된 책을 다시 출간해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더 읽게 될 굴드의 에세이가 기대된다.



"다윈 이론의 핵심은 자연 선택이 단순히 부적자(the unfit)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 진화의 창조적 추진력이라는 점에 있다. 더구나 자연 선택은 반드시 적자(the fit)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8)

"다윈주의의 본질은 자연 선택이 적자를 창조한다는 주장에 담겨 있다. 변이는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그 방향은 임의적이다. 그것은 소재를 공급해줄 뿐이다. 자연 선택은 진화라는 변화의 방향을 지시한다. 그것은 선호되는 변이 종들을 보전하고 점진적으로 적응도를 쌓아 올린다."(57)

"자연 선택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지적 적응(local adaptation) 이론이다. 거기에는 완성의 원리가 없으며, 전반적인 개선의 보장도 없다."(58)

"신에 대한 외경과 자연 과학적 지식은 다 같이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생물계의 완벽한 조화로움이 사전에 계획되지 않았다고 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감소하는가?"(30)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금모자 2021-05-20 14: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풀하우스>도 꼭 읽어보세요!

초란공 2021-05-20 15:34   좋아요 1 | URL
오~ 추천 감사합니다! 읽기 리스트에 포함!

초딩 2021-05-20 15: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어디 다른 책에서
단속평형을 강명 깊게 끄덕이며 봤습니다~~

초란공 2021-05-20 15:35   좋아요 1 | URL
저는 좀 더 읽어봐야 겠네요~ 기대됩니다^^

베터라이프 2021-05-20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판본이 복각판인지 새로 쓴 판인지 모르겠지만 이리 보니까 매우 반갑네요. 저는 범우사판으로 갖고 있는데 아마 2002년도 쯤 헌책방에서 구했을거에요. 이때는 허버트 스펜서를 잘 모를때라 그냥저냥 읽었는데 이젠 기억도 가물해서 한번 구해서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 하여튼 잘 지내시죠? 그러고 보니 범우사인지 범양사인지 가물하네요.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습니다 ㅋㅋ

초란공 2021-05-20 18:20   좋아요 1 | URL
책의 성격상 범우사 보단 범양사일 듯한한데요?^^ 하긴 70년대 나왔으니 40년이 넘었네요~

고양이라디오 2023-01-31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굴드팬 확인!ㅎ 저도 <다윈 이후>로 굴드책을 처음 만났는데 반갑습니다.

상대방의 의견도 충분히 존중하고 이해하는 굴드의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 균이 만드는 지구 생태계의 경이로움
멀린 셸드레이크 지음, 김은영 옮김, 홍승범 감수 / 아날로그(글담)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균이 만드는 지구 생태계의 경이로움

멀린 셸드레이크(Merlin Sheldrake) | 김은영 옮김 | [아날로그]

 

 

'곰팡이가 만든 세상을 읽는 방법'


 

이번에 만난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는 아마 상반기에 읽은 과학서적 중에 가장 흥미로운 책이 아닐까 싶다책의 저자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그는 10대 시절에 이미 자신의 방에서 버섯을 길렀던 인물이다그리고 지칠 때까지 부모님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고가을과 낙엽 냄새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흐드러지게 핀 꽃송이에 얼굴을 파묻기도 했던 추억을 이야기한다저자는 세상을 향해 곤두박질치듯 달려들라’(375)고 격려하던 아버지의 관심과 보살핌을 격려 삼아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에 얼굴을 파묻기도 했던 추억을 이야기한다이러한 경험이 기반이 되어그는 한 줌의 흙 속에서 우주를 발견하고이 세상의 비밀을 밝혀내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 멀린 셸드레이크는 균류를 연구하는 생물학자이자 생태학자다그런데 어떻게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탐구하게 되었을까책 속에서 띄엄띄엄 보이는 저자에 관한 정보들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우리의 교육 시스템에서 이런 사람이 탄생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이 책은 곰팡이와 같은 균류가 만드는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식물을 비롯한 생태계의 놀라운 네트워크를 통해 바라보는 과정이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지식을 다시 검토하게 하는 것이다저자의 전문적인 지식과 소양문학적 상상력그리고 튼튼한 필력은 생명을 이루는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를 보다 생생하게 이끌어주고 있다.

 

미생물이 인간 사회 전체에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해왔다는 점은 이미 우리가 경험하는 바다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간주해왔지만사실 우리는 수많은 생명의 가지 중에서 우연히 성공하여 살아남은 곁가지 하나에 불과하다이 책에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지만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공생균사체 네트워크그리고 수평적 유전자 전이와 같은 것들이 아닐까 싶다나는 식물이 단지 줄기와 잎뿌리로 명확하게 구분된다고만 알고 있었지만저자는 식물의 정의혹은 식물이라는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할 수 없다고 알려준다그 주된 이유는 미생물이 생명활동에 단순히 개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매우 중요한 역할도 담당하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식물의 뿌리 중심에 균류가 자리 잡고 있고균사체 네트워크가 뿌리 사이뿐만 아니라 식물과 식물 사이를 이어주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나에게 놀라운 사건이었다게다가 자신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해석하는 곰팡이라니!

 

여기에서 나는 지인이 몇 년 전에 경험하고 내게 말해준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려 보았다그는 언젠가 출장을 가게 되어 세면도구를 챙기다가 몇 달 동안 아내와 칫솔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이후 이 충격적인(?) 사건이 잊혀 지는가 싶었는데그의 체질에 조금의 변화가 생겨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예를 들면 과거에 그는 매운 음식이나 피자를 먹으면 배탈이 나지 않았는데이제 그가 이런 체질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흥미로운 건 이 체질이 그의 아내가 결혼 전에 지니고 있던 특징이었다는 점이다뿐만 아니라 그 전에는 부부가 같이 있으면 모기가 지인의 아내에게만 몰려들어 지인은 모기에 물리는 적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그런데 이제는 그가 아내보다 모기에 더 잘 물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분명히 몇 년 사이에 지인과 부인의 체질이 변해있었는데상대방이 갖고 있던 체질을 어느 정도 서로 공유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 나는 이 변화가 단순히 노화(?)로 인한 개인적인 신체상의 변화일 것이라고 추측했다아니면 같은 공간에서 부부가 함께 지내며 서로가 닮아가는 것일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기만 했었다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지인의 체질 변화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저자에 따르면, ‘동물의 장 속에 사는 박테리아가 동물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화학물질을 생산할 수 있다’(186)고 한다이 분야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분야인 신경미생물학에 속한 영역으로장내 미생물이 뇌와 상호작용을 하고나아가 심리적 상태인지 및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설명(415, 주석10)이었다그러므로 지인 부부가 인지하지 못한 채 몇 달간 칫솔을 공유했던 경험을 통해 각자 지니고 있던 미생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저자는 주석에서 서로 다른 기질의 쥐에 대한 언급을 한다여기에는 이 쥐들 사이에서 미소생물상을 교환하는 사례가 나온다. ‘정상적인’ 기질을 가진 쥐에게 소심한’ 쥐의 장내 미생물을 이식하자 과도한 경계심을 보이고 우유부단해졌다는 대목이다(415). 이 현상이 부부가 칫솔 공유를 했던 지인의 경험 및 이후의 체질 변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저자는 진화의 새로운 공동저자로 공생과 수평적 유전자 전이를 강조하고 있는데이 두 개념으로 지인의 체질 변화에 대한 설명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특히 한국인들은 가족이 식사할 때 반찬과 찌개 등을 공유하곤 하므로가족들이 비슷한 체질을 갖게 되는 실마리를 이 대목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아울러 흥미로운 점은 지인의 아내가 과거에 찬 음식과 매운 음식그리고 피자와 같은 음식을 먹고 배탈이 잘 났지만이제는 이 현상이 상당히 사라졌다는 점이었다나는 이 변화가 부부의 몸 속 미생물이 상대방의 몸특히 장 내부에 침투했고, ‘수평 유전자 전이를 통해 빠르게 상대방의 체질적인 특성을 공유하여장 내부에서 새로운 공생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증거로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주제를 연구할 수 있는 분야가 신경미생물학인데, ‘장 내부의 세계를 통제하거나 조종하는 것’(416, 주석10)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특히 장 내부에는 변수가 너무나 많기에 이 미생물의 활동과 특정 행동 사이의 인과 관계를 밝힌 연구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우리의 몸과 가족 사이의 관계 등에 대한 이해를 넓혀줄 수 있는 실마리를 이 작은 존재들이 쥐고 있었다.

 

그밖에 균사체 네트워크가 식물에 필요한 물질의 수송 네트워크 역할을 하는 이야기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빛을 내는 발광 곰팡이에 대한 이야기그리고 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지의류에 대한 이야기 역시 무척 흥미로웠다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모든 현상들은 식물과 곰팡이가 각각 독립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공생을 통해 가능했다여기에는 배경으로서의 지구 환경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나아가 이런 현상의 이면에 그토록 많은 우연과 필연의 요소를 포함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는 점을 생각하면 생명과 지구의 역사가 경이롭게 다가오기도 한다이렇게 형성된 식물과 균류 혹은 곰팡이 연합은 다시금 지구 대기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미칠 수 있었다는 인식이 새로웠다이것은 균근 관계가 생명의 진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줌의 흙은 그 속에 생명이 가득 차 있는 우주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우리가 단순히 생산성만을 높이기 위해 사용해온 화학비료가 땅 속의 균사체 네트워크를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안다면우리의 삶과 미래를 위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일이 보다 수월해질 것이다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생소한 개념들낯선 개념들이 많이 남지만누구든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생태계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균사체는 정형화된 신체 형태가 없다."(97)

"균사체는 통제센터가 없다."(99) - P97

"환경에 묻혀 있는 균사체는 스스로 변신(shape-shift)한다. (...) 모든 개체는 개별적인 신체 구조를 갖는다.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균사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균사체에 관한 발달론적인 ‘비결정론‘(indeterminism)
- P101

"우리는 보통 동물과 식물을 물질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물질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시스템이다." - P104

"융합하거나 번식할 때면 균사는 ‘타자’로부터 ‘자아’를 구분하며 ‘타자’의 종류도 구분한다." - P111

"‘인간과 비인간을 ‘진정한 정신’과 ‘진정한 이해력’을 기준으로 삼아 칼로 무 자르듯 깔끔하게 선을 그어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의 신화’일 뿐이다."
- 다니엘 데닛(Daniel Dennett)의 말 재인용 - P122

"우리 몸속에 있는 미네랄 일부는 어느 시점엔가 지의류를 거쳤다."
-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 P139

"곰팡이의 DNA는 지의류가 된 조류에서 발견된다. 인간 게놈의 최소한 8%는 바이러스에서 출발했다."
- 405, 주석 12 - P405

"지의류는 파트너쉽으로부터 생겨난 혁신의 놀라운 사례다. 연합체인 지의류는 부분의 합보다 훨씬 크다."
- 내부공생설을 주장한 린 마굴리스의 말. ‘초기 진핵세포는 지의류와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

"내부공생설은 21세기 진화생물학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나는 린 마굴리스의 흔들림 없는 용기와 열정에 큰 감명을 받았다."
- 내부공생설을 지지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말 재인용 - P148

"식물은 뿌리가 없습니다. (…) 식물이 가진 것은 균뿌리, 즉 균근입니다."
- 저자의 학부시절 교수가 수업중 한 말, 식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 - P2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


앤 드루얀(Ann Druyan) 지음 |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를 위한 짧은 변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를 모두 읽어본 한 지인은 앤 드루얀의 책이 전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나에게 했다. 나는 아직도 칼 세이건의 이 유명한 책을 읽어보진 못했기에 지금 두 권을 비교해서 평을 할 입장은 되지 못한다. 다만 나는 앤 드루얀의 신간을 읽고 마음에 들었던 점들을 독후기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칼 세이건의 저작은 이미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베스트셀러인데다, 많은 독자 팬을 두고 있기에, 후속작이 전작을 능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거다. 내가 앤 드루얀의 책을 읽으면서 주목했던 부분은 이 책이 공식적이든, 개인적이든 전작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이 책 나름의 자리가 있다는 점이었다.

 

앤 드루얀은 이미 여러 권의 책과 다큐멘터리 영상 <코스모스> 작업 등을 오래 해온 베테랑 작가이자 감독이다. 애초에 그녀는 자신의 책이 남편의 작업이자 전작을 넘어서기를 목표로 경쟁했던 것이 아니다. 책 끝부분에서 저자는 조심스럽게 독자를 감탄시키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저 독자와 소통하고 이어지길 바랐다’(423)는 고백을 하고 있다. 어느 작업이 더 훌륭하냐를 따지는 것은 물론 독자 마음에 달려 있는 문제이고, 이 문제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앤 드루얀의 책이 그 나름의 장점과 주목할 만 한 점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과거 칼 세이건의 주요 저작(물론 앤 드루얀과 공저한 작업을 포함하여)은 주로 미소 냉전이 한창일 시기에 나온 결과물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과학기술에 힘입어 만들어진 원자 폭탄과 같은 가공할만한 무기로 인한 인류 공멸의 위험을 절실히 체험했고, 이를 꾸준히 경고했었다. 냉전 시대가 저문 후, 앤 드루얀은 같은 맥락에서 이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문제,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한 우려와 경고의 메시지를 책에 절실히 담고 있었다. 이 점에서 앤 드루얀은 과거 두 사람이 인류에 대해 걱정하고 염려하던 전통을 변함없이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세상의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풍부한 화제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장점이자 단점으로 볼 수도 있다. 많은 이야기를 하는 대신 보다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기 힘들기 때문이다. 앤 드루얀의 책은 아주 깊이 있게 내용을 파고드는 책은 아니다. 과학과 관련된 다양한 삶의 문제를, 마치 스몰토크를 하듯 가뿐히 다루면서도 과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메시지를 놓지 않는 다. 나는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과학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편안한 자리에서 듣고 의견을 나누는 것 같아 독자의 접근성이 좋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도 분명 독자의 호불호가 나뉠 것이다.

 

물론 책에는 저자가 칼 세이건과의 만남과 사랑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은 익숙하게 다가오진 않았지만, 이는 문화적 정서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앤 드루얀의 공식적인 작업이 결국은 칼 세이건과 함께 했던 시간들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나는 이 책이 한 사람에 대한 꾸준한 사랑과 상실에 대한 애도의 작업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외부로 나아가 전 세계 독자의 삶에 닿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앤 드루얀의 염려는 저자가 인용한 스피노자의 한 마디에서, 시인 윌리엄 예이츠의 한 마디, 그리고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세계 종자 은행 개념을 제안했던 식물학자 바빌로프의 행적에서, 지구의 재앙이 임박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마나베 슈쿠로의 논문 등에 관한 이야기들에서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었다.

 

써놓고 보니 꽤나 일방적인 칭찬만 있지 않을까 싶지만,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를 두고 지인이 남긴 평에 대해 내가 좋았던 점을 정리해보고자 했다. 진부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저자가 후대인들이 선대의 업적을 기반으로 혹은 이 업적을 개선함으로써 선대의 지적 성취를 딛고 올라설 수 있었던 인류사의 장면들을 흥미롭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 책이 풍부한 화제를 담고 있는 만큼 각각의 화제는 또 하나의 씨앗이 되어 더 깊은 배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앤 드루얀이 1939년 세계박람회에서 아인슈타인이 했던 연설을 인용한 대목이 인상적이어서 남겨보고자 한다.

 

과학이 예술처럼 그 사명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수행하려면,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26)

 

우리가 흔히 과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이야기할 때, 아인슈타인은 대중에게도 그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묻고 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과학과 관련해서 말이다. 이 문장은 환경문제와 지구온난화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감안할 때, 여전히 귀담아 들을 말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이 예술처럼 그 사명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수행하려면,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 1939년 세계박람회에서 한 아인슈타인의 연설 재인용 - P26

"사람들의 마음은 무력이 아니라 사랑과 이성으로만 정복할 수 있다."
- 바뤼흐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재인용 - P76

"꿈에서 책임이 시작된다"
-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처음 사용한 말 재인용 - P126

"바빌로프와 동료 식물학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미래가 그토록 손에 잡힐 듯하고 귀중한 현실로 느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 P171

"우리는 모두 똑같은 도구 상자로 만들어졌고... 똑같은 유전 물질로 만들어졌으며,... 다만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밟아 왔을 뿐이다." - P266

"양자세계의 무법적 카지노에는 객관적 현실이라는 것이 없다." - P325

"우리가 예측력을 발휘하는 과학을 개발하더라도, 결국 손 놓고 앉아서 그 예측이 현실로 실현되길 기다리기만 할 거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 P414

"나는 더 이상 독자를 감탄시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독자와 소통하기를, 독자와 이어지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리고 <코스모스> 이후의 내 모든 작업은 매일 칼에게 바치는 사랑의 선물이었다." - P42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5-14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개인적으로 앤두루얀의 책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과학적 지식이 없어도 술술 읽혀지게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넣었고 (지루하지 않게 편집도 잘됨)
남편의 인간적인 모습도 좋았어요
남편은 워낙 세계적인 과학자 였고 코스모스 라는 책보다 미국에서 영상물로 더 많은 대중들에 관심을 모아서 전문성을 놓고 평가하기보다
남편을 향한 아내의 마지막 헌사 처럼 읽혀졌어요.

초란공 2021-05-16 22:07   좋아요 1 | URL
저도 scott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가족이든 지인이든 한 사람을 그렇게 평생을 좋은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멋진일인것 같습니다~
 

, 만들어진 위험 (Outgrowing God)

: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시작된 당신에게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지음 | 김명주 옮김 | [김영사]

 


찌르레기 무리의 움직임 패턴으로부터 인간의 본성과 대량 학살을 모형화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마지막 문장(“나는 우리가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성장함으로써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52)은 신이란 인간이 만든 허구적 개념임을 끊임없이 설파해온 리처드 도킨스의 요점을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다. , 만들어진 위험은 수십 년 동안 신의 부재와 종교의 허구성을 지적해온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입문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도킨스는 진지하고 집요하게 논점을 파고들기 보다는 몇 가지 사항에 집중하여 대체로 가볍게 자신의 생각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준다. 다만 나는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신은 뻥이다’)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해보고 싶다.


도킨스가 다루고 있는 여러 논점 중에서 5장의 선해지기 위해 신이 필요할까?’라는 주제를 우선 불러와본다. 흔히 서양의 3대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여겨지고, 이 종교들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근원에서 나왔다고 한다. 도킨스는 종교를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본인이 잘 알고 익숙한 기독교를 염두에 두고 논의를 전개한다. 다만 5장의 주제에 대해 저자는 흥미로운 통계자료를 제시한다. ‘신이 우리를 언제나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가진 인간은 더 선하다는(도킨스의 표현에 따르면, ‘하늘의 거대한 감시 카메라 이론’) 암묵적인 전제를 다음의 사례로 검토한다.


20137월에 조사된 미국 연방교도소의 기결수에 관한 조사다. 자료에 따르면, 수감자의 28%가 개신교 그리스도인, 24%가 카톨릭 그리스도인, 5%가 이슬람교였다. 나머지는 불교도, 힌두교도, 유대교, 아메리카 원주민 등이었다. 여기서 도킨스는 50%이상의 재소자가 종교를 갖고 있다고 언급하며, 종교가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는 전제는 설득력을 잃는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증에는 대체로 동의는 할 수 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다. 예컨대 종교와 무관하게 미국의 백인과 흑인의 재소자 비율을 보면 실제 인구 구성비율과 크게 차이가 날 정도로 흑인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점은 흑인들에게 결함 혹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단순히 결론을 내리기 쉽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법이 제정되는 배경 혹은 기준에 대한 내막을 좀 더 들여다봐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백인들과 흑인들의 마약 사범들이 주로 손을 뻗는 마약의 종류가 인종별로 뚜렷이 나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만일 흑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마약에 대한 처벌 규정이 백인 마약 사법에 적용되는 규정보다 비관용적이고 더 엄격하게 제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흑인 마약 사범이 백인 마약 사범보다 더 많이 검거될 여지가 발생하며, 이들이 더 중한 처벌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 점은 여러 사람들이 이미 지적해오고 있으므로 새로울 것은 없다.


달리 말해보자면, 법은 개인의 존재를 보존하는데 기여하는 인간의 사회적 장치다. 판단의 기준을 인간이 만들고 제시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복잡한 인간 사회 속에서 절대적 기준이 되기에 법 자체는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또 한편으로 모든 사람은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 사도 바울의 원죄 개념’(이제 보니 이 원죄 개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먼저 제시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인 것 같다)처럼, 어떤 죄가 규정된 순간, 사회적으로 범죄자가 양산되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 마디로 법이 그 땐 문제없었지만, 지금은 문제다라는 특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 시대와 사회에 따라 법이 다르다. 인간이 라고 규정한 항목과 기준이 상대적이란 의미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도킨스의 기결수와 종교 분포 비율만 가지고 선함과 악함의 정도와 종교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증거로 쓰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2013년 자료를 조사할 당시의 죄에 대한 관념과 법 규정에 대한 인식이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도 검토해야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에 종교인들이 거리로 많이 나와서 시위를 하다가 범법자가 되어 수감된 것인지 자세한 내막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혹은 미국 내 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조롱과 차별에 분노한 나머지 일부 이슬람 교도들이 범법 행위를 하고 수감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통계숫자는 대략적인 방향을 지시하는 인덱스로 사용될 수 있겠지만, 개별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도킨스의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제시하는 자료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타성,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도킨스의 논증에 대해

 

이 책에서 나의 흥미를 자극한 부분은 생명 탄생의 설계 방식을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에는 DNA가 있다. 그리고 DNA는 흔히 생명체를 만드는 청사진이 담겨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도킨스는 표현이 주는 모호함과 왜곡가능성을 지적하고, 보다 정교하게 이 DNA의 역할을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DNA청사진이란 표현은 매우 잘못된 표현으로, 오히려 생명체를 만드는 방법에 관한 지시 세트’(271)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기의 DNA를 고려할 때, 아기의 신체 각 부분은 DNA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DNA에 아기의 각 부분을 만들어내는 모든 암호는 이미설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DNA는 오히려 케잌을 만드는 레시피와 비슷하다. DNA의 정보는 어떤 의미로든 아기의 지도가 아니다라고 의미를 밝힌다. 여기서 두 가지 흥미로운 생명 탄생의 설계 방식을 제시하는 데, 하나는 하향식 설계, 다른 하나는 상향식 설계를 언급한다.


도킨스가 이야기하는 하향식 설계는 생명체 구성의 모든 암호가 이미 구체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청사진을 이야기한다. 나이가 들어 내 얼굴 어딘가에 점이 나타났다면, 이건 이미 내 DNA의 어딘가에 묻혀 있던 부위가 어느 시점에서 기능을 발휘하여 내 얼굴에서 발현된 것이다. 이 하향식 설계(혹은 청사진 개념)는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생장하고 변화하는 생명체를 만들어가는 데 매우 비효율적인 생명 설계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상향식 설계는 애초에 모든 것이 결정되고 지정된 청사진이 아니라, 전체 움직임이나 행동이 국지적 규칙만을 따라 출현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도킨스는 상향식 설계 방식의 예로 흰개미 언덕과 찌르레기 떼의 군무를 언급한다. 그 중에서 거대한 찌르레기 떼의 사례가 더 흥미로운데, 이 새의 무리는 수만 마리의 개체가 무리를 이루어 함께 날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정밀하게 조정하고 일사분란하게 방향을 바꾸며 대형을 구성한다. 이를 레이놀즈라는 프로그래머가 이 움직임의 패턴을 재현해 냈는데, 그 방법은 단지 각 개체에게 옆에 있는 새를 주시하고, 그에 따라 움직이도록 규칙을 정한 것뿐이었다.


여기서 잠시 옆길로 빠져본다. 나는 찌르레기 집단의 움직임 패턴에 적용된 상향식 설계 기준을 인간의 대량 학살(genocide)에 관한 사례에 적용하여 모형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 역사에 기록된 의도적인 대량 학살의 양상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그 주동자를 악한 인간으로 단정해버리기 쉽다. 대량 학살을 자행한 히틀러와 스탈린을 악의 화신이라고 규정해버린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하향식 관점(‘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한 인간이었다’)을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우리가 대량학살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 찌르레기의 군무를 설명할 수 있는 상향식 관점을 적용하면, 대량학살을 효과적으로 모형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학계에서 이미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나는 단순한 아마추어 독자일 뿐이므로 이런 연구에 대해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다시 말하면, 대량학살에는 이 작업을 지시한 지도자가 있고, 이를 숭배하는 측근과 대중을 위협하는 수단이 있으며, 그 결과 아무도 이들을 저지할 힘을 지닌 상대 집단이 없다면, 대량학살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찌르레기 군무 패턴을 프로그램할 때 적용된 규칙(‘국지적 규칙만을 따르면 된다’)은 대량학살을 모형화 할 때, 전범 재판장에 섰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업무 수행 규칙(‘나는 공무원이므로 명령에 따르기만 했을 뿐이다’, ‘나는 내가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만을 적용하면 된다. 결국 600만 명의 유대인이 최종 해결책으로 스러져갈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히틀러나 아이히만 그 자체를 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독일군 집단이라는 시스템이 돌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지시에 따르기)만으로도 집단 학살이 가능하다는 점을 찌르레기의 움직임 패턴을 설명하는데 활용했던 상향식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히틀러의 인종주의(유대인 혐오/반유대주의)나 스탈린의 이데올로기가 더해지면, 그 구성원들은 심리적 단결과 함께 인류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덜어버리는 상황이 된다.


잠시 옆길로 샜는데, 다시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도킨스의 논점으로 돌아온다. 도킨스는 인간이 이타성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참고할만한 사례로 굶주린 박쥐를 소개한다. 야행성인 박쥐는 매일 밤 먹이를 구하러 다니지만, 언제나 성공하진 않는다. 따라서 운 좋게 먹이를 구한 개체는 그날 허탕치고 먹이를 구하지 못한 같은 동굴 출신의 박쥐에게 자신의 먹이를 나누어 준다고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동굴에 있는 박쥐에게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도킨스는 친절에 대한 진화적 압력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다’(315)고 언급한다. 아직 명료하게 밝혀진 사항은 아니지만, 진화라는 개념이 성공적인 유전자가 유전자풀에 점점 많아진다는 것’(306)을 의미한다는 것을 상기한다. 이 점이 친절의 진화적 바탕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이타심에 대한 개념 역시 언제나 이타적/이기적행동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굶주린 박쥐의 경우도 먹이를 구한 개체의 호혜적이타주의행동이 다른 동굴 출신의 박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타심이 적용되는 경계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언제나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어느 개체의 이타심의 발로라고 부를 수 있는 팔이 안으로 굽는 행동은 이 집단의 경계 밖에서 봤을 때 언제나 이기적 행위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이타심’(곧 다른 집단에게는 이기심에 해당)의 발로가 곧 집단과 의 생존 확률을 더 높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비전공자이므로 내 마음대로 펼쳐보는 상상에 불과하다.


도킨스는 책에서 자연선택은 우리 뇌에 제한된 친절의 바탕을 심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불친절의 바탕도 심는다. (...) 인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 균형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친절한 방향으로.”(306)라고 언급했다. 앞서 언급한 나의 생각을 여기에 적용해보자면, 친절의 바탕을 심는 것은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해서이며, 불친절의 바탕을 심는 것은 타 집단에 대해서라고 생각하면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이 균형의 이동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도킨스는 인간이 점차 친절한 방향으로 진화해왔다는 논리로 주장하는 듯하다. 나는 이 논리가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주장했던 논지와 유사하다고 본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스티븐 핑커는 이 두툼한 책에서 인간이 폭력성이 역사 이래 줄곧 감소해왔음을 엄청난 데이터와 자료들을 제시하며 논증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생각은 인간이 본성에 대한 스티븐 핑커의 논점은 자기기만적이라고 보았다. 그 이유는 스티븐 핑커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본성을 이미 하향식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의 관점은 인간이 폭력적인 존재이지만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교훈과 교육을 통해 선한 존재로의 교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 지점이 도킨스의 인간에 대한 이타심혹은 친절 행위의 진화적 바탕을 이루는 생각과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앞서 찌르레기의 움직임 패턴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인간을 어떠한 존재로 규정하지 않고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선하다거나 악하다혹은 본래 폭력적이다라고 규정하는 대신, 어떤 특정 조건에서 인간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단지 이 논리를 대량 학살을 모형화할 때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인간의 친철에 대한 진화적 바탕을 도킨스도 단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이 부분은 앞으로의 연구결과가 더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오늘은 도킨스가 이 책 , 만들어진 위험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앞선 조상들의 지적 용기에 영감을 받아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341)는 것과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352))보다는 겨울철 찌르레기 군무에 관한 사례를 흥미롭게 읽다가 잠시 딴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전공자분들이 보시면 나의 엉터리 이야기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의도한 부분만 배운다면 재미없지 않은가. 책을 읽다가도 가끔은 엉뚱한 생각도 필요하다. 도킨스가 책에서 언급한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종종 지적 용기를 내어 생각의 골디락스 존(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지 않은, 생명의 출현에 적당한 구역)’을 벗어날 필요도 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못한다‘는 내용에 대해)
"이 규칙은 알고 보니 "너희 부족 사람들을 살인하지 말라"는 뜻일 뿐이었다." - P108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나의 주님이자 구세주를 천사로 느낍니다. 나는 그를, 소수의 추종자에 둘러싸인 고독한 상황에서 유대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차리고 그들에 맞서 싸울 사람들을 소집한 분으로 느낍니다. 고행자가 아닌 전사로서 가장 위대했던 분으로 느낍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주님께 무한한 사랑을 느끼며, 마침내 주님이 어떻게 온 힘을 다해 일어나 채찍을 쥐고 독사와 살무사 같은 무리를 사원에서 쫓아냈는지 들려주는 <성경> 구절을 통독했습니다. 세계를 위해 악독한 유대인가 맞섰던 주님의 싸움은 정말 격렬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의무는 가만히 앉아 당하는 게 아니라, 진리와 정의를 위한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 발언(1922) - P122

"(...) 그리고 우리가 올바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그 골칫덩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내 민족에게도 의무가 있습니다."
-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 발언(1922): 앞의 인용에 이어서 - P122

"친절의 진화적 바탕은 무엇일까? 8장에서 우리는 진화란 성공적인 유전자가 유전자풀에 점점 많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 P306

"내가 말하는 건 지적 용기이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능성을 심사숙고하고 이렇게 말할 용기. "설마 그럴 리가. 그래도 틀릴 셈 치고 그 가능성을 조사해보자."" - P340

"나는 우리가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성장함으로써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책의 마지막 문장 - P3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화의 오리진 - 아리스토텔레스부터 DNA까지 다윈의 ‘위험한 생각’을 추적하다
존 그리빈.메리 그리빈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화의 오리진

(On the Origin of Evolution)

: 아리스토텔레스부터 DNA까지 다윈의 위험한 생각을 추적하다

존 그리빈·메리 그리빈 지음 | 권루시안 옮김 | [진선출판사]

 


진화론에 이르는 서구 지성사의 한 단면, 진화중인 진화론의 연대기


 

지금부터 162년 전 3, 50세 생일을 막 지난 중년의 남자는 자신이 쓰던 원고의 마지막 페이지를 완성했다. 기대감과 일말의 두려움을 안고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찰스 로버트 다윈, 그는 자신이 막 완성한 종의 기원이 당대에 논란의 중심이 될 것임을 짐작했겠지만, 이후 전 인류의 세계관을 바꾸어버릴 줄 짐작했을까. 오늘날 진화의 메커니즘에 관한 그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학생이라도 누구나 다윈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다. 심지어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에서는 천재과학자라는 타이틀도 심심찮게 사용한다. 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처럼 다윈의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기작이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그 역시 거인의 어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다양한 과학 분야의 소재에 대해 책을 쓴 메리 그리빈·존 그리빈 부부가 진화의 오리진에서 주목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마치 물을 가열할 때, 물속에서 분자들의 운동이 빨라지고, ‘거대한대류가 형성되며, 바닥에서 기포가 생성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끊어 넘치는 것처럼, 진화론도 수많은 이들의 고민과 이의제기, 논쟁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이론이다. 나아가 저자인 그리빈 부부는 진화론의 계보에 속한 많은 이들을 흥미롭게 조명하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이들의 글쓰기가 인상적인 이유는 고대의 자연철학자들부터 현대의 후성유전학 분야까지 각 분야의 선구자들이 내놓은 핵심적인 주장을 짚어 내고,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간결하게 정리해내는 능력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느끼지만, 이런 작업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저자들은 이 진화론이라는, 섭씨 100도의 상태에 도달하기 직전의 물속을 면밀히 조명하고, 나아가 진화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론임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진화의 세 가지 요건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같은 종 내의 경합과 생존 투쟁이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 환경의 변화에 대한 개체들 간의 변이가 일어날 수 있어야 할 것, 마지막으로 이 변이가 세대를 거쳐 상속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 요건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두 명의 사냥꾼을 쫓는 회색곰 이야기. 곰은 두 사람보다 빠르지만, 이 위기에서 생존가능성이 큰 사냥꾼은 두 사람 중에 보다 빠른 사람이다. 이 우스개에는 진화의 첫 번째 요건의 핵심이 담겨 있다. 바로 다윈이 말하는 생존 투쟁은 종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같은 종 내에서의 경쟁이라는 점이다. 나머지 두 요건은 책의 후반에서 보다 깊은 의미가 다루어지고 있다. 현대생물학의 발전으로 DNA의 구조와 역할이 규명된 이후, 후성유전학과 같은 분야의 등장으로 진화의 의미가 보다 확장되고 깊이 이해되었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이러한 진화의 개념과 요건들이 다윈 혼자 마련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개념은 이미 다윈의 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이 고민했던 주제이기도 했다. 좀 더 가깝게는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항해를 떠나기 전인 1831년에 패트릭 매튜(Patrick Matthew)라는 사람이 쓴 책 부록에 이미 실려 있었다. 매튜는 자연법칙에 의한 선택을 언급하면서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를 거의 만들어내었다(149), 라고 그리빈 부부는 지적한다. 게다가 매튜는 현대생물학 지식 없이도, 앞서 언급한 진화의 핵심 요건 세 가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끓는 물(다윈의 진화론’)에 이르기 직전 물속의 상태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렇다고 다윈의 업적이 빛을 잃는 것도 아니다. 다윈은 커다란 업적은 끓기 전의 자신의 시공간이라는 물속에서 진화론이 인류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필요한 임계치를 성공적으로 넘었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들은 우리가 아는 진화론으로 나오기까지 이미 많은 이들의 이야기도 있었다는 점을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배울 수 있었던 부분은, 다윈의 업적이 오랜 시간 인류의 집단지성을 통해 오랜 시간 거듭난 결과라는 점이다. 종의 기원에는 다윈이 20년에 걸쳐 다양한 실험을 수행하고, 책을 읽고 이해한 활동뿐만 아니라, 수많은 연구자들과의 서신 교환 및 토론의 흔적이 담겨 있다. 특히 진화의 오리진에는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주었던 앨프리드 월리스와의 교류가 꽤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다윈의 세계와 월리스의 세계, 이렇게 다양한 각자의 시공간이 진화론의 정립이라는 목표을 향해 실감나게 병치되어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진화론이 천재다윈의 작품이라고 하기보다, 서구지성사가 이루어낸 인류 공동의 지적 결과물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물론 책을 읽으며 진화론에 이르는 과정이 지난한 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이 과정이 무엇보다 기독교 전통이 강했던 유럽, 특히 영국에서 하느님의 섭리와 대립해온 인간 지성의 도전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샤를 보네(Charles Bonnet)진화(evolution)’라는 용어를 자신의 책에 처음 사용한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용어는 펼친다는 의미의 라틴어 에볼루치오넴(enolutionem)'서 나왔다고 한다. 다만 보네가 이 용어에 담고 있던 생각은 하느님이 종을 창조했으며, 이 종은 불변 한다’(51)는 것이었다. 바로 이미 적혀 있는 (하느님의) 두루마리를 펼친다’(54)는 의미였기에,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의 진화관념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므로 진화라는 용어의 개념조차도 진화해온 셈이다. 그 밖에도 진화론자들이 생물학자이자 사제였던 많은 이들과의 토론과 논쟁을 겪는 사례는 이루 말할 수 없고,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또 하나의 사례는 사제이자 역사학 및 정치경제학교수를 지냈던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이다. 맬서스는 자신의 인구론(1798)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인구 증가 기작을 언급했다. 나아가 인구 증가의 억제 요인으로 포식자, 질병, 가용 식량’(151)을 제시한다. 앞에서 언급한 앨프리드 월리스도 자신의 책 나의 인생 My Life에서 맬서스의 인구론 에세이가 중요하게 작용했다’(198)고 기록하고 있다. 다윈의 경우, 그가 비글호 항해를 다녀오고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진화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맬서스의 인구론은 그 다음 해(아마도 1838)에 처음 읽었다고 한다. 이 때는 비글호 항해기를 집필하던 시기이므로, 이 과정에서 인구론을 접하고 진화론에 대한 보다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맬서스의 인구론은 진화론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맬서스 인구론의 기본 논리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인구론의 기본 가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환경 속에서 생존에 유리한 개체는 우월하기에 살아남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논리는 자칫하면 살아남은 자들의 우월성을 강력히 지지하는 증거로 왜곡되어 변용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생학의 역사가 이러한 논리의 극단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논리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는 책으로 나는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대표적인 저서 , , 를 떠올렸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현재 살아남은 세력이 우위를 누리게 된 이유로 맬서스의 논리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곧 현재 우위의 차이는 바로 우연한여러 환경적, 문화적 차이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점이다. 어느 개체나 집단이 살아남은 것이 그 자체로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의 가정이 맬서스의 논리와 미묘하게 차이난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 차이가 도달하는 지점의 결과는 극명하게 나뉠 수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처럼 개인의 굳은 믿음 혹은 신학적 신념의 비판과 공격, 얽히고설킨 입장 및 논리의 차이를 겪어내며 등장한 이론인 셈이다.


이렇게 진화론의 역사만 보더라도, 진화론은 분명히 과거의 전통 위에 서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다른 인간적인 요인으로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정체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후퇴한 사례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진화론 발달사가 그러하다. 이 책에서는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의 사례를 떠올려볼 수 있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퀴비에는 아프리카코끼리와 인도코끼리의 골격을 비교하고, 이를 매머드 화석과도 비교 연구를 한 인물이다. 또 코끼리를 닮은 오하이오 동물에 마스토돈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물이기도 하며, 멸종이 실제 일어난 일임을 최종적으로 입증한 인물이기도 하다(135). 문제는 1810년 무렵 이후 사망할 때까지 당시 유럽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던 생물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종이 멸종한다는 사실을 입증했지만, ‘진화한다는 사실을 반대했다. 그 결과 적어도 진화론을 진지하게 연구하던 라마르크와 조프루아의 연구가 한 순간에 빛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 생물학계는 그대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후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퀴비에의 영향력으로 진화론 연구의 중심은 바다 건너 영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처럼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지성사에 악영향을 미친 사례로, 스탈린 시대의 생물학을 떠올릴 수 있다. 흔히 리센코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례는 스탈린의 요청을 받은 소련 생물학자 리센코가 미국과 유럽에서 논의되는 유전 및 진화이론을 공공연하게 부정했던 사건이다. 일명 반멜델주의 생물학으로 표현되는 리센코의 생물학은 스탈린 치하의 공식 생물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소련 과학계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 사례에 해당한다. 이 이론에 반대하던 과학자들은 직업을 잃는 것은 물론, 목숨을 잃기도 했다. 고대 중국 진나라의 지록위마(指鹿爲馬) 고사가 현대사에 실현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진화론을 세상에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앨프리드 월리스와 다윈이 인간의 위치에 대한 관점에서 크게 달랐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이렇듯 합리성과 객관성으로 대표되는 과학 연구도 결국은 사람의 일이기에 인간적인 요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진화론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후반에는 현대생물학, 유전학의 발달 이후의 진화론에 대해 다룬다. 이제 과학자들의 관심은 다양한 생물 종과 개체들에서 세포 안으로 향하게 되었다. 현미경 및 결정학의 발달 등으로 생물학은 유전 인자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면서 용어만 알고 있던 후성유전학의 간단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내겐 큰 수확이었다. ‘획득형질이 유전 된다는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과학자들의 외면을 받고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결국 후성유전학의 교훈은 특정 환경 속에서 개체가 획득한 특징이 최소한 몇 대에 걸쳐 대물림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수평유전자 전달사례처럼 유전되는 특성이 수직적이지만은 않다는 것, 그러니까 유전자 수준에서 획득형질이 유전될 수 있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인 그리빈 부부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진화의 과학적 이해는 지금도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311)라고 했다. 다윈 이후의 진화론은 현대생물학의 발달이 더해져 생명에 대한 이해를 지금도 더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이 형성되기까지 기독교 사상을 비롯한 사회의 통념과 금기시된 지식에 대한 도전의 역사와 다윈 이후를 다루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무대에 최후의 승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큰 기여를 했지만 사회적 관습에 종속되어 있던 인간의 모습도 발견한다. 월리스와 다윈의 경우는 그나마 훈훈하게 마무리된 보기 드문 사례다. 실제로는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계급의 차이나 성차별적인 관행에 의해 뛰어난 과학자들의 공헌이 가려지고 무시된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한 번 더 노벨상을 수상했을 법한 매클린톡의 사례는 후대의 사람들이 주목하는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할 것이다. 이 책은 진화론이 형성된 역사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인간의 편견과 신념이 어떻게 여기에 개입했는지 그리고 심지어는 어떤 폐해를 남길 수 있는지도 보여주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현대생물학의 발달로 유전체는 항상 역동적인 변화 상태’(299)에 있는 존재라는 것과 생물체가 돌연변이 없이도 변화할 수 있다는 것’(311)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생물체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진화론 역시 우리의 이해가 넓어짐에 따라, 지금도 여전히 진화중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생물이 복잡한 정도에 따라 각기 순서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 ‘존재의 사슬‘ 내지 ‘생명의 사다리‘ 관념을 그리스 도교 사상가에게 전해준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였다." - P17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론자로 (...) 루크레티우스조차 인간은 특별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은 동물은 자기 종족을 복제할 수 있어야 했다는 점도 강조한다. 여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의 요소가 확실히 존재한다." - P21

"린네는 종교적이어서, 새로운 변종의 식물이 때때로 생겨난다는 것을 인식했음에도 새로운 종이 진화하여 생겨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희한한 일은 종은 불변하며 종을 창조한 것은 하느님이라고 믿은 다른 사람이 ‘진화‘라는 용어를 생물학에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린네와 같은 시대 사람인 샤를 보네다." - P51

"모든 온혈동물은 위대한 제1원인으로부터 동물성을 부여받은 단 하나의 생명 가닥으로부터 생겨났으며, (...) 따라서 타고난 원래의 활동 방식에 의해 지속적으로 개량해 나가는 성질과 그렇게 개량된 점을 세대에서 세대로 영원히 물려주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
-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이 자신의 책 <주노미아>에서 밝힌 생각 - P120

"매튜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세 가지 핵심 요건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종의 개체가 늘어나 경합과 ‘생존투쟁‘이 일어날 것, 한 종에 속한 개체들 간에 ‘변이‘가 있을 것, 변이가 ‘상속‘될 수 있을 것이 그 세 가지다." - P150

"체임버스의 <창조 자연사의 흔적>(1844)은 선풍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진화를 상류 인사들의 대화 주제로 만들었다. " - P159

"월리스가 말레이 제도로 떠나기로 결정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밴 와이는 빈 출신의 어느 비범한 여성이 말레이 제도에서 보내온 귀중한 표본을 스티븐스가 취급한 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여성은 이다 라우라 파이퍼(Ida Laura Pfeiffer)로, 1797년 태어나 1842년 남편이 죽은 뒤 여행을 시작했다." - P178

"1854년 9월부터는 종의 변성과 관련하여 내가 적어둔 어마어마한 양의 노트를 정리하고 관찰하고 실험하는 데 내 모든 시간을 바쳤다."
-다윈이 따개비 연구를 끝내고 다시 진화에 관심을 돌려 <종의 기원>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정황 - P182

"(<종의 기원>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현대의 종이 어떤 단일 개체로부터 이어 내려온 공통의 후손이라는 생각이었다." - P218

"세부 논쟁은 여전하지만 (진화론에 관한) 현대종합이론은 1930년대 초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 P254

"1980년대에 이르러 우리 인간이나 참나무 같은 복잡한 생물체의 유전체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변화 상태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 P299

"‘생명의 책‘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해도, 그 책에서 어느 구절을 읽고 행동할지는 세포가 처해 있는 상황, 즉 환경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P3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