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다. 사람들이 뻔한 거짓말을 하고못 본 척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느꼈을 슬픔도 말이다. 페스팅거는 너무나 명백한 실패 이후 변절한 대중들이 보여준 극적인 변화가 너무나 직관적이지 못한 행위로 여겨졌고, 그것이 그의 이론을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 그는 곧 자신의 인지 부조화 이론을 시험하기 위한 일련의 실험을 설계했다. 그가 교단에 잠입하여 역사책을읽으며 발견한 것은 종교 집단이 일종의 필사적인 방어 기제로 변절하기 시작할 때는 그들의 믿음이 확실하지 않을 때와 정확히 일치했다. 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믿음과 실질적인 증거 사이의 차이는 슬레이트를 긁는 날카로운 소리처럼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위 안은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우주선 위에 서명을 할 때에만 찾아올수 있었다. 우리 모두 우주선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면 우리가 당연히 옳은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 P154

 그의 인지 부조화 이론은 미국 심리학회를 폭풍처럼 강타했다.
1950년대에 페스팅거 교수 밑에서 대학원 시절을 보낸 엘리엇 애론슨Elliot Aronson은 ‘폭풍처럼‘이라는 표현을 써서 설명했다.
 "정말 대단했어요. 근사했죠. 인지 부조화 이론은 불가사의한 인간의 행동을 너무도 멋지게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인지 부조화 이론은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중국인들이[미국인 포로들을 어떻게 그토록 효과적으로 공산주의로 전향시켰.
는가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미국인- P155

포로에게 반미적인 글을 쓰도록 하기 위해 가혹한 고문이나 화려한 뇌물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들이 준 것은 쌀 조금이나 사탕 몇 개가 전부였다. 글을 쓰고 상을 받은 수많은 미군들은 나중에 공산주의로 전향을 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세뇌라는 것은 그럴싸한 아부를 당하거나 화려한 물건으로 여러 차례 유혹을 당해야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생각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지 부조화 이론에서는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에 관여한 보상으로 사소한 것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의 믿음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한다. 그것은 일종의 왜곡된 감각을 갖게 하는 것으로, 가령 우리가 사탕 하나나 담배 한 개비, 쌀 조금 때문에 자신을 팔았다면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좀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게 된다. 스스로 그런 행동을 하는 멍청이로 느끼지않기 위해서 말이다. 자신이 꾸며낸 거짓말을 돌이킬 수 없다면 아예 자신의 믿음을 바꾸어 더 이상 부조화를 겪지 않아도 되고, 바보얼간이가 된 것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인지 부조화를 직관적으로 이해한 심리의 대가들이었다. 그들은 손바닥에 보잘것없는 것을 쥐고서, 그 별 볼일 없는 힘으로 어른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 그것을 제멋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었다.
- P156

"실제로 인간의 행동은 보상 이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단히 놀라운 정신적 활동을 한다."
- P157

그곳에서 그는 혹독한 것을배웠다. 그는 보호 시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곳인가를 배웠다. 정신 의학이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음을 배웠다. 그는 이 나라의 얼마나 많은 병원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오진을 받고, 약물을 투여받으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수용되는지 궁금했다. 정신병이라는 딱지가 정신병을 낳은 것일까? 병 때문에 진단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진 진단이 두뇌에 각인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두뇌가 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두뇌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우리 몸에 붙어 있는 딱지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리라. 때는 겨울을 향해 가고 있었고, 펑펑 내린눈이 집과 자동차와 빌딩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수북이 쌓였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해본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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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삶의 방향과 모양은 사람마다 다른데, 
제가 나아갈 방향을 다른 사람에게 묻고, 
비어 있는 부분을 내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으로 채우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와 거리를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개체공간(Personal Spac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모든 개체는 자신의 주변에 일정한 공간을 필요로 하고, 다른 개체가 그 안에 들어오면 긴장과 위협을 느낀다고 합니다. 가족과는 20센티미터, 친구와는 46센티미터, 회사 동료와는1.2미터 정도의 거리가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이죠.

김종삼 시인의 「어부」입니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후회라는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돼서는 안 됩니다. 후회하는 대신 내가 저지른 잘못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반성함으로써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하는 거죠. 저 역시 잘못을 후회하고 반성할 때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했던 말을격언처럼 되새기곤 합니다.

인생은 뒤돌아볼 때 비로소 이해되지만, 우리는 앞을 향해 살아야만 하는 존재다.

세상이란 건요, 행복의 모습은 대개 거기서 거기로 비슷하지만 불행의 모습은 제각각 다르답니다. 저마다 자기만의 특별한고통을 짊어지고 있어요.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다 똑같아요. 그러니깐 당신만 무슨 특별한 사람은 아니라고요. 만약 당신만 특별히 고통스럽다고 한다면 그건 그렇게 믿는 당신 스스로가 특별히 불행한 거예요.

 아사다 지로의 소설 『파리로 가다」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처음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된 건 영화를 통해서인데요. 바로 일본 영화 <철도원>과 우리나라 영화 <파이란>입니다. 두 작품 모두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도로 행과 희망이 교차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잘 그려냈습니다.
저는 무척 다양한 색깔을 지닌 그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잔잔한 감동과 울림을 주는 동시에, 인간의 어두운 면이나 현실도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파리로 가다로 돌아가면, 앞선 문장은 레프 톨스 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에 영향을 받은 것같습니다. 바로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 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문장이지요. 아무튼 아사다 지로나 톨스토이의 말처럼 불행도 고통도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화를 내게 되는 상황도 한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박연준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큰 병이 아니더라도 자잘하게 아픈 곳이 생기면 그 자리에 몸과 마음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 아프다는 것은 이겨내야 할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겪다,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에세이 <소란>의 한 구절입니다. 시인은 아픔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미움이나 분노 같은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겨내거나 없애려고 하면 도리어 부작용을 겪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병이 생길 수도 있고,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도 있지요. 괜찮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 날 불쑥 감정이 차올라 마음을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무조건 억누를 필요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화가 날 땐 화를 내고, 대신 그 이후에 마음을 돌보면 됩니다. 
그 모든 게 다 잘 겪어내고 있는 과정입니다.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한 문장을 만나고서야 마침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인정하면 집착이 없어진다. 그 사람이 내 사람이 될 수 없고,
그 물건이 내 물건이 될 수 없고, 그 돈이 내 돈이 될 수 없고, 그의 재능이 나의 재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인정하고 나니 한편으론 여유가 생겼지만 한편으론 미친 듯이 슬퍼졌다.

 공지영 작가 역시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에서 이런 집착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지요.

버리면 얻는다. 그러나 버리면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해도 버리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니다. 버리고 나서 오는것이 아무것도 없을까봐, 그 미지의 공허가 무서워서 우리는 하찮은 오늘에 집착하기도 한다.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참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뿐이지
어느 날 큰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백창우 시인의 <소주 한잔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닐세>라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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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는 비로소 실험을 멈추었다. 그것은 파블로프의 침 흘리는 개만큼 엄청난 발견이었다. 비로소 그는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 석은 행동의 대부분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보상이 지속적으로 생기지 않는데도 어리석은 행동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인 지, 우리의 가장 친한 여자 친구가 기분이 내킬 때만 전화를 거는못된 애인의 전화를 애달프게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평소에 멀쩡한 남자가 연기 자욱한 카지노에만 가면 돈이 한 푼도 남지않을 때까지 도박을 하다가 끔찍한 지경에 이르는지 말이다. 왜 여자들은 지나친 사랑을 하고, 남자들은 위험할 정도까지 주식 투자를 하는가? 그것은 소위 ‘간헐적 강화‘라는 것으로, 스키너는 그 메커니즘과 우연성이 가진 강박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실로 강박이지니는 힘은 엄청났다. 그것은 최초의 인간이 에덴동산에 들어간이후 말없이 쫓아다니며 우리를 압도했다. 그 힘은 대단했다.

"아버지께서 한 가지 실수를 하셨다면 사용하신 어휘가 문제였어요. 사람들은 ‘통제‘ 라는 단어를 들으면 파시스트를 생각하죠. 만일아버지께서 인간이 환경에 의해 터득된다‘거나 고무된다‘고 말씀하셨다면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실제로 아버지는 평화주의자셨어요. 그리고 아이들을 보호하셨죠. 아버지는 ‘어떠한‘ 처벌도 믿지 않으셨습니다. 처벌을 해도 효과가 없다는 것을 동물을 통해 먼저 아셨죠. 캘리포니아 주에서 체벌 금지 법안이 통과된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아무도요."

하지만 그가 사르트르나 베케트와 달랐던 점은 부조리를 측정했다는 점이다.
"밀그램 교수는 부조리를 병 속에 담아 저장했지요."
스탠퍼드 대학의 리 로스Lee Ross 심리학 교수의 말이다.
"그는 실험실의 부조리한 행동을 병 속에 담아 우리에게 보여주었죠. 그것이 오늘날의 밀그램 교수를 만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이야기가 흥미로워진다. 
이 실험은 그 어떤 실험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리석음 그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열을 무너뜨리느니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존재라는 것, 
생존보다 사회적 예절을 더 중시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너무나 상반된다. 
매너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정보다 강하고, 두려움보다 원초적이다. 
달리와 라타네가 피실험자 단 한 명을 연기 나는 방 안에 두고 
실험을 했을때는 모두 다 그것을 비상 사태로 파악하고 그 사실을 ‘당장‘ 보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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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가족을 지켜봄으로써 젊은 시절 내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하던 내 시각에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따뜻한 균형이었고, 행운에속하는 경험임에 틀림없었다.

결국 인생은 인내심과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의 문제임을 이 버지는 말없이 가르쳐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가르 침이 녹아 있는 ‘끈 풀기 신공‘ 덕분인지 선배네 형제들은 여간해선 제 편에서 먼저 사람을 내치거나 일을 중간에서 그만두는법이 없었다. 쉬운 길로 가고자 요령을 피워 일을 그르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일도 보지 못했다.

‘말라 가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의 붕어는 침으로 서로의 몸을 적신다‘라고 말한 이가 장자였던가. 내 비늘이 잠깐이나마 빛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엄마의 몸에서 나온 물기 덕분일 것이다. 나는 누구의 꿈을 위해 물기를 더하고 있을까. 엄마가 보낸 택배 상자들을 풀 때마다 그 여름밤 엄마가 흘린 눈물 이 생각나곤 한다. 그러면 그때 미처 못 한 말이 가슴에 고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이의 번호를 누르면 주인이 없다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그 사실이 암시하는 바를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다른 번호로 연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제나 힘든 일이 생기면 진실이나 사실을 감당하기 힘들어 허둥대는 나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 같았다.

 우리에겐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자체는 탓할 일도, 억지로 가라앉힐 일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러운 욕망일 뿐이다. 다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때 ‘아,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고 알아채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알아채는 순간, 욕망의 온도는 견딜 만하게 내려간다.

"사랑받는 것을 내 삶의 중심으로 두면 힘들어집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사랑받으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연인 사이에 흔히 ‘넌 내 거야‘ 하고 말하죠. 그러면 그 사람이 내 것이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 것이 됩니다. 내 행복이 그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죠. 그 사람의 한마디, 몸짓 하나에 내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기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너도 날 사랑해야 돼. 이건 거래고 흥정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받으려 하면 괴로움이 생겨날 뿐입니다. 반면 사랑하려 하면 충만이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바로 서기 때문이죠."

그날 나는 처음 만난 두 사람에게 질문을 받았다. "그동안 어 떤 글을 써 왔죠?"와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라는 질문을, 비슷한 단어들의 조합인데도 두 질문이 너무나 다른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쪽이 과거와 성취 중심 이라면 다른 한쪽은 미래와 기대가 담겨 있었다. 사무실에서 퇴 짜를 맞고 나와 바로 헤어지지 않고 나를 카페로 데려가 진심을 담아 물어 주었던 일은, 과연 인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작 업으로 유명한 최광호 선생님다운 배려였다.

그때는 불타는 세상의 화염에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야말로 그 불꽃을 키우는 기름의 일부였음을 이제는 안다. 돌이켜 보니 당신이 옳았고, 내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는 말도 아니다. 애초부터 옳고 그름은 없었다. 그저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감정에 따라 혼자만의 법 정에서 유죄, 무죄를 따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나는 편안해졌다, 고 감히 말하진 못한다. 다 만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부분에 약하고 어떤 부분 에 강한지, 무엇에 가슴 뛰고 무엇에 좌절하는지 조금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해하게 됐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옳아서, 나만 억울한 것 같아서소화장애를 겪던 시절에 아는 분이 적어 준 네 글자가 있다.
지불책우智不責愚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
이 네 글자에는 들끓는 감정을 한 단계 아래로 끌어내려 급
‘냉장시키는 탁월한 기운이 담겨 있다. 한동안은 이 기운에 의지해 내 안의 불길을 잠재워 갔다.

그 뒤 세월이 흘렀고, 내게도 거자씨만한 지혜의 싹이 돋아났다. 이제는 안다. 진정 지혜로 이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니 어리석은 사람이니 굳이 나누지 않다는 것을, 그저 괴로운 사람, 괴롭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임을 지난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면서 남긴 말씀을 기억한다.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세요."
 이 말에 담긴 깊고 고요한 에너지를 음미할 때마다 들끓던마음이 잔잔해진다. 내 안에 평화롭고 따사로운 기운이 꽉 들어찬다. 평생을 신께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교황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행복하다. 당신도 행복하시라.
전율이 인다.
그래, 당신도 그때 힘들었겠구나, 당신도 뭔가를 쟁취해 행복해지고 싶었구나. 같은 이유로 나도 힘들었구나. 그때의 당신 마음이 당신의 전부는 아니었건만, 내 마음대로 편집해 반복 상영했구나.
 마음을 열자 바람을 탓하지 않는 나무처럼, 태양을 원망하않는 사막처럼 나는 둥글어진다. 둥글게 나를 껴안고, 당신을 안는다.

‘어쩔 수 없지. 너도 그랬잖아. 그들도 그저 어쩔 줄 몰라서 그랬을 거야.‘

그 겨울, 나는 잊어야 할 것들이 많았고
흘려보내야 할 것들도 많았다.
너무 추웠으므로
잊어야 하고 흘려보내야 할 것들이 어디에도 스며들지 못한 채
나와 함께 겨울을 횡단했다.

하지만 내게 부족한 것을 알고,
 내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도 능력이고, 재능이 아닐까.
사람들이 쉽게 행복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의
허구를 간파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대단한 능력자가 어디 있을까.

엄마도 그런 시절을 통과해 왔기에, 사는 일의 고달픔에짓눌려 봤기에 건네는 애틋한 위로의 말이란 걸.

엄마가 말했다.
"해가 지면 그날 하루는 무사히 보낸 거다. 엄마, 아버지도 시는 게 무섭던 때가 있었단다. 그래도 서산으로 해만 꼴딱 넘어가면 안심이 되더라. 아,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고. 그러니 해넘어갈 때까지만 잘 버텨라. 그러면 다 괜찮다."
그 밤에 엄마가 속으로만 삭인 뒷말이 있었다.
"그러다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게 몸서리쳐지게 무서웠단다.
그 말까지 더해야 진실이 완성되지만 엄마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새벽이 되면 절로 느낄 것이므로.
당장 그 순간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이란걸 알기에. 나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 뒷말까지 온전하게 전해 듣고 그 말에 담긴 서슬 푸른 삶의 비의에 혼자 몸을 떨었다.
 

"엄마아! 이 넓은 콩밭을 언제 다 맨대요?"
그때 엄마가 던진 한마디.
"야야, 눈이 게으른 거란다."

 해가 지면 안도하고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겁났다던 분들. 
그런 세월을 살면서 알아차린 것이다.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겁먹기 쉽다는 것을, 
엄마는 말했다. 오직 지금 내딛는 한 걸음, 손에 집히는 잡초 하나부터 시작하면 어느새 넓은 콩밭은 말끔해진다고. 반드시 끝이 있다고,

부탁과 거절 사이의 심리적 균형을 찾는 것도 어른이 되니 과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상대가 꼭 들어줘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현재의 내 고민을 꺼내 놓을 때, 부탁은 부탁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을 나누는 소통이 된다. 이 과정에서 상대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설사 거절한다고 해 도 당신에 대한 신뢰는 여전하고 우리 관계에는 어떤 영향도 없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잘못되는 일은 없음을 부탁이 이뤄지지않아서 잃는 것이 있다면 애초에 내 몫이 될 게 아니었던 것이다. 거절당했다고 사하라위족처럼 "당신은 내 자존심을 건드렸 어요!" 하고 울부짖을 일도 아니다. 그저 인연이 닿지 않아 일이그렇게 됐을 뿐, 거절당하는 것과 자존감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다. 마음에서 어떤 연결 고리가 생긴다면, 그건 거절한 사람과 상관없이 부탁하는 이편의 심리적 콤플렉스와 자괴감이 작동했을 뿐이다.

지혜로운 마음이 바탕이 된 부탁과 거절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 간단한 이치를 깨우치는 데 많은 세월이 걸렸다. 그러고도 실전에 부딪치면 늘 조심스럽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래저래 쉬운 일이 아니다.

수십 명 승객의 발을 묶어 놓은 것이 겨우 나사 하나라니, 삶은 그처럼 잔인한 비유로 가득 차 있었다.

 감사의 마음을 놓친 나머지 사랑하는 힘이 죽어 가고 있다.
 는 고백을 하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사랑하는 힘이 다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사랑을 완성할 수 있기를,
 나는 또 바란다.

우리는 외로워서 중독되는 것일까, 아니면 중독된 끝에 외로워진 것일까.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낄 때 뇌가 반응하는 부위와 코카인을 흡입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같다고 했던가. 무엇인가에 쉽게 중독되는 사람들에겐 허기진 내면의 자아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해 겨울을 고요한 숲 속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도시에서 밥벌이를 하는 동안 오래 여행을 떠나지 못했고, 몸은 여기저기서 경고의 신호를 보냈고, 마음은 궤도를 벗어난 별처럼 바닥 모를 곳으로 아득히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때 떠오른 곳이 숲이었다. 숲과 흙길, 그리고 막힌 데 없이 탁 트인 넓은 하늘이 이 모든 것을 치유해 줄 것이란 막연한 신뢰가 있었다.

열정과 광기는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세상에 떠도는 치정사건이란 치사량에 이르는 애정으로 말미암은 파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때론 ‘치‘가 떨리도록 지긋지긋한 ‘정‘이 일으키는 소동이기도 하다. 

멜의 발언은 사랑이야말로 철저하게 현재에 속한 우연한 사 건임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결코 달콤하지 않은 사랑의 정의다.
칸나꽃처럼 뜨겁고 아린 청춘의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한 사람들이 사랑에 관해 품는 의문이란 대개 그렇다. 살면서 소설 속멜이 얘기했던 "그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라는 질문과함께 허망함에 짓눌려 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랑은 말이 잘 통해" 라는 말이 "너랑 말은 잘 통해"의 뜻인줄 어떻게 알았을까. "너와 소통이 잘되는 건 좋지만...." 이라는말 뒤에 다른 갈증이 숨어 있다는 걸 말이다. 말이 잘 통해 좋다.
던 사람은 그 말을 남기고 표표히 떠난다. "넌 내 말을 잘 들어줘. 너랑 있으면 참 편해"라는 말이 "우리 결혼할까?"의 다른 표 현인 줄 또 어떻게 안단 말인가. 얘길 잘 들어줘서 만만하게 여기나 보다 싶었는데, 실은 나와 평생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고백 이었을 줄이야. 사랑할 때 쓰는 언어는 사전에 실린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지나간 애정의 함량을 저울에 달아 계산서로 내밀 때, 순식간에 비참해지고 마는 건 스스로도 그게 억지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내게 와 줘서 고맙고, 함께 가슴 뛰는 미지의 영역을 가볼 수 있게 허락해 줘서 고맙고,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뿐인데, 입에선 다른 말이 흘러나오고 만다. 인연이 여기까지라면 꾸벅 인사하고 돌아 나오면 그만이다. 그런데 머리로는 잘 알고 있어도 실제로 이렇듯 산뜻하기가 어디 쉬운가. 그랬다면 세상에 그 많은 회한 어린 유행가나 원망하는 마음이 발붙일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 앞에서 지지리도 못나고 맷집 약한 나를 인정하고 받아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 쿨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한평생이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흘러간 것 같다"고 하셨다. 
"정말 잠깐이다" 하고 아버지는 새삼스레 시간의 속도에 현기증이 난 듯 나직하게 되뇌었다. 

그날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리는 순간, 
운명이란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의 결과물임을 이해했다. 
그리고 또 알아차렸다. 
내 의지로 그런 환경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억울해할 수 없다는 것을,
 설사 지고한 존재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그런 선택의 배경에는 내 영혼을 위한 배려가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아버지야말로 내게서 오래도록 거절당해 온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에 이르면, 
인생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진실이 더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겸손하게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심장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길을떠난다. 
그러나 진정 성숙한 여행자는 돌아와서 자기 발밑의 장미 한 송이를 더욱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보다 멋진 사람은 굳이 떠나지 않고도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여행자이다. 
혹여 장미가 아니라 패랭이꽃이나 작은 들풀인들 어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발밑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의 봄밤은 소쩍새가 있어 아름답고, 소쩍새 소리는 이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도록 밤마다 울어 주는 훌륭한 길 벗이어서 정겹다.

 인간에게 집이란 무엇이었던가. 인간이 집을 부드러운 기운으로 소유하고 가꿨던 시대에는 집 한 채 장만하는 일이 이처럼살벌한 전쟁이 되진 않았다. 집의 노예로 사는 시대란 얼마나 비극적인가. 젊은이는 이제 2, 3층에만 살아도 소원이 없겠다던 옛 시절의 꿈을 부러워한다. 그런데도 집이 없는 사람에게 적대적인 이 도시를 왜 떠나지 못할까. 놓쳐 버린 옛 사람과 마주치고 싶어서,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아무리 그럴싸한 이 유를 붙여도 생존의 두려움과 탐욕, 문화생활과 활기라는 이름으로 치장한 욕망의 그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젊은이의 원죄요, 정직한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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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인 것이니 좋아하는 대로 마시면 된다. 좋은 커피는 몸에도 좋다. 주로 화산 지대에서 재배되는 것이어서 열이 많다. 고혈압환자에게 좋은 커피는 혈압을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반대로 로부스 타종을 쓰는 인스턴트커피는 혈관을 막는다. 인스턴트는 당연히 좋은 재료를 쓰지 않는다. 과일 · 생선 통조림을 만들 때 좋은 재료를 쓰 겠나? 인스턴트커피의 문제는, 건강한 거냐 아니냐, 좋으냐 안 좋으 냐의 문제이지 맛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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