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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 시간 - 프루스트의 서재, 그 일년의 기록을 통해 되찾은 시간
박성민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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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시간>

박성민 지음 | 책읽는고양이

 

 

[금호동 서재지기의 창업과 1년 간의 일기]

 

손에 감기는 아담한 한권을 손에 넣었다. 책의 저자는 서점 주인으로서 소규모 독립출판물 중고도서를 판매하는 서점 루스트의 서재주인장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목에서 영감을 얻은 책의 제목과 서점의 상호는 저자를 닮은 서점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기억으로 거의 20 금호동에 고구마라는 중고서점이 있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차례 교과서나 인문과학서적을 구하곤 했던 서점이었는데, 내가 가본 중고서점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중고서점이었다. ‘고구마 보유하던 책이 당시에 20 권이 넘었으니까. 요즘 인기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이 보유하는 수가 평균 3-4 권이라고 ,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 5-6 점에 해당할 만큼 많은 책이 있었다. 당시 고구마 마침 중고서적의 온라인 검색 시스템을 시도했던 곳이었다. 온라인 검색 시스템으로 책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해도, 실제로 책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날씬한 사람만이 지나갈 있었던 책장 사이의 더미들, 복도에 수직으로 쌓인 책을 뒤적뒤적하며 먼지를 털어내고, 마른 기침을 하며 책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런 헌책방이 많이 사라져서 서점의 오래된 책냄새를 맡을 있는 곳이 많이 남아있지않다. 물론 깨끗한 중고서점이 편하고, 검색도 편하지만 원하는 책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이와 비교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런 고전적인 헌책방에서 책을 구하면 종종 누군가 어느 가을 낙엽을 주워 책갈피에 넣어둔 팔았는지, 마른 나뭇잎이 들어있었다. 누군가 책의 여백 곳에 메모해둔 흔적,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면서 말로하기 멋쩍은 마음을 글로 표현해둔 메모를 년이 지난 타인이 발견하고 미소를 짓게 되는 일은 오랜 헌책방이 아니면 이제는 경험해보지 못할 일이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오랜 기억을 더듬어본 이유는 90 , 저자도 역시 헌책방 고구마에서 점원으로 책을 정리하며 일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언젠가 그와 나는 각자 찾는 책을 찾느라 분주히 서로를 지나쳤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분명 고구마라는 헌책방에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고구마 이전을 하면서 서점을 관두고 대형 서점에서도 여전히 책과 관련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간의 준비를 마치고, 오래 살던 금호동에 '프루스트의 서재'라는 책방을 열었다는 것이다. 나는 주인장을 처음 보고 고구마 듣는 순간 오래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던 친구의 안부를 전해 들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2015 1월에 서점 문을 처음 열고 1 간의 일기를 이번 <되찾은:시간> 모아 책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기쓰기를 자신의 안부를 묻는 이라 말한다. 월세를 내고 14,500원의 순이익이 남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다음에 많이 팔아야겠네하며 격려해주던 젊은 날의 서점주인을 떠올리는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온다. 주인장의 글쓰기는 화려하거나 산만하지 않다. 간결한 표현 속에 정제된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 드러내는 것만 같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그의 글과 마음 씀씀이에 호감이 간다. 저자는 아직 개발이 늦은 동네에 조그마한 책방의 문을 , 오히려 책방의 운영을 걱정해주고, 비가 오면 내놓은 책을 비닐로 덮어주거나, 꽃을 놓아두고 가는 이들을 발견한다. 이런 사람들이 지키는 마을은 마음의 여유야 인간미가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경비원한테 막말을 하고, 심지어 자살로 까지 몰아간 강남의 어느 동네를 떠올려보면 아직 이러한 마음씀씀이가 있는 동네가 남아있다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동네에 조그마한 책방을 열고 생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저자의 고민들이 진솔하게 책에 담겨있다. 저자는 2015 서점을 열기 , 그리고 열고 1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자신이 뛰어든 서점의 가치, 존재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왔을 것이다. 자신이 준비한 '프루스트의 서재' 존재이유를 주인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

 

 

나는 헌책과 새책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잊혀지거나 잊혀질 생각과 기록의 가치를 다루는 것이다. 점이 중고책과 독립 출판물이 공존하는 프루스트의서재 존재 이유다.”(63)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견지해나가려는 저자의 노력과 다짐을 느낄 있었다.

 

 

 

<되찾은:시간>에는 서재 주인이 지난 2015 1 침묵 속에서 남겨둔 기록을 보여주고있다. 단편들이긴 하지만, 일관된 저자만의 생각과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을 매개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들의 사연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 공간이 되어가는 같아 다행한 마음이 든다. 나라의 인구 절반 가까이가 대도시에 모여살며 파편화되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우리는 원래 서로 잇닿아 있는존재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일을 이런 공간과 사람들이 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서로의 연대 재확인하는 일이 앞으로 필요한 일이며 과제가 같다. 서울의 서쪽 신촌, 홍대 주변에서 이러한 작은 서점이나 공방이 모여 새로운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면, 금호동과 같은 서울의 동편에 프루스트의서재 같은 작은 서점들과 공방 등이 새로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을 덮으며)

저자는 오늘도 자신의 안부를 묻는 일기를 썻을 것이다. 말주변은 없을지 몰라도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좋아한다는 그의 나직하고 정제된 문장을 떠올려보며, 저자의 서재가 운영되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덮으니 표지에 그의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닮은 정제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책은 사람을 이어준다.

 

 

결국 책이란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사물이므로 사람을 이어주는 책이야 말로 기능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되찾은:시간> 서점 곳을 알게해준 책뿐만이 아니라, 서재지기와 다른 사람들을 이어줄 것이다. 조만간 주인장의 안부를 물으러(사실 그가 내려주는 커피 얻어마시러) ‘프루스트의 서재 다시 들러볼 예정이다.

 

 

 

 

 

 

 

"나는 헌책과 새책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잊혀지거나 잊혀질 생각과 기록의 가치를 다루는 것이다. 이 점이 중고책과 독립 출판물이 공존하는 ‘프루스트의서재’의 존재 이유다."(63면)

"책은 사람을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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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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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지음/송태욱 옮김

여기서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인용되어있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일부를 연결시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보려고 합니다.

 

(301-302)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재인용부분 )

 소심한 모습으로, 수줍게, 어색하게, 도약에 실패한 호랑이처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몰래 옆길로 새는 것을 나는 자주 보았다. 그대들은 주사위를 잘못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도박자들이여! 그 실패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대들은 도박자, 그리고 조소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늘 하나의 거대한 도박과 조소의 탁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대들이 비록 큰일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다! 가자!

높은 종족에 속할수록, 완성하는 일은 드물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충분히 완성되지 않은게 아닐까?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그대들의 완성이 불충분하거나 반쯤밖에 완성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반쯤 부서져버린 사람들이여!

그대들 내부에서 밀치락달치락하며 서로 밀치지 않는가-인간의 ‘미래’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그 모든 것이 그대들 항아리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부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

(442) 보다 높은 인간에 대하여 14-15 (사사키 아타루가 인용한 같은 부분)

[14]뛰어오르는 데 실패한 호랑이가 수줍고 부끄러워 어찌할 바 모르는 것처럼,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나는 그대들이 슬그머니 옆으로 새려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대들의 주사위가 잘못 던져진 것이다.

하지만 그대들 주사위 놀이를 하는 자들이여,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놀이하고 조롱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언제나 놀이와 조롱을 위한 커다란 탁자에 앉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대들이 큰일을 그르쳤다면 그렇다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작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작이라면 인류 자신도 실패작이란 말인가? 하지만 인류가 실패작이라면, ! 어서!

[15] 어떤 사물의 속성이 고귀할수록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이여, 그대들은 모두 실패한 자들이 아닌가?

용기를 내라. 그게 어쨌단 말인가! 아직 얼마나 많은 일이 가능한가! 사람들이 웃지 않을 수 없도록 그대 자신을 비웃는 법을 배워라!

그대들이 실패했고 아직 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그게 뭐가 이상한가. 그대들 반쯤 부서진 자들이여! 그대들 속에서 서로 밀치며 부딪치지 않는가-인간의 미래!

인간에게서 가장 멀고, 가장 깊고, 별처럼 가장 높은 것, 인간의 어마어마한 힘. 이러한 모든 것이 그대들의 항아리 속에서 서로 부딪치며 거품을 내고 있지 않은가?

많은 항아리가 부서진다 해도 그게 뭐가 이상한가! 사람들이 웃지 않을 수 없도록 그대 자신을 비웃는 법을 배워라!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아직 얼마나 많은 일이 가능한가!

그런데 참으로 이미 얼마나 많은 일이 성공했는가! 이 땅에는 조그맣고 아름답고 완전한 사물들이, 제대로 된 것이 얼마나 풍부한가!

그대들 주위에 조그맣고 아름답고 완전한 사물들을 놓아두라.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것들의 금쪽같은 성숙함이 마음을 치유한다. 완전한 것은 희망을 갖도록 가르친다.

: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다 읽고, 아타루의 문체에대해 드는 인상은 솔직히 장석주 시인이 압도적인 문체라고 표현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요. 아무래도 제 나이보다도 더 많은 시간동안 책을 읽고 글을 써오신 장석주 시인이 아타루의 참신한 문체를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파악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제가 받은 문체에대한 인상은 작가의 문체가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하다는 점입니다. 아타루 자신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나가며 짜증난다., 수치스럽다, 혐오스럽다, 치사하다 등의 표현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있고 객관적인 것처럼 말하는 작가나 비평가들의 태도에 상당한 거부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는 마치 바로 앞에서 말로 강연하듯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다소 머리가 지끈거릴만한 역사나 철학적 소재도 꽤나 빨리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대체로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문제에 힘입은바 크다고 봅니다.  이렇듯 말하듯이 글을 쓰는 방식 혹은 이러한 문체는 앞에서 얘기한 솔직한 표현과 어우러지면서 참신한 문체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인용한 부분은 아타루가 재인용한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 한 부분입니다. 아타루의 책을 번역한 번역가는 일본어로 번역된 니체의 책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라, 독일어 원전을 번역한 다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황성광 옮김)중 동일한 부분을 찾아 비교해보았습니다. 두 인용부분을 비교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들이 있긴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에 실패했더라도 나 자신이 실패자는 아니며, 아직도 가능한 일이 많이 남아있다라고 외치는 내용이겠습니다. 비가오고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 밤에 저의 머리를 도끼로 깨고, 상쾌하게 해준 한 마디였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웃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비웃는 법을 배워라라는 부분 또한 우리가 유머라고 하는 행위의 본질이라 생각해봅니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조소의 대상이 되는 일은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가능한 일일테니까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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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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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리뷰라기보다는 '책읽기'와 관련하여 한 부분을 발췌하여 저의 생각을 연장해봅니다.

 

(41-42) 「적어도 반복해서 읽는다」

 후루이 요시키치는 이어서 또 한마디 합니다. 자신으로서는 이제 두 손 들고 말 것 같은 것을 말하고 있어, 요컨대 읽어도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어쩐지 싫은 느낌이 드는 것이야 말로 독서의 묘미, 읽고 감명을 받아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 읽으면 잊어버리고, 그래서 반복해서 읽는 거라고 말이지요. 이런 것을 가볍게 말해버리는 사람이 동시대에 살고 있으며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늘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어도 전혀 모르겠다,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지루해서 왠지 싫은 기분이 든다고 하는 것, 다들 뭔가 자신의 능력이 뒤떨어져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화를 내거나 책을 내팽개치거나 하는 것입니다. 번역이 나빠라고 한다거나 좀더 쉽게 쓰란 말이야라며 다른 사람 탓을 하거나 좀 더 공부해야겠는걸, 좀 더 쉬운 책은 없을까라든가, 초급이 있어야 중급이 있고 중급이 있어야 상급이 있다는 듯한 지()의 서열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런 일종의 열등감이나 분노를 이용하여 엉터리 같은 입문서나 비즈니스 책이나 팔아치우며 독자를 착취하는 패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 첫 책 <야전과 영원>을 내고 일본에서 일약 유명해진 사사키 아타루의 두 번째 책입니다. 일본의 니체라고 불릴정도로 일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장석주 시인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아타루가 보여주는 문체에 대해 문체의 압도적인 힘에 놀랐다.라고 평하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장석주 시인이 말한 '압도적인 힘의 문체'를 느끼기보다는 거침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해버리는 작가라고 정리해보았습니다.

 오늘 인용한 부분은 책읽기에서 많은 독자들이 부딪혀본 문제일 겁니다. 어려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쉬운책을 읽어야하나하는 고민들. 저자는 거리낌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읽어가라, 그리고 적어도 반복해서 읽으라'라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마치 '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질문에 '꾸준하고 열심히 하라.'라고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달리 다른 방도가 있을까요? 정면승부를 하라는 말이아닐까요?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제목은 독일의 시인 파울 첼란의 시의 한 구절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제목만 봐서는 '뭐야 이거'라는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책에대해 짐작하기는 힘듭니다. 이 책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책읽기와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 즉 읽고, 쓰고 생각하는 행위를 담은 모든 활동으로서의 문학의 혁명성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문체란 어떤 것일까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아직 압도적인 힘이 느껴진다거나 하지는 못한 걸 보니 아직 제가 이를 파악하기에는 많이 모자란 것 같습니다. 다만 기존의 인습적, 관습적 사고와 어렴풋이 받아들이는 정보와 그 관행에 관해 도적적이고 독창적인 견해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서 통독을 하고 재독을 하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위에 발췌한 것처럼 적어도 여러번 반복해 읽어나가야겠습니다. 

  여기에 인용한 부분은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서운 것, 그만큼 진지하고 심각한 일이라는 것이죠. 읽어서 다 이해가 되는 책이면 책으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가 가미된 도전적인 책을 쓰는 것이 책 쓰는 사람, 작가로서의 의식에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한 번 읽어서 나에게 다 이해되는 책은 나를 미쳐버리게하고 나를 바꿀버릴만한 혁명적인 책은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아타루는 자신의 독서량에 만족하는 행위의 무의미성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책 읽는 행위에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다는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夜戰)과 영원(永遠)>은 자음과모음에서 10월에 출간 예정이라는데 벌써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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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 속도에서 깊이로 이끄는 슬로 리딩의 힘
이토 우지다카 지음, 이수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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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하시모토 선생의 수업은 다면적으로 보는 눈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입시 공부는 기억력 하나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주입식 학습만으로는 꾸려갈 수 없다. 관찰력, 판단력, 추리력, 종합력이 한데 어우러져야 효과를 발휘한다. 그 토대가 되는 것이 국어 실력이다. 국어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른 교과를 이해하는 힘도 크게 달라진다. 수학이든 물리든 발을 깊이 들여놓고 주제의 핵심에 다가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힘이 바로 학력의 토대이며 국어 실력이다. 국어 실력은 살아가는 힘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면 무엇보다 국어 과목이 중요하다.

(122)

 단어 속에는 넓은 공간이 있다. 단어 하나를 철저하게 이해하면 역사, 문화, 사회, 전통 등 다방면에서 지식의 폭이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다. 속독으로는 습득할 수 없는 그 폭을 여유 있게 즐기는 것이 좋다. 에티 선생의 수업은 단어가 지닌 무한한 공간을 즐기면서 교재에 얽매이지 않고 호기심의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한다. 은수저 노트가 학생들에게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다. 학생들은 정답이 있는 교재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트에 스스로 찾아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자유롭게 써 넣고, 그것을 다 같이 발표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생각을 넓고 깊게 만들었다.

 

 

: 이 책은 일본의 한 국어 선생이 한 권의 소설책을 중학교 국어과정 3년동안 가르치고 변화한 학생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젊은 국어 선생 하시모토(에티 선생)는 대학 졸업 후 시골의 한 사립학교에 부임하게 됩니다. 얽매이지 않은 수업 방식을 보장받는 상황에서 에티 선생은 자신의 소신대로 학생들에게 진득한 국어 수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에티 선생의 국어 수업과 학교가 유명해진 것은 동경대 진학이 전무하던 시골 학교에서 선생이 가르치기 시작한 후, 다수의 학생이 동경대를 진학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것이 에티 선생의 의도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 결과는 다분히 변화를 경험한 학생들에 나타난 수많은 결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 책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모든 학생이 국어 수업을 즐기는 것에서 나아가 타인을 배려하고 경청할 줄 아는 성숙한 성인으로 사회에 진출했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제자들의 이야기들이 있었기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업 방식도 84년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국어 실력이 모든 학습의 토대이며, 살아가는 힘이라는 표현에 저는 깊이 공감을 했습니다. 올해 초에 들었던 장석주 작가의 강연에서, 작가는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좌뇌만 상당히 발달한 사람이다,고 말하시더군요. 우리의 교육은 정보와 지식을 기억하고 수리력, 추리력만 발달한 인간으로 키워낸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뇌를 잘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잘 놀아라이런 말을 하셨었고요. 잘 놀 수 있게 준비된 수업이 에티 선생의 국어 수업이라고 봅니다. 소설 <은수저>에서 주인공이 막대사탕을 먹는 대목에서 에티 선생은 준비해온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막대사탕을 풀어놓고, 학생들이 소설의 저자가 경험하고 느꼈을 법한 감정들을 학생들도 스스로 체험하게 합니다. 주인공이 연을 날리는 대목에서는 미술선생과 상담하여, 직접 연을 만들어 국어 시간에 밖에 나가서 연을 날리고 놉니다.

 책에 나오는 에티 선생의 국어 시간뿐만 아니라 선생의 삶 자체도 감동적이고 존경스럽습니다. 에티 선생이 백수(百壽)를 맞은 2010, 이 책의 마지막 교열 원고를 들고 찾아간 저자가 이제 선생님은 수업의 진짜 목적을 이루셨으니 100점 만점입니다,고 하니 대꾸하는 에티 선생의 말이 걸작입니다.

 지금 나는 <은수저>의 새로운 커리큘럼 작성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요즘 학생에게 맞는 <은수저> 연구 노트입니다. 이번 노트는 이전 것보다 조사할 것써 넣을 것의 분량을 늘렸습니다. 작품과의 시간이 더 벌어진 만큼 좀더 재미있게 옆길로 새는 항목도 늘렸고요. 그러니까 이것이 완성되지 않으면 만점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 밖에도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환갑을 두 번 맞이할 때까지, 120세는 살아야겠네요.

 이 책을 읽고나면 교육분야에서 일하시는 분이나, 학부모에게 권해주고 토론을 해보고 싶네요. 법적으로 금지되어있는 선행학습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이 읽고, 어른들의 욕심에 앞서서 과연 아이들의 행복이 뭔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토론을 통해서, 에티 선생이 자율적이고 소신있게 수업을 해나갈 수 있었던 당시와는 사뭇 다른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더불어 아이를 지도하는 데 여러 가지 방향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는 아이가 없지만 무럭무럭 크고 있는 조카네에 이 책을 한 권 사서 주고 왔습니다. 조카가 학교를 들어가서도 행복하게 커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학창 시절에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고 앞으로 다가올 지난한 인생에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하시모토 선생의 수업은 ‘다면적으로 보는 눈’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입시 공부는 기억력 하나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주입식 학습만으로는 꾸려갈 수 없다. 관찰력, 판단력, 추리력, 종합력이 한데 어우러져야 효과를 발휘한다. 그 토대가 되는 것이 국어 실력이다. 국어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른 교과를 이해하는 힘도 크게 달라진다. 수학이든 물리든 발을 깊이 들여놓고 주제의 핵심에 다가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힘이 바로 ‘학력의 토대’이며 국어 실력이다. 국어 실력은 ‘살아가는 힘’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면 무엇보다 국어 과목이 중요하다.

단어 속에는 넓은 공간이 있다. 단어 하나를 철저하게 이해하면 역사, 문화, 사회, 전통 등 다방면에서 지식의 폭이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다. 속독으로는 습득할 수 없는 그 폭을 여유 있게 즐기는 것이 좋다. 에티 선생의 수업은 단어가 지닌 무한한 공간을 즐기면서 교재에 얽매이지 않고 호기심의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한다. ‘은수저 노트’가 학생들에게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다. 학생들은 정답이 있는 교재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트에 스스로 찾아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자유롭게 써 넣고, 그것을 다 같이 발표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생각을 넓고 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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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 장석주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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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과 영화제작자 동성 커플의 첫 결혼소송에관한 뉴스를 봤다. 두 손을 맞잡고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두 사람. 얼마전에는 수많은 하객을 불러 공개적인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렸다고 한다. 동성애자들의 정치적인 힘이 동성결혼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에 충분할까에대한 나의 우려와는 반대로 이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당당하였다. 굳이 외국과 비교하지 않아도 인권에대한 배려가 척박한 우리나라에서 이 결혼식 장면은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장석주 시인의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는 읽기시작하자마자 첫 페이지부터 나의 관심을 끈다. 사진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사진에관해 여러 글을 썼던 발터 벤야민이나 롤랑 바르트에 관한 글을 보고 반가웠기 때문이다. 특히 사진이란 무엇인가에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은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였다. 1977 10월에 돌아가신 롤랑 바르트의 어머니를 계기로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한장을 들여다보고 애도하는 과정에서 쓴 책이 <카메라 루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쓰기까지 어머니의 애도하고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하며 적은 메모가  <애도일기>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동성커플의 결혼소송 소식을 보고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롤랑 바르트를 떠올렸다. 롤랑 바르트 역시 동성연애자였기 때문이다. 호모, 호모섹슈얼, 게이, 레즈비언등으로 불리는 이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궁금증을 학창시절에 품곤했다. 플라톤의 <향연>에보면 그가 살았던 시대에 벌어진 향연에 노예와 여자는 참석할 수 없고, 젊은 미소년들만이 참석하여 시중을 들곤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울러 동성애자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화에 따르면 원래 인간은 머리 둘, 팔 넷, 다리 넷인 두 사람이 붙어있는 형태로서, 남자 둘, 여자 둘, 남녀 둘 이렇게 세 부류의 인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사이가 좋은 것을 신들이 질투를 하고 급기야는 이 둘을 번개로 갈라놓아 버렸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결국 사람은 이후 이 세 부류의 인간들로부터 분리가 되어 살아가야했고, 따라서 남자는 여자 혹은 다른 남자를, 여자는 남자 혹은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조금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이 살던 시대에 동성애자들이 상당히 많은 비율로 존재하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남자 둘, 여자 둘, 혹은 남녀 둘이 붙어있는 세 형태의 인간이 신의 질투로 분리가 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자들의 비율이 애초부터 상당히 많은 비율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애도일기>를 보면 짧은 메모형식의 일기들이 근 2년간 지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사진 한장을 시작으로 사진을 바라보고 때론 분석하면서 현대 사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론들을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하게된다. <애도일기> <카메라 루시다>에는 전혀 언급되어있지는 않으나 롤랑 바르트의 성적 정체성에관해서는 다른 문헌들을 통해서 조금은 알 수 있다. 내가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은, 아무리 차이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프랑스(특히 성해방, 인권에대한 담론이 거세게 촉발되던 68혁명 이후의)라고 하더라도 1970년대에 한 유명 지식인의 성정체성에 관해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란 점이다.

동성연애자들이 성장하면서 성정체성을 깨닫게되고 타인의 폭력적인 시선과 공격적인 언행, 경멸의 태도로부터 느꼈을 숟한 모멸감을 나는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롤랑 바르트역시 당대의 지성인이기는 하지만 시대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공적인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보다 만나게 된 책이 김찬호의 <모멸감>이란 책이다. 이 책은 굴욕과 존엄의 감정 사회학이란 부제가 명시하듯,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마음 풍경을 모멸감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보고 있다. 저자는 모멸감을 모욕경멸이 포함된 것으로 풀이한다. 모욕은 공격적인 언행을 주로 뜻하고, 경멸은 타인을 낯추어보는 태도를 지시한다. 다시말해 모멸감은 타인의 말과 행동과 그 근저를 이루를 태도로부터 우리가 받는 감정을 의미한다.

신라시대 이후 외국인의 왕래가 잦고, 수많은 외국인이 귀화한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었던 역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단일민족으로의 자부심을 교육받아왔다. 특히 외국인 거주자수가 150만명을 훌쩍 넘고 외국인과의 결혼이 전체 결혼의 10%가 넘는다는 통계까지 나오는 이 시점에서 차이와 다름은 우리가 시시각각 만나게되는 주제가 되었다.

다문화 가정이든 동성애자들이든 기존의 주류와는 다른 이들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한국 사회에서 느꼈을 모멸감, 다시말해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지 못하고 생명이 억눌리는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의 의도와는 달리 무심코 한 언행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모멸감을 주었을지를 반성해보았다. 책을 읽으며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했는데, 이는 저자의 말에 단순히 공감을해서가 아니라 학창시절 내가 받았던 모욕적인 말과, 나의 오랜 컴플렉스등을 다시 기억속에서 불러내어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인간의 감정이란 것에 대해 어느 인디언 부족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인디언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그가 느끼는 바를 말했다.

얘야, 마치 내 가슴속에서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는 것 같구나. 한 마리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고, 화가 나 있고, 폭력적인 놈이고, 다른 한 마리는 사랑과 동정의 마음을 갖고 있단다.

손자가 물었다, 어떤 늑대가 할아버지 가슴속에서 이기게 될까요?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지.”’

감정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서 독립적으로 자라나는 생명체 같은 존재로서 어느 감정에 더 많이 머무르고 먹이를 주는가에따라 그 감정에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감정은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우리가 느끼는 모멸감이란 감정을 극복하기위해 사회의 구조적, 문화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저자가 제시한 개인으로서의 해결책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본다. 저자는 개인의 내면적인 힘을 길러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타인의로부터 비롯되는 폭력적인 시선이나 태도, 언행은 우리가 강한 자존감으로 내면의 힘을 길러두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를 나의 경계만들기라고 언젠가부터 부르고 있다. 경계는 나 자신의 자존을 지키기위한 최소한의 ()을 말한다. 압축성장을 통해 개인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낮추고 희생해온 한국인들은 서양사람보다 이 경계선의 존재가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 나의 관찰이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나의 역할과 위치에서 지켜지는 선을 누군가 침범했을 때, 나는 반응하게된다. 나를 지키기위해 때로는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나의 불편한 감정을 꺼내어 얘기하고, 때론 분노하게된다. 상대방도 나를 존중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동성 커플의 결혼 소송에 관한 뉴스나 성정체성으로 고통받았을 롤랑 바르트, 그리고 모멸감이란 키워드로 본 한국 사회와 나의 경험을통해, 나는 인간으로서의 숙명을 실감한다. 부대끼는 사회로부터 홀로 살수는 없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하는 한 인간으로서 결국 타인에대한 배려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주는 일이다.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이유를 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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